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시장
이경희 지음 / 강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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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작가의 신작 소설 <모란시장>은 늙은 점박이 개 삽교의 눈으로 모란시장이 서술된다. 알다가도 모를 인간 심리를 그릴 땐 삽교의 1인칭 시점 같고, 시장 사람들의 마음과 개인사까지 속속들이 알 때는 전지적 작가시점 같기도 하다. 두 시점이 경계감 없이 서술되어 자연스레 소설에 빠져들었다. 시장에 가면 살아있음을 느낀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시장에서 흥정을 하고 물건을 사고 판다. 시장은 꿈틀거리는 삶의 현장이다. 그러나 개 도축상이 있는(실제로는 20185월에 철거됨) 소설 모란시장에는 죽음이 상존한다.

 

 

개가 고기가 되는 곳, 대도축산에서는 피 비린내와 비명과 함께 돈이 오간다. 대도축산 박사장은 두 번째로 들인 아내 경숙에게 개 도축을 일임한다. 그곳에 싱싱한 개를 공급하는 이는 영달이라 불리는 개도둑인데, 삽교의 형제 넷과 어미를 훔쳐와 대도축산에 팔아넘긴 자다. 삽교 혼자 겨우 살아남아 대도축산 맞은편 대도빌딩에 사는 명진의 손에 길러졌다. 태어나자마자 잡혀온 삽교는 이제 10년이 지났는지 20년이 되었는지조차 가물거릴 정도다. 하지만 모란시장 골목골목이 제 발바닥 안처럼 훤하고 시장 상인들의 사연을 속속들이 아는 것도 연식이 그만큼 되었기 때문이다.

 

 

삽교가 아빠라 부르는 명진은 온갖 약들을 주렁주렁 달고 사는 사내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대도빌딩 창문 밖으로 대도축산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개를 죽이는 경숙을 바라본다. 아니다. 경숙이 박사장에게 개 맞듯이 맞는 것을 지켜보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뛰쳐내려가면 경숙모의 제지를 받고 돌아서 풀썩 쓰러지는 유약한 인간이다. 그가 나서서 말리지 못하는 이유는 박사장이 경숙과 자신의 관계를 의심하기 때문이며 명진은 박사장의 배다른 동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이 소설의 주제는 사실 간명하다. 생명의 가치를 인간의 잣대로 논할 수 없음에도 인간은 돈의 논리로 생명을 평가하며 상위포식자답게 가장 잔인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모란시장의 밝은 쪽보다는 피하고 싶었던 어두운 면(진열되어 있던 그것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한다. 공존과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고. 작가의 이런 생각은 등장인물들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된다. 고양이 송이, 꽃집 여사장, 경숙의 대사로 또렷이 발화되고, 할머니들의 행동으로, 삽교의 생각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의도가 명징하게 드러난다.

 

 

누구나 주제에 쉽게 도달할 수 있을 테지만 각자의 경험에 따라 인상 깊은 지점은 다를 것이다. 모란시장에 가서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면 아쉬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현재 모란시장의 모습만 아는 이에겐 충격과 안도의 정서가,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다면 삽교와 송이에게 감정이입할 것이다. 나는 성남 모란시장의 개도축 역사를 신문기사로 접했을 뿐이지만 어느 정도 분위기는 알고 있었다. 부산 구포시장(구포시장 개도축 시설은 2019년 초에 철거됨) 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개 짖는 소리와 역한 냄새, 그리고 뜬장 속에 갇혀 있는 도사견, 껍질을 벗겨 가게 앞에 진열해 놓은 개들. 소설 속 대도축산에서 벌어지는 개 잡는 장면은 이 기억을 소환시켰고, 정용준의 단편소설 <개들>까지 오버랩이 되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개들>에서는 개를 거의 죽을 만큼 팬 다음 높이 매달아 목숨이 끊어지길 기다린다. 소설 속 개 도축자 옆에서 보신탕을 끓이는 여성의 이름이 모란이었다. 두 소설의 공통점은 인간의 잔인성이다. 개를 죽이는 장면에서는 치를 떨었고 무엇보다 현실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마지막 공통점은 엔딩 장면에서 두 소설 모두 도축업자가 죽는다. 잔인하게...

 

 

소설 <모란시장>의 분위기는 밝지 않다. 그나마 삽교가 화자이기 때문에 희극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의 눈으로는 이해되지 못할 일들,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같은 인간이지만 기막히는 짓거리들이 벌어지는 곳이 모란시장이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악다구니가 활기찬 배경음악이 되기도, 죽음의 그림자를 품고 있기도 한 것이다. 개도축을 하는 대도축산을 중심으로 모란시장과 탄천 주위에서 생을 영위하는 모든 생명들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삶과 죽음은 돈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곳은 어디든 애증과 연민과 복수가 있고 역시 돈이 있다. 돈에는 욕심이 자동완성어로 따라붙는다. 단순화하자면 돈을 더 많이 벌려면 더 많이 죽여야 한다.

 

 

인간은 더할 수 없이 흉포한 상위포식자다. 훔쳐온 개를 공급하는 영달도, 건강하고 믿을만한 물건이라고 큰소리 치는 박사장과 그에게 돈을 척척 내는 단골들도 인간이다. 박사장 대신 어쩔 수 없이 도축을 하다가 한 번씩 개들을 풀어주는 경숙도, 심장소리를 들어본 적도 슬픈 눈동자를 본 적도 없는 개를 모욕하지는 말자고 소리 지르는 능평꽃집 여자도 인간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다른 생명의 희생에 기댄 것이라는 경숙의 말이 곧 작가의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생명의 소중함에는 공감하겠지만 그래도 육식을 멈출 수는 없겠다고 할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다른 동물의 시체를 먹지 않고도 우리는 살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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