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진화심리학의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생물철학을 생물학의 철학으로부터 개념적으로 구분하려면, 그들 사이의 중요한 연관성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갓프리-스미스가 자연철학과 (좁은 의미의 과학철학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면서 지적하듯이, "이러한 두 종류의 철학적 작업은 상호작용한다. 과학이 세계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해준다는 당신의 생각은 그 부분의 과학이 어떻게 작동한다는 당신의 생각에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다."(Godfrey-Smith 2014, p.4)생물철학을 잘 연구하려면, 과학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게 하려면, 과학철학자들이 그러한 생물학 주장들을 질문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만큼이나, 생물과학 관련 분야에 대한 소양 또한 필수적이다.

철학과 생물학 사이에 논리적 관계가 성립하며, 그 관계는 생물철학이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지를 구별시켜준다. 내가 지적했듯이, 그 관계는 비록 생물학적 주장이 생물철학 논증에서 전제로 쓰일 수 있을지라도) 생물학적 주장과 철학적 주장의 혼합은 아니며, 그리고 엄밀한 생물학적 전제로부터 철학적 주장을 합의하는 것도 아니다. 그 관계는 또한철학적 주장을 생물학적 주장으로 범주 오류를 포함) 환원하는 것도아니다. 생물학과 철학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는 상당히 느슨하긴 하지만, 일찍이 검토되었던 대안보다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주 일반적으로 말해서, 생물철학자들은 철학적 이론화를 제약하고,
안내하고, 고무하기 위해 생물학을 이용한다. 그들은 철학 내에 어떤 개념적 선택지를 차단하기 위해 생물학을 이용한다. 그러는 와중에, 그들은 개념적 결정 공간을 관통하는 통로를 개척하기 위해 생물학을 이용한다. 그리고 그들은 생물학적 모형이 철학적 목적에 편익을 제공할 수있도록 영감을 제공하는 자원으로 생물학을 이용한다.

만일 당신이 존 서열(J. Searle)처럼 의식이나 이성에 있어 단계적이고 점차적인 이행(gradations)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결국당신은 "강한 인공지능(Strong Al)"은 불가능하다고 또는 의식은 불가해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데 이를 것이다.
이렇게 이론적 공상이라는 스스로 부과된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필요한 것은 내가 "어느 정도"라는 기능어(sorta operator)라고 부르는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것이 작동하는 것을 보기 위한 좋은 방법은,
연산에 대한 튜링(A. Turing)의 혁명적 아이디어를 진화에 대한 다윈의혁명적 아이디어와 나란히 놓는 것이다. 다윈 이전의 세계는 과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통에 의해 결합되어 있었다. 우주의 모든 것들은 가장높은 존재("인간")에서 가장 낮은 존재(개미, 자갈, 빗방울)에 이르기까지, 더욱더 드높은 존재인, 신의 창조물이다. 신은 전지전능한 지적 창조주로 두 번째 가장 높은 존재인 인간과 놀라운 유사성을 갖는다. 이것을 창조의 점적(點) 이론(the trickle-down theory of creation)이라하자. 다윈은 이것을 창조의 용솟음 이론(the bubble-up theory of crea-tion)으로 바꿨다. 19세기에 다윈 비판자 중 하나가 이것을 다음과 같이생생하게 표현했다.
우리가 다뤄야만 하는 이론에서는 절대 무지 (Absolute Ignorance)가기술공이다. 그 때문에 전체 체계의 기본 원리로서, "완벽하고 아름다운기계를 만들기 위해서, 그것을 어떻게 만들지 아는 것이 필수가 아니다"
라고 선언해도 좋다. 이 말을 주의 깊게 검토해보면, 그 이론의 본질적인 취지를 축약된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고 또 다윈 선생의 의미를 전부몇 마디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기묘하고 전도된 추리에 의거해서, 창조적 기술이 이룬 모든 성취들에 있어서 절대 무지가 절대 지혜를 일어나게 하는 것으로 충분히 평가될 수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Mackenzie 1868).

다윈주의 힘은, 인간과 다른 피조물로 하여금, 믿음 성향과 현재 믿음을 포함하여(심지어 그 믿음이 틀린 것일지라도), 그들의 환경에 적응적인 결과물을 가지도록 이끈다. 대중 물리학, 대중 생물학 그리고 대중심리학을 한번 생각해보자. 또 종교적 믿음, 이방인, 외국인, 여성 그리고 정신질환과 관련된 믿음, 확률과 관련된 믿음 등등을 생각해보자. 그러한 믿음 목록은 대략적으로 유용하나 명백히 틀린 것이다. 그렇게 적응적 대가 때문에 우리가 갖게 된 믿음 목록은 끝이 없다. 그렇게 일련의 도덕 규범들을 살펴보면, 다윈주의적 혈족(Darwinian pedigree)이 그러한 믿음의 음, 정확함, 진실함 등을 서명해주거나, 보증해주거나, 정당화시켜주는 어떤 경향도 갖지 못함이 드러난다.

"건강에 유익함" 으로부터 "도덕적으로 옳은 것임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흄의 금지령을 잘 알고 있다. 데닛 같은 일부 학자는 흡에 대한 도전으로 이렇게 응답한다. "무엇에서 ‘당위‘가 추론될 수 있는가?" 가장유력한 대답에 따르면, 도덕은 어떻게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즉,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혹은 어떤 존재일지에 근거해서,
그리고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혹은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지에 근거해서 탐색해봐야 한다. 만약 그것이 자연주의라면, 자연주의는 결코 오류가 아니다. 누구도 도덕이 인류의 본성에 관한 그러한 사실들과 관련된다는 것을 진지하게 부정할 수 없다."(Dennett 1995, p.468) 이런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응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것 같다. "우리와 같은 생명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낳을 가능성을 증진시켜준다는 이유만으로 본성과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무엇이 좋은가?" 이 질문은무어(G. E. Moore)의 "열린 질문 논증을 즉시 떠올리게 해준다. 다윈의 적합도와 관하여 무엇이 그리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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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법의 고전


























영미법과 대륙법은 밖으로만 영향력을 확대한 것이 아니라 서로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영미법 국가들과 대륙법 국가들은 서구 세계의 일원으로서 비슷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해온 만큼 접촉이많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 헌법에도 유럽 계몽주의의 색채가 짙게배였고, 미국식 입헌주의는 거꾸로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헌법 지형을 바꾸어놓았다. 위헌법률심사제도(judicial review)는 오늘날 두법 모두에 정착되었으며, 대륙법의 창조물인 공유부동산제도가 미국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려 콘도미니엄(condominium)이 되었다. 미국 보통법(common law)의 산물인 신탁제도는 대륙법에 스며 들어가 있다. 가장 대륙법적인 특성이 반영되어 있는 대학의 법학교육도 이제는 영미법 국가에서 비슷하게 따라하게 되었다.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유럽에 《나폴레옹법전》(1804)과 같은 법전편찬이 유행했다. 그런데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발간된 법전과 중세의 보통법, 그리고 19세기 법전들은 모양만 다를 뿐 내용이 거의 같았다. 이 법전들은 서로 기본 개념도 비슷하고, 구조도비슷하고, 무엇보다 목차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200여 년이 지나서 21세기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통용되고 있는민법전에조차 초창기 로마법, 중세 보통법, 19세기 민법전의 흔적이 선명하다. 로마민법은 이처럼 대륙법 전통을 가진 국가에서 가장 오래,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연구된 텍스트다. 그래서 일부 민법학자들은 법 중의 법은 민법이고, 그중에서도 로마법이 최고의 법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지식혁명을 추동한 첫 번째 원칙은 자연법이었다(특정 종교에서 주장하는 자연법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비종교적 자연법‘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자연법에서는 인간을 보는 시각이 다르다. ‘미국 독립 선언‘과프랑스의 ‘인권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그 예다. 자연법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생명과 자유와 재산에 대한 천부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정부의 역할은 이 불가침의 권리를 확인하고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국민이 선줄한
대표로 정부가 구성되어야 한다.

법실증주의란 결국 국가가 국내외적으로 입법권을 독점하는 체제를 뜻한다. 그 첫 번째 원칙이 바로 혁명기에 발원한 권력분립이론이다. 법을 만드는 기관은 하나여야 하고, 다른 기관, 특히 법원이 법을 만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입법권은 국민이 선출한 기관에게 있다. 그래야 국민의 뜻이 법에 구현된다. 이 이론으로 인해 판사라는 직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판례는 법이 아니라는 점만큼은 일단기억해두기를 바란다. 옛날에 판결한 것을 기초로 새로운 판결을하는 이른바 선례구속의 원칙(stare decisis)은 대륙법에 없다. 대륙에서는 판례가 법이 아니다. 법원은 법을 만들 수 없다는 권력분립이론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대륙법에서 법은 법률, 명령·규칙, 그리고 관습법이다. 이것 외에 다른 법은 없으며, 이 법들이 적용되는 순서 또한 정해져 있다. 법률이 가장 위에 있고, 관습이 가장 아래에 있다. 법률과 명령이 모순될 때는 법률이 우선하고 명령과 관습이 모순될 때는 명령이 우선한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런 점이 대륙법의 특징이다. 대륙법에서 판사는 법을 기계적으로적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법인지 판사에게 확실히 말해줄 필요가 있다. 실제로 사건이 발생해서 그 해결 방안을 마련할때, 대륙법 판사는 법률, 명령 · 규칙, 관습법 세 가지만 보면 된다.
그것 외에 다른 학설이나 교과서는 없다. 판례도 마찬가지다. 판례는 법이 아니다.

반면에 혁명 이념과 그로부터 발전된 거의 교조에 가까운 법이론의 영향을 덜 받은 영미법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가령 영미의 보통법(common law)은 법률과 판례와 관습법의 집합체이고, 그것을 법으로 인식하는 데 전혀 이견이 없다. 영미법 세계에서 보통법(common law)은 역사의 산물이지, 법 이론의 결과가 아니다. 국회가 제정한 법이 법이라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그것만이 법은 아니다. 또 국회가 만든 법이 판례보다 위라는생각도 없다. 대강 순서를 매겨보면 법률, 명령 · 규칙, 판례라는 식으로 배열될 것 같지만 구체적 사건에서 보면 늘 그런 것도 아니다.
영미 보통법(common law) 안에서는 이 법들의 순서에 집착하거나특정 법의 우열을 주장하지 않는다. 훨씬 더 유연하게 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미터법을 채택했고, 십진법의 화폐제도를 도입했으며,
법전을 편찬했고, 법실증주의에 따라 법의 순서를 정했다. 이 모든일을 단 몇 년 만에 완성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특히 영미법 국가 법률가의 관점에서 보면 프랑스는 참 신기하고 이상한 국가다.
법을 저렇게 쉽게 만들고, 쉽게 없애다니! 아주 오래전의 영미 보통법(common law)을 지금도 법으로 알고 따르는 영미법 세계에서는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륙법은 성문법이고, 영미법은 불문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많다. 특히 영미에서는 판례가 법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일견일리가 있는 듯 보이지만, 이런 말은 두 국가의 차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 같기도 하다.
미국에도 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못지않게 성문법이 쌓여 있다. 말 그대로 엄청나게 쌓여 있다. 미국 판사도 법 적용 시에법률과 판례 중 법률을 먼저 적용한다. 법률이 위헌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같은 사안에 관해서 판례보다 우위에 있는것이 법률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문법의 양이나 그 적용 순서를가지고 대륙법과 영미법을 나눌 일은 아니다.

영미법에서 법관은 일종의 영웅이고, 어른이다. 영미법 세계의 주인공은 주로 판사다. 코크(Coke)나 맨스필드(Mansfield), 마셜(Marshall), 스토리(Story), 홈스(Holmes), 브랜다이스(Brandeis), 카르도조(Cardozo) 등이 전부 이런 판사의 이름이다.
영미법은 사건 하나하나마다 치밀한 논리를 설파하고, 그걸 기초로 하나의 법 체계를 완성시킨 판사의 손에서 성장하고 발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다음 사건에서 판단의 근거가 되고,
선례구속의 원칙으로 귀결된다. 영미에서도 물론 입법부를 따로 두어 어떤 국가 못지않게 많은 법률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충적인 것이다. 영미에서 법은 판사가 선언하고 가꾼다. 그래서 판사들은 행정부의 각종 월권행위에 대해 꾸짖기도 하고, 위헌적 요소가 있다면 국회가 제정한 법률을 무효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이처럼 영미권에서는 판사가 말해주는 법을 더 맞는 법이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일종의
‘사법부 우위의 원칙‘이 법 문화 속에 정착되어 있다. 특히 미국의경우가 그렇다.
영미법 세계의 판사는 주로 로스쿨을 졸업하고 로펌에서 경력을쌓거나 공직을 거친 사람들이다. 특히 검사 출신이 많다. 선출직이든 임명직이든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하는데, 가령 성공적인 경력과 동료 변호사들 사이의 좋은 평판, 정치적 영향력 등이 그것이다. 판사가 된다는 것은 나이 들어서 받는 훈장과도 같다. 판사가 되면 존경과 영예가 뒤따른다. 판사는 사법부고위직이기도 해서 월급도 많이 받고, 비서도 생기고, 연구원도 배정된다. 특히 주대법원과 연방대법원에 오른 판사는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지며, 그들이 실시한 내용을 신문기사가 다루기 시작하고,
각종 연구논문에서 분석 대상이 된다. 그들은 이미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어 있다.
그런데 대륙법에서는 아주 다르다. 대륙법 세계에서 판사는 그저공무원 중 하나로 여겨진다. 국가마다 상당히 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판사란 관리에 지나지 않는다. 대륙 국가에서 법과대학이나 로스쿨을 졸업하면 다양한 진로가 앞에 펼쳐진다. 그중에서 특히 판사가 되고 싶은 사람은 따로 시험을 봐야 한다.

시험을 통과해야 수습 판사로서 일을 시작할 수 있다(프랑스 등 몇몇 국가에서는 관사 시험을 보려면 특수학교를 더 다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다음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주로 지방의 심급이 낮은 법원에서 정식 판사로 임명되고, 소위 연공서열형이라고 해서 능력과 나이 등의 요소를 감안해 한계단씩 직급이 올라간다. 급여도 미리 예정된 대로 올라가고,
판사 역시 임금 인상과 근무 조건의 개선, 신분보장을 위해 노력하는 판사 모임에 가입한다.
대륙법 국가에서 이 외에 다른 방식으로 판사가 되는 길은 그다지 많지 않다. 변호사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나 법학 교수들이 바로 높은 직급의 판사로 임명되는 국가가 없지는 않지만(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생겨난 헌법재판소 판사로 가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의 판사 직역은, 심지어 대법관까지도 주로 전문적인 판사 경력자들로 채워진다. 대륙법 국가의 판사 역시 대법원까지 올라가면존경과 예우를 받지만, 그건 판사에게만 국한된 대우는 아니다. 다른 행정부 고위 관료가 받는 예우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영미법과 대륙법에서 판사를 보는 관점이 사뭇 다른 이유를 추적해보면 로마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에서도 판사(iudex)는 법률 전문가가 아니었다. 로마제국 시대 이전부터 판사는 주로 분쟁이 생겼을 때 행정관료 중 하나인 집정관(praetor)이 작성한 서면을보고 어느 쪽 말이 맞는지 판단하는 민간인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판사는 법에 대해서 문외한이었기 때문여 법을 알고자 하면 전문가를 찾아가야
했는데, 그게 바로 법학자였다.

그러다가 제국 시대에 이르러 법을 좀 더 잘 아는 사람들로 판사직이 채워지기는 했지만, 이때에도 판사의 역할은 황제의 의도를 잘 구현하는 것이었지 재판을 통해서 로마법을 완성하는 것과 같은 엄청난역할은 아니었다. 중세를 거치고 절대왕정 시대를 거치면서 비로소대륙의 판사들도 영미 판사들처럼 법을 창조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이게 오히려 유럽 대륙에서는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판사들이마음대로 법을 해석해서 자기들만의 판례를 만들어 중앙정부의 입법권에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이다.
혁명이 일어나고 소위 권력분립의 원칙에 따라 판사의 권한이 대폭 축소된 것 역시 절대왕정기의 우울한 역사와 관련이 있다. 절대왕점기의 판사 전횡을 목도한 혁명가들이 국회만 법을 만들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즉, 직접적으로는 간접적으로는 판사가 법을만들 수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앞서 제4장에서 본 바와 같이, 대륙법의 판사는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오로지 ‘법률‘에 의거해야하고, 이전의 판례를 따라서는 안 된다. 선례구속의 원칙은 없어지고 대신 권력분립의 원칙이 자리를 잡았다. 권력분립의 원칙에 의하면, 판사에게는 불완전하고 불명확하고 모순된 법률을 해석할한조차 없다. 법률이 그렇다면 판사는 자신이 달리 해석하려고 할것이 아니라 입법부에 유권해석을 신청해야 한다. 다만 이런 상황
자체가 그다지 많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고, 초창기 약간의
혼란을 거치겠지만 결국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판사에게
적시에 제공될 것이며, 판사가 유권해석을 신청할 기회조차
거의 없게 될 것이라 믿었다.

이런 그림에서 판사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일을 기계적으로반복하는 전문가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상황에 맞는 해답을 입법자가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판사는 그 법률을 찾아내서 상황에 맞게 법률이 제공한 해답을 연결하면 된다. 이걸 법에서는 삼단논법 (syllogism)이라고 부른다. 법률을 대전제로 하고, 사실관계를소전제로 해서, 법이 정한 결론을 판사가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넘어 사건이 조금 더 복잡해져도, 판사는 미리 정해놓은 해석원칙에 따라, 그것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이게 바로 판사다. 입법자가 만든 기계를 작동시킨다는 의미에서판사의 일은 기계적이다. 그래서 대륙법에서 유명한 사람은 판사가아니다(혹시 유명한 판사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유스티니아누스,
나폴레옹, 안드레스 베요 (Andrés Bello)와 같은 입법자나 가이우스,
이르네리우스(Inerius), 바르톨루스(Bartolus), 만치니(Mancini), 도맷(Domat), 포티에(Pothier), 사비니,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 유럽과라틴아메리카의 학자들이 대륙법의 주연이다. 대륙법 세계에서 판사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창의적이지는 않은 일을 하는 고위 공무원에 불과하다.


대륙법계 국가에서 법률해석과 관련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법관은 해석권이 없다‘는 종래의 도그마를 어디까지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점이다. 아직도 법관은 법 적용만 하면 된다고 믿는 학자들이 있고, 지금도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서 새로운 법학 이론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위 이익법학과 사회법학, 현실주의법학이 그것이다. 가령 스위스민법은 판사에게 어떤 해석원칙으로도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만약 당신이 입법자였다면 제정했을 법률 조항에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한다. 이전과는 다른 발상이다. 판사도 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다수설은 아직 바뀌지 않았고, 소수 견해가 다수 견해를 넘어선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결국 판사의 법률해석권을 부정하는 태도는 대륙법 전통의일부로 아직도 살아 있는 셈이다.
앞서 본 것처럼 대륙법 세계에서 관례는 법이 아니다. 종전의 판례가 다른 사건에 관해 그 사건을 재판하는 법원을 기록하는 순간판사는 법 제정권이 없다는 원칙에 반하기 때문이다.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어떤 법원도 다른 법원의 결정에 따를 의무가 없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어떤 쟁점에 대해서 상급법원이 명확한 해법을 제시했더라도 하급법원이 그와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대부분의 대륙법 국가에서는 판결문을 공표하고, 변론을 준비하는 변호사들은 종전 판례를 참조해서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판사도 물론 자주 판례를 들추어 본다. 혁명 이론이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해도, 영미법계 법관들만큼이나 대륙법계 법관들도 종전의 판례에 충실하다. 대륙법계 법관들이 판례를 참고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종전의 관례가 권위 있는 법원의 견해이기 때문이거나, 이론적으로 탁월하기때문이다. 혹은 법관 입장에서 다른 생각을 하기가 귀찮거나, 나중에 파기환송당하기 싫어서일 수도 있다. 전부 영미법계에서 선례를따르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선례구속의 원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것으로 대륙법과 영미법을 나누는 것은 오해이며, 과장이다. 대륙법계 판사들도 선례를 따른다.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이다. 반대로 영미법계 법원도 따르기 싫은 선례는 따르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가 내린 결정을 뒤집기도 한다. 이것 역시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럼에도 고정관념은 아직도 힘이 세다. 대륙법계 법률가들은 자기 국가 판사가 법 대신 종전 판례를 보고 판결한다는 사실을 애써무시하고, 영미법계 법률가들은 선례라면 무조건 따르는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 대륙법과 영미법의 차이는 ‘실제 법원이 어떤식으로 행위하는가‘에 있지 않다. 법원이 일하는 방식에 대한 고정관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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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법의 기원과 전개를 소개한 책입니다.














자연법은 이제 다른 자연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 내지 법칙을 함의하는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인간에게 본성적으로주어진 것을 함부로 빼앗거나 침해하면 자연법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인간은 자신에게 마땅히 주어진 것에 대한 권리를 지닌다. 법과 권리를 동시에 뜻하는 라틴어 이우스(ius)의 의미론적 중첩은 따라서다른 한편으로 정의 개념에 기원을 지닌다. 이는 곧고(gerade) 올바르게(richtig) 판정한다(richten)는 어원(reht)을 지니는 독일어 ‘Recht‘나라틴어 ‘directus‘에서 파생된 프랑스어 ‘droit‘에도 해당된다. ‘Recht‘와같은 어원을 지니는 영어 ‘right‘에도 오늘날에는 드물기는 하지만 권리와 더불어 법의 의미가 남아 있다. "

보통 실정법은 한 나라에서 실제로 통용되고 있는 법률과 동의어로 이해되곤 한다. 앞서 법률로 번역되기도 하는 용어 ‘Gesetz‘가 이번에는 신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설정되고 정립된 것의 의미를 지녔듯이 실정법에 해당하는 독일어 ‘das positive Recht‘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닌다. ‘positiv‘는원래 놓다 세우다, 건립하다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동사 ‘ponere‘의 과거분사 "positum‘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해져 통용되는 것은 긍정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긍정적이라는 의미는 추후에보태어진 것이다. 따라서 ‘das positive Recht‘는 직역하면 정립된 법이라고 하겠다. 우리말 법률 또한 본받을 만한 이치를 붓으로 잘 기록한 것을 뜻하니 의미가 잘 통한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어의 droitpositif‘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반해 영어는 실정법을
"positive right‘이 아니라 "positive law‘로 표기하기에 정립된 것이라는함의가 중복되고 있다. 물론 ‘das positive Gesetz‘나 ‘Ioi positive‘라는표현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도 이 용어의 언어적 엄밀성은 섬세하게 지켜지지는 않는 셈이다.

칸트에게 중요한 자연은 본성이나 법칙 등의 형식적 의미에서의 자연이며,
자연에 속하는 인간 또한 감성적 본성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이성적 본섬으로서의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이성적 본성은목적 그 자체로서 실존한다"(GMS, AB66)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의 이성본성이 지니는 법칙을 바로 자신의 이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고 자신의목적으로 의지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형식적 의미의 자연은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에게는 자신의 이성 본성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 입법한 목적론적 자연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 본성의 법칙이 바로 자연법이다. 물론 자연법(Naturrecht)은 자연법칙(Naturgesetz)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법은 적어도 자연 사물의 법칙처럼 인간의 이성적 본성(Natur)에 대해 선차적으로 인식 가능한 법을 의미한다. ‘법론의 형이상학적 시원근거들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적 본성은 또한 모든 인간의 이성에 의해 인식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이성적 본성에 대한 이성적인간의 선차적 자기인식이 바로 칸트의 자연법이다. 

피히테는 여기서 철저히 학문적 필연성의 측면에서 논의한다. 이것은바꿔 말하면 자유로운 존재들의 공동체가 실제적으로는 앞서 말한 결단과 같은 우연적 요소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일단 공동체를 형성하기로 결단했다면 이에 대한 필연적 사유에 따라 자유의 병렬은 "오적 자유로운 존재 각자가 모든 다른 이들의 자유의 개념을 통해 자신의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자신의 법칙으로 만듦으로써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존재라면 누구나 타자의 자유를 방해할 물리적 능력을 갖고있으며, 그럼에도 이러한 방해가 일어나지 않는 자유의 병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다시 말해 여러 선택들 중에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그런 법칙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법칙은 자유로운 존재들의 공동체에 적용되는 근원적인 법법칙이다. 이 법법칙은 상반되는 이중적 측면을 지닌다. 먼저 이 법칙은 수용된 후에 어떠한 예외도 허용하지 않고 "보편타당하고 정언적으로 관철되어야 한다. 하나의 예외라도 있다면 공동체는 성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특성으로 말미암아 법법칙은 공동체 내 인격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근원법들 (Urrechte)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 법칙의 정언적 특성은 다른 한편으로 이 법칙을 받아들이기로 한 자유로운 결단의 가인적 조건에서 파생된 것이다. 자유로운 존재들의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면 각자는 이 법칙을 스스로에게 부과해야 한다. 그리고 전자는 후자의 실재적인 자기입법에 의존한다. "철학자에게" "입법"의 "유일한 근거는 바로 이러한 전제이다. 이 전제에 따라 공존 가능한 "단지 그만큼만 자기입법이 이루어져야하며, 스스로에게 이 법칙을 부여하지 않는 자는 자유로운 인격으로 존중받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은 공동체에 의해 "강제법" (Zwangsrecht)의 적용을 받을 것이다. 강제법은 법법칙을 스스로 부여하지 않고, 다른 인격의 근원법을 침해했을 경우에만 작용한다. 

셀링은 "도덕철학‘을 ‘절대적 개인도덕으로서의 도덕‘과 ‘사회도덕‘으로서의 ‘윤리‘로 나눈다(NDN, 871)." 이때 우선권이 부여되는 개인도덕은오직 "개인의 절대적 자기성(Selbstheit) "만을 요구한다(NDN, $31). 즉 "내의지의 개체성 자체"는 무제약자를 실현하라는 실천이성의 최고 요구에의해 재가 되었기에 이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 한 나는 결코 나의 자유 주장을 중단할 수 없다(NDN, $23) 이러한 의미에서 셀링의 절대적 개인도덕은 무제약자 실현의 ‘주체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자유의 절대적 인과성은 순수 사유의 차원에서는 아무 모순이 없지만그 경험적 노력의 과정에서는 타인들의 자유와 충돌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절대적으로 경험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내 자유의 절대적 인과성이 경험적으로도 관찰된다면 타인의 경험적 자유까지 지양해버릴 것이며, 나의 자유 또한 이와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적 노력이 불가능한 자유는 무제약자를 실현할 수 없다. 따라서 각자는자신의 무제한적인 경험적 자유를 포기하고 모두의 경험적 노력이 공존할 수 있도록 제한해야 한다(NDN, $27. 또한 8828-29 참조). 이로부터 "도덕적 본질들의 왕국을 전제하는 윤리의 명령이 도출된다. 이때 주의해야할 것은 이 명령의 목적이 다양하게 경험적 노력을 실행할 수 있는 개인들의 단순한 공존의 확보가 아니라 이렇게 공존하면서 다양한 노력을 실행하는 모든 개인들의 자기성 자체의 보장에 있다는 점이다.

셀링에 따르면 이렇게 나를 강제하려는 "타인의 의지에 대립해 나는필연적으로 "강제권"(Zwangstecht)을 지닌다. 이때 강제권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먼저 강제권은 개체의지가 다른 개체의지와의 대립속에서만 지니는 권리이지 개체의지에 대한 보편의지의 권리도, 보편의지에 대한 개체의지의 권리도 아니다. 보편의지에 대항해 내 의지의 자기성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자유권으로서의 근원권이었다. 즉 나의 편에서 "보편의지의 질료에 대립해 나의 자유권을 관찰할 수 있었다. 또한 개체의지에 대한 보편의자의 권리는 형식상 개체의지의 질료를 규정하는 보편의지의 불완전한 권리일 뿐이었다. 더구나 보편의지의 질료를 제약하는것은 개체의지의 형식이기에 그 질료를 표현하는 보편의지의 형식은 개체의지의 질료에 대해 "어떠한 강제권도 지닐 수 없다(NDN, 5150-153) 그러나 이는 사실상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본질 규정을 도외시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존조건을 보편의지의 내용으로 고찰하지 않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관점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셸링에게 보편의지의질료는 개체의지의 형식적 동일성으로서의 자유일 뿐이지 개체의자들의공존 형식으로 제도화할 수 있는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자유는 아니다. 이때문에 그에게는 개별자들 사이의 강제권만 있지 공동체 차원의 강제법Zwangsrecht)이 있을 수는 없다.

헤겔은 이렇게 인륜적 제도들이 구성하는 "국가의 유기적 구성"을 "정치적 헌법 (die politische Verfassung)이라고 부른다. 이미 분명해졌듯이 이헌법은 군주권력, 정부권력, 입법권력의 삼권분립을 골격으로 한다. 이때각 권력은 그 자체로 "총체성"을 이루면서도 다른 두 권력의 계기들을 자기 안에 포함하기도 한다(GPR, 88271-272). 요약하면 헤겔의 인륜적 국가는 다음처럼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이 국가의 구성원으로 태어난 개인은 가족 교육을 통해 자립적인 시민으로 양성되고 욕망들의 전면적인 경쟁체계인 시민사회로 나아간다. 때로는 성공하기도 때로는 실패하기도 하는 이 사회 속에서 개인은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특수 이익을 보편화할 수 있는 교양을 축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분쟁 시에는 정부권력산하의 사법(法) 소송 과정을 통해, 경제 활동 중에는 역시 정부권력 산하의 공안의 공정거래 감시, 빈민구제 활동 등을 통해, 그리고 시민들 스스로 형성한 다양한 협동체의 생산량 조절, 경기 전망, 파산구제 활동 등을 통해서 말이다. 시민사회야말로 도덕성이 발휘되는 본래의 장소라고하겠다. 특히 협동체에서 선출된 대표자들은 하원을 구성해 안정적인 토지 자산 관리를 맡고 있는 상원과 함께 입법부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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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처리특례법은 교통사고로 인한 피해의 신속한 회복과 국민생활의 편익 증진을 위해서 운전자에 대하여 반의사불벌의 특례를 규정하고 있다. 교통법 제3조 제2항 본문은 차의교통으로 인한 업무상과실·중과실치상죄와 업무상과실 · 중과실 재물손괴죄에 대하여 반의사불벌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단서에는 도주차량운전죄와 음주측정불응죄 및 단서각 호의 12개 사유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공소를 제기할 수 있도록 본문의 특례에 대한 예외를 두고 있다. 단서 각 호의 12개 예외사유로는 신호 또는 안전표지 위반사고(제1호). 중앙선침범 사고(제2호), 과속사고(제3호), 앞지르기 끼어들기 사고(제4호), 철도건널목 사고(제5호), 횡단보도사고(제6호), 무면허운전사고(제7호), 음주·약물운전사고(제8호), 보도침범사고(제9호), 개문발차 사고(제10호), 어린이보호구역 사고(제11호), 화물낙하 사고(제12호) 등이있는데, 이러한 사유는 제한적으로 열거된 규정으로 본다. 이와 관련한 대상판결의 쟁점을살펴보면, 반의사불벌의 특례에 대한 12개 예외사유, 예컨대 신호위반 등이 본죄의 구성요건요소인지 또는 공소제기조건인지 여부가 문제가 된다. 이는 구성요건요소로 볼 것인지 공소제기조건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이들 예외사유가 경합하거나 결여된 경우에 실체법적 소송법적 취급에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특가법") 제3조의 알선수재죄는 공무원의 직무에속한 사항의 안선에 관하여 금품이나 이익을 수수 요구 또는 약속함으로써 성립한다. 본조는 공무원에 대한 로비행위 처벌규정으로 보호법익은 뇌물죄와 같다. 공무원 신분을 가지지 않은 자도 학연이나 지연 또는 개인의 영향력 등을 이용하여 공무원의 직무에 영향력을미칠 수 있어 이러한 자가 공무원의 직무와 관련하여 알선자 내지는 중개자로서 알선을 명목으로 금품 등을 수수하는 등의 행위를 하게 되면, 공무원의 직무 집행의 공정성은 의심받게 될 것이므로 이러한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다(대법원 2014. 6. 26. 선고 2011도3106 판결).
본죄의 주체는 제한이 없는 점에서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특경법")제7조의 알선수재죄와 같지만, 공무원 또는 금융회사 등의 임직원이 주체이고 지위를 이용할 것이 필요한 형법 제132조나 특가법 제2조의 알선수뢰죄 및 특경법 제5조 제3항의 알선수재죄와는 구별된다.

피해자 본인에게 불법촬영물을 전송하는 행위가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에서정한 ‘제공‘에 해당하는지 여부

[대상판결] 대법원 2018. 8. 1. 선고 2018도1481 판결[사실관계] 피고인은 연인관계이던 피해자 몰래, 나체 상태로 앉아 있는 피해자의 전신을휴대전화기를 이용하여 촬영하고, 그렇게 촬영한 사진 1장을 피해자의 휴대전화기로 전송하였다. 검사는 그 사진을 피해자에게 전송한 행위가 구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2016.12. 20. 개정되어 법률 제14412호로 시행되기 전의 것) 제14조 제1항(현행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 제2항)의 ‘제공‘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기소하였다. 제1심은이 부분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였으나 원심은 촬영의 대상이 된 피해자 본인에게 사진을전송하는 것은 위 조항의 ‘제공‘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죄로 판단하였다.

[판결요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성폭력처벌법‘이라 한다) 제14조 제1항(현행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제2항) (괄호 부분은 인용자가 추가하였다)에서 촬영행위뿐만 아니라 촬영물을 반포·판매 임대 · 제공 또는 공공연하게 전시 · 상영하는 행위까지 처벌하는 것은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타인의 신체를 촬영한 촬영물이 인터넷 등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급속도로 광범위하게 유포됨으로써 피해자에게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초래하는 사회적 문제를 감안하여 죄책이나 비난가능성이 촬영행위 못지않게 크다고 할 수있는 촬영물의 유포행위를 한 자를 촬영자와 동일하게 처벌하기 위해서이다.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제1항에서 ‘반포‘와 별도로 열거된 ‘제공‘은, ‘반포‘에 이르지 아니하는 무상 교부행위로서 ‘반포할 의사 없이 ‘특정한 1인 또는 소수의 사람‘에게 무상으로 교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제1항에서 촬영행위뿐만 아니라 촬영물을 반포판매·임대 · 제공 또는 공공연하게 전시 상영하는 행위까지 처벌하는 것이 촬영물의 유포행위를 방지함으로써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임에 비추어 볼 때, 촬영의 대상이 된 피해자 본인은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제1항에서 말하는 ‘제공‘의 상대방인 ‘특정한 1인 또는 소수의 사람‘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봄이 타당하다.
▸따라서 피해자 본인에게 촬영물을 교부하는 행위는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제1항의 ‘제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아동·청소년성착취물배포 · 전시 등의 ‘영리목적‘

[대상판결] 대법원 2020. 9. 24. 선고 20208978 판결을 통해 인터넷 불법 도박사이트를 홍보한 후 모집된 회원들로 하여금 도박을 하게 하는 방[사실관계] 피고인과 원심공동피고인 1등은 음란물 공유 목적의 오픈채팅방(일명 ‘야톡방)법으로 사설 인터넷 도박사이트를 운영하기로 공모하였다. 원심공동피고인 1은 중국과 태국에 운영 사무실을 마련한 뒤 미국에 서버를 둔 인터넷 도박사이트를 개설하였고, 피고인은 이 도박사이트를 홍보하기 위해 오픈채팅방을 개설한 다음 수천 회에 걸쳐 음란물을 게시하였는데, 그중에는 아동·청소년성착취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고인과 그 직원들은 1:1대화를 통해 불특정 다수인을 오픈채팅방 회원으로 가입시켰고, 해당 채팅방에서 자신이운영하는 도박사이트를 홍보하였다. 또한 오픈채팅방 가입 당시에 입력된 이름과 전화번호등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박사이트의 가입을 승인해주는 등의 방법으로 회원가입을 유도한 후 회원들이 위 사이트를 통해 도박하도록 하였다.

[판결요지] 구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2020. 6. 2. 법률 제17338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11조 제2항은 영리를 목적으로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을 공연히 전시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위 조항에서 규정하는 ‘영리의 목적‘이란 위 법률이정한 구체적 위반행위를 함에 있어서 재산적 이득을 얻으려는 의사 또는 이윤을 추구하는의사를 말하며, 이는 널리 경제적인 이익을 취득할 목적을 말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배포 등 위반행위의 직접적인 대가가 아니라 위반행위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얻게 될 이익을 위한 경우에도 영리의 목적이 인정된다. 따라서 사설 인터넷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이 먼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앱에 오픈채팅방을 개설하여 아동·청소년이용음란 동영상을 게시하고 1:1 대화를 통해 불특정 다수를 위 오픈채팅방 회원으로 가입시킨 다음, 그 오픈채팅방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도박사이트를 홍보하면서 회원들이 가입시 입력한 이름, 전화번호 등을 이용하여 전화를 걸어 위 도박사이트 가입을 승인해주는 등의 방법으로 가입을 유도하고 그 도박사이트를 이용하여 도박을 하게 하였다면, 영리를 목적으로 도박공간을 개설한 행위가 인정됨은 물론, 나아가 영리를 목적으로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을 공연히 전시한 행위도 인정된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사람을 비방할 목적의 의미

[대상판결] 대법원 2009. 5. 28. 선고 20081번길

[사실관계] 의사가 운영하는 성형외과 병원에서 막부위 고주파 시술을 받았다가 그 결과에 불만을 품은 성형시술 의뢰인 P는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지식검색 질문 답변 계시판에 2007. 5. 2. 10:22경 "이. 5 씨가 가슴전문이라. 눈이랑 먹은 그렇게 망쳐놨구나. 볼왔네"라는 글을 같은 날 10:27 경 "내 눈은 지방제거를 잘못했다고 모양도 이상하다고다른 병원에서 그러던데··· 인생 망쳤음.."이라는 글을 각 게시하여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 관한 법률 제61조(현재는 제70조) 제1항 위반(정보통신망이용명예훼손 혐의로기소되었다. 제1심은 ‘사실적시가 없다‘고 판단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검사가 항소하였다. 항소심은 제1심과 달리 사실적시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 "그 표현에 의하여 훼손될 수있는 명예 침해의 정도 등을 비교 고려하고, 여기에 의뢰인이 수사기관 이래 일관되게 자신(P)이 8로부터 눈, 턱의 시술을 받았으나 부작용이 발생하였음에도 S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 반성하도록 하기 위해 위와 같은 글을 작성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등을 종합하여 "시술의뢰인(P)에게는 S를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단하여 유죄판결(형의 선고유예)을 선고하였다. 피고인 P가 불복하여 상고하였다.

[판결요지] 이 사건 법률 제61조(현재는 70조) 제1항 소정의 ‘사람을 비방할 목적‘이란 가해의 의사 내지 목적을 요하는 것으로서, 사람을 비방할 목적이 있는지 여부는 당해 적시 사실의 내용과 성질, 당해 사실의 공표가 이루어진 상대방의 범위, 그 표현의 방법 등 그 표현자체에 관한 제반 사정을 감안함과 동시에 그 표현에 의하여 훼손되거나 훼손될 수 있는 명예의 침해 정도 등을 비교, 고려하여 결정하여야 한다. 한편 ‘사람을 비방할 목적‘이란 가해의 의사 내지 목적을 요하는 것으로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과는 행위자의 주관적 의도의방향에 있어 서로 상반되는 관계에 있으므로, 적시한 사실이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인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비방할 목적은 부인된다고 봄이 상당하고, 공공의 이익에 관한것에는 널리 국가·사회 기타 일반 다수인의 이익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특정한 사회집단이나 그 구성원 전체의 관심과 이익에 관한 것도 포함하는 것이며, 행위자의 주요한 동기 내지 목적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부수적으로 다른 사익적 목적이나 동기가 내포되어있더라도 비방할 목적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대법원 2003.12. 26. 선고 2003도6036 판결: 대법원 2006. 8.25. 선고 2006도648 판결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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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고죄에는 절대적 친고죄와 상대적 친고죄가 있다. 
절대적 친고죄는범인과 피해자 사이에 일정한 신분관계가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범죄사실 그 자체가 친고죄로 규정된 일반 범죄이다. 
예컨대, 사자명예훼손죄 (308), 모욕죄(311), 비밀침해죄(316) 업무상비밀누설죄(317) 등이다. 
상대적 친고죄는 범인과 피해자 사이에 일정한 신분관계가 있는 경우에만 친고죄로 되는 범죄이다. 예컨대, 재산죄의 친족상도례 (328)에서 동거하지 않는 삼촌 등의 친족관계 (이른바 "관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친고죄에서는 고소의 존재가 소송조건이므로, 
이는 적극적 소송조건에 해당한다. 
고소가 없더라도 범죄는 성립하지만, 적법 · 유효한 고소 없이 공소제기되면 공소기각의 판결을 선고한다(형소327).

법인이 범죄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즉 법인의 범죄능력에 대해서는 견해의 대립이 있다. 이는 법인의 본질론과 논리적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법인의 본질에 대해, 대륙법의 법인실재설과 영미법의 법인의제설의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대륙법계에서는 법인실재설(법인은 자연인과 구별되는 사회적 실체라는 입장) 임에도 자연인만 범죄주체가 될 수 있을 뿐 법인은 범죄주제가 될 수 없다고 하여, 법인의 범죄능력을 부정하고 있다. 반면, 영미법계에서는 법인의제설법인은사회적 실체가 아니라 법률에 의해 법인격이 의제되는 존재임에도 법인의 형사처벌할 현실적 필요성에 기초하여, 법인의 범죄능력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법인의 범죄능력은 순수한 이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법인의 처벌과 관련된 형사정책적 차원의 문제이다.

인과과정의 착오란 행위자가 행위와 결과 사이의 인과과정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경우를 말한다. 즉, 범죄행위가 있고 결과발생도 있지만, 행휘자가 인식 · 예견한 과정과는 다른 인과과정을 거쳐 결과가 발생한 경우이다.
인과관계(객관적 귀속)도 객관적 구성요건요소이므로, 역시 고의의 인식대상이 된다. 즉, 고의범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인과관계에 대한 인식이 요구된다.
그런데 인과과정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는 것은 일반인은 물론, 전문가에게도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도 일반인이 인과과정의 세세한 부분까지구체적으로 인식하는 일은 별로 없다. 더구나 행위자의 행위 시점과 결과의 발생 시점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다면, 행위자의 인식은 향후 그 진행과정에 대한 예측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건이 애당초 예상과 달리 진행되는경우 그 불일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문제된다.
인과과정의 착오는 객관적 귀속이 인정된 다음에 비로소 논의되는 것이다.
객관적 귀속이 부정되는 경우에는 애당초 인과과정의 착오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통설에 따르면, 여기서 인과과정의 인식은 인과과정의 ‘본질적 부분 내지 중요한 부분‘을 인식하는 것(예: ‘사람의 심장을 찌르면 그 사람이 죽는다‘는 정도의 인식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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