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미덕은 남용될 수 없다. 게다가 사실 그는더 강한 어떤 것을 주장했다. 즉 사람들이 특정 미덕을 가졌기 때문에 그 미덕을 가지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쁘게 행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기본적으로 오직 하나의 미덕, 즉 올바른 판단의 능력the power of right judgment이라는 미덕만 있다고 믿었고 그런 믿음에 일관성이 있을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점에서 소크라테스를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점으로, 우리는 이 이념들[특정 덕을 가졌을 때의 행위가 그 덕을 가지지 못했을 때의 행위보다 나쁠 수 없다는 이념 및 궁극적으로 올바른 판단의 미덕이라는 하나의 미덕만 있다는 이념]에 동기를 부여했던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를 따라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개인의 삶에 있는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 모든 가능한 여건에서도 좋은 것에 대한 추구이다. 그 추구는 근대의 표현도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중 하나를 도덕이 특별히 몰두하는 것the special preoccupations of morality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다.
미덕 함양의 문제는, 만일 그것이 일인칭의 숙적 훈련으로 이해된다면, 오히려 당신의 사고가 충분히 당신 자신을 향하지않는다는 것이다. 미덕의 면에서 당신의 가능한 상태를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행위들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당신의 행위들에 관하여 당신이 생각할 수 있거나 생각해야 하는 면에 대해 두드러지게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당신의 행위들에 관하여 생각하는 그 방식에 대해 타인들이 기술하거나 논평을 할 수도 있는 방식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 숙고의 본질적 내용을 나타낸다면, 그것은 정말로 윤리적 주의를 잘못된 쪽으로 돌린 것 a mis-direction of the ethical attention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교훈은미덕이 중요한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보다는, 윤리적 개념의 중요성은 그 개념이 일인칭 숙고의 요소가 됨에 놓여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관대하거나 용감한 사람들의 숙고, 그리고 더 관대하거나 더 용감해지고자 하는 이들의 숙고는 그렇지 않은사람들의 숙고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 차이는 자신들이 관대함이나용기 면에서 어떠한지 생각한다는 점에서 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질문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기주의는, 날것 그대로의 몹시 사리적인 답이긴 하지만, 어쨌건 그 질문에 대한 지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답이다. 비록 우리 대부분은 이기주의를 거부하는 성향이 있겠지만 말이다. "윤리적"이라는 단어를,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한 지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답변을 제시할 삶의 계획이라면 어느 것에나 사용할 수도 있다. 그렇게 "윤리적"을 최대의 폭넓은 뜻으로 사용하면, 가장 노골적인 이기주의조차 윤리적 선택지가 될 것이다. 나는 우리가 그 용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에는 아무리 모호할지라도) 우리 및 우리의 행위를 요구, 필요, 주장, 욕구, 그리고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과 이해할 만하게 연관짓는 윤리적인 것의 관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윤리적 고려사항이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에서 이렇게 우리 자신의 요구 등과 다른 사람의 삶을 연관짓는 관념을 보존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나 이기주의는 그 가장 노골적인 형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매우 헷갈리게도 윤리적 이기주의 ethical egoism라고 불려온, 우리가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의 이론이 있다.
윤리적 이기주의는 각자가 사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리적이기주의는 반성적인 입장이며 사람들의 이익에 관한 일반적 견해를 취하기 때문에 노골적인 이기주의와는 다르다. 우리가 윤리적 이기주의를(그것이 자칭하는 대로) 윤리 체계로 부르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윤리적 이기주의가 윤리적 고려사항이라는 이념에 어떻게 기여하는가가 중요한 질문이다.
처음 보기엔 윤리적 이기주의는 윤리적 고려사항이라는 이념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각자가 윤리와 무관한 고려사항들nonethical considerations에 따라 행위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윤리적 이기주의가 그것만 말한다면, 그저 독단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실제로는 사리 이외의 고려사항들에따라 행위한다면, 무엇이 그들이 그렇게 행위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가?
윤리적 이기주의가 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사실 윤리적 고려사항의 역할을 열린 채로 두는 일이다. 그리고 윤리적 고려사항들을 따르는 행위를 포함하는 삶이 사리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묻는 것이다.
윤리적 고려사항의 역할을 열린 채로 두는 윤리적 이기주의와 상당히 비슷하게 보이지만 이와는 다른 또 하나의 견해가 있다. 이 견해 역시 일어나야 마땅한 것은 각자가 사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무엇인가 일반적인 것을 주장한다. 이 견해는 행위하면서 고려에 넣는 고려사항을 불안정하게 하는 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견해는 일상적인 뜻에서 윤리적인 고려사항을 도입할 수도 있다.
만일 사람들이 각자의 사리를 추구하는 것이 일어나야 마땅한 것이라고 내가 믿는다면, 내가 할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 것 하나는 각자가 사리를 추구하는 사태를 증진하는 것이며,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정책을 채택하는 것을 내가 도와주는 일은 포함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노선의 행위가 내가 나 자신의 사리만 그저 추구하는 것과 충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야 하는 것이 사람들이 그들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날것 그대로의 믿음을 지탱하는 일은 꽤나 어렵다. 이 믿음을 다른 고려사항으로 지지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 다른 고려사항이란, 각자가 모두 그렇게 한다면 가장 좋으리라는 고려사항이다it is for the best if everyone does that.
이 고려사항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려는 시도는 일어나야 할 사태가 무엇인지 혼동을 줄 뿐이다‘와 같은 말을 하는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논하면서도 실제로 어떤 다른 윤리적 고려사항, 예를 들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좋다는 것 같은 고려사항도 받아들여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능한 한 많이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믿음은 물론 19세기 초에 주장되었던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데사용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20세기 말에도 모든 경제 체계가사람들이 사리를 넘어서는 성향을 갖는다는 사실에 의존한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런 믿음을 주장한다. 아마도 이 모순은 왜 자유방임주의의 몇몇 옹호자들이 자신의 사리를 추구하는 데 실패하고있는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설교조의 강연을 하는 경향이 있는지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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