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성과 도덕성

1.칸트(Immanuel Kant)

칸트의 실천철학에서 유래되고 있는 다음의 말을 읽어보자.

"모든 입법은 (그것이 의무로 삼는 행위와 관련해서는 
서로 일치할 수 있으나, 다시 말해서 행위는 모든 경우에 
외적일 수 있으나) 동기와 관련해서는 구별된다. 
하나의 행위를 의무로 삼고 또 이 의무를 동기로 삼는 
입법은 ‘윤리적‘이다. 그러나 이 후자를 법칙 속에 
포함시키지 않고, 따라서 의무 자체의 이념과는 다른 
동기도 허용하는 입법은 ‘법적‘인 것이다."
 또한 "우리는 행위의 동기에 대한 고려 없이 하나의 
행위와 법칙의 단순한일치 혹은 불일치를 ‘합법성‘이라고 
하며, 반면에 법칙에 대한 의무의 이념이 동시에 행위의 
동기가 된 그러한 행위와 법칙의 일치 또는 불일치를
‘도덕성‘이라고 한다." - P8

칸트는 법과 도덕을 단순히 대상에 따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도덕의 구별은 오로지 ‘동기‘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즉, 법은 어떠한 행위도 그것이 합법적인 이상 
그 동기는 문제 삼지 않으며, 도덕은 도덕적 의무감을 
행위의 동기로서 요구한다. 내용적 관점보다 형식적 
측면을 고려한 사고를 볼 수 있다. 즉, 입법의 대상은 법적 
영역이나 도덕적 영역이나 차이가 없을 수 있다. 
다만, 도덕은 행위의 동기를 행위에 대한 의무감으로 
한정하지만, 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 P9

2. 약속에서 도덕과 법

예를 들면, "약속은 지켜야 한다(Pacta Sunt Servanda)"
라는 사실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도덕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약속에 대한 의무감에 의한 행위일 것을 필요할것이다. 

하지만 법에서는 그러한 동기는 문제 삼지 않는다. 
실제로 채무자는 의무감에서 채무를 이행하든, 신용의 
손상이 두려워 변제를 하든, 혹은 강제집행보다 자발적 
이행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여 이행하든 법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변제를 하면 그것으로 종결하게 된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P9

3. 소결

도덕성과 합법성의 구별은 오늘날에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도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법은 합법한 행위에 대하여는 동기를 문제 
삼지 않지만, 위법한 행위에 대하여는 그 동기를 문제 삼아 
법적 평가를 달리한다. 심지어 그 동기가 어떠한가에 따라 
합법성 여부가 결정되기도 한다. - P10

이러한 심리적 동기의 중요성은 특히 형법에서 
잘 나타난다. 즉, 고의와 과실의 구별, 영득의 의사, 
이익의 의사, 가혹한 심정 등이 행위의 구성요건
해당성과 책임성의 판단에서 중요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민법에서도 그러한 면은 나타난다. 즉, 순전한 
악의의 권리남용은 설사 그것이 합법적인 형태를 
띠더라도 무효이며, 또 객관적으로는 불법은 아니지만 
법망을 피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악의의 탈법행위
또는 제재의 대상이 된다. - P10

강제성과 비강제성

법과 도덕을 구별하는 징표로 강제성과 비강제성을 
들 수 있다. 법은 국가나 기타 집단적인 조직의 강제기구를 동원하여 자기의 명령을실현시킬 수 있다. 
반면, 도덕은 법과 같은 강제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 P11

1.예링

법과 도덕의 문제를 법철학의 난제 중의 난제라고 했던 
예링 또한"법의 강제성과 도덕의 비강제성‘을 주장하였다. 
예링(Rudolf von Jhering,1818~1892)은 법을 "하나의 
국가 내에서 효력을 갖고 있는 강제규범의 총체"라고 
주장하며, 사회가 설정한 규범들 중 법이라는 이름을 
가지려면, 그것은 ‘강제‘, 다시 말하면, 국가가 법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에 ‘국가강제‘를 배후에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법의 기준으로는 국가권력에 의한 승인과 실현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링은 다음과 같이말한다. - P11

"국가에 의해 집행되는 강제는 법의 절대적 기준을 이루며, 강제 없는 법규란 그 자체가 모순이며, 다시 말해서 타지 
않는 불, 비추지 않는 빛인 것이다. 이러한 강제가 ‘법관‘에 
의하여 집행되는 ‘행정관청에 의하여 집행되든 상관없다. 
이러한 방법으로 실현되는 모든 규범들이 법이며, 다른
모든 규범들은 비록 그것들이 생활 속에서 사실상 어김없이 준수된다 할지라도 법은 아닌 것이며, 이들은 국가적 강제의 외적 요소가 덧붙여질 때 비로소 법이 되는 것이다." - P12

2.켈젠

켈젠(Kelsen Hans, 1881~1973)은 법의 강제성을 특히 
강조한다. 강제성을 제시하면서 도덕과 구별되는 법의 
기준으로 삼았다. 법의 강제성과 관련하여 켈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P12

"강제질서로서 법은 다른 사회질서와 구별된다. 
강제요소, 다시 말해서사회 침해적 사실의 효과로서 
질서가 정해 놓은 행동(강제)은 당해인의 의사에 
반할지라도, 그리고 저항을 한다고 할지라도, 물리력을 
사용해서라도 집행된다는 점이 특징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법과 도덕의 구별은이 두 개의 사회질서가 ‘무엇‘을 
요구하고 또 금지하는가 하는 점에서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일정한 인간행위를 요구하고
금지하는가‘ 하는 점에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법과 도덕의 본질적구별은 우리가 법을 강제질서로서 
파악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정한 
행위를, 그 반대되는 행위에 조직된 강제행동을 
가함으로써, 유발하려는 규범적 질서를 법으로 파악한다. 

반면, 도덕은 그러한 제재를규정하고 있지 않는 하나의 
사회질서로 파악한다. 도덕은 규범에 맞는 행동에 대하여는 독려하고, 그렇지 않은 행위는 비난하는 것일 뿐, 
어떤 행위를 제재하기 위하여 물리력의 사용은 생각하지 
않는다." - P13

켈젠의 입장은 법과 도덕을 그 내용의 측면이 아니라 
형식적인 관점에서 구별하려는 것이다. 법과 도덕을 
강제성과 비강제성의 징표로서 구별하려는 켈젠의 
입장은 현실주의자에게는 법의 장점이자 가치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P13

3. 소결

강제를 법의 모든 경우에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들면, 민사상 위법행위라 
할지라도 당사자의 요청이 없으면 발동되지 않으며, 
강제적 소구가 허용되지 않는 자연채무도 존재한다. 
또한 강제성이없는 훈시규정이라든가 임의규정들은 
강제성이 없는 규정들에 해당되는 것이고, 
실효성이 결여된 상징적 혹은 장식적 법규들도 
없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법의 강제는 가능적 강제, 즉 법원과 집행기관의 
개입과 도움에의한 전체적이고 일반적인 ‘강제 가능성‘으로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강제성과 비강제성은 법과 도덕을 구별하는 유용한 
기준이 되는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법과 도덕을 형식적으로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 P13

결론

법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질서를 위해 존재하고 감정이 
최소한의 배제된 규범이라면, 도덕은 외부에서 정해준 
규범이 아닌 자신의 가치관, 마음, 생각을 기초로 하여 
발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법이 전후의 맥락과는 
관계없이 금지라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면, 도덕은 
어떤 행동이 나의 생각에 올바른 행위인가 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도덕은 때로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규범이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살생을 금하고자 하는 자신의 도덕적 신념,
또는 종교적 믿음으로 인해 ‘양심적 병역 거부‘를 들 수 있다. 이는 법적으로도 불법이고, 사회 전체의 질서와 안녕을 
고려했을 때는 옳지 못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당사자 
개인에게는 옳은 행동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도덕과 혼동하기 쉬운 개념으로 ‘윤리‘를 들 수 있다.
도덕이 개인이 가진 신념이나 내면의 감정을 중심으로 
하여 발현된다면, 윤리는 판단의 주체가 ‘내가 아닌 
우리의 영역이 된다. 이런 점에서 법과윤리는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하겠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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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사론과 의사결정론

인간관에 있어서 구파의 자유의사론과 신파의 
의사결정론은 형법학에서 뿐만이 아니라 철학, 신학, 
윤리학, 심리학 등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고구(考究)해 
온 주제로서 아직도 다툼이 있다.

절대적 자유의사를 인정하는 구파의 입장은 구체적인 
범죄에 있어서 인간이 소질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점에서 비판을받고 있다. 
또한 신파는 인간이 숙명적으로 결정되는 측면만을 보고, 
오로지본능의 지배를 받는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충동을 
억제하고 자신의 가치관에따라 행위를 조종할 수 있으며 
목적과 의미를 추구하는 주체적 존재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P72

자유의사를 둘러싼 이제까지의 방대한 연구성과를 돌이켜 보면, 증명될 수없는 문제를 가지고 과도한 연구의욕을 
보이는 것은 비생산적인 관념론에 도취할 염려가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따라서 엄밀한 증명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상대적인 범위 내에서" 인간의 자유의사를 책임론의 
출발선상에 놓고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기도 하고 
또한 필요하기도 하다. - P72

인간은 소질과 환경의 "제약"을 받기는 하지만 "결정" 
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소질과 환경의 제약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롭게 의사를 결정하여 
행동하고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질 줄 아는 주체적 존재이다.

- P72

자유와 책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자유없는 책임은 없다" 라는 명제는 형법에서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절대적 자유의사가 아니라 
"상대적 자유의사"가 인정된다고 하겠다(상대적 자유의사론, 연성결정론(軟性決定論, soft determinism)). - P72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역사적으로 보아 객관주의는 계몽사상의 개인주의 · 
자유주의를 신봉하여 국가형벌권의 제한과 인권보장을 
목표로 하였으나, 개인의 자유보장을 중시한 나머지 
형법의 사회방위기능을 소홀히 한 문제점이 있었다.

이에 반하여 주관주의는 사회위주의 전체주의사상에 
기초하여 범죄로부터의 사회방위에 치중한 나머지 
개인의 자유보장을 위태롭게 한 문제점이 있었다.

근본적으로 범죄는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의 양자가 
결합되어 있는것이므로, 범죄에 대한 기본관념도 객관적 
요소인 행위 및 결과와 주관적 요소인 범죄의사 및 
반사회적 성격을 종합한 가운데 제시되어야 할 것이고, 
두요소 중 어느 하나에 치중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고 
하겠다. - P72

응보형주의와 목적형주의 및 결합설

응보형주의와 목적형주의, 그리고 일반예방주의와 
특별예방주의는 각각 형벌의 본질과 목적을 밝힘에 
있어서 어느 일면만을 강조한 단점이 있으므로, 
오늘날에는 두 학파의 대립을 지양하고 그 장점을 
결합하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형벌은 그 본질상 범죄에 대한 홍보로서 책임주의는
 ‘범죄행위‘에 상응한 책임(행위책임)을 요청하고 있고, 
또한 정당한 형벌이란 범죄와 행위책임에 상응한 형벌을 
의미한다. 형법의 자유보장적 기능은 행위책임을 
한도로 할 때 지켜진다는 점에서 구파의 장점이 있다. 

행위자의 범죄적 위험성을 근거로 한 성격책임
(행위자책임)과 사회방위만을 목적으로 
한 형벌은 은연중에 과잉처벌로 나아갈 위험성을 안고 있다.
- P73

그렇지만 형벌은 형벌 그 자체로 끝나서는 안되고 
범죄로부터 사회를 방위하기 위한 목적에 기여할 때에 
비로소 그 실천적 의의가 있는 것이므로, 행위책임을 
한도로 해서 이번에는 일반예방과 특별예방이라는 
신파의 형벌목적과 접목되어야 한다.

입법자나 법관 · 검사 · 교도관과 같은 법집행자는 
일반인의 범죄예방과 범죄인의 교정을 위하여 무엇이 
가장 효과적인 형벌수단인가 하는 합목적성의 검토에 
항상 고심해야 할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자면, 정당한 형벌이라는 관점에서 
행위책임(응보형주의)을 형벌의 ‘상한‘으로 하고, 
‘효과적인 형벌이라는 관점에서 일반예방목적과 
특별예방목적(목적형주의)을 형벌의 ‘하한‘으로 
활용한다는 것이 된다.

이러한 절충적 입장을 결합설(또는 합일설)이라고 하여, 
현재 다수의 학자가 지지하고 있다. - P73

현행형법의 입장

형법학파의 대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서히 
약화되고 두 학파를절충해야 할 이론적 필요성도 깨닫게 
되어, 오늘날은 그 대립이 거의 종식된 단계에 이르렀고 
역사적 의의로서 반추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두 학파가우리에게 범죄와 형벌에 대한 기본관념을 
심어 주고 개별적 형법문제의 해결을 지도하는 형법사상을 제공해 준 근본적 의의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현행형법도 ‘절충적‘ 입장에서 한편으로는 객관주의
(응보형주의)에 입각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광범위하게 주관주의(목적형주의)를 도입하고 있다. - P74

현행 형법이 단순한 범죄의사나 행위자의 위험성만에 
대하여 처벌하지 않고, "..…행위를 한" 자를 요건으로 
하여 처벌하는 것은 행위형법, 즉 객관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예비 • 음모를 
처벌하는 것은 주관주의에 가까운 태도이다. 

특히 현행형법이 미수범에 대하여 기수범과 구별하고
 ‘예외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객관주의적 표현이고, 
미수범의 처벌을 기수범의 형에 대해 필요적 감경이 
아니라 임의적 감경사유로 한 것은 주관주의적 표현이다. - P74

형벌론에 있어서도 현행 형법이 형의 선고유예제도와 
집행유예제도, 가석방제도, 보호관찰 및 사회봉사명령
 · 수강명령과 같은 보안처분제도, 누범가중, 상습범가중, 
양형 조건의 참작, 작량감경 등을 규정한 것은 
‘특별예방주의‘를 광범위하게 도입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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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586 의 진짜 문제는 그들이 이미 사회의 새로운 
주류임에도 여전히 주류는 따로 있다고 여기는 그들 
고유의 자기 규정과 비주류 의식에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586 은 언제나 실제 생각하는 것과 대외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을 동시에 사고해야하는 이중 사고를 발전시켰다.……혁명론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상류 중산층으로서의 모든 
혜택을 누리고자 했던 이중 생활은 자신들을 새로운 
주류이자 기득권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 성찰의 부재, 
그리고 과거의 급진적 면모와 현재의 대중적 면모가 
혼재한 이중 사고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 P285

"비주류는 문제 제기로도 충분하지만, 주류는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비주류가 정치적으로 싸우는 것은 
당연하지만, 주류는 이견을 포용하고 조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정책적으로도 시민운동은 몰라도 
정치의 영역에서 시장, 욕망, 이익은 조정의 대상이지 
싸움의 대상이 아니다. 비주류에게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지만, 주류는 거기서 머물면 안 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 낡은 질서는 오직 새로운 
질서에 의해서만 청산되기 때문이다."" - P286

권력 집단의 ‘비주류 의식‘은 ‘책임 의식‘을 죽인다는 
점에서두렵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그간 비판을 많이 
받아온 ‘피포위 의식siege mentality‘과 ‘피해자 코스프레‘도 바로 그런 비주류 의식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90년대생의 지지를 회복하려면 이젠 곰팡이 냄새가 날 
정도로 케케묵은 비주류 의식을 ‘남 탓‘이 아닌 ‘내탓‘을 
앞세우는 책임 의식으로 대체해야 하지 않을까? - P287

"최선은 차선의 적이 될 수 있다. "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말이다. 이 세상의 거대한 문제와 씨름하는 
사상가가 추상적인 이론의 세계에 빠져 최선을 추구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현실 세계의 작지만 구체적인 고통의 
문제를 외면하기 쉽다는 뜻이다. 시간의 문제도 있다. 
최선을 추구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최선은 아닐망정 차선의 해결책이라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은 적이 될 수밖에 없다. - P289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에 담겨 있는 이른바 
‘경로의존path dependency‘ 때문이다. 혁명은 처음부터 
다시시작하는 걸 어느 정도 가능케 하지만, 개혁은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기존 제도와 이에 따라 
형성된 사람들의 관습과 습관을 고려하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해야만 한다. 이게 좋거나 바람직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해 ‘최선‘은
커녕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290

혁명을 하면 모든 걸 다 일시에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역시 착각이다. 개혁에 비해 어느 정도 파격적인 
정책을 취할 수있을 뿐, 여전히 ‘경로의존‘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 철학자 카를 포퍼가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시도가 늘 지옥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와 무관치 않다. - P291

"다주택자 양도차익 100퍼센트 과세"를 주장한 청와대 
참모는 부동산 불로소득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정의로운 
사람이었을 게다. 비극은 그가 너무도 성급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집단적차원에서 부동산 불로소득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역사는 반세기가 넘는다. 그 세월 동안 사람들은
 "부동산만이 살길이다"는 삶의문법을 체화했다. 
그걸 무슨 수로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겠는가? - P291

더는 악화되지 않도록 하면서 한 걸음씩 개혁의 길로 
나아가는 ‘차선‘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일이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이 한일은 ‘최선‘을 앞세워, 아니 
‘최선‘을 빙자해 ‘최악‘으로 가는 길만 활짝 열어젖힌 
것이었다. 다른 주요 정책들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무주택자들이 볼 때엔 이건 ‘실수‘가 아니라 ‘죄악‘이다. - P291

이른바 ‘분노를 이용한 권위 창출법‘이란 게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경영학자 제프리 페퍼는 
『권력의 기술』에서 "때론 분노를 표출하라"고 권한다.
 "한 연구에 의하면 상대에게 분노를 표출하면 자신이 
‘위압적이고 강인하고 유능하고 똑똑하게‘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분노를 드러내면 지위가 높고 유능하게 
보일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맞서길 꺼린다. 
화를 정면으로 맞고 싶은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P296

선거 캠페인에서도 분노를 활용하는 게 큰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다만, 용의주도하게 해야 한다. 심리학자 
드루 웨스턴은 이런 주의 사항을 제시한다. 

"분노를 이용해 열정을 불러일으키려면무엇보다 
구체적인 인물과 사물을 겨냥해 집중적으로 퍼붓고, 
산탄처럼 흩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분노를 분산시키면 
겨냥한 표적 대신 자신을 연상시켜 오히려 역효과만 
초래한다."

- P296

어떤 방법을 쓰건 문제의 핵심은 분노를 조절하거나 
관리할 수있느냐는 것이다. 감성지능의 저자인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은 "보스가 교묘하게 의도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효과적인 자극이될 수 있지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은 리더십 전술로는 빵점이다"고 말한다. 
그런 상하 관계가 아닐지라도 과유불급의 원칙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정의로운 분노마저 역효과를 내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 P297

어떤 방법을 쓰건 문제의 핵심은 분노를 조절하거나 
관리할 수있느냐는 것이다. 감성지능의 저자인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은 "보스가 교묘하게 의도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효과적인 자극이될 수 있지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은 리더십 전술로는 빵점이다"고 말한다. 그런 상하 
관계가 아닐지라도 과유불급의 원칙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정의로운 분노마저 역효과를 내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 P297

누구를 위한 분노인가? 지도자에겐 이게 가장 중요하다. - P297

지도자의 분노는 국민을 위한 분노여야 한다. - P298

‘무엇‘, ‘왜‘, ‘어떻게‘ 가운데 어떤 게 가장 중요한지를 놓고 
많은 이가 말을 남겼다. 물론 정답은 없다. 각 분야나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왜‘가 아니라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했는데, 이는 글쓰기와 관련된 조언이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1970년대 이후 사회과학에서 ‘왜‘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어떻게‘라는 
물음만 남았다"고 개탄했는데진보적 사상가들은 대체적으로 ‘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면 임상심리학자 에른스트 푀펠은 "항상 모든 것에 
‘왜‘라고 질문하는 이성에 대한 중독증은 그 자체로 
질병이 아니라면 편협함의 신호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회가 아닌 개인적 차원의 조언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 P299

이렇듯 분야나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유불급의 원리다. ‘무엇‘, ‘왜‘, ‘어떻게‘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는 게 좋다는 뜻이다. 
‘무엇‘이나 ‘왜‘를 앞세우더라도 어떻게‘에 실패하면
 ‘무엇‘이나 ‘왜‘의 의미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특히 학문 세계가 아니라 당면한 현실과 씨름을 해야 하는 
정치 ·행정의 세계에선 더욱 그렇다. 물론 정치·행정에도 
가치와 비전이 필요하므로 ‘무엇‘과 ‘왜‘를 중시해야 하지만, 
‘어떻게‘에 실패하면 ‘무엇‘과 ‘왜‘는 의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풍을 불러올 수도 있다. - P300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정책은 ‘무엇‘과 ‘왜‘의 관점에서 보자면정의롭고 아름다웠다. 누가 감히 문재인 정권의 선의를 의심할 수있으랴. 그러나 선의만 흘러넘쳤을 뿐 ‘어떻게‘에선 믿기지 않을정도로 무관심했고 무능했다. 부동산 정책은 일단 ‘욕망에 불타는 시민‘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 물론 공기업 직원과 공무원도 그런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전제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해야 ‘의도하지 않은 결과‘나 ‘역효과‘를 예방하거나 최소한으로줄일 수 있다. 이건 대단한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지 않는, 상식 중의 상식이 아닌가? 그러나 ‘선의 만능주의‘에 사로잡힌 문재인 정권엔 그런 상식이 없었다. - P301

문재인 정권이 협치를 거부한 이유도 ‘무엇‘과 ‘왜‘에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무엇‘과 ‘왜‘는 가치와 비전의 
영역이므로 협의대상이 되기 어렵다. 

협치는 사실상 ‘어떻게‘의 영역에서 작동할수 있다. 
그런데 부동산이나 일자리 등과 같은 민생 문제는 
대부분 ‘어떻게‘와 관련된 것이다. ‘어떻게‘에도 이념과 
가치가 끼어들순 있지만, 가급적 자제해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한 것들에 숨어있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디테일의 완성‘을 위해선 귀를 활짝 
열어야 하며, 특히 반대편의 의견을 경청해야만 한다. - P301

‘큰 정부‘를 지향하면서 공무원 수를 대폭 늘린 것도 그렇다.
어떻게 기존 공무원 조직 문화를 민생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게끔개혁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적극 논의해야 하건만, 그런 이야기는전혀 들을 수 없었다. 이 또한 ‘어떻게‘를 무시하는 버릇 탓이다.
의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큰 정부‘와 ‘공공부문 강화‘가 ‘어떻게‘
에서 실패하면 ‘작은 정부‘와 ‘시장 만능주의‘로 가는 길을 닦아주는 꼴이 되고 만다. 문재인 정권이 ‘무엇‘과 ‘왜‘에 경도된 만큼의도적으로 ‘무엇‘과 ‘왜‘보다 ‘어떻게‘가 중요하다고 여겼어야했건만, 문재인 정권은 끝내 그런 변화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게바로 문재인 정권이 실패한 주요 이유 중 하나다. - P302

‘풀뿌리‘를 집어삼킨 ‘인조 잔디‘

"그들이 벌인 행사들은 상습적으로 그런 일들을 해온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풀뿌리 운동이다. 
폭스뉴스의 전폭적인 홍행 지원도 한몫 거들고 있잖은가?"  - P303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2009년 4월 12일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당시 주요 이슈였던 우익 포퓰리즘 
운동인 티파티 TeaParty를 두고 한 말이다. 
이 말이 시사하듯이, 미국에선 ‘풀뿌리‘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자주 벌어진다. 

이는 한국의 ‘정치적 팬덤‘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에 시시하는 바가 크므로, 그 논쟁의 전말을 
살펴보기로 하자. - P303

묻혀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광업자에겐 그야말로 
거저먹는횡재나 다를 바 없었다. 미국에서 정치인이 grass 
roots를 강조할 땐 자신이 "흙의 아들son of the soil"
이라는 의미였지만, 그건 농업 중심 시대의 이야기고 
오늘날엔 일반 서민층으로 간주된다. 서민층이 아니라 
하더라도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밑에서 위로‘의 변화 
방식을 취할 때에 그런 운동을 가리켜 grass roots 라는
말을 많이 쓴다. - P303

한때는 groundswell(대중적 지지, 여론 등의 고조)이라는 말도 쓰였으나, 이 단어는 이젠 grass roots로 흡수된 
느낌이다.

groundswell은 먼 곳의 폭풍이나 지진 등에 의해 
일어나는 큰파도 등과 같은 여파를 말하는데, 
이것을 비유적으로 grass roots와 비슷한 개념으로 썼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쓰나미 tsunami로 볼수 있는 
groundswell은 파도와 달리 전혀 감지할 수 없는데, 
이런 특성이 여론의 고조나 비등과 비슷하다고 본 것이다. - P304

1962년 법무부 장관 로버트 케네디가 동아시아 국가들을 
순방하고 있을 때 뉴스위크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그는 미국 정책을 일반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게끔 하려고 애를 썼다 He soughtto make US. policies understandable at the tice-roots level."

rice-roots는grass roots의 의미를 살리면서 쌀농사로 
먹고사는 아시아 지역의 특성을 살린 재치 있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 P304

grass roots는 미국에서 좋은 느낌을 주는 단어인지라 
정치적 좌우를 막론하고 이 말을 즐겨 쓴다. 

2003년 10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당선되어 주지사로 변신한 할리우드 
스타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이미 정계 진출을 결심한 
2001년 1월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실현된 모든 좋은 아이디어는 풀뿌리 조직에서 나왔다는게 나의 신념이다." - P304

유행에 민감한 의류업자들은 grass roots가 호감을 받는 단어라는 점을 놓치지 않고 공략한다. 예컨대, 젊은 전문직을 위한의류 아웃렛인 바나나리퍼블릭은 1986년 가을 카탈로그에서 자사 제품이 "풀뿌리 감수성grass-roots sensibility"이 뛰어나다고 선전했다.  - P305

미국에서 grass roots 와 대비되는 용어는 인조 잔디의 상표명인 Astro Turf다. Astroturf로도 쓰며, Astroturfing이라고도 한다. 1966년에 나온 것으로 미국 우주 프로그램의 중심지인텍사스주 휴스턴에 세워진 실내 스포츠 경기장 Astrodome에최초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astro라는 이름이 붙었다. Astro Turf는 비유적으로 관제 또는 특정 세력의 지원과 부추김을 받아 움직이는 ‘사이비 grass roots‘로 보면 되겠다. - P305

오늘날 종이 편지는 이메일로 바뀌었는데, Astro Turf라고 하면 연상되는 게 바로 로비성이메일 공세다. 바로 이런 공세 때문에 미 의회가 매년 받는 이메일은 8,000만 건에 이르렀던바,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말았다. 의회가 그런 이메일을 아예 무시하기로했기 때문이다.  - P306

2009년은 앞서 소개한 폴 크루그먼의 주장처럼 티파티가
 ‘풀뿌리‘냐 ‘인조 잔디‘나를 따지는 논쟁이 뜨겁게 벌어졌다. 2009년4월 15일 민주당 소속의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는 
티파티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이건 저 높은 곳 어딘가에서 자금 지원을 받고있기 때문에
 ‘풀뿌리운동‘이 아니라 ‘인조 잔디‘다. 미국의 부유층이 
다수 중산층 대신 자기들의 감세 혜택을 누리는 데 초점을 
맞춘 ‘인조 잔디 운동‘인 것이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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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 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어떤 것을 이러저러한 
것으로 표시함으로써 표시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종류를 구분하는 표현이 아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이것은 사람이다." 또는"이것은 램프이다."라고 대답하지. "이것은 인격이다." 라고 답하지는않는다. 그것이 인격들인지를 알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그 전에 그것이 사람인지 램프인지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인격이라는 개념은 어떤 것으로서의 어떤 것을 확인하는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러저러하게 정해진 것에 관해 무엇인가를 표현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 개념은 이미 자신의 종으로 분류된 것에서 특정한 추가적인 속성에 귀속되는 술어와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인격적 존재‘ 라고 불리는 속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이전에
확인했던 특정한 속성들을 근거로 존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이 존재들이 인격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P17

그렇다면 이 속성들은 어떤 것이며, 인격적 존재를 
술어적으로 서술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속성들을 확정하여 추가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잠정적이고 비체계적인 
정보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 P17

어떤 선개념이 그러한 출발의 모색에서 우리를 이끌어 
줄 수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우리가 이미 발견한 것, 
즉 그 단어를 사용할때의 특징으로부터 발생한다. 

한편으로 인격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에 어떤 특별한 존엄성을 부여하며, 
다른 한편으로 인격이라는 용어는 특성들을 구분하는 
것을 무시하고, 단순히 수에 대응하는 것을 표시하는데 
기여한다. 한편으로 이 용어는 우리가 어떤것을 그것이 
속하는 종류의 어떤 것으로 동일화할 수 있도록 하는 
분류적인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용어는 속성도 아니다.

오히려 이 용어는 특정한 속성들의 담지자를 나타낸다. 
이제 우리가 이두 가지 쓰임새를 단순히 이름만 갖고 
다른 의미를 갖는 경우로 여기지않고 그들의 상관성에 
집중한다면, 우리가 찾아야 하는 방향에서 첫 번째로 
암시하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인격은 다른 사물들이나 
생명체가 무엇인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어떤 분일 것이다. 

- P18

무엇인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어떤 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다른 방식은 무엇인가? "마술피리‘의 
한 문장이 아마도 이 물음에 도움을 줄 것이다. 

사라스트로스(Sarastros)의 유명한 아리아 "이 거룩한 
장소에서는 누구도 복수(復)를 알지 못하네."는 
박애주의적인 선언인데, 다소 의아하기는 하지만, 
누구나 이해할만한 문장으로 끝을맺는다. 
"그런 교훈을 기뻐하지 않는 자는 인간일 자격이 없으리라."

여기서 인간됨이란 하나의 특권으로서, 상실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왕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사례가 어떤 것인지는 쉽게 이해한다. 

하지만 인간이 될 자격이 있거나 없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여기서 "인간은 소위 분류적인 용어로서, 
이 용어를 통해 무엇보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거나 
자격이 없는 어떤 사람과 동일시 할 수 있다.  - P18

여기서 "인간은 소위 분류적인 용어로서, 이 용어를 통해 무엇보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거나 자격이 없는 어떤 사람과 동일시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 표현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즉 실체는 어떤 것에 의해 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바로 그것으로 확정할 수 있게 만들며, 그렇게 확정된 것에 대해 다른 것이 더 서술되는 것이다. - P18

두 표현 간의 차이는 어떤 경우에는 짖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짓지않는 개의 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개는 짖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속해서 존재한다. 하지만 개이기를 
멈추는 순간, 이때 우리는 개가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된다. 우리는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수 있다. 
개가 짖기를 멈춘다면, 그 개는 이제 짖지 않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더는 개가 아닐 뿐이다. 개가 개이기를 멈춘다면, 그 개는 무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것으로 곧 썩은 짐승의 시체로, 그 후에는 흙으로 변화된다. 
남는 것은 한때 개라고 불렀고, 후에는 흙이라 부르는 
물질적인 기체이다. - P19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러한 사유를 거부했으며, 그는 
두 가지 종류의 ‘변동‘을 올바르게 구분한다. 생성과 소멸이 그 한 종류이고, 변화가 다른 하나이다. 

어떤 사람이 죽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마치 시공간에 있는 
한 조각의 물질처럼 여기서 어떤 것의 상태가 변화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떤 사람, 곧 한 인간의 실존이 
중단되었다고말한다. 우리가 이것저것이라고 말하는 
어떤 사물을 분별할 때, 그 분류 용어는 그것으로 우리가 
이 사물을 비로소 온전히 분별하게 만드는개념이다. 

어떤 것이 생성된 그것은 우선 이 사물의 유래로서 분별될
수 있지만, 우리가 그에 대해서 진술하는 진짜 주어는 아니다.  - P19

사라스트로스가 "그런 교훈을 기뻐하지 않는 자는 인간일 
자격이 없으리라."고 말할 때, 그는 시공간적인 한 조각의 
물질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왕자의 
자격을 상실할 수 있듯이, 그것이 인간됨을 상실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어떻게 한 조각의 물질이 어떤 것에 자격을
부여하거나 상실할 수 있겠는가. 

사라스트로스가 말한 것은 그러므로 모순적이다. 
사람만이 사람됨에 자격이 있거나 상실할 수 있다. 
이럴수 있기 위해서 그는 이미 사람이어야 한다.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라스트로스의 말을 
어떤 식으로든 직관적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인간과 그 인간됨의 관계를 개와 개임의 관계와는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을 
한 종(種)의 예시로 파악하는 경우와는 전혀 다르게 
하나의 관계, 즉 내적 차이를 생각한다. 인간은 개가 
개인 것과 동일한 방식, 즉 그의 종개념과 똑같은 
방식으로, 인간이지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 - P20

‘인간적인(menschlich)‘과 ‘인간의 (human)‘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는 예를 살펴보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의 특정한 의미에서보자면 ‘인간적인‘ 이라는 말은 
정확히 인간이 행동하는 바이다. 즉 어떤 동물도 그렇게 
할 수 없는, 특히 추악한 행동들이 ‘인간적‘ 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적‘ 이라는 용어를 이처럼 사용할 수는 없다. 우리는훨씬 더 많이 이 용어를 규범적으로 우리가 
동의하는 특정한 행위방식을 우리가 비난하는 행위와 구
분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하지만 때로는이런 언어 사용이 
이상한 방식으로 전도되기도 한다. 

우리는 살며시 거부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싶을 때 하는 
행동방식을 ‘인간적‘ 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실수는 
인간적이다."와 같은 경우이다. 이 같은 경우에서
인간적이라는 용어는 항상 나약함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식과 관련된다. 
그러나 나쁜 의도, 곧 악의적인 위반의 경우에, ‘인간적‘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비록 이 나쁜 의도가
인간에게 특징적인 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 P21

특히 역겨운 나쁜 의도와 같은 것을 우리는 ‘비인간적‘ 
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비인간적‘ 이라는 말은 인간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귀속되는 것이 분명하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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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도덕의 차이를 설명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법과 도덕의 차이는 오랜 세월 동안 이들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한 노력을 하여 왔지만, 상호 간 경계가 
모호하고 또 법과 도덕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을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은 더더욱 
용이하지 않다. - P3

관습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누구에게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전해져 내려와 
‘사회 구성원 중 누구를 데려다 놓아도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관습은 정착하는 과정이 규범이나 
윤리, 도덕과는 완전한 별개이기 때문에 때로는 불합리하고 차별의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특히, 종교적인 관습이나 
미신에 의해 내려온 관습들은 젊은 세대들의 시선에서는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점도 없는 것은 아니다. - P3

기본적으로 법이란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을 위해서 
권장되거나 지양을 요하는 행동이 아니라 ‘소속 집단의 
공공질서‘, 즉 개인이 아닌 단체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그 단체에 의해 강제되는 규범을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법이라는 것이 개개인이 아닌 집단의 
구성원 전체를 하나로 보고 제정되기 때문에, 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구성원 중의 일원이나 일부에게
불공평하고 불합리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단의 구성원전체로 보면 옳은 일, 혹은 이익이 되는 일이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원치 않는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 P3

외면성과 내면성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

법은 외면성, 도덕은 내면성이라는 징표는 오랫동안 
그리고 비교적 선명하게 인정되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라드브루흐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외부적 행위는 법적 규제에 속하고, 내부적 행태는 도덕적 규제에 속한다고 믿는 경우, 즉 사색에는 누구도 
벌을 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것은 ‘외면성-내면성‘의 대립을 법과 도덕의 기초와 관련시킨 것이다. 
이 명제는 무엇보다도 법을 인간의 공동생활규칙의 
총체로 파악하는 데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공동생활은 개인과 개인이 행동적으로 교섭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기 때문이다." - P4

구스타프 라드 브루흐(Gustav Radbruch, 1878~1949, 
하이델베르크). 신칸트파의 서남학파에 속하는 독일의 
형법 · 법철학자. 바이마르 공화국 법무장관이었고, 
쾨니히스베르크대학 · 킬대학 ㆍ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를 지냈다. 바이마르 초기의 1920~1924년 사회민주당의 
국회의원이 되며, 두 번에 걸쳐 법무장관을 맡아 형법 
초안을 기안했다. 1933년 독일 나치 정권에 의해 추방되며, 1945년 복직. 존재와 당위비판적 지성, 인식과 신앙의 
이원론, 자유주의적 경향 등에서 칸트적 정신의 계승자이다. 그러나 법철학에서의 가치상대주의, 법학론에서의 자유법론 등 칸트와 다른 측면도 많다.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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