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과 맑스 철학의 자유에 관한 사유들






개인적 자유, 즉 특수성의 권리는 헤겔에게 현대적인 
법[권리]에 대한 관점의 전제가 아니라 결과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결과로부터매우 포괄적인 귀결이 도출될 수 있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하나의 본질적인 귀결은 인격으로서 
인간의 평등에 대한 사고다. "인간은 그가 유대인,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독일인, 이탈리아인 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인• 간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사유가 적용되는 이러한 의식은 무한한 중요성을 갖는다. 
이를 통해 인간임(Menschen-sein)은 하나의 법적 규정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 헤겔이 유대인의 시민적 지위에 대한 통찰 속에 언급하듯 - "평면적인 추상적인 성질 이상의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그의 단순한 인간임을 통해, 게다가 자연으로부터가 아니라, 현대성의지반 위에서 비로소 법적 주체가 된다는 사실은 인권에 대한 헤겔의 관점을 보여 준다." 말하자면, 인권은 사회적으로 매개된 자연권이라는 역설적인 지위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성에 이르러 비로소 법은 인간임을 권리 규정으로 구성한다.

보편성에 대항하여 특수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보편성의 전체주의적인 요구를 저지할 수 있는 필수적인 수단이다. 반대로 특수성의 자립화는 정치적 공동체의 파괴 위험을 낳는다. 그것은 헤겔이 보기에 시민사회의 고유한 동학과 더불어 실재적으로 된 위험이다. 왜냐하면 시민사회는한편으로 모두가 자신의 생활필수품을 노동을 통해 벌어들이기를 요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에 대한 어떠한 해답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분명히 직시했다. 이것은그에게 주변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시민사회가 일종의 사회적 수준에서인격적 자유의 무대라면, 시민사회의 모순을 통해 바로 이 영역 안에서 인구의 거대한 부분이 그들의 자유의 실현으로부터 배제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여기에 규제적으로 개입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헤겔의 희망이었다.

맑스에게 독일해방의 긍정적 가능성"은 현존하는 사회적 정치적 실재에 대해 부정적 보편으로 관계하며 이를 통해 그것을 총체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사회적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에서 비롯한다. 그것은 "시민사회의 계급이 아니며 [・・] 보편적 고통에 의해 보편적 성격을 얻게 되어, 어떠한 특수한 부당함이 아니라 부당함 자체가 그들에게 실행되기에 어떠한 특수한 권리도요구하지 않는 [・・・] 급진적 사슬을 지닌 계급이다. 이들은 "인간의 완전한상실"이며, 이 때문에 이들은 오로지 "인간의 완전한 회복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맑스의 인상적인 레토릭은 그가 여기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절대적 부정성으로부터 발생하는 현실에 대한 절대적 부정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다. "인간을 인간의 최상의본질로 설명하는 191 그러한 철학 -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을 헤겔 철학의실현이자 동시에 부정으로 이해했던 포이어바흐의 철학은 여기서 해방의 "머리"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심장"으로 기능한다. "모든 조건들이 충족되면, 갈리아의 수탉 울음소리에 의해 독일의 부활일이 선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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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사상과 철저한 중국공산당의 지도이념에
입각한 해석으로 쓰여진
책이라 매우 비판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경제전지구화, 세계일체화 혹은 인터넷문화 시대의 도래는 결코 민족성의해소를 의미하지 않고, 전 근대문명이 이미 아무런 작용도 없음을 의미하지도않는다. 
중화민족 및 그 문화는 수천 년 동안 형성된 자신의 정신세계, 신념신앙,궁극적인 관심, 사고와 행위방식, 윤리생활의 질서, 가치이념, 심미적 취향이다.
이러한 것들은 물론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끊임없이 발전하지만 여전히 하나로관통되는 정신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중화민족 및 그 문화가 강대하고 오래갈수 있는 근거이다. 
중국문화는 종래로 다원적이고 다양하였다. 유가, 도가, 묵가및 제자백가, 도교, 불교 및 중화 각 민족 역사상의 여러 가지 문화 및 여러유파들은 문화적인 자원으로서 모두 보물임에 틀림없고 오늘날 동등한 가치와의의를 가지고 있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문화적인 자원을 존중하여야 한다.
물론 기술에는 전공이 있다.
유학은 농업문명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화민족의 정신적인 형태이고, 중국 내지는 동아시아 사회문화의 결정이며, 동아시아 각 민족의 민족 성격,
궁극적인 신념, 생활준칙, 생존지혜, 치세방략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유가가진한 이후의 사회에서 주도적인 사상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유가가 전통적인전장제도를 계승하였을뿐더러 또한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게 새롭게 바뀌고
그대로 따르거나 개혁하고 덜고 더함에 능하였던 
것과 갈라놓을 수 없다. 
따라서 유가문화는 중화민족정신이 집중된 가장 
대표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시대와 더불어 발전하는 풍격의 
시대적인 특성을 가지고있다. 
한때 휘황찬란하였던 중국 농업사회의 유가문화의 
많은 요소들 특히 정신적인 요소들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가치와 
의의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룹의식과 심리로서 유가문화는 오늘날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 P25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가 유학을 창립한 이래로 청대에 이르기까지 유학은 줄곧 끊임없이 발전하고 확대되었다. 한대 이후의 유학은 심성의학문 혹은 고중학의 범위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의 정치사무 교육사경사박고 문장자집등 여러 방면에서 선진유가의 방대한범위를 따라 확장되어 사회 전반에 깊이 침투됨으로써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적용하였고 이끌어 주었다. 유학은 정치제도, 사회풍습, 교육이념 및 개인수양면에서 영향을 발휘함으로써 이천오백여 년 동안 중국인들의 생활방식, 행위방식, 사유방식, 감정표현방식과 가치와 취향의 결정체가 되 정부와 민간의대다수 사람들의 신념, 신앙 내지는 이른바 안신입명 도로서 심지어의백성들이 날마다 사용하면서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유학의 지위는어떤 사람, 어떤 학파의 주관적인 염원 혹은 감정에 의하여 확정될 수 있는것이 아니다. 유학이 중국 사회와 민간문화의 주요한 조류를 형성하게 된 것은유학의 기본 정신, 방대한 영향 범위, 역사적인 발전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확립된것이지 결코 개인의 염원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일부 유가문화를 공격하고반론하는 일부 사람들은 유학을 단순화하여 유학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중국사회와 중국 역사의 발전을 추상화하였다. 사실 중국의 전통사회는 바로 유가식사회이고 전통문화의 밑바탕과 주류는 유가이며 전통적인 중국 사람들의 성격또한 유기적이다. 반대로 말하면 유가 혹은 유학이 중국에서의 역할 혹은 기능은서양의 기독교나 천주교, 러시아의 정교, 인도의 힌두교, 아랍 세계의 이슬람교와유사한 것으로 모두 종족문화의 자기 정체성의 근거이자 윤리인식의 핵심이다. - P35

과거에는 선진유학이라고 하면 그저 공자맹자순자를 말하였는데, 이는간이나 상해박물관 초간을지나치게 간단한 것이다. 최근에 출토된읽게 되면서 선진유학사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은 유정이다.
육경은 선진유학의 뿌리이다. 유경 다음이 공자이고, 공자 다음이 바로 우리가두 번째로 주목하여야 할 점, 바로 칠십자이다. 칠십자의 자료는 문헌 가운데에서 고찰할 수도 있고 출토된 문헌에도 관련된 자료가 있는데, 정현에서출토된 유언설원과공자가에서 모두 칠십자를언급하고 있다. 칠십자 이후 각 학파가 발전하였고 나중에야 비로소 맹자와순자의 두 대중이 나타나게 되었다. 맹지는 심성설의 맥락으로부터 내성에서 외왕에 이르고, 순자는 사회학 내지는 제도화된 예학의 맥락으로부터유학을 사회 전반으로 펼치고자 하였다.
육경의 자료는 최근에 출토된 간사와 백서에도 적지 않은데 백서,간서의 주역」, 「시경 공자가 한 詩), 상서』 등이 대표적이다. 육경을 해석한자료는 칠십자와 관련이 있다. 간서와 백서의 자료에는 일부 경을 해석하는전 · · 설 등도 포함된다. 유가는 파벌이 많은데, 단순히 여덟 가지만있는 것은 아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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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학사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이 돋보입니다.
















































주희는 인심이 이기적인 인욕으로 변화하여 도심과 대립하게 되는 상황에서 도심을 선택하여 인심을
통제하는 방법에 관해 논함으로써 도덕철학의 신기원을 열게 된다. 
이후 조선성리학에서도 지각론과 연계되어 있는 
인심도심의 문제에 대해 저마다 다른 해법을 제기하고였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황은 지각 내용에 의거하여 사단과 철정을 도시과 인심으로 간주하되 각각 ‘리의 발현‘과 ‘기의 발현‘으로 양자를 구분했던 반면, 이이는 사단 칠정을 ‘기의 발현‘이라는 하나의 심리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설명하되 감정에 의의 계산하고 비교하는 사고가 더해져야 인심과 도심의 구분이 생기게 된다고 본다. 
나중에 정약용은 이황과 이이의 상반된 인심도심론을 종합지양하면서 덕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윤리학을 제시하게 된다.
한국유학에 대한 철학적 접근법은 외부로부터 어떤 것을 가져와서 새롭게 고안해야 할 것이 아니라 성리학 내에 이미 존재하는 철학적 문제들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성리학의 본체론과 지각론, 인심도심론의 주제들은 비록 정확히 꼭 들어맞지는 않더라도, 서양철학의 존재론우주론 인식론, 윤리학에 대체로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주제들에 초점을맞춰 한국유학을 조명하는 것은 전지구적 세계철학이나 보편철학을 염두에 두면서 소통과 통합을 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성리학의 주제들과 이론들은 세계철학과 소통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리학의 문제와 이론에 의거하여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곧한국유학에 대한 가장 적절하고 합당한 철학적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이의 이기원론 우주론은 장재의 기원론을 비판하의면서 
등장한 우주론이다. 
이 점에서 정이의 우주론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장재의 기의 우주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북송시대에 주돈이나 소옹의 새로운 우주론적 견해들이 등장하게 된사상적 
배경에 대해서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이 장재는 "기의 모이고 흩어짐과 태허의 관계는 얼음이 얼고 녹는 것과 물과의 관계와 같으니, 태화가 곧 기여서 두는 없음을 알 수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태허"란 텅 비어 있는 큰 공간이란 뜻으로서 일정한 조화를 지닌 것이므로 "태화"라고도 칭한다. 장재는 이러한 텅 빈 공간태허태학이 진공 상태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너지로서의 기가 채워져 있는 것으로 보았다. 물질 -에너지로서의 기는 용축하여사물을 이루다가 그 사물이 사멸하면 그것을 구성했던 기는 다시 분산하여 태허의 우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었다가 다시 얼음이 녹으면 물로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장재의 일기를 중심으로 하는 우주론에는 오늘날 열역학 제1 법칙과 매우 유사한 일기의 존재는 영원히 보존된다는 견해가 함축되어있다. 즉, 물질에너지로서 기의 총량은 일정하게 변하지 않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장재가 개별자의 기와 우주의 태허지관계를의얼음과 물의 관계로 비유한 것은 이러한 일기 보존의 법칙에 근거해 있다.
물이 얼음이 되었다가 다시 녹으면 물로 돌아가듯이, 개별자가 소멸한 뒤그것을 이루는 기는 다시 그 근원인 태허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일기의 총량은 일정하다는 것이다.
정이는 장재와 마찬가지로 기의 총량 보존이라는 우주론적 원칙에 근거하여 노자의 본체론적 우주론을 비판한다. 이는 "시간에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없는 것(무)은 없다"고 말한다. 없던 것이 무로부터새롭게 생겨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전제 위에서 그는 장재와 마찬가지로 ‘노자의 ‘허공으로부터 기를 발생시킨다‘는 말은 틀렸다"고 말함으로써 노자의 본체론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말하자면,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서 물질-에너지인 기의 총량은 일정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기를 생성시키는 신비로운 어떤 실체를 따로 상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정이는장재와 같은 맥락에서 노자의 본체론적 우주생성론을 비판했던 것이다.

정이가 말한 조화라는 것은 기화 작용을 가리키는데, 운동과 정지,음과 양의 기의 작용을 통해 사물을 생성하는 것을 말한다. 즉,우주의 조화 작용에서는 항상 새로운 기가 
사물을 생성하지, 이미 한번 사물을구성했었던 기가 다시 우주 조화에 참여할 수는 없다. 
이미 사물을 구성했다가 ‘분산된 기‘는 ‘큰 화로‘와도 같은 우주에서 완전히 소진하여 우주끝으로 흩어져 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사물을 구성하는 유용한 기가 될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큰 화로‘로 비유되는 정이의 우주 모델은 ‘물과 얼음‘으로 비유되는 장재의 우주론과 완전히 대조된다고 하지 않을 수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장재 우주론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정이가물질-에너지적 기와 다른 또 하나의 실재로서 리를 상정한다는 데 있다.
정이는 다음처럼 말한다.

만약 이미 돌아가 버린 기가 다시 장차 바야흐로 펴질 기가 되고 반드시 이것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천지의 조화와는 전혀 같지 않다. 천지의 조화는 자연히 생고생하여 끝이 없으니, 어찌 이미 무너진 형체와 이미돌아가 버린 기에 다시 근거하는 것을 조화라고 하겠는가? (・・・중략) 기는자연히 생한다. 인간의 기는 진원에서 생고생한다. 하늘의 기 또한 자연히생하고 생하여 끝이 없다. (・・・중략..) [기] 자연히 생하여 갔다가 오고 접혔다 펴질 수 있는 것은 단지 리 때문이다. 성하면 곧 쇠함이 있고, 낮이면 곧 밤이 있으며, 가면 곧 봄이 있다. 천지 안은 큰 화로와 같으니 어떤 사물이 녹아타지 않겠는가?

"본체와 현상은 근원을 하나로 하고,
드러난 것과 은밀한 것은 간격이 없다"는 말은 노자나 화엄종과 마찬가지로 중국철학 전통에서의본체와 현상의 합일적 사유를 나타내는 것이긴 하지만, 지각론적 관점에서 현상계 사물에는 형이상의 본체인 리가 관통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형이상학과 성격을 근본적으로 달리 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장재의 기일원론과 정이의 이기이원론으로 대표되는 송대의 우주론은 당시 형이상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노불의 본체론을 비판하면서등장한 것이다. 특히, 정이는 장재의 기록을 일정부분 승인함으로써 자의 우주생성론에 대한 비판에 동참하였지만, 더 나아가서 기일원론을 비판하고 이기이원론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우주론을 제시한 것이다. 특히 정이의 이기이원론적 우주론은, 주희도 주장한 것처럼,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합치되는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정이는 정호와함께 주돈이에게 수학할 때 그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았지만, 이후 자신들의 이원론 체계를 수립하면서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기존의 본체론이 우주의 시작점으로서 모종의 초월적인 본체를 상정하고 이것으로부터 기를 포함한 천지만물이 생성되어 나온다고 보았던반면, 주돈이와 장재, 그리고 정이의 우주론은 공통적으로 물질에너지로서의 기가 원래부터 항상 존재해 왔다는 견해를 나타낸다. 특히 정이는기와 더불어 우주론적 원리나 법칙으로서 리의 존재를 상징함으로써 이후 철학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리의 존재에 관한 정이의 철학적 견해는 우주론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본성에 관한 논의에서 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이는 도가와 더불어 당시 형이상학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었던 불교에 대해 비판하면서 우주론에서처럼 새로운 인간관과 심성론을 구축하였다. 당시 불교는 중국화된 불교로서 화엄종과 선종이 주류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심성 개념은 심리학적인 인간의 마음과 본성을 가리키기보다는 오히려 본체론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말하자면, 성은 현상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불생불멸의 본체이고, 심은 본체가 현상적으로드러난 작용을 가리킨다. 현상적 세계는 발현된 의식과 일치되는 것이고, 그 안에는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본체인 성이 내재해 있다. 그러나 본체와 작용의 관계는 마치 바다 자체와 파도와 물거품이 일어나는 현상적 바다가 다르지 않고 하나인 것처럼 일체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노자와도 상통하는 일원론적인 본체론이다. 노자의 본체론에 대한 정이의 비판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새로운 우주론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면, 불교의 본체론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심성 개념을 제시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정이는 철학사상 최초로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 마음이발 상태에서 대상적 원리들을 궁구하고 인식하는 방법으로 간주하고 지각론적으로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천하의 사물들은 모두 리로써 비출수가 있으니,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다‘고 하니 한 사물에는반드시 하나의 리가 있다. 마음은 그것을 궁구하여 알 수 있는 능력이70있기 때문에 ‘격물‘함으로써 사물의 이치를 알 수 있다." 대상적 탐구로서 격물치지에 대해 정이는 다음처럼 말한다.

‘격‘은 궁구한다는 것이고, ‘물‘은 이치와 같으니 ‘그 이치를 궁구한다‘고말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 이치를 궁구한 후에야 앞을 지극히 할 수 있으니, 궁구하지 않으면 지극히 할 수가 없다. ‘격물‘이라는 것은 도에 나아가는 시작이니, 사물을 궁구하고자 생각했다면 진실로 이미 도에 가까운 것이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마음을 거두어 들여서 풀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정이는 격물치지와 더불어 수양의 방법으로서 경을 제시한다. 격물치지가 대상을 궁리하여 그 이치를 인식하는 학문의 방법이라면, 경은 마음의 주체의식을 기르는 수양법이다. 경으로 주체의식을 함양하고 격물치지로 학문을 진전시키는 것은 수양방법상의 두 축을 이룬다. 정이는 함양은반드시 경으로 해야 하고 학문을 진보시키는 것은 치지에 달려 있다"고말했는데, 이러한 양대 방법론은 이후 세부적인 조정이 가해지긴 하지만주희에 의해 수용된다. 또한 두 방법 중에서도 "도에 들어감은경만한 것이없으니 능히 치지하되 경에 달려 있지 않은 경우는 없기 때문에, 마음의 주체성을 기르는 경의 함양법이 격물치지의 토대를 세우는 공부법으로서 좀 더 중시된다. 정이는 경으로써 마음의 주체의식을 확고히 세워야한다는 자신의 견해가 도가나 불교의 수양론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고주장하면서 다음처럼 말한다.

배우는 자가 먼저 힘써야 할 것은 진실로 마음의 의지에 있다. 보고 들으며알고 생각하는 것을 물리쳐서 없애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성인을 끊고 지혜를 버리는 것‘이다. 사려함을 물리쳐서 없애려 하고 생각이 혼란스러운 것을 근심하는 것은 반드시 [선종의] 좌선하여 깨달음의 상태로 들어가려는것이다. (중략..) 인간의 마음은 만물과 교감하지 않을 수 없으니, 또한 그것으로 하여금 사려하지 않게 만들기는 어렵다. 이것을 면하고자 한다면, 오직 마음에 주체성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주체가 되는가? 경할 뿐이다.

정이를 포함한 북송 신유학자들의
철학은 우주론과 인간론의 두 영역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적절했지만, 
주희는 그와 같은 구조를 탈피하여성리학의 새로운 
이론들을 정립했다. 
이는 이전의 체용 관계 중심의 형이상학본론을 심물 관계 중심의 도학으로 전환시켰지만, 주희는 그와 같은 심물 관계론 자체를 반성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출범시켰던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철학적 사유는 ‘지각‘이라고 하는 인간의 인지 기능에 대한 반성적 탐구와 그 같은 지각에 근거한 도덕철학적탐구를 의미했다. 주희의 지각 이론에 대해서는 이미 전문적으로 다룬 바있으므로 "여기에서는 한국유학의 철학적 문제와 흐름을 해명하기 위한목적에 관련시켜서 간략히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한편, 주희의 지각론에 입각한 도덕철학은 ‘인식‘과 ‘도심‘이라는 두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도덕철학이 지각론에 입각해 있다고 말한 이유는 그가 인심과 도심을 지각된 내용에 근거해서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각에 관한 인식론적 탐구와 인심도심에 관한 도덕철학적 논의는 주희 심성론의 두 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전 북송신유학의 우주론과 인간론이라는 접근법은 주희에 있어서는 지각론과 인심도심론이라는프레임으로 대치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주희 지각론의 형성과정을 송대 이전의 전통 형이상학이라 할 본체론에 대한 비판이라는맥락에서 조명한 뒤 그의 지각 이론이 지니는 체계와 성격을 개괄적으로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지각된 내용에 근거하여 구성하게 되는 인심도심론의 형성 과정과 구조, 특징 등을 살펴볼 것이다. 이 같은 탐색을 통해 주희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도덕철학과 정이가 추구했던 도덕적 형이상학의 완성을 목표로 했다는 점이 해명될 것이다.

정이의 도학과 성리학에 대한 접근법은 우주론과 인간론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보다 적합했던 반면, 주희의 경우에 있어서는 지각과 인심도심의 문제가 가장 큰 철학적 문제로서 간주될 수 있다. 비록 이전 철학과달리 심물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지각의 관점이 정이의 우주론과 인간론에 관통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지각과 인심도심이라는 인식론과 도덕론의 문제를 전면적이고도 반성적으로 사유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주희에이르러서였다. 다시 말해서, 주희는 우주와 인간에 대해 범범하게 사유다기보다는 정이의 성리학에 근거하되 지각과 도심의 문제를 자각적으로 성찰하고 천착했다는 데 그 철학적 독창성이 있다. 즉, 성이의 지각론적 관점을 계승하되 그에 비해 지각과 도심의 문제에 내향적으로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희의 성리학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주론과 인간론보다는 지각론과 인심도심론의 틀로써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 

주희는 「중용장구서」에서 "정밀히 함은 저 두 가지 사이를 살펴서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요. ‘한결같이 함은 그 본심의 바름을 지켜서 떨어지지 않는것"이라고 말한 것을 「중용」에 나오는 "선을 택하여 단단히 지킨다‘는 구절과 연결시킨다. 그는 "선을 택하여 단단히 지킨다‘는 것은, 정밀하게하고 한결같이 하는 것을 말한다"14" 고 한다. 즉, ‘정밀히 힘‘은 마음을 세밀하게 살펴서 인심과 도심을 구별하여 이 가운데 도심을 택한다는 것이고, ‘한결같이 힘‘이란 선한 도심을 굳게 지킨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주희는 다음처럼 말한다.
인심과 도심은 본디 하나의 사물일 뿐이지만, 지각한 것이 같지 않다. 오직 정밀히 하고 오직 한결같이 한다‘는 것은 두 가지 공부이다. ‘정밀히 함은이 사물을 변별하는 것이요, ‘한결같이 함은 변별한 뒤에 또 그것을 단단히지켜야 한다. 만약 변별하지 못할 때 다시 무엇을 단단히 지키겠는가? 만약변별한 뒤에 다시 단단히 지키지 않으면, 길게 밀리 가지 못하니. 오직 이와같아야 중도에 합할 수 있다. ‘오직 정밀히 하고 오직 한결같이 한다‘는 것은
‘선을 택하여 단단히 지킨다‘는 것이다. 149

<태극도의 연원과 ‘무극‘의 해석에 관련하여 지금도 학자들의 견해가엇갈리고 있긴 하지만, 주희가 주돈이의 일생과 그 학설을 오랜 시간에 걸쳐 면밀히 연구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주이가 태극 개념을 극과 일치시킴으로써 자신의 독창적인 우주론을 제시했다고 보는 주희의 해석은 대체로 객관적이고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과학이나 학문은 당대의 여러 전통에 기원하는 많은 사상 조류들이 결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근동지역에서 아라비아 숫자와 수학이 유입되지않았다면, 근대 유럽의 고전역학이 과연 형성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의 물리학과 우주론도 오로지 서양의 고전 역학과우주론에서 기원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현대 우주론은 서양의고전역학과 우주론뿐만 아니라 종교와 예술, 철학 등 여러 분야로부터 영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양 등 다른 문화전통으로부터도 일정한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태극도설의 우주론 역시 도교와 불고, 그리고 『주역』의 기론 등으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들을주돈이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를 통해 종합하고 새롭게 재해석한 우주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요컨대, 주돈이의 ‘태극도설은 리와 기의 이원론적 구조를 분명하게 천명하지 못했다는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기존의본체론적 우주생성론과는 판연히 다른 입장의 우주론이라고 할 수 있다.
천명도설은 이와 같은 태극도설』의 우주론에 대체로 근거해 있기 때문에 그 우주론적 핵심 전제를 공유한다.

천명도설은 이와 같은 태극도설의 우주론에
대체로 근거해 있기 때문에 그 우주론적 핵심 전제를 공유한다. 
그렇다면 두 도설의 우주론적 공통점은 무엇인가? 
먼저, ‘태극도설과 천명도설은 이기이원론을 우주론적 골자로 삼고 있다. 이기이원론이란 물질-에너지를 의미하는 기이외에 또 다른 우주론적 실체로서의 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리는 ‘형체를 이루지 않는 것으로서, ‘형체를 이루는 물리적인 기에대해 규칙성을 부여하는 원리나 법칙을 의미한다. 현상계의 사물들은 리와 기의 결합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지만, 기로 이루어진 물질적 형제 안에내재해 있는 형이상의 리를 인간은 볼 수 없다. 
그러나 본체계인 리의 관점에서 보면,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과 사태들의 운동과 변화의 원리는 이미 하나의 리 안에 모두내재해 있다.
이러한 리와 기의 긴밀한 결합 관계에 대해 일찍이 정이는 
"움직임과 고요함에는 시작점이 없고 음과 양에는
시초가 없으니, 도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던 것이다. 
즉, 원래부터 존재해 있는 기의 움직이고 고요하며,
음적이고 양적인 변화와 작용들은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까닭이나원리로서의 리에 의해 가능하지만, 
그러한 리는 애초부터 기와 결합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주의 시작과 끝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황에 의하면, ‘태극‘이라는 개념은 우주의 생성과 자연 조화의 영역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 행위나 수양의 노력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반면 천명도설의 ‘천명‘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만물이 부여받은 직분으로서의 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내적으로 "직분과 도리를 행해야 한다"는 당위적 수양의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이황은이것이 「중용」에서 솔성, 수도 존양, 성찰이라고 하는 구체적 실천과 수양법을 말하게 된 이유라고 본다. 도덕적 수양과 당위로 이어지는 직분과도리는 결국 마음 내적으로 자각해야 하는 것이므로, ‘천명‘은 ‘태극‘에비해 주체의식과 지각에 좀 더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천명도설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이황의 도덕적 사유는 사찰변을 거치면서 지각된 당위의식에서 도덕적 선악의 기준을 찾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천명‘ 개념은 ‘태극‘에 비해 인간적 입장에 친화적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하늘이 개별적 존재자에게 부여하는 명령"이라는 뜻으로서 인간과만물이 부여 받은 직분과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천명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만물에 똑같이 부여된 것이지만, 특히 자신의 직분을 자각하고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행하는 이른바 수양의 노력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인 인간에게만 실현이 요구되는 도덕적 개념이기도 하다.
만약 이와 같은 천명의 도덕적 함의를 계속 미루어 나간다면, 천명은 마치도덕적이고 당위적인 명령처럼 인간의 지각 작용에서 당위의식이나 의무감으로서 자각될 것이다. 나중에 이황은 사단칠정논변 과정에서 이와 같은 천명의 함의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면서 그의 호발설을 정립하게 된다. 사단과 칠정의 지각 내용을 발과 기발로 나눈 것은 천명의 자각을 외물에 대한 일반적인 감각 내용과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태극도설은 인간 존재를 설명할 때 형세가 생기면
정신의 지각 기능이 작동하고 오성이 감동하여 선악이 나뉜다고 
언급할 뿐, 선과 악이 어떤기준에 의해 나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자연의원리에 근거해서 도덕 수양을 이끌어 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심성과 지각을 중시하는 천명도설은 도덕을 설명하는 상반된 두 가지 입장이 가능하다. 즉 하나는 우주의 리와 기를 인간의 영역에 그대로 적용하여 선악을 도출하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태극도설처럼 자연주의를 나타내는데, 인간도 천지우주와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므로 지각과 행위를 객관적 상황에 부합 절도에 맞음으로써 그것이도덕적인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객관주의와 결과주의로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선과 악이 나님에 있어 지각된 내용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즉, 인간의 주관적인 지각 내용이 하늘의 명령] 혹은 그것의 내재적 양태인 도덕성의 명령에서 근원한 당위의식일 때,
이것이 선과 악의 근본적인 기준이 된다는 입장이다. 비록 일반적인 감정의 선악 여부를 모두 이러한 당위의식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선악의 궁극적인 기준은 당위적인 의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것처럼, 주희는 공리주의 입장을 나타냈던 공학파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의 입장은 일의 결과나 공효를 따지지 말고 행위의 동기로서 당위
의식이나 의무감을 기준으로 인심과 도심, 선과 악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천명도설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단칠정논변은 태극과 다른 ‘천명‘의 함의가 배경에 깔려 있었다. 
태극은 객관주의적인 우주론의 성격을 띠는 반면, 
천명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명령을 직분과 
도리에대한 당위의식으로서 주관적으로 
자각하도록 이끄는 특성을 띠는 것이다.
이황은 처음에 "태극도설에서 유래된 우주론적존재론적 
도덕론의 입장에서 정지훈과 함께 천명도설 수정하였고, 
이 과정에서 사단과 질정을우주론적존재론적 리와 기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방식을 권고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기대승은 상대적으로 천명이 함축하고 있는 
주관주의 입장에입각해서 이황의 사단칠정에 대한 설명을 비판하였다. 즉, 우주론적인 리와기 개념이 인간의 영역으로 확장될 때, 도덕적 선악의 문제는 우주론적리와 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고, 심성과 지각에 관련하여 다른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주론적인 리는 ‘재료를 주재하는 원리 기는 ‘사물을 구성하는 재료‘의 의미를 지니는데, 인간도 우주의 다른 만물처럼 이러한 리와 기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또한 인간의 지각작용도재료인 기와 그것을 주재하는 원리인 리가 결합하여야만 성립되므로, 사단과 칠정을 각각 리와 기로 배속시켜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리와 기라고 하는 지각의 형식은 사단이는 칠정이든 모두 필수적인 것이다.
반면, 도덕적인 선악은 리와 기가 결합하여 발생한 심리적 결과물이 외부환경과 그에 대한 규범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칠정 가운데 심성 작용의 결과물이 외적 규범예의 절목에 부합하는 것을 특별히 사단이라고 지칭할 뿐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사단과 칠정, 선과 악이 나뉘게 되는 것은 절도에 맞음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주희의 철학적 입장과 노선을 이황과 이이 중 누가 더 정통으로 계승하였는가 라는 도통론의 관점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 철학에서는 독창성이 중요하지 누가 무엇을 더 충실히 계승하였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통론은 학문적 논리나 합리성이 기준이 되는 것이아니라, 흔히 자신이 추종하는 인물이나 학파의 정치적 주도권을 획득하려는 의도를 배후에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도봉론은 철학에서오히려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사인 이황이나 이이의 철학을 해석하는 바람직한관점과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주성리학의 철학적 근본 문제, 즉지각론과 
인심도심론의 문제와 방법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다. 
그들의 철학적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각론과 인심도심론의 문제와 접근법이 가장 적절하다.

요컨대, 이황이 지각론에 있어서 주리론(이성주의)을 
나타내는 반면 이는 주기론(경험주의)의 입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주리론은 지각의 두 요소에 있어 리로 지시되는 
당위의 원천으로서의 선험적 도덕성을 중시하는
반면 주기론은 이성을 중시하되 감성의 원천이 
되는 심리 육체적 에너지와 경험적 감각 질료를 
의미하는 기도 주목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는 것으로 말미암아이이는 리의 본연이 순선하다고 함으로써 표면상 맹자의 성선설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리의 본연은 선악을 떠난 가치적인 중립적 상태라고 봐야 한다. 만약 리가 순선하다면, 그것에 의해 선한 도심과 그렇지않은 인심이 지각 상에서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이에 있어 그것은 부정되기 때문에, 선악의 기원은 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리의 본연이기를 타고 발용하여 현상화될 때 그 상태가 선한지 약한지, 인심인지 도심인지는 지각 차원에서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기가 유행할 때 선악을 결정하는 기준은 감정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 없이 절도에 맞는가중절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일반인은 지각 상에서 그것을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성인은 사람들이 선과 악, 인심과 도심을 분별하고 수양의 실천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인심과 도심을 규정하고 그것을 구분하는 객관적 기준으로서의 예를 제정했던 것이다. 리의 본연을 그대로 발현시킨 마음은 감정이 절도에 맞는 상태로서 도심이라고 명명하되, 육체적 형기에 가려진 마음은감정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여 절도에 맞지 않으므로 인심이라고 칭한것이다. 일반인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객관 규범에 비추어 헤아려서 그것이 도심이면 존양하고 확충하며, 그것이 인심이면 그 과불급을 절도에 맞도록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도심이 인심을 통제한다는 것은 둘의 병존과 갈등상태를 말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심적 상태를 살펴서 성인이 만든 규범으로서의 예의 절목에 맞도록 제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리와 기는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아 한 물건인 것 같으나 다르다고 하는 까닭은, 리는 무형이고 기는 유형이며, 리는 무위이고 기는 유위이기 때문입니다. 무형과 무위이면서 유형과 유위의 주재가 되는 것은 리이고, 유형과유이면서 무형과 무위의 그릇이 되는 것은기입니다. 리는 무형이고 기는 유형이므로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되는 것이며, 리는 무위이고 기는 유위이므로 기가 발하여 리가 타는 것입니다. 

이이에 의하면,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천지만물은 리와 기의 두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리는 형이상의 본체적 측면을 나타낸다면, 기는 형이하의 현상적 측면을 가리킨다. 천지만물은 실제로는 리와 기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합쳐져 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인간은 천지만물을설명하기 위해서 리와 기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기는 물질-에너지로서유형의 운동성이 있는 물리적인 실체인 반면, 리는 작용성이 없고 무형인것으로서 물리적 실체를 주재하는 원리나 이유소연에 해당된다. 리는 무형과 무위라는 속성에 의해 만물에 관통하는 초시공적 보편성을 지니는 반면,
기는 유형과 유위의 속성에 의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국한되는 특수성과 개별성을 띤다. 이 점에서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근원적으로 다른 감정이라고 구분한 뒤 이를 각각 도심과 인심에 해당시켰다. 그는 지각 내용이 서로 다른 것으로서 자각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사단도심과 칠정인심을 근원소총래에서부터 다르다고주장했다. 즉, 사단도실은 내적 도덕이성에서 반출된 양심입지이나 법칙을따라야 한다는 당위의식이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감각 질료로부터 촉발된 육체적 감각과 감정으로서의 칠정인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황은 지각의 도덕적 내용은 도덕이성의 원리로부터 나오고 그 밖의 일반적 감각과 감정의 내용은 육체적 형기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함축하는 명제, 즉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발하여 리가 탄다"는 호발설을 제창했던 것이다.
반면 이이는 모든 지각은 "기가 발현하고 리가 타는 하나의 경로"를 통해서만 성립되는 것이므로, 사단과 칠정의 지각 내용의 차이는 자각될 수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성혼이 주희의 중용장구서」의 인심도심의윤리학과 이황의 호발설의 상통성을 지적하자, 이이는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는 것과 달리 인심과 도심은 ‘계산하고 비교하여 따지는 의의 기능이 더해져야 성립되는 것으로서 대립적 관계로 설명 가능하다고 답했다.
리는 단지 기가 발동하여 지각작용을 일으키는 형식적 원리일 뿐 도덕적당위의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발현된 감정이 외적 규범]에 부합하는지의 중절과 과불급의 여부에 의해 인심과 도심, 선과 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결과주의적 윤리학의 입장으로서, 선험적인 도덕성을 신뢰하고 내적 동기나 의무감을 중시하는 주희나이황의 입장과는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동기주의와 결과주의라고 하는이러한 두 윤리학적 입장은 근본적으로 상반된 지각론적 입장에서 야기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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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 직관의 형식은 예술에 속하는바, 이로써 예술은 진리를 의식에 대해 감각적 형상화의 양태로 제시한다; 더욱이 이 감각적 형상화가이런 현상 자체에 한층 고차적이며 심오한 의의와 의미를 갖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예술은 감각적 매체를 통해 개념 자체의 보편성을 파악 가능하게만들고자 의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념과 개별적 현상의 통일이 곧 미의본질이자 예술을 통한 그 본질의 생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론 예술의이러한 통일은 감각적 외면 속에서 실현될 뿐만 아니라, 특히 시의 경우에는 표상의 요소 속에서도 실현된다. 하지만 극히 정신적인 이 예술에서조차 의미와 그 개별적 형상화의 통일은 아무리 표상하는 의식에 대한 것이라고는 해도 현존하며, 모든 내용은 직접적으로 포착되고 표상된다. 무릇주저 없이 단언할진대, 예술은 진리, 정신을 고유한 대상으로 삼는 까닭에,
그 직관을 예컨대해, 달, 대지, 성좌 등등의 특수한 자연 대상들을 통해서는제시할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은 물론 감각적 실존들이긴 하되, 그 자체로 본다면 정신성의 직관을 보장하지 않는 개체화된 실존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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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풀어낸 헤겔의 명저




























이제 예술철학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자연미는 즉시 배제된다. 각 학문들은 자신의 범위를 임의로 구획하는 권한을 갖는다고 일컬어지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의 대상에 대한 그러한 경계설정이 일면 자의적 규정인 듯 비칠 수도 있겠다. [14] 그러나 미학을 예술미에 제한하는 것이 이런 의미에서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꽃들, 아름다운 동물들, 나아가 아름다운 사람들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색깔, 아름다운하늘, 아름다운 강이란 것을 말하곤 하는데, 이 대상들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미라는 특질을 부여해도 좋을지, 그리하여 자연미를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예술미와 나란히 세울 수 있을지에 대한 논쟁에 개입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에 대해 일단 예술미가 자연미보다 한층 고차적이라는 점만은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술미는 정신으로부터 태어나고 또 거듭 태어난 미이며, 정신과 그 산물들은 그만큼 더 자연과 그 현상들보다 고차적이며, 또 그만큼 더 예술미가 자연미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기실 형식적으로 보면, 인간의 머리를 스치는 어떠한 저급한 착상이라도 그 어떤 자연 산물보다 우월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착상에는 항상 정신성과 자유가 현전하기 때문이다. 내용적으로 보면 빗나간 착상은 물론 우연적, 일시적인 것으로서 사라져 버리는 반면, 가령 태양 같은 것은 절대 필연적인 계기로서 나타남이 사실이다; 그러나 태양과 같은 자연존재는 그 자체로서는 무차별적이며, 내적으로 자유롭거나 자의식적이지 않으며, 또한 우리가 태양을 다른것과의 필연적 관계 속에서 고찰한다면, 우리는 태양을 자체로서 고찰하는것이 아니며 따라서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

우선 스스로를 고찰하는 정신은 의식을, 그것도 자기 자신과 자신으로부터 출현하는 모든 것에 관해 사유하는 의식을 소유할 수 있으리란 사실 정도는 인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는 바로 정신의 가장 내밀한 본질적 본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자신과 자신의 산물들에 대해 사유하는 이러한 의식에서는, 이 산물들이 통상적으로 제아무리 많은 자유와 자의를 갖는다고해도, 그 속에 정신이 참되게 존재하기만 한다면, 정신은 자신의 본질적 본성에 적합하게 행동한다. 이제 예술과 예술작품은 정신으로부터 출현하고산출된 것으로서, 비록 그 표현이 감성의 가상을 자신 안에 취하고 정신을감각적인 것에 배어들게 하지만, 그 자체는 정신적 종류의 것이다. 이런 만큼 예술은 그저 외적인, 정신이 결여된 자연보다 이미 한층 더 정신과 그 사유에 가까이 있다. 정신은 예술산물들에서 오로지 정신 자신의 것과 관계할 뿐이다.

그리고 비록 예술작품이 사상과 개념이 아니라 개념의 자기자신으로부터의 전개, 감각적인 것을 향한 외화라고 할지라도, 정신은 외화된 것을 사상으로 변환하고 또한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로 환원시키는 것이기에, 사유하는 정신의 힘은 비단 스스로를 사유로서의 자신의 고유한 형식 속에서 파악한다는 점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감흥과 감성에로의 자신의 외화 속에서 스스로를 재인식한다는 점, 다시 말해 자신의타자 속에서 스스로를 개념화한다는 점에도 있는 것이다. 또 사유하는 정신은 이렇게 타지에 몰두하는 속에서 혹 스스로에게 불성실하여 그 결과그 속에서 스스로를 망각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또한 자신과 구별되는 것을포착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지도 않으며, 도리어 자기 자신과 자신의 대립자를 개념화한다. 왜냐하면 개념은 보편자이며, 이는 자신의 특수들 속에서 자신을 보존하고, 자신과 자신의 타자를 넘어 번져 가며, 그리하여 개념이 향해 가는 외화를 마찬가지로 다시금 지양하는 힘이자 활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상이 외화된 예술작품도 역시 개념파악적 사유의 영역에속하며 또한 정신은 예술작품을 학적 고찰하에 둠으로써 그 속에서 자신의가장 고유한 본성의 욕구를 만족시킬 따름이다. 왜냐하면 사유가 정신의본질이자 개념인 까닭에, 정신은 그 활동의 모든 산물에 사상이 또한 관류케 하고 그리하여 비로소 그 산물을 진정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경우에만 궁극적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더 분명히 보게 되겠지만, 정신의 최고 형식에는 멀리 못 미치기에 학문에서 비로소 진정으로 추인된다.


주지하듯 플라톤은 진이란 개별적인 선한 행위, 참된 의견, 아름다운인간 혹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선, 미, 진 그 자체라고 주장했던 그는 대상이 그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 속에서, 그 속에서, 즉자대자적 존재속에서 인식되어야 하리라는 요구를 철학적 고찰에 대해 한층 깊게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상 미가 그 본질과 개념에 따라 인식되어야 한다.
면 이는 오직 사유적 개념을 통해서만 가능하니, 이를 통해서는 이념 일반및 미라는 특수한 이념의 논리적 형이상학적 본성이 사유적으로 의식화된다. 하지만 미 자체의 이념에 대한 이러한 고찰은 그 스스로가 또다시 추상적 형이상학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이 경우 아무리 플라톤이 그 근거이자 지도자로 여겨진다고 해도, 플라톤적 추상은 미의 논리적 이념을 위해서조차도 우리에게 더 이상 충분한 것이 못 된다. 플라톤적 이념에 점착되어 있는몰내용성은 오늘날 우리 정신의 한층 풍부한 철학적 욕구를 더 이상 만족시키지 못하므로, 우리는 미 이념 자체를 좀 더 깊게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그런즉 우리도 역시 예술철학에서 미 이념으로부터출발해야 하지만, 미에 대해 철학하기가 처음 출발하는, 플라톤적 이념이라는 예의 추상적 방식에만 매달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시작(詩作)의 경우 사람들은 표현대상을 전에 미리 산문적 사상으로 파악하고, 다음으로 이것을 이미지와 각운 등으로 옮기고, 그리하여 이미지적인 것이 단순히 장식물이나 치장으로서 추상적 반성에 부가 되도록 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려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그러한 태도는 조악한 시만을 양산할 뿐이니, 이유인즉 예술적 생산성의경우에는 오로지 그 분리되지 않은 통일로서만 타당한 것이 여기서는 분리된 활동으로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수한 제작이 예술적 판타지의 활동을 이룬다. 이 판타지는 이성적인 것이니 오로지 자신을 능동적으로 의식화해 가는 한에서만 정신으로서 존재하되 그 속에 담지된 것을감각적 형식으로 비로소 자신 앞에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활동은정신적 내용을 지니되 그것을 오직 감각적으로만 의식할 수 있기에 감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이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인생 경험이 많고 기지 또한 풍부하며 재치 있는 사람, 즉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실체로서 사람들을 결합하는지, 또 그들을 움직이며 그들을 주재하는 힘이 무엇인지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만, 이 내용을 스스로 보편적 규칙으로 파악하지 못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편적 반성을 거쳐 설명할 줄도 모르고, 자신의 의식 내용을 현실적이든 허구적이든 항상 특수한 사례로, 적절한 실례 등으로 자신과 타인에게 해명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이의 생각에 모든 것이 구체적이며 시공간상에 규정된 이미지로, 이때어쨌든 고유명사들이나 기타 갖가지 외적 정황들이 빠질 수 없는 이미지로 형상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종류의 구상력은 스스로가 생산적이기보다는 외려 체험된 상황이나 겪은 경험들의 기억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기억은 그러한 사건들의 개별성 및 외적 발생 여건을 갖가지 정황들과함께 보존하고 되살리는 반면 보편적인 것이 그 자체로서 출현하도록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술적, 생산적 판타지는 위대한 정신과 심정의 판타지이며, 표상과 형상을, 그것도 가장 심오하고 가장 보편적인 인간적 관심을 이미지적이며 완전히 특정한 감각적 표현으로 파악하고 산출하는 것이다.

예술은 기실 일체의 가능한 소재들을 직관과 감흥 앞으로 가져와 치장할 수 있는 이러한 형식적 측면도 또한 갖고 있으니, 이는 추론적 사상이일체의 가능한 대상과 행동방식들을 다듬고 또한 그들을 근거와 정당성의로 무장시킬 수 있는 바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내용의 그러한 다양성의경우에는 예술이 촉발하거나 확립해야 할 여러 감응과 표상이 서로 교차·대립하며 또한 서로를 지양한다는 언급이 곧바로 제기된다. 그렇다. 이 측면에서 보면 정녕 예술이 대립적인 것에 열광할수록, 예술은 단지 감정과열정들의 모순을 증폭시키는 것에 불과하며 또한 우리를 취한 듯 비틀거리게 만들거나 혹은 알맹이 없는 사유가 그렇듯 궤변과 회의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소재 자체의 이러한 다양성은 그러한 외형적 규정에 머물지 말 것을 우리에게 강요하니, 까닭인즉 이 다채로운 상이성 속으로 파고드는 이성원리Versonfiger가 그토록 모순적인 요소들로부터 한층 고차적이며 내적으로 한층 보편적인 목적의 출현을 볼 것을, 또 그것을 달성할 줄 알 것을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공동생활과 국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일제의 인간적 능력들과 일체의 개인적 힘들이 모든 측면과 방향으로 전개되고표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궁극목적으로 거론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형식적 견해에 대해서는 이 잡다한 구성들이 어떤 통일성으로 총괄되며 또한 그것들이 어떤 하나의 목표를 그 근본 개념과 최종 목적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즉각 제기된다. 국가 개념의 경우가 그렇듯 예술 개념의 경우에도 역시 한편으로는 특수한 측면들에 공통적인 목적을 추구하려는 욕구와 다른 한편으로는 좀 더 높은 실체적 목적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성립한다.

절대이념의 참된 현실성이 무엇인가를 간단히 특징짓고자 할 때, 그 이념이 곧 정신, 그것도 유한한 우여곡절에 매인 정신이 아니라, 보편적이고무한하며 절대적인 정신, 진리가 진정 무엇인가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규정하는 정신이란 사실을 말해 두어야 한다. 그저 우리의 일상적 의식만을 두고 본다면, 마치 정신이 자연에 대립이라도 하는 듯한 생각이 우리를 짓누르며 이 경우 우리는 자연에 동등한 존엄을 할애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듯정신과 자연을 똑같이 본질적 영역인 것으로 병치하여 관련짓는다면, 정신의 유한성과 한계만이 고찰될 뿐 그 무한성과 진리는 고찰되지 않는다. 말인즉슨 자연은 절대정신에 등가물이나 혹은 경계로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정신을 통해 정립되었다는 지위를 가지며, 이로써 자연은 경계와제한의 힘이 박탈된 산물이 된다. 동시에 절대정신은 오로지 절대적 운동성으로, 따라서 정신 내면의 절대적 분별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제 정신은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분별해 내는바, 분별된 것으로서의 이 타자가 바로 자연이며, 또한 정신은 이러한 자기 자신의 타자에게 그의 고유한 본질을 완전히 충일하게 부여하는 자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스스로가 절대적 이념을 품는 것으로 파악해야 하되, 그 이념은 절대정신을 통해 정신의 타자로 정립되어 있다는 그런 형식을 갖는 이념이다. 그런 한도에서 우리는 자연을 피조물이라고 부른다. 하여 자연의 진리는 정립자 자신, [1291 즉 관념성과 부정성으로서의 정신일지니, 그 까닭은 정신은 스스로를 내면에서 특수화하고 부정하나, 자신을 통해 정립된 것으로서의 이러한자신의 특수화와 부정을 마찬가지로 지양하며, 또한 그 특수화와 부정 속에서 한계와 제한을 갖기보다는 자신과 타자로서의 자신을 자유로운 보편성 안에서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성과 무한한 부정성이 정신의주관성의 심오한 개념을 형성한다. 

정신이 의식의 단계로 올라가 자신을 내면에서 앎의 주체이자 또한 이에 대응하는 앎의 절대적 대상으로 구분함으로써, 절대자 자체가 정신의 객체가 된다. 정신의 유한성이라는 과거의 입장에서는 정신은 절대자를 대립적이고 무한한 객체로서 인식하였고 이로써 절대자로부터 구분되는 유한자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층 높은 사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대자적으로 자기지로 존재하고자 자신을 자신 안에서 구분하며 또한 그럼으로써 정신의 유한성을 정립하고, 이 유한성 내부에서 스스로가 자기지의 절대적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절대정신 자신이다. 그리하여 정신은 자신의 교구를 갖는 절대정신으로, 정신이자 자기지로서 현재하는 절대자로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가 예술철학에서 출발해야 할 지점이다. 왜냐하면 예술미는논리적 이념, 사유의 순수한 요소 속에서 전개되는 절대적 사상은 아니지만 역으로 자연적 이념도 아니니, 그것은 정신적 영역에 속하되 결코 유한한 정신의 인식과 활동에 머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의 왕국은 절대정신의 왕국이다. 여기서는 이 사실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학적인 증명은 선행하는 철학 교과들의 소임이다. 즉 절대적 이념 그 자체를 내용으로 삼는 논리학, 자연철학 및 정신의 유한한 국면에 관한 철학의 소임이다. 왜냐하면논리적 이념이 그 고유한 개념에 따라어떻게 자연의 현존재로 전환하도록 되어 있는지, 이러한 외면성으로부터정신으로, 그리고 정신의 유한성으로부터 다시금 정신의 영원성과 진리로어떻게 해방되어야 하는지는 이러한 학문들에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지고하고도 참된 예술의 존엄에 걸맞은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예술이종교 및 철학과 동일한 영역에 있다는 사실이 즉각 드러난다. 절대정신의모든 영역에서 정신은 자신의 우연적인 세속의 인연들과 그의 목적과 관심의 유한한 내용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즉자대자적 존재의 고찰과 완성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 감으로써 그 현존재의 답답한 제한에서 벗어난다.

이제 관심과 목적의 내용은 우선은 단지 주관적인 것이라는 일면적 형식으로 현존하고 또한 일면성은 한계인 까닭에, 이러한 결함은 동시에 불안, 고통으로서 무언가 부정적인 것으로서, 즉 부정적인 까닭예스스로를 지양해야 하며 따라서 감지된 결함을 교정하고 의식 · 사유된한계를 극복하고자 진력하는 것으로서 밝혀진다. 그리고 그것도 주관적인것에는 그 상대 측면, 즉 객관적인 것이 그냥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 자체에 속해 있으며 또한 그것에 의해 의식되는 이러한 결함은 주관적인 것 자체가 갖는 결함이자 부정이며, 주관적인것이 다시금 그 부정을 위해 노력하는 부정이라는 한층 규정적인 연관성에서 그러하다. 말하자면 주관은 그 개념에 따를 때 즉자적으로 총체적인 것,
즉 단순히 내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외적인 것 일반에 기대어 이루어지는그 실현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주관이 일면적으로 단지 하나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면, 그 즉시 그것은 개념에 따를 때는 전체로 존재하고 실존에 따를 때는 단지 하나의 측면으로만 존재한다는 모순에 빠진다. 따라서자신 속에 있는 그러한 부정의 지방을 통해 삶은 비로소 자신에게 긍정적이게 된다. 이러한 대립, 모순, 그리고 그 해소의 과정을 두루 거치는 것이생명체에게 주어진 한층 고차적인 특전이다; 처음부터 그저 긍정적일 뿐인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삶은 부정과 그 고통으로 나아가 대립과 모순을제거함으로써 비로소 그 자체로서 긍정적이게 된다. 삶이 모순의 해소 없이 단순한 모순에 머문다면, 그 삶은 물론 모순에 즉해 파멸하고 만다.
추상적이긴 하지만 이것이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규정들일게다.

무지한 자는 부자유스럽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저위와 저 밖이라는 생소한 세계가 대면하니, 그는 여기에 속하며, 이 생소한 세계를 자신을 위한 것으로 만들지도 또 그리하여 자신의 것으로서의그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 곁에 존재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통찰의 최저 단계에서 최고 경지에 이르기까지 지식욕의 충동, 인식을 향한 열망은 오로지 예의 부자유스러운 관계를 지양하여 표상과 사유 속에 있는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에서 나올 따름이다. 이와는 반대로 행위에서의 자유는 의지의 이성이 현실성을 얻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의지는 이러한 이성을 국가적 삶에서 실현한다. 참으로 이성적으로 분화된국가의 모든 법률과 제도는 본질적 규정에 따르는 자유의 실현에 다름이아니다. 이 경우 개별적 이성이 이러한 제도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 고유한 본질의 현실성일 따름이며, 또한 이러한 법칙들에 복종할 때 그 이성과 동행하는 것은 그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고유성이다. 종종자의도 또한 자유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자는 그저 비이성적 자유일 뿐이며, 의지의 이성에서 비롯하기보다는 우연적 충동과 감각적, 외적인 것에 대한 그 충동의 종속에서 비롯하는 선택과 자기규정일뿐이다.

자유와 자기만족은 유한성의 측면도 역시 간직하게 된다. 
그러나 유한성이 있는 곳에는 늘 대림과 모순이 또다시 새로이 돌출하며 만족은 비교급을 넘지 못한다. 예컨대법률과 그 현실성에서는 나의 이성원리, 나의 의지, 그리고 그 자유가 인정되고, 나는 인격으로서 간주되고 또한 그 자체로서 존중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재산을 소유하며, 그것은 나의 소유물로 머물러야 한다. 만약 그것이 위협받으면 법정은 나의 권리를 옹호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정과 자유는 언제나 그렇듯 단지 개체적, 상대적인 측면과 그 개체적 객체들에만 그러니까 이 집, 이 금액, 이 특정한 권리나 법 등등 이 개별적 행위와 현실성에만 관여한다. 여기에서 의식이 목전에 두는 것은 개체성들인데, 이것들은 서로 관계하고 또한 관계의 총화를 이루기는 하지만,  다만 극히 상대적인 범주들과 잡다한 조건들 아래서 그럴 뿐이며, 이러한 것들이 지배할경우 만족은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도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제 더욱높은 곳에서 전체로서의 국가적 삶이 내적으로 완성된 총체성을 형성하고있긴 하다: 군주, 정부, 법정, 군대, 시민사회의 제도, 단체 등둥, 권리와 의무, 목적과 그 충족, 규정된 행동양식, 업적을 통해 이 전체는 자신의 일상을 성취하고 또 유지한다. 이러한 전체 조직은 진정한 국가 속에서 내적으로 성숙하고 완성되며 실현된다. 그러나 원칙 그 자체는 그 현실은 국가적 삶이며 또한 인간은 그 속에서 만족을 추구한다, 아무리 그것이 자신의 내적, 외적 분화 속에서 다양하게 전개될지라도 마찬가지로 또다시내적으로 일면적이며 추상적이다. 이 원칙 속에서 천명되는 것은 의지의이성적 자유일 뿐이다: 자유가 현실화되는 곳은 오로지 국가, 그것도 다시금 이 개별적 국가일 뿐이며, 그럼으로써 그곳은 그 자체가 다시금 현존재의 특수한 국면이자 그 개별화된 실제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러한 영역들 속에 있는, 그 세속적이자 다시금 유한한 존재의 양태들 속에 있는 권리와 의무들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 그 권리와 의무들이 그들의 객관성에 있어서나 주관에 대해 갖는 관계에 있어서나 여전히 더욱 고차적인 검증과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정신이 의식의 단계로 올라가 자신을 내면에서 앎의 주체이자 또한 이에 대응하는 앎의 절대적 대상으로 구분함으로써, 절대자 자체가 정신의 객체가 된다. 정신의 유한성이리는 과거의 입장에서는 정신은 절대자를 대립적이고 무한한 객체로서 인식하였고 이로써 절대자로부터 구분되는 유한자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층 높은 사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대자적으로 자기지로 존재하고자 자신을 자신 안에서 구분하며 또한 그럼으로써 정신의 유한성을 정립하고, 이 유한성 내부에서 스스로가 자기지의 절대적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절대정신 자신이다. 그리하여 정신은 자신의 교구를 갖는 절대정신으로, 정신이자 자기지로서 현재하는 절대자로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가 예술철학에서 출발해야 할 지점이다. 왜냐하면 예술비는논리적 이념, 사유의 순수한 요소 속에서 전개되는 절대적 사상은 아니지만 역으로 자연적 이념도 아니니, 그것은 정신적 영역에 속하되 결코 유한한 정신의 인식과 활동에 머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의 왕국은 절대정신의 왕국이다. 여기서는 이 사실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학적인 증명은 선행하는 철학 교과들의 소임이다; 즉 절대적 이념 그 자체를 내용으로 삼는 논리학, 자연철학 및 정신의 유한한 국면에 관한 철학의 소임이다. 왜냐하면 논리적 이념이 그 고유한 개념에 따라어떻게 자연의 현존재로 전환하도록 되어 있는지, 이러한 외면성으로부터정신으로, 그리고 정신의 유한성으로부터 다시금 정신의 영원성과 진리로어떻게 해방되어야 하는지는 이러한 학문들에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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