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제는 권리의 주체, 즉 권리를 갖게 되는 자연인과 법인(사단법인과 재단법인)의 종류와 특징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다음 권리의 객체‘라는 제목하에 물 (유체물과 무체물, 동산과 부동산, 유형물과 무형물, 가분물과 불가분물, 소비물과 비소비물)을 나누어 설명한다.
이렇게 사법상 법률관계와 권리의무 등 대륙법이 자랑하는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서 설명한 다음, 가장 중요한 개념인 "법률행위"로 들어간다(이것 역시 제10장에서 본 전형적인 개념법학의 성과물로서, 개념법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들은 빠짐없이 이 개념을 중심에 둔다. 심지어 독일과 같은 국가에서는 법조문에 ‘법률행위 (Rechtsgeschäft)‘라는 개념이 적혀 있고, 그 외의 국가에서는 법 이론서에 설명이 들어 있다. 거의 대부분의 대륙법 국가에서 법률행위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학자들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서 전파하고 있는 법 질서의 가장 중심에 있는 개념이고, 또 하나는 권리 개념과 더불어법 질서에서 개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법률행위라는 개념은 ‘법률사실‘이라는 개념에서 나온다. 앞에서본 법 이론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원래 법이란 일정한 사실관계에 적용되도록 만들어졌다. 법학자가 상상해낸 어떤 사실관계가존재하는 경우 그에 맞는 법률이 적용되어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이때 법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사실관계가 바로 법률사실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법률사실이고, 계약도 법률사실이다. 그런 사실이 있으면 법이 적용되어 법률효과가 발생한다. 가령 사람은 태어남으로써 권리능력을 가지고, 계약이 있음으로써 국가가 그 계약의이행을 강제하게 된다.
그런데 법률사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사람이 병에 걸려 죽는다든가, 지진이 난다든가 하는 것처럼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사람의 의지와 생각에 따라서 발생하는 사실이다. 앞의 것을 ‘사람의 정신작용에 의거하지 않은 법률사실‘ 이라고 하고,뒤의 것을 ‘사람의 정신작용에 의거한 법률사실‘ 이라고 한다.
"법률행위에는 법률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 법률효과를 허용하는 적법행위와 법률이 허용할 수 없는 것으로 평가해 행위자에게 불이익한 사실을 발생하게 하는 위법행위가 있다. 그리고 적법행위는 다시 물건을 소유한다든가 배를 만드는 것과 같이 외부세계의 변화를 일으키는 행위가 있고, 외부세계의 변화 없이 사람의 생각, 마음이나 의사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 그치는 행위가 있다. 이 가운데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을 관념의 통지(declarations of knowledge)라고 하고, 사람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을 법률행위(juridical acts)라고 한다. 이상의 논의 가운데 가장 중요한것은 법률행위인 것과 법률행위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법률행위는 그 안에 표시된 의사대로 법률효과가 발생하는 데 반해, 그 외의 행위는 설령 의사나 생각이 표시된다고 해도 그것대로 효과가 발생하지 않고 법이 정한대로의 효과만 발생한다. 가령 어떤사람이 서면을 통해서 혼인관계 외에서 생긴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확실하게 선언하는 경우, 설령 그럴 마음이 본인에게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에게 부양을 청구할 권리가 법적으로 발생하는것과 같다. 따라서 이건 법률행위가 아니라 관념의 통지가 된다. 의사대로 결과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대륙법은 아무 이야기가 없더라도 앞서 소개한 민법총칙 내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다. 법을 제정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 모두 학자들이 만든 민법총칙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이 기본이고 진리라는 점에 동의한다. 학교 수업에서 배운 법학이 현실 세계의 법을 지배하고 있고, 법률가와 입법자, 행정가, 판사가 생각하고 일하는 방식 전부를 지도하고 있는 셈이다.
통설에 따르면 판사는 ‘학자들의 설계에 따라 입법자가 만든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대륙법계에서 판사를 "법을 말하는 일"이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재판할 때 판사는사실관계로부터 필요한 사실을 추출해서 그를 기초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거기 적용될 법을 찾아내서 적용한다. 학자와 입법자가 자기 일을 충실히 했다면 판사의 일은 전혀 복잡할 것이 없다. 정답은 하나밖에 없고, 다른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혹시라도 판사가 적용할 법을 찾지 못하거나 그 법을 주어진 사실관계에 적용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판사가 시키는 일을 잘할 줄 모르거나, 입법자가 사실관계에 적용될 정확한 법을 만들지 못했거나, 학자의 이론에 흠결이 있어서 판사나 입법자를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각자가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했다면 판사는 어려움 없이 법을 찾아서 적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해결이 어려운 사건은 그야말로 예외에 불과하고, 그런 사건이 있다고 해서 대륙법이 잘못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도 않는다.
대륙법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학자는 법이라는 구조물을 가장 완벽하게 쌓아 올려서 늘 확실한 결과가 나오도록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법 자체가 완전하고, 분명하며, 흠결이 없어야 한다.
즉, 입법자의 역할이 가장중요하다. 판사는 법적 안정성을 최고의 목표로 두고 법을 해석, 적용해야 한다. 가혹한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법을 바꿀 일은 아니고, 모든 비법률적인 고려도 재판에서 제외된다. 다른 어떤 목적보다 우선시되는 것이 법적 확실성 또는 안정성이다. 비현실적이고 가혹하고, 부당한 결론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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