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원리에 대한 벤담의 정당화

윤리적 물음에 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만으로는충분하지 않다. 그 의견을 정당화하는 무엇을 
제시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있는 무엇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 정당화의 형식은 윤리학자체의 본질에 관한 견해에 
의존한다. 

즉, ‘도덕 판단은 참 또는 거짓일 수 있는가, 아니면 단순히 
우리의 태도를 표현하는것인가‘에 대한 견해에 의존한다. 
윤리의 제1원리를 증명하는것은 어렵기로 유명하다. 
우리는 데카르트처럼 다른 모든 윤리적 판단의 토대로서 
사용할 수 있는 자명한 제1원리를 찾아야 하는가? 
이것은 ‘토대주의 (foundationalism)‘ 라고 불리는 
방법이다. 아니면 우리는 존 롤스의 예를 따라서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의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 반성적 평형은 윤리적 원리가 우리의 도덕 판단과 얼마나 
잘 조화되느냐에 따라 윤리적 원리를 정당화함과 동시에 
판단과 신빙성 있는 원리의 정합성에 비추어서 판단 자체를 재고찰하는 방법이다.

벤담은 자신의 제1원리를 입증하는 간접적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도덕과 입법의 원리에 관한 서론》
에서 ‘공리의원리에 대한 직접적 증명이 가능한가?‘ 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을 증명하는 데 사용되는 것 그 
자체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증명의 사슬은 어딘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벤담은 우리가 자신과 타인들을 판단할 때 자연적으로 공리에 호소하는경향을 가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혼란과 비일관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공리의 원리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성향을 가지도록 만든다.벤담은 그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일련의 물음에 대해서 스스로 답해 보라고 요구한다. 이 물음들은 선택을 요구하는 물음이며, 각각의 선택은 또 다른 물음으로 이어진다. 
이 물음의 계열은 공리의 원리에 대한 대안들이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가도록
의도된 것이다. 

《공리주의》를 시작하면서 밀은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방법론의 종류에 관해서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직관주의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도덕원리를 수용해야 하는지를 자명한 
진리처럼 즉각적으로 알수 있는 ‘자연적 능력, 감각 또는 
본능‘이 있다고 믿는다. 이에 반대해서 밀 자신이 속하는 
귀납학파는 관찰과 실험에 의해 옳고 그름에 대해서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두 학파 사이에서의 선택은 공리주의를 정당화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밀도 벤담과 마찬가지로 궁극적 목적은 증명 불가능하다고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궁극적 목적을 지지하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리주의는행복이 우리가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왜 우리가 행복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우리는 이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밀에 의하면, 목적에 관한 물음은 바람직한(desirable) 
것에 관한 물음이다. 행복이 바람직하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제시할수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 밀의 대답은
 이렇다. ‘어떤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의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출발이 아니다. 마약 중독자는 마약을 바란다.
그러나 이것이 마약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람직한‘은 보통 ‘바랄 수 있는(able to be desired)‘보다는 ‘바랄 만한 가치가 있는(worthy of being desired)‘을 
의미한다.

19세기의 위대한 공리주의자 세 사람 가운데 세 번째 
인물인헨리 시지웍은 밀이 사용한 귀납적 방법은 오류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경험은 기껏해야 우리에게 모든 
사람이 항상 쾌락을 궁극적 목적으로 추구한다고 말해 줄 
뿐이다. 경험은우리에게 쾌락을 궁극적 목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말해 줄수 없다.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무어는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 )-대략적으로 말해서 사실로부터 가치를
도출하는 오류-에 반대하는 그의 매우 영향력 있는 
논증에서 ‘바라는 것‘으로부터 ‘선(좋은)‘을 도출한 밀을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밀은 『공리주의』의 뒷부분에서 정의에 관해 논의하면서, 
‘모든 사람은 하나로 계산되어야 하고 누구도 하나 이상으로 계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벤담의 말을 인용한다. 그 다음에 그는, 공리의 원리는 ‘어떤 사람의 행복이 어떤 종류에 
있어서 허용된 정도의 면에서 평등하다고 상정할 때, 
그 사람의 행복이다른 사람의 행복과 정확하게 똑같이 
계산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합리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하다‘고 덧붙인다. 

밀의 이러한 언급은 그가 자신의 책의 독자들이
공평성(impartiality)의 관념을 도덕의 본질로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가정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밀에게 있어서 [이기주의는 진정한 도덕 
이론이 아니다.] 이기주의는 공리주의와 도덕 이론의 
지위를 두고 다툴 경쟁자가 아니다. 

만약 이 해석이 옳다면, ‘A의 행복은 A에게 하나의 선이고, 
B의행복은 B에게 하나이 선이다. 등등‘과 ‘이 모든 것의 
합은 모두에게 하나의 선이다.‘ 사이에 간격이 없다고 
밀이 생각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공리주의에 대한 밀의 정당화가 그렇게 널리 
논의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철학적 논증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오류들을 발견하도록 가르치는 데 유용하다. 그 외견상의 오류가 진정한 오류인지는 밀의 
저작을연구하는 전문 학자들에게 맡겨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밀을 아무리 너그럽게 독해한다고 할지라도, 밀의 글쓰기는 정확하지 않고 그 의미가 불명료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위대한 19세기 공리주의자인 시지웍은 그의 
전임자인벤 담과 밀의 저작을 읽을 수 있는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와 다른 비판자들이 벤담과 밀의 저작에서 발견한 문제들의 상당 부분을 피할 수 있었다.

시지웍의 증명

시지웍은 그의 주저인《윤리학의 방법》을 시작하면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목적은 공리주의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명하고 객관적으로 참인 도덕 판
단 또는 공리(axiom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책의말미에서, 시지원이 공리주의가 매우 
합당한 이론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리주의의 경쟁 이론인 
이기주의를 제거하지는 못했다.

밀과는 달리, 시지윅은 궁극적인 윤리적 원리들은 이성의 
진리들(truths of reason)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자명하다는(self-evident)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자명하다는 것은 이 진리들이 다른 어떤 전제들로부터 추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가 
그것들이 분명하다고(obvious)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철학적 직관주의자(philosophical intuitionist)‘이다. 직관주의자들은 전형적으로 상식 도덕(commons-ense morality)은 자명한 도덕적 직관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시지윅은 그의 책의 많은 부분을 지혜, 자제, 
박애 (benevolence), 정의, 선한 신앙심, 진실성, 타산, 순수와 같은 덕들에 상응하는 도덕 규칙들을 면밀히 검토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직관주의자들과 달리, 그는 상식 도덕의 외견상의 자명성은 우리가 그것의 규칙을 특수한 경우에 적용하려고 할 때 사라진다고 결론짓는다.

예를 들어 상식 도덕은 우리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어떤 것이 문자 그대로 참이지만 듣는 사람을 오도할 것임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경우에도 그것을 말해야 
하는가?

방금 문신을 하고 온 친구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에게 물었을 때 나는 진실을 말해야만 하는가? 당신이 
믿지않는 말을 하도록 요구받는 종교 행사에 참여함으로써 가족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른 것인가? 어린아이에게 누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오는지에 관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허용가능한가? 또는 아이들에게 방금 진단받은 질병의 치료 가능성에 관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허용 가능한가?

상식 도덕은우리가 절대로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상식 도덕의 규칙들이 예외를 
포함하도록 그 규칙들을 개선하려고 하는 순간, 그 규칙들의 명료함(clarity)과 외견상의 자명성은 사라지고 만다.
 ‘ㆍ할 때를 제외하고 진실을 말하라‘는 그 예외가 
그 자체로 명료하고 자명한 것이 아닌한 자명한 도덕적 
진리일 수 없다.

이것은 시지원이 실시한 상식 도덕에 대한 폭넓은 분석에서가져온 단지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상식 도덕에 대한 
분석의 요점은, 제한 조건과 예외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상식 도덕의규칙들은 자명하지 않고, 오히려 더 심층적인 
설명을 필요로한다는 것이다. 그 심층적인 설명은 그 
규칙들이 우리의 행위를 더 큰 선으로 안내하는 수단이라는 
[공리주의적] 설명이다.

물론 그 규칙들은 완전한 지침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많은 종류의 왜곡에, 예컨대 자기이익, 미신, 무지에서 비롯되는 왜곡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선을 산출하는 것을 행하라는 공리주의적 원리는 
다른 어떤 도덕 이론도 가지지 못한 설명력을 지니고 있다.

공리주의가 우리의 상식 도덕을 설명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을 체계화할 수 있다는 시지워의 생각은 우리가 이 장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 있는 롤스의 반성적 평형 이론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롤스의 모델에서 참인 도덕 이론은 우리의 공통의도덕 판단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다. 

시지웍은 윤리학에서 진리가 우리의 공통의 도덕 판단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대신에 그는 상식 
도덕의 규칙보다 더 고차적이고 더 추상적인 수준에서 
진정으로 자명한 도덕원리를 찾는다. 그는 자명한 명제가 
충족시켜야 하는 네 가지 조건을 제안한다.

명제의 용어는 분명하고 정확해야만 한다.

명제의 자명성은 신중한 반성에 의해서 확인되어야만 한다.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명제들은 상호 일관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똑같이 유능한 다른 판단자들이 내가 주장하는 어떤 명제가 진리임을 부인하는 정도만큼 그 명제가 진리라고 믿는
나의 믿음도 감소되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판단자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없다면, 
나는 적어도 잠정적으로 ‘중립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보편적 또는 일반적 합의].

시지웍은 이 요건들을 충족시키는 세 가지 원리를 발견했다.

• 정의는 우리에게 같은 경우를 똑같이 대우하라고 요구한다.
또는 시지윅의 표현대로 .…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다면, 그는 암묵적으로 동일한 상황에 있는 모든 동일한 사람들이 그 행동을하는 
것도 옳다고 판단해야 한다.‘

• 타산은 우리가 ‘자신의 의식적 삶의 모든 부분들에 대해서공평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모든 순간을 평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미래를 
할인할수도 있다. 그러나 미래 그 자체는 현재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 박애는 타산과 마찬가지로 부분의 선이 아니라 전체의 
선을고려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문제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선이 아니라 보편적 선이다. 그러므로 시지윅은 
말하기를 박애의 원리는 우리에게 ‘공평하게 보았을 때 
다른 사람의 선이 자신의 선보다 더 적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아닌 한, 또는다른 사람의 선이 그에 의해 확실히 
알거나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아닌 한, 
다른 개인의 선을 자신의 선과 똑같이‘ 대우하라고 요구한다.

시지웍에게 있어서 이 박애의 원리는 공리주의를 위한 
토대이다. 그는 이 박애의 원리를 바탕으로 쾌락주의적 
공리주의로나아간다. 그러나 아직까지 시지윅은 쾌락 
또는 행복만이 본래적으로 선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논증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정당화는 그것의 토대가 굳건할 때에만 
강력한정당화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 토대가 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시지웍의 조건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방금 언급한 세 가지 원리와는 비일관적이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다른 공리들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시지원 자신도 이기주의 역시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주장위에 기초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즉, ‘어떤 한 사람과 다른 사람 간의 
차이는 실재적이고 근본적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개인들의 삶의 질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의미에서 하나의 개인으로서 나의 삶의 질에
관심을 가진다.‘

시지웍은 이 주장이 자신의 박애의 원리와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 그래서 실천이성이 두 가지 다른 방향을 
가리키도록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지윅은 그가 ‘실천이성의 이원론(dualism of practical 
reason)‘이라고 부르는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도덕에 합리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는 
자신의 시도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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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는 얼마나 추울까,
환영이 사라지고 질려버린 현실주의자가
현실을 처음 보는 순간 치명적인 ‘아니오‘는
공허할 뿐 아니라 비극으로 끝나리하지만 
비극은 이미 시작했으리,
다시, 상상이 새로이 시작될 때,
‘예‘라고 말해야 해서,
모든 ‘아니오‘ 아래결코 무너지지 않은 ‘예‘의 열정이 있어서,
현실주의자가 ‘예‘라고 말할 때.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악의 미학Esthétique du Mal>

성격이 없으면, 방법이라도 써야 한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전락La Chute》

도덕철학의 목적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의 운명에 결박되어 있다. 그리고 진지한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는 도덕철학이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희망도, 설사 철학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리라고 합당하게 희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도덕철학이 출발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선할 수 있는가?"나 심지어 "우리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보다 나은 질문이다. 이런 질문들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당연한 듯 전제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 전제된 것이 무엇인지 의견을 같이하지 
않을 것인데도 말이다. 마지막 질문[행복에 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고 해보자. 첫 번째 질문[의무의 질문]에서 출발하고 싶어 하는 일부 사람들은, 마지막 질문이 잘못된 장소에서 출발하며 그래서 도덕의 독특한 쟁점을무시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먼저 답을 얻을 가능성을 오히려 낙관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그 쟁점을 비롯해 많은 쟁점들에 
관하여 중립적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아무것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제일 처음 해야 하는 일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그리고 만일그 질문을 유익하게 
던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전제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How should one live" - 주체 one의 일반성이이미 주장을 고정시킨다. 
그리스의 언어는 우리에게 주체를 언급하지도 않는다. 
그 질문은 특정 개인을 언급하지 않고 모든 개인에게
적용되도록 표현되었다. 그런 표현은 누구에게나 관련 
있거나 유용한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음을 합의한다. 
그리고 이것은 무언가 일반적인 것, 즉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을 던지게 하는 개개인의 관심을 
수용하거나 형성하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음을 함의한다. 
(더 큰 혐의를 이 일반성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더 큰 함의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자아ego 의 관심을 넘어서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나중에 다시 살펴볼 것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일상적인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을 넘어서는 한 측면이다. 

또 하나의 함의는 그 질문이 즉각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 질문은 내가 지금 또는 바로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식manner of life에 
관한 질문이다. 그 질문이 결과적으로 전체 삶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으며 좋은 삶의 방식은 인생의 마지막에 좋은 삶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삶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이념에, 
그리스인 본인들이 큰 인상을 받았다. 가장 좋은 모습의 
삶으로 보이던 것을 망가뜨리는 운의 힘에 깊은 인상을 
받은 까닭에, 그들 중 일부는 운의 힘을 줄이고 운으로부터 가급적 가장 자유로운 삶을 사는 합리적 기획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런 기획을 추구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이 기획은 상이한 형태이긴 하지만 이후의 사고에서도 
하나의 목표로 생각되었다. 이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전체 삶a whole life 에 관해 생각해야만 한다는 이념은, 우리 
중 일부에게는 소크라테스에게 강력했던것만큼 강력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여전히 전체로서 asa whole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며 압박한다. 설사 우리가 삶이 어떻게 끝날지에 관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이 부여했던 만큼의 무게를 두지 않는다 할지라도, 삶의 모든 측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반성을 요구하는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사람은 해야 한다 one should "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의 이 구는 [영어 번역과는 달리] 원래 비인칭 형식이므로 
논의되고 있는 삶이 누구의 삶인가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질문에 적용되어야 하는 고려사항의 
종류에 관하여도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언질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 논의를 매우 
풍부하고 유익하게 만든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나는 도덕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내가 언급했던 의무에 관한 질문이나선한 사람의 삶에 
대한 질문들과는 다른 출발점이 된다. 

그 질문은 좋은 삶the good life, 살 가치가 있는 삶a life 
worth living에 관한 질문과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관념 자체는 아무런 독특한 도덕적 주장을 들여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믿었고 우리 대부분이 
여전히 그렇게 희망하고 있는 것처럼, 좋은 삶이 선한 
사람의 삶이기도 하다고 판명될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좋은 삶이 선한 사람의삶임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좋은 삶이 선한 사람의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대부분의 희망하는 바이다.) 

그러나 만일 좋은 삶이 선한 사람의 삶이기도 하다면, 
그 결론은 나중에야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해야한다는 
단적인 해야 한다일 뿐이며, 이 매우 일반적인 질문에서의 
‘해야 한다‘는 그 자체로는 여느 일상적이고 무심한 질문인 
"지금 무엇을 해야 되지?"에서의 ‘해야 한다‘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몇몇 철학자들은 우리가 이 일반적이거나 불확정적인 
종류의 실천적 질문에서 시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what should Ido?", "내가 사는 가장 좋은 방식은 무엇인가?" 등등과같은 질문들은 
애매하며 도덕적인 뜻과 도덕과 무관한 뜻을 함께 지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의미의 분석은 의미의 범주로서 "도덕적인"과 "도덕과 
무관한"을 요건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를 들어 화자가, 그가 군대 돌격대 임무를 수행하기에좋은 사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임을 의미했는지를 물을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군사상의 뜻을(또는 미식축구상의 뜻 등등을) 산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뜻의 "좋은" 또는
 "좋은 사람을 산출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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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는 도덕적 사유의 경계를 탐색하도록 우리를 밀어붙인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종종 우리의 관심 
밖에 놓여 있는 존재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도록 만든다. 
이런 사유방식이 간혹 논쟁을 유발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이 책이 여러분에게 공리주의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제공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 이 책은 
공리주의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것이 본래적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무엇인지, 공리주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론과 그것들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무엇이며, 규칙이 공리주의에서 하는 역할은무엇인지, 
그리고 공리주의가 오늘날의 실천적 쟁점들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등에 관해서 논의할 것이다.

공리주의의 핵심 사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이 세상을 
최선의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힘이 닿는 한에서 모든 개인들이 가능한 최고 수준의 
행복한 삶 (복지, well-being)‘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것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전통 도덕과 반대된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규칙 준수를 강조하는 도덕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 
준수의 결과가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지 더 나쁘게 
만드는지와 무관하게 규칙들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위를 할 때마다 어떤 대안이 최선의 결과를 낳는지를 
계산하는 것보다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의 핵심통찰은 너무나 
단순하고 매력적이다. 그래서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서 
많은 사상가들이 독립적으로 공리주의를 발전시켜왔다.

공리주의의 발전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벤담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적 견해를 처음으로 널리 알리게 만든 
저작은 1785년에 출판된 페일리 (William Paley)의 
《도덕과 정치철학(Moral and Political Philosophy)》
이었다.목사였던 페일리는 신은 우리가 모두의 행복을 
증진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신의 의지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세속적인 공리주의 저작 
가운데서는 1793년에 출판된 고드윈(WilliamGodwin)의 
『정치적 정의에 관한 탐구 (Enquiry Concerning Po-litical Justice)』가 수년 동안 벤담의 저작보다 더 많이 
알려져있었다.

벤담이 공리주의의 원리에 대한 정식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해는 1776년이다. 
그때부터 그는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헌신했다. (벤담이 
나중에 깨달았던 바와 같이 그 정식은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인구의 49%를 전적으로 불행하게 
만들고 단지 인구의 51%만을 약간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해도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을 옳은 것으로 여긴다는 
잘못된 생각을 대중들이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벤담은 ‘공리주의자‘라는 용어를 꿈속에서 
생각해 냈다고 한다. 그 꿈속에서그는 ‘한 종파의 창시자로서 매우 신성하고 중요한 존재였는데, 그 종파를 공리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780년에 벤담은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 관한 서론(Introduction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을 완성했다. 이 책은 그가 공리주의 이론을 가장 명료하게 제시한 책이다. 

벤담은 그의 법률 체계 개혁안과 형벌 개혁안으로 국제적인명성을 얻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실천적 제안 가운데 
하나는 ‘원형 감옥 (Panopticon)‘이다. 원형 감옥은 
죄수나 근로자가 자신들이 관찰당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모르도록 하면서도 그들을 항상 관찰할 수 있는 감옥 또는 
공장을 설계한 것이다. 오늘날 원형 감옥은 프라이버시를 
체계적으로 침해할 위험성 때문에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벤담은 원형 감옥의한 가지 장점으로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이 간수나 감독관의학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벤담이 1770년대부터 1820 년대까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서성적 자유를 옹호하는 수필과 소논문들을 썼다는 
것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그 당시는 새뮤얼 존슨 박사와 같이 대중들의칭송을 받는 
사상가들이 ‘비정상적인 성교의 ‘악‘을 방지하기위하여 
‘엄격한 법률의 지속적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벤담은 성의 쾌락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똑같이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성적 쾌락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맹목적 편견‘에서 비롯된 제약들을 폐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성적 취향에서의 차이는 그것이 해악을 야기한다는 것이 
입증되는 경우에만 처벌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 
처벌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성적 취향의 차이가 해악을 
낳는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다양한 저술에서 벤담은 동성애를 범죄시하는 전통적 
논증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논박하였다. 
그는 이런 저술들을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그의 사후에라도출판이 가능해지는 시대가 
오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성에 관한 서구인의 관념이 
벤담의 사상을 따라잡는 데는 한 세기 반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개혁에 대해서 공리주의가 
제공한 추동력은 여성 평등을 위한 밀의 노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벤담과 마찬가지로 밀 역시 ‘기존 
관습과 일반적 감정‘에 기초한 제도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여성의 예속의 서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들이 여성을종속적 지위에 묶어 두기 위한 유일한 
기초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해리엇 테일러는 밀의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밀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그녀는 
‘여성의 참정권‘이라는 제목을지닌 논문의 주저자였다. 
이 논문은 처음에는 1850년에 웨스트민스터 리뷰(Westminster Review)에 밀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다가, 나중에 
밀과 해리엇 테일러의 공동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해리엇 테일러는 『여성의 예속』이 출판되기 15년 전에 
사망했지만, 밀은 그 책 안에 표현된 사상의 많은 것들이
그녀와 그녀의 딸인 헬렌 테일러의 공로라고 말했다.

시지웍은 케임브리지 대학에 여성이 입학하는 길을 놓았다.
그는 최초로 ‘여성을 위한 강좌‘를 개설하고 그 강좌에 
출석하는 여성들이 기거할 집을 임대해 주었다. 
이런 노력은 여성용 기숙사인 뉴넘 홀(Newnham Hall)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또한 시지웍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시지원은 38세 되던해에 엘리너 밸푸어 (Eleanor Balfour)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지녀서 수학을 연구하기 위해 뉴넘 홀에온 학생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레일리경(Lord Rayleigh)과 공저자로 전기에 관한 세 편의 논문을 썼다. 
엘리너의 남자 형제인 아서 밸푸어 (Arthur Balfour)는 
시지웍의 학생이었다. 그는 나중에 보수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수상을 역임하였다. 엘리너는 시지웍과 함께 심령 
현상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었으며, 그들은 여성 교육의 
신장을 위해서함께 노력하였다. 엘리너는 1892년에 뉴넘 
홀이 변화된 뉴칼리지의 학장이 되었다. 시지원과 엘리너의 결혼은 주로 정신적인 결합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전적으로 정신적인 결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시지윅이 낭만적 감정을 느꼈던 대상이 남성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증거들도 있다.

19세기에 공리주의는 벤담의 독단적인 옹호론에서 시작해서시지웍의 신중하고 세련된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공리주의는 초기의 개혁의 열정을 일부 잃어버렸지만, 정치학과경제학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확보하였으며, 윤리학에 대한 하나의 합리적은 접근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시지웍의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생이었던 무어(G. E. Moore,
1873-1958)는 옳은 행동은 최선의 결과를 낳는 행동이라는 스승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쾌락 또는 행복만이 본래적 선이라는 견해는 거부하였다. 그는 여기에 우정과 
미의 감상을 독립적 가치로 추가하였다. 이런 종류의
공리주의는당시에는 ‘이상 공리주의(ideal utilitarianism)‘로 알려졌으나, 오늘날에는 간단히 일종의 결과주의로 
불린다. 그러나 무어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공리주의에 
대한 그의 공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저「윤리학 원리(Principia Ethica)』에서 오늘날 ‘메타 윤리학‘으로 
알려진 일단의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여 도덕철학의 방향을 재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기서 그는 ‘선(좋은 good)‘과 같은 도덕적 용어의 
정의에 관련되는 메타 윤리학의 독립 분과를 발전시켰다.
 20세기의 많은 기간동안에 도덕철학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 것으로 기대했던 영역은 공리주의와 그 경쟁 이론 간의 
선택과 같은 규범적 쟁점이아니라 메타 윤리학이었다.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철학의 초점이 규범 
윤리학과 응용 윤리학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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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철학 전체로서의 역사철학

 "헤겔을 통해 처음으로 제기되었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뜨겁게 다루어지는 문제는 "철학과 세계의 역사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의 문제다" (Löwith 1962, 7). 

20세기의 권위 있는 헤겔 연구자 뢰비트의 이 말은,
헤겔 철학은 그 전체에 있어 역사를 중심 문제로 가진 
역사철학임을 시사한다.

많은 학자들이 말하듯이, 헤겔은 "역사철학자"였다(예를 
들어 G. Lasson1920, Hegel als Geschichtsphilosoph).물론 헤겔의 역사철학 강의는 그의 생애 후기인 베를린 
시대에 속한다. 헤겔은 이 강의를 1822-1823년 겨울학기에시작했고, 그 이후 2년마다 한 번씩 그것을 강의했다. 
그는 사망한 1831년(1830-1831년 겨울학기)까지 5번의 역사철학을 강의했다. 따라서 헤겔의 역사철학은 그의 
철학 체계 전체의 정점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 없는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Ohne Welt ist Gott nicht Gott)라고 말할 만큼, 헤겔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의 현실과 역사였다(19666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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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처럼 특이한 교의, 곧 자연상태에서 모든 사람이 
자연법을 집행할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교의에 대해서 
반론이 제기될 것이라는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이 관련된 사건에 관해서 재판관이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든가, 자기애는 자기 자신은 물론 자신의 친구들에게도 편파적이 되도록 만들 것이라는 반론이 그것이다. 

추가적으로 악한 본성, 정념, 복수심으로 사람들이 타인을 
과도하게 처벌할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될 것이다. 그 결과 
오직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되고 그렇기 때문에 신은 인간의 편파성과 폭력을 억제하기 위해서 정부를수립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시민정부가 자연상태가 지닌 폐단에 대한 적절한 
치료책이라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 인간이 스스로의 
사건에서재판관이 될 수 있는 곳에서 그러한 폐단은 막대할 것임이 분명하다.

자신의 동포(brothers)에게 손해를 입힐 정도로 부정의한 사람이 그 행위에 관해서 자신을 비난할 만큼 정의로울 리가 거의 없다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절대군주 역시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의 사건에서 재판관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오는그러한 해악에 대한 치유책이 정부이고 따라서 자연상태가 지속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한 사람이 
다수를 좌지우지하고 그 자신이 관련된사건에서 재판관이 될 수 있고, 그의 기분이 내키는 대로 무슨 일이나 그의 
신민들에게 할 수 있으며, 그렇게 집행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이를 의문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마저 가지지 못한곳에는 대체 어떠한 종류의 정부가 
존재하고, 과연 그것이 자연상태보다얼마나 더 나은 상태인지 묻고 싶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리고 이성,과오,정념 등 무엇에 의해서 이끌리는 복종해야 하는가? 차라리 사람들이 타인의 부당한 의지에 복종하지 않아도 무방한 자연상태에 있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게다가 자연상태에서는 재판을 하는 
자기 자신이나타인이 관련된 사건에서 잘못 재판하면, 
그는 그것에 대해서 다른 모든 인류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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