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진화심리학의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생물철학을 생물학의 철학으로부터 개념적으로 구분하려면, 그들 사이의 중요한 연관성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갓프리-스미스가 자연철학과 (좁은 의미의 과학철학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면서 지적하듯이, "이러한 두 종류의 철학적 작업은 상호작용한다. 과학이 세계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해준다는 당신의 생각은 그 부분의 과학이 어떻게 작동한다는 당신의 생각에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다."(Godfrey-Smith 2014, p.4)생물철학을 잘 연구하려면, 과학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게 하려면, 과학철학자들이 그러한 생물학 주장들을 질문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만큼이나, 생물과학 관련 분야에 대한 소양 또한 필수적이다.
철학과 생물학 사이에 논리적 관계가 성립하며, 그 관계는 생물철학이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지를 구별시켜준다. 내가 지적했듯이, 그 관계는 비록 생물학적 주장이 생물철학 논증에서 전제로 쓰일 수 있을지라도) 생물학적 주장과 철학적 주장의 혼합은 아니며, 그리고 엄밀한 생물학적 전제로부터 철학적 주장을 합의하는 것도 아니다. 그 관계는 또한철학적 주장을 생물학적 주장으로 범주 오류를 포함) 환원하는 것도아니다. 생물학과 철학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는 상당히 느슨하긴 하지만, 일찍이 검토되었던 대안보다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주 일반적으로 말해서, 생물철학자들은 철학적 이론화를 제약하고, 안내하고, 고무하기 위해 생물학을 이용한다. 그들은 철학 내에 어떤 개념적 선택지를 차단하기 위해 생물학을 이용한다. 그러는 와중에, 그들은 개념적 결정 공간을 관통하는 통로를 개척하기 위해 생물학을 이용한다. 그리고 그들은 생물학적 모형이 철학적 목적에 편익을 제공할 수있도록 영감을 제공하는 자원으로 생물학을 이용한다.
만일 당신이 존 서열(J. Searle)처럼 의식이나 이성에 있어 단계적이고 점차적인 이행(gradations)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결국당신은 "강한 인공지능(Strong Al)"은 불가능하다고 또는 의식은 불가해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데 이를 것이다. 이렇게 이론적 공상이라는 스스로 부과된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필요한 것은 내가 "어느 정도"라는 기능어(sorta operator)라고 부르는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것이 작동하는 것을 보기 위한 좋은 방법은, 연산에 대한 튜링(A. Turing)의 혁명적 아이디어를 진화에 대한 다윈의혁명적 아이디어와 나란히 놓는 것이다. 다윈 이전의 세계는 과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통에 의해 결합되어 있었다. 우주의 모든 것들은 가장높은 존재("인간")에서 가장 낮은 존재(개미, 자갈, 빗방울)에 이르기까지, 더욱더 드높은 존재인, 신의 창조물이다. 신은 전지전능한 지적 창조주로 두 번째 가장 높은 존재인 인간과 놀라운 유사성을 갖는다. 이것을 창조의 점적(點) 이론(the trickle-down theory of creation)이라하자. 다윈은 이것을 창조의 용솟음 이론(the bubble-up theory of crea-tion)으로 바꿨다. 19세기에 다윈 비판자 중 하나가 이것을 다음과 같이생생하게 표현했다. 우리가 다뤄야만 하는 이론에서는 절대 무지 (Absolute Ignorance)가기술공이다. 그 때문에 전체 체계의 기본 원리로서, "완벽하고 아름다운기계를 만들기 위해서, 그것을 어떻게 만들지 아는 것이 필수가 아니다" 라고 선언해도 좋다. 이 말을 주의 깊게 검토해보면, 그 이론의 본질적인 취지를 축약된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고 또 다윈 선생의 의미를 전부몇 마디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기묘하고 전도된 추리에 의거해서, 창조적 기술이 이룬 모든 성취들에 있어서 절대 무지가 절대 지혜를 일어나게 하는 것으로 충분히 평가될 수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Mackenzie 1868).
다윈주의 힘은, 인간과 다른 피조물로 하여금, 믿음 성향과 현재 믿음을 포함하여(심지어 그 믿음이 틀린 것일지라도), 그들의 환경에 적응적인 결과물을 가지도록 이끈다. 대중 물리학, 대중 생물학 그리고 대중심리학을 한번 생각해보자. 또 종교적 믿음, 이방인, 외국인, 여성 그리고 정신질환과 관련된 믿음, 확률과 관련된 믿음 등등을 생각해보자. 그러한 믿음 목록은 대략적으로 유용하나 명백히 틀린 것이다. 그렇게 적응적 대가 때문에 우리가 갖게 된 믿음 목록은 끝이 없다. 그렇게 일련의 도덕 규범들을 살펴보면, 다윈주의적 혈족(Darwinian pedigree)이 그러한 믿음의 음, 정확함, 진실함 등을 서명해주거나, 보증해주거나, 정당화시켜주는 어떤 경향도 갖지 못함이 드러난다.
"건강에 유익함" 으로부터 "도덕적으로 옳은 것임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흄의 금지령을 잘 알고 있다. 데닛 같은 일부 학자는 흡에 대한 도전으로 이렇게 응답한다. "무엇에서 ‘당위‘가 추론될 수 있는가?" 가장유력한 대답에 따르면, 도덕은 어떻게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즉,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혹은 어떤 존재일지에 근거해서, 그리고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혹은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지에 근거해서 탐색해봐야 한다. 만약 그것이 자연주의라면, 자연주의는 결코 오류가 아니다. 누구도 도덕이 인류의 본성에 관한 그러한 사실들과 관련된다는 것을 진지하게 부정할 수 없다."(Dennett 1995, p.468) 이런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응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것 같다. "우리와 같은 생명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낳을 가능성을 증진시켜준다는 이유만으로 본성과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무엇이 좋은가?" 이 질문은무어(G. E. Moore)의 "열린 질문 논증을 즉시 떠올리게 해준다. 다윈의 적합도와 관하여 무엇이 그리 좋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