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몸

나는 정원의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있다. 나는 ‘나무‘를 보고 
있다고나는 의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 나무를 
보고 있는 것이 ‘나‘라는 것도 의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들이 특별한 종류의 현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로 
정신적 현상들이다. 무엇이 정신적 현상들인 지는 아직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첫째, 정신적 현상은 의식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험에 대한 본능적 불안과 같은 무의식적인 정신적 현상도 있다. 또한 "내가 범인을 보았을 때, 이마의 상처를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 사진을 보여 준다면, 
나는 그 상처를 기억해 낼 수 있다"라는 말처럼,
의식적 상태는 무의식적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둘째, 정신적인 현상은 공간적이지 않다. 만일 정신적인 
현상이 사물이 아니라, 상태 혹은 속성이라면, 정신적 현상에 장소를 할당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셋째, 정신적인 현상은 개인적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은그 현상들에 대해 특별하고, 개인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 그 현상들을경험하는 사람은 그 현상들을 느낀다. 
만일 내가 불안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불안을 느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 내가 불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식하겠지만, 내가 느끼는 그대로 그 불안을 감지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불안, 기쁨, 사랑의 느낌과 같은 현상들이 
정신적 현상의 전부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은 
잔혹한 전쟁의 지휘자였다는나의 삶은 아무런 느낌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 상태는 내가 더 자세히 기술할 수 
있는 특별한 방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넷째, 정신적인 현상은 지향적이며, 명제적 태도를 가진다.
마음은 늘 무언가와 관계를 맺는다. 어떤 대상을 향해 있다. 나는 그냥 보지 않고, 나무 한 그루와 같은 특정한 무언가를 본다. 나는 단순히희망하지 않고, 어떤 특정한 것이 일어나기를 희망한다. 마음이 어떤 대상으로의 향함을 브렌타노
(1838-1917) 이래로 ‘지향성‘이라고 한다. ‘지향적 상태‘ 
혹은 ‘지향적 태도‘가 그에 상응하는 상태들이다.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에 향해진 지향적 상태와 사물의 속성과 같은 사태에 향해진 지향적 상태가 정신적 상태의 
전부는 아니다. 지향적이지 않은 정신적 상태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무엇에대해 불안해하는지 말할 
수 없지만, 불안해할 수도 있다. 혹은 그와 비슷하게 긴장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긴장에 대한 느낌은 지향적이지 않다.

명제적 태도 : 대상은 나무 한그루처럼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일 수도 있지만, "나무가 초록색 잎을 지니고 있다"와 같은 사태(속성)일수도 있다. 사태는 종속절을 통해서 
기술될 수 있다. 하나의 종속절은 하나의 명제를 표현한다. 그래서 어떠한 사태로 항해진 태도들을 ‘명제적 태도‘라고 부른다.

명제적 태도들은 내용과 상태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믿다‘ ‘의지하다‘ ‘원하다‘ ‘생각하다‘ ‘희망하다‘
 ‘무서워하다‘ ‘의도하다‘ 등이 상태에 해당한다. "나는 내일 남호를 만난다는 것", "모레 비가내린다는 것", "지구는 
둥글다는 것" 같이 주어진 사태가 내용에 해당한다. 
내용과 상태를 합하면, "내일 남호를 만난다는 것‘을 
나는 원한다"와같은 문장이 되며, 이것이 명제적 태도이다. 
사태는 틀릴 수도 있다. 실제로는 비가 내리지만, 지금 
눈이 내린다고 나는 믿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용과 상태는 다르다.

정신적 상태의 특징을 재는 단 하나의 척도는 없다. 그런 
척도가 되는 단 하나의 특징은 없다. 위에 언급한 네 개의 
특징들 중 세 개는 정신적인 상태를 비정신적인 상태와 
구분해 준다. 이 탁자는 의식의 상태가없다. 탁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 무엇으로도 지향해 있지 않다.
탁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 이 고양이는 
무언가를 지각하고, 그 지각은 무언가로 향해 있으며, 그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 즉 고양이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양이도 마음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고양이는 인간처럼 자기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양이도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존재가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의식이 필요한지, 그리고 
고양이도 그 정도의 의식들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지가 
해명되어야 한다.

영혼은 정신적인 실체이다. 실체 (substance)는 다른
것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실체는 속성들을 
붙잡고 있는담지자이다. 물질적인 실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적 실체가 있다. 이 입장을 ‘실체 이원론‘
이라고 한다. 물질과 정신이 두 실체이다.

그에 반해 이른바 ‘물질주의‘ 혹은 ‘물리주의‘는 오직 
물질적인 실체만 있다고 본다. 만일 물질주의가 옳다면, 
정신적인 속성들은 물질적인속성들로 환원되어야 한다. 
이것이 과연 가능하냐는 물음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실체 이원론-데카르트

정신적 속성들의 담지자는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정신의 본성에 대해 생각을 해 왔다. 특히 인간이 죽으면, 정신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왔다. 인간이 죽으면 존재하기를 멈춘다는 생각은 
많은 이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만일 신체의 죽음 이후에도 
정신은계속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러한 불안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신체와 다를 때에만, 
정신은 죽지 않을 것이다. 영혼은 신체와 달라서 죽지 않는다. 이를 보여 주고자 많은 철학자들이 시도했는데,
그 중 중요한 것이 플라톤 (427-347)의 대화편 「파이돈」, 데카르트(1596-1650)의 방법서설과 『성찰』이다.

실체 이원론의 핵심 주장은 정신과 신체는 서로 다른 
실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데카르트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논증: 다음과 같은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은 
기계가 가지지 않은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연 
법칙을 통해 행위가 규정되거나, 이 법칙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능력의 예로
 말하기와 지적 행위를 든다. 이 능력들은 과학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만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 능력은 과학의설명 대상인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능력들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뭔가가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정신적인 실체, 즉 영혼이다. 데카르트는 이 
능력을 가지고 인간과 동물들의 차이를 확정 짓는다. 
동물들과 달리, 우리 인간은 말할 수 있고, 지적으로 
행위할 수 있으며, 따라서 영혼을 가지고 있다. 
다른 동물들은 우리보다 더 적은 이성을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두번째 논증은 좀 더 복잡하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내가 
명석하고(lear) 판명하게(distinct) 파악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내가 명석하고 판명하게 파악하는 모든 것은 존재 가능하다.

내가 순수하게 생각하는 존재, 즉 나는 신체적 속성들 없이도 존재할 수있는 것이라고 나는 명석 판명하게 파악한다. 
정신과 신체는 다르다고나는 명석 판명하게 이해한다. 
내가 명석 판명하게 서로 구분할 수 있다면, 실제로 그것은 서로 다르다. 이로부터, 정신은 신체와 실제로 다르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따라서 정신적 실체(res cogitans)와 
연장된 실체(resextensa)가 존재한다.

반론 1

첫 번째 논증은 건전하지 않다. 몇몇 동물들은 지적으로 
행동한다. 우리는 애완용 고양이의 행동에서 이미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양이는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줄 
알고 먹고 싶을 때는울음 소리를 낸다. 우리는 고양이의 
이러한 행동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정신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

대답

데카르트의 논증은 동물들이 그 어떤 정신적 능력들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첫번째 논증은 여전히 거부될 수 없다. 인간의 능력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동물들의 능력을 넘어선다. 특히 우리는 
자기 의식을 가지며, 우리 자신을 서로 구분할 수 있는 
구별된 존재로 지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행위를 장기간에
걸쳐 계획할 수도 있다.

대답에 대한 반론

대부분의 원숭이나 다른 포유류들은 어떤 종류의 
자기의식을 가진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에 대한 이해를 
가진다. 또한 자기 자신과 미래에 대해 진술할 수 있는 
지능적 로봇과 같은인공적인 존재도 있다.

대답

그런 동물이나 로봇은 인간과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반론 2

첫번째 논증은 타당하지 (valid) 않다. 어떤 현상을 
자연과학이 지금까지 설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현상이 
비물리적원인을 가진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두뇌가 사람의 정신적 능력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 
아직은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정신적 능력들에 대한 
원인은 우리의 두뇌이다.

대답

이는 당신의 신념이지,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반론 3

두번째 논증은 건전하지 (sound) 않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은 옳지 않다. 
생각함은 신체 기능을 필요로 한다. 신체 없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다.

대답

우리는 항상 신체를 통해서만 경험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체 없이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지를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습관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몸이 없어도 
정신은 생각을 할 수 있다.

반론 4

인과적인 상호 작용의 문제가 있다. 만일 정신이 비신체적인것이라면, 정신은 신체에 인과적인 영향을 줄 수 없고, 
받을수도 없다. 그렇다면 정신은 몸의 부대 현상(Epiphänomen)이다. 존재하지만, 인과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현상에 불과할 것이다.

첫째, 정신과 신체가 접촉점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물리적 원인의 닫힘성원칙 때문이다. 몸이라는 
물질적인 것의 원인은 항상물리적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비물질적인 정신과 물질적인 신체의 인과적 상호 
작용은 불가능하다. 정신은 몸에 인과적 영향을 행사할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로 몸을 움직일 수있는 존재로 경험한다. 가령 누군가 
내 팔을 바늘로 찌른다면, 나는 통증을 감지한다. 
이처럼 실체 이원론을 반박할 수 있다.

대답 1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 사이를 이어 주는 접촉점으로 
송과선(松果線)을 제시한다. 이는 뇌의 특정 기관이다.

대답 2

만일 접촉 지점과 인과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인 개념과 
생각으로, 신체와 정신 사이의 인과적 상호작용을 기술할 
수 없다면, 이는 실재에 대한 탐구에 좋을리가 없다. 
이 경우 정신과 신체의연관성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보헤미아의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데카르트는 말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정신과 신체의 
통합을 인식하지만, 그에 대해 되씹으면서 숙고하면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정신과 육체의 상호 작용을 상식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대답 3

정신과 신체의 연관성에 대해서 라이프니츠(1646-1716)는 시계를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우리는 같은 시간을 가리키는두 개의 시계를 상상할 수 있다. 두 시계는 왜 동일한가? 
두 시계가 애초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거나, 부지런한 사람이 늘 시간을 새로 맞추거나, 처음부터 정확히 동일하게 
작동하도록 제작되었다.

이 중 어떤 것이 가장 합리적인가? 세 번째 일 것이다.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두 시계와 비교한다면, 처음부터 서로 맞게 예정되어 있다고해야 한다. 이를 예정 조화설이라 한다.

대답들에 대한 반론

대답 1은 옳지 않다. 정신과 신체는 다른 실체이기 때문에
서로 완전 분리된다. 대답 2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대답이 맞으려면 기계 신(deus ex machina)과 같은 신이 지속적으로 개입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답 3은 정신과 신체의 관계 문제이다. 정신과 신체 
사이에는 미리 예정된 조화가 있다. 정신과 신체는 신에
의해 항상 평행하게 움직이도록 설정되었다. 따라서 만일 
나의 뇌 안의특정 부위가 활성화되면, 항상 나의 정신은 
통증을 느끼고,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기를 원한다면, 
나의 신체는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신을 설정한다면, 세상에 설명하지 못 할 것이 없게 된다. 이는 반과학적, 반철학적인 태도이다.

반론 5

실체 이원론의 예정 조화설이 옳다면, 정신적인 상태는 
가지지 않지만, 우리와 완전히 똑같이 행동하는 존재가 
있을 수도 있다.

이 좀비는 우리에게 인사하고, 우리와 대화를 나누며, 
농담을 하면서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이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실체 이원론에서 정신은 존재는 
하지만 신체에 인과력을 행사할 수 없는 부대 현상이 된다. 따라서 신체로부터 독립적인 정신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대답

예정 조화설이 실체 이원론의 전부는 아니다. 물질로 
정신을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면, 물질과 정신의 두 실체를 
인정하는 이원론이 최선이다.

논리적 행동주의

몸과 마음은 ‘논리적‘ 관계이며, 마음은 몸의 ‘행동‘으로 
환원된다. 독립적인 실체로서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물질적 실체나물질(몸)만 존재한다는 가정이 남는다. 물질주의는 라메트리 (1709-1751)가 그의 저서 
《인간 기계》에서 제시했다. 그러나 물질주의는 
20세기가 되어서야 널리 지지받는 대세가 되었다.

물질주의는 정신적인 속성이 물질적인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라는 헤어나기 어려운 
난제에 직면한다. 아래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세 개의 
대답과 이에 따르는 물질주의의 버전들을 소개하겠다.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고한 대세가 된다. 따라서 정신의 실체를 부정하고, 몸을 실제하는 것으로 본다.

논리적 행동주의, 동일성 이론, 무법칙적 일원론이 그것이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과 라일(1900-1976)이 가장 
중요한 주창자인 논리적 행동주의는 첫째, 정신적 속성들이 행동으로 환원될 수 있다.

둘째,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 사이의 관계는 논리적 
혹은 개념적인방식이라고 주장한다. ‘논리적으로 정신적 
속성들은 특정한 ‘행동‘으로바꾸어서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논리적 행동주의‘라 한다.

첫째, "정신이 행동으로 환원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논리적 행동주의에 따르면, 정신 혹은 정신적인 것에 대한 
설명들은 단순한 행동에 대한 진술이 아닌, 상세한 행동 
성향에 대한 언급들로 번역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통증을 느낀다"라는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울거나 
신음을 하거나,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행동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논리적으로 바꿀 수 있다.

물론 누군가는 자기 억제를 하여 그런 어떤 행동 성향도 
보여 주지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연극이라면, 통증이 
없는데도 몸을 웅크리며 아픈 척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통증을 가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특정한 행동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즉 특정한 행동 성향을통증을 가진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그 상황을 직관적으로 설득력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가 통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행동에 있어서는 통증에 상응하는 성향을 보이지 않고, 
지극히정상적으로 행동한다면, 그가 통증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어렵다. 결국 정신적인 현상에 대한 표현은 특정한 
행동 성향들로 바꾸어서 말해야 한다. 이렇게 환원되어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의 관계는 인과적이지 
않고, 논리적 혹은 개념적이다. 논리적 경험주의 두 번째 
주장은 무슨 뜻인가?

정신적인 현상에 주목할 경우, 우리는 종종 특정한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르게 표현하곤 한다. 예를 들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기를 원했기 때문에, 윤희는 창문을 열었다" 
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흔히 그녀의 의지가 그 행동의 원인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에 대한 표현들은 행동 성향들로 환원된다는 논리적 행동주의자들의 주장을 따른다면, 이는 틀렸다. ‘의지‘는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특정 행동은 그 행동에 대한 성향으로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논리적 행동주의의 설명은 인과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특정 행동 성향에 대한 개념은 행동의 
개념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성향에 대한 기술은 정확하게 행동과 연계되어 있다. 
만일 두 개의 사건들이 논리적으로 서로 독립적이지 않으면, 하나는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이에 어떤 논리적 행동주의자들은 재해석해서 말한다. 
행동성향에대한 설명은 "설탕은 물에 용해된다. 왜냐하면 
설탕은 수용성 (물에 녹는성질)이기 때문이다"와 같은 
종류의 설명이므로 인과적인 설명이 아니다.

이 역시 문제이다. 수용성은 설탕의 용해에 대한 원인이 
아니라, 설탕의 성향에 불과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동 
성향은 원인이 아니다.

반론 1

정신적인 것에 대한 모든 문장들을 행동 성향에 대한 
문장들로 대체하려는 논리적 행동주의의 프로젝트는 
성사될 수 없다. 그들의 주장에 따라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남호는 맥주를 원한다"는 무슨 뜻인가? 이 문장은
 "남호는 맥주를 마신다"로 대체될 수 있을까?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남호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으면서도, 맥주를
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한다고 꼭 마시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남호는 맥주를 보고,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로 번역할수 있을까? 이 조건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눈을 반짝임은 맥주를 마셨을 때일 수도 있지만, 친구와 
대화했던 기억 때문일 수도 있다. 이처럼 다른 원인을 
가질 수도 있다.

정신을 행동 성향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는 이처럼 
아주 간단한 경우에서부터 실패하는 것 같다. 
이웃 국가의 정치적 위기에 대한 배경 정보를 알고자 하는 
욕구와 같은 복잡한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대답

우리는 더 간단한 상황들을 통해서 명제적 태도에 대한 
설명을 시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한 생명체의 감각 
기관이 어떻게 구조 지어졌는지 안다면, 생명체의 직접적인 주변 조건에 대한 기술을 통해서, 그 생명체가 어떤 정신적 상태를 가지고 있는지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호가 눈을 뜨고, 맥주 앞에 선다면, 그가 맥주를 보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또한 남호가 몇 시간 전부터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남호가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할 수 있다. 

이런 욕구들과 남호가 맥주 앞에 서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남호가 맥주를 원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반론 2

정신적인 현상과 행동 성향 사이의 개념적인 연관성에 
대한앞의 비판적 논증은 건전 (sound) 하지 않다. 
성향은 원인의 한 부분이다. 설탕의 수용성은 왜 특정 
분량의 설탕만 물에 녹는지에 대한 원인의 한 부분이다. 
이처럼 정신적인 현상은 그것이 성향이라는 가정하에서 
그 자체로 행동의 원인일 수 있다.

정신 현상을 행동 성향으로 바꾸는 것은 원인ㆍ결과라는 
관점과는아무 상관이 없다. 우연히 행동 성향이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부차적인 것이다.

반론 3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신체에 인과적 영향을 행사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정신과 행동 사이의 인과적 상호 작용을 매일 
경험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논리적 
행동주의는 옳지 않다. 실체 이원론처럼 논리적 행동주의 
역시 정신적인 것을 부수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 
이는 정신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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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미덕은 남용될 수 없다. 게다가 
사실 그는더 강한 어떤 것을 주장했다. 즉 사람들이 특정 
미덕을 가졌기 때문에 그 미덕을 가지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쁘게 행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기본적으로 
오직 하나의 미덕, 즉 올바른 판단의 능력the power of right judgment이라는 미덕만 있다고 믿었고 그런 믿음에 
일관성이 있을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점에서 소크라테스를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점으로, 우리는 이 이념들[특정 덕을 가졌을 때의 행위가 그 덕을 가지지 못했을 때의 행위보다 나쁠 수 없다는 이념 및 궁극적으로 올바른 판단의 미덕이라는 하나의 
미덕만 있다는 이념]에 동기를 부여했던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를 따라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개인의 삶에 
있는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 모든 가능한 여건에서도 좋은 
것에 대한 추구이다. 그 추구는 근대의 표현도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중 하나를 도덕이 특별히 몰두하는 것the 
special preoccupations of morality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다.

미덕 함양의 문제는, 만일 그것이 일인칭의 숙적 훈련으로 
이해된다면, 오히려 당신의 사고가 충분히 당신 자신을 
향하지않는다는 것이다. 미덕의 면에서 당신의 가능한 
상태를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행위들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당신의 행위들에 관하여 당신이 생각할 수 
있거나 생각해야 하는 면에 대해 두드러지게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당신의 행위들에 관하여 생각하는
그 방식에 대해 타인들이 기술하거나 논평을 할 수도 있는 
방식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 숙고의 본질적 내용을 나타낸다면, 그것은 정말로 윤리적 주의를 
잘못된 쪽으로 돌린 것 a mis-direction of the ethical 
attention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교훈은미덕이 중요한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보다는, 윤리적 개념의 
중요성은 그 개념이 일인칭 숙고의 요소가 됨에 놓여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관대하거나 용감한 사람들의 숙고, 
그리고 더 관대하거나 더 용감해지고자 하는 이들의 숙고는 그렇지 않은사람들의 숙고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 차이는 
자신들이 관대함이나용기 면에서 어떠한지 생각한다는 
점에서 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질문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기주의는, 날것 그대로의 몹시 사리적인 답이긴 
하지만, 어쨌건 그 질문에 대한 지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답이다. 비록 우리 대부분은 이기주의를 거부하는 성향이 
있겠지만 말이다. "윤리적"이라는 단어를,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한 지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답변을 제시할 삶의 
계획이라면 어느 것에나 사용할 수도 있다. 그렇게 "윤리적"을 최대의 폭넓은 뜻으로 사용하면, 가장 노골적인 이기주의조차 윤리적 선택지가 될 것이다. 나는 우리가 그 용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에는 아무리 모호할지라도) 우리 및 
우리의 행위를 요구, 필요, 주장, 욕구, 그리고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과 이해할 만하게 연관짓는 윤리적인 것의 
관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윤리적 고려사항이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에서 이렇게 우리 자신의 요구 
등과 다른 사람의 삶을 연관짓는 관념을 보존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나 이기주의는 그 가장 노골적인 형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매우 헷갈리게도 윤리적 이기주의 ethical 
egoism라고 불려온, 우리가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의 이론이 있다. 

윤리적 이기주의는 각자가 사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리적이기주의는 반성적인 입장이며 사람들의 이익에 관한 일반적 견해를 취하기 때문에 노골적인 
이기주의와는 다르다. 우리가 윤리적 이기주의를(그것이 
자칭하는 대로) 윤리 체계로 부르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윤리적 이기주의가 윤리적 고려사항이라는 이념에 어떻게 기여하는가가 중요한 질문이다. 

처음 보기엔 윤리적 이기주의는 윤리적 고려사항이라는 
이념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각자가 윤리와 무관한 고려사항들nonethical
 considerations에 따라 행위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윤리적 이기주의가 그것만 말한다면, 그저 독단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실제로는 사리 
이외의 고려사항들에따라 행위한다면, 무엇이 그들이 
그렇게 행위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가? 

윤리적 이기주의가 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사실 윤리적 
고려사항의 역할을 열린 채로 두는 일이다. 그리고 윤리적 
고려사항들을 따르는 행위를 포함하는 삶이 사리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묻는 것이다.

윤리적 고려사항의 역할을 열린 채로 두는 윤리적 이기주의와 상당히 비슷하게 보이지만 이와는 다른 또 하나의 견해가 있다. 이 견해 역시 일어나야 마땅한 것은 각자가 사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무엇인가 일반적인 것을 주장한다. 이 견해는 행위하면서 고려에 넣는 고려사항을 불안정하게 하는 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견해는 일상적인 
뜻에서 윤리적인 고려사항을 도입할 수도 있다.

만일 사람들이 각자의 사리를 추구하는 것이 일어나야 
마땅한 것이라고 내가 믿는다면, 내가 할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 것 하나는 각자가 사리를 추구하는 사태를 증진하는 
것이며,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정책을 채택하는 것을
내가 도와주는 일은 포함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노선의
행위가 내가 나 자신의 사리만 그저 추구하는 것과 충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야 하는 것이 사람들이 그들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날것 그대로의 믿음을 지탱하는 일은 
꽤나 어렵다. 이 믿음을 다른 고려사항으로 지지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 다른 고려사항이란, 각자가 모두 그렇게 한다면 가장 좋으리라는 고려사항이다it is for the best if 
everyone does that. 

이 고려사항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려는 시도는 
일어나야 할 사태가 무엇인지 혼동을 줄 뿐이다‘와 같은 
말을 하는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논하면서도 
실제로 어떤 다른 윤리적 고려사항, 예를 들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좋다는 것 같은 고려사항도 받아들여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능한 한 
많이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믿음은 물론 
19세기 초에 주장되었던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데사용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20세기 말에도 모든 
경제 체계가사람들이 사리를 넘어서는 성향을 갖는다는 
사실에 의존한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런 믿음을 주장한다. 아마도 이 모순은 왜 자유방임주의의 몇몇 
옹호자들이 자신의 사리를 추구하는 데 실패하고있는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설교조의 강연을 하는 경향이 있는지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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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원리에 대한 벤담의 정당화

윤리적 물음에 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만으로는충분하지 않다. 그 의견을 정당화하는 무엇을 
제시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있는 무엇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 정당화의 형식은 윤리학자체의 본질에 관한 견해에 
의존한다. 

즉, ‘도덕 판단은 참 또는 거짓일 수 있는가, 아니면 단순히 
우리의 태도를 표현하는것인가‘에 대한 견해에 의존한다. 
윤리의 제1원리를 증명하는것은 어렵기로 유명하다. 
우리는 데카르트처럼 다른 모든 윤리적 판단의 토대로서 
사용할 수 있는 자명한 제1원리를 찾아야 하는가? 
이것은 ‘토대주의 (foundationalism)‘ 라고 불리는 
방법이다. 아니면 우리는 존 롤스의 예를 따라서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의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 반성적 평형은 윤리적 원리가 우리의 도덕 판단과 얼마나 
잘 조화되느냐에 따라 윤리적 원리를 정당화함과 동시에 
판단과 신빙성 있는 원리의 정합성에 비추어서 판단 자체를 재고찰하는 방법이다.

벤담은 자신의 제1원리를 입증하는 간접적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도덕과 입법의 원리에 관한 서론》
에서 ‘공리의원리에 대한 직접적 증명이 가능한가?‘ 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을 증명하는 데 사용되는 것 그 
자체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증명의 사슬은 어딘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벤담은 우리가 자신과 타인들을 판단할 때 자연적으로 공리에 호소하는경향을 가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혼란과 비일관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공리의 원리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성향을 가지도록 만든다.벤담은 그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일련의 물음에 대해서 스스로 답해 보라고 요구한다. 이 물음들은 선택을 요구하는 물음이며, 각각의 선택은 또 다른 물음으로 이어진다. 
이 물음의 계열은 공리의 원리에 대한 대안들이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가도록
의도된 것이다. 

《공리주의》를 시작하면서 밀은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방법론의 종류에 관해서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직관주의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도덕원리를 수용해야 하는지를 자명한 
진리처럼 즉각적으로 알수 있는 ‘자연적 능력, 감각 또는 
본능‘이 있다고 믿는다. 이에 반대해서 밀 자신이 속하는 
귀납학파는 관찰과 실험에 의해 옳고 그름에 대해서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두 학파 사이에서의 선택은 공리주의를 정당화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밀도 벤담과 마찬가지로 궁극적 목적은 증명 불가능하다고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궁극적 목적을 지지하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리주의는행복이 우리가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왜 우리가 행복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우리는 이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밀에 의하면, 목적에 관한 물음은 바람직한(desirable) 
것에 관한 물음이다. 행복이 바람직하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제시할수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 밀의 대답은
 이렇다. ‘어떤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의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출발이 아니다. 마약 중독자는 마약을 바란다.
그러나 이것이 마약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람직한‘은 보통 ‘바랄 수 있는(able to be desired)‘보다는 ‘바랄 만한 가치가 있는(worthy of being desired)‘을 
의미한다.

19세기의 위대한 공리주의자 세 사람 가운데 세 번째 
인물인헨리 시지웍은 밀이 사용한 귀납적 방법은 오류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경험은 기껏해야 우리에게 모든 
사람이 항상 쾌락을 궁극적 목적으로 추구한다고 말해 줄 
뿐이다. 경험은우리에게 쾌락을 궁극적 목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말해 줄수 없다.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무어는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 )-대략적으로 말해서 사실로부터 가치를
도출하는 오류-에 반대하는 그의 매우 영향력 있는 
논증에서 ‘바라는 것‘으로부터 ‘선(좋은)‘을 도출한 밀을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밀은 『공리주의』의 뒷부분에서 정의에 관해 논의하면서, 
‘모든 사람은 하나로 계산되어야 하고 누구도 하나 이상으로 계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벤담의 말을 인용한다. 그 다음에 그는, 공리의 원리는 ‘어떤 사람의 행복이 어떤 종류에 
있어서 허용된 정도의 면에서 평등하다고 상정할 때, 
그 사람의 행복이다른 사람의 행복과 정확하게 똑같이 
계산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합리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하다‘고 덧붙인다. 

밀의 이러한 언급은 그가 자신의 책의 독자들이
공평성(impartiality)의 관념을 도덕의 본질로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가정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밀에게 있어서 [이기주의는 진정한 도덕 
이론이 아니다.] 이기주의는 공리주의와 도덕 이론의 
지위를 두고 다툴 경쟁자가 아니다. 

만약 이 해석이 옳다면, ‘A의 행복은 A에게 하나의 선이고, 
B의행복은 B에게 하나이 선이다. 등등‘과 ‘이 모든 것의 
합은 모두에게 하나의 선이다.‘ 사이에 간격이 없다고 
밀이 생각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공리주의에 대한 밀의 정당화가 그렇게 널리 
논의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철학적 논증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오류들을 발견하도록 가르치는 데 유용하다. 그 외견상의 오류가 진정한 오류인지는 밀의 
저작을연구하는 전문 학자들에게 맡겨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밀을 아무리 너그럽게 독해한다고 할지라도, 밀의 글쓰기는 정확하지 않고 그 의미가 불명료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위대한 19세기 공리주의자인 시지웍은 그의 
전임자인벤 담과 밀의 저작을 읽을 수 있는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와 다른 비판자들이 벤담과 밀의 저작에서 발견한 문제들의 상당 부분을 피할 수 있었다.

시지웍의 증명

시지웍은 그의 주저인《윤리학의 방법》을 시작하면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목적은 공리주의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명하고 객관적으로 참인 도덕 판
단 또는 공리(axiom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책의말미에서, 시지원이 공리주의가 매우 
합당한 이론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리주의의 경쟁 이론인 
이기주의를 제거하지는 못했다.

밀과는 달리, 시지윅은 궁극적인 윤리적 원리들은 이성의 
진리들(truths of reason)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자명하다는(self-evident)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자명하다는 것은 이 진리들이 다른 어떤 전제들로부터 추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가 
그것들이 분명하다고(obvious)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철학적 직관주의자(philosophical intuitionist)‘이다. 직관주의자들은 전형적으로 상식 도덕(commons-ense morality)은 자명한 도덕적 직관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시지윅은 그의 책의 많은 부분을 지혜, 자제, 
박애 (benevolence), 정의, 선한 신앙심, 진실성, 타산, 순수와 같은 덕들에 상응하는 도덕 규칙들을 면밀히 검토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직관주의자들과 달리, 그는 상식 도덕의 외견상의 자명성은 우리가 그것의 규칙을 특수한 경우에 적용하려고 할 때 사라진다고 결론짓는다.

예를 들어 상식 도덕은 우리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어떤 것이 문자 그대로 참이지만 듣는 사람을 오도할 것임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경우에도 그것을 말해야 
하는가?

방금 문신을 하고 온 친구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에게 물었을 때 나는 진실을 말해야만 하는가? 당신이 
믿지않는 말을 하도록 요구받는 종교 행사에 참여함으로써 가족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른 것인가? 어린아이에게 누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오는지에 관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허용가능한가? 또는 아이들에게 방금 진단받은 질병의 치료 가능성에 관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허용 가능한가?

상식 도덕은우리가 절대로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상식 도덕의 규칙들이 예외를 
포함하도록 그 규칙들을 개선하려고 하는 순간, 그 규칙들의 명료함(clarity)과 외견상의 자명성은 사라지고 만다.
 ‘ㆍ할 때를 제외하고 진실을 말하라‘는 그 예외가 
그 자체로 명료하고 자명한 것이 아닌한 자명한 도덕적 
진리일 수 없다.

이것은 시지원이 실시한 상식 도덕에 대한 폭넓은 분석에서가져온 단지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상식 도덕에 대한 
분석의 요점은, 제한 조건과 예외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상식 도덕의규칙들은 자명하지 않고, 오히려 더 심층적인 
설명을 필요로한다는 것이다. 그 심층적인 설명은 그 
규칙들이 우리의 행위를 더 큰 선으로 안내하는 수단이라는 
[공리주의적] 설명이다.

물론 그 규칙들은 완전한 지침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많은 종류의 왜곡에, 예컨대 자기이익, 미신, 무지에서 비롯되는 왜곡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선을 산출하는 것을 행하라는 공리주의적 원리는 
다른 어떤 도덕 이론도 가지지 못한 설명력을 지니고 있다.

공리주의가 우리의 상식 도덕을 설명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을 체계화할 수 있다는 시지워의 생각은 우리가 이 장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 있는 롤스의 반성적 평형 이론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롤스의 모델에서 참인 도덕 이론은 우리의 공통의도덕 판단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다. 

시지웍은 윤리학에서 진리가 우리의 공통의 도덕 판단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대신에 그는 상식 
도덕의 규칙보다 더 고차적이고 더 추상적인 수준에서 
진정으로 자명한 도덕원리를 찾는다. 그는 자명한 명제가 
충족시켜야 하는 네 가지 조건을 제안한다.

명제의 용어는 분명하고 정확해야만 한다.

명제의 자명성은 신중한 반성에 의해서 확인되어야만 한다.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명제들은 상호 일관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똑같이 유능한 다른 판단자들이 내가 주장하는 어떤 명제가 진리임을 부인하는 정도만큼 그 명제가 진리라고 믿는
나의 믿음도 감소되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판단자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없다면, 
나는 적어도 잠정적으로 ‘중립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보편적 또는 일반적 합의].

시지웍은 이 요건들을 충족시키는 세 가지 원리를 발견했다.

• 정의는 우리에게 같은 경우를 똑같이 대우하라고 요구한다.
또는 시지윅의 표현대로 .…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다면, 그는 암묵적으로 동일한 상황에 있는 모든 동일한 사람들이 그 행동을하는 
것도 옳다고 판단해야 한다.‘

• 타산은 우리가 ‘자신의 의식적 삶의 모든 부분들에 대해서공평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모든 순간을 평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미래를 
할인할수도 있다. 그러나 미래 그 자체는 현재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 박애는 타산과 마찬가지로 부분의 선이 아니라 전체의 
선을고려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문제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선이 아니라 보편적 선이다. 그러므로 시지윅은 
말하기를 박애의 원리는 우리에게 ‘공평하게 보았을 때 
다른 사람의 선이 자신의 선보다 더 적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아닌 한, 또는다른 사람의 선이 그에 의해 확실히 
알거나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아닌 한, 
다른 개인의 선을 자신의 선과 똑같이‘ 대우하라고 요구한다.

시지웍에게 있어서 이 박애의 원리는 공리주의를 위한 
토대이다. 그는 이 박애의 원리를 바탕으로 쾌락주의적 
공리주의로나아간다. 그러나 아직까지 시지윅은 쾌락 
또는 행복만이 본래적으로 선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논증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정당화는 그것의 토대가 굳건할 때에만 
강력한정당화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 토대가 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시지웍의 조건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방금 언급한 세 가지 원리와는 비일관적이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다른 공리들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시지원 자신도 이기주의 역시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주장위에 기초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즉, ‘어떤 한 사람과 다른 사람 간의 
차이는 실재적이고 근본적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개인들의 삶의 질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의미에서 하나의 개인으로서 나의 삶의 질에
관심을 가진다.‘

시지웍은 이 주장이 자신의 박애의 원리와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 그래서 실천이성이 두 가지 다른 방향을 
가리키도록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지윅은 그가 ‘실천이성의 이원론(dualism of practical 
reason)‘이라고 부르는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도덕에 합리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는 
자신의 시도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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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는 얼마나 추울까,
환영이 사라지고 질려버린 현실주의자가
현실을 처음 보는 순간 치명적인 ‘아니오‘는
공허할 뿐 아니라 비극으로 끝나리하지만 
비극은 이미 시작했으리,
다시, 상상이 새로이 시작될 때,
‘예‘라고 말해야 해서,
모든 ‘아니오‘ 아래결코 무너지지 않은 ‘예‘의 열정이 있어서,
현실주의자가 ‘예‘라고 말할 때.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악의 미학Esthétique du Mal>

성격이 없으면, 방법이라도 써야 한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전락La Chute》

도덕철학의 목적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의 운명에 결박되어 있다. 그리고 진지한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는 도덕철학이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희망도, 설사 철학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리라고 합당하게 희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도덕철학이 출발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선할 수 있는가?"나 심지어 "우리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보다 나은 질문이다. 이런 질문들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당연한 듯 전제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 전제된 것이 무엇인지 의견을 같이하지 
않을 것인데도 말이다. 마지막 질문[행복에 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고 해보자. 첫 번째 질문[의무의 질문]에서 출발하고 싶어 하는 일부 사람들은, 마지막 질문이 잘못된 장소에서 출발하며 그래서 도덕의 독특한 쟁점을무시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먼저 답을 얻을 가능성을 오히려 낙관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그 쟁점을 비롯해 많은 쟁점들에 
관하여 중립적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아무것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제일 처음 해야 하는 일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그리고 만일그 질문을 유익하게 
던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전제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How should one live" - 주체 one의 일반성이이미 주장을 고정시킨다. 
그리스의 언어는 우리에게 주체를 언급하지도 않는다. 
그 질문은 특정 개인을 언급하지 않고 모든 개인에게
적용되도록 표현되었다. 그런 표현은 누구에게나 관련 
있거나 유용한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음을 합의한다. 
그리고 이것은 무언가 일반적인 것, 즉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을 던지게 하는 개개인의 관심을 
수용하거나 형성하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음을 함의한다. 
(더 큰 혐의를 이 일반성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더 큰 함의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자아ego 의 관심을 넘어서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나중에 다시 살펴볼 것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일상적인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을 넘어서는 한 측면이다. 

또 하나의 함의는 그 질문이 즉각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 질문은 내가 지금 또는 바로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식manner of life에 
관한 질문이다. 그 질문이 결과적으로 전체 삶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으며 좋은 삶의 방식은 인생의 마지막에 좋은 삶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삶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이념에, 
그리스인 본인들이 큰 인상을 받았다. 가장 좋은 모습의 
삶으로 보이던 것을 망가뜨리는 운의 힘에 깊은 인상을 
받은 까닭에, 그들 중 일부는 운의 힘을 줄이고 운으로부터 가급적 가장 자유로운 삶을 사는 합리적 기획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런 기획을 추구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이 기획은 상이한 형태이긴 하지만 이후의 사고에서도 
하나의 목표로 생각되었다. 이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전체 삶a whole life 에 관해 생각해야만 한다는 이념은, 우리 
중 일부에게는 소크라테스에게 강력했던것만큼 강력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여전히 전체로서 asa whole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며 압박한다. 설사 우리가 삶이 어떻게 끝날지에 관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이 부여했던 만큼의 무게를 두지 않는다 할지라도, 삶의 모든 측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반성을 요구하는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사람은 해야 한다 one should "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의 이 구는 [영어 번역과는 달리] 원래 비인칭 형식이므로 
논의되고 있는 삶이 누구의 삶인가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질문에 적용되어야 하는 고려사항의 
종류에 관하여도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언질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 논의를 매우 
풍부하고 유익하게 만든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나는 도덕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내가 언급했던 의무에 관한 질문이나선한 사람의 삶에 
대한 질문들과는 다른 출발점이 된다. 

그 질문은 좋은 삶the good life, 살 가치가 있는 삶a life 
worth living에 관한 질문과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관념 자체는 아무런 독특한 도덕적 주장을 들여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믿었고 우리 대부분이 
여전히 그렇게 희망하고 있는 것처럼, 좋은 삶이 선한 
사람의 삶이기도 하다고 판명될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좋은 삶이 선한 사람의삶임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좋은 삶이 선한 사람의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대부분의 희망하는 바이다.) 

그러나 만일 좋은 삶이 선한 사람의 삶이기도 하다면, 
그 결론은 나중에야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해야한다는 
단적인 해야 한다일 뿐이며, 이 매우 일반적인 질문에서의 
‘해야 한다‘는 그 자체로는 여느 일상적이고 무심한 질문인 
"지금 무엇을 해야 되지?"에서의 ‘해야 한다‘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몇몇 철학자들은 우리가 이 일반적이거나 불확정적인 
종류의 실천적 질문에서 시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what should Ido?", "내가 사는 가장 좋은 방식은 무엇인가?" 등등과같은 질문들은 
애매하며 도덕적인 뜻과 도덕과 무관한 뜻을 함께 지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의미의 분석은 의미의 범주로서 "도덕적인"과 "도덕과 
무관한"을 요건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를 들어 화자가, 그가 군대 돌격대 임무를 수행하기에좋은 사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임을 의미했는지를 물을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군사상의 뜻을(또는 미식축구상의 뜻 등등을) 산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뜻의 "좋은" 또는
 "좋은 사람을 산출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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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는 도덕적 사유의 경계를 탐색하도록 우리를 밀어붙인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종종 우리의 관심 
밖에 놓여 있는 존재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도록 만든다. 
이런 사유방식이 간혹 논쟁을 유발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이 책이 여러분에게 공리주의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제공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 이 책은 
공리주의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것이 본래적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무엇인지, 공리주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론과 그것들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무엇이며, 규칙이 공리주의에서 하는 역할은무엇인지, 
그리고 공리주의가 오늘날의 실천적 쟁점들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등에 관해서 논의할 것이다.

공리주의의 핵심 사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이 세상을 
최선의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힘이 닿는 한에서 모든 개인들이 가능한 최고 수준의 
행복한 삶 (복지, well-being)‘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것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전통 도덕과 반대된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규칙 준수를 강조하는 도덕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 
준수의 결과가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지 더 나쁘게 
만드는지와 무관하게 규칙들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위를 할 때마다 어떤 대안이 최선의 결과를 낳는지를 
계산하는 것보다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의 핵심통찰은 너무나 
단순하고 매력적이다. 그래서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서 
많은 사상가들이 독립적으로 공리주의를 발전시켜왔다.

공리주의의 발전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벤담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적 견해를 처음으로 널리 알리게 만든 
저작은 1785년에 출판된 페일리 (William Paley)의 
《도덕과 정치철학(Moral and Political Philosophy)》
이었다.목사였던 페일리는 신은 우리가 모두의 행복을 
증진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신의 의지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세속적인 공리주의 저작 
가운데서는 1793년에 출판된 고드윈(WilliamGodwin)의 
『정치적 정의에 관한 탐구 (Enquiry Concerning Po-litical Justice)』가 수년 동안 벤담의 저작보다 더 많이 
알려져있었다.

벤담이 공리주의의 원리에 대한 정식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해는 1776년이다. 
그때부터 그는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헌신했다. (벤담이 
나중에 깨달았던 바와 같이 그 정식은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인구의 49%를 전적으로 불행하게 
만들고 단지 인구의 51%만을 약간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해도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을 옳은 것으로 여긴다는 
잘못된 생각을 대중들이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벤담은 ‘공리주의자‘라는 용어를 꿈속에서 
생각해 냈다고 한다. 그 꿈속에서그는 ‘한 종파의 창시자로서 매우 신성하고 중요한 존재였는데, 그 종파를 공리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780년에 벤담은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 관한 서론(Introduction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을 완성했다. 이 책은 그가 공리주의 이론을 가장 명료하게 제시한 책이다. 

벤담은 그의 법률 체계 개혁안과 형벌 개혁안으로 국제적인명성을 얻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실천적 제안 가운데 
하나는 ‘원형 감옥 (Panopticon)‘이다. 원형 감옥은 
죄수나 근로자가 자신들이 관찰당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모르도록 하면서도 그들을 항상 관찰할 수 있는 감옥 또는 
공장을 설계한 것이다. 오늘날 원형 감옥은 프라이버시를 
체계적으로 침해할 위험성 때문에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벤담은 원형 감옥의한 가지 장점으로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이 간수나 감독관의학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벤담이 1770년대부터 1820 년대까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서성적 자유를 옹호하는 수필과 소논문들을 썼다는 
것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그 당시는 새뮤얼 존슨 박사와 같이 대중들의칭송을 받는 
사상가들이 ‘비정상적인 성교의 ‘악‘을 방지하기위하여 
‘엄격한 법률의 지속적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벤담은 성의 쾌락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똑같이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성적 쾌락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맹목적 편견‘에서 비롯된 제약들을 폐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성적 취향에서의 차이는 그것이 해악을 야기한다는 것이 
입증되는 경우에만 처벌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 
처벌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성적 취향의 차이가 해악을 
낳는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다양한 저술에서 벤담은 동성애를 범죄시하는 전통적 
논증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논박하였다. 
그는 이런 저술들을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그의 사후에라도출판이 가능해지는 시대가 
오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성에 관한 서구인의 관념이 
벤담의 사상을 따라잡는 데는 한 세기 반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개혁에 대해서 공리주의가 
제공한 추동력은 여성 평등을 위한 밀의 노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벤담과 마찬가지로 밀 역시 ‘기존 
관습과 일반적 감정‘에 기초한 제도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여성의 예속의 서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들이 여성을종속적 지위에 묶어 두기 위한 유일한 
기초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해리엇 테일러는 밀의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밀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그녀는 
‘여성의 참정권‘이라는 제목을지닌 논문의 주저자였다. 
이 논문은 처음에는 1850년에 웨스트민스터 리뷰(Westminster Review)에 밀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다가, 나중에 
밀과 해리엇 테일러의 공동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해리엇 테일러는 『여성의 예속』이 출판되기 15년 전에 
사망했지만, 밀은 그 책 안에 표현된 사상의 많은 것들이
그녀와 그녀의 딸인 헬렌 테일러의 공로라고 말했다.

시지웍은 케임브리지 대학에 여성이 입학하는 길을 놓았다.
그는 최초로 ‘여성을 위한 강좌‘를 개설하고 그 강좌에 
출석하는 여성들이 기거할 집을 임대해 주었다. 
이런 노력은 여성용 기숙사인 뉴넘 홀(Newnham Hall)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또한 시지웍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시지원은 38세 되던해에 엘리너 밸푸어 (Eleanor Balfour)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지녀서 수학을 연구하기 위해 뉴넘 홀에온 학생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레일리경(Lord Rayleigh)과 공저자로 전기에 관한 세 편의 논문을 썼다. 
엘리너의 남자 형제인 아서 밸푸어 (Arthur Balfour)는 
시지웍의 학생이었다. 그는 나중에 보수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수상을 역임하였다. 엘리너는 시지웍과 함께 심령 
현상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었으며, 그들은 여성 교육의 
신장을 위해서함께 노력하였다. 엘리너는 1892년에 뉴넘 
홀이 변화된 뉴칼리지의 학장이 되었다. 시지원과 엘리너의 결혼은 주로 정신적인 결합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전적으로 정신적인 결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시지윅이 낭만적 감정을 느꼈던 대상이 남성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증거들도 있다.

19세기에 공리주의는 벤담의 독단적인 옹호론에서 시작해서시지웍의 신중하고 세련된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공리주의는 초기의 개혁의 열정을 일부 잃어버렸지만, 정치학과경제학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확보하였으며, 윤리학에 대한 하나의 합리적은 접근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시지웍의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생이었던 무어(G. E. Moore,
1873-1958)는 옳은 행동은 최선의 결과를 낳는 행동이라는 스승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쾌락 또는 행복만이 본래적 선이라는 견해는 거부하였다. 그는 여기에 우정과 
미의 감상을 독립적 가치로 추가하였다. 이런 종류의
공리주의는당시에는 ‘이상 공리주의(ideal utilitarianism)‘로 알려졌으나, 오늘날에는 간단히 일종의 결과주의로 
불린다. 그러나 무어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공리주의에 
대한 그의 공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저「윤리학 원리(Principia Ethica)』에서 오늘날 ‘메타 윤리학‘으로 
알려진 일단의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여 도덕철학의 방향을 재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기서 그는 ‘선(좋은 good)‘과 같은 도덕적 용어의 
정의에 관련되는 메타 윤리학의 독립 분과를 발전시켰다.
 20세기의 많은 기간동안에 도덕철학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 것으로 기대했던 영역은 공리주의와 그 경쟁 이론 간의 
선택과 같은 규범적 쟁점이아니라 메타 윤리학이었다.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철학의 초점이 규범 
윤리학과 응용 윤리학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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