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책임은 법학 법철학뿐만 아니라 사회철학에서 중요한 문제로 취급된다. 많은 법학자뿐만 아니라 사회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다루고 각기 나름대로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한 것만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책임의 경우에는 최근 독일 형법학에서 책임의 본질과 근거에 관해 논쟁이 전개되었다. 또한 영미철학에서는 ‘의사의 자유‘나 ‘행위의 자유‘와 관련하여 논의가 이루어졌다. 정의론에 관해서는 과거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 사이에서 벌어졌던 형식적 · 실질적 정의론 논쟁이나 최근 영미철학에서 전개되었던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이 이를 시사한다. - P21
그렇지만 그동안 전개되었던 논의를 보면 각기 책임과 정의에만 논의가 집중되었을 뿐 이러한 책임과 정의가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논의한 것 같지 않다. 그 때문에 책임과 정의는 우리의 경우를 예로 보면 각각 별개의 중요한 법적 개념으로, 가령 정의는 법철학 영역에서 그리고 책임은 주로 민법학이나 형법학과 같은 실정법학 영역에서 논의되는 경우가 많았다. - P22
그런데 이에 관해 영국의 법철학자 토니 오노레는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주장을 하였다.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자기존중 및 개인적·사회적 복리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배분적 정의에도 기여한다는 것이다. - P22
이러한 오노레의 주장은 책임과 정의 사이에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 상관관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제3장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법철학적 견지에서 책임과 정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간단하게 스케치하는 데 목표를 둔다. 책임과 정의 사이에는 모종의 상관관계가 존재하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 관계는 도대체 무엇인지 다루고자 한다. - P22
오노레에 따르면 우리는 ‘도덕적인 비난‘을 받지 않는 경우에도 또는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경우에도 책임을 부담할 수있다.
또한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경우에도 책임을 질 수 있고, 나아가 합리적인 판단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행위한 경우 또는 자유가 제한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행위한 경우에도 책임을 질 수 있다고 한다. 오노레에 따르면 도덕적인 책임이나 법적인 책임, 무엇보다도 형사책임은 오노레 자신이 말하는 책임 개념보다 좁은 개념이다. - P23
물론 오노레에 따르면 우리에게 책임이 인정되지 않고 그 대신 우리가 혼경의 희생자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행위자에게 책임능력이 없는경우를 들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책임의 의미가 약화된다.
이때 책임과 행위자의 능력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 문제될 수 있는데 이에 오노레는 비난과 제재 사이의 비례성이라는 응보적 관점을 한 대답으로 내놓는다. 그렇지만 오노레는 이러한 경우에도 책임은 인정되고 다만 그 비난의 강도가 약해질 뿐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영국법을 전제로 했을 경우에 그렇다고 한다. 오드레는 이렇게 책임능력이 없는 경우 책임을 감경시킴으로써 책임과 환경을 모고려할 수 있다고 한다. - P23
여기서 오노레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과연 어느 정도로 환경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책임을 판단할 것인가? 오노레에 따르면 이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 P23
이는 곧 책임구상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지역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책임능력이 없는 경우 영국법은 책임을 감경하는 것에 만족할 뿐이지만 독일법은 아예 책임을 조각한다는 차이점이 이를 예증한다. - P24
이처럼 오노레에 따르면 우리는 원칙적으로 책임 있는 행위자나 환경의 희생자 모두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노레는 이러한 경우에 우선적으로는 책임을 인정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개인적·사회적 공공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환경의 희생자‘로 보아야 할 경우 역시 있을 수 있다고 한다. - P24
오노레는 책임 개념이 반드시 법적 책임이나 도덕적 책임을 전제로 해야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오노레가 책임 개념을 법적인 책임개념이나 도덕적인 책임 개념보다 더욱 확장하고 있음을 간취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떤 근거에서 오노레는 책임 개념을 확장하는 것일까? - P24
Ⅱ. 토니 오노레의 테제
책임과 관련한 ‘이원적 코드화의 문제를 다룬다. 이에 관해 오노레는 다음과 같은 테제를 제시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넓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오노레에 따르면 인간이 부담하는 책임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 · 사건에 대한 책임이며, 셋째는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신뢰에 기초를 둔 책임, 즉 가족이나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그것이다.
- P24
그런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오해가 제기된다고 한다. 첫째, 우리는 오직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것이고, 둘째, 우리는 우리가 비난받을 만한 경우에만 책임을 진다는 것이며, 셋째, 우리는 오직 우리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노레는 이러한 주장은 모두 타당하지 않다고 한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선 우리는 법적으로도 타인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 P24
나아가 도덕적인 비난과는 무관하게 책임을 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또한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선택권이 없는 경우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 P25
이러한 주장을 통해 오노레는 책임 개념을 확장한다. 이때 책임 개념을 확장하는 데 기초가 되는 것은 신뢰와 위험이라고 한다. 가령 오노레는 위험을 인수함으로써 책임이 성립하는 경우도 있고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책임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아울러 오노레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서도 우리는 책임을 질 수 있다고 한다. - P25
그러면 오노레가 이렇게 책임 개념을 확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오노래는 이렇게 책임 개념을 확장하여 부과하는 것이 ‘자기존중‘(self-respect)과 ‘개인적·사회적 복리‘ (individual and social well-being)를 증진하기 때문이라고한다. 또한 이러한 책임 개념은 분배적 정의에도 기여한다고 말한다. - P25
그러나 오노레는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개인적 · 사회적 복리에 기여한다 하더라도 행위자의 행위가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에도 이렇게 책임을 부과할 것인지는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행위자를 제재할 것인가 아니면 그 행위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을 제거하는 데 만족할 것인가 하는 쟁점과 관련을 맺는다고 한다.
이는 책임과 관련해 논란을 빚는 ‘결정주의와 자유‘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오노레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오노레는 우선적으로 책임을 인정하는 쪽을 선택한다. - P25
그렇지만 이렇게 책임을 우선적으로 인정하면 행위자가 진정 책임질 수 없는 경우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노레는 인간이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건전한 거짓말‘(salutary lie) 일지도 모른다고한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귀속이 실제로 ‘건전한 거짓말‘에 불과한지 확신할 수도 없다고 한다. 사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오노레는 책임귀속의 대상이 되는 행동의 근거 또는 원인을 찾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근거 또는 원인이 행동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행동이 결정된다는 것은 다소 약한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 P26
한편 오노레는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심리적인 법칙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물론 만약 이러한 법칙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정말 복잡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행동이 이러한 심리적인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면, 이렇게 심리적인 법칙에 따라 행동을 하고 또 이에 책임을 부담한다고 해서 이를 환경의 희생자가 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 책임을 지는 이유는 행위자의 외부에 속하는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심리적인 법칙은 책임부과의 바탕이 되는≪행위의도→ 행위선택 → 행위결정 → 행위≫라는 일련의 내적 체계와 양립할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논증을 통해 오노레는 결국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환경의 희생자로 보는 것보다 더욱 많은 근거를 갖고 있고 이렇게 하는 것이 개인과 사회의 복리를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 P26
그렇지만 이렇게 책임을 우선적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행위자를 환경의 희생자로 볼 여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 때문에 오노레는 도덕과 법 영역에서어느 경우에 행위자를 환경의 희생자로 볼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 P27
이에 오노레는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한 대답으로 내놓는다. 물론 엄격하게 말하면 이러한 능력은 ‘정도의 문제‘ (a matter ofdegree)일 수 있다고는 한다. 여하간 오노레는 이렇게 능력에 장애가 있을 때는 행위자를 환경의 희생자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오노레는 그 이유로 비례성 원칙을 제시한다. - P27
그렇다면 이렇게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에 장애가 있을 때 책임을 경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오노레는 ‘핸디캡 이론‘을 제안한다.
오노레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공정한 경쟁을 기초로 하는데, 이렇게 능력에 결함이 있을 때에는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없으므로 이를 위해 책임을 경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책임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미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사회에 도움이 되며, 더 중요한 것은 ‘자기존중‘(self-respect)과 ‘정체성 의식‘(sense of identity)증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 P27
분석 및 평가
이러한 오노레의 책임구상은 주로 독일 법학의 성과를 계수하여 발전시킨 종래의 책임구상과 비교할 때 획기적인 관점을 여럿 담고 있다. 여기서는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오노레의 책임구상이 가지는 획기적인 쟁점을 분석 및 평가하고자 한다. - P27
(1) 책임의 근거로서 개인적·사회적 복리
우선 오노레는 전통적인 책임구상과는 달리 책임을 도덕적인 비난과 결부시키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하기 때문에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개인적 · 사회적 복리를 증진하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기존중을 증진하는 데도 기여하기 때문에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 P27
이러한 오노레의 책임구상은 책임과 정의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오노레는 책임과 정의 사이에 일정한 상호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P28
그러나 이러한 오노레의 책임구상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오노레는 책임을 부과함으로써 개인의 자기존중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하지만, 만약 도덕적인 비난가능성이나 각 개인이 가진 의사의 자유를 책임의 전제로 삼지 않는다면 어떻게 책임을 통해 자기존중을 증진할 수 있는가의 의문이 그것이다. 더군다나 자기존중과 사회적 복리 증진이 책임의 범주 아래서 양립할수 있는지에도 의문이 없지 않다. - P28
(2) 책임능력의 근거로서 공정한 경쟁에 대한 참여
다음으로 오노레는 공정한 경쟁에 대한 참여라는 관점에서 책임능력을 근거 짓는다. 시장경제 질서는 자유롭고 평등한 경쟁을 전제로 하는데, 책임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이러한 경쟁에 참여할 수 없기에 이러한 행위자들이 어떤 일탈행위를 저지른 경우에는 그에 대한 비난을 감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종래 독일 형법학이 발전시킨 책임 (Schuld)에 대한 이해와 비교해볼때 차이가 있다.
독일 연방대법원이 수용한 규범적 책임론에 따라 책임 개념을 파악하면 책임은 비난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비난가능성은 다시 행위자에게 의사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이는 ‘자율적인 자기결정에 따른 자기책임‘이라는 칸트적인 사고를 반영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규범적 책임이론이 응보형 이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 P28
그러나 오노레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한다는 측면, 즉 공리주의의 측면에서 책임을 이해한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공정한 경쟁에 대한 참여라는 관점에서 책임능력을 이해한다. 이러한 오노레의 주장은 ‘책임구상‘과 ‘참여‘라는 관점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종래의 규범적 책임론이 의사의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주체중심적인 책임구상에 머물러 있는 반면, 오노레의 책임구상은 참여를 부각시킴으로써 탈주체적인, 다시 말해 상호주관적인 책임구상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 P28
그러나 책임을 공리주의의 관점에서만 이해한다는 점, 이의연장선상에서 공정한 경쟁에 대한 참여라는 일종의 ‘경제적 참여‘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오노레의 책임구상은 한계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책임은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는 더욱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기 때문이다. - P29
한편 오노레의 책임구상은 독일의 형법학자 귄터 야콥스 (Günther Jakobs)가제시한 책임구상과 비슷한 측면을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야콥스는 자신의 책임구상에서 인격 개념 (Personenkonzept)을 전제로 하면서도 책임을 적극적 일반예방이라는 관점에서 근거 짓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은 자기존중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책임부과가 개인적·사회적 복리에 기여한다는 오노레의 구상과 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사실이 그렇다면 야콥스에 제기되는 비판은 기본적으로 오노레에게도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