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정신사에서 관념주의 철학의 완성자로 알려진 헤겔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학문적 체계의 방대함에 있어서는 물론, 후대에 대한 영향에 있어서도 헤겔을 능가하는 학자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의 변증법적 사고는 학문의 영역에서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의 영역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물론 칸트, 마르크스, 니체가 후대에 남긴 영향도 매우 크다. 특히 마르크스의 사상은 철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 학문적 영역에서는 물론, 세계의 정치와 경제 영역에 거대한 혁명을 일으킬 만큼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영향력도 헤겔의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마르크스의사상 자체가 헤겔 없이는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청년기에철저한 헤겔 연구자로서 헤겔 철학의 깊이를 꿰뚫어 보았다. 그의 유물론적 (물질론적) 변증법은 사실상 헤겔의 정신의 변증법을 뒤바꾸어 놓은 것에불과하다.
헤겔 철학은 그 전체에 있어 일종의 기독교 종교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헤겔의 종교철학은 그의 체계의 한 부분인 동시에, 그의 체계 전체이기도하다. 곧 그의 철학 전체가 일종의 종교철학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직접적 근거를 철학의 연구 대상에 대한 헤겔의 진술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철학사 서문에 의하면, "본래 철학의 대상은 하나님일 뿐이다. 혹은 철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다. 철학은 이 대상을 종교와 공동으로 가진다." 차이가 있다면, 철학은 하나님을 사유하면서, 파악하면서 관찰한다면, 종교는 표상하면서 관찰하는 데 있다" (1966a.91). 철학과 종교의 관찰 방법은 다르지만, 그 대상이 동일하다면, 헤겔의 철학은 하나님을 중심 대상으로 가진 종교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보다 더 깊은 근거를 찾는다면, 헤겔 철학 전체의 중심 개념인 정신의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따라서 헤겔 철학 전체의 중심 개념은 "정신으로서의 하나님"이다.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헤겔 자신도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정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정신이 헤겔 철학 전체의 중심 개념이라면, 그의 철학 전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 출발점 내지 중심점으로 가진 종교철학일 수밖에 없다.
헤겔의 문헌을 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의 깊은 영성이 그의 사상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볼 수 있다. 헤겔은 경직된 교리신학과 성서의 문자주의적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깊이 사색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독특한 변증법적 사고의 방법을 발견했음을 볼 수 있다. 사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성육신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발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정신의 개념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체계를 세운다.
물론 헤겔은 글자로 경직되어버린 기독교의 전통적 교리와 신앙고백, 제도화, 형식화된 교회, 믿음과 경건의 모습은 있지만 예수의 "마음"이 없는 신앙 양태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청년기의 헤겔은 이와 같은 기독교를 가리켜 "실증 종교"(positive religoin)라고 비판했다.
헤겔에 따르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취하고 육적·감성적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발견할수 없는 하나의 혁명이다. 그것은 영원하고 무한한 하나님이 인간의 유한함과 연약함과 허무함과 제한성, 곧 인간의 모든 부정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했음을 말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부정을말한다. 영원하고 무한한 무한자가 유한자로 상처를 받을 수 없는 자가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신적인 본성과 인간적본성이 하나가 되었다.
헤겔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나타내기 위한 감각적 표상일 따름이다(사실 인간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표상이 나타내고자 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신적 본성과 인간의 본성,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 통일을 확실히 알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육이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확실하게 알도록 하기 위해 세상의 육속에서 나타나야만 했다."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야만했다"(히 2:17)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의 통일성은 "한 인간 안에서 나타나야 했다"(141).
그러나 "하나님이 육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자기 비움, 자기 낮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것과 결합하는 그분의 깊은 사랑을 나타낸다. 헤겔은 거룩하고 고귀한 하나님이 인간의 천한 육이 되었다는 것, 바로 여기에 기독교 종교의 "혁명적인 것이 있다고 말한다(137).
앞서 언급한 대로, 헤겔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자기 동일성 안에 머물러 있는 일자(Eins)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 그들 사이에 있는 깊은 사랑의 영곧성령이 하나를 이루면서 구별되고, 구별되는 동시에 하나를 이루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정신으로서의 하나님" 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정신은삼위성(Dreiheit)이다" (214). "하나님은 정신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 부르는 그것이다"(1966457). 하나가 셋이요, 셋이 하나라는것은 수학 공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 혹은 "비밀"이다(57). 이 비밀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게시된다.
물론 헤겔은 신적 삼위성에 대한 흔적을 고대 그리스 철학과 칸트 철학에서도 발견한다(19664, 59). 그러나 인격적 현실로서의 삼위일체는 성육신 한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거울이다. 그리스도 안에 삼위일체의 비밀이 계시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비밀을 알고자 한다면, 자연이나 자연의어떤 짐승을 볼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태를 입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보아야 한다(K. Barth의 생각이 이미 여기에 나타남).
앞서 언급한 대로, 헤겔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에서 자신의 철학의 원리인 변증법적 사고를 발견한다. 아버지 하나님은자기 자신을 자기의 아들로 대상화시킨다.
그는 아들을 인간의 육을 입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보낸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아들은 아버지의 타재다. 아들과 아버지는 깊은 사랑의 영 곧 성령 안에서 하나인 동시에 둘로구별되고, 둘로 구별되면서 하나가 되는 변증법적 활동 속에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이 통찰이 헤겔의 세계사 철학의 원리를 구성한다. 세계사는 "정신으로서의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기를 대상 세계로대상화하고, 대상 세계 속에서 신으로 돌아가는 변증법적 활동이다. 이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버지-아들-성령이라는 종교적 표상에 머물지 않고, 세계사를 이끌어나가는 구체성을 갖게 된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은 "공허한 추상물"(ein leeresAbstraktum) 일 수 없다(1966e, 28 주해). 추상적인 존재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될 수 없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은 세계사를 다스리는 구체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참된 것은 추상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면, 그는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추상적인 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철학은 추상적인 것에 가장 철저히 대립한다. 그것은 추상적인 것에 대항하는 싸움이다"(1966a,113).
헤겔은 하나님의 구체성을 하나님의 삼위일체에서 발견한다. 삼위일체하나님은 추상적 일자, 절대자, 보편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기의타자로 대상화시키며, 이 대상 안에서 자기를 보고, 대상의 부정적인 것을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구체적 활동성이다. 따라서 헤겔은삼위일체를 가리켜 "세계사가 그 주위를 맴도는 낚싯바늘"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 삼위일체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계시된다면, 성육신한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요, 헤겔 철학의 밑바닥에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헤겔의 철학은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사색과 영성에 기초한다. 따라서 헤겔은 자신의 철학 체계 도처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언급한다.
그는 성육신한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적 화해의 원리"를 발견한다. 헤겔은 하나님의 성육신에서 자신의 변증법적 사고에 대한 중요한 근거를 발견했다.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의 근거는 "성육신의 현실"에 있다.
헤겔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본성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죽음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외화하며, 유한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
그는 유한한 존재의 모든 부정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다. 곧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과 제한성과 천함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다.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 객체와 주체, 하나님과 세계의 변증법적 통일성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성육신, 곧 인간의 형태 안에 있는 하나님은 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한한 것, 제한된 것 속에 머물 수 없다. 그는 유한한것의 부정적인 것을 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헤겔은이 하나님의 활동을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인지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정적인 것, 곧 "자연적 유한성과 직접적 현존의 지양, 외화의 지양, 차단기(Schranke)의 폐기"다(1966d 159).
한마디로 그것은 "이 부정적인 것의 부정적인 것"이요, 이것이 곧 정신이다(163).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일어난부정의 극복, 곧 "부정의 부정은 신적 본성의 계기다"(166). 여기서 우리는헤겔이 정반합을 말하지 않고, 부정적인 것의 부정을 말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기 이전에 "한 사람의 감성적 개체" (ein sinnliches Individuum)였다. 그는 유한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통해 감성적 개체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넘어간다. 죽음은 "영광, 영화롭게 됨으로 넘어감"이다(171).
"인간적인 것이 벗어지고, 신적인 영광이 다시 나타난다 죽음은 인간적인것, 부정적인 것을 벗어버림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죽음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다. 자연적 현존으로서 인간이 내맡겨져 있는 것의 가장 높은 정점이다"(1966d, 172).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죽었다.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사람을 위한 이 화해가 계시되었다." 그러나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신적 역사다."
세계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가 하나님 자신의 활동을통해 실현되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하나님 자신인 삶(Leben)이다" (174). "하나님은 자기 자신 속에서의 이 활동이다" (166). 헤겔은 세계사를 구성하는 하나님의 이 활동의 정점을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인지한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 그것은 주인을 버리고 도주하다가 붙들린 노예들 정치적 반란자가 당하는 가장 잔인하고 "가장 천한 것"이었다(스파르타푸스의 노예혁명 참조). 로마 군인들은 잡혀온 노예나 정치적 반란자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엉덩이뼈가 드러나기까지 태형을 먼저 가했다.
헤겔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한성의 가장 높은 꼭대기"다. 그의 죽음은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범죄자의 죽음, 가장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가장 천한 것, 비참한 것이 "가장 높은 것이 되었다"(1966d, 161).
헤겔은 "가장 친하다고 여기는 것" 곧 "십자가의 죽음"이 "가장 높은것"이 되었다는 것에서 "기존하는 것에 대한 완전한 혁명의 표현을 발견한다. 세속의 권력자들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것"이 "가장 고귀한 것"이 되었다면, 그들이 다스리는 세속의 질서, 곧 "인간의 공동생활의 모든 끈이사실상 공격을 당하고, 동요되며, 해체되었다" (1966d, 161).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기초가 주어졌다. "세상의 모든 위대함과 모든 타당한 것이 이로써 정신의 무덤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여기에 혁명적 요소가 있다. 이 요소를 통해 전혀 다른 형태가 세계에 주어졌다"(166). 예수의 십자가가 서 있었던 "골고다" 곧 "해골 골짜기"는 "절대정신의해골 골짜기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왕관의 현실이고 진리이며 확실성이다." 이 왕관이 없다면, "절대정신은 생명이 없는 고독한 것일 것이다. 오직이 정신의 왕국의 잔으로부터 그의 무한성이 그에게 거품처럼 생성된다(schäumt)"(1952, 564. 《정신현상학》 마지막 문장).
그리스도에 대한 헤겔의 사색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우리는 이것을 《종교철학 강의》 제3부에서 볼 수 있다(1966d, 155-174). 이문헌에 따르면, 죽음은 유한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최후의 한계요, "인간성의 가장 높은 증명" 이다(165). 죽음은 "유한성의 가장 높은 정점"이요. "가장 높은 부정"이다. "죽음의 고통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가장 높은유한성", "가장 극단적 유한성을 나타낸다(157). 인간은 죽음을 통해 유한한 존재로 확정된다. 죽음은 "가장 높은 유한화다(die höchste Verendlichung, 158).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당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것이다. "하나님-인간 예수는 모든 인간이 당하는 "자연적 죽음"을 당했다. 그의 죽음은 한인간의 죽음, 한 친구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자연적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부끄러움과 치욕의 죽음", "십자가의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당했다(165, 161). 그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자기 존재의 포기, 소유의 포기였다(161).
헤겔은 예수를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하나님 - 인간"이라 부른다. 예수는 "하나님 - 인간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단지 한 인간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깊은 사랑의 영 안에서 그와 한몸을 이룬 아버지 하나님의 죽음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사망했다. 하나님이 죽었다(Gott ist gestorben, Gott ist tot) - 모든 영원한 것, 모든 참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부정 그 자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은 가장 경악스러운 생각이다. 가장 깊은 고통, 구원의 완전한 상실(Rettungslosigkeit), 모든더 높은 것의 포기가 이와 결합되어 있다" (1966d 167).
그러나 헤겔이 말하는 "하나님의 죽음"은 하나님이 죽어서 없어져버렸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비밀이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자기 아들이 겪은 죽음의 고통을 함께당한다.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경험된다. 아들의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경험하는 아버지는 성령을 통해 아들로부터 구별되며, 구별되는 동시에 죽어가는 아들과 하나로 결합된다.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 자신의 죽음으로 경험된다. 이런 뜻에서 예수의 죽음은 성부성자성령이 함께 당한 삼위일체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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