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몸

나는 정원의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있다. 나는 ‘나무‘를 보고 
있다고나는 의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 나무를 
보고 있는 것이 ‘나‘라는 것도 의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들이 특별한 종류의 현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로 
정신적 현상들이다. 무엇이 정신적 현상들인 지는 아직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첫째, 정신적 현상은 의식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험에 대한 본능적 불안과 같은 무의식적인 정신적 현상도 있다. 또한 "내가 범인을 보았을 때, 이마의 상처를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 사진을 보여 준다면, 
나는 그 상처를 기억해 낼 수 있다"라는 말처럼,
의식적 상태는 무의식적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둘째, 정신적인 현상은 공간적이지 않다. 만일 정신적인 
현상이 사물이 아니라, 상태 혹은 속성이라면, 정신적 현상에 장소를 할당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셋째, 정신적인 현상은 개인적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은그 현상들에 대해 특별하고, 개인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 그 현상들을경험하는 사람은 그 현상들을 느낀다. 
만일 내가 불안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불안을 느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 내가 불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식하겠지만, 내가 느끼는 그대로 그 불안을 감지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불안, 기쁨, 사랑의 느낌과 같은 현상들이 
정신적 현상의 전부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은 
잔혹한 전쟁의 지휘자였다는나의 삶은 아무런 느낌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 상태는 내가 더 자세히 기술할 수 
있는 특별한 방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넷째, 정신적인 현상은 지향적이며, 명제적 태도를 가진다.
마음은 늘 무언가와 관계를 맺는다. 어떤 대상을 향해 있다. 나는 그냥 보지 않고, 나무 한 그루와 같은 특정한 무언가를 본다. 나는 단순히희망하지 않고, 어떤 특정한 것이 일어나기를 희망한다. 마음이 어떤 대상으로의 향함을 브렌타노
(1838-1917) 이래로 ‘지향성‘이라고 한다. ‘지향적 상태‘ 
혹은 ‘지향적 태도‘가 그에 상응하는 상태들이다.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에 향해진 지향적 상태와 사물의 속성과 같은 사태에 향해진 지향적 상태가 정신적 상태의 
전부는 아니다. 지향적이지 않은 정신적 상태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무엇에대해 불안해하는지 말할 
수 없지만, 불안해할 수도 있다. 혹은 그와 비슷하게 긴장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긴장에 대한 느낌은 지향적이지 않다.

명제적 태도 : 대상은 나무 한그루처럼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일 수도 있지만, "나무가 초록색 잎을 지니고 있다"와 같은 사태(속성)일수도 있다. 사태는 종속절을 통해서 
기술될 수 있다. 하나의 종속절은 하나의 명제를 표현한다. 그래서 어떠한 사태로 항해진 태도들을 ‘명제적 태도‘라고 부른다.

명제적 태도들은 내용과 상태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믿다‘ ‘의지하다‘ ‘원하다‘ ‘생각하다‘ ‘희망하다‘
 ‘무서워하다‘ ‘의도하다‘ 등이 상태에 해당한다. "나는 내일 남호를 만난다는 것", "모레 비가내린다는 것", "지구는 
둥글다는 것" 같이 주어진 사태가 내용에 해당한다. 
내용과 상태를 합하면, "내일 남호를 만난다는 것‘을 
나는 원한다"와같은 문장이 되며, 이것이 명제적 태도이다. 
사태는 틀릴 수도 있다. 실제로는 비가 내리지만, 지금 
눈이 내린다고 나는 믿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용과 상태는 다르다.

정신적 상태의 특징을 재는 단 하나의 척도는 없다. 그런 
척도가 되는 단 하나의 특징은 없다. 위에 언급한 네 개의 
특징들 중 세 개는 정신적인 상태를 비정신적인 상태와 
구분해 준다. 이 탁자는 의식의 상태가없다. 탁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 무엇으로도 지향해 있지 않다.
탁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 이 고양이는 
무언가를 지각하고, 그 지각은 무언가로 향해 있으며, 그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 즉 고양이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양이도 마음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고양이는 인간처럼 자기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양이도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존재가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의식이 필요한지, 그리고 
고양이도 그 정도의 의식들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지가 
해명되어야 한다.

영혼은 정신적인 실체이다. 실체 (substance)는 다른
것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실체는 속성들을 
붙잡고 있는담지자이다. 물질적인 실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적 실체가 있다. 이 입장을 ‘실체 이원론‘
이라고 한다. 물질과 정신이 두 실체이다.

그에 반해 이른바 ‘물질주의‘ 혹은 ‘물리주의‘는 오직 
물질적인 실체만 있다고 본다. 만일 물질주의가 옳다면, 
정신적인 속성들은 물질적인속성들로 환원되어야 한다. 
이것이 과연 가능하냐는 물음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실체 이원론-데카르트

정신적 속성들의 담지자는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정신의 본성에 대해 생각을 해 왔다. 특히 인간이 죽으면, 정신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왔다. 인간이 죽으면 존재하기를 멈춘다는 생각은 
많은 이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만일 신체의 죽음 이후에도 
정신은계속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러한 불안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신체와 다를 때에만, 
정신은 죽지 않을 것이다. 영혼은 신체와 달라서 죽지 않는다. 이를 보여 주고자 많은 철학자들이 시도했는데,
그 중 중요한 것이 플라톤 (427-347)의 대화편 「파이돈」, 데카르트(1596-1650)의 방법서설과 『성찰』이다.

실체 이원론의 핵심 주장은 정신과 신체는 서로 다른 
실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데카르트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논증: 다음과 같은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은 
기계가 가지지 않은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연 
법칙을 통해 행위가 규정되거나, 이 법칙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능력의 예로
 말하기와 지적 행위를 든다. 이 능력들은 과학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만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 능력은 과학의설명 대상인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능력들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뭔가가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정신적인 실체, 즉 영혼이다. 데카르트는 이 
능력을 가지고 인간과 동물들의 차이를 확정 짓는다. 
동물들과 달리, 우리 인간은 말할 수 있고, 지적으로 
행위할 수 있으며, 따라서 영혼을 가지고 있다. 
다른 동물들은 우리보다 더 적은 이성을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두번째 논증은 좀 더 복잡하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내가 
명석하고(lear) 판명하게(distinct) 파악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내가 명석하고 판명하게 파악하는 모든 것은 존재 가능하다.

내가 순수하게 생각하는 존재, 즉 나는 신체적 속성들 없이도 존재할 수있는 것이라고 나는 명석 판명하게 파악한다. 
정신과 신체는 다르다고나는 명석 판명하게 이해한다. 
내가 명석 판명하게 서로 구분할 수 있다면, 실제로 그것은 서로 다르다. 이로부터, 정신은 신체와 실제로 다르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따라서 정신적 실체(res cogitans)와 
연장된 실체(resextensa)가 존재한다.

반론 1

첫 번째 논증은 건전하지 않다. 몇몇 동물들은 지적으로 
행동한다. 우리는 애완용 고양이의 행동에서 이미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양이는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줄 
알고 먹고 싶을 때는울음 소리를 낸다. 우리는 고양이의 
이러한 행동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정신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

대답

데카르트의 논증은 동물들이 그 어떤 정신적 능력들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첫번째 논증은 여전히 거부될 수 없다. 인간의 능력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동물들의 능력을 넘어선다. 특히 우리는 
자기 의식을 가지며, 우리 자신을 서로 구분할 수 있는 
구별된 존재로 지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행위를 장기간에
걸쳐 계획할 수도 있다.

대답에 대한 반론

대부분의 원숭이나 다른 포유류들은 어떤 종류의 
자기의식을 가진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에 대한 이해를 
가진다. 또한 자기 자신과 미래에 대해 진술할 수 있는 
지능적 로봇과 같은인공적인 존재도 있다.

대답

그런 동물이나 로봇은 인간과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반론 2

첫번째 논증은 타당하지 (valid) 않다. 어떤 현상을 
자연과학이 지금까지 설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현상이 
비물리적원인을 가진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두뇌가 사람의 정신적 능력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 
아직은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정신적 능력들에 대한 
원인은 우리의 두뇌이다.

대답

이는 당신의 신념이지,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반론 3

두번째 논증은 건전하지 (sound) 않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은 옳지 않다. 
생각함은 신체 기능을 필요로 한다. 신체 없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다.

대답

우리는 항상 신체를 통해서만 경험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체 없이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지를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습관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몸이 없어도 
정신은 생각을 할 수 있다.

반론 4

인과적인 상호 작용의 문제가 있다. 만일 정신이 비신체적인것이라면, 정신은 신체에 인과적인 영향을 줄 수 없고, 
받을수도 없다. 그렇다면 정신은 몸의 부대 현상(Epiphänomen)이다. 존재하지만, 인과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현상에 불과할 것이다.

첫째, 정신과 신체가 접촉점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물리적 원인의 닫힘성원칙 때문이다. 몸이라는 
물질적인 것의 원인은 항상물리적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비물질적인 정신과 물질적인 신체의 인과적 상호 
작용은 불가능하다. 정신은 몸에 인과적 영향을 행사할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로 몸을 움직일 수있는 존재로 경험한다. 가령 누군가 
내 팔을 바늘로 찌른다면, 나는 통증을 감지한다. 
이처럼 실체 이원론을 반박할 수 있다.

대답 1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 사이를 이어 주는 접촉점으로 
송과선(松果線)을 제시한다. 이는 뇌의 특정 기관이다.

대답 2

만일 접촉 지점과 인과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인 개념과 
생각으로, 신체와 정신 사이의 인과적 상호작용을 기술할 
수 없다면, 이는 실재에 대한 탐구에 좋을리가 없다. 
이 경우 정신과 신체의연관성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보헤미아의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데카르트는 말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정신과 신체의 
통합을 인식하지만, 그에 대해 되씹으면서 숙고하면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정신과 육체의 상호 작용을 상식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대답 3

정신과 신체의 연관성에 대해서 라이프니츠(1646-1716)는 시계를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우리는 같은 시간을 가리키는두 개의 시계를 상상할 수 있다. 두 시계는 왜 동일한가? 
두 시계가 애초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거나, 부지런한 사람이 늘 시간을 새로 맞추거나, 처음부터 정확히 동일하게 
작동하도록 제작되었다.

이 중 어떤 것이 가장 합리적인가? 세 번째 일 것이다.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두 시계와 비교한다면, 처음부터 서로 맞게 예정되어 있다고해야 한다. 이를 예정 조화설이라 한다.

대답들에 대한 반론

대답 1은 옳지 않다. 정신과 신체는 다른 실체이기 때문에
서로 완전 분리된다. 대답 2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대답이 맞으려면 기계 신(deus ex machina)과 같은 신이 지속적으로 개입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답 3은 정신과 신체의 관계 문제이다. 정신과 신체 
사이에는 미리 예정된 조화가 있다. 정신과 신체는 신에
의해 항상 평행하게 움직이도록 설정되었다. 따라서 만일 
나의 뇌 안의특정 부위가 활성화되면, 항상 나의 정신은 
통증을 느끼고,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기를 원한다면, 
나의 신체는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신을 설정한다면, 세상에 설명하지 못 할 것이 없게 된다. 이는 반과학적, 반철학적인 태도이다.

반론 5

실체 이원론의 예정 조화설이 옳다면, 정신적인 상태는 
가지지 않지만, 우리와 완전히 똑같이 행동하는 존재가 
있을 수도 있다.

이 좀비는 우리에게 인사하고, 우리와 대화를 나누며, 
농담을 하면서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이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실체 이원론에서 정신은 존재는 
하지만 신체에 인과력을 행사할 수 없는 부대 현상이 된다. 따라서 신체로부터 독립적인 정신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대답

예정 조화설이 실체 이원론의 전부는 아니다. 물질로 
정신을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면, 물질과 정신의 두 실체를 
인정하는 이원론이 최선이다.

논리적 행동주의

몸과 마음은 ‘논리적‘ 관계이며, 마음은 몸의 ‘행동‘으로 
환원된다. 독립적인 실체로서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물질적 실체나물질(몸)만 존재한다는 가정이 남는다. 물질주의는 라메트리 (1709-1751)가 그의 저서 
《인간 기계》에서 제시했다. 그러나 물질주의는 
20세기가 되어서야 널리 지지받는 대세가 되었다.

물질주의는 정신적인 속성이 물질적인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라는 헤어나기 어려운 
난제에 직면한다. 아래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세 개의 
대답과 이에 따르는 물질주의의 버전들을 소개하겠다.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고한 대세가 된다. 따라서 정신의 실체를 부정하고, 몸을 실제하는 것으로 본다.

논리적 행동주의, 동일성 이론, 무법칙적 일원론이 그것이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과 라일(1900-1976)이 가장 
중요한 주창자인 논리적 행동주의는 첫째, 정신적 속성들이 행동으로 환원될 수 있다.

둘째,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 사이의 관계는 논리적 
혹은 개념적인방식이라고 주장한다. ‘논리적으로 정신적 
속성들은 특정한 ‘행동‘으로바꾸어서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논리적 행동주의‘라 한다.

첫째, "정신이 행동으로 환원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논리적 행동주의에 따르면, 정신 혹은 정신적인 것에 대한 
설명들은 단순한 행동에 대한 진술이 아닌, 상세한 행동 
성향에 대한 언급들로 번역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통증을 느낀다"라는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울거나 
신음을 하거나,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행동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논리적으로 바꿀 수 있다.

물론 누군가는 자기 억제를 하여 그런 어떤 행동 성향도 
보여 주지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연극이라면, 통증이 
없는데도 몸을 웅크리며 아픈 척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통증을 가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특정한 행동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즉 특정한 행동 성향을통증을 가진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그 상황을 직관적으로 설득력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가 통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행동에 있어서는 통증에 상응하는 성향을 보이지 않고, 
지극히정상적으로 행동한다면, 그가 통증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어렵다. 결국 정신적인 현상에 대한 표현은 특정한 
행동 성향들로 바꾸어서 말해야 한다. 이렇게 환원되어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의 관계는 인과적이지 
않고, 논리적 혹은 개념적이다. 논리적 경험주의 두 번째 
주장은 무슨 뜻인가?

정신적인 현상에 주목할 경우, 우리는 종종 특정한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르게 표현하곤 한다. 예를 들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기를 원했기 때문에, 윤희는 창문을 열었다" 
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흔히 그녀의 의지가 그 행동의 원인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에 대한 표현들은 행동 성향들로 환원된다는 논리적 행동주의자들의 주장을 따른다면, 이는 틀렸다. ‘의지‘는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특정 행동은 그 행동에 대한 성향으로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논리적 행동주의의 설명은 인과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특정 행동 성향에 대한 개념은 행동의 
개념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성향에 대한 기술은 정확하게 행동과 연계되어 있다. 
만일 두 개의 사건들이 논리적으로 서로 독립적이지 않으면, 하나는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이에 어떤 논리적 행동주의자들은 재해석해서 말한다. 
행동성향에대한 설명은 "설탕은 물에 용해된다. 왜냐하면 
설탕은 수용성 (물에 녹는성질)이기 때문이다"와 같은 
종류의 설명이므로 인과적인 설명이 아니다.

이 역시 문제이다. 수용성은 설탕의 용해에 대한 원인이 
아니라, 설탕의 성향에 불과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동 
성향은 원인이 아니다.

반론 1

정신적인 것에 대한 모든 문장들을 행동 성향에 대한 
문장들로 대체하려는 논리적 행동주의의 프로젝트는 
성사될 수 없다. 그들의 주장에 따라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남호는 맥주를 원한다"는 무슨 뜻인가? 이 문장은
 "남호는 맥주를 마신다"로 대체될 수 있을까?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남호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으면서도, 맥주를
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한다고 꼭 마시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남호는 맥주를 보고,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로 번역할수 있을까? 이 조건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눈을 반짝임은 맥주를 마셨을 때일 수도 있지만, 친구와 
대화했던 기억 때문일 수도 있다. 이처럼 다른 원인을 
가질 수도 있다.

정신을 행동 성향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는 이처럼 
아주 간단한 경우에서부터 실패하는 것 같다. 
이웃 국가의 정치적 위기에 대한 배경 정보를 알고자 하는 
욕구와 같은 복잡한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대답

우리는 더 간단한 상황들을 통해서 명제적 태도에 대한 
설명을 시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한 생명체의 감각 
기관이 어떻게 구조 지어졌는지 안다면, 생명체의 직접적인 주변 조건에 대한 기술을 통해서, 그 생명체가 어떤 정신적 상태를 가지고 있는지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호가 눈을 뜨고, 맥주 앞에 선다면, 그가 맥주를 보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또한 남호가 몇 시간 전부터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남호가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할 수 있다. 

이런 욕구들과 남호가 맥주 앞에 서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남호가 맥주를 원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반론 2

정신적인 현상과 행동 성향 사이의 개념적인 연관성에 
대한앞의 비판적 논증은 건전 (sound) 하지 않다. 
성향은 원인의 한 부분이다. 설탕의 수용성은 왜 특정 
분량의 설탕만 물에 녹는지에 대한 원인의 한 부분이다. 
이처럼 정신적인 현상은 그것이 성향이라는 가정하에서 
그 자체로 행동의 원인일 수 있다.

정신 현상을 행동 성향으로 바꾸는 것은 원인ㆍ결과라는 
관점과는아무 상관이 없다. 우연히 행동 성향이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부차적인 것이다.

반론 3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신체에 인과적 영향을 행사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정신과 행동 사이의 인과적 상호 작용을 매일 
경험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논리적 
행동주의는 옳지 않다. 실체 이원론처럼 논리적 행동주의 
역시 정신적인 것을 부수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 
이는 정신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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