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풀어낸 헤겔의 명저




























이제 예술철학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자연미는 즉시 배제된다. 각 학문들은 자신의 범위를 임의로 구획하는 권한을 갖는다고 일컬어지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의 대상에 대한 그러한 경계설정이 일면 자의적 규정인 듯 비칠 수도 있겠다. [14] 그러나 미학을 예술미에 제한하는 것이 이런 의미에서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꽃들, 아름다운 동물들, 나아가 아름다운 사람들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색깔, 아름다운하늘, 아름다운 강이란 것을 말하곤 하는데, 이 대상들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미라는 특질을 부여해도 좋을지, 그리하여 자연미를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예술미와 나란히 세울 수 있을지에 대한 논쟁에 개입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에 대해 일단 예술미가 자연미보다 한층 고차적이라는 점만은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술미는 정신으로부터 태어나고 또 거듭 태어난 미이며, 정신과 그 산물들은 그만큼 더 자연과 그 현상들보다 고차적이며, 또 그만큼 더 예술미가 자연미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기실 형식적으로 보면, 인간의 머리를 스치는 어떠한 저급한 착상이라도 그 어떤 자연 산물보다 우월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착상에는 항상 정신성과 자유가 현전하기 때문이다. 내용적으로 보면 빗나간 착상은 물론 우연적, 일시적인 것으로서 사라져 버리는 반면, 가령 태양 같은 것은 절대 필연적인 계기로서 나타남이 사실이다; 그러나 태양과 같은 자연존재는 그 자체로서는 무차별적이며, 내적으로 자유롭거나 자의식적이지 않으며, 또한 우리가 태양을 다른것과의 필연적 관계 속에서 고찰한다면, 우리는 태양을 자체로서 고찰하는것이 아니며 따라서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

우선 스스로를 고찰하는 정신은 의식을, 그것도 자기 자신과 자신으로부터 출현하는 모든 것에 관해 사유하는 의식을 소유할 수 있으리란 사실 정도는 인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는 바로 정신의 가장 내밀한 본질적 본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자신과 자신의 산물들에 대해 사유하는 이러한 의식에서는, 이 산물들이 통상적으로 제아무리 많은 자유와 자의를 갖는다고해도, 그 속에 정신이 참되게 존재하기만 한다면, 정신은 자신의 본질적 본성에 적합하게 행동한다. 이제 예술과 예술작품은 정신으로부터 출현하고산출된 것으로서, 비록 그 표현이 감성의 가상을 자신 안에 취하고 정신을감각적인 것에 배어들게 하지만, 그 자체는 정신적 종류의 것이다. 이런 만큼 예술은 그저 외적인, 정신이 결여된 자연보다 이미 한층 더 정신과 그 사유에 가까이 있다. 정신은 예술산물들에서 오로지 정신 자신의 것과 관계할 뿐이다.

그리고 비록 예술작품이 사상과 개념이 아니라 개념의 자기자신으로부터의 전개, 감각적인 것을 향한 외화라고 할지라도, 정신은 외화된 것을 사상으로 변환하고 또한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로 환원시키는 것이기에, 사유하는 정신의 힘은 비단 스스로를 사유로서의 자신의 고유한 형식 속에서 파악한다는 점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감흥과 감성에로의 자신의 외화 속에서 스스로를 재인식한다는 점, 다시 말해 자신의타자 속에서 스스로를 개념화한다는 점에도 있는 것이다. 또 사유하는 정신은 이렇게 타지에 몰두하는 속에서 혹 스스로에게 불성실하여 그 결과그 속에서 스스로를 망각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또한 자신과 구별되는 것을포착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지도 않으며, 도리어 자기 자신과 자신의 대립자를 개념화한다. 왜냐하면 개념은 보편자이며, 이는 자신의 특수들 속에서 자신을 보존하고, 자신과 자신의 타자를 넘어 번져 가며, 그리하여 개념이 향해 가는 외화를 마찬가지로 다시금 지양하는 힘이자 활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상이 외화된 예술작품도 역시 개념파악적 사유의 영역에속하며 또한 정신은 예술작품을 학적 고찰하에 둠으로써 그 속에서 자신의가장 고유한 본성의 욕구를 만족시킬 따름이다. 왜냐하면 사유가 정신의본질이자 개념인 까닭에, 정신은 그 활동의 모든 산물에 사상이 또한 관류케 하고 그리하여 비로소 그 산물을 진정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경우에만 궁극적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더 분명히 보게 되겠지만, 정신의 최고 형식에는 멀리 못 미치기에 학문에서 비로소 진정으로 추인된다.


주지하듯 플라톤은 진이란 개별적인 선한 행위, 참된 의견, 아름다운인간 혹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선, 미, 진 그 자체라고 주장했던 그는 대상이 그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 속에서, 그 속에서, 즉자대자적 존재속에서 인식되어야 하리라는 요구를 철학적 고찰에 대해 한층 깊게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상 미가 그 본질과 개념에 따라 인식되어야 한다.
면 이는 오직 사유적 개념을 통해서만 가능하니, 이를 통해서는 이념 일반및 미라는 특수한 이념의 논리적 형이상학적 본성이 사유적으로 의식화된다. 하지만 미 자체의 이념에 대한 이러한 고찰은 그 스스로가 또다시 추상적 형이상학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이 경우 아무리 플라톤이 그 근거이자 지도자로 여겨진다고 해도, 플라톤적 추상은 미의 논리적 이념을 위해서조차도 우리에게 더 이상 충분한 것이 못 된다. 플라톤적 이념에 점착되어 있는몰내용성은 오늘날 우리 정신의 한층 풍부한 철학적 욕구를 더 이상 만족시키지 못하므로, 우리는 미 이념 자체를 좀 더 깊게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그런즉 우리도 역시 예술철학에서 미 이념으로부터출발해야 하지만, 미에 대해 철학하기가 처음 출발하는, 플라톤적 이념이라는 예의 추상적 방식에만 매달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시작(詩作)의 경우 사람들은 표현대상을 전에 미리 산문적 사상으로 파악하고, 다음으로 이것을 이미지와 각운 등으로 옮기고, 그리하여 이미지적인 것이 단순히 장식물이나 치장으로서 추상적 반성에 부가 되도록 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려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그러한 태도는 조악한 시만을 양산할 뿐이니, 이유인즉 예술적 생산성의경우에는 오로지 그 분리되지 않은 통일로서만 타당한 것이 여기서는 분리된 활동으로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수한 제작이 예술적 판타지의 활동을 이룬다. 이 판타지는 이성적인 것이니 오로지 자신을 능동적으로 의식화해 가는 한에서만 정신으로서 존재하되 그 속에 담지된 것을감각적 형식으로 비로소 자신 앞에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활동은정신적 내용을 지니되 그것을 오직 감각적으로만 의식할 수 있기에 감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이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인생 경험이 많고 기지 또한 풍부하며 재치 있는 사람, 즉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실체로서 사람들을 결합하는지, 또 그들을 움직이며 그들을 주재하는 힘이 무엇인지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만, 이 내용을 스스로 보편적 규칙으로 파악하지 못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편적 반성을 거쳐 설명할 줄도 모르고, 자신의 의식 내용을 현실적이든 허구적이든 항상 특수한 사례로, 적절한 실례 등으로 자신과 타인에게 해명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이의 생각에 모든 것이 구체적이며 시공간상에 규정된 이미지로, 이때어쨌든 고유명사들이나 기타 갖가지 외적 정황들이 빠질 수 없는 이미지로 형상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종류의 구상력은 스스로가 생산적이기보다는 외려 체험된 상황이나 겪은 경험들의 기억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기억은 그러한 사건들의 개별성 및 외적 발생 여건을 갖가지 정황들과함께 보존하고 되살리는 반면 보편적인 것이 그 자체로서 출현하도록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술적, 생산적 판타지는 위대한 정신과 심정의 판타지이며, 표상과 형상을, 그것도 가장 심오하고 가장 보편적인 인간적 관심을 이미지적이며 완전히 특정한 감각적 표현으로 파악하고 산출하는 것이다.

예술은 기실 일체의 가능한 소재들을 직관과 감흥 앞으로 가져와 치장할 수 있는 이러한 형식적 측면도 또한 갖고 있으니, 이는 추론적 사상이일체의 가능한 대상과 행동방식들을 다듬고 또한 그들을 근거와 정당성의로 무장시킬 수 있는 바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내용의 그러한 다양성의경우에는 예술이 촉발하거나 확립해야 할 여러 감응과 표상이 서로 교차·대립하며 또한 서로를 지양한다는 언급이 곧바로 제기된다. 그렇다. 이 측면에서 보면 정녕 예술이 대립적인 것에 열광할수록, 예술은 단지 감정과열정들의 모순을 증폭시키는 것에 불과하며 또한 우리를 취한 듯 비틀거리게 만들거나 혹은 알맹이 없는 사유가 그렇듯 궤변과 회의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소재 자체의 이러한 다양성은 그러한 외형적 규정에 머물지 말 것을 우리에게 강요하니, 까닭인즉 이 다채로운 상이성 속으로 파고드는 이성원리Versonfiger가 그토록 모순적인 요소들로부터 한층 고차적이며 내적으로 한층 보편적인 목적의 출현을 볼 것을, 또 그것을 달성할 줄 알 것을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공동생활과 국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일제의 인간적 능력들과 일체의 개인적 힘들이 모든 측면과 방향으로 전개되고표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궁극목적으로 거론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형식적 견해에 대해서는 이 잡다한 구성들이 어떤 통일성으로 총괄되며 또한 그것들이 어떤 하나의 목표를 그 근본 개념과 최종 목적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즉각 제기된다. 국가 개념의 경우가 그렇듯 예술 개념의 경우에도 역시 한편으로는 특수한 측면들에 공통적인 목적을 추구하려는 욕구와 다른 한편으로는 좀 더 높은 실체적 목적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성립한다.

절대이념의 참된 현실성이 무엇인가를 간단히 특징짓고자 할 때, 그 이념이 곧 정신, 그것도 유한한 우여곡절에 매인 정신이 아니라, 보편적이고무한하며 절대적인 정신, 진리가 진정 무엇인가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규정하는 정신이란 사실을 말해 두어야 한다. 그저 우리의 일상적 의식만을 두고 본다면, 마치 정신이 자연에 대립이라도 하는 듯한 생각이 우리를 짓누르며 이 경우 우리는 자연에 동등한 존엄을 할애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듯정신과 자연을 똑같이 본질적 영역인 것으로 병치하여 관련짓는다면, 정신의 유한성과 한계만이 고찰될 뿐 그 무한성과 진리는 고찰되지 않는다. 말인즉슨 자연은 절대정신에 등가물이나 혹은 경계로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정신을 통해 정립되었다는 지위를 가지며, 이로써 자연은 경계와제한의 힘이 박탈된 산물이 된다. 동시에 절대정신은 오로지 절대적 운동성으로, 따라서 정신 내면의 절대적 분별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제 정신은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분별해 내는바, 분별된 것으로서의 이 타자가 바로 자연이며, 또한 정신은 이러한 자기 자신의 타자에게 그의 고유한 본질을 완전히 충일하게 부여하는 자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스스로가 절대적 이념을 품는 것으로 파악해야 하되, 그 이념은 절대정신을 통해 정신의 타자로 정립되어 있다는 그런 형식을 갖는 이념이다. 그런 한도에서 우리는 자연을 피조물이라고 부른다. 하여 자연의 진리는 정립자 자신, [1291 즉 관념성과 부정성으로서의 정신일지니, 그 까닭은 정신은 스스로를 내면에서 특수화하고 부정하나, 자신을 통해 정립된 것으로서의 이러한자신의 특수화와 부정을 마찬가지로 지양하며, 또한 그 특수화와 부정 속에서 한계와 제한을 갖기보다는 자신과 타자로서의 자신을 자유로운 보편성 안에서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성과 무한한 부정성이 정신의주관성의 심오한 개념을 형성한다. 

정신이 의식의 단계로 올라가 자신을 내면에서 앎의 주체이자 또한 이에 대응하는 앎의 절대적 대상으로 구분함으로써, 절대자 자체가 정신의 객체가 된다. 정신의 유한성이라는 과거의 입장에서는 정신은 절대자를 대립적이고 무한한 객체로서 인식하였고 이로써 절대자로부터 구분되는 유한자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층 높은 사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대자적으로 자기지로 존재하고자 자신을 자신 안에서 구분하며 또한 그럼으로써 정신의 유한성을 정립하고, 이 유한성 내부에서 스스로가 자기지의 절대적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절대정신 자신이다. 그리하여 정신은 자신의 교구를 갖는 절대정신으로, 정신이자 자기지로서 현재하는 절대자로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가 예술철학에서 출발해야 할 지점이다. 왜냐하면 예술미는논리적 이념, 사유의 순수한 요소 속에서 전개되는 절대적 사상은 아니지만 역으로 자연적 이념도 아니니, 그것은 정신적 영역에 속하되 결코 유한한 정신의 인식과 활동에 머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의 왕국은 절대정신의 왕국이다. 여기서는 이 사실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학적인 증명은 선행하는 철학 교과들의 소임이다. 즉 절대적 이념 그 자체를 내용으로 삼는 논리학, 자연철학 및 정신의 유한한 국면에 관한 철학의 소임이다. 왜냐하면논리적 이념이 그 고유한 개념에 따라어떻게 자연의 현존재로 전환하도록 되어 있는지, 이러한 외면성으로부터정신으로, 그리고 정신의 유한성으로부터 다시금 정신의 영원성과 진리로어떻게 해방되어야 하는지는 이러한 학문들에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지고하고도 참된 예술의 존엄에 걸맞은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예술이종교 및 철학과 동일한 영역에 있다는 사실이 즉각 드러난다. 절대정신의모든 영역에서 정신은 자신의 우연적인 세속의 인연들과 그의 목적과 관심의 유한한 내용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즉자대자적 존재의 고찰과 완성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 감으로써 그 현존재의 답답한 제한에서 벗어난다.

이제 관심과 목적의 내용은 우선은 단지 주관적인 것이라는 일면적 형식으로 현존하고 또한 일면성은 한계인 까닭에, 이러한 결함은 동시에 불안, 고통으로서 무언가 부정적인 것으로서, 즉 부정적인 까닭예스스로를 지양해야 하며 따라서 감지된 결함을 교정하고 의식 · 사유된한계를 극복하고자 진력하는 것으로서 밝혀진다. 그리고 그것도 주관적인것에는 그 상대 측면, 즉 객관적인 것이 그냥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 자체에 속해 있으며 또한 그것에 의해 의식되는 이러한 결함은 주관적인 것 자체가 갖는 결함이자 부정이며, 주관적인것이 다시금 그 부정을 위해 노력하는 부정이라는 한층 규정적인 연관성에서 그러하다. 말하자면 주관은 그 개념에 따를 때 즉자적으로 총체적인 것,
즉 단순히 내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외적인 것 일반에 기대어 이루어지는그 실현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주관이 일면적으로 단지 하나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면, 그 즉시 그것은 개념에 따를 때는 전체로 존재하고 실존에 따를 때는 단지 하나의 측면으로만 존재한다는 모순에 빠진다. 따라서자신 속에 있는 그러한 부정의 지방을 통해 삶은 비로소 자신에게 긍정적이게 된다. 이러한 대립, 모순, 그리고 그 해소의 과정을 두루 거치는 것이생명체에게 주어진 한층 고차적인 특전이다; 처음부터 그저 긍정적일 뿐인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삶은 부정과 그 고통으로 나아가 대립과 모순을제거함으로써 비로소 그 자체로서 긍정적이게 된다. 삶이 모순의 해소 없이 단순한 모순에 머문다면, 그 삶은 물론 모순에 즉해 파멸하고 만다.
추상적이긴 하지만 이것이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규정들일게다.

무지한 자는 부자유스럽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저위와 저 밖이라는 생소한 세계가 대면하니, 그는 여기에 속하며, 이 생소한 세계를 자신을 위한 것으로 만들지도 또 그리하여 자신의 것으로서의그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 곁에 존재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통찰의 최저 단계에서 최고 경지에 이르기까지 지식욕의 충동, 인식을 향한 열망은 오로지 예의 부자유스러운 관계를 지양하여 표상과 사유 속에 있는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에서 나올 따름이다. 이와는 반대로 행위에서의 자유는 의지의 이성이 현실성을 얻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의지는 이러한 이성을 국가적 삶에서 실현한다. 참으로 이성적으로 분화된국가의 모든 법률과 제도는 본질적 규정에 따르는 자유의 실현에 다름이아니다. 이 경우 개별적 이성이 이러한 제도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 고유한 본질의 현실성일 따름이며, 또한 이러한 법칙들에 복종할 때 그 이성과 동행하는 것은 그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고유성이다. 종종자의도 또한 자유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자는 그저 비이성적 자유일 뿐이며, 의지의 이성에서 비롯하기보다는 우연적 충동과 감각적, 외적인 것에 대한 그 충동의 종속에서 비롯하는 선택과 자기규정일뿐이다.

자유와 자기만족은 유한성의 측면도 역시 간직하게 된다. 
그러나 유한성이 있는 곳에는 늘 대림과 모순이 또다시 새로이 돌출하며 만족은 비교급을 넘지 못한다. 예컨대법률과 그 현실성에서는 나의 이성원리, 나의 의지, 그리고 그 자유가 인정되고, 나는 인격으로서 간주되고 또한 그 자체로서 존중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재산을 소유하며, 그것은 나의 소유물로 머물러야 한다. 만약 그것이 위협받으면 법정은 나의 권리를 옹호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정과 자유는 언제나 그렇듯 단지 개체적, 상대적인 측면과 그 개체적 객체들에만 그러니까 이 집, 이 금액, 이 특정한 권리나 법 등등 이 개별적 행위와 현실성에만 관여한다. 여기에서 의식이 목전에 두는 것은 개체성들인데, 이것들은 서로 관계하고 또한 관계의 총화를 이루기는 하지만,  다만 극히 상대적인 범주들과 잡다한 조건들 아래서 그럴 뿐이며, 이러한 것들이 지배할경우 만족은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도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제 더욱높은 곳에서 전체로서의 국가적 삶이 내적으로 완성된 총체성을 형성하고있긴 하다: 군주, 정부, 법정, 군대, 시민사회의 제도, 단체 등둥, 권리와 의무, 목적과 그 충족, 규정된 행동양식, 업적을 통해 이 전체는 자신의 일상을 성취하고 또 유지한다. 이러한 전체 조직은 진정한 국가 속에서 내적으로 성숙하고 완성되며 실현된다. 그러나 원칙 그 자체는 그 현실은 국가적 삶이며 또한 인간은 그 속에서 만족을 추구한다, 아무리 그것이 자신의 내적, 외적 분화 속에서 다양하게 전개될지라도 마찬가지로 또다시내적으로 일면적이며 추상적이다. 이 원칙 속에서 천명되는 것은 의지의이성적 자유일 뿐이다: 자유가 현실화되는 곳은 오로지 국가, 그것도 다시금 이 개별적 국가일 뿐이며, 그럼으로써 그곳은 그 자체가 다시금 현존재의 특수한 국면이자 그 개별화된 실제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러한 영역들 속에 있는, 그 세속적이자 다시금 유한한 존재의 양태들 속에 있는 권리와 의무들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 그 권리와 의무들이 그들의 객관성에 있어서나 주관에 대해 갖는 관계에 있어서나 여전히 더욱 고차적인 검증과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정신이 의식의 단계로 올라가 자신을 내면에서 앎의 주체이자 또한 이에 대응하는 앎의 절대적 대상으로 구분함으로써, 절대자 자체가 정신의 객체가 된다. 정신의 유한성이리는 과거의 입장에서는 정신은 절대자를 대립적이고 무한한 객체로서 인식하였고 이로써 절대자로부터 구분되는 유한자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층 높은 사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대자적으로 자기지로 존재하고자 자신을 자신 안에서 구분하며 또한 그럼으로써 정신의 유한성을 정립하고, 이 유한성 내부에서 스스로가 자기지의 절대적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절대정신 자신이다. 그리하여 정신은 자신의 교구를 갖는 절대정신으로, 정신이자 자기지로서 현재하는 절대자로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가 예술철학에서 출발해야 할 지점이다. 왜냐하면 예술비는논리적 이념, 사유의 순수한 요소 속에서 전개되는 절대적 사상은 아니지만 역으로 자연적 이념도 아니니, 그것은 정신적 영역에 속하되 결코 유한한 정신의 인식과 활동에 머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의 왕국은 절대정신의 왕국이다. 여기서는 이 사실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학적인 증명은 선행하는 철학 교과들의 소임이다; 즉 절대적 이념 그 자체를 내용으로 삼는 논리학, 자연철학 및 정신의 유한한 국면에 관한 철학의 소임이다. 왜냐하면 논리적 이념이 그 고유한 개념에 따라어떻게 자연의 현존재로 전환하도록 되어 있는지, 이러한 외면성으로부터정신으로, 그리고 정신의 유한성으로부터 다시금 정신의 영원성과 진리로어떻게 해방되어야 하는지는 이러한 학문들에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