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지식의 본성과 한계를 고찰하다.




길수는 형수에게 자신이 현대 그랜저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소유권 증서를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지금까지 영수에게 늘 정직했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영수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P) 우리 사무실에 있는 어떤 사람은 내게 자신이 현대 그랜저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를 입증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증서를 보여주었다. 그는 지금까지 내게 늘 정직했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다.
(C) : 우리 사무실에 있는 어떤 사람은 현대 그랜저를 소유하고 있다.

위 추론은 정당한 귀납추론이다. 즉 전제 (P)가 참일 때 결론 (C)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식적으로 합리적이다. 그런데 갈수는 실제로 현대 그랜저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가 보여준 증시는 위조한 것이다. 또한 우연히 영수의 사무실의 어떤 다른 사람이 현대 그랜저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을 영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예에서
전제 (P)는 참이다. 따라서 결론 (C)는 거짓 전제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수의 믿음 (C)는 여전히 운 좋게 참이 된 경우이기 때문에 지식이 아니다.

예컨대 앞에 있는 빨간색 사과로부터의 시각자극이 내 두뇌에 비개념적인 감각상태를 야기하고 그 감각상태가 ‘내 앞에 빨간색 사과가 있다‘는 지각판단을 야기했다고 하자. 이 경우 내 앞에있는 빨간색 사과는 ‘내 앞에 빨간색 사과가 있다‘는 지각판단의 원격원인(distal cause)이고 이 지각판단을 촉발시킨 비개념적 감각상태는 이 지각판단의 근접원인(proximal cause)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내 앞에 빨간색 사과가 있다‘는 사실을 ‘내 앞에 빨간색 사과가 있다‘는 지각판단의 근접원인인비개념적인 감각상태를 매개로 하여 인식한다. 따라서 이 대개가 없으면나는 ‘내 앞에 빨간색 사과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외부대상으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야기된 감각상태를 매개로 하여 외부대상을 간접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러한 감각상태는 ‘내 앞에 빨간색사과가 있다‘와 같은 인식에서 중요한 인과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지만 나는 ‘내 앞에 빨간색 사과가 있다‘는 지각판단을 이 지각판단을 야기한 감각상태에 대한 인식적 파악을 토대로 추론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 이와 같은 지각판단은 현상적 상태로부터 추론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대상에 대한 지각을 통해서 비의지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감각경험과 이것이 촉발하는 지각판단 사이의 관계는 추론적 관계가 아니라 인과적 관계이다. 다시 말해 내적 감각상태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접근은 비인식적(non-epistemic) 접근이다.

어떤 사람이 외부의 어떤 자극에 대한 인과적 반응으로서 ‘아야‘라는소리를 냈다고 가정해보자. 이 ‘아야‘ 소리는 참인가 거짓인가? 이 소리는 단지 자극에 대한 인과적 반응일 뿐 참 또는 거짓으로 평가될 수 있는 표상내용을 갖지 않는다. 5 외부사실을 표상한다는 것은 외부 환경의상태를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그리고 심적 내용이 외부자실을 옳게 표상한다는 것은 심적 내용이 외부사실을 분류한 방식과이 심적 내용이 표상하고자 하는 외부사실이 실제로 분류된 방식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내 앞에 사과가 있다‘는 S의 심적 내용이 세계를분류한 방식과 이 심적 내용이 표상하고자 하는 ‘S 앞에 사과가 있다‘는사실이 분류된 방식이 일치하기 때문에 이 심적 내용은 옳다. 이런 이유에서 개념적이지 않은 것은 외부사실을 표상할 수 없다. 즉 참 또는 거짓으로 평가될 수 있는 옳음 조건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시각경험 속에 포함된 비개념적 현상적 요소는 참 또는 거짓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경험내용을 갖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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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다.












데카르트와 과학혁명의 시기에 이르면 산, 강, 나무는 물론 동물도 영혼을 갖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인간을 신체와 영혼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용고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오늘날에도 강하게 남아 있다. 죽음은이러한 이원론자들에게 대단히 곤혹스러운 문제다. 왜 영혼은 갑자기 축거나 신체를 떠나야 하는가? 영혼이 신체를 떠난다면 과연 어디로 가는가? 찰스 다윈cturdes Daesin 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을 제시하기 전까지는 죽음에 대한 과학적 또는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했다. 19세기 말 다원주의자였던 아우구스트 바이스만August Weismann은 급변하는 환경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유전자형들이 급속한 세대교체를 통해 공급된다고설명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그의 글은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생물학자와 철학자들이 ‘생명‘을 말할 때, 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생명(살아 있음)이 아니라, 무생물의 생명 없음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생명을 뜻한다. 생물학의 중요한 목표는 ‘생명‘이라 불리는 어떤 실체의 본성을 해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생명‘이 어떤 실체나 힘으로 가정됐다는 것이다. 철학자와 생물학자 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실체나 활력 vital force 을 찾아내려고 애썼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사실 ‘생명‘이라는 단어는 삶의 물화일 뿐이다. 그것은 독립된 개별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명의 과정을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지만, 추상화된 ‘생명‘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삶이 무엇인지 서술하거나 정의해볼 수 있고, 생명체를 정의해 볼 수도 있으며, 살아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것을 구분해 볼 수도 있다. 어떤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생명이 그 자체로서는 살아 있지 않은 분자들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도 설명해 볼 수 있다.



진화된 프로그램. 

생물은 38억 년에 걸친 진화사의 산물이다. 그것들의 모든 특성은 그 역사를 반영한다. 발달, 행동 등 살아 있는 생물의 모든 활동은 유전 프로그램에 의해 부분적으로 제어되는데, 이때 유전 프로그램은 생명의 역사를 통해 축적된 유전정보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건대 생명의 기원으로부터 단순한 원핵세포로, 그리고 거대한 나무, 코끼리,
고래, 인간에 이르는 연속된 흐름이 있다.

과학은 신학과 어떻게 다른가?

과학과 신학을 나누는 것은 아주 쉽다. 왜냐하면 과학자는 자연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설명하려고 초자연적인 것을 끌어들이지는 않으며, 또한 자연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신적인 계시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찍이 인간은 자연 현상 특히 천재지변을 설명하려고 했을 때는 반드시 초자연적인 존재와 힘을 끌어들였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신성한 계시는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에게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합법적인 진리의 원천이다.
실제로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모든 과학자는 가장 좋은 의미에서 종교를갖고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인과관계를 설명하거나신성한 계시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과학을 신학과 구분하는 다른 특징은 과학의 개방성이다. 종교는 그들의 상대적 불가침성으로 특징지어진다. 계시종교에서는 계시에 기초한 자료 중 하나의 단어에 대한 해석 차이로도 새로운 종교가 기원한다. 거의모든 이론에서 상이한 해석들을 찾을 수 있는 과학과는 극적으로 대조를이룬다. 새로운 추측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며 이전의 추측은 논박된다.
그리고 언제든지 상당한 지적 다양성이 존재한다. 실로 이것은 과학을 진전시키는 가설의 형성과 검증에서 나타나는 다윈적인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의 과정이다.

과학의 각 분과들에는 아직도 완전히 설명되지 않은 현상들이 있다. 어떤 무척추동물(특히 소위 살아 있는 화석들은 왜 1억 년 이상 실제로 변하지 않은 채로 있을까? 동일 군에 속해 있던 유사한 종들은 멸종되었거나 극적으로 진화했는데도 말이다. 두 종류의 새 중 하나는 수컷이 새끼의 양육에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데, 왜 둘 다 똑같이 성공적으로 보이는가? 그 대답은 새끼가 먹는 것이 곤충이나 과일이냐에 달려 있을지 모른다.) 그러한 수수께끼들의 수는 50년 전 또는 100년 전에는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그동안에 그러한 사례들이 현저하게 높은 비율로 만족스럽게 설명되었다. 예를 들면 왜 사회를 이루는 곤충들에서 불임인 구성원들이 여왕의 자손들을 양육하는 데 헌신적으로 참여하는가와 같은 문제를 들 수 있다.

교배 불가능성이라는 기준으로부터 생물학적 개념이 나왔다. 이 개념에 따르면 종이란 생리적 장벽이나 행동적 장벽에 의해서 번식적으로적으로 격리되어 자연적으로 형성된 교배 가능한 개체군들의 집합이다. 생물학적 개념이 가지는 타당성을 완벽히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윈이물었던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좋은 왜 존재하는가? 왜 우리는원리적으로 서로 모두 교배 가능한 유사한 개체에서부터 아주 다른 개체에 이르기까지 단절 없는 연속성을 자연에서 발견하지 못하는가? 잡종에대한 연구가 그 답을 제공한다. 부모가 같은 종이 아닌 경우(말과 당나귀와 같이) 그 자손(노새‘)은 잡종이다. 잡종은 일반적으로 대부분 2세대 안에 불임이 되며 생존력이 감소한다. 그러므로 동종으로 불리는 밀접한 유연관계를 갖는 개체들 사이의 짝짓기를 선호하고 먼 유연관계에 있는 개체들의짝짓기를 허용하지 않는 메커니즘이 선택적 이점을 갖는다. 종의 번식적격리 메커니즘이 이러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생물학적 좋은 균형 있고 조화로운 유전자형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한동안 대부분의 유전학자는 진화란 단지 유전자 빈도의 변화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대진화적 변화에서의 발생의 역할은 무시되었다. 최근에 와서야 다시 이와 같은 발생의 매우 흥미로운 측면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선택의 주된 대상인 개체는 발생 과정에서 유전자와 유전자 그리고 유전자와 환경이 상호 작용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 작용은 진화적 변화의 허용 가능한 범위를 한정한다. 대부분의 종이 나타내는 표현형의 통일성이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특정 종의 표준적인 유형과는 다른형태들은 안정화 혹은 정상화 선택을 통해 제거될 것이다. (9장 참고) 이러한 발생적 제약들에 대한 연구는 현대 발생생물학에서 흥미를 끄는 주요한 분야 중 하나다.

진화의 연구가 마음의 기원에 대해 어떠한 빛을 던져줄 수 있을까? 정활동은 사람만이 갖고 있는 특성이라는 제한된 생각 때문에 마음에 대한 연구는 오랫동안 커다란 진전이 없었다. 오늘날 동물 행동을 연구하는사람들은 정신 활동에 있어서 일부 동물들(코끼리, 개, 고래, 영장류, 앵무새)과 사람 사이에는 범주적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의식에 있어서도마찬가지다. 의식의 근거는 무척추동물은 물론 심지어는 원생동물에서도나타난다. 정신이나 의식은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는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영장류와 호미니드 조상 모두에 있어서 수없이 일어나는작은 도약의 연쇄를 통해 궁극적으로 만들어진 산물로 생각된다. 결코 한순간에 나타난 것은 아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중추신경계의 산물, 즉 정신은 비록 형성 단계에 따라 매우 일정한 속도는 아니었지만 아주 천천히 꾸준하게 형성되었다. 의사소통과 문화의 발달을 일으킬 수 있었던 언어가 등장한 시기는 분명히 마음의 형성이 크게 촉진된 시기였음이 확실하다.
지난 40년간 우리가 얻은 한 가지 사실은 진화는 앞으로도 계속되는 과정이지만 뚜렷한 파동 양상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생물계의 모든 특징이 동시에 또는 같은 속도로 진화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호리호리한몸집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처럼 여전히 ‘동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부터유일하고 특별한 종인 현세인류로 이어지는 과정은 서서히 진행되었지만이는 변화의 수준을 크게 바꾸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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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진화심리학의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생물철학을 생물학의 철학으로부터 개념적으로 구분하려면, 그들 사이의 중요한 연관성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갓프리-스미스가 자연철학과 (좁은 의미의 과학철학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면서 지적하듯이, "이러한 두 종류의 철학적 작업은 상호작용한다. 과학이 세계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해준다는 당신의 생각은 그 부분의 과학이 어떻게 작동한다는 당신의 생각에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다."(Godfrey-Smith 2014, p.4)생물철학을 잘 연구하려면, 과학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게 하려면, 과학철학자들이 그러한 생물학 주장들을 질문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만큼이나, 생물과학 관련 분야에 대한 소양 또한 필수적이다.

철학과 생물학 사이에 논리적 관계가 성립하며, 그 관계는 생물철학이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지를 구별시켜준다. 내가 지적했듯이, 그 관계는 비록 생물학적 주장이 생물철학 논증에서 전제로 쓰일 수 있을지라도) 생물학적 주장과 철학적 주장의 혼합은 아니며, 그리고 엄밀한 생물학적 전제로부터 철학적 주장을 합의하는 것도 아니다. 그 관계는 또한철학적 주장을 생물학적 주장으로 범주 오류를 포함) 환원하는 것도아니다. 생물학과 철학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는 상당히 느슨하긴 하지만, 일찍이 검토되었던 대안보다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주 일반적으로 말해서, 생물철학자들은 철학적 이론화를 제약하고,
안내하고, 고무하기 위해 생물학을 이용한다. 그들은 철학 내에 어떤 개념적 선택지를 차단하기 위해 생물학을 이용한다. 그러는 와중에, 그들은 개념적 결정 공간을 관통하는 통로를 개척하기 위해 생물학을 이용한다. 그리고 그들은 생물학적 모형이 철학적 목적에 편익을 제공할 수있도록 영감을 제공하는 자원으로 생물학을 이용한다.

만일 당신이 존 서열(J. Searle)처럼 의식이나 이성에 있어 단계적이고 점차적인 이행(gradations)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결국당신은 "강한 인공지능(Strong Al)"은 불가능하다고 또는 의식은 불가해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데 이를 것이다.
이렇게 이론적 공상이라는 스스로 부과된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필요한 것은 내가 "어느 정도"라는 기능어(sorta operator)라고 부르는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것이 작동하는 것을 보기 위한 좋은 방법은,
연산에 대한 튜링(A. Turing)의 혁명적 아이디어를 진화에 대한 다윈의혁명적 아이디어와 나란히 놓는 것이다. 다윈 이전의 세계는 과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통에 의해 결합되어 있었다. 우주의 모든 것들은 가장높은 존재("인간")에서 가장 낮은 존재(개미, 자갈, 빗방울)에 이르기까지, 더욱더 드높은 존재인, 신의 창조물이다. 신은 전지전능한 지적 창조주로 두 번째 가장 높은 존재인 인간과 놀라운 유사성을 갖는다. 이것을 창조의 점적(點) 이론(the trickle-down theory of creation)이라하자. 다윈은 이것을 창조의 용솟음 이론(the bubble-up theory of crea-tion)으로 바꿨다. 19세기에 다윈 비판자 중 하나가 이것을 다음과 같이생생하게 표현했다.
우리가 다뤄야만 하는 이론에서는 절대 무지 (Absolute Ignorance)가기술공이다. 그 때문에 전체 체계의 기본 원리로서, "완벽하고 아름다운기계를 만들기 위해서, 그것을 어떻게 만들지 아는 것이 필수가 아니다"
라고 선언해도 좋다. 이 말을 주의 깊게 검토해보면, 그 이론의 본질적인 취지를 축약된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고 또 다윈 선생의 의미를 전부몇 마디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기묘하고 전도된 추리에 의거해서, 창조적 기술이 이룬 모든 성취들에 있어서 절대 무지가 절대 지혜를 일어나게 하는 것으로 충분히 평가될 수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Mackenzie 1868).

다윈주의 힘은, 인간과 다른 피조물로 하여금, 믿음 성향과 현재 믿음을 포함하여(심지어 그 믿음이 틀린 것일지라도), 그들의 환경에 적응적인 결과물을 가지도록 이끈다. 대중 물리학, 대중 생물학 그리고 대중심리학을 한번 생각해보자. 또 종교적 믿음, 이방인, 외국인, 여성 그리고 정신질환과 관련된 믿음, 확률과 관련된 믿음 등등을 생각해보자. 그러한 믿음 목록은 대략적으로 유용하나 명백히 틀린 것이다. 그렇게 적응적 대가 때문에 우리가 갖게 된 믿음 목록은 끝이 없다. 그렇게 일련의 도덕 규범들을 살펴보면, 다윈주의적 혈족(Darwinian pedigree)이 그러한 믿음의 음, 정확함, 진실함 등을 서명해주거나, 보증해주거나, 정당화시켜주는 어떤 경향도 갖지 못함이 드러난다.

"건강에 유익함" 으로부터 "도덕적으로 옳은 것임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흄의 금지령을 잘 알고 있다. 데닛 같은 일부 학자는 흡에 대한 도전으로 이렇게 응답한다. "무엇에서 ‘당위‘가 추론될 수 있는가?" 가장유력한 대답에 따르면, 도덕은 어떻게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즉,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혹은 어떤 존재일지에 근거해서,
그리고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혹은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지에 근거해서 탐색해봐야 한다. 만약 그것이 자연주의라면, 자연주의는 결코 오류가 아니다. 누구도 도덕이 인류의 본성에 관한 그러한 사실들과 관련된다는 것을 진지하게 부정할 수 없다."(Dennett 1995, p.468) 이런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응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것 같다. "우리와 같은 생명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낳을 가능성을 증진시켜준다는 이유만으로 본성과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무엇이 좋은가?" 이 질문은무어(G. E. Moore)의 "열린 질문 논증을 즉시 떠올리게 해준다. 다윈의 적합도와 관하여 무엇이 그리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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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법의 고전


























영미법과 대륙법은 밖으로만 영향력을 확대한 것이 아니라 서로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영미법 국가들과 대륙법 국가들은 서구 세계의 일원으로서 비슷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해온 만큼 접촉이많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 헌법에도 유럽 계몽주의의 색채가 짙게배였고, 미국식 입헌주의는 거꾸로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헌법 지형을 바꾸어놓았다. 위헌법률심사제도(judicial review)는 오늘날 두법 모두에 정착되었으며, 대륙법의 창조물인 공유부동산제도가 미국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려 콘도미니엄(condominium)이 되었다. 미국 보통법(common law)의 산물인 신탁제도는 대륙법에 스며 들어가 있다. 가장 대륙법적인 특성이 반영되어 있는 대학의 법학교육도 이제는 영미법 국가에서 비슷하게 따라하게 되었다.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유럽에 《나폴레옹법전》(1804)과 같은 법전편찬이 유행했다. 그런데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발간된 법전과 중세의 보통법, 그리고 19세기 법전들은 모양만 다를 뿐 내용이 거의 같았다. 이 법전들은 서로 기본 개념도 비슷하고, 구조도비슷하고, 무엇보다 목차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200여 년이 지나서 21세기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통용되고 있는민법전에조차 초창기 로마법, 중세 보통법, 19세기 민법전의 흔적이 선명하다. 로마민법은 이처럼 대륙법 전통을 가진 국가에서 가장 오래,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연구된 텍스트다. 그래서 일부 민법학자들은 법 중의 법은 민법이고, 그중에서도 로마법이 최고의 법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지식혁명을 추동한 첫 번째 원칙은 자연법이었다(특정 종교에서 주장하는 자연법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비종교적 자연법‘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자연법에서는 인간을 보는 시각이 다르다. ‘미국 독립 선언‘과프랑스의 ‘인권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그 예다. 자연법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생명과 자유와 재산에 대한 천부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정부의 역할은 이 불가침의 권리를 확인하고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국민이 선줄한
대표로 정부가 구성되어야 한다.

법실증주의란 결국 국가가 국내외적으로 입법권을 독점하는 체제를 뜻한다. 그 첫 번째 원칙이 바로 혁명기에 발원한 권력분립이론이다. 법을 만드는 기관은 하나여야 하고, 다른 기관, 특히 법원이 법을 만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입법권은 국민이 선출한 기관에게 있다. 그래야 국민의 뜻이 법에 구현된다. 이 이론으로 인해 판사라는 직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판례는 법이 아니라는 점만큼은 일단기억해두기를 바란다. 옛날에 판결한 것을 기초로 새로운 판결을하는 이른바 선례구속의 원칙(stare decisis)은 대륙법에 없다. 대륙에서는 판례가 법이 아니다. 법원은 법을 만들 수 없다는 권력분립이론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대륙법에서 법은 법률, 명령·규칙, 그리고 관습법이다. 이것 외에 다른 법은 없으며, 이 법들이 적용되는 순서 또한 정해져 있다. 법률이 가장 위에 있고, 관습이 가장 아래에 있다. 법률과 명령이 모순될 때는 법률이 우선하고 명령과 관습이 모순될 때는 명령이 우선한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런 점이 대륙법의 특징이다. 대륙법에서 판사는 법을 기계적으로적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법인지 판사에게 확실히 말해줄 필요가 있다. 실제로 사건이 발생해서 그 해결 방안을 마련할때, 대륙법 판사는 법률, 명령 · 규칙, 관습법 세 가지만 보면 된다.
그것 외에 다른 학설이나 교과서는 없다. 판례도 마찬가지다. 판례는 법이 아니다.

반면에 혁명 이념과 그로부터 발전된 거의 교조에 가까운 법이론의 영향을 덜 받은 영미법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가령 영미의 보통법(common law)은 법률과 판례와 관습법의 집합체이고, 그것을 법으로 인식하는 데 전혀 이견이 없다. 영미법 세계에서 보통법(common law)은 역사의 산물이지, 법 이론의 결과가 아니다. 국회가 제정한 법이 법이라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그것만이 법은 아니다. 또 국회가 만든 법이 판례보다 위라는생각도 없다. 대강 순서를 매겨보면 법률, 명령 · 규칙, 판례라는 식으로 배열될 것 같지만 구체적 사건에서 보면 늘 그런 것도 아니다.
영미 보통법(common law) 안에서는 이 법들의 순서에 집착하거나특정 법의 우열을 주장하지 않는다. 훨씬 더 유연하게 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미터법을 채택했고, 십진법의 화폐제도를 도입했으며,
법전을 편찬했고, 법실증주의에 따라 법의 순서를 정했다. 이 모든일을 단 몇 년 만에 완성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특히 영미법 국가 법률가의 관점에서 보면 프랑스는 참 신기하고 이상한 국가다.
법을 저렇게 쉽게 만들고, 쉽게 없애다니! 아주 오래전의 영미 보통법(common law)을 지금도 법으로 알고 따르는 영미법 세계에서는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륙법은 성문법이고, 영미법은 불문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많다. 특히 영미에서는 판례가 법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일견일리가 있는 듯 보이지만, 이런 말은 두 국가의 차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 같기도 하다.
미국에도 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못지않게 성문법이 쌓여 있다. 말 그대로 엄청나게 쌓여 있다. 미국 판사도 법 적용 시에법률과 판례 중 법률을 먼저 적용한다. 법률이 위헌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같은 사안에 관해서 판례보다 우위에 있는것이 법률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문법의 양이나 그 적용 순서를가지고 대륙법과 영미법을 나눌 일은 아니다.

영미법에서 법관은 일종의 영웅이고, 어른이다. 영미법 세계의 주인공은 주로 판사다. 코크(Coke)나 맨스필드(Mansfield), 마셜(Marshall), 스토리(Story), 홈스(Holmes), 브랜다이스(Brandeis), 카르도조(Cardozo) 등이 전부 이런 판사의 이름이다.
영미법은 사건 하나하나마다 치밀한 논리를 설파하고, 그걸 기초로 하나의 법 체계를 완성시킨 판사의 손에서 성장하고 발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다음 사건에서 판단의 근거가 되고,
선례구속의 원칙으로 귀결된다. 영미에서도 물론 입법부를 따로 두어 어떤 국가 못지않게 많은 법률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충적인 것이다. 영미에서 법은 판사가 선언하고 가꾼다. 그래서 판사들은 행정부의 각종 월권행위에 대해 꾸짖기도 하고, 위헌적 요소가 있다면 국회가 제정한 법률을 무효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이처럼 영미권에서는 판사가 말해주는 법을 더 맞는 법이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일종의
‘사법부 우위의 원칙‘이 법 문화 속에 정착되어 있다. 특히 미국의경우가 그렇다.
영미법 세계의 판사는 주로 로스쿨을 졸업하고 로펌에서 경력을쌓거나 공직을 거친 사람들이다. 특히 검사 출신이 많다. 선출직이든 임명직이든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하는데, 가령 성공적인 경력과 동료 변호사들 사이의 좋은 평판, 정치적 영향력 등이 그것이다. 판사가 된다는 것은 나이 들어서 받는 훈장과도 같다. 판사가 되면 존경과 영예가 뒤따른다. 판사는 사법부고위직이기도 해서 월급도 많이 받고, 비서도 생기고, 연구원도 배정된다. 특히 주대법원과 연방대법원에 오른 판사는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지며, 그들이 실시한 내용을 신문기사가 다루기 시작하고,
각종 연구논문에서 분석 대상이 된다. 그들은 이미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어 있다.
그런데 대륙법에서는 아주 다르다. 대륙법 세계에서 판사는 그저공무원 중 하나로 여겨진다. 국가마다 상당히 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판사란 관리에 지나지 않는다. 대륙 국가에서 법과대학이나 로스쿨을 졸업하면 다양한 진로가 앞에 펼쳐진다. 그중에서 특히 판사가 되고 싶은 사람은 따로 시험을 봐야 한다.

시험을 통과해야 수습 판사로서 일을 시작할 수 있다(프랑스 등 몇몇 국가에서는 관사 시험을 보려면 특수학교를 더 다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다음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주로 지방의 심급이 낮은 법원에서 정식 판사로 임명되고, 소위 연공서열형이라고 해서 능력과 나이 등의 요소를 감안해 한계단씩 직급이 올라간다. 급여도 미리 예정된 대로 올라가고,
판사 역시 임금 인상과 근무 조건의 개선, 신분보장을 위해 노력하는 판사 모임에 가입한다.
대륙법 국가에서 이 외에 다른 방식으로 판사가 되는 길은 그다지 많지 않다. 변호사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나 법학 교수들이 바로 높은 직급의 판사로 임명되는 국가가 없지는 않지만(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생겨난 헌법재판소 판사로 가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의 판사 직역은, 심지어 대법관까지도 주로 전문적인 판사 경력자들로 채워진다. 대륙법 국가의 판사 역시 대법원까지 올라가면존경과 예우를 받지만, 그건 판사에게만 국한된 대우는 아니다. 다른 행정부 고위 관료가 받는 예우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영미법과 대륙법에서 판사를 보는 관점이 사뭇 다른 이유를 추적해보면 로마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에서도 판사(iudex)는 법률 전문가가 아니었다. 로마제국 시대 이전부터 판사는 주로 분쟁이 생겼을 때 행정관료 중 하나인 집정관(praetor)이 작성한 서면을보고 어느 쪽 말이 맞는지 판단하는 민간인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판사는 법에 대해서 문외한이었기 때문여 법을 알고자 하면 전문가를 찾아가야
했는데, 그게 바로 법학자였다.

그러다가 제국 시대에 이르러 법을 좀 더 잘 아는 사람들로 판사직이 채워지기는 했지만, 이때에도 판사의 역할은 황제의 의도를 잘 구현하는 것이었지 재판을 통해서 로마법을 완성하는 것과 같은 엄청난역할은 아니었다. 중세를 거치고 절대왕정 시대를 거치면서 비로소대륙의 판사들도 영미 판사들처럼 법을 창조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이게 오히려 유럽 대륙에서는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판사들이마음대로 법을 해석해서 자기들만의 판례를 만들어 중앙정부의 입법권에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이다.
혁명이 일어나고 소위 권력분립의 원칙에 따라 판사의 권한이 대폭 축소된 것 역시 절대왕정기의 우울한 역사와 관련이 있다. 절대왕점기의 판사 전횡을 목도한 혁명가들이 국회만 법을 만들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즉, 직접적으로는 간접적으로는 판사가 법을만들 수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앞서 제4장에서 본 바와 같이, 대륙법의 판사는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오로지 ‘법률‘에 의거해야하고, 이전의 판례를 따라서는 안 된다. 선례구속의 원칙은 없어지고 대신 권력분립의 원칙이 자리를 잡았다. 권력분립의 원칙에 의하면, 판사에게는 불완전하고 불명확하고 모순된 법률을 해석할한조차 없다. 법률이 그렇다면 판사는 자신이 달리 해석하려고 할것이 아니라 입법부에 유권해석을 신청해야 한다. 다만 이런 상황
자체가 그다지 많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고, 초창기 약간의
혼란을 거치겠지만 결국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판사에게
적시에 제공될 것이며, 판사가 유권해석을 신청할 기회조차
거의 없게 될 것이라 믿었다.

이런 그림에서 판사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일을 기계적으로반복하는 전문가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상황에 맞는 해답을 입법자가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판사는 그 법률을 찾아내서 상황에 맞게 법률이 제공한 해답을 연결하면 된다. 이걸 법에서는 삼단논법 (syllogism)이라고 부른다. 법률을 대전제로 하고, 사실관계를소전제로 해서, 법이 정한 결론을 판사가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넘어 사건이 조금 더 복잡해져도, 판사는 미리 정해놓은 해석원칙에 따라, 그것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이게 바로 판사다. 입법자가 만든 기계를 작동시킨다는 의미에서판사의 일은 기계적이다. 그래서 대륙법에서 유명한 사람은 판사가아니다(혹시 유명한 판사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유스티니아누스,
나폴레옹, 안드레스 베요 (Andrés Bello)와 같은 입법자나 가이우스,
이르네리우스(Inerius), 바르톨루스(Bartolus), 만치니(Mancini), 도맷(Domat), 포티에(Pothier), 사비니,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 유럽과라틴아메리카의 학자들이 대륙법의 주연이다. 대륙법 세계에서 판사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창의적이지는 않은 일을 하는 고위 공무원에 불과하다.


대륙법계 국가에서 법률해석과 관련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법관은 해석권이 없다‘는 종래의 도그마를 어디까지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점이다. 아직도 법관은 법 적용만 하면 된다고 믿는 학자들이 있고, 지금도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서 새로운 법학 이론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위 이익법학과 사회법학, 현실주의법학이 그것이다. 가령 스위스민법은 판사에게 어떤 해석원칙으로도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만약 당신이 입법자였다면 제정했을 법률 조항에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한다. 이전과는 다른 발상이다. 판사도 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다수설은 아직 바뀌지 않았고, 소수 견해가 다수 견해를 넘어선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결국 판사의 법률해석권을 부정하는 태도는 대륙법 전통의일부로 아직도 살아 있는 셈이다.
앞서 본 것처럼 대륙법 세계에서 관례는 법이 아니다. 종전의 판례가 다른 사건에 관해 그 사건을 재판하는 법원을 기록하는 순간판사는 법 제정권이 없다는 원칙에 반하기 때문이다.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어떤 법원도 다른 법원의 결정에 따를 의무가 없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어떤 쟁점에 대해서 상급법원이 명확한 해법을 제시했더라도 하급법원이 그와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대부분의 대륙법 국가에서는 판결문을 공표하고, 변론을 준비하는 변호사들은 종전 판례를 참조해서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판사도 물론 자주 판례를 들추어 본다. 혁명 이론이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해도, 영미법계 법관들만큼이나 대륙법계 법관들도 종전의 판례에 충실하다. 대륙법계 법관들이 판례를 참고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종전의 관례가 권위 있는 법원의 견해이기 때문이거나, 이론적으로 탁월하기때문이다. 혹은 법관 입장에서 다른 생각을 하기가 귀찮거나, 나중에 파기환송당하기 싫어서일 수도 있다. 전부 영미법계에서 선례를따르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선례구속의 원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것으로 대륙법과 영미법을 나누는 것은 오해이며, 과장이다. 대륙법계 판사들도 선례를 따른다.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이다. 반대로 영미법계 법원도 따르기 싫은 선례는 따르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가 내린 결정을 뒤집기도 한다. 이것 역시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럼에도 고정관념은 아직도 힘이 세다. 대륙법계 법률가들은 자기 국가 판사가 법 대신 종전 판례를 보고 판결한다는 사실을 애써무시하고, 영미법계 법률가들은 선례라면 무조건 따르는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 대륙법과 영미법의 차이는 ‘실제 법원이 어떤식으로 행위하는가‘에 있지 않다. 법원이 일하는 방식에 대한 고정관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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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법의 기원과 전개를 소개한 책입니다.














자연법은 이제 다른 자연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 내지 법칙을 함의하는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인간에게 본성적으로주어진 것을 함부로 빼앗거나 침해하면 자연법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인간은 자신에게 마땅히 주어진 것에 대한 권리를 지닌다. 법과 권리를 동시에 뜻하는 라틴어 이우스(ius)의 의미론적 중첩은 따라서다른 한편으로 정의 개념에 기원을 지닌다. 이는 곧고(gerade) 올바르게(richtig) 판정한다(richten)는 어원(reht)을 지니는 독일어 ‘Recht‘나라틴어 ‘directus‘에서 파생된 프랑스어 ‘droit‘에도 해당된다. ‘Recht‘와같은 어원을 지니는 영어 ‘right‘에도 오늘날에는 드물기는 하지만 권리와 더불어 법의 의미가 남아 있다. "

보통 실정법은 한 나라에서 실제로 통용되고 있는 법률과 동의어로 이해되곤 한다. 앞서 법률로 번역되기도 하는 용어 ‘Gesetz‘가 이번에는 신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설정되고 정립된 것의 의미를 지녔듯이 실정법에 해당하는 독일어 ‘das positive Recht‘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닌다. ‘positiv‘는원래 놓다 세우다, 건립하다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동사 ‘ponere‘의 과거분사 "positum‘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해져 통용되는 것은 긍정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긍정적이라는 의미는 추후에보태어진 것이다. 따라서 ‘das positive Recht‘는 직역하면 정립된 법이라고 하겠다. 우리말 법률 또한 본받을 만한 이치를 붓으로 잘 기록한 것을 뜻하니 의미가 잘 통한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어의 droitpositif‘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반해 영어는 실정법을
"positive right‘이 아니라 "positive law‘로 표기하기에 정립된 것이라는함의가 중복되고 있다. 물론 ‘das positive Gesetz‘나 ‘Ioi positive‘라는표현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도 이 용어의 언어적 엄밀성은 섬세하게 지켜지지는 않는 셈이다.

칸트에게 중요한 자연은 본성이나 법칙 등의 형식적 의미에서의 자연이며,
자연에 속하는 인간 또한 감성적 본성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이성적 본섬으로서의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이성적 본성은목적 그 자체로서 실존한다"(GMS, AB66)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의 이성본성이 지니는 법칙을 바로 자신의 이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고 자신의목적으로 의지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형식적 의미의 자연은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에게는 자신의 이성 본성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 입법한 목적론적 자연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 본성의 법칙이 바로 자연법이다. 물론 자연법(Naturrecht)은 자연법칙(Naturgesetz)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법은 적어도 자연 사물의 법칙처럼 인간의 이성적 본성(Natur)에 대해 선차적으로 인식 가능한 법을 의미한다. ‘법론의 형이상학적 시원근거들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적 본성은 또한 모든 인간의 이성에 의해 인식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이성적 본성에 대한 이성적인간의 선차적 자기인식이 바로 칸트의 자연법이다. 

피히테는 여기서 철저히 학문적 필연성의 측면에서 논의한다. 이것은바꿔 말하면 자유로운 존재들의 공동체가 실제적으로는 앞서 말한 결단과 같은 우연적 요소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일단 공동체를 형성하기로 결단했다면 이에 대한 필연적 사유에 따라 자유의 병렬은 "오적 자유로운 존재 각자가 모든 다른 이들의 자유의 개념을 통해 자신의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자신의 법칙으로 만듦으로써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존재라면 누구나 타자의 자유를 방해할 물리적 능력을 갖고있으며, 그럼에도 이러한 방해가 일어나지 않는 자유의 병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다시 말해 여러 선택들 중에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그런 법칙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법칙은 자유로운 존재들의 공동체에 적용되는 근원적인 법법칙이다. 이 법법칙은 상반되는 이중적 측면을 지닌다. 먼저 이 법칙은 수용된 후에 어떠한 예외도 허용하지 않고 "보편타당하고 정언적으로 관철되어야 한다. 하나의 예외라도 있다면 공동체는 성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특성으로 말미암아 법법칙은 공동체 내 인격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근원법들 (Urrechte)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 법칙의 정언적 특성은 다른 한편으로 이 법칙을 받아들이기로 한 자유로운 결단의 가인적 조건에서 파생된 것이다. 자유로운 존재들의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면 각자는 이 법칙을 스스로에게 부과해야 한다. 그리고 전자는 후자의 실재적인 자기입법에 의존한다. "철학자에게" "입법"의 "유일한 근거는 바로 이러한 전제이다. 이 전제에 따라 공존 가능한 "단지 그만큼만 자기입법이 이루어져야하며, 스스로에게 이 법칙을 부여하지 않는 자는 자유로운 인격으로 존중받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은 공동체에 의해 "강제법" (Zwangsrecht)의 적용을 받을 것이다. 강제법은 법법칙을 스스로 부여하지 않고, 다른 인격의 근원법을 침해했을 경우에만 작용한다. 

셀링은 "도덕철학‘을 ‘절대적 개인도덕으로서의 도덕‘과 ‘사회도덕‘으로서의 ‘윤리‘로 나눈다(NDN, 871)." 이때 우선권이 부여되는 개인도덕은오직 "개인의 절대적 자기성(Selbstheit) "만을 요구한다(NDN, $31). 즉 "내의지의 개체성 자체"는 무제약자를 실현하라는 실천이성의 최고 요구에의해 재가 되었기에 이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 한 나는 결코 나의 자유 주장을 중단할 수 없다(NDN, $23) 이러한 의미에서 셀링의 절대적 개인도덕은 무제약자 실현의 ‘주체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자유의 절대적 인과성은 순수 사유의 차원에서는 아무 모순이 없지만그 경험적 노력의 과정에서는 타인들의 자유와 충돌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절대적으로 경험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내 자유의 절대적 인과성이 경험적으로도 관찰된다면 타인의 경험적 자유까지 지양해버릴 것이며, 나의 자유 또한 이와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적 노력이 불가능한 자유는 무제약자를 실현할 수 없다. 따라서 각자는자신의 무제한적인 경험적 자유를 포기하고 모두의 경험적 노력이 공존할 수 있도록 제한해야 한다(NDN, $27. 또한 8828-29 참조). 이로부터 "도덕적 본질들의 왕국을 전제하는 윤리의 명령이 도출된다. 이때 주의해야할 것은 이 명령의 목적이 다양하게 경험적 노력을 실행할 수 있는 개인들의 단순한 공존의 확보가 아니라 이렇게 공존하면서 다양한 노력을 실행하는 모든 개인들의 자기성 자체의 보장에 있다는 점이다.

셀링에 따르면 이렇게 나를 강제하려는 "타인의 의지에 대립해 나는필연적으로 "강제권"(Zwangstecht)을 지닌다. 이때 강제권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먼저 강제권은 개체의지가 다른 개체의지와의 대립속에서만 지니는 권리이지 개체의지에 대한 보편의지의 권리도, 보편의지에 대한 개체의지의 권리도 아니다. 보편의지에 대항해 내 의지의 자기성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자유권으로서의 근원권이었다. 즉 나의 편에서 "보편의지의 질료에 대립해 나의 자유권을 관찰할 수 있었다. 또한 개체의지에 대한 보편의자의 권리는 형식상 개체의지의 질료를 규정하는 보편의지의 불완전한 권리일 뿐이었다. 더구나 보편의지의 질료를 제약하는것은 개체의지의 형식이기에 그 질료를 표현하는 보편의지의 형식은 개체의지의 질료에 대해 "어떠한 강제권도 지닐 수 없다(NDN, 5150-153) 그러나 이는 사실상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본질 규정을 도외시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존조건을 보편의지의 내용으로 고찰하지 않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관점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셸링에게 보편의지의질료는 개체의지의 형식적 동일성으로서의 자유일 뿐이지 개체의자들의공존 형식으로 제도화할 수 있는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자유는 아니다. 이때문에 그에게는 개별자들 사이의 강제권만 있지 공동체 차원의 강제법Zwangsrecht)이 있을 수는 없다.

헤겔은 이렇게 인륜적 제도들이 구성하는 "국가의 유기적 구성"을 "정치적 헌법 (die politische Verfassung)이라고 부른다. 이미 분명해졌듯이 이헌법은 군주권력, 정부권력, 입법권력의 삼권분립을 골격으로 한다. 이때각 권력은 그 자체로 "총체성"을 이루면서도 다른 두 권력의 계기들을 자기 안에 포함하기도 한다(GPR, 88271-272). 요약하면 헤겔의 인륜적 국가는 다음처럼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이 국가의 구성원으로 태어난 개인은 가족 교육을 통해 자립적인 시민으로 양성되고 욕망들의 전면적인 경쟁체계인 시민사회로 나아간다. 때로는 성공하기도 때로는 실패하기도 하는 이 사회 속에서 개인은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특수 이익을 보편화할 수 있는 교양을 축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분쟁 시에는 정부권력산하의 사법(法) 소송 과정을 통해, 경제 활동 중에는 역시 정부권력 산하의 공안의 공정거래 감시, 빈민구제 활동 등을 통해, 그리고 시민들 스스로 형성한 다양한 협동체의 생산량 조절, 경기 전망, 파산구제 활동 등을 통해서 말이다. 시민사회야말로 도덕성이 발휘되는 본래의 장소라고하겠다. 특히 협동체에서 선출된 대표자들은 하원을 구성해 안정적인 토지 자산 관리를 맡고 있는 상원과 함께 입법부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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