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제1회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장욱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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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단편을 읽는다. 왠지 장편보다는 단편의 흡입력에 끌리게 되는 건 뭐든지 길게 이어가지 못하는 성격 탓인 것 같기도 하고. 아주 가끔 단편을 읽는다. 요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나, 혹은 요즘 작가들은 어떤 소설을 쓰나, 뭔가 시선을 확 끄는 작품들이 있나하고. 누군가 한 사람을 정해두고 그 작가만을 추종하거나 하는 그런 종류의 독자가 되지 못하다 보니 여기저기 기웃기웃 이런 소설 저런 소설들을 읽게 된다. 다행히 집 가까이 도서관이 있어서 주로 책을 빌려 읽다가 간혹 이건 꼭 읽어봐야지 아니, 꼭 가지고 있어야지 하는 책을 주로 사게 된다.   

  얼마 전에 새로 일하면서 알게 된 딱 서른 살 먹은 젊은 여성이, 나한테는 너무나 젊어보이기만 하는 그 여성이 자기는 시집갈 때 혼수로 가져가려고 책을 산다고 한다. 우리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난 그런 생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책이 가전제품처럼  혼수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다. 아니 신선했다. 책을 정말 좋아해서 책을 가져가겠다는 것인지, 막 장만한 새 가전제품과 가구들 사이로 그래도 사람의 손때가 묻는 정감어린 것들을 두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어쩌면 이쪽이 더 가까울 것 같긴 하지만 미래의 남편에게 예쁘게 화장을 하듯 자신의 내면을 그 책들로 좀 치장해서 보여주고 싶은 건 아닌지. 어느 쪽이든 책을 혼수품(?)으로 가득가득 실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괜찮아 보였다.  

  한때는 나도 책을 사면서 그런 비슷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같다. 물론 결혼할 때 가지고 간다는 생각은 떠오른 적도 없지만 책장에 책을 진열 아니 과시해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 경제적 여건상 절대 그럴 수는 없었지만... 자꾸 이야기가 옆길로 새는 감이 있지만 어쨌든 그 여성과의 대화 이후 내가 이렇게 모든 것에 시들한 건 책과 많이 멀어진 탓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고... 

  요즘은 책장에 과시하기 예쁜 책들로 넘쳐나는 것 같다. 내용과는 상관없이 (꼭 그런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독자들의 눈을 유혹하는 예쁜 디자인들로 책표지들은 화려하다 못해 정신없다. 어쩐지 강렬한 색깔로 도배된 거리의 간판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자꾸만 어딘가로 빠지려하는 이야기를 돌려세울 때가 된 것 같다. 결론은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는 거다. 남의 시선 받으려 죽으라 노력한 것 같지 않으면서도 시선을 끄는 독특함이 있다. 소박한 꽃무늬로 프린트 된 1이라는 톤다운된 초록빛 숫자가 편안하다. 꽉 채우지 않아서 숨통이 트이는, 어찌보면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기대어 서 있는 듯도 하고... 

  드디어, 책장을 넘겨 보니 대체로 내게는 생소한 작가였다. 그동안 너무 책과 특히 소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나 싶다. 한편으론 신인들의 세계가 더욱 궁금해지기도 하고. 아직 다 읽진 못했지만 읽다가 두 번 쯤 졸았던 작품도 있었고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읽은 작품들도 있었다. 우선 수상작인 '곡란'은 끝까지 몰입하게 하는 작품이었는데 반면 문체나 느낌은 신인이라기보다는 중견에 더 가깝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소도시의 모텔 202호에는 지금도 누군가 유령처럼 흘러들고 있을 것 같다.  

  무딘 독자의 시선을 가장 끌었던 작품은 '괴물을 위한 변명'이었다. 작품 스타일이 보르헤스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요즘 들어 새삼 보르헤스의 단편들에 끌려서 반복해서 읽어보게 되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 '괴물을 위한 변명'이 가장 흥미롭게 읽혔다. 보르헤스의 단편을 읽다보면 사고의 폭이랄까 상상력이 엄청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나아가서 그의 작품에 인용된 작품들이나 등장인물들을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작품도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는 걸 이번에 확실히 알았고, 프랑켄슈타인의 작가가 누구라는 것도 이 작품을 통해 알았고, 그것도 여성작가라는 것을, 원작을 읽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다 보니 당연히 읽었을 거라 생각한 건지, 아니면 아주 오래전에 읽은 탓에 읽었다는 기억마저 사라진 건지 잘 모르겠다. 이 세상에 새로운 건 없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하게 한 작품이었고 소설이란 창작이란 수많은 과거의 패러디일 따름이라는 말에 또한번 긍정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가나'도 흡인력있게 읽히는 작품이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사체, 누군가에게는 그저 구역질나는 사체일 따름이지만 그에게도 이야기가 있었다. 이 세상 누구든, 그게 썩어 문드러져가는 사체일지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줄만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 흔히 쓰는 말이라서 그 뜻이 희석되어 버린 말이긴 하지만 작가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희미한 빛'은 제목처럼 뚜렷하게 인상적인 부분이 남지 않는 작품이다.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묘사랄까 그런 것들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들이 책을 덮는 순간 희미하게 사라져버리는 느낌이다. 내가 답답해마지 않는 요즘 작가들의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문제의식이나 내용보다는 스타일만 살아있는 소설이랄까. '커트'는 잔혹동화 같은 소설이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다. 우리의 삶이 특히 약자의 삶이 이토록 살벌하고 서늘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는 성공한 작품이었다.  

  '게발 선인장'은 어쩌면 작가는 만들어진 신이라는 당돌한 발언에 동의하는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맹목적인 인간이 결국에는 신을 만들어내는 건 아닌가 하는. 무언가에 의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맹목을 실감나게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단이라 주변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종교에 한 때 빠졌던 내 주변의 사람 몇몇을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었고. 

  '옹기전'을 처음 읽자마자 아주 어렸을 때 들었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아팠는지 마을의 누군가 아팠는지 어렸을 때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는데 굿 비슷한 것을 하고 단지를 땅에 묻었단다. 그리고 그 단지가 장마철에 땅밖으로 드러나 깨져버렸다는 이야기였다. 별것 아닌 이야기였지만 조금은 으스스했던 기분이 아직도 남아 있다. 현재의 우리들은 작품 속의 어른들처럼 과거의 항아리가 밖으로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부정한 것들은, 특히 살기 좋은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은 묻힌 그대로 두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수많은 항아리 위에, 수많은 무덤 위에 세워진 것들이라 하더라도. 

  '나의 메인스타디움' 속에는 나의 과거도 함께 녹아 있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나에게 아시안 게임의 개막식은 늘 태풍과 함께 한다. 친구의 자취방에서 개막식을 보다 비가 새는 지붕을 덮으려 빗속을 뚫고 옥상으로 올라갔던 일. 작품 속 여자아이는 개막식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어린아이답지 않는 과장돼 보이는 일련의 행동들을 하고 있었던 반면 우리는 여름방학에도 하루종일 계속되는 보충 수업 중에 하루 쉴 수 있는 날이었다. 그날 태풍 때문에 비가 샌 지붕이 아니었더라면 기억 속에 사라진 수많은 날들 중의 하루가 되었을 것이다. 그건 그들만의 잔치였으므로. 그들만의 잔치에 끼이고자 그토록 안간힘을 쓰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어서 공감이 쉽지 않았다.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여자아이의 모습과 대비시켜려는 의도로 보이긴 하지만. 어딘지 불편했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였을까. 

  '실수하는 인간'은 다분히 사이코패스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섬뜩한 소재임에도 너무나 평범하게 그려놓아서 작가의 의도대로 그린 것인지 아니면 실패한 소재인지 좀 헷갈린다. 주인공 역시 범죄자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비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당연한 귀결인 것처럼 연쇄살인범이 된다. 모든 악의 원조는 아버지, 가정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인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 이야기에서 어딘가에서 어떤 아이는 사이코패스로 길러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섬뜩한 느낌을 갖게 한다. 

  '눈을 감고 기다리렴'은 특별한 병증을 안고 사는 여자의 이야기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죽은 쌍둥이의 영혼을 보고 자궁 속의 삶을 기억하는 여자가 있다. 자궁 속에서 스스로 만든 이마의 상처가 현재의 모든 삶을 지배한다. 생의 비밀을 엿보고 싶은 작가의 욕망이랄까 욕심이랄까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독서의 취향'을 나의 취향대로 읽어보면 나는 3월의 눈내리는 어느날(3월의 눈은 마치 환각이었던 것처럼 금방 녹아버린다.) 우연히 들어간 빈집에서 일기인지 소설인지 모를 책을 하나 발견했고 안나라는 인물을 상상속에서 만들어 간다. 마지막에 안나가 없는 빈집에서 내가  발견한 책이 안나가 실존인물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단서가 될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 책은 안나라는 여자가 그 책으로부터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걸 증명할 따름이다.   

  지금까지 나의 취향대로 읽은 감상이었다. '독서의 취향'의 작가가 던진 메시지처럼 독서든 세상 읽기든 사람은 자신의 취향대로 읽고 버리고 할 뿐이니까. 나의 독서 취향은 단편에 어울리고 어떤 주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느껴지거나 새롭다는 인상을 주는 쪽에 후한 점수를 주는 편이다. 비록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걸 진작에 알면서도... 작가들이 이 새로움을 찾아내느라 얼마나 생각을 쥐어짤까 알면서... 하지만 나 같은 평범한 독자는 언제나 새로운 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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