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는 얼마나 추울까,
환영이 사라지고 질려버린 현실주의자가
현실을 처음 보는 순간 치명적인 ‘아니오‘는
공허할 뿐 아니라 비극으로 끝나리하지만 
비극은 이미 시작했으리,
다시, 상상이 새로이 시작될 때,
‘예‘라고 말해야 해서,
모든 ‘아니오‘ 아래결코 무너지지 않은 ‘예‘의 열정이 있어서,
현실주의자가 ‘예‘라고 말할 때.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악의 미학Esthétique du Mal>

성격이 없으면, 방법이라도 써야 한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전락La Chute》

도덕철학의 목적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의 운명에 결박되어 있다. 그리고 진지한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는 도덕철학이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희망도, 설사 철학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리라고 합당하게 희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도덕철학이 출발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선할 수 있는가?"나 심지어 "우리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보다 나은 질문이다. 이런 질문들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당연한 듯 전제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 전제된 것이 무엇인지 의견을 같이하지 
않을 것인데도 말이다. 마지막 질문[행복에 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고 해보자. 첫 번째 질문[의무의 질문]에서 출발하고 싶어 하는 일부 사람들은, 마지막 질문이 잘못된 장소에서 출발하며 그래서 도덕의 독특한 쟁점을무시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먼저 답을 얻을 가능성을 오히려 낙관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그 쟁점을 비롯해 많은 쟁점들에 
관하여 중립적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아무것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제일 처음 해야 하는 일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그리고 만일그 질문을 유익하게 
던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전제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How should one live" - 주체 one의 일반성이이미 주장을 고정시킨다. 
그리스의 언어는 우리에게 주체를 언급하지도 않는다. 
그 질문은 특정 개인을 언급하지 않고 모든 개인에게
적용되도록 표현되었다. 그런 표현은 누구에게나 관련 
있거나 유용한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음을 합의한다. 
그리고 이것은 무언가 일반적인 것, 즉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을 던지게 하는 개개인의 관심을 
수용하거나 형성하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음을 함의한다. 
(더 큰 혐의를 이 일반성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더 큰 함의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자아ego 의 관심을 넘어서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나중에 다시 살펴볼 것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일상적인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을 넘어서는 한 측면이다. 

또 하나의 함의는 그 질문이 즉각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 질문은 내가 지금 또는 바로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식manner of life에 
관한 질문이다. 그 질문이 결과적으로 전체 삶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으며 좋은 삶의 방식은 인생의 마지막에 좋은 삶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삶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이념에, 
그리스인 본인들이 큰 인상을 받았다. 가장 좋은 모습의 
삶으로 보이던 것을 망가뜨리는 운의 힘에 깊은 인상을 
받은 까닭에, 그들 중 일부는 운의 힘을 줄이고 운으로부터 가급적 가장 자유로운 삶을 사는 합리적 기획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런 기획을 추구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이 기획은 상이한 형태이긴 하지만 이후의 사고에서도 
하나의 목표로 생각되었다. 이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전체 삶a whole life 에 관해 생각해야만 한다는 이념은, 우리 
중 일부에게는 소크라테스에게 강력했던것만큼 강력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여전히 전체로서 asa whole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며 압박한다. 설사 우리가 삶이 어떻게 끝날지에 관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이 부여했던 만큼의 무게를 두지 않는다 할지라도, 삶의 모든 측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반성을 요구하는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사람은 해야 한다 one should "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의 이 구는 [영어 번역과는 달리] 원래 비인칭 형식이므로 
논의되고 있는 삶이 누구의 삶인가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질문에 적용되어야 하는 고려사항의 
종류에 관하여도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언질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 논의를 매우 
풍부하고 유익하게 만든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나는 도덕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내가 언급했던 의무에 관한 질문이나선한 사람의 삶에 
대한 질문들과는 다른 출발점이 된다. 

그 질문은 좋은 삶the good life, 살 가치가 있는 삶a life 
worth living에 관한 질문과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관념 자체는 아무런 독특한 도덕적 주장을 들여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믿었고 우리 대부분이 
여전히 그렇게 희망하고 있는 것처럼, 좋은 삶이 선한 
사람의 삶이기도 하다고 판명될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좋은 삶이 선한 사람의삶임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좋은 삶이 선한 사람의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대부분의 희망하는 바이다.) 

그러나 만일 좋은 삶이 선한 사람의 삶이기도 하다면, 
그 결론은 나중에야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해야한다는 
단적인 해야 한다일 뿐이며, 이 매우 일반적인 질문에서의 
‘해야 한다‘는 그 자체로는 여느 일상적이고 무심한 질문인 
"지금 무엇을 해야 되지?"에서의 ‘해야 한다‘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몇몇 철학자들은 우리가 이 일반적이거나 불확정적인 
종류의 실천적 질문에서 시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what should Ido?", "내가 사는 가장 좋은 방식은 무엇인가?" 등등과같은 질문들은 
애매하며 도덕적인 뜻과 도덕과 무관한 뜻을 함께 지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의미의 분석은 의미의 범주로서 "도덕적인"과 "도덕과 
무관한"을 요건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를 들어 화자가, 그가 군대 돌격대 임무를 수행하기에좋은 사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임을 의미했는지를 물을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군사상의 뜻을(또는 미식축구상의 뜻 등등을) 산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뜻의 "좋은" 또는
 "좋은 사람을 산출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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