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범죄란 어떤 사람이 법을 어기고 이성의 올바른 
규칙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발생하는데, 이로 인해서 
그 사람은 그만큼 타락한것이며 자신이 인간 본성의 
원칙을 포기하고 해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선언하는 
셈이 된다. 그러한 범죄 이외에도 통상 어떤 사람에게 
손상을가하게 되는 일이 있으며 그 사람은 그러한 위반행위에 의해서 손해를입게 된다. 그 경우에 손해를 입은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이 공통으로가지는 처벌권 이외에도 손해를 가한 사람에게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있는 특별한 권리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피해자 이외의] 타인은 그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피해자 편에 가담하여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받은 해악에 대해 충분히 만족할
만큼의 배상을 받도록 협조할 수 있다.

이처럼 상이한 두 개의 권리 중에서 하나는 범죄를 억제하고 유사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 처벌하는 것인데, 
그 처벌권은 모든 사람에게있다. 다른 하나는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권리인데, 이는 오직 피해를입은 당사자에게만 속한다. 이처럼 두 개의 권리가 상이하기 때문에 그직무상 
공통된 처벌권을 가지게 된 위정자는 종종 공공선이 법의 
집행을요구하지 않는 경우에 범죄의 처벌을 그 자신의 권한으로 면제할 수 있지만, 사적인 피해자가 받게 된 손해로서 그에게 지불되어야 하는 손해배상은 면제할 수 없다. 
곧 손해를 입은 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으며, 오직 그 사람만이 이를 면제할 수 있다.

동일한 이유로,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자연법의 좀 더 경미한 위반행위도 처벌할 수 있다. 그 경우에 아마 ‘사형도 무방한가?‘라고 물을 법하다. 

그러한 물음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각 범죄는 
그 범죄가 가해자에게 불리한 교환이 되기에 충분할 
정도의 엄격성을 가지고 처벌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으로써 그는 후회를 하고 다른 사람은 유사한행동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자연상태에서 저질러질 수 있는 모든 범죄는 가급적 
국가에서 처벌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자연상태에서도 
처벌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서 자연법의 구체적인 내용 
또는 그 처벌의 기준을 논하는 것은 현재의 목적을 
넘어서기에 다루지 않겠다. 그렇지만 자연법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자연법 역시 합리적인 피조물이나 그 법의 연구자에게는 국가의 실정법만큼이나 이해하기 쉽고
명백하다는 점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더 명백할 수도 있다.
상반된 그리고 숨겨진 이해관계를 법 구절에 삽입하는 
인간의 황당한재주나 복잡한 기교보다 이성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사실여러 나라의 대부분의 
국내법들이 그러한데, 그 법들은 자연법에 기초한
한도에서만 올바르며, 마땅히 자연법에 따라 규제되고 
해석되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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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아들 예수의 죽음 속에서 최고의 유한성에 
참여하며, 이 유한성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다.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예수의 죽음 속에서 하나로 
결합된다.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동일성 하나님이 
인간적인 것, 유한한 것 안에서 자기 자신 가운데 있고, 
이 유한한 것이 죽음 자체 속에서 하나님의 규정이 된다
(166). 

루터교회의 찬송가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이 죽었다." 
이것은 인간적인 것, 유한한 것, 천한 것, 약한 것, 부정적인 것이 신적인 계기(Moment) 자체"로서 "하나님 바깥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1966d,172).

하나님 자신이 죽음의 한계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죽어가는 유한한 것과 자기를 일치시키는 바로 여기에 깊은 사랑이 
있다. 이런 점에서 "가장 높은 유한성은 시간적인 것 속에 
있는 현실의 삶이 아니라 죽음, 죽음의 고통이다. 
그것은 최고의 부정・・・ 그의 가장 높은 극단 속에 있는 유한성이다.... 하나님이 죽었다. 하나님 자신이 죽었다‘는 
신적 관념의 가장 높은외화는 둘로 나누어짐(Entzweiung)의 가장 깊은 심연을 보여주는 두렵고 무서운 표상이다" 
(157-158). 그의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신적 본성"이 
가장 깊이 계시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 죽음은 가장 깊은 사랑이기도 하다.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이 동일성이 바로 사랑이다. 
의식의 이 유한화(Verendlichung)가 그의 극단에 
이르기까지, 곧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다.

여기서..… 가장 높은 사랑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사랑은 
자기의 인격성, 소유등의 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절대적 사랑 자체의직관이다." 성서는 이 사랑을 가리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희생되었다고 표현하며, 
희생제물로서 그의 죽음은 절대적 보상(Genugtuung)의 
행위로 표상된다"(166).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표상을 
반대한다. 각자는 자기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 
뿐이며, 어떤 다른 사람이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세속의 형식적·법적 관점이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영안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죽음은 "최고의 
유한화로서 자연적 유한성, 직접적 현존의 지양이고, 
외화의 지양이며, 제한(Schranke)의 해체이고, 자기를
자기 안에서 파악하는 정신의 계기다" (157-158). 

"죽음은 사랑 자체다. 절대적 사랑이 여기에 나타난다"(166).죽음은 하나님의 자기 외화의 가장 깊은심연이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높은 사랑‘이다. 그것은 죽음의 고통을 당하기까지 자기를 유한한 존재로 외화하며 자기를 유한한것과 결합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깊은 직관(바라봄, Anschauung)"이다(1966d, 158).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죽음을 통해, 인간이 당해야 할 치욕과 고통과 죽음이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에게 속한 영광과 생명이 인간의 것이 된다.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의 교환이 일어난다. 모든 인간의한계 상황인 죽음, 세계사의 "해골 골짜기"가 하나님 자신의 것이 된다.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죽음은 화해하는 것(das Versöhnende)이다. 죽음은 사랑 자체다.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세계와 화해했고, 자기를 영원히 자기 자신과 화해했다"(1966d,166).

헤겔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본성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죽음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외화하며, 유한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

그는 유한한 존재의 모든 부정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다. 곧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과 제한성과 천함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다.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 객체와 주체, 하나님과 세계의 
변증법적 통일성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성육신, 곧 "인간의 형태 안에 있는 하나님"은 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한한 것, 제한된 것 속에 머물 수 없다. 
그는 유한한 것의 부정적인 것을 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헤겔은이 하나님의 활동을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인지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정적인 것, 곧 "자연적 유한성과 직접적 현존의 지양, 
외화의 지양, 차단기(Schranke)의 폐기"다(19664 159).

한마디로 그것은 "이 부정적인 것의 부정적인 것"이요, 
이것이 곧 정신이다(163).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일어난부정의 극복, 곧 "부정의 부정은 신적 본성의 계기다"(166). 여기서 우리는 헤겔이 정-반-합을 말하지 않고, 부정적인 
것의 부정을 말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기 이전에 "한 사람의 
감성적 개체" (ein sinnliches Individuum)였다. 
그는 유한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통해 감성적 
개체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넘어간다. 죽음은 "영광, 영화롭게 됨으로 넘어감"이다(171). 

"인간적인 것이 벗어지고, 신적인 영광이 다시 나타난다 
죽음은 인간적인것, 부정적인 것을 벗어버럼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죽음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다. 자연적 현존으로서 인간이 내맡겨져 있는 것의 가장 높은 점점이다"(1966d 172).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죽었다.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사람을 위한 이 화해가 계시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신적 역사다." 

세계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가 하나님 자신의 활동을통해 실현되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하나님 자신인 삶(Leben)이다" (174). "하나님은 자기 
자신 속에서의 이 활동이다" (166). 헤겔은 세계사를 
구성하는 하나님의 이 활동의 정점을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인지한다.

우리는 앞에서 고찰한 헤겔의 통찰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깊은 영성을 볼 수 있다. 필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헤겔의 사색보다 더 깊은 사색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철학자들은 필자의 생각을 너무 
주관적인 신학적 해석이라고 비판할지 모른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필자의 주관적 해석이 아니라 약간의 
연결 부분을 제외하고, 헤겔 자신의 문장을 결합시킨 것이다.물론 헤겔이 튀빙겐슈티프트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철학에 심취했음은 사실이다.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외에 고대 그리스 철학 칸트와 스피노자의 철학, 루소의 사회사상을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여전히 신학이 헤겔의 주 전공 과목이었다. 원했든지 원하지 않있든지 간에, 그는 신학과 성서를 공부했다. 그의 문헌 곳곳에서 적절하게인용된 성서 구절, 신학적 내용들에 대한 언급은 성서와 신학에 대한 그의깊은 지식을 보여준다. 그는 튀빙겐슈티프트에서 경직된 신학 이론과 형식화된 교리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늙은이 "der Alte) 혹은 "두더지"라는 별멍을 얻을 정도로 기독교의 핵심 진리에 대해 깊이 사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신현상학》 서론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그의 깊은 사색을 보여준다. 
"죽음은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다. 죽은것을 붙들고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힘을 요구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황폐시킴으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보존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견디고 그속에서 자기를 지키는 삶이 정신의 삶이다. 정신은 절대적 갈가리 찢어짐 속에서 오직 자기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자기의 진리를 획득한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에서 눈을 돌려버리지 않고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며, 그가운데 머물러 있음으로써 자기의 힘을 나타낸다. 이 머물러 있음은 그것을 존재로 전환시킬 수 있는 마술적 힘(Zauberkraft)이다" (1952,29-30).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깊은 사색과 명성이 헤겔의 철학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철학은 하나님의 성육신, 참 인간(vere homo)인 동시에 참 하나님 (vere Deus), 곧 "하나님-인간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 속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등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기초한 기독교 종교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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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의 영원한 고전 필독서




















자연상태에 관하여

정치권력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그 기원으로부터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가를 고찰해야한다. 자연상태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타인의 허락을 
구하거나 타인의 의지(will) 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법의 
테두리안에서 스스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고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person)을 처분할 수 있는 상태이다.

자연상태는 또한 평등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모든 
권력과 사법권(jurisdiction)은 상호적이며, 어느 한 인간도 다른 인간들보다 더 많이 가지지 않는다. 이 점은 동일한 
종류와 등급의 피조물은 차별 없이자연의 동일한 혜택을 
받고 태어나 동일한 재능을 사용하기 때문에적어도 그 
피조물의 주인이자 지배자가 그의 의지를 명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어느 한 인간을 다른 한 인간보다 위에 놓고 
명백하고 명확한지명을 통해서 의심의 여지없는 지배권과 주권을 그에게 수여하지 않는 한 어떠한 복종이나 종속
없이 상호 평등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지극히 명백하다.

그러나 이 자연상태는 ‘자유의 상태(state of liberty)‘이지, ‘방종의 상태(state of licence)‘는 아니다. 그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인신과 소유물을처분할 수 있는 통제받지 
않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파괴할 수 없으며, 또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떠한 피조물도 그것을
단순히 살려놓는 것보다 죽이는 편이 더 훌륭한 용도에 
봉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살해할 수 없다. 

자연상태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법이있는데 그 법은 
모든 사람을 구속한다. 그리고 이성이야말로 그 법에
해당하는데, 이성은 조언을 구하는 모든 인류에게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독립된 존재이므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소유물에 위해를 가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유일하고 전지전능한 조물주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유일하며 최고인 주인의명령에 의해 모든 
인간은 그의 하인으로서 그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졌기 때문에, 인간은 그의 소유물이자 작품으로서 
타인의 뜻이아니라 그 주인의 뜻이 지속되는 동안만 살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비슷한 재능을 부여받았고 
모두 자연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공유하므로 인간들 
사이에서는 서로를 죽일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는 이른바
어떠한 복종관계도 상정될 수 없다. 열등한 피조물이 인간의 쓸모에 봉사하도록 만들어진 것과 달리, 인간은 상호간의 
쓸모에 봉사하기 위해서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보존해야 하며 고의로 자신의 위치를 
떠나서는 안 된다. 따라서 비슷한 이유로 그 자신의 보존이 
위태롭지 않을 때 인간은 가능한 최대한 타인을 보존해야 
하며, 공격자에 대한 정당한 반격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생명, 또는 생명을보존하는 데 필요한 것, 곧 그의 자유, 건강, 신체 또는 재물을 빼앗거나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인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가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 곧 모든 인류의 
평화와 보존을 지향하는자연법의 준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자연상태에서 자연법의 집행은 모든사람의 수중에 맡겨져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연법의 위반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 그 법의 위반자를 처벌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 관한 이 세계의 다른 모든 법과 마찬가지로 자연법 역시, 만약 자연상태에서 그 법을 집행할 권력을 
가지고 있고 이를 통해서 무고한 자를 보존하고 공격자를 
억제할 사람이 없다면, 공허한 것이 되고말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자연상태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가 
저지른 해악을 이유로 처벌할 수 있다면, 무릇 모든 사람이 그렇게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본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우월성이나 사법권(jurisdiction)을 
가지지 않는 완전한 평등의 상태에서는 어떤 사람이 
그 법의 집행을 위해서 능히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자연상태에서 한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해서
 [자연법위반을 처벌할 수 있는]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범법자를 붙잡았을 때 격정에 따라 또는 
그 자신의 의지대로 무제한적인 방종에따라 사용할 수 있는 절대적이거나 자의적인 권력이 아니다. 

그것은 차분한 이성과 양심이 명하는 바에 따라 범법자를 
그의 침해에 비례하여 응징할 있는 권력으로서 배상과 
[범죄의] 억제를 목적으로 하는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두 요소야말로 한 인간이 합법적으로 다른 
인간에게 해악을 가할 수 있는-우리는 그것을 처벌이라고 
부른다-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자연법을 위반함으로써 공격자는 자신이 이성 및 공통된 형평의 규칙-이 규칙은 신이 인간 상호간의 안전을
위해서 인간의 행위에 부과한 조치다-이 아닌 다른
규칙에 따라 살겠노라고 선언한 셈이다.

그리하여 그는 인류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며, 인간을 
피해와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유대는 그에 의해서 
무시되고 파기된다.

그것은 모든 종(species)에 대한 침해이며 자연법이 
보장하고자 하는평화와 안전에 대한 침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인류 일반을 보존하기위해서 그들이 가진 권리에 
의거해 그들에게 해를 가하는 자들을 제지시킬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파괴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법을 위반한 자들에게 해악을 
가함으로써 범법을 후회하게 만들고재발을 억제하거나, 
그에 대한 본보기적 행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비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경우에, 앞의 논거에 의거해서 모든 사람은 
위반자를 처벌할 수 있는권리를 가지며 자연법의 집행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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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제는 권리의 주체, 즉 권리를 갖게 되는 자연인과 
법인(사단법인과 재단법인)의 종류와 특징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다음 권리의 객체‘라는 제목하에 물 (유체물과 무체물, 동산과 부동산, 유형물과 무형물, 가분물과 불가분물, 소비물과 비소비물)을 나누어 설명한다.

이렇게 사법상 법률관계와 권리의무 등 대륙법이 자랑하는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서 설명한 다음, 가장 중요한 개념인 "법률행위"로 들어간다(이것 역시 제10장에서 본 전형적인 개념법학의 성과물로서, 개념법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들은 빠짐없이 이 개념을 중심에 둔다. 심지어 독일과 같은 국가에서는 법조문에 ‘법률행위 (Rechtsgeschäft)‘라는 개념이 적혀 있고, 그 외의 국가에서는 법 이론서에 설명이 
들어 있다. 거의 대부분의 대륙법 국가에서 법률행위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학자들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서 전파하고 있는 법 질서의 가장 중심에 있는 개념이고, 또 
하나는 권리 개념과 더불어법 질서에서 개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법률행위라는 개념은 ‘법률사실‘이라는 개념에서 나온다. 
앞에서본 법 이론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원래 법이란 
일정한 사실관계에 적용되도록 만들어졌다. 
법학자가 상상해낸 어떤 사실관계가존재하는 경우 그에 
맞는 법률이 적용되어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이때 
법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사실관계가 바로 법률사실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법률사실이고, 계약도 법률사실이다. 그런 사실이 있으면 법이 적용되어 법률효과가 발생한다. 
가령 사람은 태어남으로써 권리능력을 가지고, 계약이 있음으로써 국가가 그 계약의이행을 강제하게 된다. 

그런데 법률사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사람이 병에 걸려 죽는다든가, 지진이 난다든가 하는 것처럼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사람의 의지와 생각에 따라서 발생하는 사실이다. 
앞의 것을 ‘사람의 정신작용에 의거하지 않은 법률사실‘
이라고 하고,뒤의 것을 ‘사람의 정신작용에 의거한 법률사실‘
이라고 한다.

"법률행위에는 법률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 법률효과를 허용하는 적법행위와 법률이 허용할 수 없는 것으로 평가해 행위자에게 불이익한 사실을 발생하게 하는 위법행위가 있다. 그리고 적법행위는 다시 물건을 소유한다든가 배를 
만드는 것과 같이 외부세계의 변화를 일으키는 행위가 있고, 외부세계의 변화 없이 사람의 생각, 마음이나 의사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 그치는 행위가 있다. 이 가운데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을 관념의 통지(declarations of knowledge)라고 하고, 사람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을
법률행위(juridical acts)라고 한다. 이상의 논의 가운데 
가장 중요한것은 법률행위인 것과 법률행위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법률행위는 그 안에 표시된 의사대로 
법률효과가 발생하는 데 반해, 그 외의 행위는 설령 의사나 
생각이 표시된다고 해도 그것대로 효과가 발생하지 않고 
법이 정한대로의 효과만 발생한다. 가령 어떤사람이 서면을 통해서 혼인관계 외에서 생긴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확실하게 선언하는 경우, 설령 그럴 마음이 본인에게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에게 부양을 청구할 권리가 법적으로 발생하는것과 같다. 따라서 이건 법률행위가 아니라 관념의 통지가 된다. 의사대로 결과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대륙법은 아무 이야기가 없더라도 앞서 소개한 민법총칙 내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다. 법을 제정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 모두 학자들이 만든 민법총칙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이 기본이고 진리라는 점에 동의한다. 학교 수업에서
배운 법학이 현실 세계의 법을 지배하고 있고, 법률가와 
입법자, 행정가, 판사가 생각하고 일하는 방식 전부를 
지도하고 있는 셈이다.

통설에 따르면 판사는 ‘학자들의 설계에 따라 입법자가 
만든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대륙법계에서 판사를 "법을 말하는 일"이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재판할 때 판사는사실관계로부터 필요한 사실을 추출해서 그를 기초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거기 적용될 법을 찾아내서 적용한다. 학자와 입법자가 자기 일을 충실히 했다면 판사의 일은 전혀 복잡할 것이 없다. 정답은 하나밖에 없고, 다른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혹시라도 판사가 적용할 법을 찾지 못하거나 그 법을 주어진 사실관계에 적용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판사가 시키는 일을 잘할 줄 모르거나, 입법자가 사실관계에 적용될 정확한 법을 만들지 못했거나, 학자의 이론에 흠결이 있어서 판사나 입법자를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각자가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했다면 판사는 어려움 없이 법을 
찾아서 적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해결이 어려운 사건은 
그야말로 예외에 불과하고, 그런 사건이 있다고 해서 대륙법이 잘못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도 않는다.

대륙법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학자는 법이라는 구조물을 가장 완벽하게 쌓아 
올려서 늘 확실한 결과가 나오도록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법 자체가 완전하고, 분명하며, 흠결이 없어야 한다.

즉, 입법자의 역할이 가장중요하다. 판사는 법적 안정성을 
최고의 목표로 두고 법을 해석, 적용해야 한다. 
가혹한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법을 바꿀 일은 아니고,
모든 비법률적인 고려도 재판에서 제외된다. 다른 어떤 
목적보다 우선시되는 것이 법적 확실성 또는 안정성이다. 
비현실적이고 가혹하고, 부당한 결론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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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철학의 집대성
























































인류의 정신사에서 관념주의 철학의 완성자로 알려진 
헤겔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학문적 체계의 방대함에 
있어서는 물론, 후대에 대한 영향에 있어서도 헤겔을 
능가하는 학자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의 변증법적 사고는 
학문의 영역에서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의 영역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물론 칸트, 마르크스, 니체가 후대에 남긴 영향도 매우 크다. 특히 마르크스의 사상은 철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 
학문적 영역에서는 물론, 세계의 정치와 경제 영역에 
거대한 혁명을 일으킬 만큼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영향력도 헤겔의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마르크스의사상 자체가 헤겔 없이는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청년기에철저한 헤겔 연구자로서 
헤겔 철학의 깊이를 꿰뚫어 보았다. 그의 유물론적
(물질론적) 변증법은 사실상 헤겔의 정신의 변증법을 
뒤바꾸어 놓은 것에불과하다.

헤겔 철학은 그 전체에 있어 일종의 기독교 종교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헤겔의 종교철학은 그의 체계의 한 부분인
 동시에, 그의 체계 전체이기도하다. 곧 그의 철학 전체가 
일종의 종교철학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직접적 근거를 
철학의 연구 대상에 대한 헤겔의 진술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철학사 서문에 의하면, "본래 철학의 대상은 하나님일 뿐이다. 혹은 철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다. 
철학은 이 대상을 종교와 공동으로 가진다." 차이가 
있다면, 철학은 하나님을 사유하면서, 파악하면서 
관찰한다면, 종교는 표상하면서 관찰하는 데 있다" 
(1966a.91). 철학과 종교의 관찰 방법은 다르지만, 
그 대상이 동일하다면, 헤겔의 철학은 하나님을 중심 
대상으로 가진 종교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보다 더 깊은 근거를 찾는다면, 헤겔 철학 전체의 중심 개념인 정신의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따라서 헤겔 철학 전체의 중심 개념은 "정신으로서의 하나님"이다.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헤겔 자신도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정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정신이 헤겔 철학 전체의 중심 개념이라면, 그의 철학 
전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 출발점 내지 중심점으로 가진 종교철학일 수밖에 없다.

헤겔의 문헌을 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의 깊은 
영성이 그의 사상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볼 수 있다. 
헤겔은 경직된 교리신학과 성서의 문자주의적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깊이 사색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독특한 변증법적 사고의 방법을 발견했음을 볼 수 있다. 
사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성육신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발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정신의
개념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체계를 세운다.

물론 헤겔은 글자로 경직되어버린 기독교의 전통적 교리와
신앙고백, 제도화, 형식화된 교회, 믿음과 경건의 모습은
있지만 예수의 "마음"이 없는 신앙 양태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청년기의 헤겔은 이와 같은 기독교를 가리켜
"실증 종교"(positive religoin)라고 비판했다.

헤겔에 따르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취하고 육적·감성적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발견할수 없는 하나의 혁명이다. 그것은 영원하고 
무한한 하나님이 인간의 유한함과 연약함과 허무함과 
제한성, 곧 인간의 모든 부정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했음을 말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부정을말한다. 영원하고 무한한 무한자가 유한자로 
상처를 받을 수 없는 자가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신적인 본성과 인간적본성이 
하나가 되었다.

헤겔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나타내기 위한 감각적 표상일 
따름이다(사실 인간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표상이 나타내고자 
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신적 본성과 인간의 본성,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 통일을 확실히 알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육이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확실하게 알도록 하기 위해 
세상의 육속에서 나타나야만 했다."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야만했다"(히 2:17)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의 통일성은 "한 인간 안에서 나타나야 했다"(141).

그러나 "하나님이 육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자기 비움, 자기 낮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것과 결합하는 
그분의 깊은 사랑을 나타낸다.
헤겔은 거룩하고 고귀한 하나님이 인간의 천한 육이 
되었다는 것, 바로 여기에 기독교 종교의 "혁명적인 것이 
있다고 말한다(137).

앞서 언급한 대로, 헤겔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자기 동일성 안에 
머물러 있는 일자(Eins)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 그들 사이에 있는 깊은 사랑의 영곧성령이 하나를 
이루면서 구별되고, 구별되는 동시에 하나를 이루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정신으로서의 하나님" 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정신은삼위성(Dreiheit)이다" (214). 
"하나님은 정신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 부르는 그것이다"(1966457). 하나가 셋이요, 셋이 하나라는것은 수학 공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 
혹은 "비밀"이다(57). 이 비밀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게시된다.

물론 헤겔은 신적 삼위성에 대한 흔적을 고대 그리스 철학과 칸트 철학에서도 발견한다(19664, 59). 그러나 인격적 현실로서의 삼위일체는 성육신 한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거울이다. 그리스도 안에 삼위일체의 비밀이 계시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비밀을 알고자 한다면, 자연이나 자연의어떤 짐승을 볼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태를 입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보아야 한다(K. Barth의 생각이 이미 여기에 나타남).

앞서 언급한 대로, 헤겔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에서 자신의 철학의 원리인 변증법적 
사고를 발견한다. 아버지 하나님은자기 자신을 자기의 
아들로 대상화시킨다. 

그는 아들을 인간의 육을 입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보낸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아들은 아버지의 타재다. 아들과 
아버지는 깊은 사랑의 영 곧 성령 안에서 하나인 동시에 
둘로구별되고, 둘로 구별되면서 하나가 되는 변증법적 활동 속에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이 통찰이 헤겔의 세계사 철학의 원리를 
구성한다. 세계사는 "정신으로서의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기를 대상 세계로대상화하고, 대상 세계 속에서 신으로 돌아가는 변증법적 활동이다. 이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버지-아들-성령이라는 종교적 표상에 머물지 
않고, 세계사를 이끌어나가는 구체성을 갖게 된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은 "공허한 추상물"(ein leeresAbstraktum) 일 수 없다(1966e, 28 주해). 
추상적인 존재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될 수 없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은 세계사를 다스리는 
구체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참된 것은 추상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면, 그는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추상적인 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철학은 추상적인 것에 가장 철저히 대립한다. 그것은 추상적인 것에 대항하는 
싸움이다"(1966a,113).

헤겔은 하나님의 구체성을 하나님의 삼위일체에서 
발견한다. 삼위일체하나님은 추상적 일자, 절대자, 보편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기의타자로 대상화시키며, 이 대상 
안에서 자기를 보고, 대상의 부정적인 것을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구체적 활동성이다. 따라서 헤겔은삼위일체를 가리켜 "세계사가 그 주위를 맴도는 낚싯바늘"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 삼위일체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계시된다면, 성육신한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요, 헤겔 철학의 밑바닥에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헤겔의 철학은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사색과 영성에 기초한다. 따라서 헤겔은 자신의 철학 
체계 도처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언급한다. 

그는 성육신한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적 화해의 원리"를 발견한다. 헤겔은 하나님의 성육신에서 자신의 변증법적
사고에 대한 중요한 근거를 발견했다.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의 근거는 "성육신의 현실"에 있다.

헤겔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본성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죽음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외화하며, 유한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

그는 유한한 존재의 모든 부정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다. 곧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과 제한성과 천함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다.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 객체와 주체, 하나님과 세계의 
변증법적 통일성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성육신, 곧 인간의 형태 안에 있는 하나님은 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한한 것, 제한된 것 속에 머물 수 없다. 
그는 유한한것의 부정적인 것을 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헤겔은이 하나님의 활동을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인지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정적인 것, 곧 "자연적 유한성과 직접적 현존의 지양, 
외화의 지양, 차단기(Schranke)의 폐기"다(1966d 159).

한마디로 그것은 "이 부정적인 것의 부정적인 것"이요, 
이것이 곧 정신이다(163).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일어난부정의 극복, 곧 "부정의 부정은 신적 본성의 계기다"(166). 여기서 우리는헤겔이 정반합을 말하지 않고, 부정적인 것의 부정을 말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기 이전에 "한 사람의 
감성적 개체" (ein sinnliches Individuum)였다. 
그는 유한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통해 감성적 
개체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넘어간다. 죽음은 "영광, 영화롭게 됨으로 넘어감"이다(171). 

"인간적인 것이 벗어지고, 신적인 영광이 다시 나타난다 
죽음은 인간적인것, 부정적인 것을 벗어버림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죽음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다. 자연적 현존으로서 인간이 내맡겨져 있는 것의 가장 높은 정점이다"(1966d, 172).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죽었다.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사람을 
위한 이 화해가 계시되었다." 그러나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신적 역사다." 

세계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가 하나님 자신의 활동을통해 실현되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하나님 자신인 삶(Leben)이다" (174). "하나님은 자기 
자신 속에서의 이 활동이다" (166). 헤겔은 세계사를 
구성하는 하나님의 이 활동의 정점을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인지한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 그것은 주인을 
버리고 도주하다가 붙들린 노예들 정치적 반란자가 당하는 가장 잔인하고 "가장 천한 것"이었다(스파르타푸스의 
노예혁명 참조). 로마 군인들은 잡혀온 노예나 정치적 
반란자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엉덩이뼈가 드러나기까지 태형을 먼저 가했다.

헤겔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한성의 가장 높은 꼭대기"다. 그의 죽음은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범죄자의 죽음, 
가장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가장 천한 것, 
비참한 것이 "가장 높은 것이 되었다"(1966d, 161).

헤겔은 "가장 친하다고 여기는 것" 곧 "십자가의 죽음"이 
"가장 높은것"이 되었다는 것에서 "기존하는 것에 대한 
완전한 혁명의 표현을 발견한다. 세속의 권력자들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것"이 "가장 고귀한 것"이 되었다면, 
그들이 다스리는 세속의 질서, 곧 "인간의 공동생활의 
모든 끈이사실상 공격을 당하고, 동요되며, 해체되었다" 
(1966d, 161).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기초가 주어졌다. "세상의 모든 위대함과 모든 타당한 것이 이로써 정신의 무덤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여기에 혁명적 요소가 있다. 이 요소를 통해 전혀 다른 
형태가 세계에 주어졌다"(166). 예수의 십자가가 서 있었던 
"골고다" 곧 "해골 골짜기"는 "절대정신의해골 골짜기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왕관의 현실이고 진리이며 확실성이다." 이 왕관이 없다면, "절대정신은 생명이 없는 고독한 것일 
것이다. 오직이 정신의 왕국의 잔으로부터 그의 무한성이 
그에게 거품처럼 생성된다(schäumt)"(1952, 564. 
《정신현상학》 마지막 문장).

그리스도에 대한 헤겔의 사색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우리는 이것을 《종교철학 강의》 
제3부에서 볼 수 있다(1966d, 155-174). 
이문헌에 따르면, 죽음은 유한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최후의 한계요, "인간성의 가장 높은 증명" 이다(165). 
죽음은 "유한성의 가장 높은 정점"이요.
"가장 높은 부정"이다. "죽음의 고통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가장 높은유한성", "가장 극단적 유한성을 나타낸다(157). 인간은 죽음을 통해 유한한 존재로 확정된다. 
죽음은 "가장 높은 유한화다(die höchste Verendlichung,
158).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당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것이다. "하나님-인간 예수는 모든 인간이 당하는 "자연적 
죽음"을 당했다. 그의 죽음은 한인간의 죽음, 한 친구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자연적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부끄러움과 치욕의 죽음", "십자가의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당했다(165, 161). 
그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자기 존재의 포기, 
소유의 포기였다(161).

헤겔은 예수를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하나님 - 인간"이라 부른다. 
예수는 "하나님 - 인간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단지 한 
인간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깊은 사랑의 영 안에서 그와 
한몸을 이룬 아버지 하나님의 죽음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사망했다. 하나님이 죽었다(Gott ist gestorben, Gott ist tot) - 모든 영원한 것, 모든 참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부정 그 자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은 
가장 경악스러운 생각이다. 가장 깊은 고통, 구원의 완전한 상실(Rettungslosigkeit), 모든더 높은 것의 포기가 이와 
결합되어 있다" (1966d 167).

그러나 헤겔이 말하는 "하나님의 죽음"은 하나님이 
죽어서 없어져버렸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비밀이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자기 아들이 겪은 죽음의 
고통을 함께당한다.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경험된다. 아들의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경험하는 아버지는 성령을 통해 아들로부터 구별되며, 
구별되는 동시에 죽어가는 아들과 하나로 결합된다.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 자신의 죽음으로 경험된다. 
이런 뜻에서 예수의 죽음은 성부성자성령이 함께 당한 
삼위일체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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