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지음, 김도연.이선화 옮김 / 달콤한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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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적힌 제목이지만, 웬지 표지의 글자가 아랍어체?로 보이는건 나뿐일까. 지인이 이 책이 궁금하다면서 아는 책이냐고 물어왔는데, 뭐지 하고 찾았다가 우연히 읽게된 책.

프랑스인이면서 아랍인인 저자가 쓴 소설이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 내용은 곧 저자의 성장소설임을 알 수 있었다.


한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그 아이의 생각을 따라 쓰여진 책은 이란의 격동기에 이란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온 부모님을 따라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이란인으로 하지만 이제는 새로 맞이해야할 또다른 조국 프랑스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전세계에서 전쟁, 내란, 분쟁등으로 자신의 조국을 불가피하게 떠나야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각 나라마다 이민자, 망명자들과 꽤 오랜시간 골머리를 앓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 우리에게 어쩔수 없이 자신의 나라를 떠나온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 나라에 동화되면서도, 자신이 살아온 뿌리를 잊지 못하는 것인지를 이 책은 아이의 눈으로 종알종알 이야기한다. 


자다가 누군가 체포되고, 끌려가 별것 아닌 죄목으로 감옥을 가고, 사형을 당하는 이란의 독재를 떠나 프랑스에 자리잡은 마리암의 가족, 마리암은 이란의 모든 것들이 그립지만, 아버지는 크로아상을 사오며, 이제 프랑스인 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학교에 갔지만 자신과 다른 모습,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친구들 틈에서 부족한 프랑스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무는 마리암. 어눌한 프랑스어가곧 놀림감이 될것임을 알기에, 프랑스어가 자리잡아 말을하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음식은 프랑스가 이상하다. 이젠 음식을 먹지않는 마리암. 하지만 결국 적응을 시작한 마리암에게, 이제 프랑스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마리암에게 아버지는 페르시아어를 가르치려든다. 집에서는 프랑스어를 쓰지말고 페르시아어를 쓰라며, 그것이 너의 근본이라고,  하지만 마리암은 그런 아버지가 싫다. 왜 이제와서. 프랑스 인이라며, 왜 나에게 페르시아어를 강요하는가.

그러고 몇년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마리암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여전히 그리운 이란이면서, 프랑스어가 서툰 어머니는 친구들에게 부끄럽고, 이란에서 자신은 프랑스인이고, 프랑스에서 자신은 이란인인. 그녀 자신이 말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마리암은 자신의 근원, 이란을 찾는다. 잊고 지냈던 것들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그러면서 그리웠던.


이 책은 이란인이면서 프랑스인인 마리암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어떻게 스스로를 찾아가는지를 굉장히 무겁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통통튀는 아이의 시선으로 말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한국인으로, 어쩌면 책속에서는 프랑스인으로 이민자인 마리암을 바라보는 시선으로써 읽게된다. 내가 우리나라에 온 망명자를 이민자를 어떻게 바라봐야하는지. 그들이 타국의 문화에 동화되어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기위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고민하는지를 말이다. 


사실 나도 우리의 것이 타국의 문화에 쓸려 변화하거나, 내가 알지 못하는 문화를 나의 나라에서 받아들이기는 사실 쉽지않다. 그런데, 그들은 쉽겠는가. 약자인데, 소수인데, 그럼에도 그들을 따뜻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시선은 왜일까. 알려고 들지 않아서,,, 몰라서,, 글쎄.

이 책은 그런 나의 생각들을 계속해서 반추하게 한다.

추천.


 "다행히 지도교수는 특별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녀는 여기서 문화의 개방성을 찾을 수 없고, 이민족 동화에 따른 리스크가 간과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는 다른 문화와 영토, 정체성과 언어 등 프랑스와 다른 것은 전부를 거부하는 거라고 비판했다. 지도교수는 이런 시스템들이 언젠가는 진정한 포용과 교류의 배경이 되기를 희망했다.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나는 내가 광범위한 세탁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의 다름을 숨겨야 했고, 이어서 그 다름을 완전히 지우는 과정을 따라야 했던 것이다. 
 프랑스에 처음 온 아이는 오 분간 자기소개를 하고나서 곧바로 정체성을 완전히 지우는 과정에 들어간다. 첫 오 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근원'에 대해 말 할 수 있는 기회이다. '세탁' 과정을 마치고 나면 정규반으로 돌아갈 수 있다. 언어새내기든 언어세척이든, 결국 같은 거였다. " p.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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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쾌락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7
에피쿠로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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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쾌락주의>만큼 우리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학파가 있었을까?! 옮긴이 역시 에피쿠로스가 이야기했던 의미가 우리말에서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는"쾌락"의 의미는 아니였다고, 그래서 잘못된 번역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활동할 당시에도 "쾌락"이 우리가 알고 있는 "쾌락"의 의미는 아니라고 말할 정도 였으니, 어쩌면 오역이 아닐수도. 그냥 그의 말을 이해를 잘 못한거지.ㅋ 그래서 궁금했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은 대체 무엇이였을까?!


에피쿠로스는 방대한 저작물을 남겼지만, 남아있는것은 얼마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런 그의 저작물을 모아, 옮겨놓은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것은 철학자이줄 알았던 에피쿠로스가 현 시대를 살았다면 과학자였겠구나 싶을만큼 자연학에 대한 저작물을 많이 남겼다는 것이다.   역자가 정리해놓은 당시의 철학의 계보를 읽고 있자니 그의 저작물에 이해가 가는 바이기도 했다. 탈레스에서 시작한 유물론적 철학관이 계속해서 여러 사람을 통해 다양한 분파로 나뉘며 신의 영역이라고 믿었던 것이 점차 자연학으로 설명하려는 움직임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런 철학적 논조는 소크라테스를 전후로 자연학을 통해 증명하려했던 것들을 인간 이성, 지성을 통해 추론하려는 논리적 움직임이 시작된다. 하지만 아테네의 몰락과 각종 전쟁 등으로 혼란에 빠진 시기로 혼란기에 접어들며, 그런 철학적 흐름은 개인주의적이고 실존주의적인 철학을 필요로했고 그때 등장한 것이 에피쿠로스 였다.


에피쿠로스 서신의 시작은 헤로도토스에 보내는 것이다. 이 서신을 통해 그가 왜 자연학을 연구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자연현상에 대해 면밀히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불필요한 오해나 엉뚱한 곳으로 빠져드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사고에 근거하지 않는 사고는 근거없는 두려움과 혼란과 괴로움을 낳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편적이고 중요한 원리를 앎으로써, 이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 내면에 평정심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연구하는 지식은 평정심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셨던 걸까….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아타락시아 평정심을 기본으로 한다. 이 때 쾌락은 먹고 마시고, 애욕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맑은 정신으로 이성적으로 추론하여 선택과 회피의 근거를 찾고, 잘못된 생각을 몰아내는 것을 말한다. 그 시작은 사려깊음을 기본으로하며, 그것은 곧 이성적인 사고를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하고, 그것은 곧 평정심을 의미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기에 그의 삶은 곧 신과 같은 삶이며,
"불멸의 선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필요의 존재와 다르지 않기 때문 p.116" 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이런 서신 속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점은 인간의 혼에 대해서도 설명한다는 것이다. 혼의 상실등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읽고있자면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그것을 자연학으로 설명함으로써 그런 부분조차 인간의 지성과 이성으로써 이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과거보다 훨씬 더 과학적으로 발전된 지금의 인류보다 더 이성적이여서 놀랐다.  지금을 살고계셨다면 천상 과학자셨을듯 싶어서ㅋ

또한 다른 한편 에피쿠로스의 글을 읽으며 놀라웠던 것은 그가 말하는 것이 꼭 우리가 말했던 "카르페디엠"의 의미와 맞다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우리의 미래와 맞닿아있다고 말하는 의미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 말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 여전히 인간이 말하는 현재의 행복에 대한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그의 쾌락에 대한 사상은 대단히 도덕적이면서도 개인적인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어울어지는 도덕적인 삶이면서, 나의 평정심, 나의 쾌락에 보다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그토록 유행했던 사상이였는가 싶게, 그리고 현재에도 그의 사상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되돌아 보게 만드는게 싶게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 중요한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수 있을까. 방점은 현재다. 읽어볼만한 책이다. Good!


"내일을 가장 적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 가장 기쁜 마음으로 내일을 맞을 수 있다."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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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슬픔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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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슬픔> 왜 이 책을 읽고 싶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베트남 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만 기억에 맴돌뿐. 아무튼 읽었다. 세계사를 관련 책을 읽다보면, 진짜 많은 전투나 전쟁이 나온다. 문득 대체 사람이라는 종족이 어떻게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올수 있었는지가 궁금할 정도로. 


이 소설은 그런 전쟁 중 하나였던 베트남 전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이의 기억이다.

끼엔의 전쟁 이전부터, 전쟁 이후까지. 큰 줄기는 끼엔과 프엉의 스토리이면서, 그 중심에는 전쟁이 있었다. 전쟁 이전의 끼엔과 프엉, 이후 끼엔과 프엉 그들은 죽지않고 살아 만났지만, 더이상 서로가 알고 있던 상대도 아니였고, 스스로도 이미 변해있었다. 이야기는 끼엔의 기억을 따라 쓰여졌지만, 모든것이 비정상이였던 그 시대에 대하여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각개의 장면으로 쓰여졌기에 더 그 시간 속에 있는것 같았다. 

그 시간이 흐름으로 기억될리가 없었다. 장면으로 기억되었고, 사람으로 기억되었고, 사건으로 기억된다. 끼엔이 생존자로써 이 이야기를 써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곁에 그를 살려준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죽었지만,,, 

문득 떠오른 장면을 떠올리며, 끼엔은 그들과 함께 있던 장소로 찾아가지만, 그들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살아남았지만 끼엔의 그 시간에 파멸되었고, 전쟁이라는 그 비극 속 있던 누구의 삶도 오롯할 수는 없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 속에 있던 이의 모든 기억과 삶은 아직 전쟁 속에 있었다. 끼엔도 프엉도, 모두 다.


대체 전쟁은 누구를 무엇을 위해 하는것인지. 그 비극 속에서 평범했던 모든 이의 인생을 이토록 망가뜨리면서까지 왜 해야하는 것인지를,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베트남 전에 대해 베트남 인의 눈으로 쓰여진 책이라 어떤 이념이 보이지 않을까했지만, 전혀. 이 이야기 속에서 적은 미국이 아니라, 이 전쟁을 일으킨 모두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전쟁이라는 주제를 선택했고, 왜 반드시 그것이어야만 하는 걸까? 전쟁 당시 그의 삶은,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의 삶은 실로 참혹했고, 심지어 그것은 삶이라 말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으며, 그 삶속에서 예술적인 색체란 찾아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p.77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 사람은 누군가의 자식이고 부모이고 형제이고 자매이고 너이고 나이다. 그 사실을 모든 이가 기억한다면, 전쟁이라는 비극은 이 땅에서 없어지지 않을까.


진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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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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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소설로 유명한 <제 5도살장>을 드디어 읽었다. 다른 책을 읽다가 문득 전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어 읽었는데, 왜 이 책이 반전소설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책의 해설에 보면 실제 작가는 드레스덴에 포로로 잡혀있었고, 도살장을 포로수용소로 개조한 제 5도살장에 진짜 끌려갔고, 살아남았다고한다.(진짜 제 5도살장이 있다고 한다!) 이 책 역시 화자가 드레스덴에 있었고, 그 때의 이야기를 소설로 집필하려는 시도로 시작한다. 실제 내용은 화자의 소설 이다.


주인공 빌리 필그램은 그냥 그런 미국인,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사실 그안에서 가장 먼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런 그는 그 전쟁에서 포로로 끌려갔던 지옥 속에서 살아남았다. 정말 군인 같았던 이들은 죽었는데 말이다. 그런 그가 전쟁 이후 트랄팔마도어라는 외계인에게 납치를 당했고, 시간 여행을 시작한다. 그가 원하는 시간으로 갈 수 있는것 같지는 않다. 소설 속에서 그는 문득 돌아보니 어느 시간때이고, 돌아보니 어느시간때이고, 두서없이 왔다갔다하니까. 


빌리가 책 속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뭐 그런거지"라는 말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학살에 그는 항상 저 말로 마무리를 한다. 그러다보니, 나는 읽는 내내 이 책이 대체 왜 반전소설일까?라는 의문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 학살, 파괴 이런 것들이 저토록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인데,, 전쟁이라는 불가파함에 대해 어쩔수 없는 인간성의 포기? 그게 이 소설이 말하고 싶은 것일까? 여전히 나는 의문스럽다. 

다만 빌리의 냉소는 그의 시간여행 때문이기도하다. 어짜피 무슨 '짓'을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어쩌면 냉소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긴 인생의 시간 속에서 늘 비극만 보고 사는 것은 아닐테니, 그 비극을 떠나 자신의 희극 속으로 들어가면 되니까. 그것이 트랄팔마도어인들이 사는 방식이기도 했다. 


시간이라는 절대 값이 우리에게 전부 노출되어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모든 것이 정해진 결과라는 불가피함으로 빌리처럼 살게될까?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나에게 든 다른 의문이였다. 우리가 늘 말하는 자유의지는 시간이 선형으로 흘러가고 있어, 미지로 남아있기 때문이기도한데, 그 시간이 우리에게 공개되어진다면,  우리가 우리의 모든 시간을 알고 있다면, 마치 "네 인생 이야기"의 헵타포드 언어처럼 말이다. 그럼 우리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할까?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폭력성, 죽음, 학살 등에 대해 빌리가 트랄팔마도어인에게 어떻게 하면 당신들 처럼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물었을 때, 그들은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므로 그러니 당신 인생에서 가장 좋은 순간만을 보며 살라 말한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살고 있는데, 과거의 순간에 멈추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해질까? 평화로워질까?


"오늘은 그렇죠. 하지만 다른 날에는 당신이 보거나 읽었던 어느 전쟁 못지않게 끔찍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에 그냥 안보고 말지요. 무시해버립니다. 우리는 기분좋은 순간들을 보면서 영원한 시간을 보냅니다. -- 동물원의 오늘처럼 말입니다. 지금은 멋진 순간 아닌가요?" p.151


하지만 어쩌면 빌리는 시간 여행을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그 순간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그 끔찍한 순간 역시 그의 인생의 한 부분이였으니까. 어쩌면 바꾸고 싶었는지도,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결과로 "뭐 그런거지"라는 냉소만이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볼수 있다한들, 한 인생의 흐름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기억은 별개다. 그것은 좋고 나쁨을 떠나 우리 기억속에 각인되는 것들일테니. 그러니 비극은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트랄팔마도어인이 아니니.. 

오래간만에 굉장히 신기한 책을 만났다.

책이 던지는 질문으로 머리속이 복~잡해지는 하지만, 묘한.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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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 한국 사회는 이 비극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김승섭 지음 / 난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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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김승섭 교수님 신작 책 제목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더 나와야, 저 제목이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일지. 문득 두려워졌다.

김승섭 교수님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거의 바로 구매했지만, 이제서야 읽었다. 이 분 책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탁. 짚고 있어서. 내가 외면하고 싶어하는 그 현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분이라서. 그래서 이제서야 읽었다. 부끄럽게도.


책은 교수님이 첫머리에서 후주에서도 말하듯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비극에 대해 말한다. <천안함>과 <세월호>.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 비극속에서 살아남은 이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비극들에 대해 교수님이 '공부'하는 사람으로 쓴 글이다. 천안함 사건으로 46명이 죽고, 58명이 살았다. 그 58명의 생존자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일까? 패잔병이라는 시선, 천암함 생존자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는 현실, 군 내에서 패잔병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외면하는 시선, 첨예한 정치적 대립. 누구도 그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의 삶을 말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세월호는. 세월호 생존학생들에 대해 국가가 지자체가 언론이, 우리의 행위나 생각은 좀더 나아졌을까? 전혀. 여전히 보여주시기식이였고, 프레임을 씌웠고, 생존자, 유가족 누구에게도 그들이 진정 필요로하는 마음을 나눠주진 못했다. 그리고, 역시 세월호도 진행형이다.


작가는 이런 문제에대해 국가적 대처나 지원 등은 물론 우리 사회에서 '이야기'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말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그저 피곤해하고, 그렇기에 그 이야기들을 시위나 보상을 위한 일종의 '떼'쓰는 행위로만 보는 것이다. 세월호 생존학생의 정신적 PTSD등을 고려하여 군입대 문제를 논의해야 함에도, 생존자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그리고 군대를 갔고, 생존학생은 건강히 군생활을 마치지 못했다.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못한 것이다.

비극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그 고통을 오롯히 혼자 감내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결국 치유되지 못한 삶을 낳고, 그 것은 또다른 비극을 낳는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물론 비극이 발생할 때마다 대처방안에대한 백서를 통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위해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사고, 사건을 통해 살아남은이, 떠나보낸이들을 위해 우리가 어떤 시간을 함께 나눠줘야할지에대해서는 우리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몫이 아닐까 싶다.


책의 말미에서 산업재해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도 여전히 여전히 갈길이 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사회의 안전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소방공무원, 경찰공무원등의 재해에 대해 국가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그리고 강도높은 노동 현장에서의 재해를 각 회사가, 국가가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그 통계를 바탕으로 본 우리사회는 여전히 50-60년대를 보는것 같았다. 

책의 제목인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라는 제목이 정말 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더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을 만나야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피해자는 '당신'이 아니라 '나'일 수 있다는 것. 비극은 사람을 가려오지 않는다. 그러니 더 타인의 비극에 피곤해하지도, 무감각해지지도 말아야하지 않을까.


강력추천!



"혹자는 세월호 생존학생과 천안함 생존장병의 고통을 모욕하고 가짜 뉴스에 호응했던 사람들이 어리석은 극소수일 뿐 그러한 현상을 한국 사회 전체로 확대해 생각할 수는 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피해자들에게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저열한 비난을 하는 사람 자체는 소수였을지 몰라도, 우리 편의 고통만을 선택적으로 공감하고 우리편에 유리한 근거만을 선택적으로 취합하는 성향이 사회에 만연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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