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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싱어송라이터
이미경 지음 / 북극곰 / 2026년 3월
평점 :

‘고전’이라는 단어는 오래 되었다, 어렵다는 어감이 있다. 여기에 ‘시가’라는 낱말까지 붙으면 진짜 어렵겠다, 국어시간에 배운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안 난다 같은 생각이 든다. 다가가기 어렵기만 한 이 ‘고전시가’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 책이 출간되었다. 38년간 파격적인 방식으로 학생들의 고전시가 멀미증을 치유해온 이미경씨의 <조선의 싱어송라이터>이다.
“고전시가는 원래 악보가 있는 노래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시(詩)는 문학으로, 가(歌)는 음악으로 강제로 분리되었다. 노래에서 멜로디를 빼앗긴 탓에 악보를 잃은 반쪽짜리 옛 노래를 만나고 있다.”(머리말에서 발췌)는 건 몰랐다. 고전시가를 고전문학으로만 배워 어렵고 재미없게 느낀 게 아닐까 싶었다. 작가는 안타까운 마음에 고전시가와 현대가요를 연결해 사람들이 고전시가를 친숙하게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 마음 아주 잘 느껴졌다. 덕분에 몇 백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이야기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작가는 16개의 챕터에서 고전시가와 가요를 각각 한 곡씩 묶어 총 32개의 노래를 소개하고 있다. 유사한 감정과 정서를 공유하는 두 곡을 기가 막히게 연결했고, 시대적 배경과 역사는 물론 인물의 숨겨진 이야기까지 알 수 있게 했다. 대표곡을 뽑아 챕터의 부제에 넣긴 했으나 각 예술가의 생애가 서술되기에 여러 곡이 등장하고 비슷한 심상을 노래한 다른 작품도 곁들여 더욱 풍성하다. 학창시절에 이렇게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선생님이 있었다면 어렵지 않게 공부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고전문학 시간이 마냥 지루한 고등학생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물론 성인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나는 역사책 읽기를 좋아해서 이 책이 흥미로웠고 작가의 서술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1부에서 눈에 들어온 챕터는 추사 김정희의 <도망시>다. 얼마 전 어떤 드라마에서 언급된 적이 있어서 처음 알게 된 시다. 언뜻 어디론가 도망친다는 뜻인가 싶었는데 한자로 도망(悼亡)은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슬퍼한다는 뜻이다. 김정희 하면, 추사체를 만들었다는 것과 제주도에 유배 가서 그린 ‘세한도’ 정도밖에 몰랐는데 이 책을 읽고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게 되었다. 유배 생활을 하며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은 애정 표현과 투정이 난무한다. 허허, 조선시대에 양반이 이런 표현을? 싶었고 절절함이 훅 다가왔다.
오늘 집에서 보낸 서신과 선물을 받았소. 당신이 봄밤 내내 바느질했을 시원한 여름옷은 겨울에야 도착했고 나는 당신의 마음을 걸치지도 못하고 손에 들고 머리맡에 병풍처럼 둘러놓았소. 당신이 먹지 않고 어렵게 구했을 귀한 반찬들은 곰팡이가 슬어 당신의 고운 이마를 떠올리게 하였소. 내 마음은 썩지 않는 당신 정성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워 집 앞 붉은 동백 아래 거름되라고 묻어주었소. 동백이 붉게 타오르는 이유는 당신 눈자위처럼 많이 울어서일 것이오.
귀양살이를 뒷바라지하던 아내의 지병이 위중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김정희는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아내는 그것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편지를 보내고 한 달쯤 뒤에야 아내의 부고를 받은 김정희는 거처에 위패를 만들어 모시고 추모글을 올렸다. 그리고 그는 아내를 간병하지도 못하고 직접 배웅하지도 못한 비통함을 담아 도망시를 썼다.
뉘라서 월하노인께 명부의 일을 아뢰어
다음 생에는 금슬의 연분 서로 바꾸리오.
천 리 먼 곳에 나 먼저 가고 그대 홀로 남아
비로소 이 애끊는 심사를 그대 알련만.
김정희는 아내 사후 6년 뒤 제주도 귀양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절망의 시간을 담금질하여 완성한 것이 추사체이다.
도망시의 가요 버전은 임재범의 ‘내가 견뎌온 날들’이다. 임재범의 아내는 갑상선암으로 투병하다가 마흔다섯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모든 대외 활동을 멈추고 아내를 애도했다. 상실의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것은 역시 노래와 무대였다. 7년의 공백 끝에 낸 정규 7집 앨범 <SEVEN,>의 수록곡 <내가 견뎌온 날들>에서 임재범은 아내가 슬퍼하지 않게 잘 견디겠다고 약속한다.
이 두 곡을 나란히 놓고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p.122
김정희는 9년의 유배 끝에 돌아왔다. 집으로, 하지만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임재범은 7년의 침묵 끝에 돌아왔다. 노래로,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들의 애절한 도망시는 남았다. 견딜 수 없었던 날들을 견디며 쓴 기록. 우리는 그 기록을 읽고 들으며, 슬퍼하고 위로받는다. 시대는 달라도, 사랑이 예술을 만든다는 진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예술은 결국, 남겨진 자의 언어다. 누군가는 시로, 누군가는 노래로, 사랑의 잔향을 기록한다. 김정희의 붓끝이 남긴 한시와 임재범의 목소리가 남긴 울음은 모두 한 인간의 간절한 사랑의 형상이다. 그들의 작품은, 결국 ‘잃음의 자리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울림을 준다. 그래서 두 남자의 작품은 사랑하고, 잃고, 견뎌낸 모든 이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예술은 오늘도 계속된다.
이렇게 각 챕터마다 대구를 이루는 두 곡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이야기 솜씨에 감탄했다. 이 책을 선택했다면 고전시가를 잘 몰라도 좋아하는 곡이나 가수가 보이면 그 챕터부터 먼저 읽어보자. 자연스레 고전시가의 음률 속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2부에서 유난히 눈길을 끈 챕터는 허난설헌과 김광석이다. 그들의 접점은 무엇일지 궁금했다. 허난설헌의 문학적 재능은 빼어났다. 허난설헌 사후에야 조선의 선비와 문인들은 그녀를 칭송했으면서도 그 천재적 능력을 폄하했다. 동생 허균이 극히 일부 작품만 옮겨놓았다는 <난설헌집>에는 한시 210여 수와 산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시대는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했으며 기어이 살해하고 말았다.
허난설헌의 오언고시 ‘곡자’에는 어린 남매를 잃은 어미의 처절한 슬픔으로 가득하다. 남매를 잃은 후 시댁의 구박이 심해졌고 뱃속 아이마저 잃고 만다. 작가는 ‘곡자’에서 또 다른 슬픔을 감지했다. ‘곡자’가 아이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이자 세상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유언장으로 읽었다.
지난해에 애오라지 딸아이를 잃더니
올해에는 사무치는 아들마저 잃었네.
아아, 서럽도다 광릉의 푸른 언덕이여.
나란한 두 봉분이 쓸쓸히 마주 섰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스산한 바람 울고
소나무 가래나무엔 인혼 불빛 어른거리네.
지전을 사르며 너희 넋을 부르고
너희 무덤에 검은 술 올리어 제하노라.
응당 알리라, 너희 오누이 혼백이
밤이면 밤마다 서로 의지해 노니는 것을.
설령 태중에 아이 깃들었다 한들
어찌 온전히 자라기를 바라리오.
부질없이 황대의 비가를 읊조리니
피눈물로 통곡하며 그 소리마저 삼키네.
작가는 허난설헌의 ‘곡자’와 김광석의 ‘일어나’를 나란히 놓은 챕터의 제목을 “내 작품의 제단에 나를 바치다”라고 이름 붙였다. 다른 시대, 다른 성별의 두 아티스트는 모두 자신이 낳은 작품에 희생 제의로 바쳐졌다고 했다. 그들의 슬픔은 개인의 울분에 그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이었고, 다음 세대에 공감의 씨앗을 뿌린 행위였다고 썼다.
이 챕터에서는 두 아티스트의 여러 작품을 언급하며 그들의 생애를 망라하여 설명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김광석의 ‘일어나’는 삶의 허무함과 답답함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러기에 더더욱 “봄의 새싹들처럼” 얼음장을 뚫고 일어서자는 활기차고 힘찬 노래라고 했다. 작가는 그들의 접점을 같은 방향성에서 찾았다.
p.219
사람이 슬픔을 견디는 방식, 상실을 기록하는 방식, 그리고 절망을 예술로 끌어올리는 마지막 몸부림까지.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