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넷플릭스에서 세계 2차대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기억의 유령>을 읽으면서 전쟁에 대한 대목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제발트의 글 속엔 독일인으로서 느껴야 했던 전쟁의 참혹함과 조국의 집단 기억상실에 대한 분노가 진하게 묻어난다. 그가 평생 붙들고 있던 건 전쟁의 그림자였다. 어린 시절 알프스 고산지대에서 얼어붙은 시신을 본 기억, 나치가 아닌 척하는 교수들을 보고 독일을 떠났던 대학 시절의 기억들이 그의 글에 스며 있다.
제발트는 단순히 전쟁이 무서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전쟁 이후에도 사람들의 삶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기억의 전쟁, 망각의 전쟁을 말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가 그토록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글을 써내려간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기억의 유령>은 제발트가 1997년부터 사망하기 직전까지 남긴 심층 인터뷰와 저명한 평론가들의 글을 모은 책이다. 제발트는 소설 네 권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 몇 권만으로도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제발트는 기억의 무게를 감당하면서도 그 간극을 메우려 애쓴 작가였다.
제발트는 자신의 글쓰기를 산문 픽션이라고 불렀는데 소설 같으면서도 사실 같고, 현실 같으면서도 환상 같은 글이 문학 장르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새로운 시도로 보인다. 제발트는 <이민자들>을 쓸 때 지인의 삶을 녹여내면서 반드시 당사자의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누군가 반대하면 과감히 그 이야기를 삭제했다. 문학적 성취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우선시 하는 태도에서 그의 품격이 드러난것 같다.
"모호한 무언가에 대해 쓰되, 모호하게 쓰지말라"는 제발트의 말처럼 그는 어둡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문장은 맑고 투명하게 빛난다. 특히 독일어로 쓴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생긴 일들은 제발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기억의 유령>을 덮자마자 제발트의 소설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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