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를 만나다 - 구토 나는 세상, 혐오의 시대
백숭기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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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구토 나는 세상, 혐오의 시대"라는 부제가 눈에 띄었다. 사르트르 하면 막연히 어려운데, 싶었지만 부재가 나를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모든 것이 양극단으로 가고 있는 지금, 사르트르의 철학은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이 있는가.
참고로 나는 구토라는 책을 읽어보진 못했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같은...그런 느낌..ㅎ
그래서인지 저자가 철학에 대한 막연한 어려움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누구나 사르트르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썼다는 이 책이 나는 반가웠다.

하루하루 살아가던 현실에 지겨움을 느끼던 청년P가 사르트르 살롱의 카드를 받아, 사르트르 살롱을 찾는다. 뭔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신사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를 통해 사르트르의 철학을 배워간다.
저자가 말한 "휴머니즘"의 철학을.

청년P는 현실의 어지러움과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며, 자신이 루저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사는 청년 P가 루저가 아닌  "내던져진 존재"라 말한다.  그저 우리는 모두 우연히 태어난 존재라는 것. 그러니 흔들리는 당신은 결코 승자도 패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불명확하고 불안전한 존재. 그것이 우리이며, 사르트르는 이것을 "구토"로 표현한다고. 그러니 당신의 혼란스러움은 당연한 것이라고. 
이렇게 사르트르 살롱은 시작된다.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 p.65
모두가 "내던져진 존재"인데, 누구는 명확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나는 왜 그렇지 못하는 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다른 이와 나의 비교. 그래서 내가 더 루저같이 느껴지는 지금 이 부분에서 사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라 한다.  그런 우리에게 가장 지옥은 타인의 시선 속에 갖힌 나라는 것이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그 안에 갖혀버린 내가 곧 지옥인 것이다. 그럼 사회라는 환경 안에서 타인과 함께, 끊임없이 누군가와 나의 우위를 비교해야하는 지금. 우리는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나는 내가 나인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아닌 존재가 나다" p. 113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면서, 나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즉자존재로 태어나 대자존재로 향하는 것. 이말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로 태어났으나,  나에대해 탐구하며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선택에서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가 또 다른 선택을 하며 만들어가는 나이기에 지금과는 다른 나인 것이다.
"인간은 그가 가진 것의 총합이 아니라 그가 가지지 않은 것, 그가 가질 수 있는 것의 총체다" p.128
이 말은 타인의 시선 속에 갖힌 내가 곧 미래의 나는 아니라는 위로를 사르트르는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그런 생각에 매몰되지 말라고, 당신은 당신의 선택에 또 바뀔 수 있다고, 그러니 그 무엇보다 너 자신을 제대로 보는 대자존재로써 나아가라고 말이다. 
 이런 사르트르의 말이 가장 인상 깊었던 챕터가 노예와 주인의 관계를 규정하는 부분이 였다. 주인이 있어 노예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노예를 통해 주인이라는 존재가 생겨나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진짜 발상의 전환 같은 신선함이였다. "독립적인 자의식"이 있는 사람만이 그 관계에서 진정한 주인의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환경이나 사회의 제도 안에서 나를 규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나만이 만들어 나갈 수 있기에, 누구도 나를 규정하게 두지 말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죽음과도 맞닿아 있었다. 

"죽은 자로 있는 것은 산 자의 먹잇감이 되는 일이다." p.224
"내던져진 존재"로써 죽음, 그 죽음 중에서도 자살은 나의 선택 중 하나 일 것이라고 사르트르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했지만 사르트르는 죽음은 대자존재인 인간이 즉자존재로써 남는 행위가 죽음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더 이상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은 산자의 즉 타자의 처분에 맡겨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죽음이 아닌 선택하는 존재여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자살조차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했는데,, 실존주의 철학자여서 그런 걸까. 살아있는 존재 로써의 인간에 더 의미를 두었던 것일까.

이 밖에도 인간에게 신이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인지, 타자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나는 즉 대타존재로써의 나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하는지 등을 읽고 있다보면, 저자가 말한 "휴머니즘"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는 그가 말한 대로 참여하는 지성인으로써 
"참여는 행동이지 말이 아니다" p.270 살았다. 그래서 그의 철학이 더 빛나는 지도.. 앙가주망, 그것이 또한 독보적인 철학자로 이끌었다.
사랑에서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p.245 라는 말로 계약 결혼이지만 아내 보부아르와의 계약을 지켰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오롯한 나를 향해있었고, 또한 타인과 함께하는 관계 속의 나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안에 사랑이 있고, 종교가 있고, 사회가 있었다. 
다만, 정말 타인이나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오롯한 나를 찾아가는 선택과, 대타존재로써 살아가는 나를 위한 선택. 그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어디쯤을 만들어가는 것이 정말 어려운 건데,, 싶은 두려움도 들게했다. 
그럼에도 그는 정말 사람을 사랑하는 철학자였음을 알게 된 책.
<구토>를 시작할 때다!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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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크림빵 새소설 19
우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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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시티뷰로 혼불문학상을 받은 우신영 작가의 신작. 기괴(?)한 제목과 그에 걸맞는 표지의 그림. 하지만 문득 깔끔해보이기도 하는 이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이 책을 읽게 만들었달까.
그리고 책을 다 읽은 나의 느낌은 작가님의 표현 그대로 어둑하다.

고산대학교의 허자은 본인 부고를 시작으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허자은 교수. 그녀의 장례식에는 오빠만이 빈소를 지키고, 주변의 교수들은 조문조차 오지 않았다. 국어국문학과 조교였던 이종수 외에는.
허자은. 그녀는 누구인가?
낙원떡집의 막내딸로 태어나 학교의 서가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두 미친듯이 읽어내는 인물. 떡집 딸이기에 엄마는 매일 남은 떡을 그녀에게 가져다 주었고, 그녀는 그것 역시 다 먹어 치웠다. 마치 무엇을 매꾸려는 듯.
그렇게 어영부영 국문과에 진학했고, 졸업해 사립학교에 선생으로 취업했으나 반학기만에 잘렸다. 아이에게 손수건을 던졌다는 이유로.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박사과정을 수료한 그녀는 고산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원래 교수를 하고 있던 견고한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녀에게 행해지는 각종 성추행, 언어폭행을 그녀는 그저 견딘다.
때로는 학과 여학생에게 은근히 가해지는 교수들의 성추행을 조용히 막아주기도하고, 모두가 조교에게 당연히 시키는 심부름도 그녀는 시키지 않는다. 다 그녀의 일이니까.
그녀의 학생들도 그녀를 무시한다. 마치 대학내 서열을 안다는 듯. 냄새난다. 학과과정이 이상하다 등등 그런 그녀가 학교의 화장실에서 죽었다.

이 소설은 너무나 이상했다. 한사람의 이야기인듯. 어떤 한 사회의 고발소설인듯하며 다시 누군가의 이야기로 돌아와있는 이 스토리가.

허자은으로 시작해 이종수를 거쳐, 정하늬까지 이어진다. 허자은은 허기를 달콤한 크림방을 통해 채운다. 나의 몸에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아야 완전한 내가 될 수 있다는 믿는 사람인 마냥..어떤 구멍속에서 나오는 진물은 냄새나고 더럽지만 깨끗해지기 위한 것이라 말하는 그녀는 달콤한 크림을 삼키고, 다시 토악질을 하며 뱉어낸다. 그녀를 더러워하고, 자신들의 세계에 들여놓고 싶지 않은 교수세계의 더러운 오물을 그녀의 몸을 통해 정화하는 과정인것 처럼 말이다.

반대로 허자은의 제자 정하늬는 자신의 몸에 모든 구멍을 뚫어 몸안의 더러운 것을 다 밖으로 빼내고 싶은 사람 같았다. 부모도 가지 말라는 학과를 택했고, 유일한 조교 종수조차 오지 말라 말하는 대학원을 선택한 그녀는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피어싱을 한다. 온 몸에.. 진물이나고, 고름이 나도 멈출 수가 없다. 그것이 마치 정화의 의식같은 그녀. 그러다 어느순간 그녀의 심장에도 구멍을 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종수는 허자은과 정하늬의 매개이면서도 책속 인물중 부조리와 더러움에 가장 현실적으로 버티는 인물이다. 결국은 허자은의 죽음과 그녀가 남긴 기록을 읽으며, 제대로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실을 더는 견딜 수 없었기에 그는 그곳을 떠난다. 


 그 세계를 먼 발치에서 바라볼 때는 아름다운 면면만이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그래서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더 이상 내가 멀리서 보았던 그 아름다움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밖과 안의 간극으로 인한 허무를..우리는 어떻게 버텨야 할까. 
 허자은에게 그것은 책과 크림빵이였고, 정하늬는 피어싱이였고, 이종수는 그의 미래였다.

오롯이 나로써만 존재할 수 없는 사회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나를 지키고자하는 마음, 부조리 속에서 어느정도는 타협 할 수 밖에 없는 현실, 어디까지 버텨내야할 경계인지 조차 가늠이 되지 않는 지금이 지옥일지도. 결국 허자은의 크림빵은 불량 식품마냥 입안에서만 단맛을 흉내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으니까.

작가님의 말처럼 이토록 어둑한 소설이 있을까.  이 소설이 소설로써만 읽히지 않았던 것은 내가 조금씩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면이 허자은을 통해, 정하늬를 통해, 이종수를 통해 보였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곽용권의 몰락은 조금은 통쾌했지만 우리는 안다. 그런 사람은 없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대신하는 것이지.

소설을 다 읽고난 지금 새삼 산뜻한 이 아침이 왜...더이상 맑아보이지 않는다.ㅠ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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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페이스
R. F. 쿠앙 지음, 신혜연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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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표지에 그려진 눈. 어느한쪽을 곁눈질하는 눈. 대체 무엇을 보고 있을까.
누군가 이 책을 읽고 써놓은 서평을 읽고서 나는 이 책이 궁금해졌다. 나의 소소한 취미중 하나인 책. 그런 책을 만들어내는 출판업계의 이면과 작가의 창작에 대한 이야기 이기에.

이 책은 미국에서 유색인종 여성작가인 아테나와 백인여성작가인 나 주니퍼의 이야기이다. 저자 R.F 쿠앙은 이 책에 출판계의 적나라함을 드러내며, 과연 창작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를 묻고 있다. 생각치도 못한 질문이였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아테나. 나는 그녀의 친구다. 나도 작가이지만 나는 잘나가지 못한다. 내가 쓴 책은 초판만 찍은 상태이고, 내가 보낸 원고는 봐주지 않는다. 나는 아테나가 부럽다. 그런 아테나의 작품이 넷플릭스에까지 팔리며, 나는 아테나와 작은 축하파티를 열었고, 아테나의 집까지 이어진 파티에서 그녀는...목에 음식물이 걸려 질식사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그날 아침에 초고를 완성한 <최후의 전선>을.. 훔쳤다.

그 원고는 너무나 흥미로웠다. 아테나가 비워둔 부분들을 완성해가며 주니퍼는 마치 자신의 창작물인듯 홀린듯이 완성해갔다. 그리고 자신의 편집자에게 그 원고를 보냈다. 
그리고 시작된 자기합리화. 
아테나가 비워둔 많은 부분을 내가 채웠고, 이상한 부분을 수정했으니 이것은 나의 글이라고,
편집자는 그 원고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했고, 중소출판사이지만 나름 명망있는 출판사와 계약을 하며 본격적으로 책을 손보기 시작한다. 마치 나의 원고 였던 것인마냥.
그렇게 출간된 <최후의 전선>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호평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SNS에서는 여러 말들이 돌기시작한다. 중국인들에 대해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평부터 아테나의 글을 훔쳤다는 말까지..

주니퍼는 대응하지 않았지만, 출판사는 빠르게 다음 작품을 재촉한다. 그러면 그런 모든 말들은 수면아래로 내려갈것이라며.. 그래서 주니퍼는 아테나와 함께 대학때 이야기했던 내용을 소재로 다음 작품을 썼다. <엄마마녀>를.
그 작품은 <최후의 전선>만큼의 인기는 없었으나, 나름 괜찮은 작품으로 평가되던 중, 누군가 글을 올린다. 그 작품의 첫 문장과 소재는 아테나의 것이라고.
사실 아테나와 이야기를 나눈 것이지만 사실 이 소재와 이야기는 주니퍼의 것이였다. 그런데 당시 아테나가 주니퍼의 이야기를 듣고 마치 자신의 창작물인 마냥 주변에 이야기한 것을 들은 이들이 표절이라며 부정 댓글을 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드러나는 아테나 소설의 전말, 주니퍼의 몰락, 그 몰락 뒤에 숨겨진 출판 업계의 이면 등이 이 이야기를 주를 이루며 대체 어디까지 이 이야기가 이어 질지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몰입하는 스토리랄까.
계속해서 주니퍼의 자기 파괴적인 심리가 마치 늪처럼 빠져들어 헤어나올 수 없는 그 상황을 해결하는 것도, 그렇다고 해결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한 자가당착의 상황이 문득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캔슬 컬처의 주인공이 된 셈. 분명 잘못은 있으나, 그 잘못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기에 그러했다. 
이건 주니퍼가 시작일까?
아테나가 시작일까..?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창작의 범위였다. 몇 해 전 어떤 수상작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 나온 부분과 유사했다. 두 작가의 전화 대화가 있었는데, 한쪽 작가가 그 대화를 책 속에 그대로 차용했고, 그 작품은 수상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작품을 읽은 다른 작가가 해당 대화는 표절이라고 폭로를 한 것이다. 아테나의 전 남자친구는 자신이 한 말을 아테나가 책에 차용하는 것을 겪은 뒤 어떤 말을 할 때 아테나의 표정을 살피고, 말을 조심하게 되어 짜증 났다는 부분이 나온다. 이 경우는 창작일까 표절일까.
한쪽이 작가일 때만 표절로 유효한 것일까? 책 속 주니퍼 역시 아테나의 그런 면에 당했고, 결국 나의 작품이지만 아테나의 작품이 되어버린 경험을 당했다. 
물론 주니퍼 역시 아테나의 작품을 훔쳤고, 그녀가 많은 부분을 수정했다. 그럼 그건 누구의 것일까...마치 테세우스의 배와 같은 질문이 든다. 그건 예전의 것과 같은 것일까? 아닐까? 주니퍼의 것일까? 아테나의 것일까?
또한 이와 유사하게 일전에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대해 막스 브로트가 사후 그의 작품을 출간하는 과정에 많은 부분을 수정했을지도 모른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카프카의 책은 사실상 누구의 것일까?
사실 이 부분은 작가와 편집자의 관계에서도 궁금해지긴 했다. 작가도 편집자도 아닌 나로써는 편집자에 의해 수정이 많이 이뤄진 작품이 있다면 작가만의 작품이라고 오롯이 말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해서. 책 속 주니퍼 역시 담당 편집자에 의해 아테나의 작품을 계속해서 수정해 간다. 그럼 3명의 공동저자가 되는 건가..? 

R.F 쿠앙은 이 밖에도 유색 인종 여성 작가로써 미국 출판 업계에서 그들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도 적나라하게 설명한다. 진짜 말 그대로 소비다. 창작자인 작가가 누군가에게 취사 선택되어 소비되는 시장. 그게 출판 시장이다.

창작의 범위, 출판 업계의 이면, 창작이라는 것의 고통 등등. 그저 책을 읽는 한 독자로써는 알지 못했던 면면 들.
흥미롭지만 무겁고, 
소설이기에 가볍게 읽고 싶지만, 
결말을 읽고서 새삼 달리 보이는 표지.

흥미롭다는 말이 전부는 아닌 책이지만, 흥미롭다.

"별일 없을 거야. 벌어지고 있을 때는 꼭 세상이 끝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 소셜미디어는 아주 작고 고립된 공간이야. 일단 화면을 닫으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 너도 그러는게 좋아. 알았지?" 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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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 昏君 -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었던 조선의 네 군주들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32
신병주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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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개인적인 감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소위 위정자들이 보이는 행태가 너무나도 이상했기에.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임을 알기에 말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4명의 혼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중 2명은 반정으로 시호조차 받지 못했고, 2명은 왕의 지위를 유지하였으나 후대에 혼군으로 분류된 자들이다.
재밌는 점은 지위를 유지한 쪽과 반정으로 물러남을 당한쪽이 서로에게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처음으로 뽑은 인물은 단연코 누구도 이이를 제기하지않는 "연산군"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는데, "연산군"은 조선시대의 적장자로는 세번째 왕이다. 첫번째는 문종이였으나, 왕으로서는 짧은 생을 살았고, 그다음은 단종이다. 연산군은 어렸을 때는 총명하였고, 아버지 성종은 어머니를 잃은 연산군을 꽤나 아꼈다. 하지만 연산군은 아버지와 달리 국정을 돌보고 끊임없이 학문을 공부하고 노력하는 스타일은 아니였었다. 그런 인물이 왕이 되어, 신하들을 상대하고, 그들과의 강연을 통해 끊임없이 군주로써의 자질을 갈고 닦아야하는 그 엄중함을 견뎌낼수 있었겠는가. 그는 점차 신하들과 의논, 대화하지 않으며, 군주로써 잘못된 점을 비판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자리를 없애고, 자신의 뜻과 대치하는 자들을에게 화를내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결국은  두번의 사화를 통해 쓴소리 하는 자들을 모두 죽였다. 무오사화은 사초를 트집잡아 시작했고, 갑자사화는 어머니의 죽음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연산군은 그 이전부터 친모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 일기에 그런 흔적이 보인다고 하니, 결국 연산군은 말 잘듣는 인물만 남기고 싶었던 것.
그리고 그의 또다르 패착은 "장녹수"다. 장녹수는 연산을 사로잡아 그의 눈과 귀를 막았다. 그리고 소위 비선실세로써 인사권을 휘두르고,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고 하니, 그와 그녀의 주변에는 오로지 간신만이 남은 상태. 오죽하면 반종이 일어났을 당시, 궁을 지켜줄 이조차 없었다고 하니,,

그리고 광해군. 장점과 단점이 뚜렷한 인물이다. 아버지로 인해 일찍이 왕으로써의 자질을 보였으나, 아버지로 인해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백성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백성을 위하는 인물이였지만, 자신의 가족은 믿지 못했다. 그래서 영창을 죽여야만 했고, 인목대비를 가둬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왕위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누구보다 훌륭한 면모를 보였으나,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 신하들과 적장자가 아니라는 스스로의 약점을 벗어나지못해 안타까운 인물이다. 일장일단이 있는 인물로 저자는 말하고 있지만, 광해의 잘못된 행정을 논하는 부분에서도 나는 그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리는 지켰으나 후대에 혼군으로 분류된 선조와 인조. 둘다 모두 전쟁과 관련이 있고, 임진왜란이 나고 병자호란이 일었을 때 왕으로써 보여야할 태도는 전부 저버리고, 국민을 속이고 가장먼저 피난한 인물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잔인함으로써 보여준 인물들이다. 선조는 아들 광해와 유능한 신하 이순신에게.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 일가에 그랬다. 읽고 있다보면 현재와 어찌 이리 비슷한 것인지. B급 인물은 절대 A급을 기용하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말은 진짜 구나 싶었다. 선조가 이순신에게 보이는 열등감이 그러했다. 

역사는 역사로 끊나지 않는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작가님의 연설에서 "죽은자가 산자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말은 아주 오랜 과거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역사는 지금의 우리에게 말한다. 이제는 제대로 보라고,, 말이다.
그리고 잘못된 과거의 청산은 제대로 해야 한다. 옳은 방법을 통해서. 그래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정당한 근거를 제공하고, 같은 실수를 우리 모두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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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들은 민족이라는 집단주체 혹은 지도자를 자신들의 이상으로 만들고 그것에 환상적인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이제 개인으로서는 실현하기 불가능한 저 고대적인 위대한 자아를 일부 현실로 만든다. 동시에 그들은 자아-이상 속에 묶여 있는 그들 자신의 공격성을 투사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데, 이는 이 세계가 주체가 나서서 방어해야 하는 위험천만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대상들로 가득하다는 불가피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사회적 나르시시즘'이 마련해주는 보상의 이면은 박해망상인 것이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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