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가 만드는 가상경제 시대가 온다
최형욱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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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언제부터인가 이말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대체 뭐지? 뭔데 이리 많은 이들이 이를 논하는지. 사실은 클럽하우스안에서 처음들었고, 꽤 유명한 사람들이 메타버스 얘기를 하고 있기에 궁금했다. 그래서 찾아보고 안 사실은 영화 "레디플레이어 원"이 말하는 세상이구나라는 것과 아직 멀었네, 시작 단계의 기술을 놓고 뭐 이리 말들이 많은가... 라는 것이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초기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세계라는 것을 알았다.

대략적인 설명만으로는 아직 희미한 기술 같지만 사실 작년부터 시작된 펜데믹으로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떨어져있지만 온라인을 통해 연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검증했다. 재택 근무, 재택 수업 등등 온라인을 이용한 전시회, 콘서트 등도 같은 맥락이다. 이미 메타버스 환경을 이용해 콘서트나 전시회는 열리기도 했다. VR, PC, 모바일 등 다양한 플랫폼을 반으로 말이다. 특히 최근의 오큘러스 퀘스트 같은 VR기기의 성능이 좋아지면서도 반대로 가격은 다운되어 사용자의 진입장벽이 낮아짐으로써, VR을 통한 또다른 가상세계로의 진입이 가능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콘서트나 전시회 같은 부분은 실사 이미지를 이용하여 VR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면 굳이 물리적으로 해당 장소를 가지 않아도 실제와 같은 느낌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도 현재 사용중이라고 한다. 와우, 써보고 싶군요.ㅎ)


그렇기에 실제로 메타버스의 세계를 선점하려는 각 유니콘기업들의 움직임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관련해서 구글, 애플 또한 AR, VR의 기술을 위해 관련 기업들을 인수하고, 자체적인 연구 및 데이터 축적에도 한창이라고 하니, 앞으로의 10년이 어떤 세상이 될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일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메타버스라는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뒤안길로 사라진 기업 및 컨텐츠에 대한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싸이월드>. SNS의 초기 모델이였고, 도토리라는 가상경제 시스템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유저들이 이용했음에도 왜 싸이월드는 그리 무너져야 했는지에 대해 폐쇠성, PC라는 플랫폼에서 모바일로의 전환이 늦은점, 그리고 그것이 곧 미니홈피였지만 미니홈피를 벗어날 수 없는 그 프레임 등 여러 요인에 관해 말한다. 관련하여  또다른 프로그램으로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나 <세컨드라이프>라는 컨텐츠도, 메타버스로 가기위한 노력은 하고 있으나, 메타버스로 가기에 기술력이나 동기부여 시스템이 부재한 상황이라 꽤나 고전중이라고 한다.


 이처럼 지금 핫한 기업이라도 사용자의 관심이 떨어지는 것은 한 순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사용자의 니즈를 빠르게 판단하면서도 관심이 떨어지지 않도록 퀘스트나 적절한 보상이 뒤따라야 하며, 어떤 플랫폼에서 동작이 가능해야 하는 등의 수많은 요소가 필요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런 생태계가 생성되기 전에 상업화가 먼저이뤄진다면, 그 또한 더이상의 나아감을 저해하는 부분이라니, 그 안의 균형은 정말 현실을 닮았다는 느낌이다. 관련하여 물론 기술은 기본이다.

 지금의 휴대폰 또는 웨어러블 디바이스에 적용되고 있는 수많은 센서가 결국은 앞으로의 메타버스에 반드시 필요한 기술들이며, 여전히 부족함이 더 많지만 지금의 발전속도로 본다면, 와. 

꼭 이런 영화같은 일 뿐 아니라, PTSD 증후군을 치료하는 방법으로도 VR을 이용하기도 하고, 치매환자들의 진행도를 늦추게 만드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도 있다고 한다.  (예전의 추억들을 이미지화 하여 계속해서 보여줌으로써 치매의 정도를 늦추는 효과 등) 또한 아주 오래전부터 논의되었지만, 사실상 힘들었던 수술시뮬레이션(실제 수술하는 느낌을 줄수 있는..) 프로그램 이야기도 거의 가시화 되고 있는 시점이라고 하니, 메타버스라는 세계가 가져올 수 있는 효과는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기술을 차치하고서라도 경제적인 부분이나 활용적부분 등에서 보완하고 사회적 합의점을 찾아가야 할 부분등 가상세계 및 가상경제의 이슈와 한계는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치 지금의 암호화폐처럼.? 신뢰성, 안정성, 변동성, 투명성, 보안, 규제와 사회 수용성 등등 그리고 우리는 현실세계에 발을 딪고 서있기에 현실과 가상 세계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지 등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사회적 합의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도 있다. 그리고 그 세계 자체를 지배하려들고,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각종 범죄들에 대한 규범도 필요하다. 가상이면서 현실속에 녹아있는, 그러면서 현실이 가상화 되는 세계라. 영화속에서만 가능했을 법한 일들이 현실로 나오는 것을 보면 저런 논의 또한 기술만큼이나 빠르게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또한 책에서 언급되는 상업화와 관련된 메타버스 세계는 개인적으로 "감시"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머무는 시선, 나의 움직임. 나의 소리 등으로 판단되는 모든 데이터들을 수집하여 상업이라는 측면과 묶는다니, 말그대로 "감시자본주의"시대에 들어서는 초반이지 않나 하는 두려움이 든다. 관련해서 개인의 어떤 정보도 개인의 허락없이는 이용될 수 없음을 명시하는 법이 기술만큼 빠르게 뒷받침 되기를 바란다. 


중고등학교 시절만해도 생각치도 못한 세상이 지금 현실이 되어 있는 지금, 20-30년후의 현실이 내가 아는 지금의 현실일지. 사뭇 궁금해지게 만드는 책이다. Good!


새로운 구글이 그 안에서 탄생할 수도 있고 새로운 인류가 탄생할 수도 있다. 가상경제의 규모가 실물 경제에 뮥박할 수도 있고, 가상 세계의 인구가 지구 인구의 몇십 배가 될 수도 있다. 하루를 보내는 시간에서 가상세계에서의 비중이 점점 커지다가 역전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고 주말 내내 그곳에서 보내는 사람도 많아지게 될 것이다. 단순히 상상이라 치부하기에는 지금 변화의 속도가 급진적이고 가파르다. 하지만 분명한 것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달렸다는 것이다. 기술이 만들어온 변화와 영향은 늘 양날의 칼이었고, 인류는 이롭고 정의로운 목적으로 이를 이용하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는 것이다. 메타버스로의 여정도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변화의 크기만큼 기회의 크기도 크다. 기하급수적인 변화는 우리에게 어느 때보다 큰 기회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주게 될 것이다. 제임스 할리데이가 지금 다시 메타버스를 바라본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것 같다.

"모든 현실은 진짜다. Every Reality is Real."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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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자격 - 도시계획학 1 : 역사 도시계획학 1
강명구 지음 / 서울연구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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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란 무엇일까? 그냥 사람이 많이 살면 도시인가? 얼마나 많이 살아야 도시인가? 도시는 언제부터 생겨난것일까? 등등에 대한 질문이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떠올랐다. "도시의 자격" 도시에 대한 자격이 왜 필요하지? 라는 질문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떠올리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 질문들에 대해 이 책은 일단 도시의 시작과 그 역사를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한것은 농업혁명, 즉 농경의 시작에서 비롯되었다고 알고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생각했는지는 기억이..) 그런데 이 책에서 그 전후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한다. 인간,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호모 사피엔스는 사회적 유대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혈족들을 기반으로 군집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이 자신들의 생존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여살던 인간군집 속에서 공동체 의식을 깨우고, 그것을 하나로 묶기위해 종교가 생겨났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동료애가 탄생했다고 한다. 그렇게 모여살던 인간이 수렵채집에서 농업생산으로, 이동에서 정착생활로 생활 패턴이 변경되었고, 그로인해 인간의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그것이 농업이 활성화의 원인이였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정설이라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보는 측면이 요즘은 좀더 힘을 얻는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도시다.

이런 도시가 고대 그리스 아테네를 거치며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했고, 그 속에서 민주주의가 태어났다. 물론 당시는 인구의 10%정도만이 참여 가능한 민주주의 였지만, 도시의 형태가 아고라를 통해 누구와도 의견을 나눌수 있는 개방된 공간으로써 모두의 공간이였다고 한다.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시장이 서기도 해 상업적인 공간이 되기도하는, 특정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의 필요에의해 자연스럽게 생겨난 공간이 도시라는 것이다. 그러다 중세에 들어오면서 왕과 영주, 그리고 성직자들이 도시를 점령하면서 지배권을 위한 도시로써만 존재하는 도시의 후퇴의 시기가 되었다. 이후 이 모든 억압으로부터 도망쳐나온 이들과 상업을 위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 도시로써 새로 탄생하게되었고, 이것은 피지배계층의 시민사회운동의 계기가 되는 장소로써의 도시가 되기도 했다. 중세 이후의 도시는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그들끼리 군락을 이루고, 서로의 이득을 도모하면서 자치정부 형태로써의 도시가 생성됨으로써 과학이 발전되고 사회적 시민의식이 고취됨으로써,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생각이 피어나면서 18세기 시민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사람의 의지로 모인 장소가 또다른 의지를 만들어낸것이다.

이렇게 도시가 발전하는 중에 사회학, 과학의 발전으로 도시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된다. 도시의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도시는 농촌에 비해 인구가 많이 모여들면서 자유롭지만 오염되고 혼잡스러운 이미지도 가지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시작된 도시계획, 도시를 보다 살기 편하고 깨끗한 곳으로 만들기 위했던 여러 노력의 역사를 저자는 말하고 있다. 물론 시민을 위한 노력도 있었지만, 그저 보여주기식도 있었고, 또는 지배계층의 구미에 맞는 계획도 있었다. 물론 다 실패 였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도시를 계획하는 이의 생각만 반영된 도시의 이미지는 절대 그 이미지 그대로 만들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자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는 것은 도시를 계획할때, 또는 도시가 만들어질때에는 그곳에 사는 이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부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는 특정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그곳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서울은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왕과 양반위주의 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한 형태에서 6.25를 겪으며 무너진 도시를 세우기위해 국가위주의 개발이 중심이 되었기에 당시에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거추장스러운 규제가 대부분이고 사람이 있어야 할 곳에 건축만이 남고 소수의 건축업자에게만 유리한 도시가 되었다.

사실 이 부분은 왜?라는 질문이 든다. 서울의 어떤면이 저자에게 이리 아쉬움으로 남는지? 이 부분은 아마 다음책에 등장할 것 같다. 서울이 좋은 도시의 모습은 아니지만 도시공학자로써 바라보는 서울의 아쉬운 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지금 서울의 모습과 유럽도시, 미국도시에 비해 아쉬운 점은 무엇인지를 다음 편을 통해 꼭 알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개인적으로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헤세바르텍이 기록한 여행기 속의 서울은 조금 아쉽다. 물론 100년전의 서울은 당시 오스트리아에 비해 많이 뒤떨어진 모습이겠지만. 사실 그들도 그런 시대를 거쳐오지 않았는가?! 췌. 닥터후보니까 중세 영국으로 가니까 X밭이던데... 하던 생각에 잠시 울컥 하기도했지만.ㅎ 그때의 서울과 지금의 서울이 불과 100년밖에 차이나지 않는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발전에 으쓱해 지기도 한다.

사실 역사에는 관심이 있지만, 말그대로 세계사에 대한 부분이였지, 도시 관점 속에서 역사는 처음이였기에 책을 읽으며 신선했다. 아. 역사의 흐름을 이런 관점에서도 알 수 있구나. 하는 새로움. 저자의 다음 편을 기다리며. Good!

"도시의 공기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다. 도시로 들어온 어떤 사람에 대하여 누군가가 아무런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은 채 1년 하고도 하루가 지나면 그는 농노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된다는 불문율이 독일에서 자리 잡았다. 이전에는 없었던 '독립된 개인'이 탄생한 것이다." p.82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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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 건축 너머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질문과 성찰 서가명강 시리즈 17
김광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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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건축에 대해 어떤 말을 하려하나, 미래를 향하는 건축을 말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건축의 역사부터 미래까지를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하면서 읽은 이 책은 먼저 소감을 밝히자면 내게는 어려웠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점을 나느 다음과 같이 이해햇다. "건축에 대해 알고, 원하는 바를 말하고, 간섭하라는 것."

 

"건축은 불순한 학문이다"라는 대제목이 붙은 챕터를 시작으로 마지막 "건축이 모두의 기쁨이 되려면"이라는 대제목으로 끝나는 이 책은 건축의 의미하는것과 건축이 나타내는 것을 시작으로 사회가 변화해감에 따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변경으로 인해 변화하는 건축, 그리고 그 건축이 나타내는 것에 대한 변화, 그리고 앞으로(?) 아니면 진정 원하는(?) 건축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한다.

건축은 태생적으로 '배제'하는 학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타자로부터 나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구별짓기 위해 짓기 시작한 것이 건축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지금 선사시대부터 남아있다고 보는 유적터를 가보면 돌 세워놓은거며, 이스타문명의 모아이 석상이 떠오르는것 나뿐인가. 저자는 또 다른 의미로 건축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사람들의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가장 바깥에 있는 보호물이기도하고, 현대, 특히 우리나라의 건축은 말그대로 부동산이고 재산 형성을 위한 욕망의 산물이라고 말씀하시니 첫 대제목이 이해가 가는 바이다.

그렇다면 건축은 사회를 나타내는가? 아니면 사회가 건축을 그리 만든것인가. 이 부분에서 한나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등장한다.(개인적으로 못읽어본책이다....)

 

"이소노미아는 법 앞에서 동등하다는 뜻이다. 평등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듯이 무릇 인간이기 때문에 추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날 때부터 불평등했기 때문에 법에 의해 시민이 됨으로써 인공적으로 약속한 사항에서 평등이 비롯됐다는 것이다." p.123

 

평등이라는 개념을 당시 도시들은 격자모양으로 구회함으로써 도시 전체의 체계를 통일했고, 그런 공간을 같이 누림으로써 공평한 권력으로부터 평등을 누리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근대 산업화를 시작으로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이 공급되고, 소위 특정 타운을 만들어 그들에게 대출을 통해 제공하고, 개인이 '사유'하는 사적인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제공되었다고도 한다. 그로인해 공적장소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음으로써 공적영역의 건축물의 권력은 당시의 지배계급, 요즘이라면 관료행정 계급이 그 권력을 가지고 주문함으로써 다양성을 고려한 건축이 아니라 표준화하고 단순화된 오로지 기능적인 요구, 다채로운 의견이 아닌 단순화되고 '사회적 요청'의 근거로써 건축물이 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건축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요구에 따라 건축물이 세워지고, 그 건축물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 획일화되고 표준화 됨으로써 다시 건축물의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음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를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여러 철학자의 말을 들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중 푸코의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상상해보니, 병원, 학교, 공장이 다 비슷하게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의 색깔만 다를뿐 다 비슷하게 생긴 건물에 내부도 거의 비슷하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전혀 다른 목적으로 누리는 공간이 다 비슷한것이다. 이것을 '국가이데올로기정치'라 하며,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국가와 사회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장치들이라는 것이다. 소름이 끼쳤다.

 

다른 건축물로 "소유가 곧 자산의 정도"를 나타내는 요즘의 아파트 역시 복잡하고 다양한 내용이 나타난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  소유하는 주택이라는 개념은 근대 산업화와 함께 등장했고, 소위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에게 던지는 당근과 같은 개념이기도 했다.  개인의 내밀한 공간을 제공하고,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프라이빗한 곳, 깨끗하고, 쾌적한 '나', '우리가족'의 집이라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환상을 '집'에 묶어두기 위한 수단으로써 제공되었고, 그것이 더 많은 일을, 더 많은 노동을 하게끔 만드는 방법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지어진 뉴욕 롱아일래든의 레빗타운p.224가 등장하는데, 그 사진을 보고 있자니, 그 집들을 위로 쌓아 올리면 지금 대한민국의 아파트이겠구나.하는 생각에 미국이나 우리나, 비슷하다는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지어지는 우리의 집은 무엇이 목표가 되어야하는가?

 

"지속 가능성을 말할 때 종종 인용하는 문장이 있다.

'환경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 미래의 아이들에게서 빌린 것이다.'

레스터 브라운의 경구다. '대지를 잘 돌보라.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대지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로부터 잠시 빌린 것이다'라는 인디언 격언에서 따온 말이다." p.253

 

과학, 기술등은 미래를 생각하고 연구되고 발전되어 가지만, 건축은 현재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가장 보수적인 학문중 하나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건축이 미래를 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개개인이 어떤 건축을 원하는지를 항상 생각하고 소리내어 말을 해서 그것을 건축가에게 사회에 반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40년전, 50년전에 만들어진 학교와 똑같은 학교를 또 만들고 앞으로 미래를 살아가야하는 아이들이 지내야 하는 공간에 대해 그저 전문가들이나 관료행정가들에게만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공公이란 어떤 것일까? 아렌트는 그리스 광장을 떠올리며 '공적'이라는 용어가 세계 자체를 의미한다고 했다. 공이란 '세계'다 권력이나 행정이 아니다. 공은 개인과 사회에 잠재한 바를 확장해 이뤄지는 '세계'를 말한다. 우리는 공공은 많이 말하고 이것으로 정책의 타당성을 강조하지만 '세계'로서의 공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p. 282

 

건축은 기능적으로도 필요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 공간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행복해야 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공간을 활용하면서도, 그 공간을 가까이 또는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누리는 기쁨도 포함해야 한다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공간을 누가 만들어내는 것일가. 그것을 저자는 그곳을 사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실천함으로써 그 건축이 만들어낸 공간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렌트가 말한 '세계'라는 공간이라고 한다. 그런 공간으로 말리의 젠네모스크라는 건축물이 등장하는데, 그 모스크는 1년에 한번 전 도시인들이 그 모스크에 보여 진흙을 칠한다고 한다. 말그대로 출현하는 공간으로 모든 시민들의 손으로 지켜지고 만들어지는 건축인 것이다. 그 모스크는 그곳에 사는 이들의 신념, 의지, 생각 그 모든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흙으로써 만들어진 물화인것이다.

 

처음부터 말했든 책이 쉽지 않다. 건축이란 무엇일까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읽기시작했지만 생각보다 어려워 한번 읽고, 서가명강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다시 읽으며 이해한바는 '건축'을 사회속에 맡기지말고, 사회의 일원으로써 소리내어 만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교를 바라보면서는 적어도 40년,50년전과 같은 모습의 학교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기술이 발전하는데 고작 이런생각밖에 못하냐는 소리를 해선 안될거같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 정말 빠르게 변해사는 사회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무엇을 생각했었는가를 깊게 고민해 봐야겠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Good!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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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 왕과 사대부, 그리고 사관마저 지우려 했던 조선 최초의 자유로운 사상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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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반란이나 왕위찬탈을 한 인물도 이름이 알려지는데, 이름 자체가 금기어가 된 "유학자"가 있다는 제목 그 자체가 놀라웠다.

"윤휴"라는 인물이라.

 

자유로은 사상가라는 책의 소개글을 읽고, 아.. 싶었다. 계급을 건드렸구나. 아니나 다를까. 윤휴는 인조시대부터 숙종까지 살았던 인물로 실제 정치는 노년에 시작했고, 그나마도 제대로된 정치는 5년정도 였다. 인조시대의 병자호란을 겪고, 말로만 북벌을 외치고, 자기 안위만 도모하는 다른 양반들과는 달리, 청의 정세를 보고 북벌을 준비하고 실제로 북벌을 행함으로써 병자호란과 우리나라 왕의 삼전도 굴욕을 회복하고, 우리의 자주성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남인 세력이였다. 그런 북벌을 행함에 있어, 사대부에 대한 특권을 없애는 것을 시작으로 양반과 평민, 노비를 구분하는 호패를 없애고, 모두 지패를 가짐으로써 호패로 구분되는 반상의 구별을 없애고, 양반 사대부가는 물론 양반 개개인의 숫자를 조사하여 모두에게 군포를 내게하는 구산제를 주장한 인물이였다.(당시 군포는 평민들만 대상이였고, 그나마도 죽은사람, 도망간 사람, 젖먹이 아이까지 부과대상이였기에 나의 군포뿐아니라 타인의 군포까지 평민들의 몫이였다.)

반상의 구별에 대해서도 이토록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상가이다 보니, 서얼에 대한 차별 또한 없애야하고, 북벌을 위해 능력있는 무인을 선출하기위해, 무과에 평민도 지원하게 하는 등 말그대로 양반과 평민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였다. 그러다보니, 당시 양반들은 무과는 평민들이나하는 천한것으로 폄하해, 자신들은 지원도 안했다니, 그러고도 '입'으로 북벌을 외쳤다는게 정말 가증스러울 정도 였다.


그런 반상의 구별, 서얼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자 하면서도 인조 이후 바닥에 떨어져있는 왕권으로, 1,2차 예송논쟁 시기에도 왕의 예법은 일반 양반의 예법에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인물이기도 했다. 기년설을 주장했으나, 왕가는 일반 양반가와는 다르기에 차남이지만 3년상을 이야기한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주자학이 대세였던 시기, 주자만이 세상의 이치가 아님을 말하며, 공자와 노자 그 사상을 주자의 해석이 아닌 그 자체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당시의 유학자들의 반발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이런 당시의 주류, 당연하다는 모든 것의 기반을 흔드는 사람이다보니, 결국 사대부 전체가 그의 적이 되어 버린것이다. 가진 특권을 모두 내려놓으라니, 모두의 적이 되어 역모로 몰리고, 증거도 없이 그는 그냥 죽어야 했다. 물론 그 사이 숙종의 이해가 얽혀있긴했지만, 숙종의 계산이 아니였어도, 그는 죽을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서인의 세상이 노론으로, 그리고 조선말까지, 그리고 일제치하의 친일까지.  문득 광해대군이 반정군을 이겼다면, 소현세자 살았다면, 숙종이 조금더 현명한 인간이였다면. 이라는 역사속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 IF(만약)를 생각치않을수가 없다.


이 책을 통해 알게됬지만, 드라마에서 숙종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사화를 이용했지만, 그 사화 또한 당시 집권세력이나 반대세력의 이권과 맞물려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서인의 반정이 두려웠던 숙종이 서인에게 권력을 주기위해 탁남, 청남 모두를 쓸어버린 것이다. 말그대로 남인이 눈앳가시였던 서인과 그런 서인이 두려워 원하는 것을 주고 조용히 시키고자 했던 숙종의 이해가 맞아들어감으로써 복성군을 통한 반정을 꾸며 남인에게 뒤짚어 씌운 전형적인 공작정치를 하는 인물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뭐 예상했고, 당연히 그랬겠지 싶었던 당시 사대부 즉 양반의 행태를 이 책에서 읽고 읽다보니, 조선은 망해갈수밖에 없는 나라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자신들만의 안위를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하는 인물들이 99.9%였다는 것. 그러니 그 0.1%의 인물들은 정적도 아니고 말그대로 세상 땅에서 흔적조차 없어야 하는 인물들이 였겠구나 하는 사실이다. 슬펐고, 화가 났다. 지들의 안위를 위해서 부리는 억지는.... 읽고있다보면 화가...


문득 우리도 지금 뭔가에 가려지고 귀막혀진 세상을 보고 있진 않을까. 저들의 말도 안되는 논리에 귀막고, 눈감아버린 왕. 그런 시대에서 부당한 것들을 바꿔보려했던 인물들의 스러짐은 지금은 없는 것일까?! 과거를 배우면서, 현재는 정말 나아졌는가를 꼭 생각해본다. 근데 확신은 들지 않는다. 늘.


북벌의 주장은 '말'로만했던 송시열이 아니고, 진심으로 자주국방을 외쳤던 윤휴라는 것. 그리고 북벌로 인해서 였지만, 일반 평민에게만 오로지 있었던 의무를 양반에게도 부여함으로써 특권을 없애려 한 인물. 당시 학문적 사상에 대해서도 누군가의 특정 학설이 아닌 그 근본을 들여다 보려한 사람. 우리의 교과서에서 실렸으면 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알았지만, 그 이름 두글자 '윤휴'는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Good!


"윤휴는 그렇게 사망 300년이 지난 지금도 지워진 이름이 되었다.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고 있는 우리시대는 그를 살해했던 시대보다 나은가. 윤휴는 지하에서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p.396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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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왔는데 중생으로 갈 수는 없잖아 - 지극히 평범하고 게으른 산골중의 성장기
법혜 지음 / 빈빈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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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왔는데 중생으로 갈수는 없잖아"라는 제목에 아~ 스님이 쓰신 책이구나 해서 읽은 책이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기독교에대한 언급은 많이 되는데, 불교쪽은 책 한권정도 읽어본게 전부라.. 그냥 궁금했다. (아, 법정스님 책을 몇권 읽기는 했었다.ㅎ)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불교에 대한 책은 아니다. 책의 부제에 있었다. "산골중의 성장기"  어쩌다보니 스님이 되신 법혜스님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책은 모르는중, 헤매는중, 어리석은중, 찾아가는중 등등의 스님의 성장기에 따라 중제목과 그 제목에 해당하는 소제목들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가르침도, 스님으로써 불자들을 인도하기 위한 가르침도 어떤 것도 없다. 이 책은 그저 스님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읽고 있다보면 스님의 가신 길과 스님이 그 길속에서 깨달으신 것들에 숙연해진다. 그 길이 스님의 가르침이란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종교를 믿지 않지만, 누군가의 인생에서 종교를 믿으라고 설득하고자한다면 한낱 말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를 믿고 있는 자신을 존경하게 만들어, 그사람을 닮고자하는 마음을 갖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참 종교인의 자세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는데, 내게는 책의 저자인 법혜스님의 삶이 그런 모습으로 보였다.


어쩌다 중이되신 법혜스님은 훌륭하신 첫번째, 두번째 은사님으로부터 가르침을 얻어, 산골 100년쯤 된 암자를 고쳐 수행을 하시다 더 깊은 공부를 해보고자 미얀마로 가셨다. 우리나라와 많이 다른 미얀마에서 '담마'를 만나 불자의 길의 방향을 깨닫고, 서울로 돌아와 봉평의 암자에 자리잡아 공부하는 스님으로 살고 계신다고 한다. 첫번째 암자에서, 미얀마에서, 지금의 봉평에서 스님이 살아내신 삶을 죽 읽다보니, 내가 불교를 믿는다면 나는 "중생으로 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사람은 못 되겠구나...ㅠ) 육체적 불편함도, 사회적 불편함도 뭐가됬든 불편함 자체를 요만큼도 못참아내는 사람으로 나는 이리는 못살겠네...하는 생각에 정진은 커녕 투덜대다 안해!이러고 그만둘 사람이라..ㅠ


책을 읽다 문득 생각이 딴길로 빠졌던 부분이 있다. 스님께서 미얀마에 계시던 때의 글인데, 그 당시에 미얀마 정부가 행정수도를 옮기면서 지출이 늘어 물가를 올렸는데, 버스요금이 무려 2배에서 4배가 올라 승려분들께서 평화시위를 했었단다. 이유는 그로인해 국민이 물가상승으로 인해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기에 그걸 알리고자 발우를 거꾸로 엎어들고 마을을 돌며 불경을 읊는 평화시위를 한것이다. 허나 그 이틑날부터 군대진입해 온 절을 돌아다니며 승려들을 체포하고 때리고하다가 저항이 일어나니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진압을 한것이다. 그때 한국스님들께서 미얀마의 절에 묵고계신 스님에게 비행기표를 내밀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귀국을 종용하셨다고 한다. 그때가 2007년 이였다. 1997년에서는 군부에의한 미얀마 시민의 대학살이 있었고, 그때는 산채로 불태워지거나 묻혀죽은이도 태반이였다니, 지금 다시 군부가 세력을 잡고 시위하는 일반인을 어떻게 대하고있을지, 상황 자체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조차 없었다.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시기보다 더 가혹하지 않을까하는 끔찍한 생각이 자꾸들어서. 어서 빨리 저 쿠테타가 종식되기를 기원한다.


책에서 나에게는 종교적인 부분을 생각치 않더라도 한 인간의 삶을 놓고보더라도 배울점은 분명히 있다. 조금의 불편함도 참지 못하는 내게, 무엇하나 제대로 못해내는 내게, 타인의 시선과 말에 일희일비하는 내게, 무엇이 나에게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Good!


' "나는 장미 한 송이를 사지 않겠다"라고.

어떤 이가 장을 보러 갔다가 아름다운 장미꽃을 보고 너무나 마음에 들어 무엇을 사러 갔는지도 잊고 장미 한송이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더란다. 꽃을 사 왔건만 꽂을 데가 없어 꽃병을 샀고, 꽃병을 사고 보니 꽃병을 둘 식탁이 없어 식탁을 샀는데 식탁과 부엌과 어울리지 않더란다. 식탁을 사고 보니 부엌이 마음에 안 들고, 식탁과 어울리는 부엌을 지었더니 집이 부엌과 어울리지 않더란다. 하여...

욕심의 끝은 가엽고 한없다.'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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