정치철학의 영원한 고전 필독서




















자연상태에 관하여

정치권력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그 기원으로부터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가를 고찰해야한다. 자연상태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타인의 허락을 
구하거나 타인의 의지(will) 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법의 
테두리안에서 스스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고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person)을 처분할 수 있는 상태이다.

자연상태는 또한 평등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모든 
권력과 사법권(jurisdiction)은 상호적이며, 어느 한 인간도 다른 인간들보다 더 많이 가지지 않는다. 이 점은 동일한 
종류와 등급의 피조물은 차별 없이자연의 동일한 혜택을 
받고 태어나 동일한 재능을 사용하기 때문에적어도 그 
피조물의 주인이자 지배자가 그의 의지를 명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어느 한 인간을 다른 한 인간보다 위에 놓고 
명백하고 명확한지명을 통해서 의심의 여지없는 지배권과 주권을 그에게 수여하지 않는 한 어떠한 복종이나 종속
없이 상호 평등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지극히 명백하다.

그러나 이 자연상태는 ‘자유의 상태(state of liberty)‘이지, ‘방종의 상태(state of licence)‘는 아니다. 그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인신과 소유물을처분할 수 있는 통제받지 
않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파괴할 수 없으며, 또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떠한 피조물도 그것을
단순히 살려놓는 것보다 죽이는 편이 더 훌륭한 용도에 
봉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살해할 수 없다. 

자연상태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법이있는데 그 법은 
모든 사람을 구속한다. 그리고 이성이야말로 그 법에
해당하는데, 이성은 조언을 구하는 모든 인류에게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독립된 존재이므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소유물에 위해를 가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유일하고 전지전능한 조물주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유일하며 최고인 주인의명령에 의해 모든 
인간은 그의 하인으로서 그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졌기 때문에, 인간은 그의 소유물이자 작품으로서 
타인의 뜻이아니라 그 주인의 뜻이 지속되는 동안만 살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비슷한 재능을 부여받았고 
모두 자연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공유하므로 인간들 
사이에서는 서로를 죽일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는 이른바
어떠한 복종관계도 상정될 수 없다. 열등한 피조물이 인간의 쓸모에 봉사하도록 만들어진 것과 달리, 인간은 상호간의 
쓸모에 봉사하기 위해서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보존해야 하며 고의로 자신의 위치를 
떠나서는 안 된다. 따라서 비슷한 이유로 그 자신의 보존이 
위태롭지 않을 때 인간은 가능한 최대한 타인을 보존해야 
하며, 공격자에 대한 정당한 반격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생명, 또는 생명을보존하는 데 필요한 것, 곧 그의 자유, 건강, 신체 또는 재물을 빼앗거나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인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가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 곧 모든 인류의 
평화와 보존을 지향하는자연법의 준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자연상태에서 자연법의 집행은 모든사람의 수중에 맡겨져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연법의 위반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 그 법의 위반자를 처벌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 관한 이 세계의 다른 모든 법과 마찬가지로 자연법 역시, 만약 자연상태에서 그 법을 집행할 권력을 
가지고 있고 이를 통해서 무고한 자를 보존하고 공격자를 
억제할 사람이 없다면, 공허한 것이 되고말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자연상태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가 
저지른 해악을 이유로 처벌할 수 있다면, 무릇 모든 사람이 그렇게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본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우월성이나 사법권(jurisdiction)을 
가지지 않는 완전한 평등의 상태에서는 어떤 사람이 
그 법의 집행을 위해서 능히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자연상태에서 한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해서
 [자연법위반을 처벌할 수 있는]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범법자를 붙잡았을 때 격정에 따라 또는 
그 자신의 의지대로 무제한적인 방종에따라 사용할 수 있는 절대적이거나 자의적인 권력이 아니다. 

그것은 차분한 이성과 양심이 명하는 바에 따라 범법자를 
그의 침해에 비례하여 응징할 있는 권력으로서 배상과 
[범죄의] 억제를 목적으로 하는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두 요소야말로 한 인간이 합법적으로 다른 
인간에게 해악을 가할 수 있는-우리는 그것을 처벌이라고 
부른다-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자연법을 위반함으로써 공격자는 자신이 이성 및 공통된 형평의 규칙-이 규칙은 신이 인간 상호간의 안전을
위해서 인간의 행위에 부과한 조치다-이 아닌 다른
규칙에 따라 살겠노라고 선언한 셈이다.

그리하여 그는 인류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며, 인간을 
피해와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유대는 그에 의해서 
무시되고 파기된다.

그것은 모든 종(species)에 대한 침해이며 자연법이 
보장하고자 하는평화와 안전에 대한 침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인류 일반을 보존하기위해서 그들이 가진 권리에 
의거해 그들에게 해를 가하는 자들을 제지시킬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파괴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법을 위반한 자들에게 해악을 
가함으로써 범법을 후회하게 만들고재발을 억제하거나, 
그에 대한 본보기적 행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비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경우에, 앞의 논거에 의거해서 모든 사람은 
위반자를 처벌할 수 있는권리를 가지며 자연법의 집행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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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제는 권리의 주체, 즉 권리를 갖게 되는 자연인과 
법인(사단법인과 재단법인)의 종류와 특징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다음 권리의 객체‘라는 제목하에 물 (유체물과 무체물, 동산과 부동산, 유형물과 무형물, 가분물과 불가분물, 소비물과 비소비물)을 나누어 설명한다.

이렇게 사법상 법률관계와 권리의무 등 대륙법이 자랑하는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서 설명한 다음, 가장 중요한 개념인 "법률행위"로 들어간다(이것 역시 제10장에서 본 전형적인 개념법학의 성과물로서, 개념법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들은 빠짐없이 이 개념을 중심에 둔다. 심지어 독일과 같은 국가에서는 법조문에 ‘법률행위 (Rechtsgeschäft)‘라는 개념이 적혀 있고, 그 외의 국가에서는 법 이론서에 설명이 
들어 있다. 거의 대부분의 대륙법 국가에서 법률행위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학자들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서 전파하고 있는 법 질서의 가장 중심에 있는 개념이고, 또 
하나는 권리 개념과 더불어법 질서에서 개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법률행위라는 개념은 ‘법률사실‘이라는 개념에서 나온다. 
앞에서본 법 이론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원래 법이란 
일정한 사실관계에 적용되도록 만들어졌다. 
법학자가 상상해낸 어떤 사실관계가존재하는 경우 그에 
맞는 법률이 적용되어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이때 
법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사실관계가 바로 법률사실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법률사실이고, 계약도 법률사실이다. 그런 사실이 있으면 법이 적용되어 법률효과가 발생한다. 
가령 사람은 태어남으로써 권리능력을 가지고, 계약이 있음으로써 국가가 그 계약의이행을 강제하게 된다. 

그런데 법률사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사람이 병에 걸려 죽는다든가, 지진이 난다든가 하는 것처럼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사람의 의지와 생각에 따라서 발생하는 사실이다. 
앞의 것을 ‘사람의 정신작용에 의거하지 않은 법률사실‘
이라고 하고,뒤의 것을 ‘사람의 정신작용에 의거한 법률사실‘
이라고 한다.

"법률행위에는 법률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 법률효과를 허용하는 적법행위와 법률이 허용할 수 없는 것으로 평가해 행위자에게 불이익한 사실을 발생하게 하는 위법행위가 있다. 그리고 적법행위는 다시 물건을 소유한다든가 배를 
만드는 것과 같이 외부세계의 변화를 일으키는 행위가 있고, 외부세계의 변화 없이 사람의 생각, 마음이나 의사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 그치는 행위가 있다. 이 가운데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을 관념의 통지(declarations of knowledge)라고 하고, 사람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을
법률행위(juridical acts)라고 한다. 이상의 논의 가운데 
가장 중요한것은 법률행위인 것과 법률행위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법률행위는 그 안에 표시된 의사대로 
법률효과가 발생하는 데 반해, 그 외의 행위는 설령 의사나 
생각이 표시된다고 해도 그것대로 효과가 발생하지 않고 
법이 정한대로의 효과만 발생한다. 가령 어떤사람이 서면을 통해서 혼인관계 외에서 생긴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확실하게 선언하는 경우, 설령 그럴 마음이 본인에게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에게 부양을 청구할 권리가 법적으로 발생하는것과 같다. 따라서 이건 법률행위가 아니라 관념의 통지가 된다. 의사대로 결과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대륙법은 아무 이야기가 없더라도 앞서 소개한 민법총칙 내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다. 법을 제정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 모두 학자들이 만든 민법총칙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이 기본이고 진리라는 점에 동의한다. 학교 수업에서
배운 법학이 현실 세계의 법을 지배하고 있고, 법률가와 
입법자, 행정가, 판사가 생각하고 일하는 방식 전부를 
지도하고 있는 셈이다.

통설에 따르면 판사는 ‘학자들의 설계에 따라 입법자가 
만든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대륙법계에서 판사를 "법을 말하는 일"이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재판할 때 판사는사실관계로부터 필요한 사실을 추출해서 그를 기초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거기 적용될 법을 찾아내서 적용한다. 학자와 입법자가 자기 일을 충실히 했다면 판사의 일은 전혀 복잡할 것이 없다. 정답은 하나밖에 없고, 다른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혹시라도 판사가 적용할 법을 찾지 못하거나 그 법을 주어진 사실관계에 적용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판사가 시키는 일을 잘할 줄 모르거나, 입법자가 사실관계에 적용될 정확한 법을 만들지 못했거나, 학자의 이론에 흠결이 있어서 판사나 입법자를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각자가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했다면 판사는 어려움 없이 법을 
찾아서 적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해결이 어려운 사건은 
그야말로 예외에 불과하고, 그런 사건이 있다고 해서 대륙법이 잘못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도 않는다.

대륙법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학자는 법이라는 구조물을 가장 완벽하게 쌓아 
올려서 늘 확실한 결과가 나오도록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법 자체가 완전하고, 분명하며, 흠결이 없어야 한다.

즉, 입법자의 역할이 가장중요하다. 판사는 법적 안정성을 
최고의 목표로 두고 법을 해석, 적용해야 한다. 
가혹한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법을 바꿀 일은 아니고,
모든 비법률적인 고려도 재판에서 제외된다. 다른 어떤 
목적보다 우선시되는 것이 법적 확실성 또는 안정성이다. 
비현실적이고 가혹하고, 부당한 결론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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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철학의 집대성
























































인류의 정신사에서 관념주의 철학의 완성자로 알려진 
헤겔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학문적 체계의 방대함에 
있어서는 물론, 후대에 대한 영향에 있어서도 헤겔을 
능가하는 학자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의 변증법적 사고는 
학문의 영역에서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의 영역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물론 칸트, 마르크스, 니체가 후대에 남긴 영향도 매우 크다. 특히 마르크스의 사상은 철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 
학문적 영역에서는 물론, 세계의 정치와 경제 영역에 
거대한 혁명을 일으킬 만큼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영향력도 헤겔의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마르크스의사상 자체가 헤겔 없이는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청년기에철저한 헤겔 연구자로서 
헤겔 철학의 깊이를 꿰뚫어 보았다. 그의 유물론적
(물질론적) 변증법은 사실상 헤겔의 정신의 변증법을 
뒤바꾸어 놓은 것에불과하다.

헤겔 철학은 그 전체에 있어 일종의 기독교 종교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헤겔의 종교철학은 그의 체계의 한 부분인
 동시에, 그의 체계 전체이기도하다. 곧 그의 철학 전체가 
일종의 종교철학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직접적 근거를 
철학의 연구 대상에 대한 헤겔의 진술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철학사 서문에 의하면, "본래 철학의 대상은 하나님일 뿐이다. 혹은 철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다. 
철학은 이 대상을 종교와 공동으로 가진다." 차이가 
있다면, 철학은 하나님을 사유하면서, 파악하면서 
관찰한다면, 종교는 표상하면서 관찰하는 데 있다" 
(1966a.91). 철학과 종교의 관찰 방법은 다르지만, 
그 대상이 동일하다면, 헤겔의 철학은 하나님을 중심 
대상으로 가진 종교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보다 더 깊은 근거를 찾는다면, 헤겔 철학 전체의 중심 개념인 정신의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따라서 헤겔 철학 전체의 중심 개념은 "정신으로서의 하나님"이다.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헤겔 자신도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정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정신이 헤겔 철학 전체의 중심 개념이라면, 그의 철학 
전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 출발점 내지 중심점으로 가진 종교철학일 수밖에 없다.

헤겔의 문헌을 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의 깊은 
영성이 그의 사상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볼 수 있다. 
헤겔은 경직된 교리신학과 성서의 문자주의적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깊이 사색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독특한 변증법적 사고의 방법을 발견했음을 볼 수 있다. 
사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성육신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발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정신의
개념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체계를 세운다.

물론 헤겔은 글자로 경직되어버린 기독교의 전통적 교리와
신앙고백, 제도화, 형식화된 교회, 믿음과 경건의 모습은
있지만 예수의 "마음"이 없는 신앙 양태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청년기의 헤겔은 이와 같은 기독교를 가리켜
"실증 종교"(positive religoin)라고 비판했다.

헤겔에 따르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취하고 육적·감성적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발견할수 없는 하나의 혁명이다. 그것은 영원하고 
무한한 하나님이 인간의 유한함과 연약함과 허무함과 
제한성, 곧 인간의 모든 부정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했음을 말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부정을말한다. 영원하고 무한한 무한자가 유한자로 
상처를 받을 수 없는 자가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신적인 본성과 인간적본성이 
하나가 되었다.

헤겔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나타내기 위한 감각적 표상일 
따름이다(사실 인간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표상이 나타내고자 
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신적 본성과 인간의 본성,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 통일을 확실히 알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육이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확실하게 알도록 하기 위해 
세상의 육속에서 나타나야만 했다."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야만했다"(히 2:17)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의 통일성은 "한 인간 안에서 나타나야 했다"(141).

그러나 "하나님이 육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자기 비움, 자기 낮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것과 결합하는 
그분의 깊은 사랑을 나타낸다.
헤겔은 거룩하고 고귀한 하나님이 인간의 천한 육이 
되었다는 것, 바로 여기에 기독교 종교의 "혁명적인 것이 
있다고 말한다(137).

앞서 언급한 대로, 헤겔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자기 동일성 안에 
머물러 있는 일자(Eins)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 그들 사이에 있는 깊은 사랑의 영곧성령이 하나를 
이루면서 구별되고, 구별되는 동시에 하나를 이루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정신으로서의 하나님" 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정신은삼위성(Dreiheit)이다" (214). 
"하나님은 정신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 부르는 그것이다"(1966457). 하나가 셋이요, 셋이 하나라는것은 수학 공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 
혹은 "비밀"이다(57). 이 비밀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게시된다.

물론 헤겔은 신적 삼위성에 대한 흔적을 고대 그리스 철학과 칸트 철학에서도 발견한다(19664, 59). 그러나 인격적 현실로서의 삼위일체는 성육신 한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거울이다. 그리스도 안에 삼위일체의 비밀이 계시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비밀을 알고자 한다면, 자연이나 자연의어떤 짐승을 볼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태를 입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보아야 한다(K. Barth의 생각이 이미 여기에 나타남).

앞서 언급한 대로, 헤겔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에서 자신의 철학의 원리인 변증법적 
사고를 발견한다. 아버지 하나님은자기 자신을 자기의 
아들로 대상화시킨다. 

그는 아들을 인간의 육을 입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보낸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아들은 아버지의 타재다. 아들과 
아버지는 깊은 사랑의 영 곧 성령 안에서 하나인 동시에 
둘로구별되고, 둘로 구별되면서 하나가 되는 변증법적 활동 속에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이 통찰이 헤겔의 세계사 철학의 원리를 
구성한다. 세계사는 "정신으로서의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기를 대상 세계로대상화하고, 대상 세계 속에서 신으로 돌아가는 변증법적 활동이다. 이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버지-아들-성령이라는 종교적 표상에 머물지 
않고, 세계사를 이끌어나가는 구체성을 갖게 된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은 "공허한 추상물"(ein leeresAbstraktum) 일 수 없다(1966e, 28 주해). 
추상적인 존재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될 수 없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은 세계사를 다스리는 
구체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참된 것은 추상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면, 그는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추상적인 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철학은 추상적인 것에 가장 철저히 대립한다. 그것은 추상적인 것에 대항하는 
싸움이다"(1966a,113).

헤겔은 하나님의 구체성을 하나님의 삼위일체에서 
발견한다. 삼위일체하나님은 추상적 일자, 절대자, 보편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기의타자로 대상화시키며, 이 대상 
안에서 자기를 보고, 대상의 부정적인 것을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구체적 활동성이다. 따라서 헤겔은삼위일체를 가리켜 "세계사가 그 주위를 맴도는 낚싯바늘"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 삼위일체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계시된다면, 성육신한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요, 헤겔 철학의 밑바닥에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헤겔의 철학은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사색과 영성에 기초한다. 따라서 헤겔은 자신의 철학 
체계 도처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언급한다. 

그는 성육신한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적 화해의 원리"를 발견한다. 헤겔은 하나님의 성육신에서 자신의 변증법적
사고에 대한 중요한 근거를 발견했다.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의 근거는 "성육신의 현실"에 있다.

헤겔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본성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죽음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외화하며, 유한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

그는 유한한 존재의 모든 부정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다. 곧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과 제한성과 천함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다.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 객체와 주체, 하나님과 세계의 
변증법적 통일성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성육신, 곧 인간의 형태 안에 있는 하나님은 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한한 것, 제한된 것 속에 머물 수 없다. 
그는 유한한것의 부정적인 것을 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헤겔은이 하나님의 활동을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인지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정적인 것, 곧 "자연적 유한성과 직접적 현존의 지양, 
외화의 지양, 차단기(Schranke)의 폐기"다(1966d 159).

한마디로 그것은 "이 부정적인 것의 부정적인 것"이요, 
이것이 곧 정신이다(163).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일어난부정의 극복, 곧 "부정의 부정은 신적 본성의 계기다"(166). 여기서 우리는헤겔이 정반합을 말하지 않고, 부정적인 것의 부정을 말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기 이전에 "한 사람의 
감성적 개체" (ein sinnliches Individuum)였다. 
그는 유한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통해 감성적 
개체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넘어간다. 죽음은 "영광, 영화롭게 됨으로 넘어감"이다(171). 

"인간적인 것이 벗어지고, 신적인 영광이 다시 나타난다 
죽음은 인간적인것, 부정적인 것을 벗어버림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죽음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다. 자연적 현존으로서 인간이 내맡겨져 있는 것의 가장 높은 정점이다"(1966d, 172).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죽었다.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사람을 
위한 이 화해가 계시되었다." 그러나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신적 역사다." 

세계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가 하나님 자신의 활동을통해 실현되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하나님 자신인 삶(Leben)이다" (174). "하나님은 자기 
자신 속에서의 이 활동이다" (166). 헤겔은 세계사를 
구성하는 하나님의 이 활동의 정점을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인지한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 그것은 주인을 
버리고 도주하다가 붙들린 노예들 정치적 반란자가 당하는 가장 잔인하고 "가장 천한 것"이었다(스파르타푸스의 
노예혁명 참조). 로마 군인들은 잡혀온 노예나 정치적 
반란자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엉덩이뼈가 드러나기까지 태형을 먼저 가했다.

헤겔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한성의 가장 높은 꼭대기"다. 그의 죽음은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범죄자의 죽음, 
가장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가장 천한 것, 
비참한 것이 "가장 높은 것이 되었다"(1966d, 161).

헤겔은 "가장 친하다고 여기는 것" 곧 "십자가의 죽음"이 
"가장 높은것"이 되었다는 것에서 "기존하는 것에 대한 
완전한 혁명의 표현을 발견한다. 세속의 권력자들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것"이 "가장 고귀한 것"이 되었다면, 
그들이 다스리는 세속의 질서, 곧 "인간의 공동생활의 
모든 끈이사실상 공격을 당하고, 동요되며, 해체되었다" 
(1966d, 161).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기초가 주어졌다. "세상의 모든 위대함과 모든 타당한 것이 이로써 정신의 무덤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여기에 혁명적 요소가 있다. 이 요소를 통해 전혀 다른 
형태가 세계에 주어졌다"(166). 예수의 십자가가 서 있었던 
"골고다" 곧 "해골 골짜기"는 "절대정신의해골 골짜기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왕관의 현실이고 진리이며 확실성이다." 이 왕관이 없다면, "절대정신은 생명이 없는 고독한 것일 
것이다. 오직이 정신의 왕국의 잔으로부터 그의 무한성이 
그에게 거품처럼 생성된다(schäumt)"(1952, 564. 
《정신현상학》 마지막 문장).

그리스도에 대한 헤겔의 사색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우리는 이것을 《종교철학 강의》 
제3부에서 볼 수 있다(1966d, 155-174). 
이문헌에 따르면, 죽음은 유한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최후의 한계요, "인간성의 가장 높은 증명" 이다(165). 
죽음은 "유한성의 가장 높은 정점"이요.
"가장 높은 부정"이다. "죽음의 고통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가장 높은유한성", "가장 극단적 유한성을 나타낸다(157). 인간은 죽음을 통해 유한한 존재로 확정된다. 
죽음은 "가장 높은 유한화다(die höchste Verendlichung,
158).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당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것이다. "하나님-인간 예수는 모든 인간이 당하는 "자연적 
죽음"을 당했다. 그의 죽음은 한인간의 죽음, 한 친구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자연적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부끄러움과 치욕의 죽음", "십자가의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당했다(165, 161). 
그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자기 존재의 포기, 
소유의 포기였다(161).

헤겔은 예수를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하나님 - 인간"이라 부른다. 
예수는 "하나님 - 인간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단지 한 
인간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깊은 사랑의 영 안에서 그와 
한몸을 이룬 아버지 하나님의 죽음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사망했다. 하나님이 죽었다(Gott ist gestorben, Gott ist tot) - 모든 영원한 것, 모든 참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부정 그 자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은 
가장 경악스러운 생각이다. 가장 깊은 고통, 구원의 완전한 상실(Rettungslosigkeit), 모든더 높은 것의 포기가 이와 
결합되어 있다" (1966d 167).

그러나 헤겔이 말하는 "하나님의 죽음"은 하나님이 
죽어서 없어져버렸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비밀이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자기 아들이 겪은 죽음의 
고통을 함께당한다.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경험된다. 아들의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경험하는 아버지는 성령을 통해 아들로부터 구별되며, 
구별되는 동시에 죽어가는 아들과 하나로 결합된다.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 자신의 죽음으로 경험된다. 
이런 뜻에서 예수의 죽음은 성부성자성령이 함께 당한 
삼위일체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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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법에서 법은 공법과 사법으로 나뉘고, 사법 안에는 
민법과 상법이 있다. 민법은 다시 사람에 관한 법(법인 포함)
, 가족법, 상속법, 물권법, 채권법으로 나뉜다. 이런 목차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법학제요도 같고, 19세기 민법전도 같다. 그외 다른 법, 즉 행정법이나 형법 등도 전부 이민법 체계로부터 발달해왔다는 믿음도 대륙법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대륙법에서는 민법 공부가 우선이다. 민법을 보면 개념에 
익숙해지고, 법의 기본 구조를 알며, 사법기관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민법 외의 다른 법학은 전부 민법에 엄청난 빚을 졌다. 민법을 통해서 익힌 법의 기본 개념과 기본 
구조를 받아 다른 법 연구에 쓰기 때문이다. 민법 학자는 
선구자다. 가장 열심히 법 이론을 발전시켜가는 사람들은 
늘 민법 학자다. 

현대사회로 오면서 소위 공법 영역이 눈부시게 넓어지며 
이런 신념이 약간 흔들릴 만한 상황이 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없다. 민법은 여전히 기본법이고, 
민법 공부가 우선이다. 대륙법계의 법학자들은 다 이렇게 
생각한다.

민법에도 당연히 주요 법전으로서의 민법이 있고, 그를 
보충하는 민사에 관한 특별법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바로 기본 개념과 이론이다. 이는 전부 
학자들의 작품이며, 제9장에서 본 것처럼 학자들의 권위는 이 연구에서 나온다. 학자는 결국 개념을 정리하고 이론을 
세우는 사람이다. 개념과 이론은 실정법인 민법에 적혀 
있지 않고, 실정법을 기초로 학자들이 과학적 방법으로 
추출해내서 체계화한 것이다. 자료를 통해서 추출해낸 
일종의 진리, 그것이 바로 개념이고 이론이다.

개념과 이론이 무엇인지 알려면 세 가지 문헌을 들추어보면 된다. 첫째, 1896년 독일민법과 그 체계를 이어받은 다른 
국가 민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위 ‘총칙‘ 규정이다. 
둘째는 법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재구성한 복잡한 민법 
이론서이고, 셋째가 법학을 처음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법학개론‘이다. 서로 다른 곳에산재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이 세 가지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민법총칙, 민법 이론서, 법학개론 이 3종 세트는 19세기 
이후독일법을 그대로 받아들였거나 독일법의 영향으로 
기존의 민법을개정한 국가에서 공히 확인할 수 있다.

독일법을 본뜨지 않은 국가들도자기 국가 법이 ‘과학적‘
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성이란 총칙, 민법 
이론서, 법학개론이 얼마나 잘 정리되어 있는지를 평가한 
결과다. 그 세 가지가 체계적으로 정리가 잘되어 있으면 
법은 과학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기왕이면 민법전 총칙보다 민법 이론서나 법학개론이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 학자들이 눈여겨 보는 것은 민법전이 아니라 이론서나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먼저 교과서는 기본 개념인 ‘법 질서 (legal order)‘에 
대해 "사람이사회생활을 하려면 사람들 사이에 충돌하는
 이해를 조절하고 다툼을 피하기 위하여 일정한 규준
(사회생활의 준칙). 즉 법이 필요하며, 구성원들은 법이 
각자에게 지시하는 바를 이행해야 한다"라고 설명한다. 
이걸 그대로 국가에 적용하면 국가는 ‘국가가 정한 법을 
시민들이 잘 지키는지 감시하기 위하여 법 제도와 기관을 
만들어 법을 집행하는 것‘이다.

이어서 교과서는 법의 특징을 "법은 개인에게 어떤 행위를 할지강제하는 명령규범"이라고 설명한다(실제로 모든 법이 다 명령규범은 아니다. 민법을 보면 어떤 상태에 있으면 
어떤 결과가 발생한다‘고만 적힌 법도 있다. 가령 ‘사람이 
유언 없이 죽으면 그 재산은 자손에게 상속된다‘는 규정은
 개인에게 특정한 행위를 하게 하는 명령규범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민법을 포함한 많은 법은 특정한 행위를 요구하거나금지하며, 그림으로써 "누군가에게 권리를 부여한다." 즉, 빚을 진자가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빚을 준 자는 원금을 받을 권리가 생긴다는 식이다. 
"법이 개인에게 특정 행위를 요구하는 순간, 이로인해 한 
개인에게는 다른 개인에게 행위를 요구할 권리가 발생한다. 단, 여기서 말하는 법에 자연법은 포함되지 않는다. 
대륙법은 오로지 실정법만 가지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법 규범은 단순한 권고가 아니다.
법을 어길 경우에는 "공권력이라는 필요악이 발동한다". 
이런 의미에서 법은 양심의 가책이나 사회적인 비난이 
뒤따르는 도덕이나 에티켓, 계명, 윤리와 다르다(법 규범 
가운데 국가공권력의 제재가 발동하지않는 규범도 아주 
많다. 유언 없는 상속의 경우 소유권이 누구한테 가는지, 
계약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민사나 형사사건, 소액사건의 관할법원은 어딘지를 정해주는 조항들 모두 제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민법총칙에 따르면 법 규범은 추상적이다. 
특정 행위자를 지정하지 않고 ‘일반적인 예‘만 보여준다. 
즉, 채무자가 빚을 갚지 않으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원래 ‘권리 (subjective right)‘라는 개념은 ‘사법상 
법률관계로부터개인이 누리는 법적 이익‘을 의미한다.
 "법 규범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반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개인이 각자 
이익을 추구하도록 두고, 그 이익을 법이 보장하는 데 있다. 따라서 법 질서는 개인의 이익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법률관계에서 그것을 실현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권리란 개인이 이익을 추구해 
만족을 얻을 수있게 하기 위해 법이 인정하는 힘이라고 
정의된다."

권리자는 권리를 남용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권리 행사로 
인해 타인에게 발생한 손해를 책임지지 않는다(이 명제는 
정확하지도 않고, 충분한 논의 없이 내린 잘못된 결론에 
가깝다. 앞서 사인 간의 법률관계가 제3자에게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명제에 대한 비판은 여기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무엇보다 이 진술은 동어반복 이상의 의미가 없다. 권리를 
남용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권리 행사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은 권리 행사로 인해 책임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고 바꿀 수 있는데,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공허한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 책임지고 
언제 책임지지 않느냐는 것인데 이 내용은 빠져 있다). 

‘권리 남용‘에 대해서 프랑스 같은 국가는 무엇이 권리 
남용인지 학자들이 정의한 내용을 법원이 적용한다. 
하지만 어떤 국가에서는 "그 판단을 판사의 재량과 
들쭉날쭉한 기준에 맡기고 있어 위험해 보인다"라고 한다. 명확성의 원칙에 따라 입법자가미리 제시해준 기준에 맞춰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권리를 나누는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방법"은 "절대권과 상대권으로 나누는 것"이다. "절대권은 특정한 상대방이 없고, 일반인을 의무자로 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이며, 상대권은 특정인을 의무자로 하여 그에게만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절대권은 ‘물건에 대한 권리‘인 물권이다. 물권은 권리자가 물건의 전부(소유권 또는 일부제한물권)를 직접 지배해서 이익을 얻는 배타적 권리를 말한다. 물건과 그 권리자의 관계는 직접적이며, 
권리의 향유를 위해서 타인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

다른 사람들은 그 권리자가 물건을 지배하는 데 방해하지만 않으면되는 것이다. 반면에 권리의무관계에서는 의무를 
지닌 자의 행위가제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특정인의 행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채권이라고 한다. 
즉, 물건에 대한 절대적 권리는 물권사람에 대한 상대적 
권리는 채권이라고 부른다. 채권은 어떤 사람의 행위만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사람의 인격, 성명, 초상 등을배타적으로 누릴 수 있는 인격권과는 내용이 다르다. 
한편 절대권이든 상대권이든 불문하고 권리의 반대편에는 의무(duty)가 있다. 어떤 물권을 다른 사람이 침해하면 안 
된다는 점에서 물권에 대한의무자는 물권자 외 전부이고, 
채권에 대한 의무자는 정해진 행위를 해야 하는 채무자에 
국한된다.

이렇게 정의한 다음 교과서는 법률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간다. "법률관계에서는 법익의 주체가 권리를 취득한다. 권리의 취득으로 인해 주체에게 권리가 발생하고, 권리자는 소유자가 된다. 

즉, 권리는 주체가 향유하는 재산 중 일부가 되는 것이다. 
권리의 취득은 다시 원시취득과 승계취득으로 나뉘는데, 
원시취득은 타인의 권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원시적으로 취득하는 것이며, 승계취득은타인의 권리를 바탕으로 하여 취득하는 것이다. 승계취득에서 권리자에게는 타인이 
가지고 있는 이미 존재하는 권리를 이어받음으로써 권리가 발생한다. 따라서 두 가지 점을 주의해야 한다. 

첫째, 승계취득에서 신(新)권리자는 구(舊)권리자가 가지고 있었던 권리 이상의 권리를 취득하지 못하고, 둘째, 구권리자의 권리에 제한이나 흠이 있으면 신권리자의 권리도 같은 
제한이나 흠이 생긴다는 점이다."(여기서 이 원칙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신권리자는 구권리자가 가지고 있던것
보다 큰 권리를 갖거나 더 작은 권리를 가지는 경우가 아주 많고, 신권리자의 권리가 전(前) 권리에 붙은 제한이나 흠 
외에 다른 사유에 의하여 제한받는 경우도많다는 점이다. 
민법총칙 교과서의 저자의 승계취득에 관한 설명이 정확하고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한 검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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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법의 전제로서의 자연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이 어떠한 의미를 갖느냐에 관하여는 여러 견해가 
갈려져 있다. 자연법의 전제로서의 자연은 실정법의 근원으로서 보편적이고 평화로운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연법의 전제로서의 자연은 물리적 존재로서의 
자연이 아니다. 물리적 존재로서의 자연의 조화로운 
운행질서가 자연법의 전제로서의 자연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물리적 존재로서의 자연은 구체적인 물리적 
존재인데 반하여, 자연법의 전제로서의 자연은 추상적인 
자연질서 내지 우주질서를 의미한다.

홉스에게 자연상태는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한 
투쟁상태이면서 무법상태이기 때문에 그 혼동상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사회계약에 의하여 인민은 
그들의 권리를 남김없이 전부 국가의 지배자에게 위임하고 그 지배자에게 절대복종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홉스는 절대권력자에게 지배권력을 위임한 인민은 
그 절대지배자의 지배상태에 저항하거나 그의 정치권력을
할 권리는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지향한 
절대왕정의 정당성을 인정하려고 하였으며, 당시의 
공화정을 지지한 세력에 대항하는 이론을 제공하였던 
것이었다. 홉스의 이와 같은 자연상태와 사회계약에 관한 
이론은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성악설에 입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록크에게 있어서의 자연상태는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상태이었으며, 인민은 재화에 대한 
사소유권을 갖고서 화평하게 살아가는 상태였다. 
이러한 자유와 평화와 사유재산이 보호되는 자연상태를 
사회상태에서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하여 인민은 
사회계약에 의하여 지도자에게 그러한 자연상태를 
유지하도록 그들의 권리를 위임하였으며 지도자가 
자연상태를 위반하는 권력행사를 하는 경우에는 
그 지도자를 제거할 수 있고, 그들의 정부를 전복할 수 
있다는 저항권행사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록크의 자연상태에 대한 이해와 인민의 폭군에 
대한 저항권 행사의 인정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입장에 
있었다고 파악되며, 이와 같은 록크의 사상은 영국에서는 
명예혁명 (Glorious Revolution: 1688-1689)과 
권리장전(Bill of Rights:1689)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으며, 미국의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1776) 
과 독립혁명(1775-1781), 그리고 프랑스대혁명(1789)과 프랑스 인권선언(1789)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생각건대 자연상태는 홉스가 말한 투쟁상태 내지 
혼돈상태는 아니며, 평화로운 자연상태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그렇게 이해함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인류의 최초의 상태는 평화로운 상태라고 이해된다. 
그것이 바로 자연상태였으며, 그 자연상태가 힘이 센 
강자에 의하여 사회상태 내지 지배상태로 발전되었다고 
이해된다.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전환에 의한 
사회상태의 정당성은 사회계약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이해되며, 그 사회계약의 내용은 사회상태이전의 이고 
평화로운 자연상태의 회복을 위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고 이해함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자연상태에 관한 록크의 이해와 설명이 자연상태에 관한 적절한 설명으로 
이해된다.

자연권은 자연상태를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의 상태로 
이해할 때에 비로소 인정될 수 있으며 혼돈상태로 파악할 
때에는 자연권을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록크는 자연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홉스는 
사회계약은 인정하였지만 자연권은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오로지 실정적인 권리만을 인정하였을 뿐이었다. 
록크는 자연권으로서 생명권, 자유권, 평등권 그리고 
사유재산권을특히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로크는 노예제도의 금지를 주장하였다.

록크는 자연상태에서 인민은 자연적인 의무를 부담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자연적인 의무는 법으로 되지도 
아니하고 공포되지 아니하였지만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알게 된다고 하였다. 자연상태에서 인민은 자기보존의 
의무가 있으며, 타인에 대한 저의 의무를 진다고 하였다. 
록크는 이러 한의무를 자연상태에서의 인민의 의무로 
이해하였다.

자연상태를 자유롭고 평화로운 상태로 이해한 록크는 
자연상태의 법을 자연법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 법을 
Naturrecht 라 하지 아니하고 Naturgesetz라고 하였다.

그리고 록크는 자연법에 의한 저항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홉스는 이를 인정하지 아니하였으며 인민은 절대왕정의 
통치에 따를 것만을 주장하였을뿐이다. 저항권은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국가권력이 남용되었을 때에 그것에 
대한 대응권력으로서 승인되고 그 행사가 정당화되었다.
저항권은 성서에서 그 근거를 두고서 법사상으로 인정되기 시작하였으며, 록크의 자연법에서는 확고한 인민의 권리로 인정되게 되었다.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제5장 제29절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느니라" (Man muß Gott mehrgehorchen als den Menschen)는 
성서에서부터 한 지배자의 권력에 의한 불의한 법을 
따르기보다는 정의로운 하나님의 법을 따르라는 것이며, 
하나님의법을 따른 결과로 순교를 당한 데서부터 저항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본다. 

미국독립혁명, 프랑스대혁명은 록크의 자연법에 의한 
저항권 행사의 극치였다. 이러한 자연법에서의 저항권은 
오늘날 인류의 보편가치를 담은 법치국가체제가 마련되어 있지 아니한 곳에서는 그것을 쟁취하게 위한 수단으로서, 
인류의 보편가치를 담은 법치국가체제가 이미 쟁취되어 
있는 곳에서는 그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 그리고 인류의 
보편가치를 담고 있는 법치국가체제가 파괴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하는 법원리로 발전하였다.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의 상호교착

법실증주의(Rechtspositivismus)는 입법자에 의하여 
제정된 법률은 그 내용의 정당성과는 관계없이 항상 
그 효력을 갖는다는 법사상이며, 법은 입법자의 의사에 
의한 결정이며, 법은 오로지 제정법만이 존재하며, 제정법
위에 초실정법적인 법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러므로 
법실증주의하에서는 입법자에의하여 제정만 되면 법이며, 악법도 법임을 인정한다.

이와 같은 법실증주의의 특징은, 첫째로 법과 도덕을 
구별하며, 둘째로 법이 부도덕,부정당하더라도 법에 
복종할 의무를 인정하며, 셋째로 법효력의 근거를 법의 
내용의 정당성 내지 타당성에서 보다는 실효성으로만 
보고자 하며, 넷째로 법의 징표를명령, 의지로 보며
실정성의 계기를 중요시한다. 이처럼 법실증주의에서는 
법기를의 내용의 정당성 내지 정의에 부합여부보다는 
권력자에 의하여 제정만 되면 그 법은 내용의 정당성에 
상관없이 그 효력을 갖게 되어 강제력을 갖는다고 본다.

자연법은 좋은 법을 찾고자 하는 법사상 내지 법정책인데 
반하여, 법실증주의는 그러한 좋은 법이나 바쁜 법이냐의 
판단보다는 법의 실효성과 법적안정성을 중시하는 
법사상이다. 자연법은 입법자에 의해서 법이 제정되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이 정의롭지 못하면 그 법의 효력을 
부인하고자 하는 법사상인데 반하여, 법실증주의는 법의 내용보다는 법의 실정성을 중시하고 강조하는 법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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