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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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만큼 보인다는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이가 대체 무엇이길래.
그런데 그 말이 이해가 되는 나이가 된것 같다. 물론 지금 보이지 않는 것도 많겠지.
20대부터 읽었던 박완서작가님 책은 늘 내게 향기로움을 주었지만,
40대가되어 읽는 박완서 작가님의 글은 깊은 공감을 준다. 20대때에는 그냥 흘리듯이 읽었던 문장, 단어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그때도 좋았고, 지금도 좋지만, 뭔가 지금은 나의 입주위를 맴도는 말들이 유려하게, 그러면서도 소박하게 작가님의 글로 아, 맞아. 아, 그래. 이런 감탄사가 나온다.
어쩜 이리 솔직하면서도, 깊은 속마음을 단아하게 쓰는 분이라니.
새삼 작가님의 새로운 글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면서도, 이 분의 글을 다시 읽으며 느끼는 새로움은 낯선듯 반갑다.


제목부터 "사랑을 무게로 안느끼게".. 라니. 20대라면 당연한 말이지라고 생각했을 이 제목 마저도 내게는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세월이 흐르고, 지켜야 할것, 지켜나가야 할것이 나이가 지나며 어깨 위로 한켜 한켜 얹히다 보면, 문득 그것들이 다 사랑임에도 무겁워 버겨워지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이 제목이 뜨끔하면서도, 나의 젊음을 내가 가졌던 첫 마음을 다시 생각하게 했달까. 표제작이 책의 거의 말미에 등장하는데, 작가님의 마음이 내 마음인가 싶어서 책 제목을 물끄러미 다시 보게도 했다.


"화창한 세상" 10, 20대에는 입시와 취업준비과정을 거치며 내가 첫 발을 디디는 곳은 남들에게 보기 좋아야 하는 곳이라는 생각 속에 갖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절이였다. (돌이켜보니 그러했다) 그리고 중년의 시간을 맞고보니, 왜 그런 편협한 생각 속에 있었는지에 대한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된다. 빈부격차는 더욱더 심해지고, 더 무한경쟁으로 빠져드는 사회 속에서 지쳐가서 인지도. 이 글을 그렇게 살아왔던 내가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지, 그래서 내가 무엇을 외면하였는지를 알게했다. 그래서 뜨끔했달까. 
"이제  우린 열심히 일만 하면 배부르고 등 뜨스울 수 있는 정도는 보장된 세상이 됐다고 믿으면서도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갈망은 오히려 헐벗고 굼주렸을 때 보다 더하면 더하다" p.126


"항아리를 고르던 손" 어여쁜 손에 고무장갑을 끼웠을 때, 그 투박함으로 인한 정나미 떨어지는 손에서 옹기를 고르던 뿌뜻함으로 이어지는 손으로 쓰여진 글이라니. 그저 빙그레 웃음이 지어지던 글이다. 덤으로 작은 옹기 하나도 이리보고 저리보고 골라 뿌듯한 웃음이 지어진 B부인에 대한 작가님의 글은 묘하게 어렸을 적 교과서에서 배워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은 "방망이 깎던 노인"이란 글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작은 방망이 하나이지만 정말 그토록 진심이였던 그 노인 이야기. B부인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그 웃음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셨겠지. 예전보다 사회는 계속해져 편리해지며 말그대로 현대화 되어가지만, 문득 예전의 것을 떠올려 그리워지는 것은 그때 느꼈던 그 감성 때문이겠지. "목욕탕에서 갓 나온 여자 p.188"이라는 문구가 그 시절을 생각나게했다. 맞어. 그 상쾌하고도 싱그러운 표정들.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는 말이 필요없는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며, 얼마전에 TV에서 보았던 마라톤이 생각났다. 예능프로의 출연자가 마라톤에 참석한 내용이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시각장애인 분이 도움을 받아 42.195km를 뛰고 있는 모습. 뭉클해지는 순간이였다. 작가님이 보냈던 그 갈채는 내가 보았던 마라톤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자신과의 싸움.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오롯히 나의 의지로 이끄는 그 걸음에 보내는 갈채. 감히 나는 한걸음 조차 떼어보지 못한 그 걸음에 대하여 말이다. 어쩌면 과거 금메달에게만 보내던 박수가 이제는 올림픽 전체의 선수들에게 향하는 광경을 종종 보게 된다. 결과만을 바라보던 사회가 과정을 보기 시작한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결과가 중요한 세상이긴 하지만... 하지만 이런 글을 1970년대에 쓰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또 끝까지 달려서 골인한 꼴찌 주자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 무서운 고통과 고독을 이긴 의지력 때문에. 나는 아직 그 무서운 고통과 고독의 참뜻을 알고 있지 못하다." p.173


"보통으로 살자"라는 글을 읽으면서는 그때도 그랬지만 더 깊어진 혐오를 생각하게 한다. 재벌에 향하는 혐오. 가난에 향하는 혐오. 우리는 왜 혐오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재벌에 향하는 그것은 아마도 나는 갖지 못한 그들만의 리그로 인한 사회의 삐뚤어진 구조에 보내는 미움이겠지만, 가난에는 왜 미움이 담겼을까. 작가님의 쓴 보통의 조건은 그시대나 지금이나 결국 돈이라는 잣대가 그어져 있다. 그것이 점점 돈으로 수치화 되어가는 것이겠지. 구체적으로. 
1975년에 쓰여진 글속에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 돈이 귀하지만, 사람을 더 귀하게 ,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살아내시겠다는 글을 읽으며, 왜 우리는 여전히 이토록 팍팍해지는 세상 속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나에대한 안타까움.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든다. 우리는 돈 그자체가 아니라 삶의 목표라는 것을 세우고는 있을까.  


한편한편 허투루 읽을 수가 없는 글이였다. 
맞어맞어하면서 읽다가 문득 쓰여진 연대를 보면서, 어떻게 이 때의 글이 지금도 깊은 공감을 이끄는 것인지. 어떻게 대체 그 한줄한줄이 뻔하지 않는 것인지... 정말 읽어나가는 것이 너무..웠던 책.... 흑.


진짜 추천!!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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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눈물 - 대한검국에 맞선 조국의 호소
조국 지음 / 다산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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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 정의의 여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여신. 그런 여신의 이름을 빌어 조국 교수가 책을 냈다. 무슨 내용일까.


“법”이라 하면, 당연히 공정할 것이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최소한의 도덕이라 불리는 법인데, 그런 법이 불공정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어느 순간 부터 법이란 가진자들의 권력을 지키고, 못가진 자들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가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벌금과, 임금이 수개월치 나오지 않아 벌이는 노동자들의 벌금의 금액이 거의 비슷할 때, 누군가를 차로치여 죽이고도, 초범이라는 이유로 각종 감형사유로 말도안되는 판결을 받을때…. 그건 뭐라고 해야 할까…

 현재의 대한민국은 “법을 이용하는 지배”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법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버린 부조리를 본다. 그렇기에 

그 전제가 정말 옳은것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하는 시대. 그렇다면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다시 되살아나는 시대가 아닌가.


책은 조국 교수가 생각하는 법과 그 법의 지배하의 사회가 어떤 모습이여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정리된 글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근거에 법이 어떤 역할이여야 하는지, 그 법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공정이라는 미명하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타인에 대한 연민, 타인과의 교감, 공감에 대해서 말이다. 계속해서 양극화되어가는 사회가 어떻게 우리 인간을 더 약하면서 악하게 만들어가는지, 그렇기에 사회의 안전망 두텁게 만들고 생활 최저선을 왜 끌어올려야 하는지를, 인간이 “노동”이라는 굴레에 갖혀 잊었던 여유를 왜 되찾아야하는지를 말이다.  먹고사니즘에 빠져 타인의 불행에 눈감고, 당장의 삶에 매몰되지 말라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문득… 돈의 숭배에 빠져버린 대한민국. 인구가 줄어서 망하는게 아니라, 어쩌면 함께 하지 못한 각자 도생사회로 인해 망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라는 결속력이 없는 나라가 지탱이 가능할까. 그 나라는 정말 나라일까..? 하는 생각.


같은 법전으로 같은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고도, 법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다를수 있을까. 가족 모두가 말그대로 멸문지화를 당하는 수순까지 갔음에도, 스스로를 돌아 반성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가는 그의 모습이 개인적으로는 놀라웠다. 그리고 나는 그의 신념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추천!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 시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모두에게 각각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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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물었다, 어떻게 살 거냐고 - 찬란한 생의 끝에 만난 마지막 문장들
한스 할터 지음, 한윤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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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책은 언제나 지금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 생각하게 말이다.

 죽음과 삶은 공존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 것인데, 왜 죽음을 돌아보다 보면 아이러니하게 삶을 생각케할까.

이 책은 유명한 이들의 삶 끝에 남긴 말을 모아놓은 책이다. 어떤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어떤 이는 그 끝에서 다시 삶을 말한다. 


화려한 삶을 살았던 미국의 소설가 오스카와일드는 죽음 직전에는 초라했지만, 여전히 작가로써의 풍자는 살아있던 인물이였다. 그래고 재미(?) 있게도 마지막 말이 “돈“이 진리였음을 깨달았다는 그의 말은…. 어쩌면 선택할 수 있다면 그는 삶을 생각하는 것인가...하는 생각을 하게했다. 

독일의 극작가이면서 항상 빈곤하게 살았던 고트홀트 레싱은  마지막까지도 아픈 몸을 이끌고 복권 판매소에서 복권을 사기 위해 ”52” p.169라 속삭였다고도하니. 당첨이 되었다면 누구를 위한 복권이였을까..

죽으면서도 돈을 생각했던 인물들의 마지막을 읽으며, 아직은 삶을 살고 있는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싶은 웃픈 생각이 들기도..ㅠ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말은 마르크스의 말이였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책으로도, 연설로도 다 했었던 사상가의 마지막 다웠달까. 

”유언이란 살아서 할 말이 별로 없었던, 좀 바보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 같네.“ p.118


그리고 아직은 살아있는 삶에서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 누군가의 온기를 그리워했던 사람 넬슨 제독의 마지막은 슬펐다. 그것은 떠나는 이와, 남겨진 이. 모두의 감정이 느껴졌어서. 그 사람과 나누는 마지막 온기...니까.

”나에게 키스해주게, 하디.“ p.286


그들의 말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가 읽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말그대로 유명한 이의 삶이였기에 그럴 수 도 있으나, 그들의 죽음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이들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의 그 끝은 적어도 외롭지는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까.?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이별 때문이다. 나의 삶에서 죽음이란 것을 별로 겪어보진 않았지만, 내가 사랑했던 가족들의 죽음을 돌이킬때, 늘 내 곁에 항상 있었던 내가 사랑하는 이와 다시는 만날 수 없고, 대화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을 견디기가 힘들었고, 그 사실은 여전히 아프다.

하지만 책속의 인물들 곁에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었고, 자신의 인생을 충실히 살았기에 남길 수 있었던 한 마디의 말들. 그들이 남긴 말들을 읽으며, 나는 한편 이토록 초연히 삶의 끝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의 마지막에서 나는 후회만 하다가 끝날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어서;;;


나는 무엇을 가장 후회할까…. 내 말은 누가 들어줄까. 모르겠네.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P.56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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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현재의 철학 - 21세기의 삶을 위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 EBS CLASS ⓔ
조대호 지음 / EBS BOOKS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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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현재의 철학"이라는 제목 하단에 달린 부재 "21세기 삶을 위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를 읽으며, 고대 철학을 통해 현재의 무엇을 돌아봐야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읽었다.


시작은 역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질문이다. 질문을 통해 내가 무지한것을 깨닫고,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질문일까? 저자는 그 시작을 '철학은 무엇인가'로 풀어간다. 철학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속에서 결국 대화를 통해 영혼의 '탁월함'을 찾고, 그것은 곧 참된 정치로 이어진다. 무슨 이야기일까? 요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는 토론을 통해 무지를 깨닫고 지혜를 찾아가는 과정은 곧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그것을 신경을쓰는 인간의 마음을 알게 하고, 이는 곧 참된 정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기는 펠로폰테소스 전쟁으로 인해 혼란스럽던 사회였고, 그런 사회 속에서 민주정은 불안정했다. 합법적인 것과  옳은 것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컸고, 그 간극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그 간극을 줄이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그 끝은 사형이였고,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통해 민주정의 위험성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과거를 통해서도 말이다.


그리고 등장하는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고, 그가 했던 말들을 책으로 엮어낸 인물이다. 소크라테스가 문답법을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했다면 플라톤은 그 본질을 이데아에서 찾는다. 현실의 폭력이 자신의 스승을 죽음으로 몰았기에, 그는 어쩌면 형이상학 속에서 그 인간의 본질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하여 저자는 동굴의 비유를 통해 말한다. 동굴안에 갖혀 꽁꽁 묶인채, 동굴 안쪽의 벽만 쳐다보는 죄수들이 있다. 그들은 동굴 벽으로 보여지는 그림자만을 볼 수 있고, 그 그림자는 바깥세상에서 만들어낸 또다른 허구의 세계이다. 그 죄수중 한명이 그곳을 탈출해 진짜 바깥 세상을 보았다. 그는 두려웠지만 그 세상을 보기 위해 나아갔고, 그곳이 진짜 세계 임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그 사실을 알리기위해 동굴로 돌아와 남은 이들에게 설명했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여기서 두렵지만 바깥으로 나아가는 행위, 이것을 상승의 이야기, 바깥에서 다시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하강의 이야기라 일컫는다. 상승을 이데아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면, 하강은 그런 이데아를 향해 모두를 이끄는 정치적 행위라는 것이다. 결국 양면적인 이야기이지만, 두 가지 모두 목적은 빛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말함인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국가란 무엇일까. 플라톤의 저서 <국가>에서 그 답을 엿볼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일까. 합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법은 쉽게 바뀐다. 그것을 제정하는 사람들이 누군지에 따라. 그렇다면 법은 누구를 위함인것일까? 지배집단? 피지배집단? 강자? 약자?

플라톤은 정의를 합법이라는 범주가 아니라 더 근원적인 도덕에서 그 근원을 찾는다. 물질적인 것을 탐하는 욕망에서 벗어나, 도덕적 정의를 지향하는 것. 반지를 탐하는 골룸이아니라, 그 반대편에서 역경과 시련을 딛고 단단하게 선 아르곤 같은 인물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도덕은 법보다 우선하며, 그런 도덕이 무너진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정치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영혼 삼분설에 따라 기개, 욕구, 이성 능력에 따라 그들이 가진 역할을 분리하고, 그들 모두를 참여시키는 불완정한 민주정이 아니라, 통치자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선발하여 지혜를 갖게하고, 그를 통한 통치. 즉 철학자에 의한 통치를 해야 한다는 것. 

플라톤의 철인통치를 처음 알았을 때에는 뭐지? 이사람? 싶었는데, 지금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만, 과연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알아봐야하는지? 누가 그런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기준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데아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 그렇다면 그사람은 현실을 볼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답을 하는 이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스승 플라톤이 이데아를 통해 인간을 돌아보았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하여 인간을 돌아보았다. 그는 의사인 아버지를 통해 생물을 연구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작은 자연의 관찰이다. 자연의 관철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구분하고, 살아있는 생물의 관찰을 통해 세상을 보던 인물인셈이다. 이부분을 읽으며, 1800년대에서야 쓰여진 책 종의기원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지. 그것을 고대부터 연구한 이가 있었다니.. 그렇게 자연의 관찰을 통해 인간을 바라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실존과 본질에 대해, 인간이 가진 로고스, 그 로고스의 작용을 통해 생성되는 창조성을 말한다. 인간의 로고스는 이야기, 추리를 할 수 있고, 우리는 그런 능력을 통해 과학적 탐구, 실천적 계획, 예술, 범죄, 종교 등 모든 것을 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동물에게는 생존을 위한 일차적 도구사용만 가능할 뿐, 인간은 그것을 나아간 이차적 도구의 제작 등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 차이인셈.

그 다음.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일까. 어떤 것이 인간의 행복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찾은 것은 덕이다. 좋은 욕망에 부합하는 좋은 습성을 가지게하는 탁월함. 곧 덕. 그것은 중용을 말하기도 한다. 어떤 것에 대해 가지는 욕망에 대하여, 본질에 가까운 욕망과 사회적 삶에 가까운 욕망 사이의 그 중간 어디쯤을 찾아가는 것. 중용. 좋은 습성을 가진 인간은 그것을 찾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이부분은 글쎄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중용이라는 것도 개개인마다 다를 것이고, 그 기준도 각각일 터인데, 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였달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치는 "폴리테이아, 다수를 위한 정치"는 어떤 것이였을까? 이부분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놀라웠다. 가장... 현실적인 부분을 짚고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좋은 정치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면, 플라톤은 철인통치를 말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것'을 시작으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플라톤과 달리 기본적으로 집단지성의 힘을 믿었으나, 그 전제에는 '경제적 평등'을 말한다. 가진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이의 간극은 그 중간지대가 탄탄할때 메워지는 셈. 물론 정치적으로 성숙하기 위한 다양한 시민적 역량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던 가장 기본적인 현실에 대해 논하고 있다는 점에 지금을 내다보았던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며, 제목이 왜 "영원한 현재의 철학"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이 했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며, 여전히 우리는 그 답을 있으니까.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역사를 통해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함에도, 우리는 실수를 되풀이 해왔다. 소크라테스를 통해 민주정의 위험성을 알았음에도, 우리는 히틀러를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인간의 편의와 욕망을 위해 계속해서 발전해가는 기술은 분명 가치중립적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기술은 다 가치 중립적이였을까? 얼마전 보았던 영화 오펜하이머 속 원자폭탄은?...

그래서 고대의 철학자들이 인간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등장하는 아르테, 덕, 실천적 지혜 등의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기준은 시대에 맞춰 바뀌어 가겠지만, 그 전제는 모두가 함께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것임은 같을 터이니.


굿굿! 추천.


"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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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제명 공주 1~2 세트 - 전2권
이상훈 지음 / 박하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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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상훈 작가님의 "사명대사"관련 소설을 처음 접해보고, 작가님의 다른 책이 궁금했다. 그렇게 선택한 책. 제명공주? 조선시대인가? 싶어서 소개글을 보았는데, 백제라는 말과, 의자왕, 그리고 제명공주에 관한 소설이라기에 읽게 된 책. 개인적으로 조선 시대 이전의 역사는 거의 모르는데 그 중 백제? 라는 궁금증이 한 몫했다.


책은 현대의 문교수와 조민국 조교가 일본의 학회에 참석해, 역사를 날조하는 일본 학자들의 세미나를 보던 중, 유일하게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마사코라는 교수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마사코는 다른 학자들의 의견과는 다른 의견을 말하고, 그것을 반박하는 사람들에게 조곤조곤 되받아 친다. 문교수와 조민국 조교는 백제사 그 중 백제와 당시 일본의 관계에 대해 일본이 날조하는 고대사를 연구하는 인물들이다. 그렇게 시작되는 백제 후기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주요 배경이다.


우리의 삼국시대는 나라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형성되어 가는 중심에서 지방 호족들의 힘을 중앙에서 제어하기가 힘든 시기로 보여진다. 그렇기에 왕권이 전복되고 다시 되찾는 과정이 계속되었고, 그런 시기 일본으로 넘어간 백제의 곤지왕으로부터 당시 왜(현 일본)에 정착한 백제가 나라를 세우고, 천황가가 시작되었다. 

그런 비슷한 상황에서 백제의 임성태자가 왜로 넘어가 쇼도쿠 태자의 도움으로 아스카 지역에 뿌리를 내린다. 쇼도쿠 태자역시 백제의 곤지왕으로부터 시작된 인물이다. 임성태자는 형님의 아들과 함께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왜로 건너 왔으며, 그렇게 형님 아좌태자의 아들은 손주 의자를 낳았고, 자신의 아들은 딸 제명을 낳았다. 그렇게 의자와 제명은 사촌지간으로 함께 자랐다. 형님의 아들은 백제로 돌아가 자신의 왕좌를 되찾아 무왕이 되었고, 그런 무왕은 아들 의자를 백제로 불러들인다. 당시 제명과 의자는 서로 사랑하였고, 두사람이 이미 약혼한 사이 였으나, 의자가 백제의 왕권을 물려받기 위해 백제로 간 후, 그곳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력 호족의 딸과 결혼한다. 제명은 의자를 사랑하였으나, 그가 그럴 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고, 의자는 제명을 사랑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다. 그렇게 제명은 자신의 삼촌인 조메이 천황과 결혼하여 중대형과 대해인을 낳는다. 


조메인 천황이 죽고, 임성태자와 당시 왜의 유력 가문인 소가대인은 제명을 다음 천황으로 정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의자와 제명의 관계였다. 그렇게 천황이 된 제명. 의자가 신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도우려 했으나, 의자왕은 웅진의 공산성에서 제명의 후발 부대를 기다렸으나, 예식의 배신(신채호 선생님의 조선상고사에서도 의자왕은 결사항전을 주장하였다고 함)으로 이미 당나라로 잡혀가 온갖 치욕을 당한 후 자결한다. 

백제의 멸망 이후 당나라와 신라를 피해 당시 왜로 옮겨간 백제인의 수만 명에 이른다니. (인구의 자연증가율로는 설명할 수 없는 증가로 인구 대이동이 있었다는 결과로 연구됨)

 제명은 백제의 수복을 위해 천도를 감행 하고, 의자의 아들 부여 풍과 자신의 아들 중대형을 통해 수년간 배를 선적하여 5만명의 대군을 백제로 보내, 백제를 되찾기 위한 백제부흥운동을 위해 백촌강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폐배하고, 슬픔을 이기지 못한채 병사한다. 


책은 비록 소설이지만, 우리가 향락에 빠져 신라가 쳐들어오는지도 몰랐다가 뒤늦게 성을 버리고 도망가 낙화암에서 삼천궁녀와 함께 죽었다는 의자왕의 진실. 그리고 당시 백제와 왜의 관계를 이토록 제대로 몰랐던가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제명군주와 의자왕이 서로 사랑했다는 사실은 작가의 상상이겠지만, 제명(사미메이) 천황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일본에서는 제명 천황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의 무덤조차 작은 표지판이 전부이니...(일본의 고대사에서 여성으로 두번이나 천황에 오른 인물임에도 말이다.)

 소설을 읽으며, 나또한 승자에 의해 쓰여진 왜곡된 역사를 지금까지 사실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말들이였음에도 말이다. 삼천명이 한꺼번에 죽으면,, 그 강은 어떻게 되나... 궁녀가 삼천명이나 될 수 있나..? 말도 안되는 기록인셈이다... 


책은 일본과 우리의 관계가 이토록 앙숙이 된 시작을 그 시대로 보고 있다. 백제의 멸망으로 인한 백제인의 이주 다시 돌아가고 싶은 땅을 되찾고자 하는 그들의 바램. 신라와 당나라에 대한 원한.

작가의 상상이 더해진 소설이지만, 내가 잘못된 사실로 알고 있던 역사를 다시보게 한 책이다. 재밌었고, 유익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소설.

그리고 이상훈 작가님은 역사적 사실에 상상을 더하여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픽션인지가 정말 가늠하기 힘들정도! 와.우.


굿.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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