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거시기 머시기 - 이어령의 말의 힘, 글의 힘, 책의 힘
이어령 지음 / 김영사 / 2022년 4월
평점 :

시인, 소설가, 평론가, 기호학자, 문화기획자, 교육자, 장관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종횡무진 활동해온 이어령 선생이 지난 2월 26일 영면에 들었다. 투병 중 편집하던 <거시기 머시기>가 유작이 되었다. 이 책은 말과 글과 책을 주제로 한 이어령의 대중 강연과 대담 모음집이다. 강연 시기는 2001년 이화여자대학교 퇴임 고별 강연부터 2014년 세계번역가대회 기조 강연까지 15년에 걸쳐 있지만 실제로는 이어령이 최초로 책을 접했던 어린 시절부터 언어의 힘에 천착해온 그의 글쓰기 인생 전체를 아우른다.
제목을 ‘거시기 머시기’로 잡은 이유는 ‘여는 글’에 실었다. ‘거시기 머시기’의 의미를 풀어낸 2013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주제 강연 「집단 기억의 잔치 카오스모스의 세상」이다. 내용 일부를 옮긴다.
무슨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직접 대놓고 말하기가 거북할 때 쓰는 토박이말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기억이란 망각의 과정이라고도 하듯이 말할 때 생각나지 않는 말이 생기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고 어느 나라에도 있는 법이다. 이미 알고 있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답답함을 나타내는 주어가 ‘거시기’이고 언어로는 줄 긋기 어려운 삶의 의미를 횡단하는 행위의 술어가 ‘머시기’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특히 전라도 지역 사람들은 단지 이 두 마디 말만 가지고서도 서로의 복잡한 심정과 신기한 사건들을 교환할 줄 안다. 우리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이분법으로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세상ㅇ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그 경계의 반란ㄷ자들과 동반자가 되고 혼란과 질서가 겹쳐진 그 상태에서 새로운 창조의 힘을 가져와야 한다. 그러니까 ‘거시기 머시기’나 ‘카오스 코스모스’는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암호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생각장치라 할 수 있다.
7개의 강연은 20년 전부터 8년 전 것까지다.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전혀 오래된 느낌이 들지 않는데 석학의 글을 클래식이라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각 장의 주제는 지식, 정보와 시, 문학, 책을 주로 다루므로 평소 책과 출판에 관심이 많다면 읽어보길 권한다. 나는 오래전에 <흙속에 저 바람 속에>와 <축소지향의 일본인> 두 권밖에 못 읽었고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이번 책을 읽어보니 이어령 선생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어, 외국어, 단어의 어원과 의미에 대한 통찰을 다룬 내용 뿐 아니라 후배시인과 일본작가 ‘다치바나 다카시’와 나눈 대담, 88서울올림픽을 총괄 지휘했던 이야기 등등 인상적인 내용들이 많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이란 말을 일상에서 역설적으로 사용한다는 부분을 읽으면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다.
p.28~31
한국인들은 기쁠 때도 슬플 때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슬퍼 죽겠다’는 말과 함께 ‘좋아 죽겠다’라는 말도 씁니다. 때로 죽음은 부정이 아니라 극상의 긍정억 되기도 합니다. 아주 만족스러운 공연을 보거나 감동적인 광경을 볼 때 한국인의 감탄사는 ‘죽여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국말에서는 무엇을 강조하거나 최상급의 상태로 말할 때에 ‘죽는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서구 사람들은 신을 두고 맹세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죽음을 두고 맹세하는 일이 많습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도 ‘앞으로는 죽어도 하지 않겠다’라든가 ‘죽어도 널 버리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말에서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서열상 앞에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자 살자로 사랑한다’거나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어에서는 생사결단이라고 하지 않고 ‘사생결단’이라고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그 유명한 대사 “To be or not to be”도 한국말로 번역되면 “사느냐 죽는냐”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로 바뀝니다. 그래야 자연스러운 한국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언어문화권이라고 하는 일본이지만 명번역이라고 하는 쓰보우치의 <햄릿> 번역본에는 한국어 번역본과는 달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되어 있습니다.
2012년 후배 시인들과 나눈 특별좌담회(참여자:이어령,강정,김경주,김산,김언,서효인)의 주제는 “시의 정체성과 소통”이었다. 시를 즐겨 읽으려 해도 가까워지기가 어려웠는데 시인들의 발언을 읽어보니 시인과 독자와의 거리감의 연원을 조금은 확인할 수 있었다. 서효인 시인이 고등학생들에게 시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는 것이다. 시에 대해 알고 싶어서 검색하거나 해석한 것을 찾아 읽어보면 그게 더 어렵더라고. 한편 이어령 선생은 그 반대로 이런 시각을 펼쳤다.
p.104
세상에 쉬운 시란 없어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예로 들어볼게요. “이런 쉬는 쉬워?”하고 물으면, “그야 애들 동요 같은 건데 그걸 모를 사람이 있겠어요?”라고 반문하거든요. “그럼 왜 하필 엄마, 누나야? 아빠, 형님은 어디로 갔어?”라고 물으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요. 그렇구나, 왜 ‘아빠야 형님아’라고 하지 않고 ‘엄마야 누나야’라고 했을까. 대답을 못 합니다. ‘엄마야 누나야’는 시적 젠더의 공간이에요. 강변은 생식과 자궁의 공간, 생명의 장소입니다. 아버지, 형님의 공간은 역사와 사회의 투쟁 공간, 공장이거나 전쟁터이거나 경쟁을 하는 볼모의 도시예요. 이렇게 시적 공간이란 창조된 공간이므로 먹고 자고 일하는 일상적인 공간하고는 거리가 있지요. 이 거리가 바로 난해성을 낳게 하는 공간, DMZ입니다.
강정 시인은 대학 강의를 하면서 젊은이들이 시를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정형화되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어리니까 새롭고 신선한 사유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것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회적인 장치가 뿌리가 얕고 편견이 심한 것 같다고 했다. 이 좌담회의 마지막 발언은 이어령 선생이 했는데 한국문학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p.119~120
2000년대 이전 한국의 문학은 외상 치료 같은 것이었지요. 칼이나 총탄에 맞은 외상 말입니다. 그리고 문학은 거기에 붙이는 고약과 붕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외부의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빈곤이 있었기에 문학은 그만큼 영향력을 갖고, 그러한 체제에 저항하는 힘이 생겼던 것이지요. 그래서 외부의 상처에 바르는 고약과 같은, 붕대와 같은 언어가 절실히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2000년대 산업화와 민주화가 다 같이 그 유효 한계에 이르자, 이제는 위기가 안이나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내부의 경계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지요. 이 시대의 시인들은 면역 이상으로 생긴 거절 현상을 소거해 바깥에서 들어온 이물질을 융합,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세포)의 창조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선생의 80년 책 인생의 시작은 어머니였다고 하면서 시작하는 ‘다치바나 다카시’와의 대담은 일제강점기부터 디지털시대까지의 문자와 지식, 책에 대한 역사와 마찬가지였다. 돌잡이로 책을 손에 쥐었고 어머니를 ‘영원히 읽어도 읽을 수 없는 도서관이고 수만 권의 책이었다’고 밝히면서 어머니의 몸인 생명에 근원에 있는,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기억에 없는 책이 바로 디지털 시대와 연결된다고도 했다. 선생이 주창한 생명의 책을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 깊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p.141
책이라는 게 시간이 없어 못 읽고 흥미가 없어 안 읽지 디지털로 만들어진 건 읽고 종이책이면 안 읽습니까? 더구나 한국처럼 억지로 읽히려고 수능 시험에 지문을 길게 책처럼 만들어 놓으니까 애들이 독서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빼앗겼습니다. 수능 시험 보면서 문단이 어떻고, 주제는 어떻고 해놓으니까 우리 어렸을 때 그냥 좋아서 읽었던 소설, 내가 너무 즐거워 눈물을 흘렸던 그 시절의 책들을 요즘 애들은 수능 시험을 보기 위한 것으로 강압적으로 접하고 있습니다. 독서를 위한 독서가 되면 안 됩니다. 내가 마지막 만나 책,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하나 되는, 어머니 몸의 책, 살이 있고 피가 흐르는 따뜻한, 그것에서 얻어지는 음성‧시각‧촉각이 살아있는 생명의 책을 우리는 만들어야 합니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