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지성사 3부작 세트 - 전3권
스튜어트 휴즈 지음, 김병익, 김창희, 황문수 옮김 / 개마고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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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성사란 인간의 사상(thoughts), 즉 합리적 논의 뿐만 아니라 감정(emotions), 즉 격정의 폭발까지도 함께 다루어야 할 학문이다. 쓰고 말하고 또 실제 행동이나 전승을 통하여 나타나는 인간 표현의 모든 영역이 지성사의 대상인 것이다. (13면)




2. 학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유혹인데 복잡다단한 자료에다 자신의 산뜻한 사상유형을 뜯어 맞추려는 욕심이 그것이다. (16면)




3. 그것은 저자 마르크스의 강렬한 개성과 자기 주장이 옮다는 데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 때문에 너무나도 이질적인 철학적 사회적 제요소를 불길 같은 종합의 용광로 속에 용해시켜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65면)




4. 사회주의의 성서라고 할 자본론이 모든 성서가 갖는 특성, 즉 애매모호성을 최고도로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복잡해진다. (74면)




5. 역사적으로 볼 때 이른바 인민의 지도자란 현실적 권력으로부터 자신이 소외되었다고 느낀 매우 유능한 불만분자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대혁명은 신엘리트가 구엘리트를 몰아내려는 투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때 인민은 엘리트에 봉사하는 가엾은 병사였다. 이들 인민은 스스로 “그들이 정의요, 자유요, 인간성이라 부른 바로 그것”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인민의 지도자들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고 ‘성실하게’ 상상하였다. 그러나 그 진실한 목적은 신 엘리트의 계급적 이익 또는 개인적 이익이었다. 그러므로 파레토는 ‘자본’과 ‘노동’간 투쟁의 종말이 곧 넓은 의미의 계급투쟁의 종말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라 결론지었다. 공산주의 사회에 있어서도 사회투쟁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즉 “사회주의 국가의 각종 노동자 간에, 지식인과 비지식인 간에, 정치가와 정치가 간에, 정치가와 피통치자 간에 그리고 개혁파와 보수파 간에 투쟁이 계속 일어날 것이다.” 사회주의의 묵시록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 (75면)




6. 비록 법칙에 관한 지식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지각에 밝은 빛을 비추어 줄지 몰라도 지각 그 자체는 될 수 없다. (81면)




7. 소렐: 바른 판단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운동에 투신하고 그에 대한 지적 공감을 얻는 일이 꼭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물의 밑바닥에 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86면)




8. 많은 독창적 사상가들이 그랬듯이 그들도 자신을 어떤 훌륭한 철학적 가계에다 집어넣는 일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3류사상가에게나 필요한 일이었다. 연구의 어떤 점에 다다르면 일류는 의례 체계적 연구에 참지 못하는 법이었다. (95면)




9. 프로이트; 그 핵심적 주장은 꿈의 해석은 마음의 무의식적 활동에 관한 지식에 이르는 왕도이다. (116면)




10. ‘문화란 문화를 권력과 압재의 수단으로 만드는 방법을 아는 소수자에 의해 저항하는 다수자에게 강제된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프로이드는 쓰고 있다. (119면)




11. 초기에 프로이드는 인간 심리 속에 현실원칙(reality-principle)과 쾌락원칙(pleasure-principle)이 있다고 가정하고 양자의 주도권 싸움이 에고(ego)와 이드(id)의 투쟁이라 보았다. 전자는 의식적으로 형성된 인격(consciously formed personality)을 말하며 후자는 인간의 야성적인 욕망이 아직 미분화된 부도덕한 심리영역을 말한다. 분명히 문명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에고가 이드를 억제하여야 하며 현실원칙이 쾌락원칙을 지배하여야 한다. 더욱이 이 양자의 투쟁 속에서 수퍼 에고(super ego, 초자아)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죄의 현주소요 아버지를 내면화한 가치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이 슈퍼 에고가 문명 형성의 주동력인 것처럼 보인다. (128면, 129면)




12. 왜냐하면 그(프로이드)의 기본명제는 진리의 탐구는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되며 지식만이 이성을 가능케 하고 이성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131면)




13. 칼 쿠스타브 융은 베르그송과 프로이트가 만나는 꼭 중간점이다. 프로이트의 리비도 개념을 일반화하여 삶의 에너지의 충일이라 재정의하고 또 거기서 프로이트가 부여한 성적 의미를 제거함으로써 융은 리비도를 베르그송의 삶의 비약과 동일시하였다. (133면)




14. 독일 사회 과학의 전통이 그 형이상학적 사변에의 기호와 정신에의 탐닉으로 말미암아 취약하다는 사실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245면)




15. 그러나 그(베버)의 모든 사상과 생활은 역사적 사고로 충만되어 있었다. 법률학도 경제학처럼 독일에서는 역사적 학문으로서 가르쳐지고 있었다. 사회학도 또한 같았다. (246면)




16. 그(베버)의 모든 관심이 하나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 즉, 서구사회에 있어서의 합리성(rationality)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45면) ... 이제 그(베버)는 사회과학이라는 학문에 있어서 가장 골치아프고 어려운 문제 - 사회과학 자체의 철학과 바업론의 문제 -에 전념하게 되었다. (251면)




17. 가치판단에 대한 어떤 절대적인 것도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 윤리적 또는 실제적 규범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적 지지를 포기함으로써 - 베버는 리케르트와 갈라지고 딜타이가 사는 희미한 상대주의의 세계로 접근해 갔다. 이리하여 그는 상호조건화(mutual conditioning)의 세계에 종착하였다. (259면)




18. 사회적 문화적 세계에 있어서는 고정된 실재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발견하였다. 모든 확실한 것은 인간이 윤리적 문화적 가치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이 가치의 기원과 의미는 신비의 장막에 싸여 있다. (259면)




19. 불교와 힌두교에는 없는 것, 합리 지향적 상업활동의 생활을 받아들이고 촉진하는 윤리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다. (269면)




20. 만일 그가 산상의 ...의 ‘궁극적 목적이 윤리’를 택한다면 그 사람은 속세에 참여할 수 없다. 이 윤리는 오로지 성인에게만 적합한 윤리다. 그러므로 행동의 실제적 결과의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공공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결심했다면 그는 ‘책임의 윤리’(ethic of responsibility)를 지게 되며 이 윤리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도덕기준과 어긋날지 모른다. (27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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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체계와 법 고려대학교출판부 인문사회과학총서 42
이상돈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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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최근 사회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의료체계의 중심축인 의료보험, 의약분업 그리고 의료사고로 인한 분쟁의 해결제도에 대한 법철학적, 법이론적 및 법사회학적 접근을 통하여 - 때로는 정치철학적 접근을 통하여 - 의료체계의 개혁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먼저 나는 ‘생활세계-사회체계’의 사회분석틀을 제공하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또는 대화이론)을 끌어들이고 또 그것을 응용하여 ‘의료생활세계-의료체계’라는 개념을 새로이 만들었다. 이 이론틀에 의해 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나라의 의료정책이 형성해 온 의료체계가 의사와 환자가 만나는 사회적 공간, 즉 의료생활세계를 권력과 자본의 논리로 왜곡시켰다(의료생활세계의 식민지화)는 매우 비판적인 명제를 제안한다. (1면)




2. 예컨대 현재 주류가 되어 있는 의료법정책의 바탕에는 재정의 결핍이 만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의료보장체계를 ‘상징적’으로나마 관철하려는 기획이 숨어 있는데, 이 기획은 권력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러나 정치체계가 시민사회에 대해 약속한 사회적 의료보장을 관철하기 위해 의료영역을 보험재정적 관점에서 권력적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기획은 의료영역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그 왜곡의 결과는 의료공급기구들로 하여금 시민사회를 다시 희생양으로 삼게 만드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된다. 의료전달체계의 왜곡이나 공격적인 병원경영은 그런 악순환의 표피적인 한 증상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이 악순환은 의료체계를 짜는 입력제도인 의료보험제도나 의약분업제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제도로 짜여진 의료체계에서 발생하는 의료사고로 인한 분쟁, 즉 출력문제를 해결하는 각종 법제도(의료책임법, 의료보험법, 의료형법)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1면, 2면)




3. 나는 의사와 환자의 만남을 치료적 대화로 규정짓고, 이 구조적 해명을 바탕으로 하여 의료체계는 의료생활체계와 단절된 사회체계, 그러니까 예컨대 기능적 합리성이나 경제적 합리성만을 추구하는 사회체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비판적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의료체계는 의료생활체계의 논리, 즉 대화적 재생산의 논리를 닮은 모습의 사회체계, 즉 대화적 구조로 짜여진 사회체계이여야 한다는 기획을 세운다. (2면)




4. 응용이론을 통하여 기초이론은 비로소 더 ‘구체화’되고, 더 ‘현실화’된다. 이것은 응용이론이 기초이론에 대해 창조적 기능을 갖고 있음을 말해 준다. (4면)




5. 결국 의사와 환자의 상호주체성이란 의사와 환자가 치료적 대화를 온전하게 펼칠 수 있는 의사소통적 교류(의 전제조건들)를 의미할 수 밖에 없다. (7면)




6. 이와 같은 의료관계의 상호주관적 이해로부터 이른바 의업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진다. 흔히 의사의 포괄적인 의료권을 의업권이라고 표현한다. ... 다시 말해 의업권은 고립된 주체로서 의사 개인에게 의료의 자유를 부여하는 (단지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자유권적 기본권’이 아니라 의사가 환자와 ‘함께’ 의료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자율영역’을 보장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자율영역을 의료생활체계라고 부를 수 있다. (7면)




7. 일반적인 의료행위규범은 어떤 의료행위가 의학의 발전수준을 고려할 때 ‘올바른’(richtig) 의료행위인지를 규정하는 반면에, 구체적인 의료행위규범은 어떤 의료행위가 특정한 환자의 특정한 병을 치료하는 개별적인 진료상황에 ‘적절한’(angemessen) 것인지를 규정한다. (9면)




8. 의료생활세계의 구조적 요소: 자율적 의료행위 규범, 의료인격(의과대학의 자치), 성찰적 의료문화. ... 의료행위규범, 의료인격, 의료문화는 의료생활세계라는 개념의 집을 떠받드는 세 가지 기둥이 될 수 있다. (12, 13면)




9. 우리의 의료생활체계가 어떻게 - 의료보험관련법규와 의약분업관련법규를 조종매체로 삼는 - 정치체계의 권력논리와 경제체계의 자본논리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의미구조를 정상적으로 재생산하지 못하는 병리적 현상을 겪게 되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15면)




10. 정치권력은 재정현실을 무시하고 시민에게 낮은 보험료만으로 높은 의료서비스가 보장된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의 권력재생산은 단기적으로는 시민사회에 우호적인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시민사회에 대해 불리하다. 왜냐하면 민간의료시장을 허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낮은 의료수가를 강제하는 것은 의료공급기구들의 수익성 악화를 가져오고, 이를 피하기 위해 의료공급기구들은 시민사회에 대해 ‘공격적 경영’을 감행하게 되고, 시민들은 그런 경영의 수동적인 피해자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17면)




11. 의약분업은 의약품의 오남용방지를 통한 ‘국민건강의 보호’라는 이익보다 (병원-약국-병원을 오락가락하는) 번거로운 외래이용을 기피하는 시민들의 경향(의 증대)을 이용하여 국민의료비의 감소나 (현재 매우 부실상태에 빠져 있는) 의료보험재정의 건실화와 같은 ‘경제적 이익’을 겨냥한 전략이 아니냐는 의혹이 의료계에 점점 더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다시 말해 의약분업정책은 사회보장적 의료체계의 재정보완정책이며, 정치체계의 시민사회에 대한 사회보장약속의 ‘상징성’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23면)




12. 그러나 진료의 보편적 규격화란 의료인이 환자와의 대화과정에서 최선의 진료라고 판단되는 행위를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26면)




13. 그러나 의료시장의 구조가 수익성을 보장하지 않고, 심지어는 수익성을 고갈시키는 통제되고 ‘사회화된 시장구조’ 위에 서 있는 경우에는 의료공급체계는 이른바 ‘공정한 경쟁’의 방법에 의해 스스로는 기능화할 수 있는 자본을 재생산할 수 없다. 여기서 의료공급기구들은 시민사회에 대하여 ‘공격적’ 경영을 펼치게 된다. 예를 들면 의료수가가 낮은 진료를 기피한다든지, 불법적인 임의비급여를 확대한다든지, 불필요한 진료(특히 각종 검사)를 환자에게 행하는 왜곡된 현상이 빚어진다. 또한 이를 위하여 의료기관간에 무분별한 첨단장비의 도입 경쟁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런 경쟁은 의료기관간의 협동적 기능분화(이른바 의료전달체계)를 가로막고, 갈등적 경쟁관계를 촉진시킴은 물론 전공과목별 의료인력의 균형있는 공급도 왜곡시켜버린다. (28면)




14. 그 결함은 평등의 이념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변증적으로 지양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 바로 여기에 자유는 누리되 평등을 지향하고, 평등은 누리되 자유를 지향하는 변증적 교류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요구됨을 알 수 있다. (36, 37면)




15. 여기서 대화윤리란 어떤 실체적인 내용의 특정(의료)윤리를 대화적 방식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대화윤리란 (도덕적) (의료) 행위규범 자체가 오직 그 규범에 관련되는 모든 개인들이 자유롭고 기회균등하게 의견을 교환한 가운데 ‘더 나은 근거’가 (서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되, (서로) 그 의견을 수용하는 의사소통적 과정, 즉 상호이해로 지향된 합의형성적 의사소통적 방식으로만 정당한 규범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요청은 복잡한 경제현실, 탈중심화된(다원화된) 문화, 다층적인 맥락의 사회로 특징되는 현대사회에서도 시민들이 수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핵심윤리가 된다는 점을 가리킨다. (42면)




16. 이와 같은 의료교육목표의 방향선회는 의사나 환자의 ‘인격’을 개인적인 차원의 도덕적 함량(치료적 대화에 지향된 상호작용의 능력)이 아니라 모든 의료주체들이 의료행위가 펼쳐지는 삶의 세계를 대화적 방식으로 함께 구성하는 ‘의사소통의 역량과 권한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게 만든다. (42면)




17. 이런 점에서 의사인격과 환자인격은 대화적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정체성이 - 의사와 환자의 입장에서 각각 비춰질 때 - 나타나는 의사소통적 주체성 이외에 다름 아니다. (43면)




18. 의료영역에서 법의 정당성이 이처럼 ‘내용적으로’(또는 실체적으로)가 아니라 ‘절차적으로’ 창출된다는 점은 법철학의 현대적 논의에 깊이 들어감이 없이도, 쉽게 그리고 소박하게 이해될 수 있다. ... 이러한 현실은 탈형이상학화되고, 다원화되고, 통일적인 패러다임이 상실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전통적 권위(예: 관료의 권력, 의료인의 전문적 및 직원윤리적 명망)가 세계를 지배했던 사회에서와는 달리 어떤 주체도 의료법규범을 독점적으로 정립할 권위를 가질 수가 없다. 여기서 민주적 규범형성이 자연스럽게 대안으로 남게 된다. (50면)




19. 의료공론영역에서 형성되는 합의는 일방의 견해가 타방의 견해보다 비판과 토론의 과정을 거쳐 ‘더 합리적인 근거’로 자리매김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있는 주장으로 (상호)승인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자발적 준수를 동기화하는 역량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료시민사회와 의료공론영역에서 의사소통은 정당한 권력의 근원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런 권력을 ‘의사소통적 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51, 52면)




20. 정치체계는 바로 이와 같은 의사소통적 권력을 수용할 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정적 집행력도 확보할 수 있다. (52면)




21.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의료생활세계의 대화적 재생산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의료시민사회와 의료공론영역이 성장하고 활성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의료시민사회와 의료공론영역이 성장할수록 정치체계의 권력이나 (의료)경제체계의 자본이 의료영역을 왜곡시키는 것은 그 만큼 더 어려워지게 될 것이다. (52, 53면)




22. 의료재의 분배를 오로지 행정관료와 공공의료의 보험자에게 내맡길 경우에는 관료화의 일반적 병폐인 경직성과 비효율이 의료체계에 터잡게 되기 쉽다. (67, 68면)




23. 미국식의 체계는 자유에 편향되어 있고 한국식의 체계는 평등에 편향되어 있지만, 전자의 자유는 (특히 저소득층의) 시민들을 의료시장으로부터 소외시켰고, 후자의 평등은 시민들을 관료적 권위주의에 예속시킨다는 차이는 있으나, 두 체계가 모두 의사와 환자 사이의 치료적 대화를 (의사나 환자 개인의 인격적 결함과 같은 개별적인 차원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왜곡시킨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어 있다. (70면)




24. 의사든 환자든 자율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권력적인 이유에서 또는 금전적인 이유에서 의사와 환자가 질병의 치료를 위해 펼쳐야 할 이사소통과 상호작용이 굴절됨을 의미한다. (71면)




25. 공공의료부문에서 의료보호제도는 ‘최소진료’를 제공한다. 최소진료란 모든 국민이 헌법상 누리는 생존권적 기본권의 연장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최소한의 진료를 말한다. 공공의료보험제도는 사회보장적 프로그램으로서 ‘기본적 진료’(‘보편적 진료’)를 제공하게 된다. 이에 비해 민간의료보험은 이보다 높은 수준의 의료를 제공하게 된다. 즉, 민간의료보험제도는 흔히 병원경영자들이 말하는 ‘적정진료’를 재정적으로 조달하고, 개별의료계약에 의한 의료는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게 된다. (78, 79면)




26. 먼저 의료체계의 두 부문에서 의료서비스 공급의 주된 역할은 공공부문이 해야 하고 민간부문은 공공부문의 기능을 보완해주는 역할만을 떠맡아야 한다. 이와 같은 역할의 기능적 분담은 한편으로는 의료(재)의 공공적 성격, 즉 누구나 생존을 위해서는 누리지 않으면 안되는 재화(공공재)의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요청이며, 또한 시장기능이 실패하기 쉬운 의료서비스의 특성으로부터 나오는 요청이기도 하다. 또한 다른 한편, 이 요청은 인명에는 귀천이 없다는 전승된 문화적 법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요청이기도 하다. (81면)




27. 만일 미국사회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적 약자인 저소득층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면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통합 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은 그의 재정적 역량과는 상관없이 ‘기본적인’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요소, 즉 ‘능력’에 따라 기여(보험금, 세금)하고 ‘필요’에 따라 의료의 혜택을 누리는 사회체계를 사회국가적 기획 아래 수용한 의료체계, 즉 사회보장적 의료체계가 의료체계의 중심에 위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의료적 생존배려(Daseinsvorsorge)는 의료체계의 중심을 형성해야 한다. (81면)




28. 우선 민간의료체계는 의료를 자유시장에 방임하는 미국식의 민간의료체계가 아니라, 의료생활체계의 대화적 재생산에 기여하는 의료체계이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해두어야 한다. (9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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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한길그레이트북스 26
에드문트 후설 지음, 이종훈 옮김 / 한길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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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데 왜 학문은 이 주도적 지위를 상실하였는가? 왜 사정은 본질적으로 제한되었고, 학문의 이념은 실증주의적으로 제한되었는가? (67면)




2. 이것은 궁극적으로 세게 자체 속에서 세계에 내재하는 이성(Vernunft)과 목적론(Teleologie) 그리고 그 최상원리인 신(Gott)을 인식하는 작업이다. (67면)




3. 이 경우 이성은 ‘절대적’, ‘영원한’, ‘초시간적’, ‘무제약적’으로 타당한 이념이나 이상에 대한 명칭이다. (69면)




4. 모든 존재의 불가분적 통일성 속에 일치되었던 고대의 철학이념에는 이미 존재가, 따라서 존재문제의 의미심장한 질서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최고의 그리고 궁극적 문제의 학문인 형이상학(Metaphysik)에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는 지위가 주어졌고, 이 형이상학의 정신은 그밖의 모든 학문들이 제공하는 인식에 비로소 최종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또한 이것을 (르네상스시대에) 새로 부흥된 철학이 이어받았고, 더구나 이 철학은 참된 보편적 방법을 발견해야만 하고 이 방법을 통해 형이상학에서 절정을 이루는 체계적 철학으로, 더 자세히 말하자면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으로 진지하게 구축되어야만 한다고까지 믿었다. (69, 70면)




5. 그런데 그 높은 정신으로 고무되고 축복받은 새로운 인간성이 계속 지탱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인간성이 자신의 이상인 보편적 철학에 대한 신뢰와 새로운 방법의 효과에 대한 생동감에 넘치는 신뢰를 상실하였다는 사실에 이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사실이 발생하였다. 그 방법은 확실한 성과를 얻었던 실증과학들에서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 이 동기는 그 때까지 지배적이었던 (철학의) 이상에 확고히 뿌리박힌 자명한 사실에 대항하여 더욱더 소리높여 이의를 제기하였다. (71, 72면)




6. 사고 전체의 기묘한 전회는 필연적 귀결이었다. (72면)




7. 보편적 철학과 이에 필요한 방법의 확고한 이상은, 말하자면 철학적 근대와 이것이 발전하는 모든 계열을 근원적으로 건립함으로써 착수된다. 그러나 이 이상은 사실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내적인 해체를 겪는다. (72, 73면)




8. 새로운 철학을 근원적으로 건립한 것은 근대유럽의 인간성을 근원적으로 건립하는 것이며, 게다가 중세의 인간성이나 고대의 인간성인 그때까지의 인간성에 대항하여 자기를 혁신하려는 인간성인 근대유럽의 인간성을 근원적으로 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의 위기는 철학적 보편성의 분과들인 근대학문 모두의 위기를 뜻하며, 이것은 유럽 인간성의 문화적 삶이 지닌 의미심장함 전체, 즉 그의 실존 전제에서 맨 처음에는 잠재적이지만 점차 더욱더 두드러지게 드러난 유럽 인간성 자체의 위기이다. (73면)




9. 후설이 파악한 현대의 위기는 이론적 측면의 ‘학문’뿐만 아니라, 실천적 측면의 ‘인간성’의 위기를 포함하는 이중구조를 갖는다. (역자주, 73면)




10. 내적으로 볼 때 철학사는 더욱더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성격, 즉 자신의 과제를 충실히 해결하고자 전력을 다하는 철학 - 이성을 소박하게 신뢰하는 철학 -과 이성을 부정하거나 경험주의적으로 무가치하다고 거부하는 회의론과의 투쟁이라는 성격을 띤다. (75면)




11. 오히려 근대철학은 새로운 보편적 과제를 지닌 철학과 고대철학의 부흥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 철학을 새롭게 건립하는 것으로서 반복과 보편적 의미변화가 하나로 있는 것이다. (75면)




12. 합리적이고 무한한 존재 전체와 이것을 체계적으로 지배하는 합리적 학문의 이념이라는 이러한 구상은 전대미문의 새로운 것이다. 무한한 세계 즉 여기서는 이념성의 세계는 그 객체들이 우리의 인식에 개별적으로 불완전하게 그리고 우연히 접근될 수 있는 그러한 세계가 아니고, 합리적이며 체계적으로 일관된 방법이 도달하는 세계, 말하자면 (이러한 방법을) 무한히 진행해가서 모든 객체가 결국 그것의 완전한 그 자체로 존재함(An-sich-sein)에 따라 인식되는 세계로서 구성된다. (86, 87면)




13. 플라톤주의에서 실재적인 것(Reales)은 그 완전함에서 이념적인 것(Ideales)에 다소간에 관여(Methexis)한다. 이것은 고대기하학이 실재성에 원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다. (87, 88면)




14. 인식론이 등장하고 선험철학을 진지하게 시도한 이래 철학의 역사 전체는 객관주의적 철학과 선험적 철학 사이의 엄청난 긴장의 역사이다. ... 내가 여기에서 제시하고자 시도하려는 것은 선험철학의 최종형식(Endform) - 현상학으로서 - 으로 향한 목표이다. (149면)




15. 다음과 같은 점도 다시 기억해야만 한다. 즉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우스로부터 시작된 고대의 회의주의는 객관적 인식(episteme) 즉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An-sich-seiend)의 학문적 인식을 문제로 삼아 그것을 부정하였다는 점, 그러나 이 회의주의는 그들의 추정적 진리를 그 자체와 더불어 합리적인 그 자체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철학을 합리적으로 구축하는 작업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불가지론을 넘어서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에 있어) 이 세계는 합리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의 인식은 주관적-상대적 현상들을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었다. (158면)




16. 판단중지 즉 미리 주어진 모든 것 -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그 모든 전제된 타당성(Vorgeltung) -을 철저하게 억제하는 것을 단순히 결심하는 일로써 작업이 다 수행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판단중지는 진지하게 수행되어야만 하며, 사실상 그렇게 수행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세계의 어떤 잔여(Residumm)가 아니라 절대적이고 필증적으로 정립된 것인데, 이것은 판단중지를 통해서만 즉 세계의 타당성 전체를 ‘괄호침’으로써만 가능하며, 또한 유일한 정립(Setzung)으로서 가능하게 된다. (163면)




17. 그래서 왜 데카르트가 객관주의와 정밀한 과학을 형이상학적-절대적 인식을 보장하는 학문으로 정초하려고 서두른 나머지, 그 작용들이나 능력들에서 자신에 고유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순수자아가 이러한 작용들과 능력들을 통해 지향적 작업수행(intentionale Leistung)으로서 성취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순수자아 - 판단중지 속에서 일관되게 남아 있는 것 -를 체계적으로 물어보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과하지 않았는지 이해된다. 데카르트가 이것을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문제제기 - 자아 속의 ‘현상’인 세계로부터 시작해서 체계적으로 되돌아가 묻는 문제 즉 실제로 증명될 수 있는 자아의 어떠한 내재적 작업수행에서 세계는 그 존재의미를 유지해왔는가 하는 문제제기 -가 천명될 수 없었다. (166, 167면)




18. 즉 동일한 자기는 결코 감각자료가 아니라, 감각자료가 끊임없이 변이하는 다발이다. (그러므로) 동일성(Identitaet)이란 하나의 심리학적 허구이다. (174면)




19. 그러므로 사실상 이것은 객관적 인식의 파산을 의미한다. 흄은 근본에 있어서 결국 하나의 독아론(Solipsismus)에 귀착한다. ... 흄의 천재성은 경탄할 만한 것이지만, 그에 상응하는 위대한 철학적 품성(Ethos)이 그 천재성과 결합하지 못한 것은 더 유감스러운 일이다. (175면)




20. 선험철학은 학문 이전의 객관주의와 학문적 객관주의에 대립해서 모든 객관적 의미형성과 존재타당성의 근원적 터전인 이식하는 주관성(erkennende Subjektivitaet)으로 되돌아가는 철학이며, 존재하는 세계를 의미형성물과 타당성형성물로 이해하고 이러한 방식으로 본질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학문적 성격과 철학에의 길을 개척하고자 시도하는 철학이다. (191면)




21. 칸트는 자신의 철학이 그 당시를 지배하고 있는 합리주의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칸트는 합리주의가 자신에게 근본적 물음임에 틀림없었을 물음을 다루지 않았다고 정당하게 비판한다. 즉 합리주의는 학문적 인식에 앞서 그리고 학문적 인식에서 우리의 세계의식의 주관적 구조를 결코 깊이 파고들어가지 않았으며, 그런 까닭에 ‘인간과 학자들로서의 우리들에게 즉시 나타나는 세계가 어떻게 아프링오리하게 인식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어쨌든 순수과학과 그밖의 순수한 아프리오리가 모든 객관적 인식 즉 모든 이성인(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타당한 인식의 도구로 사용되는 정밀한 자연과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결코 묻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197면)




22. 반성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것을 갖는다. 왜냐하면 지금은 나타남들 자체의 경과가 문제이지, 나타남들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주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199면)




23. 우리는 주어지는 방식들의 흘러가는 변화 속에서 우리에 대해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는 세계가 정신적 형태의 통일로서 즉 의미형성물로서 -궁극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보편적 주관성의 형성물로서- 생성되었고, 동시에 계속 생성하는 것으로서 보편적인 정신적 획득물이라는 사실을 배워서 이해하게 된다. 이 경우 주관성이 자기자신을 인간적인 것으로서 즉 세계의 존립요소로서 객관화한다는 사실은 세계를 구성하는 이러한 작업수행에 본질적으로 속한다. (210면)




24. 모든 객관적 세계관찰은 ‘외부’에서의 관찰이며, 단지 ‘외적인 것’ 즉 객체성들만 파악할 뿐이다. (하지만) 철저한 세계관찰은 자기자신을 외부에서 ‘외화하는’ 주관성의 체계적이며 순수한 내적 관찰이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의 통일에서와 같다. 물론 유기체란 외부로부터 관찰하거나 분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유기체의 은폐된 뿌리로 되돌아가서 그것들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위로 향해 노력하는 생명 즉 내부로부터 형성하는 생명을 그 모든 작업수행을 통해 체계적으로 추구할 때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210, 211면)




25. ... 완전히 무관심한 관찰자(uninterestierter Betrachter) ... 그리고 이것은 그 세계의 존재(Sein)와 그러하게 존재함(Sollen)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러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타당하였고, 또한 우리에게 계속 타당한 것을 ‘어떻게 그것이 주관적으로 타당한가’, ‘그것이 어떠한 모습으로 보여지는가’ 등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을 항상 자신의 목표로 삼는다. (270면)




26. 이러한 것은 외적 융합으로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국면에서 ‘의미’를 그 자체 속에서 지니고 있는 것 즉 무엇인가를 사념하는 것으로서 일어난다. 그 지각작용의 양상들은 더욱더 의미가 풍부하게 되고(Sinnbereicherung), 의미가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것(Sinnfortbildung) - 이 속에서는 (이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도 여전히 유지되는 것으로서 계속 타당하며, 또한 이 속에서 지속적 흐름을 선취하는 예측적 사념이나 혹은 생성되는 것을 미리 기대하는 것이 동시에 충족되고 상세히 규정된다-에 결부되어 있다. (273면)




27. 지각은 단지 현재에만 관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지각은 그 배후에 무한한 과거를 가지며, 그것의 전면에는 개방된 미래를 갖는다는 사실이 이미 사념되어 있다. (275면)




28. 세계의 고유한 존재는 (다른) 의미형성과 더불어 기능하면서 종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는 의미형성(Sinnbildung)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의미(Sinn)란 타당성양상들 속에 있는 의미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지향하고 있는 것 그리고 타당성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서 자아주체들에 관련된 것이다. (또한) 지향성이란 유일하게 실제적으로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에 대한 명칭이다. (287면)




29. 우리가 주관성은 상호주관성 속에서만 그것의 본질 즉 구성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자아라는 사실을 깊이 고려하자마자 곧, 모든 것이 복잡하게 된다. (294면)




30. 이해할 수 없은 역설의 출현 - 새로운 철저한 성찰의 필요성 (298면)




31. 모든 객관성 즉 도대체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속으로 해소되는 보편적 상호주관성(universale Intersubjektivitaet)은 어쨌든 인간성(Menschheit)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며,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 자체로 세계의 부분적 구성요소이다. (305면)




32. 세계는 이미 주어져 있다는 자명성의 유일한 우주이다. 처음부터 현상학자는 자명한 것을 의심스러운 것 즉 수수께끼와 같은 것으로 간주해야만 하고, 그후부터는 이러한 것 -현상학자에게는 실로 모든 ‘수수께끼 가운데 최대의 수수께끼’인 세계존재의 보편적 타당성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변경시키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학문적 주제로서 가질 수 없다는 역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305, 306면)




33. 새롭게 시작하는 현상학적-선험적 철저주의라는 철학의 본질적 특성은, 이미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객관적 철학과 달리 이 철학은 자명성의 토대를 미리 마련하는 것 대신 (비록 다르더라도) 이와 유사한 의미의 토대를 원리적으로 배제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철학은 우선 토대없이(bodenlos) 시작해야만 한다. 그러나 곧바로 그 철학은 자기자신의 힘으로부터 -즉 그 철학이 원초적 자기성찰을 통해 하나의 현상 또는 현상들의 우주로 변경된 소박한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하나의 토대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307면)




34. 보편적 구성의 의미 작업수행과 타당성 작업수행을 실행하고 있는 주체들로서의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극체계로서의 세계, 따라서 공동체화된 삶의 지향적 형성물로서의 세계를 공동체 속에서 구성하고 있는 자들로서의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309면)




35. 근원적 자아(Ur-Ich)로서의 자아는 세계를 구성하는 선험적 상호주관성의 공동주체들로서의 선험적 타자(Andere)에 대한 나의 지평을 구성한다. (311면)




36. 연역하는 것(Deduzieren)은 해명하는 것(Erklaeren)이 아니다. (319면)




37. 이것의 기원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즉 소박한 객관주의적 학문의 정초방식으로부터 원리적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선험철학은 근원적 형태로는 필연적 자아로부터 철학을 절대적으로 주관주의적으로 정초하려는 시도로서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최초로 그 발단으로 등장한다. (330, 331면)




38. 선험적 자아로서의 나 자신은 세계를 구성하고, 동시에 인간적 자아의 영혼으로서 세계 속에 존재한다. (334면)




39. 이 수수께끼는 곧 모든 객관적 학문들에 불가결한 무한한 자명성에 대한 명칭으로서의 세계가 우리에 대해 끊임없이 그리고 학문 이전적으로 존재한다는 자명성이다. (337면)




40. 나는 주어지는 방식들과 타당성양상들 그리고 자아가 집중하는(Ich-Zentrierung) 방식들의 내용(Was)와 방식(Wie)에 관해 모든 측면에서 일관되게 심문하면서, 이러한 의식삶이 철저하게 지향적으로 작업을 수행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337면)




41. 우리는 실로 데카르트가 한 바와 마찬가지로 생각함(cogito) 즉 지향성을 발견하는데... (371면)




42. 판단중지는 일반적인 철학적 의도에서 경험에 대한 보편적 비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진리 그 자체에 관한 인식가능성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회의적, 불가지론적 판단중지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이 모든 것에는 태도를 취함(Stellungnahmen)이 포함되어 있다. (379면)




43. 관념론은 자신의 이론에 너무 성급하였으며, 대부분 은폐된 객관주의적 전제로부터 스스로 해방할 수 없었다. 혹은 관념론은, 사변적 관념론으로서, 현실적인 현상적 세계를 직관성 속에서 타당하게 갖는 현실적 주관성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심문하는 과제를 빠트리고 말았다. (414면)




44. 이러한 철학은 그 이성을 통해 애매하게 됨 속에서, 드러내 밝힘 속에서 명백한 자기이해의 운동 속에서 무한한 과정인 것으로서 절대적 상호주관성의 발견이다. 즉 끊임없이 세계를 구성하는 선험적 삶 속에서 ‘절대적’(궁극적 의미에서 ‘선험적’) 주관성의 필연적인 구체적 존재방식의 발견이며, 이와 더불어 상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새로운 발견인데, 선험적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이 세계의 존재의미는 이전단계에서 세계와 세계진리, 세계인식으로 불렸던 것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밝혀 준다. (4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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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2016-01-23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들에 비해 정말 제대로 공부하시네요....
올려주신 몇몇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아 도서 구입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위험사회 (반양장)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울리히 벡 지음, 홍성태 옮김 / 새물결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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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당연시되는 구조적 및 인지적 맥락을 밝히고, 이 위험천만한 풍요의 시대를 안전과 평화의 시대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를 추구한다. (역자서문, 6면)




2. 본래 위험(Risk)이라는 용어는 17세기 스페인의 항해술 용어에서 나온 것으로 위험을 감수하다, 암초를 뚫고 나가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로부터 위험이란 부를 얻기 위해서 당연히 감수해야만 하는 난관이라는 함의를 갖게 되었다. 또한 이 단계에서 위험은 잠재적인 부수효과이자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역자서문, 6면)




3. 그러나 그 같은 ‘낭만의 시대’는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 그와 동시에 위험은 부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우연적 난관에서 체계적으로 생산되는 정상적 개연성으로 변모하였다. 그 결과 부의 추구와 그 분배의 문제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우연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겼던 산업사회가 그 정점에서 맞이하게 된 것은 구조적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위험사회’이다. (역자서문, 7면)




4. 선진화된 근대성에서는 부의 사회적 생산에 위험의 사회적 생산이 체계적으로 수반된다. 따라서 결핍사회의 분배의 문제들 및 갈등은 기술-과학적으로 생산된 위험의 생산, 정의, 분배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및 갈등과 중첩된다. (52면)




5. 체계적으로 말하자면 시간 차는 있을지라도 근대화가 지속되는 중에 ‘부를 분배하는’ 사회의 사회적 지위와 갈등은 ‘위험을 분배하는’ 사회의 그것들과 결합되기 시작한다. (54면)




6. 우리는 아직 위험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지만, 더 이상 결핍사회의 분배갈등 내에서만 살아가지도 않는다. (54면)




7. 오늘날의 문명이 낳은 위험들은 분명히 인지되지 않으며 (식료품에 포함된 유독물질이나 핵 위협과 같이) 물리-화학적 공식의 영역에 자리잡고 있다. ... 오늘날의 위해들은 산업적 과잉생산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55면)




8. 이것은 이제까지 과학과 법에 의해 확립되어 온 위험의 산정방법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56면)




9. 이 위험은 지식 내부에서 변화될 수 있고, 과장될 수 있고, 각색되거나 축소될 수 있다. 그만큼 이 위험은 사회적으로 정의되고 구성될 소지를 특히 많이 지니고 있다. 이로부터 대중매체 및 위험을 정의할 책임을 지고 있는 과학 전문가와 법 전문가가 핵심적인 사회-정치적 지위집단이 된다. (57면)




10. 승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근대화의 위험은 거대한 사업거리이다. 위험은 경제학자들이 오랫동안 찾아 온 탐욕스러운 수요이다. (58면)




11. 루만(Luhmann)을 따르자면 위험의 도래와 함께 경제는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과 무관하게 ‘자기연관적’으로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8면)




12. 사람들은 부를 소유할 수 있지만 위험에 의해서는 단지 영향받을 수 있을 뿐이다. (59면)




13. 계급과 계급지위에서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반면에, 위험지위에서는 의식(지식)이 존재를 규정한다. (59면, 103면)




14. 위험의 위해성을 객관적으로 조사할 수 있다는 과학의 합리성 주장은 그 자체가 영원한 논박 대상이다. (67면)




15. 위험에 대한 토론을 조금이라도 의미있게 진행하려면 도덕적 관점을 전제해야만 한다. (67면)




16. 핵발전소의 안전에 관한 연구들은 발생가능한 사고에 기초하여 특정한 수량화할 수 있는 위험들의 평가로 제한되고 있다. 위해의 차원들은 처음부터 기술적 관리가능성으로 한정된다. 몇몇 과학자 모임들은 아직 기술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위험은 적어도 과학적 산정이나 법률적 산정의 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67면)




17. 다른 말로 하면 위험 논의에서 명확해지는 것은 문명의 위대한 잠재력을 다루는 과학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 사이의 균열과 격차이다. 양자는 서로의 능력범위를 넘어서서 이야기한다. 사회운동은 위험 기술자들이 전혀 답하지 않는 문제들을 제기한다. 기술자들은 실제로 질문한 요점과 대중이 우려하고 있는 문제점을 놓친 답변을 제시한다. 과학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은 실제로 분리되지만, 동시에 서로 결합되며 의존한다. 엄격히 말해서 이 같은 구분은 점점 더 불분명해지고 있다. 마치 위험에 관한 사회적 논의와 인식이 과학적 논쟁에 의존하는 것처럼, 산업발전의 위험에 대한 과학적 관심은 사실상 사회적 기대와 가치평가에 의존한다. (68면)




18. 유명한 문귀를 빌어서 말하자면, 사회적 합리성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며,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 (69면)




19. 위험의식의 중심은 현재에 있지 않으며 미래에 있다. 위험사회에서 과거는 현재에 대한 규정력을 상실한다. 그 자리는 미래가 차지하며, 존재하지 않으며 고안된 가공의 무엇이 현재의 경험과 행동의 ‘원인’으로서 등장한다. 내일과 모레의 문제와 위기를 예방하고 약화시키거나 주의하기 위해, 또는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오늘 행동하게 된다. (74면)




20. 위험분배의 역사는 부와 마찬가지로 위험이 계급유형에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만 그 방향은 서로 반대이다. 즉 부는 상층에 축적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 그런 만큼 위험은 계급사회를 폐지하지 않고 강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빈곤은 불행하게도 위험을 만연시킨다. 그와 반대로 (수입, 권력 또는 교육의 면에서) 부자는 위험으로부터의 안전과 자유를 사들일 수 있다. (75면)




21.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 객관적으로 위험은 그 범위 내부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등화 효과를 보여 준다. 위험이 새로운 정치력을 갖게 되는 것은 정확히 그 같은 효과 안에서이다. 이런 점에서 위험사회는 정확히 계급사회가 아니다. 위험사회의 위험지위는 계급지위로 이해될 수 없다. 또는 그 갈등은 계급갈등으로 이해될 수 없다. (77면)




22. 조만간 위험은 위험을 생산하거나 위험에서 득을 보는 사람들도 따라잡을 것이다. 위험은 사회적 부메랑 효과를 보이면서 확산된다. 즉 부자나 권력자들도 그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78면)




23. 비료와 화학물질의 사용에 비교하여 산출량의 상당히 적은 증대는 자연의 파괴가 대단히 크게 진행되었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루는 데, 농부는 그 변화를 눈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이처럼 경계해야 할 발전의 두드러진 지표는 많은 야생 동식물 종의 뚜렷한 감소이다. (79면)




24. 이처럼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차효과’가 그 원인인 생산의 본거지 자체를 위험하게 하는 볼 수 있는 일차효과가 되고 있다. 근대화 위험의 생산에는 부메랑 곡선이 따른다. (79면)




25. 부메랑 효과는 개별 자원들을 직접 공격할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평등주의적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80면)




26. 산업적 위험과 파괴는 국경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83면)




27. 동시에 위험을 규정하는 ‘관리’도구들이 날을 갈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도끼날이 허공을 가르고 있다. 위험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괜한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그리고 위험의 생산자라는 중상을 받게 된다. 그들이 제시한 위해는 ‘증명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 위해가 인간과 동물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그들의 실증은 ‘엉뚱할 정도로 과장된’ 것으로 취급된다. 현재 상황이 어떠하며 취해야 할 적합한 조치는 어떠한 것인가를 분명히 할 수 있으려면 더 많은 연구가 행해져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과학에 대한 비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비합리주의’로 낙인찍힌다. (91, 92면)




28. 위험은 더 이상 기회의 어두운 면이 아니며 오히려 시장기회이다. 위험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위험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과 그로부터 이윤을 얻는 사람들 간의 적대감이 발전한다. 지식의 사회적-경제적 어려움이 비슷하게 커가며, 그와 함께 지식을 구성하고(과학과 연구) 퍼뜨리는(대중매체) 미디어에 대한 권력이 커진다. 위험사회는 이런 점에서 과학과 미디어와 정보사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새로운 적대는 위험의 정의를 생산하는 사람과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된다. (93면)




29. 계급사회가 국민국가로 조직될 수 있다면, 위험사회는 궁극적으로 국제연합(UN) 내에서만 구성될 수 있는 ‘위난공동체’를 낳는다. (95면)




30. 계급사회는 그 발전동학에서 (‘기회의 평등’에서 사회주의적 사회모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형성되는) 평등의 이상과 계속해서 관련을 맺는다. 위험사회는 그렇지 않다. 그 기초이자 원동력인 규범은 안전(safety)이다. ‘불평등한’ 사회의 가치체계의 자리는 ‘불안한’ 사회의 가치체계로 대체된다. 평등의 유토피아가 사회변화의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목표로서 부를 포함한다면, 위험사회의 유토피아는 특히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성격을 지닌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좋은’ 것을 획득하는 데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그보다는 최악의 것을 예방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97면)




31. 계급사회의 동력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나는 배고프다! 다른 한편 위험사회에서 작동하는 운동은 이런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나는 두렵다! 불안(anxiety)의 공동성이 필요의 공동성의 자리를 차지한다. (98면)




32. 한때 부의 원천으로 상찬되었던 것들(원자력, 화학, 유전자 기술 등)이 예측할 수 없는 위난의 원천으로 변천된다. (101면)




33. 위험은 지식의 위험이기 때문에 위험의 인식과 위험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107면)




34. 위험의 정의는 언제나 새롭게 해석될 수 있고 우연히 고안될 수 있으며 끝없이 재생산될 수 있다. 따라서 위험사회의 승리와 함께 생산과 소비가 완전히 새로운 수준에 오르게 된다. 상품생산의 준거점으로서 미리 주어지며 조작가능한 수요가 누렸던 지위가 자가생산할 수 있는 위험으로 양도된다. (108면)




35. 위험에 관한 과학적 조사는 어디서나 환경과 진보와 문화의 전망에서 산업체계에 대해 가하는 사회비판의 뒤를 절름거리며 따라간다. 이런 의미에서 위험에 관한 기술-과학적 관심에는 언제나 개종자의 드러내지 않는 문화비판적 열망이 상당한 정도로 포함되어 있다. 위험 인식의 합리성을 독점하려는 공학 측의 주장은 루터교로 개종한 교황이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111, 112면)




36. 나의 명제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비판의 기원은 비평가의 ‘비합리성’이 아니라, 성장하는 문명의 위험과 위협에 직면한 기술-과학적 합리성의 실패에 있다는 것이다. 이 실패는 그저 과거의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문제이며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112면)




37. 과학은 결코 문명의 위험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이 바로 그 위험의 기원과 성장에 주도적으로 개입해 있기 때문이다. (112면)




38. 위험의 생산과 그에 대한 오해는 기술-과학적 합리성을 마치 외눈박이 거인처럼 경제적으로만 추구하는 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 외눈박이 거인의 눈은 생산성의 향상만을 본다. 이 때문에 이 거인의 눈도 체계적으로 형성된 위험에 대한 맹목성에 의해 상처를 입는다. (114면)




39. 과학은 과잉전문화의 체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 위험은 전문화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129면)




40. 여기서 목표집단으 새로운 자율성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에 기초하고 있으며, 가능한 과학적 해석의 저발전이 아니라 그 분화와 극복잡성에 기초하고 있다. ... 이러한 자율화 경향을 보여 주는 중요한 지표는 무엇보다도 지식원천의 특수한 다원화와 그에 대한 방법론의 비판적인 성찰이다. (273면)




41. 위험의 비판은 규범적인 가치비판이 아니다. 바로 전통과 가치가 악화된 곳에서 위험은 태동한다. 비판의 기초는 과거의 전통보다는 미래의 위협이다. (27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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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1996년 12월
평점 :
절판


 

1. 그의 시선은 언제나 약자들의 운명으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약자들을 보는 그의 눈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안으로부터였다. 그러기에 그는 현실에서 끝없이 억압받고, 상처받는 약자들의 처지 때문에 분노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도, 동시에 풀뿌리 민중이 그러한 핍박 속에서도 서로 보살피고 상부상조하는 인간적인 유대 가운데서 삶의 근원적인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것을 주목할 수 있었다. (김종철, 7면)




2.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알맞게 살아갈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모두 부당한 것입니다. 내 몫의 이상을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니까요. (10면)




3. 한 20여년 전, 친구한테 얘기했던 게 생각난다. 내용은 내가 만약 교회를 세운다면, 뾰족탑에 십자가도 없애고 우리 정서에 맞는 오두막 같은 집을 집겠다. (22면)




4. 어쨌든 교회는 70년대에 들면서 갑자기 권위주의, 물질만능주의, 거기다 신비주의까지 밀려와서 인간상실의 역할을 단단히 했다. 조용히 가슴으로 하던 기도는 큰 소리로 미친 듯이 떠들어야 했고, 장로와 집사는 직분이 아니라 명예가 되고 계급이 되고 권력이 되었다. (24면)




5. 함께 일하지 않고는 일주일 계속 책상머리에 앉아 설교준비를 해도 고통받는 사람들엑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설교를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부 사정은 동무과부만이 안다. 일하지 않고는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른다. 일주일 동안 일을 하고 나면 주일날 그야말로 넘치도록 충만한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하면서 시간 있는 대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면 구태여 40일간 금식기도를 안해도 영혼의 양식을 구비할 수 있다. (41면)




6. 가장 겸손한 삶은 이웃과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42면)




7. 예수는 종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거지와 친구가 되자면 거지가 되어야 하고, 과부 사정은 동부과부가 가장 잘 안다. 훌륭한 사람이란 바로 상대와 가장 가깝게 사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상대는 바로 억울하게 고통당하고 있는 나의 이웃들이다. (52면)




8. 이 세상에서 진정 공생의 길을 찾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모두가 참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그 누구나 그 무엇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다. 우리의 모습이 본래부터 하느님이었는데 세삼스레 하느님이 되려고 하는 노력은 가장 우둔한 짓이다. 가장 사람다운 삶과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다. (60면)




9. 결국 이웃돕기는 같은 가난한 사람들끼리 아껴 쓰며 나누는 길뿐이다. (62면)




10. 말의 낭비나 돈의 낭비는 거짓을 갖추려는 인간의 권위와 허영에서 비롯된 것이다. 똑같은 음식도 단돈 천원에 사먹는 것보다 만원에 사서 먹으면 위대한 장부가 된 것처럼 착각에 빠지는 것이 인간이다. 아무리 위대해 봤자 인간은 결국 졸장부밖에 되지 못한다. (75면)




11. 진정한 혁명은 자신의 삶이 바로 서야 한다. (1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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