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
주성철 지음 / 김영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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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는 홍콩영화팬이었다. 

주윤발빠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제 일의 홍콩영화 전문가 주성철씨의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를 읽으며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홍콩 배우와 내가 본 홍콩 영화는 정말이지 새 발의 피라는 걸. 이 책은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 2010년>의 전면개정판이지만 나는 전작을 읽지 않았으므로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장국영>을 읽으면서 감탄했었는데 이번 신간으로 주성철 평론가의 디테일에 존경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고맙다.

홍콩영화팬 동지였던 정희와 나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서서히 멀어졌고 연락이 끊긴지 오래 되었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되리라곤 그 땐 정말 몰랐다. 그러나 나는 안다. 정희도 분명 이 책을 읽을 거라고. 장국영과 주윤발을 사랑했던 그 때 우리를 생생하게 떠올릴 거라고. 저자가 소개하는 영화를 읽으면 우리가 함께 봤던 극장과 영화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고, 실려 있는 QR코드로 들어가 영화 속 장소를 돌아보며 머릿 속엔 이미 여행 동선을 그릴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홍콩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나 같이 한 때 홍콩 영화 팬이었던 사람들은 분명 환호할 책이다. 책에도 실린 것처럼, 장국영 찐팬들은 영화 속에 채 1분도 채 나오지 않은 장면속 장소가 어디인지를 찾아낸다. 그러나 나처럼 호들갑 떨다 급속하게 시들해진 사람들은 본 영화도 그리 많지 않고 감히 찐팬들과 비교할 수 없다. 그저 홍콩 영화 종합선물세트인 이 책을 은혜롭게 받아들어야 한다. 앞으로 할 일이 무궁무진하게 많아진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이 책의 추천평을 세 명의 감독이 썼는데 그 중 류승완 감독의 글을 소개하고 싶다.


예전부터 ‘뿅’ 갈 때 “홍콩 간다”고 했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영화계를 뒤흔들었던 ‘홍콩영화’ 속의 실제 거리와 건물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그야말로 뿅 갈 노릇이다. 주성철이 발로 써내려간 이 기록은 영화와 삶을 뿅 가게 이어주는 훌륭한 가교다. 이제 우리는 그와 함께 홍콩으로 뿅 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 뿅 가기만 하면 되는 홍콩 가이드북이 나왔다. 이 책을 토대로 테마 여행 상품을 만들어도 될 듯하다. 일명 ‘홍콩 영화 속 장면을 찾아서’가 어떨까. 장소를 찾아가는 게 주 테마이지만 소 테마로 세분화가 가능하다. 책의 목차대로 홍콩섬, 구룡반도, 신계, 란타우섬, 마카오와 카이핑 을 돌아보는 모범생 루트를 짜보는 거다. 아니면 영화별, 배우별, 감독별로 구분해서 가보는 방법이다. 정답은 없다. 내가 가보고 싶은 곳으로 가면 되는데 홍콩여행이 자유로워질 때가 언제일지... 곧 오겠지?

이 책은 단순히 홍콩여행 가이드북이 아니다. <화양연화> 속 양조위와 장만옥이 몰래 만나던 레스토랑이자 <2046>에서 양조위가 소설을 쓰던 장소, 1960년대 홍콩의 시간과 정서 속으로 관객을 데려가는 곳, 그곳은 바로 왕가위 감독이 사랑한 ‘골드핀치 레스토랑’이다.



골드핀치 레스토랑(장소)을 시작으로 화양연화 줄거리와 등장인물 소개(영화)가 미술, 음악과 함께 쏟아지고, 당시 중국 본토와 홍콩의 관계(역사), 홍콩의 분위기까지 훑는다. 그리고 골드핀치의 메뉴를 소개한 후 그곳이 ‘노스탤지어 레스토랑’으로 이름을 바꾸어 이전했다고 위치까지 소개한다.


이렇게 가이드가 끝나면 심심하니까, 변해버린 영화 속 장소의 아쉬움을 달래려고, 이 꼭지 마지막에 화양연화의 마지막과 오버랩을 시킨다. 엔딩장면의 자막으로.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이런 구성이야말로 골드핀치레스토랑용 풀세트가 아닌가! 읽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주는 완벽한 편성이다.


영화는 좋아해도 여행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책! 일독을 권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책을 읽고 영화 속 장소를 찾아가는 투어를 계획하고 실천할 생각에 심장 쿵쾅거릴 사람은 그것을 맘껏 누리면 된다. 여행에 별 취미가 없다면 이 책을 '홍콩영화 가이드북'으로 삼으면 된다. 장소에 대한 설명과 여행자를 위한 식당, 호텔 소개도 좋지만 책 전체에 베이스로 깔려있는 건 홍콩영화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윤발을 좋아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가 언급한 주윤발 영화 중 안 본 것이 더 많았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당시에 어마무시하게 찍어댄 영화들을 개봉하는 족족 다 보긴 힘들었을 거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해 본다.

주윤발이 느와르만 찍었을 것 같지만 아니다. 장르불문 다작왕이었다. 느와르는 물론 코미디, 멜로까지 쉴 틈 없이 찍었고, 너무 많은 영화에 동시 출연하다보니 대사를 다 외우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영화를 찍었단 말? 그 때는 후시녹음이라서 가능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그리고 처음 듣는 제목 <감옥풍운>에서 주윤발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잭 니콜슨을 연상시킬 정도의 연기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팬이었다면서 본 영화가 몇 편 안 되다니 슬며시 낯 뜨거워졌다. 그래서 저자가 소개한 주윤발 영화를 리스트업해서 보려고 한다.

양조위 영화도 찬찬히 봐야할 게 많다. <류망의생>에서 양조위가 “Let It Be Me’를 부르는데 저자는 이 노래의 여러 리메이크 곡 중에 양조위 버전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요 영화, 리스트 1번 각이다! 아, 저자는 음악 얘기도 자주 하는데 장국영과 매염방이 같이 부른 <연분> 주제곡의 애절함을 이야기하며 그들의 사망을 안타까워했다.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이 떠난 후 매염방도 소문에 의하면 충격으로 병세가 악화돼 그해 12월 30일에 영원히 잠들었다. 이렇게 책에서 언급한 영화를 배우별로 리스트업해서 하나씩 도장깨기하고, 소개한 음악들을 플레이 리스트에 업로드 해두면 홍콩에 여행가지 않아도 홍콩에서 지내는 것 같을 것이다.


홍콩영화 광팬이 영화평론가가 되었고 무수한 취재를 바탕으로 다른 홍콩영화 팬들을 위해 책을 냈다. 이 책 앞에서, 홍콩영화를 두고, 누가 먼저 팬이 되었고 누가 더 많이 좋아하는지를 견주는 일은 의미 없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이를 축복하고,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음에 고마워하면서, 우리는 홍콩에서 만나면 된다. 헤어진 이들도 다시 홍콩에서!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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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돌보고 연구합니다 - 경이롭고 감동적인 동물과 과학 연구 노트
장구 지음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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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돌보고 연구합니다>는 서울대 수의과대학 장구 교수의 신간이다. 주로 번식생물학을 연구하는 학자지만 이 책은 인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동물과 질병, 과학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나는 고양이 집사이다보니 수의사가 출간한 책을 가끔 읽는데 대부분 고양이 전문병원 선생님이 쓴 글이었다. 4월 김영사 서포터즈 도서로 신청할 때 제목을 보니 동물 서적이라 신청했고 잘 몰랐던 분야에 대해 알게 되어 좋았다.


저자 장구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동물 관련 굵직굵직한 이슈에 직접 참여한 선생님이다. 그런 자신의 활동과 유명 학술지에 100여 편이 넘는 논문을 제출한 이력을 바탕으로 우리가 잘 몰랐던 인간을 위한 동물들의 활약상?을 이 책을 통해 알려준다. 다 읽고 나니 동물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먼저 목차를 확인하고 인상 깊었던 내용 몇 몇을 소개하려고 한다.

1부 세상을 바꾼 동물학자의 연구실 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실험 동물에 대한 이야기다. 동물들의 희생 덕분에 인간이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2부 세상을 바꿀 동물학자의 연구실 의 내용은 현재 진행 중인 생명과학 분야의 일들인데 특히 돼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3부 생명을 돌보는 수의사의 진료실 에는 저자가 직접 돌보는 동물들의 이야기와 인상에 깊이 남았던 진료 후기가 실려 있다.


다양한 동물들이 인간을 위해 실험도구로 사용되는데 저자의 경우 동물병원에 오는 반려동물들을 살리기 위해 애쓰면서 연구자로서 실험동물들의 희생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실험동물은 연구 목적 외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데 일부 연구자들이 실험동물에 감정이입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저자의 학생이 연구에 참여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그 학생이 다루던 실험동물을 마음속으로 너무 아끼게 된 모양인지 연구가 끝나고 그 동물을 안락사시켜야 하는 상황이 되자,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하며 며칠 학교를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저자는, 마음 같아서는 그 동물을 분리해서 키우게 해주고 싶었으나 실험동물은 안락사로 생을 마치는 것이 운명이고 실험실의 규칙이다. 일반적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한 사람들일 것 같은데 단호하게 구분해야하는 게 일이니까 딜레마적 상황에 마음을 컨트롤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소와 돼지를 살처분한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이 많이 안 좋았다. 사람에게 고기를 대량으로 공급하기 위해 시작한 공장식 축산은 구제역 같은 전염병을 낳았고 그것이 번지면 생목숨을 묻어야만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구제역으로 인한 살처분 뉴스를 보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고 어찌나 다행인지! 2010년 구제역 통제에 실패해 무려 3조원을 투입해 350만 마리의 가축을 매몰하여 겨우 종식시켰다. 그 후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백신 정책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2011년부터는 수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에게 구제역 백신을 접종하기 시작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정착이 되었고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구제역이 거의 발병하지 않는다. 국내에서 구제역 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덕분에 점차 국산화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 책을 통해 돼지에게 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소보다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인간의 육식욕구를 채워주고 있는 돼지가 인간의 건강을 위한 실험에도 많이 쓰이고 있는데 이젠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장기를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 인간에게 장기를 공급하기 위해 면역 반응이 억제된 돼지를 생산하는 연구는 이미 20여 년전부터 하고 있으며 유전자 조절 돼지들에서 얻은 장기를 원숭이에게 이식하는 연구도 진행중이다. 다중 유전자 조절 돼지의 심장을 분리해 원숭이에게 이식해서 1년 이상 생존한 다국적 연구팀의 결과가 2018년에 보고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돼지의 신장을 원숭이에게 이식해 2개월 이상 생존하는 결과를 얻었다. 향후 돼지의 심장이나 신장을 영장류에 이식해 더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생존하는 연구 결과들이 나올 것이다.


사실 심장이나 신장은 구조가 매우 복잡해서 이식하는데 어려움이 많은데 반해 임상적으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장기가 있는데, 바로 각막이다. 눈은 면역 체계가 분리돼 있어서 돼지의 각막을 이식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면역 거부 반응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 중국에서 최초로 사람에게 돼지의 각막을 이식했고 9년이 지난 2019년 이식받은 여성이 건강하게 지낸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첫 수술이후 100명 이상이 돼지의 각막을 이식받았다.


또 다른 이식 후보로 연구되고 있는 돼지 장기는 췌장이다. 췌장은 매우 민감하고 부드러운 조직이므로 분리해서 다른 동물에게 이식하기 매우 어렵다. 그래서 췌장 전체를 이식하는 대신, 인슐린을 분비하는 췌도만을 분리해 사람의 간에 이식한다. 그런데 이식된 돼지의 췌도가 사람의 몸 안에 직접 노출되면 사람의 면역 시스템이 이물질로 인식하고 공격해서 췌도 세포를 죽이게 된다. 이런 점을 극복하기 위해 돼지의 췌도를 특수한 생체 물질로 코팅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 특수물질이 세포 생존에 필요한 영양분은 통과하지만 세포를 죽이는 항체는 통과할 수 없다. 이런 특수 장치를 이용해 실제로 돼지의 췌도가 원숭이의 간에서 오랫동안 그 기능을 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2020년 우리나라에서 돼지의 췌도를 사람에게 이식하겠다는 임상실험계획서가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제출되었다고 한다.


또 특정 질병에 걸리지 않는 일명 슈퍼동물의 사례도 있다. ‘돼지 생식기 호흡기 증후군 바이러스(PRRS)’ 질병에 걸리지 않는 돼지가 있다. 이 질병은 돼지에서 호흡기 증상과 유산을 일으켜 구제역만큼이나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 이 질병의 기전을 연구해, 바이러스가 돼지의 세포에 침투할 때 세포의 표면에 있는 특정 통로를 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미국 연구팀이 유전자 편집으로 돼지에서 세포의 특정 통로를 제거하는 시도를 했다. 그렇게 태어난 돼지에게 PRRS바이러스를 감염시키는 실험을 했는데 감염되지 않았다는 놀라운 결과가 2016년에 발표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PRRS에 저항성이 있는 슈퍼돼지를 차세대 동물자원으로 이용하기 위한 연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동물을 이용한 과학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저자는 식량자원에 있어 사람들이 가지는 두려움에 대해 과학적으로 검증하고 윤리적 문제도 꼼꼼히 살펴야 하지만 그런 논의 이전에 근거 없는 편견으로 문을 닫아걸지는 말자고 충고하고 있다. 우리가 그런 기술을 외면하고 규제해도, 다른 나라에서 개발을 장려하고 관련기술을 선점해버리면 순식간에 경쟁할 수 없는 수준으로 격차가 벌어지게 될 수도 있으므로.


마지막 장, 저자가 병원에서 직접 만나고 돌본 동물들의 이야기 중 심바 이야기는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 뭉클했다. 저자는 세계 최초 복제견 스너피의 핵심연구자였다. 언론으로부터 연예인급 관심을 얻은 스너피와 세포를 제공한 타이외에 숨은 공로자가 있었는데 바로 심바였다. 심바는 스너피의 대리모였다. 심바의 출생과 저자의 반려견이 되었던 사연, 복제 수정란을 심바에게 착상시켜 출산까지 성공한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동화 같았다.


첫 반려견 심바의 유골함을 연구실에 두고 있다는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특히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동물과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한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건강해야 사람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오늘도 묵묵히 진료실과 연구실을 오가며 동물을 돌보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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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달콤한 인생입니다 - 아픈 나와 마주보며 왼손으로 쓴 일기
고영주 지음 / 보다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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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오른손 위주로만 살아왔다. 작년 여름부터 오른쪽 팔꿈치 뼈가 아팠다. 병원에 갔더니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일명 테니스 엘보우, 팔꿈치를 주로 사용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란다. 근육에 염증이 생겼고 석회화도 진행되었다고 했다. 의사에게 저는 테니스도, 골프도 안 치는데요?” 했더니 주부시잖아요!” 그렇다. 주부라는 직업으로 너무 오래 오른팔만 혹사해왔다. 치료를 할 때 잠시 괜찮더니 지난 겨울부터 점점 심하게 아파서 청소하거나 무거운 것을 들 때는 왼손을 주로 사용해야 했다. 왼손에 수세미를 들고 설거지를 하는데 뭐가 이렇게 엉성하냐! 왼손은 정교성이 너무 떨어졌다. 빡빡 문질러야 하는데 것도 안 된다. 힘도 딸리는 거다.

 


그런데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일기를 쓰고 그림 그린 것으로 책을 냈다고? 내가 왼손으로 버벅거리고 있을 때 책 <이만하면 달콤한 인생입니다>의 광고를 보게 되었다. 왼손으로 일기를 쓴 사람은 초콜릿을 만드는 고영주씨라고 했다.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초콜릿이라니! 어머 이 서평 이벤트엔 꼭 참여해야 해! 그래서 신청했고 당첨되었다.

 

 

책은 202147일에 왼손으로 쓴 일기부터 시작한다. 갑자기 나도 왼손으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제목을 왼손으로 써봤는데 이런 괴발개발이 있나...


 

 ↑ 일주일간 왼손으로 써보니 조금 늘긴 늘었다.

 


저자는 20년 넘게 초콜릿을 만들어 파는 쇼콜라티에이다. 자칭 초콜릿 기술자인 오른손잡이가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굽어버렸다. 예전처럼 유연하게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매일 글 쓰고 그림 그리기를 실천하겠다고 공언하고 어길 시에는 백만원을 기부하겠다고 다짐했다. 10달이 넘는 시간동안 왼손으로 실행에 옮겼고 그것을 SNS에 올렸다가 책으로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저자의 일기와 에세이, (음식 그림 포함)초콜릿 레시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왼손으로 직접 그리고 썼다. 처음에 삐뚤빼뚤했던 글자가 어느 순간 예뻐지고 있었다. 줄 없는 노트인데 오르락 내리락하지도 않고 가지런해졌다.

 


 

그는 왼손으로 쓰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했더니 에필로그에 이렇게 썼다.

 

"왼손 글씨로는 복잡한 생각을 다 쓰기가 힘들다. 그래서 덜어내고 건너뛰며 쓰게 되는데, 다 쓰고 읽어보면 굳이 쓰지 않아도, 혹은 버려도 상관없는 생각들이 참 많구나 싶다."

 

역시 덜어내기다! 좋은 퇴고는 많이 덜어내는 것이라더니 애초에 이렇게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건너뛰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싶었다.

 

이 책은 저자가 일기를 쓰면서 생각을 정리한 것, 힘들었던 개인사, 사장으로서 가게를 운영하며 겪게 되는 고충들 등등 독자 입장에서 공감할만한 것들이 많다. 다들 비슷비슷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남의 일기를 왜 읽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서 읽는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사람 사는 모습 거기서 거기구나 하며, 일면식 없는 타인의 삶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저자와 올레길을 같이 걸었던 친구의 소감이 제 맘과 같이 너무 좋아서 옮겨 적는다고 한 내용은 지금 하는 일에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걱정 잠시 접고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라며 용기를 줄만하다.

 

 


 

저자는 심리상담을 왜 받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잘못해 횡설수설하다가 집에 돌아와 천천히 생각해보니 이런 답이 나왔다고 했다.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요. 나를 좀 더 알고 나를 좀 더 이해하고 위해주고 싶어요. 나 말고 나를 이만큼 이해하고 싶은 사람 없잖아요. 나를 잘 이해하고 싶어요."

 

우린 타인을 이해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정작 자신은 잘 모른다. ‘나 말고 나를 이만큼 이해하고 싶은 사람 없다는 말이 참 맞는 말이다. 타인보다 나를 잘 이해하고 위해주는 게 먼저다. 자신을 잘 알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20여년 전 벨기에에서 배워와 '카카오봄'을 차린 이후로 사장을 하고 있으니 시대의 흐름과 종업원들의 태도 변화를 몸소 겪었고 이젠 다 잘 아는 것 같아도 여전히 처음인 것 같은 상황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그런 경우다.

 


 


쇼콜라티에로서 저자가 받은 진단명이 한 두 개가 아니다. 하지정맥류부터 시작해 허리, 어깨, , 손목, 손가락까지 골고루다. 운동을 해야지, 해야지 다짐을 하면서도 운동보다 쉬는 게 먼저가 아닌가 하며 또 핑계를 댄다. 그러나 규칙적인 운동과 골고루 음식 섭취 같은 방법 역시 잘 알지만 실천이 힘들다. 저자는 습관으로 잘 지키겠다고 표어를 하나 만들었다.

 


 

 

왼손으로 이렇게 그림을 잘그리다니 대단하다!

 

 ↑ 저자가 좋아하는 서해안 어느 펜션에서

 

 

↑ 옥상에 도시양봉을 하면서 벌을 관찰하게 됨

 

 

20211231일 일기에서 저자는 친구와 냉면을 먹으면서 한 해를 돌아본다.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한 해였고 큰 일도 무사히 치른 것 같다며 내년을 다짐했다. 소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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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 머시기 - 이어령의 말의 힘, 글의 힘, 책의 힘
이어령 지음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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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소설가, 평론가, 기호학자, 문화기획자, 교육자, 장관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종횡무진 활동해온 이어령 선생이 지난 226일 영면에 들었다. 투병 중 편집하던 <거시기 머시기>가 유작이 되었다. 이 책은 말과 글과 책을 주제로 한 이어령의 대중 강연과 대담 모음집이다. 강연 시기는 2001년 이화여자대학교 퇴임 고별 강연부터 2014년 세계번역가대회 기조 강연까지 15년에 걸쳐 있지만 실제로는 이어령이 최초로 책을 접했던 어린 시절부터 언어의 힘에 천착해온 그의 글쓰기 인생 전체를 아우른다.


제목을 거시기 머시기로 잡은 이유는 여는 글에 실었다. ‘거시기 머시기의 의미를 풀어낸 2013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주제 강연 집단 기억의 잔치 카오스모스의 세상이다. 내용 일부를 옮긴다.


무슨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직접 대놓고 말하기가 거북할 때 쓰는 토박이말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기억이란 망각의 과정이라고도 하듯이 말할 때 생각나지 않는 말이 생기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고 어느 나라에도 있는 법이다. 이미 알고 있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답답함을 나타내는 주어가 거시기이고 언어로는 줄 긋기 어려운 삶의 의미를 횡단하는 행위의 술어가 머시기. 그래서 한국인들은, 특히 전라도 지역 사람들은 단지 이 두 마디 말만 가지고서도 서로의 복잡한 심정과 신기한 사건들을 교환할 줄 안다. 우리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이분법으로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그 경계의 반란자들과 동반자가 되고 혼란과 질서가 겹쳐진 그 상태에서 새로운 창조의 힘을 가져와야 한다. 그러니까 거시기 머시기카오스 코스모스는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암호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생각장치라 할 수 있다.

 


7개의 강연은 20년 전부터 8년 전 것까지다.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전혀 오래된 느낌이 들지 않는데 석학의 글을 클래식이라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각 장의 주제는 지식, 정보와 시, 문학, 책을 주로 다루므로 평소 책과 출판에 관심이 많다면 읽어보길 권한다. 나는 오래전에 <흙속에 저 바람 속에><축소지향의 일본인> 두 권밖에 못 읽었고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이번 책을 읽어보니 이어령 선생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어, 외국어, 단어의 어원과 의미에 대한 통찰을 다룬 내용 뿐 아니라 후배시인과 일본작가 다치바나 다카시와 나눈 대담, 88서울올림픽을 총괄 지휘했던 이야기 등등 인상적인 내용들이 많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이란 말을 일상에서 역설적으로 사용한다는 부분을 읽으면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다.


p.28~31


한국인들은 기쁠 때도 슬플 때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슬퍼 죽겠다는 말과 함께 좋아 죽겠다라는 말도 씁니다. 때로 죽음은 부정이 아니라 극상의 긍정억 되기도 합니다. 아주 만족스러운 공연을 보거나 감동적인 광경을 볼 때 한국인의 감탄사는 죽여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국말에서는 무엇을 강조하거나 최상급의 상태로 말할 때에 죽는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서구 사람들은 신을 두고 맹세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죽음을 두고 맹세하는 일이 많습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도 앞으로는 죽어도 하지 않겠다라든가 죽어도 널 버리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말에서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서열상 앞에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자 살자로 사랑한다거나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어에서는 생사결단이라고 하지 않고 사생결단이라고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그 유명한 대사 “To be or not to be”도 한국말로 번역되면 사느냐 죽는냐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로 바뀝니다. 그래야 자연스러운 한국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언어문화권이라고 하는 일본이지만 명번역이라고 하는 쓰보우치의 <햄릿> 번역본에는 한국어 번역본과는 달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되어 있습니다.

 


2012년 후배 시인들과 나눈 특별좌담회(참여자:이어령,강정,김경주,김산,김언,서효인)의 주제는 시의 정체성과 소통이었다. 시를 즐겨 읽으려 해도 가까워지기가 어려웠는데 시인들의 발언을 읽어보니 시인과 독자와의 거리감의 연원을 조금은 확인할 수 있었다. 서효인 시인이 고등학생들에게 시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는 것이다. 시에 대해 알고 싶어서 검색하거나 해석한 것을 찾아 읽어보면 그게 더 어렵더라고. 한편 이어령 선생은 그 반대로 이런 시각을 펼쳤다.


p.104


세상에 쉬운 시란 없어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예로 들어볼게요. “이런 쉬는 쉬워?”하고 물으면, “그야 애들 동요 같은 건데 그걸 모를 사람이 있겠어요?”라고 반문하거든요. “그럼 왜 하필 엄마, 누나야? 아빠, 형님은 어디로 갔어?”라고 물으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요. 그렇구나, 아빠야 형님아라고 하지 않고 엄마야 누나야라고 했을까. 대답을 못 합니다. ‘엄마야 누나야는 시적 젠더의 공간이에요. 강변은 생식과 자궁의 공간, 생명의 장소입니다. 아버지, 형님의 공간은 역사와 사회의 투쟁 공간, 공장이거나 전쟁터이거나 경쟁을 하는 볼모의 도시예요. 이렇게 시적 공간이란 창조된 공간이므로 먹고 자고 일하는 일상적인 공간하고는 거리가 있지요. 이 거리가 바로 난해성을 낳게 하는 공간, DMZ입니다.


 

강정 시인은 대학 강의를 하면서 젊은이들이 시를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정형화되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어리니까 새롭고 신선한 사유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것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회적인 장치가 뿌리가 얕고 편견이 심한 것 같다고 했다. 이 좌담회의 마지막 발언은 이어령 선생이 했는데 한국문학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p.119~120


2000년대 이전 한국의 문학은 외상 치료 같은 것이었지요. 칼이나 총탄에 맞은 외상 말입니다. 그리고 문학은 거기에 붙이는 고약과 붕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외부의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빈곤이 있었기에 문학은 그만큼 영향력을 갖고, 그러한 체제에 저항하는 힘이 생겼던 것이지요. 그래서 외부의 상처에 바르는 고약과 같은, 붕대와 같은 언어가 절실히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2000년대 산업화와 민주화가 다 같이 그 유효 한계에 이르자, 이제는 위기가 안이나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내부의 경계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지요. 이 시대의 시인들은 면역 이상으로 생긴 거절 현상을 소거해 바깥에서 들어온 이물질을 융합,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세포)의 창조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선생의 80년 책 인생의 시작은 어머니였다고 하면서 시작하는 다치바나 다카시와의 대담은 일제강점기부터 디지털시대까지의 문자와 지식, 책에 대한 역사와 마찬가지였다. 돌잡이로 책을 손에 쥐었고 어머니를 영원히 읽어도 읽을 수 없는 도서관이고 수만 권의 책이었다고 밝히면서 어머니의 몸인 생명에 근원에 있는,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기억에 없는 책이 바로 디지털 시대와 연결된다고도 했다. 선생이 주창한 생명의 책을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 깊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p.141


책이라는 게 시간이 없어 못 읽고 흥미가 없어 안 읽지 디지털로 만들어진 건 읽고 종이책이면 안 읽습니까? 더구나 한국처럼 억지로 읽히려고 수능 시험에 지문을 길게 책처럼 만들어 놓으니까 애들이 독서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빼앗겼습니다. 수능 시험 보면서 문단이 어떻고, 주제는 어떻고 해놓으니까 우리 어렸을 때 그냥 좋아서 읽었던 소설, 내가 너무 즐거워 눈물을 흘렸던 그 시절의 책들을 요즘 애들은 수능 시험을 보기 위한 것으로 강압적으로 접하고 있습니다. 독서를 위한 독서가 되면 안 됩니다. 내가 마지막 만나 책,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하나 되는, 어머니 몸의 책, 살이 있고 피가 흐르는 따뜻한, 그것에서 얻어지는 음성시각촉각이 살아있는 생명의 책을 우리는 만들어야 합니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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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시장
이경희 지음 / 강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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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작가의 신작 소설 <모란시장>은 늙은 점박이 개 삽교의 눈으로 모란시장이 서술된다. 알다가도 모를 인간 심리를 그릴 땐 삽교의 1인칭 시점 같고, 시장 사람들의 마음과 개인사까지 속속들이 알 때는 전지적 작가시점 같기도 하다. 두 시점이 경계감 없이 서술되어 자연스레 소설에 빠져들었다. 시장에 가면 살아있음을 느낀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시장에서 흥정을 하고 물건을 사고 판다. 시장은 꿈틀거리는 삶의 현장이다. 그러나 개 도축상이 있는(실제로는 20185월에 철거됨) 소설 모란시장에는 죽음이 상존한다.

 

 

개가 고기가 되는 곳, 대도축산에서는 피 비린내와 비명과 함께 돈이 오간다. 대도축산 박사장은 두 번째로 들인 아내 경숙에게 개 도축을 일임한다. 그곳에 싱싱한 개를 공급하는 이는 영달이라 불리는 개도둑인데, 삽교의 형제 넷과 어미를 훔쳐와 대도축산에 팔아넘긴 자다. 삽교 혼자 겨우 살아남아 대도축산 맞은편 대도빌딩에 사는 명진의 손에 길러졌다. 태어나자마자 잡혀온 삽교는 이제 10년이 지났는지 20년이 되었는지조차 가물거릴 정도다. 하지만 모란시장 골목골목이 제 발바닥 안처럼 훤하고 시장 상인들의 사연을 속속들이 아는 것도 연식이 그만큼 되었기 때문이다.

 

 

삽교가 아빠라 부르는 명진은 온갖 약들을 주렁주렁 달고 사는 사내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대도빌딩 창문 밖으로 대도축산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개를 죽이는 경숙을 바라본다. 아니다. 경숙이 박사장에게 개 맞듯이 맞는 것을 지켜보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뛰쳐내려가면 경숙모의 제지를 받고 돌아서 풀썩 쓰러지는 유약한 인간이다. 그가 나서서 말리지 못하는 이유는 박사장이 경숙과 자신의 관계를 의심하기 때문이며 명진은 박사장의 배다른 동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이 소설의 주제는 사실 간명하다. 생명의 가치를 인간의 잣대로 논할 수 없음에도 인간은 돈의 논리로 생명을 평가하며 상위포식자답게 가장 잔인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모란시장의 밝은 쪽보다는 피하고 싶었던 어두운 면(진열되어 있던 그것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한다. 공존과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고. 작가의 이런 생각은 등장인물들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된다. 고양이 송이, 꽃집 여사장, 경숙의 대사로 또렷이 발화되고, 할머니들의 행동으로, 삽교의 생각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의도가 명징하게 드러난다.

 

 

누구나 주제에 쉽게 도달할 수 있을 테지만 각자의 경험에 따라 인상 깊은 지점은 다를 것이다. 모란시장에 가서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면 아쉬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현재 모란시장의 모습만 아는 이에겐 충격과 안도의 정서가,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다면 삽교와 송이에게 감정이입할 것이다. 나는 성남 모란시장의 개도축 역사를 신문기사로 접했을 뿐이지만 어느 정도 분위기는 알고 있었다. 부산 구포시장(구포시장 개도축 시설은 2019년 초에 철거됨) 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개 짖는 소리와 역한 냄새, 그리고 뜬장 속에 갇혀 있는 도사견, 껍질을 벗겨 가게 앞에 진열해 놓은 개들. 소설 속 대도축산에서 벌어지는 개 잡는 장면은 이 기억을 소환시켰고, 정용준의 단편소설 <개들>까지 오버랩이 되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개들>에서는 개를 거의 죽을 만큼 팬 다음 높이 매달아 목숨이 끊어지길 기다린다. 소설 속 개 도축자 옆에서 보신탕을 끓이는 여성의 이름이 모란이었다. 두 소설의 공통점은 인간의 잔인성이다. 개를 죽이는 장면에서는 치를 떨었고 무엇보다 현실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마지막 공통점은 엔딩 장면에서 두 소설 모두 도축업자가 죽는다. 잔인하게...

 

 

소설 <모란시장>의 분위기는 밝지 않다. 그나마 삽교가 화자이기 때문에 희극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의 눈으로는 이해되지 못할 일들,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같은 인간이지만 기막히는 짓거리들이 벌어지는 곳이 모란시장이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악다구니가 활기찬 배경음악이 되기도, 죽음의 그림자를 품고 있기도 한 것이다. 개도축을 하는 대도축산을 중심으로 모란시장과 탄천 주위에서 생을 영위하는 모든 생명들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삶과 죽음은 돈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곳은 어디든 애증과 연민과 복수가 있고 역시 돈이 있다. 돈에는 욕심이 자동완성어로 따라붙는다. 단순화하자면 돈을 더 많이 벌려면 더 많이 죽여야 한다.

 

 

인간은 더할 수 없이 흉포한 상위포식자다. 훔쳐온 개를 공급하는 영달도, 건강하고 믿을만한 물건이라고 큰소리 치는 박사장과 그에게 돈을 척척 내는 단골들도 인간이다. 박사장 대신 어쩔 수 없이 도축을 하다가 한 번씩 개들을 풀어주는 경숙도, 심장소리를 들어본 적도 슬픈 눈동자를 본 적도 없는 개를 모욕하지는 말자고 소리 지르는 능평꽃집 여자도 인간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다른 생명의 희생에 기댄 것이라는 경숙의 말이 곧 작가의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생명의 소중함에는 공감하겠지만 그래도 육식을 멈출 수는 없겠다고 할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다른 동물의 시체를 먹지 않고도 우리는 살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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