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 - 각자의 현실 너머, 서로를 잇는 정치를 향하여
권성민 지음 / 돌고래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소개 영상을 보고 구입한 책. 참고로 TV방영은 보지 않았다. 꽤나 유명했다고 듣기만 했을 뿐. 추천 내용을 듣고 별 생각 없이 읽었는데, PD의 생각에 꽤나 놀랐다.

 이 책은 시사예능 프로 “더 커뮤니티”를 기획하면서 PD가생각했던 것들, 그리고 그 기획, 촬영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는 사상의 저변에 깔려있는 생각을 건드린다. 단순히 좌/우의 관점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안하는 것인지부터, 좌/우의 구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그리고 그 간극을 어떻게하면 좁힐 수 있을까를 치열하게 고민한 책이다.


아마도 전세계적으로 극대화되어가는 갈등의 근원은 무엇인지가 그 시작이 아니였을까 싶다. 나는 그 시작이 온라인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저자는 그것을 “만나지 않는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한다. 특히나 자신의 생각을 확고하게 만드는 알고리즘으로 인한 무분별한 노출은 상대의 생각을 접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그렇게 이미 확정되어버린 대상은 역시나 온라인 내에서 가장 공격하기 쉬운 대상이 되어버린 상태.


저자는 그렇기에 “더 커뮤니티”라는 프로그램의 기획단계 부터 굉장히 세심하게 판을 짜기 시작한다. 조사를 통해 보수성향/진보성향을 구분하고, 그에 따른 소득/환경을 통해 최대한 다양한 구성요건을 만들고자 한 노력이 보였다.(물론 방송이라는 특성상 기본 검증이 필요하기에 어쩔수 없는 점을 말하기도했지)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이또한 성향 조사를 통해 진보/보수를 나눴다. (이 부분에서 자신이 믿었던 것과는 반대의 성향이 나타난 분도 계시다니.. 나도 해보고 싶네.)


그렇게 시작한 프로그램은 다양한 주제/요건에서 보여지는 의견 /탈락자 그로인해 분열되는 현상이 마치 지금 전세게 속에서 보여지는 분열의 양상과 유사하게 보였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지금 사회 분열의 이유의 한 면을 읽는 느낌이랄까.

그것은 이미 자신의 의견을 공고하게 말할 대본을 준비하고 나온 토론프로그램과는 달랐다.  기본 장에서부터 여러 상황들 속에서 사람들의 의견이 어떻게 대립되고 그것들이 어떻게 표출되는 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예를 들면 지지난 대선 때 나왔던 의견이 그러했다. “최저임금보다 낮은 금액으로 일하면 안되는것” 이라는 말. 그 후보가 옳은 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배경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 그럼에도 그것을 사회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그렇기에 사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폭넓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보편적 선이 내세우는 대의가 실제 노동자들이 실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을 읽으며 다른 책에서 읽었던 아이의 말이 떠오른다.

공감이라는 뜻의 의미에 대해 아이는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 이라고 말했다. 저자의 결론은 대화였다.

공론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였고, 저자는 그것을 시사에능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낸것이다. 차이라는 것을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사회는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는 장소이고 시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위선“을 말하는 부분이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위선을 집어던지는 일이 아니라, 위선을 끌어 안고 지켜나갈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다.“ p.347

이 부분에서 임산부석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등장한다.(어쩜 그리 내생각과 같은지) 그것은 결국 우리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위선의 한 측면이며, 그런것을 감내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만들어가는 시스템이라는 것. 나는 여기서 외국에서 많이 나오는 우리나라 카페 문화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CCTV가 우리의 행동을 그렇게 유도하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위선이라는 부정적 단어가 우리의 행동을 성공한 위선자로 이끌고 그것은 우리를 우리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최저선이 무너졌을 때 최대 악까지 내려갈 수 있는 것 역시 인간이라는 점도 같이 말한다. 그것은 스텐퍼드 대학교의 교도소 실험에서 ”설계자의 개입이라는 강한 압력“이 인간 본성을 어디까지 끌어내릴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니까.


다시 야만의 시대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게 하는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미술관 여행자를 위한 도슨트 북 - 모든 걸작에는 다 계획이 있다 ㅣ 미술관 여행자를 위한 도슨트 북 1
카미유 주노 지음, 이세진 옮김 / 윌북아트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조토에서 뱅크시까지 이어지는 회화사의 흐름에 따라 쓰여진 책으로 1200년도~ 1900년도 중반까지 이어진다. 대다수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따라 쓰여졌지만 중간중간 아시아가 잠깐씩 등장한다.

사실 미술은 관심을 가지려해도 워낙 방대하고, 특히나 180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추상화와 현대미술의 심오함은 책을 통해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인지, 미술관련 책을 그래도 조금 읽었음에도 이 책을 읽으며 새삼 모르는 작가가 이토록 많았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오래전 작품이든 아니든 작품을 눈으로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작가님의 설명을 통해 달리보이는 작품들, 그리고 실제 회화를 볼때 보여지는 것 외에 완성되어져가는 과정 구도등에 대한 설명이 있어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미술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책을 읽으며 매번 노라운 점은 표현이다. “한스 홀바인 - 한스 홀바인이 그리다” p.61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그 털의 질감은 작가는 ”귀한소재 - 꼼꼼하게 그려진 천의 무늬“라고 표현했지만 텍스트가 주는 정보보다 실제 그림에서 오는 감탄스러움은.. 정말 마치 사진 같은 느낌이랄까. 이 그림이 놀라운 점은 바닥의 ”해골”인데 이 해골이 마치 위에서 봐야 제대로 보일것 같은 모양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내가 2차원의 평면을 보고 있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욱 빼고 위에서 보게 만드는 것 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허되다는 바니타스의 메시지‘ p.60라는 설명에 아하.. 싶었던 그림.


정말 사실적인 그림에 마치 사진인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중 하나였던 ”라비니아 폰타나의 비안카 델리 우틸리 마셀리의 초상“ p.72 당시 보기드분 여성 이고, 남성들의 전유물인 아카데미 회원까지 지낸 인물인데, 그림을 보면 진짜 와. 귀족가문의 초상화에서 이토록 감탄하게 만들 수 있을까.  예전에 어디선가 본 조선시대의 어떤 무관의 초상화 속 수염을 보며 진짜 와와 싶었는데, 폰타나 작가의 그림역시 진짜 디테일의 끝판왕 같았다. 이 그림을 보며 화가들은 자신들의 그림의 끝이라는 것에 대한 기준이란게 있을까?! 싶을 정도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700년, 1800년대의 시민혁명 시기를 맞으며 귀족이나 종교에 대한 그림을 지나 현실이 그림속에 등장했다. 샤르댕의 ”산딸기 바구니“는 그저 산딸기를 쌓은 바구니를 그린 것 아닌가 싶으면서도 탁자위에 꽃은 마치 곧 떨어질 것같은 아슬아슬함을 보여주는 것이 당시의 아슬아슬함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같은 작가의 ”가오리“p.147 내의 속을 다 드러내 벽에 걸려진 가오리는 “순교자”를 연상시킨다했지만, 내 눈에는 마치 참다참다 더이상은 참지못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의 마지막 몸부림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내 모든 것을 던지는 뭐 그런 느낌.. 그래서 슬프게도 보이는..


그리고 1800년대 후반의 반 고흐.

데이비드 호크니라는 영국 화가가 반고흐는 가장 낡은 모텔에 있어도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것 같다는 평을 했다던데, 고흐의 그림은 미술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참. 아름답다. 어떻게 같은 밤 하늘을 보고도 저분은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책속의 그림은 고흐의 가장 유명한 그림중 하나 “별이 빛나는 밤”인데, 이 작품이 고흐 본인이 “습작”이라고 말했다하니,, 와.우


책의 흐름을 따라 읽다보면 요 무렵쯤 부터 아니면 좀더 이전부터의 그림이 사실적 묘사에서 추상화 단계로 넘어오는 느낌이 든다. 반 고흐의 그림은 추상화는 아니지만 화가가 보는 밤 하늘이 사진같은 하늘이 아니라 작가가 느끼고 생각한대로 보여지는 그림 같으니까. 뭉크의 “절규”역시 한 개인이 다리위에서 느껴지는 공포를 사진이 아니라 오롯한 개인의 감정으로 보여질때의 표현이라 더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마치 사진같은 느낌이지만 사진이 아니였던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 이라는 그림은 순간 헉했다. 분명 뒷모습이고, 그 앞의 거울도 뒷모습인데.. 나의 자아가 나를 보지 않는 반대의 느낌?! 그런데 이 그림이 자화상이라니 그저 놀라울뿐.(그것도 주문받아서 그린거란다.) 그려지는 사실이 보여지는 사실과 다른 그림. 


그리고 현대 미술. 잭슨 폴록의  그림은 여러 책에서 접했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무엇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느낌이다. 하나의 선을 따라가도 보면 다른 선과 색이 눈에 들어오고, 그 선과 색을 따라가보면 또 다른 선과 색이 눈에 들어오고, 혼란스러우면서도 묘한 안정감을 주는 ”물의 경로“라는 그림은 정말..

그리고 “상업미술”이라는 말을 처음 듣게했던 앤디워홀.  “샷 세이지 브루 매릴린” p.323 마를린 먼로가 살았던 1960년대의 미국. 그 미국에 대한 상징이면서, 에술 역시 그 시대를 그대로 반영했음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저자의 설명을 읽으며 그림을 다시보니 왜 그녀가 슬퍼보이는 걸까.

“클리셰 그 자체인 여배우의 이미지는 인위적이고 냉랭하게 재현되었다. 이 매끈한 단일색조는 일종의 가면 역할을 한다. 반복은 이미지에서 의미를 비워버린다. 이 과잉된 노출 속에 과연 무엇이 남아있을까” p.322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 뿐이였던 그녀의 삶은 그녀 삶 전체를 소비하게 만든 느낌이랄까.


어떤 분야든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흥미가 생긴다. 아무 관심이 없던 분야의 미술 책들을 읽으며 왜 우리가 지금 이 그림들을 “예술”이라 부르고 칭하는지를 조금씩 이해해가는 중이다. 그래서 처음볼때와 두번째 볼때가 다르고, 내가 그림을 보는 시기마다 조금씩 다르게 다가온다. 


진짜 추천.

정말 재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요즘 노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중년의 나이를 살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노년에 접어든 부모님을 보며 노년이란 어떤 의미 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10년전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만해도 나의 부모님이 노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어느덧 할머니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가는 부모님을 보니 “노년”에 대해 생각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이 책을 만났다.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친 순간
‘상호 가식의 의례적 드라마 p.58‘ 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어머니의 노년과 죽음, 그리고 그 어머니의 삶을 돌이키는 책이다. 사회학자이고 철학자인 그의 시선으로 쓰인 책은 어려울 것 같았지만 내가 외면했던 노년, 내가 뜨끔했던 노년의 모습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부모님에 대한 나의 시선이겠지만, 머지않아 나의 모습이기도 한 노년의 모습은 프랑스나 한국이나 서글펐다.
저자도 어쩔 수 없이 더이상 어머니를 집에서 돌볼 수 없었기에 요양원에 모셨다. 프랑스나 한국이나 노년을 맞은 인간에게 요양원이란 삶의 마지막 장소 였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이 왜 부정적 의미를 갖는가
”우리는 거기서 죽을 것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어디서인지는 안다. 블라디밀르 장켈레비치는 이 라틴어의 격언을 즐겨 인용했다. 죽음은 확실하나, 시간은 불확실하다.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적시할 수 있다. 일단 그런 시설에 들어가면 ‘장소는 확실하다‘고.“ p.60
그리고 그곳은 
”동일한 상황에 놓인 다수의 개인이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바깥 사회와 단절된 채, 명확하고 세밀하게 조정된 양식의 격리된 삶을 함께 영위하는 거주와 노동의 장소“ p.116
라고 말한다.
어쩔 수 없음을 말하고, 어쩔수 없음을 인지하면서도, 그곳에 어머니를 모셔야만했던 저자와 가야만 했던 어머니의 간극은 나의 현재이면서 나의 미래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 사이에 있는 처음에서 말했던 ”상호 가식의 의레적 드라마“인 것.

이 사실적이고도 직설적인 저자의 글에 나는 시간이라는 상대적 시간을 생각했다. 나와 부모님의 시간. 서로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그들이 노년에 들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문득  어렸을적 보아던 그들의 자신만만했던  40대의 모습으로  대한다. 왜..?
“노화 과정이 종종 한 사람의 사회적 위치, 그리고 타인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노화 경험은 결코 이해될 수 없을 것” p.262
이 문장은 내가 노화라는 과정에서 간과했던 것을 짚고 있었다. 신체적 노화만을 생각했었던 짧은 생각에서 노화의 과정이 가져오는 삶 전반의 변화에 대해 말이다.
어렸을 적 어렸던 나를 이해했던 나의 부모님에 대해 내가 가져야 했던것은 그들의 노년을 바라보던 나의 무심한 시선이 아니라 적극적 이해와 연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저자는 어머니가 자신들을 키우기위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것들을  포기하고 살았는지를 돌이켜, 그녀의 죽음에서야 그녀의 삶을 돌이킨다. 가난하고 고단했던 삶 속에서 그녀가 무엇에 침묵했고 인내했는지를 생각하며, 노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사회가 노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지와도 연결된다. 
”자유로 부터 도피하는 것… 중략…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자유가 없다. 선택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 철학에서 늙음의자리는 없다.“p.270
이 부분에서 철학적 용어가 등장해 내게는 좀 어려웠지만 나는 이 파트를 고령자라고 해서 사람이 아닌것은 아닌데, 철저하게 사회에서 배제되고 고립되어진 미래가 없는 존재로 대상화 된다라는 의미로 읽혔다. 자신의 신체 속에서 과거의 (신체적) 능력을 발휘할 수 없고, 취약성, 질병 속에 갖혀버린 존재를 사회는 고립시켜버린 것이다. 물론 과장된 의미로 들릴지 모르나, 틀딱이니 냄새가 어쩌구 하는 등의 말을 생각해보면 글쎄. 


현대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인간에게 노화라는 것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질병”이 되어버린다면 모를까, 현재를 놓고 보면 여전히 인간에게 공평한 것은 늙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가난”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지만, 소수의 부자를 제외하고서 노년의 삶은 어쩌면 모두에게 비슷할 것이다. 내게도 닥칠 그 시간을 돌이키게 하는 책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 시간을 미리 보내고 있는 주변의 이들에 대한 나의 태도도 조금은 달라지겠지.

추천. 
근데 좀.. 슬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6 - 사과
박솔뫼 외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개인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수상작품집은 매년 찾아보는 편이다. 어떤 주제들이 올해는 등장했는지, 단편소설들을 보며 한해의 문학 경향을 보는 기분이 꽤 좋기 때문이다.

단편소설은 밀도가 굉장히 높은 소설들이다. 짧은 소설안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녹여내야 하니까.

근데 올해의 이효석문학상은 굉장히 정적인 느낌이였다.


“박솔뫼 작가의 사과”

올해의 대상작품이면서 어떤 작품보다도 정적이였다. 그냥 길을 걷는 어떤 한 사람의 하루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 안에는 애리와 선호의 연애인가 싶은 연애 이야기도 있었지만, 작가의 말처럼 “정처없는 하루”라는 느낌의 소설이다. 느낌엔 정말 사실적인 우리의 하루같은 느낌이면서도 굉장히 모호한 누군가의 하루인것 같은 느낌이랄까. 뚜렷하지 않은 하루.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하루이면서 의식하지 않은 채 그저 살아내고 있는 오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박솔뫼 작가의 사과는 정말 누구나 가지는 하루이면서, 블러처리 되어 있는 하루이기도 했다. 정말 신기했던 소설.


내게 슬펐던 소설 “황시운 작가의 일일업무 보고서”

아주 오래전에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라는 장애인 변호사님이 쓴 책을 본적이 있다. 담담하게 쓰여진 글이 내게는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책이다. “이동권”이라는 말이 주는 이질감. 너무나 당연했던 나의 이동이 누군가에는 주장해야할 무엇. 그리고 그 주장의 바탕엔 그들의 생존이 달려있었다. 이 소설이 그랬다. 어떤 동정이나 연민, 과장이 없이 누군가의 하루가 이토록 처절할 수 있을까. 아무도 읽지 않는 일일 보고서를 쓰는 일을 하는 세진. 사고 소송으로 받은 돈으로 빠듯하게 살아가는 세진에게 돈을 요구하는 가족들. 그리고 장애인으로 보조인을 통해 자신의 용변을 해결하는 그녀의 일상은 비장애인의 하루보다 고되다. 나가는 일조차, 먹는 일조차 그녀의 몸에 묶여버린 하루. 그럼에도 그녀에게 끊임없는 요구를 하는 가족. 담담하게 쓰여진 작가님의 글이 나를 더 숨막히게했던 이야기.


”장희원 작가의 영주“

글을 쓰는 우진을 찾아온 영주. 영주는 우진의 옆에서 죽고 싶다고 했다. 영주는 우진이 학창시절 괴롭혔던 이였다. 그리고 ”내가 죽는 순간에,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p.157

라며 서늘한 말을 건낸다. 영주는 여름을 넘기고 겨울의 초입까지 버텼다. 우진의 옆에서. 이 소설을 읽으며 왜 이토록 처연한 느낌였을까. 영주는 자신을 죽음을 우진에게 지켜보게 함으로써 자신을 괴롭혀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의 과거를 우진에게 심어주는것 같았다. 오롯하게 자신의 시간을. 그리고 우진은 별것 아닌 글이였지만 자신이 더이상 글을 쓸 수 없음을알고, 그녀역시 영주가 죽어가는 시간 속에 묻혀버리는 느낌이랄까.

가해자, 피해자라는 서사와 역할의 반전이라기보다 절망에 갇히는 누군가의 삶을 아주 느린 시선으로 어떤 말도 할 수 없이 지켜보는 느낌이. 차가웠고, 무서웠던 소설.


수상작품집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내가 가지는 어떤 정형화된 생각이 조금씩 무너지는 느낌이다. 틀안에서 이럴꺼야, 저럴꺼야 하는 그런 생각의 경계가 조금씩 바뀌는 느낌이랄까. 그것이 문학이 주는 힘이면서, 그렇게 서서히 변해가는 시간에 젖어들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앞서 언급한 세 작품 외에도 “임솔아 작가의 나의 빈묘에”는 가족이라는 경계를 “성혜령 작가의 하악”은 장애인과 비장인의 구분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제하고 타자화 하는지를 꼬집는다. 


추천.

여전히 문학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주와 연
청예 지음 / 래빗홀 / 2026년 6월
평점 :
품절


청예작가님의 이야기는 도무지 종잡을수가 없다. 어떻게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평온하게 쓸 수 있는 것이지?! 그저 불륜에 대한 복수인가 싶었던 이야기는 나를 종잡을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갔다.

한글로는 “주와 연”이지만, 책 표기에 ‘와‘의 표기는 정말…


아버지가 바람을 폈고, 엄마를 버렸다. 부모에게 버려진 오주희는 무당을 찾아가 부적을 받았다. 사랑의 부적이였다. 그리고 그 부적을 내연녀의 손에 쥐어주고는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오연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태어났다.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와 계모의 딸로. 

축복받은 삶을 살기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복수의 심정으로 태어난 그녀의 손가락은 6개였고, 해를 넘기고 태어나면 큰 복을 누리지만, 해를 넘기지 못하면 대흉일 것이라는 늙은 무당의 말에 기여코 해를 넘기기 5초전에 태어났다. 

두번째 인생이기에 많은 것이 수월했다. 알고 있는 지식들을 이용해 오연린은 그녀의 부모에게 큰 자신감을 넣어주었다. 끝없이 돈을 쓰게 했고, 그녀는 그 모든것들을 원했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서 그녀는 모든것을 망쳤고, 아버지와 계모는 절망했다.

자신들의 딸이 왜 그런지조차 모른채.


그녀는 그녀의 삶 전체를 들여 그들에게 복수를 했다. 늙은 무당인 할머니부터 아버지 계모까지.

그러다 만난 은정. 아버지로부터 학대받고 자란 아이. 둘은 합심하여 부모에게 상처를 입히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가던 중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는데..

이 이야기를 읽으며 연린은 대체 누구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것인지가 흐려졌다. 분명 시작에는 분명했던 복수의 대상이 점차 흐릿해지며, 스스로에게 가해지고 복수의 결과가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이였을까.

누군가는 삶을 살아가며 잊었던 과거를 그녀는 두번의 생을 살아가면서도 잊지 못하고 스스로에 대한 가해로써 복수를 행하는 것일까.


보통의 회귀환은 통쾌하던데,ㅠ

통쾌함이라는 것 자체가 판타지려나. 복수라는 감정의 바탕에 깔려있는 그 분노가 통쾌함이라는 감정과 맞닿을 수 없는 것이니까. 그녀의 분노가 만들어낸 과정에서 빚어진 또다른 분노는 결국 또다른 결과를 낳는 결말에서 우리가 회귀환이라는 소재를 통해 가지고 싶었던 복수에 대한 통쾌함은 결고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닐 수도 있음을 작가님은 말하고 있는듯 했다. 내 인생 전체를 걸고하는 복수의 다음 생이 정말 “극락”일 수는 없을테니까.


 책의 전반에 깔려있는 윤회, 극락과 같은 단어가 의미하는 불교 철학사상은 결국 흘러갈 것을 흘러가게 두지 못하고 끝내 쥐고 놓지 못해 또다른 억겁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슬펐던 걸까.

무시무시한 이야기 한편을 읽었는데,

왜 내게는 슬픔으로 남는 것일까.


“할머니가 아무리 많은 부적을 써서 칠갑으로 붙여두어도, 이미 닿은 연을 지우지는 못한다.” p.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