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는 도덕적 사유의 경계를 탐색하도록 우리를 밀어붙인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종종 우리의 관심 밖에 놓여 있는 존재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도록 만든다. 이런 사유방식이 간혹 논쟁을 유발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이 책이 여러분에게 공리주의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제공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 이 책은 공리주의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것이 본래적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무엇인지, 공리주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론과 그것들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무엇이며, 규칙이 공리주의에서 하는 역할은무엇인지, 그리고 공리주의가 오늘날의 실천적 쟁점들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등에 관해서 논의할 것이다.
공리주의의 핵심 사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이 세상을 최선의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힘이 닿는 한에서 모든 개인들이 가능한 최고 수준의 행복한 삶 (복지, well-being)‘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것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전통 도덕과 반대된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규칙 준수를 강조하는 도덕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 준수의 결과가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지 더 나쁘게 만드는지와 무관하게 규칙들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위를 할 때마다 어떤 대안이 최선의 결과를 낳는지를 계산하는 것보다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의 핵심통찰은 너무나 단순하고 매력적이다. 그래서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서 많은 사상가들이 독립적으로 공리주의를 발전시켜왔다.
공리주의의 발전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벤담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적 견해를 처음으로 널리 알리게 만든 저작은 1785년에 출판된 페일리 (William Paley)의 《도덕과 정치철학(Moral and Political Philosophy)》 이었다.목사였던 페일리는 신은 우리가 모두의 행복을 증진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신의 의지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세속적인 공리주의 저작 가운데서는 1793년에 출판된 고드윈(WilliamGodwin)의 『정치적 정의에 관한 탐구 (Enquiry Concerning Po-litical Justice)』가 수년 동안 벤담의 저작보다 더 많이 알려져있었다.
벤담이 공리주의의 원리에 대한 정식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해는 1776년이다. 그때부터 그는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헌신했다. (벤담이 나중에 깨달았던 바와 같이 그 정식은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인구의 49%를 전적으로 불행하게 만들고 단지 인구의 51%만을 약간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해도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을 옳은 것으로 여긴다는 잘못된 생각을 대중들이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벤담은 ‘공리주의자‘라는 용어를 꿈속에서 생각해 냈다고 한다. 그 꿈속에서그는 ‘한 종파의 창시자로서 매우 신성하고 중요한 존재였는데, 그 종파를 공리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780년에 벤담은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 관한 서론(Introduction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을 완성했다. 이 책은 그가 공리주의 이론을 가장 명료하게 제시한 책이다.
벤담은 그의 법률 체계 개혁안과 형벌 개혁안으로 국제적인명성을 얻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실천적 제안 가운데 하나는 ‘원형 감옥 (Panopticon)‘이다. 원형 감옥은 죄수나 근로자가 자신들이 관찰당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모르도록 하면서도 그들을 항상 관찰할 수 있는 감옥 또는 공장을 설계한 것이다. 오늘날 원형 감옥은 프라이버시를 체계적으로 침해할 위험성 때문에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벤담은 원형 감옥의한 가지 장점으로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이 간수나 감독관의학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벤담이 1770년대부터 1820 년대까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서성적 자유를 옹호하는 수필과 소논문들을 썼다는 것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그 당시는 새뮤얼 존슨 박사와 같이 대중들의칭송을 받는 사상가들이 ‘비정상적인 성교의 ‘악‘을 방지하기위하여 ‘엄격한 법률의 지속적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벤담은 성의 쾌락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똑같이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성적 쾌락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맹목적 편견‘에서 비롯된 제약들을 폐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성적 취향에서의 차이는 그것이 해악을 야기한다는 것이 입증되는 경우에만 처벌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 처벌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성적 취향의 차이가 해악을 낳는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다양한 저술에서 벤담은 동성애를 범죄시하는 전통적 논증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논박하였다. 그는 이런 저술들을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그의 사후에라도출판이 가능해지는 시대가 오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성에 관한 서구인의 관념이 벤담의 사상을 따라잡는 데는 한 세기 반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개혁에 대해서 공리주의가 제공한 추동력은 여성 평등을 위한 밀의 노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벤담과 마찬가지로 밀 역시 ‘기존 관습과 일반적 감정‘에 기초한 제도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여성의 예속의 서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들이 여성을종속적 지위에 묶어 두기 위한 유일한 기초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해리엇 테일러는 밀의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밀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그녀는 ‘여성의 참정권‘이라는 제목을지닌 논문의 주저자였다. 이 논문은 처음에는 1850년에 웨스트민스터 리뷰(Westminster Review)에 밀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다가, 나중에 밀과 해리엇 테일러의 공동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해리엇 테일러는 『여성의 예속』이 출판되기 15년 전에 사망했지만, 밀은 그 책 안에 표현된 사상의 많은 것들이 그녀와 그녀의 딸인 헬렌 테일러의 공로라고 말했다.
시지웍은 케임브리지 대학에 여성이 입학하는 길을 놓았다. 그는 최초로 ‘여성을 위한 강좌‘를 개설하고 그 강좌에 출석하는 여성들이 기거할 집을 임대해 주었다. 이런 노력은 여성용 기숙사인 뉴넘 홀(Newnham Hall)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또한 시지웍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시지원은 38세 되던해에 엘리너 밸푸어 (Eleanor Balfour)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지녀서 수학을 연구하기 위해 뉴넘 홀에온 학생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레일리경(Lord Rayleigh)과 공저자로 전기에 관한 세 편의 논문을 썼다. 엘리너의 남자 형제인 아서 밸푸어 (Arthur Balfour)는 시지웍의 학생이었다. 그는 나중에 보수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수상을 역임하였다. 엘리너는 시지웍과 함께 심령 현상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었으며, 그들은 여성 교육의 신장을 위해서함께 노력하였다. 엘리너는 1892년에 뉴넘 홀이 변화된 뉴칼리지의 학장이 되었다. 시지원과 엘리너의 결혼은 주로 정신적인 결합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전적으로 정신적인 결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시지윅이 낭만적 감정을 느꼈던 대상이 남성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증거들도 있다.
19세기에 공리주의는 벤담의 독단적인 옹호론에서 시작해서시지웍의 신중하고 세련된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공리주의는 초기의 개혁의 열정을 일부 잃어버렸지만, 정치학과경제학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확보하였으며, 윤리학에 대한 하나의 합리적은 접근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시지웍의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생이었던 무어(G. E. Moore, 1873-1958)는 옳은 행동은 최선의 결과를 낳는 행동이라는 스승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쾌락 또는 행복만이 본래적 선이라는 견해는 거부하였다. 그는 여기에 우정과 미의 감상을 독립적 가치로 추가하였다. 이런 종류의 공리주의는당시에는 ‘이상 공리주의(ideal utilitarianism)‘로 알려졌으나, 오늘날에는 간단히 일종의 결과주의로 불린다. 그러나 무어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공리주의에 대한 그의 공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저「윤리학 원리(Principia Ethica)』에서 오늘날 ‘메타 윤리학‘으로 알려진 일단의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여 도덕철학의 방향을 재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기서 그는 ‘선(좋은 good)‘과 같은 도덕적 용어의 정의에 관련되는 메타 윤리학의 독립 분과를 발전시켰다. 20세기의 많은 기간동안에 도덕철학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 것으로 기대했던 영역은 공리주의와 그 경쟁 이론 간의 선택과 같은 규범적 쟁점이아니라 메타 윤리학이었다.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철학의 초점이 규범 윤리학과 응용 윤리학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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