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류 논법(reductio ad absurdum)은 널리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효과적으로 쓰이는 타당한 논증 
형식이다. 이논증 형식은 가끔 긍정적 결론을 확립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주장을 논박하기위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이 논증 형식의 기본 발상은 매우 단순하다. 이제 "p다"라는진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고 해보자. 논증은 "p" 라는 진술이 그르다는 가정, 즉 "p가 아니다"라는 진술이 옳다는 가정을 세우면서 시작한다. 이 가정을 근거로 하여 
그르다고 이미 밝혀져 있는 진술을 결론으로 연역한다. 
이렇게 되면 그른 결론이 "p가 아니다"라고 가정한 전제에서 타당한 연역 논증을 통해서 나왔기 때문에 "p가 아니다"
라는 가정은 그를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만일 "p가 아니다" 라는 가정이 그르다면 "p" 라는 
진술이 옳을 수밖에없는데, 이 "p다"라는 진술은 처음에 
진리성을 증명하려고 했던 바로 그 진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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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의 부분을 가리키는 낱말은 논증이 제시될 때,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사용되어야 한다. 이런 낱말을 사용했는 
데도 전혀 논증이 성립하지 못한다면 이는 낱말을 잘못 
사용하는 일이다. 한 예를들어 어떤 진술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면, 독자가 이 진술이 이미 진술된 어떤 
내용으로부터 끌어 낸 것이라고 생각하는것은 당연하다. 
논증을 제시할 때에는 논증이 제시된다는 사실과 어느 
진술이 전제로 사용되고 있고, 어느 진술이 결론으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 
논증을 분석하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진술이 전제이고, 어떤 진술이 결론인가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일은 논증을 
분석하려는 사람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어떤 사람의 논의에 대한 논리적 분석은 앞에서 설명했던 
세가지 예비 단계를 거쳐야 한다.

1. 논증을 확인해야 한다. 특히 입증되지 않은 진술은 
반드시 논증의 결론과 구별되어야 한다.

2. 논증을 발견했으면 전제와 결론을 확인해야 한다.

3. 논증이 불완전하면 생략된 전제를 보충해야 한다.

논증이 완전하고 분명한 형식으로 정립되면, 그 논증이 
논리적으로 올바른가 올바르지 못한가를 결정하기 위해 
논리적 표준을 적용할 수 있다.

논증과 추리 사이에는 밀접한 평행 관계가 있다. 
논증과 추리는 둘 다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증거와 
결론으로 이루어진다. 논증과추리의 주요한 차이는 
논증이 언어적 대상 즉 우리가 보거나 들을수 있는 
일군의 진술인 데 반해서, 추리는 이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추리하는 일은 심리적 활동이다. 즉 추리는 증거로부터 
결론을 끌어 내는 일, 다시 말해서 어떤 의견이나 신념을 
근거로 하여 다른 의견이나 신념에 도달하는 일이다. 
그러나 논리학은 심리학이 아니다. 따라서 논리학은 
사람들이 추리하고 생각하고 추론할 때 일어나는 정신적 
과정을 서술하거나 설명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추리는 논리적으로 올바른 반면에, 어떤 
추리는 논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법이다. 이 사실은 
논리적 표준들이 추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추리에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어떤 진술에 대한 입증이 토론의 쟁점이 될 때에는 언제나 
발견의 경위와 정당화의 맥락을 구별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떤 진술에 대한 정당화는 하나의 논증을 이룬다. 
정당화되는 진술은 논증의 결론이다. 논증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결론과 입증 증거로 구성된다. 이와는 달리 
진술의 발견은 그 진술을 생각하거나 떠올리거나 
승인하는 심리적 과정이다.

흔히들 추리는 증거에서 결론으로 건너가는 사고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말이 사고(思考, thinking) 추론(推論, reasoning),추리(推理, inference)는 어떻게 주어지든) 주어진 증거에서 
출발하여 정연한 논리적 단계를 밟아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뜻으로해석된다면 분명히 부정확한 말이다. 
첫째로 증거가 결론보다 항상먼저 확보되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결론이 먼저 떠오르고, 그다음에 그 결론의 옳음을 입증하거나 그름을 밝히는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때로는 약간의 증거에서 결론을 끌어 내기도 하는데, 결국에는 
완전한 추리가 되도록 하기 위해 더 많은 증거를 발견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증거를 가지고 출발해서 결론에 쉽사리 
도달했다 할지라도, 사고는 대부분의 경우에 논리적 단계를 거치면서 진행되지 않는다. 우리는 추리를 할 때 마음으로 
의아하게 여기고, 공상에 잠기고, 환상에 빠져들고, 당치 
않은 연상을 떠올리고, 가망이없는 착상까지도 잇달아 
추구해 보게 된다.

여러 개의 다른 논증이 동일한 형식을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형식이 논증의 타당성을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논증의 타당성뿐만 아니라 형식의 타당성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있다. 어떤 논증형식이 타당하다"는 말은 그 형식을 사용하여 만들어지는 모든 논증이 옳은 전제와 그른 결론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타당한 형식을지닌 논증은 모두 타당한 논증이다. 따라서 어떤 논증의 타당성에대한 검사는 그 논증이 타당한 형식을 가셨는가를 알아보는 일을통해서 이루어진다.

al 만일 오늘이 수요일이라면, (그러면) 내일은 목요일이다.

bl 만일 뉴튼이 물리학자라면, (그러면) 그는 자연과학자다.

위의 두 진술은 모두 조건 진술, 즉 가인 진술이다. 
조건 진술에서 "만일" 이라는 말에 의해 인도되는 부분을 
전건(antecedent)이라 하고, "그러면" 이라는 말의 바로 
다음에 오는 부분을 후(consequent)이라 한다. 

"오늘은 수요일이다"는 첫번째 조건 진술의 전건이고, 
"뉴튼은 물리학자다" 는 두 번째 조건 진술의 전건이다. 
또 "내일은 목요일이다"는 첫번째 조건 진술의 후견이고, 
"그(뉴튼)는 자연과학자다"는 두 번째 조건 진술의 후건이다.조건 진술의 전건과 후건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진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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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성비판을 읽기 전 예비단계로 봐야 할 필독서
































"윤리 형이상학은 불가결하게 필요하다. 선험적으로 우리 
이성 안에 놓여 있는 실천적 원칙들의 원천들을 탐구하기 
위한 사변적 동인에서도 그러하지만, 윤리를 자신이 
그것을 올바르게판정할 실마리와 최상의 규범이 없는 
한 갖가지 부패에 굴복하기 때문에도 그러하다.
무릇 윤리적 법칙은 그것의 순수성과 진정성에 있어 
순수 철학이 아닌 어떤 다른 곳에서 찾을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순수 철학(형이상학)이 선행해야만 한다. 
이것 없이는 도무지 어디에서도 도덕철학은 있을 수 없다."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고대 그리스 철학은 세 가지 학문, 즉 물리학, 윤리학 및 
논리학으로 나뉘었다." 이 구분은 사태의 본성에 완전히 
알맞은 것으로, 사람들은 이것에 가령 구분의 원리를 
덧붙이는 일 같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개선할 것이 없다. 
이렇게 하여, 한편으로는 구분의 완벽성을 확보하고, 
한편으로는 필연적인 하위 분과들을 올바르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성인식은 질료적인 것으로 어느 객관을 고찰하거나, 또는 형식적인 것으로 객관들의 구별 없이 순전히 지성과 
이성 자신의 형식 및 사고 일반의 보편적 규칙들만을 다룬다. 형식적 철학을 일컬어 논리학이라한다. 그러나 특정한 
대상들과 그 대상들이 속하는 법칙들을 다루는 질료적 
철학은 다시금 두겹이다. 왜냐하면 이 법칙들은 자연의 
법칙이거나 자유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학문을 
물리학이라 일컫고, 후자의 학문이 윤리학이다. 또한 저것은 자연이론이라고 불리고, 이것은 윤리이론이라고도 불린다.

철학이 경험의 근거들에 발을 딛고 있는 한, 모든 철학은 
경험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론들을 오로지 선험적 원리들에서 개진하는 철학은 순수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후자가 만약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라면, 
논리학이라고 일컫지만, 그것이 지성의 특정한 대상들에
제한되어 있다면, 형이상학이라 일컫는다.

이렇게 해서 두 겹의 형이상학의 이념(개념), 즉 자연 형이상학의 이념(개념)과 윤리 형이상학의 이념(개념)이 생긴다.
그러므로 물리학은 경험적 부분을,그러나 또한 이성적 
부분을 가질 것이고, 윤리학도 마찬가지일 것인데, 
그럼에도 이 경우는 그 경험적 부분을 특별히 실천적 
인간학이라고, 그러나 이성적 부분은 본래 도덕학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다.

무릇, 윤리 형이상학은 가능한 순수의지의 이념과 
원리들을 연구해야 하는 것으로, 인간의 의욕 일반의 
작용들과 조건들을 연구해야 하는 것이아니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심리학에서 얻을 수 있다. 
일반 실천철학에서 (모든 권한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도덕법칙들과 의무가 논의된다는 사실이 내 주장에 대한 
반박이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학문의 저자들은 
이 학문에 대한 그들의 이념에 여전히 충실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또는 도대체가 이 세계 밖에서까지라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은 오로지 
선의지뿐이다. 지성, 기지, 판단력, 그 밖에 정신의 재능들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들, 또는 용기(의기),
결단성, 초지일관성 같은 기질상의 성질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많은 관점에서 선하고 바람직스럽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만약 이런 천부의 자질들을 사용하는 그 때문에 그것의 
특유한 성질을 성격이라고 일컫는 의지가 선하지 않다면, 
극히 악하고 해가 될 수도 있다. 행운의 천부관련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권력, 부, 명예, 심지어 건강도, 
그리고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서의 자기 상태에 대한 
전적인 편안함과 만족도 의기를 불러일으키고, 그럼으로써 자주 사람을 오만방자하게 만든다.
이것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그리고 그와 함께 행위하는 전체 원리를 올바르게 하고, 보편적으로 합목적적이게끔 
만들어주는 선의지가 없는 곳에서는 말이다. 이성적이고 
편파적이지 않은 관객은 순수하고 선한의지의 특징을 갖추지 못한 자가 부단히 무사 번영함을 보는 것만으로도 결코 
흡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할 것도 없이, 선의지는 
행복할 만함(품격 있음)의 필요불가결한 조건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의지가 단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일컬어질 수 있기위해서는 법칙의 표상이, 그로부터 기대되는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서도, 의지를 규정해야만 하는바, 
그러나 어떤 종류의 법칙이 실로 그런 것일 수 있는가? 
나는 의지로부터 어떤 법칙의 준수에서 의지에서 생길 수도 있는 모든 충동을 빼앗았으므로, 남는 것은 오로지 행위 
일반의 보편적 합법칙성뿐으로, 이것만이 의지의 원리로 
쓰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또한 나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어야만 할 것을 내가 의욕할 수 있게끔 오로지 그렇게만 처신해야 한다. 

할 수 있는 한, 선행을 하는 일은 의무이다. 그 밖에도 천성적으로 동정심이 많은 사람들도 많아서 그들은 허영이나 
사익 같은 어떤과 다른 동인 없이도 자기 주위에 기쁨을 
확대시키는 데서 내적 만족을 발견하고, 그것이 자기의 작품 소행인 한에서 타인의 만족을 기뻐할 수있다. 
그러나 나는 주장하거니와, 그러한 경우에 그 같은 행위는 
매우 의무에 맞고, 매우 사랑받을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참된 윤리적 가치를 갖지 못하며, 
오히려 다른 경향성들, 예컨대 명예에 대한 경향성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명예에 대한 경향성은, 만약 그것이 다행히도 실제로 
공익적이며 의무에 맞고, 그러니까 명예로운 것에 해당한다면 칭찬과 격려를 받을 만한 것이지만, 그러나 존중받을 
만한 것은 못된다. 왜냐하면 그 준칙에는 곧 그러한 
행위들을 경향성에서가 아니라, 의무로부터 행하는 
윤리적 내용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의 원수조차도 사랑하라고 
지시명령하는 성서의 구절들도 의심할 여지없이 이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경향성으로서 사랑은 지시명령될 수 없는 것이지만, 비록 어떤 경향성도그것을 채근하지 
않음에도 아니 자연적이고 참을 수 없는 혐오가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의무로부터 하는 선행 자신은 실천적 사랑으로서, 정념적 사랑이 아닌 것으로 실천적 사랑은 의지 안에 들어 
있지, 감각의성벽(性)에 있지 않으며, 행위의 원칙들에 있지 애잔한 동정에 있지 않은바, 이런 실천적 사랑만이 지시명령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사물은 어떤 것이나 법칙들에 따라 작용한다. 
오로지 이성적존재자만이 법칙의 표상에 따라, 다시 말해 
원리들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 내지 의지를 가지고 있다. 
법칙들로부터 행위들을 이끌어내는 데는 이성이 
요구되므로, 의지는 실천이성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만약이성이 의지를 불가불 규정한다면, 그러한 존재자의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인식된 행위들은 주관적으로도 필연적이다. 다시 말해, 의지란 이성이 경향성에 독립해서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다시 말해 선하다고 
인식하는 그런 것만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성이
그 혼자만으로는 의지를 충분하게 규정하지 못한다면, 
즉 의지가 언제나객관적인 조건들과 합치하는 것은 아닌, 
주관적인 조건들(어떤 동기들에도 종속하는 것이라면, 
한마디로 말해, 인간의 경우가 실제로 그러하듯이)의지가 
자체로 온전하게는 이성과 맞지 않다면, 객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인식된 행위들이 주관적으로는 우연적이고, 그러한 의지를 객관적인법칙들에 맞게 규정하는 것은 강이다. 
다시 말해, 철두철미하게 선하지는 않은 의지에 대한 
객관적인 법칙들의 관계는 비록 이성의 근거들에의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의 규정으로 표상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의지는 본성상 이성의 근거들에 필연적으로 
순종적이지는 않다.

모든 명령은 당위(해야 한다)를 통해 표현되며, 그에 의해 
이성의 객관적 법칙의 주관적 성질상 그에 의해 필연적으로 규정되지는 않는 의지에 대한 관계(즉 강요)를 고지한다. 
명령들은 어떤 것을 하거나 또는 하지않는 것이 선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명령들이 그 말을 하는 상대는,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그 앞에 제시된다고 
해서 언제나 그어떤 것을 하는 것은 아닌 의지이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선한좋은 것은 이성의 표상들에 의해, 
그러니까 주관적 원인에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다시 말해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그 자체로서 타당한 근거들에서 
의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쾌적한 것과는 다르다. 
쾌적한 것은 오로지 이런저런 감관에만 타당한 한낱 주관적 원인들로부터 말미암은 감각에 의해서만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이성의 원리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선의지는 마찬가지로 (선의)
객관적인 법칙들 아래에서 있을 터이지만, 
그러나 그로 인해 그것이 법칙에 맞는 행위를 하도록
강요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완전한 선의지는 그것의 주관(주체)적인 
성질상 스스로 오로지 선의 표상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적인 의지에 대해서는, 
그리고 도대체가신성한 의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명령도 
타당하지가 않다. 여기에는 당위 해야 한다)가 있을 바른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의욕(하고자 한다)이
이미 스스로 법칙과 필연적으로 일치해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명령은의욕 일반의 객관적 법칙과 이런저런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의, 예컨대 인간 의지의 주관적 
불완전성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정식일 따름이다.

그런데 모든 명령은 가인적으로나 정언적으로 
지시명령한다. 전자는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사람들이 의욕하는 (또는 의욕하는 것이 가능한 어떤 
다른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상하는 것이다. 
정언적 명령은 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어떤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그런 명령이겠다.

모든 실천 법칙은 가능한 행위를 선한것으로,
그렇기에 이성에 의해 실천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주관(주체)에 대해서는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에, 모든 명령들은 어떤 방식에서든 선한 의지의 원리에
따라 필연적인 행위를 규정하는 정식들이다. 
그런데 행위가 한낱 무엇인가 다른 것을 위해, 
즉 수단으로서 선하다면, 그 명령은 가언적인것이다. 
반면에 행위가 자체로서 선한 것으로 표상되면, 
그러니까 자체로서 이성에 알맞은 의지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즉 의지의 원리로 표상되면, 그 명령은
정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명령은, 나를 통해 가능한 어떤 행위가 선할 것인가를 말해주며, 실천 규칙을 한 의지와의 관계에서 표상하되, 의지는 어떤 행위가선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을 곧바로 행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주관이 언제나 그 행위가 선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주관이 이것을 안다 할지라도, 주관의 준칙이 실천이성의 객관적 원리들에 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언명령은 단지, 행위가 여느 가능한 또는 
현실적인 의도를 위해 좋다(선하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전자의 경우에 가언명령은 미정적 실천 원리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확정적 실천 원리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처신에 의해 도달해야 할 여느 다른 의도를 조건으로서 근저에 두지 않고, 이 처신을 직접적으로 
지시명령하는 명령이 있다. 이 명령은 정언적이다. 
이 명령은 행위의 질료 및 그 행위로부터 결과할 것에 
상관하지 않고, 형식 및 그로부터 행위 자신이 나오는 
원리에 상관한다. 행위의 본질적으로 선함은, 그 행위로부터 나오는 결과가 무엇이든, 마음씨에 있다. 이 명령은 윤리(성)의 명령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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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나‘에 대한 표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지상의 다른 모든 생물보다 무한히 우위에 선다. 그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인격이며,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변화 
중에도 의식을 통일하여하나의 동일한 인격을 이룰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지위와 존엄성에 비추어볼 때,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하고 지배할 수 있는 이성없는 동물과 같은 
그런 사물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다. 이는 설령인간이 
아직 ‘나‘를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때에도 
인간은 ‘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수한 단어로 ‘나임‘을 
표현하지 않더라도 1인칭으로 이야기하는 경우 모든 
말에서 ‘나‘를 생각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능력(즉, 생각하는 능력)이 지성이다.

관찰에 따르면 어린아이는 생후 3개월이 지나서야 
울음이나 웃음을 표출하는데, 이는 이성을 암시할 수도 
있는 어떤 표상, 즉 모욕과 부당행위에 대한 표상의 발달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에 그 아이가 자신 앞에 놓인 반짝이는 대상을 눈으로 쫓기 시작하는 것은 
지각(감각 표상의 포착)이 감각 대상에 대한 인식, 
즉 경험으로 확장되기 위한 지각 발전의 서투른 출발점이다.

더구나 어린아이가 막 말하기를 시도할 때 단어를 더듬거리는 것은 어머니와 유모가 그 아이에게 친절하고 애정을 
갖도록 만든다. 그래서 그들은 그 아이를 끊임없이 껴안고 
그 아이에게 입 맞추게 되며, 모든 바람과 의지를 들어줌에 따라 그 아이를 작은 지배자로 잘못 키우게 된다. 인간성이 발현되기까지 그 시기에 이 피조물의 그런 사랑스러움은 
틀림없이, 한편으로는 이 피조물의 모든 표현에서 나타나는 천진난만함과 솔직함, 즉 아무런 숨김도 악의도 없지만 아직결함이 많은 모든 표현에서 나타나는 천진난만함과 솔직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애교를 부리며 타인의 의사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이 피조물에 대해 친절을 베푸는 유모의 자연적성벽 덕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피조물에게는 모든 시간 중에서가장 행복한 
놀이시간이 허락되고, 그때 보육자 자신도 말하자면 아이가 됨으로써 이 [어린 시절의] 안락함을 다시 한번 즐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육자의 회상은 그 시절에 
결코 다다르지 못한다. 그 시절은 경험의 시절이 아니라 
단지 산만한 지각의 시절, 아직 대상의 개념 아래에서
통일되지 못한 지각의 시절일 뿐이다.

자신의 표상을 의식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내가 의식하는어떤 표상에 주의를 쏟거나 그 표상에서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주의를 돌리는 것은 단지 주의를 쏟는 것을 
그만두거나 소홀히 하는 것(이런 것은 주의가 산만한 것일 테니)이 아니라 내가 의식한 어떤 표상이 하나의 의식 
안에서 다른 표상들과 결합하지 못하도록 인식능력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떤 것을 
추상한다(추출한다고 말하지 않고 어떤 것에서 추상한다고, 즉 내 표상의 대상에 대한 어떤 규정에서 추상한다고 말한다.이렇게 추상함으로써그 표상은 하나의 개념으로서 
보편성을 얻게 되고, 그래서 그 표상은지성 안에 수용된다.

어떤 표상이 감각능력을 통해 인간에게 밀려올 때조차 
그 표상에서 추상할 수 있다는 것은 그 표상에 주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능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고 
능력의 자유를 그리고 자기 표상의 상태를 스스로 지배하는마음의 자주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해보면 감각 표상과 관련하여 추상 능력은 
주의 능력보다훨씬 더 힘들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 주목하는 것은 아직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후자는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지각들을 방법에 따라 취합하는것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찰자의 일지에 소재를 제공하고, 쉽게 광신과 망상으로 인도한다.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쏟는 것은 사람들과 관계 맺을 때 
실제로 필BA 12 수적이지만 교제 중에 그것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에 그것은 거북하게 난처하게 만들거나 
과장되게 꾸미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둘 모두에 대해 반대되는 것은 꾸밈없음(편안한 태도)으로, 타인이자신의 태도를 좋지 않게 평가하지 않을 거라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다. 마치 거울 앞에 있는 자신이 어떤지 스스로 평가하려는듯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 혹은 
마치 자기 말을 (단지 타인이 들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듣는 듯이 말하는 사람은 일종의 배우다. 그는 연기를 
하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의 인격을 가상으로 꾸민다. 
그리하여 만일 사람들이 이런 노력을 알아채면 그는 
타인의 판단에서 손해를 입는다. 이런 노력은 속이려고 
했다는 의심을 일으키니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의심을 전혀 일으키지 않으면서 자신을 외적으로 내보이는 진솔한 태도를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한다(그렇다고 해서 이행동이 미적 기예와 취미 도야를 모두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행동은 단지 표현의 진실성만으로 호감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천진함에서 비롯된 솔직함, 즉 이미 규칙이
된 꾸밈 기술의 부족에서 비롯된 솔직함이 말에서 드러나는
경우, 그것은 소박함이라고 부른다.

"표상을 가지고 있지만 의식하지는 않는다"는 것에는 모순이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로크가 이미 이런 이의를 제기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로크는 그런 종류의 표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표상을 직접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그 표상을 가지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의식할 수 있다. 
이때 그와 같은 표상은 모호한 표상이라고 부른다. 
그 외의 표상은 명확한 표상이고, 이 표상 전체의 부분 
표상들과 부분 표상들의 결합까지 명확하다면 이 표상은 
사고의 표상이건 직관의 표상이건 분명한 표상이다.

모호한 표상들의 영역은 이렇게 인간에게 가장 큰 영역이다. 그러나 이 영역은 단지 인간의 수동적인 부분에서 감각의
놀이로 인간에게 지각되므로 모호한 표상에 대한 이론은 
오직 생리학적 인간학에만 속할 뿐이지 우리가 여기서 목표로 삼는 실용적 인간학에는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모호한 표상들을 가지고 놀이하면서, 상상력에서 애호되거나 애호되지 않는 대상들을 압도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모호한 표상들의 놀이거리가 되는 경우가 더 잦으며, 그때 우리 지성은 모호한 표상들이 착각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런모호한 표상들의 영향으로 불합리에 빠져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표상에 관한 의식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기에 충분할 때 그 의식은 명확하다. 그러나 
의식에 의해 표상들의 합성도 역시 명확해진다면 
그 의식은 분명하다고 부른다. 이 분명한 의식만이 
표상들의 집합을 인식이 되게 만든다. 이때 인식 안에서는 
저다양한 표상들의 질서가 생각되는데, 의식적인 모든 
합성은 의식의통일을 따라서 합성의 규칙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표상과 반대되는 것은 혼란한 표상
(혼동된 지각)일 수 없다. 분명한 표상과 반대되는 것은 
오직 불분명한 (단지 명석하기만 한) 표상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런 능력들을 탁월하게 소유한 사람을 
수재라고 부르고, 이런 능력들을 아주 조금 타고난 
사람을 (그는 항상 다른 사람에의해 이끌려갈 필요가 
있으므로) 둔재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런 능력들을 
사용할 때 심지어 독창성을 발휘하는 사람은
(독창성 덕분에이 사람은 대개 남의 지도 아래에서 
배워야 하는 것을스스로 산출한다) 천재라고 부른다.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만약그 사람이 배운 사람으로 보이길 원하는 한, 
반드시 그것을 알아야했다면, 무지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이런 요구가 없다면 그는 위대한천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스스로 생각할 수없는 사람은 답답한(고루한) 사람이라고 불린다. -어떤 사람은 대단히 박식한 사람(자신이 배운 대로 타인을 가르치는 기계)이면서도 자신의 역사적 지식에 대한 
이성적 사용과 관련해서는 매우 고루할 수있다. -자신이 배운 것을 공개적으로 전달할 때 학교 식의 강제 
(그러므로 스스로 생각하는 자유의 결핍)가 드러나도록 
행동하는 사람은 완고한 사람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학자나 군인, 심지어 신하일 수도 있다. 
이 중에서 그나마 원칙상 가장 견딜 만한 사람은 완고한 
학자다. 그래도 그에게서 우리는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신하들이 격식을 차릴 때 드러내는 꼼꼼함
(완고함)은 단지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완고한 사람에게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자만심 때문에 심지어 우스꽝스럽게 된다. 그런 것은 무지한 사람의 자만심이기 때문이다.

표상들의 상태와 관련해서 내 마음은 능동적이면서 능력을 내보이든가 아니면 수동적이면서 감수성(수용성)으로 존속한다. 하나의인식 안에서 이 양자는 결합되어 있고, 이런 
인식을 갖게 할 가능성은인식능력이라는 이름을 지니는데, 이 이름은 인식에서 가장 중요한부분, 즉 표상들을 결
합하거나 서로 분리하는 마음의 활동에서 가져온 것이다.

어떤 표상과 관련해서 마음이 수동적 태도를 취하고 따라서 그 표상을 통해 주관이 촉발된다면(그런데 주관은 자기 
자신에 의해 촉발되기도 하고 어떤 객관에 의해 촉발되기도 한다), 그 표상은 감성적 인식능력에 속한다. 그러나 오직 
행위(사고)만을 포함하는 표상들은 지성적 인식능력에 
속한다. 전자는 하위의 인식능력이라고 하지만 후자는 
상위의 인식능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전자는 감각에 
대한 내감의 수동성을 특성으로 지니고 후자는 통각의 
자발성, 즉 활동에 대한 순수한 의식의 자발성을
특징으로 지닌다.

경험이란 경험적 인식이지만, 인식은 판단에 근거를 
둠으로 인식은 성찰(반성)을 필요로 하고, 따라서 의식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서 인식은 다양을 통일하는 규칙에 
따라 표상의 다양을 정돈하는 활동[의식], 즉 개념과 직관함과 구별되는 사고 일반을 필요로한다. 

그래서 의식은 논리적 의식으로서 규칙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선해야 하는 추론적 의식과 직관적 의식으로 구분되고, 
전자(자기 마음의 작용에 대한 순수 통각)는 단순하다. 
반성의 ‘나‘는 자신 안에 어떤다양도 지니지 않으며, 
모든 판단에서 항상 하나이고 동일한데, 반성의 ‘나‘는 
의식에서 오직 형식적인 것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적 경험은 의식에서 질료적인 것과 경험적인 
내적 직관의 다양,즉 포착의 ‘나‘ (따라서 경험적 통각)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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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조직된 절차가 법적으로 구속력을 갖는 결정의 
정당화에 이바지할 수 있고, 정당화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전제는 법, 국가 그리고 사회에 관한 유럽의 전통을 해체한 자유주의적 사고에 속한다.

이 전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법원과 법적 문제의 
위계질서를 전제한 구유럽 모델을 대체하기 위한 목적에서 구상되었다. 즉 이러한 전제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더 높은 개방성을 확보하고 법의 탄력성과 적응능력을 더 높이며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대비하는 잠재력을 더 강화할 수 있다고 예상했던 것 같다. ‘사회‘ 영역에서 계약이라는 개념이 마치 마술을 부리는 ‘주문‘ 역할을 했다면,
‘국가‘ 영역에서는 절차가 그러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절차라는 이주문을 통해 최대한의 자유와 안전을 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욱이 절차는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제도로서 모든 결정과 규정을 미래에 맡겨둘 수 있는 장치로 여겨졌다.

계약과 절차가 그러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것이 과연 성공할 것인지가 극히 
불투명했던 개연성이 매우 낮은 성취에 해당한다. 
이러한 진화적 성취는 현재가 자신의 변경 가능성을 
확정하고 개방된 미래의 가능성을 충분히 견뎌낼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진화적 성취는 혁명가와 자본가의 이데올로기였다고 말할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적 성취가 실현 가능했던 조건 및 실현가능성의 정도를 파악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이러한 시도에서는 아마도 계약의 비계약적 토대에 대한 뒤르켐의 물음이 모범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물음은 우리를 일반 사회이론이라는 험난한 문제에 봉착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펼쳐질 연구는 다른 길을 걷는다. 
즉 이 책은 정당화개념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생각이라는 사실적 측면과 관련을 맺는다는 점을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경험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사정을 십분 활용한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절차에 대한 사회학적 이론을 통해 
자유주의이론의 타당성을 검토하기위한 또 다른 토대를 확보하려고 시도한다. 그 때문에 이 책은 절차를특수한 종류의 사회적 체계, 즉 사실상의 행위와 의미의 결합으로 파악한다. 
같은 맥락에서 정당화란 구속력을 갖는 결정을 사실상의 행위자체의 결정 구조로 수용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체계이론적 ·학습이론적 토대 위에서 절차를 통한 정당화라는 자유주의적 전제를 경험적으로 더 면밀하게 
검토해볼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정치적 선거의 공식적 목표는 국민의 의지에 따른다는 
의미에서 올바르게 결정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국민의 
의지를 진정으로 대표할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갖춘 
인물들이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기관을담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선거제도의 주도적 사상에 따르면, 특히 공직을 
둘러싼 경쟁, 자유선거, 보통선거, 평등선거, 비밀선거 및 -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역시 중요한 의미가 있는 - 표결과 관련된 커뮤니케이션의 특화와 사전 구조화 등 
선거를 조직하는 원칙들은 그러한 목적에 봉사한다고 한다. 유권자는 투표용지에 표시하는것 말고는 달리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런 식으로 해서 어떻게 그와 같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일단 불확실하다. 공직을 둘러싼 경쟁이 가장 
탁월한 자격을 갖춘 자가 공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식의 가정은 이미 경험을 통해 반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공직을 둘러싼 경쟁과 최상의 능력을 갖춘 인물의 
선출 간의 인과관계를사후적으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 가정을 추가해야만 할것으로 보인다. 

법적용을 위한 법정절차의 경우 공식적 목적, 제도적 장치 
그리고 잠재적 기능 간의 불일치가 선거와 입법의 경우에 
비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사법부가 자기 자신을 
묘사하는 내용은 법이론과국가이론의 논의에서 상당 부분 인정되고 있고 어쨌든 민주적 선거와의회의 입법에서처럼 첨예하고 설득력 있는 폭로 대상은 아니다. 그이유는 아마도 사법의 결정 상황이 선거와 입법에 비해 더 잘 구조화되어 
있고 따라서 사법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경험적 조건을 
구체화하기가 더 쉽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지만 사법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법으로 규율된 법정절차의 의미도 지배적인 소송이론에 
따르면 진리라는 가치, 즉 법으로서 효력을 갖고 개별 
사례에서 법적으로 타당한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관련을 맺는다고 한다. 즉 법정절차 역시선거나 입법과 마찬가지로 결정을 통해 정당한 것을 실현하는 절차라고 전제한다. 
그에 따라 법정절차의 주요 목적은 권리보호라고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개개의 소송법 제도를 정당화할 때도 
이러한 서술방식을 이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결정이 실질적으로 부정당할지라도 확정력을 갖는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난점을 안게 된다.

정치적 기계의 조합은 언제나 한편으로는 사회가 가진 
이성, 정의, 진리를추출해 통치에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를 통해 사회발전을 촉진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정당성이란 일정한 허용한계 내에서 
내용이 아직확실하지 않은 결정을 수용하고자 하는 
일반화된 자세로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정당성을 이렇게 
파악할지라도 이러한 자세가 비교적 단순한심리학적 동기 - 예컨대 복종에 대한 대가로 ‘민주적‘ 참여를 얻는것에 대한 내적 만족감 -에 기초하는지 아니면 극히 이질적인 상태의 동기들을 
획일화하는 다수의 사회적 메커니즘의 소산인지는 여전히 대답되지 않은 물음이다.

정당성개념과 관련해서는 우선 결정의 전제에 대한 승인과 결정자체에 대한 승인을 뚜렷이 구별해야 한다. 이러한 
구별은 정당화하는결정 과정이 ‘예/아니요‘라는 조건 아래 작동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이러한 조건이 오로지 결정의 전제에만 적용되는지 아니면 결정자체에도 적용되는지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즉 결정이 도출되는 원칙과 규범을 인정하면서도 결정이 
논리적으로 오류라거나 결정이 잘못된 해석이나 잘못된 
사실에 기초해 성립되었다는 이유로 결정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결정 자체를 인정하면서도 결정의 기초가 
되는 가치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거나 완전히 
무관심할수도 있고, 심지어 결정근거들이 일반적 
결정규칙이 될 수 없다고 거부할 수도 있다. 
법의 실정화, 즉 모든 법은 결정을 통해 제정된다는
테제는 정당성개념을 결정의 구속력에 대한 승인으로 확정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하지만 이는 더 넓은 의미의 
정당성개념이다. 이개념은 결정의 전제에 대한 승인까지 
포함한다. 왜냐하면 (다른 시간대에 다른 곳에서)이 
결정의 전제에 대해서도 역시 결정이 내려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률, 행정행위, 판결 등은 구속력이 
있다고 여겨져야 하고, 각자의 행위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승인되는이상 결정으로서 정당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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