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0-1953 환상문학전집 29
아서 C. 클라크 지음, 심봉주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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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유선방송으로 타임머신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어두운 밤하늘에 별무리와 함께 깨어진 달이 흩어져 있던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책에도 달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두세 편정도 들어 있었다. 아폴로호가 달에 착륙하기 전에 쓴 작품이라 달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던 시대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었다. 

  '파수병'은 달에서 발견한 피라미드에서 달이 아닌 외계로부터 온 문명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피라미드는 지구라는 아직 문명의 초기에 있는 행성을 지켜보기 위한 파수병이라는 것이다. 비교적 짧은 단편으로 밤하늘에 떠 있는 달 속에 지구에 문명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전부터 우리를 지켜보는 파수병이 있다는 상상이 재미있다. '달에서 보낸 휴일'은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가능한 이야기지 않을까 싶고. 특별한 사건이나 소설적 장치가 없는 평범한 내용이었는데 우리의 현실에서 너무 멀어보이지 않아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지구의 빛'은 인류가 태양계를 완전히 개척한 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지구와 지구를 벗어나 태양계의 다른 행성을 개척하고 있는 우주연합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이다. 마치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등 식민지를 개척한 후 그 식민지로부터 독립의 열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듯이... 지구와 태양계 다른 행성들을 잇는 관문과도 같은 달에는 천문관측기지가 있고 지구의 정부가 몰래 캐내고 있는 우라늄 광산이 있다. 우주 연합은 태양계 바깥쪽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우라늄이 필요한 상황이고 지구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마음이 없다. 우주 연합의 힘이 그들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마침내 달에는 비밀 광산과 함께 비밀 무기가 갖추어지기 시작하고...우주 연합의 순양함 세 대가 달의 상공에 나타난다.  

  지구에서 보낸 과학자를 비밀기지에 데려다주는 임무를 마친 천문기지의 천문학자 제이미슨과 휠러는 달에서 벌어지는 지구와 우주 연합과의 전쟁을 목격한다. 그동안 달에서 비밀스럽게 만들어온 우라늄 광선을 이용한 무기로  순양함 두 대가 격추되고 다행히 전쟁은 지구의 승리로 돌아가게 된다. 두 천문학자는 자신도 모르게 지구의 승리를 도운 결과가 되었지만 미래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달 저편의 지구는 구름 속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고, 태양계 저 바깥쪽에는 똑같이 어머니 지구에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이룩한 우주 연합이 있다. 이번 전쟁은 지구의 승리로 끝났지만 곧 그들의 힘이 지구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 다음에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아폴로호가 달에 착륙하기 전의 작품이라고 해서 달에 관한 이야기가 허무맹f랑하고 시시한 이야기로 전락하는 것은 아니며, 아폴로호가 달에 흔적을 남겼다고 해서 달에 관한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 달의 이면을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달에 관한 상상은 계속 되어도 좋다.

  '과학의 패배'는 짧지만 의미심장하고 역설인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독일에서 대륙간 탄도 미사일, 핵무기등을 개발한다는 정보를 들은 미국이 아인슈타인등 유명 과학자들을 동원해서 맨하탄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핵무기를 개발했던 시대 상황을 담고 있다. 독일보다 먼저 핵무기를 개발한 미국이 독일이 아닌 일본에 핵무기를 사용한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물론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려하지 않았던 일본 정부의 어리석음 때문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한 과학자의 진술서로 이루어진 이 이야기로, 기술이 미국보다 한 발 앞서 있었던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것처럼 기하급수장(유한한 공간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무기, 축지법의 반대 개념인가)이라는 최첨단 무기를 가진 쪽이 아직 구식무기로 대항하는 적에게 패한다. 기하급수장이라는 무기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지만 그 엄청난 위력이 일어날 생기는 에너지가 우주선을 미세하게 변화시켜 기하급수장을 일으키는 파장기를 껐을 때는 미세한 변화이긴 하지만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파장기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오류가 축적되게 되고 우주선의 오작동은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첨단의 기술이 오히려 자신들을 옭아매는 덫이 된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학기술을 맹신하며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의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이 책에는 중편이 몇 편 실려 있는데 '바다에 이르는 길'이 그 중 하나다. 이 작품은 한때 인간의 삶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거대 도시가 버려지고 천 년이란 긴 시간 동안, 누군가는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향하고 누군가는 그 옛날의 습성을 좇아 숲으로 들판으로 흩어져 살아가는 시대의 이야기다. 브렌트, 존, 이라드네는 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고 두 남자는 이라드네의 선택을 기다리는 중이다. 브렌트는 이라드네의 마음이 누구에게 가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던 중 브렌트는 인간이 마지막으로 건설하고 버려진 도시, 샤스타를 알게 되고 그곳을 향해 혼자 길을 떠난다. 이라드네에게 선물로 줄 뭔가를 발견하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마침내 해변에 폐허로 남은 도시에 도착한다. 뭔가 쓸쓸한 마음으로 이리저리 헤매던 그는 극장 같기도 한 원형지붕의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브렌트는 거대한 크기의 초상화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초상화는 트로이 전쟁의 시발점이 된 헬레나의 초상이었다. 브렌트는 그 초상화를 따라 그리기 시작하는데 그가 그린 그림은 이라드네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래 전 지구를 떠나 우주로 나아갔던 방문객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모험을 끝내고 이라드네와 정착해서 살고 싶어하는 브렌트에게 지구를 벗어나 또 다른 여행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고대에는 바다가 수많은 전설, 영감, 모험을 제공했지만 지금은 지구 밖의 다른 세계가 그것들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브렌트는 샤스타를 등지고 다시 길을 떠난다. 그는 어디로 가게 될까. 이라드네가 있는, 자신이 원래 떠나왔던 곳으로 혹은 막 우주선이 날아간 저 하늘로... 

  거대하고 신비로운 시간의 흐름 앞에서 먹먹해지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특별한 사건이나 기막힌 반전은 없었지만 브렌트의 여행을 따라가며 시간의 의미, 문명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한 천년 쯤 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도 우거진 수풀 속의 폐허로 남게 될 날이 올까. 몇 천년 전 수많은 사람들이 삶을 영위했던 도시가 지금 우리에게 역사 속의 유물이나 유적으로 남았듯이.        

  SF소설은 결국에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무한한 시간에 관한 상상이 이야기를 특히 SF적인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것을 아닐까. 현재의 시간이 너무나 지루하게 느껴질 때, 나의 시간이 하찮다고 느껴질 때 SF소설을 읽어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무한하고 압도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란 존재가 한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가끔 그걸 잊고 살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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