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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체계와 법 ㅣ 고려대학교출판부 인문사회과학총서 42
이상돈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0년 10월
평점 :
1. 이 책은 최근 사회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의료체계의 중심축인 의료보험, 의약분업 그리고 의료사고로 인한 분쟁의 해결제도에 대한 법철학적, 법이론적 및 법사회학적 접근을 통하여 - 때로는 정치철학적 접근을 통하여 - 의료체계의 개혁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먼저 나는 ‘생활세계-사회체계’의 사회분석틀을 제공하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또는 대화이론)을 끌어들이고 또 그것을 응용하여 ‘의료생활세계-의료체계’라는 개념을 새로이 만들었다. 이 이론틀에 의해 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나라의 의료정책이 형성해 온 의료체계가 의사와 환자가 만나는 사회적 공간, 즉 의료생활세계를 권력과 자본의 논리로 왜곡시켰다(의료생활세계의 식민지화)는 매우 비판적인 명제를 제안한다. (1면)
2. 예컨대 현재 주류가 되어 있는 의료법정책의 바탕에는 재정의 결핍이 만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의료보장체계를 ‘상징적’으로나마 관철하려는 기획이 숨어 있는데, 이 기획은 권력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러나 정치체계가 시민사회에 대해 약속한 사회적 의료보장을 관철하기 위해 의료영역을 보험재정적 관점에서 권력적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기획은 의료영역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그 왜곡의 결과는 의료공급기구들로 하여금 시민사회를 다시 희생양으로 삼게 만드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된다. 의료전달체계의 왜곡이나 공격적인 병원경영은 그런 악순환의 표피적인 한 증상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이 악순환은 의료체계를 짜는 입력제도인 의료보험제도나 의약분업제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제도로 짜여진 의료체계에서 발생하는 의료사고로 인한 분쟁, 즉 출력문제를 해결하는 각종 법제도(의료책임법, 의료보험법, 의료형법)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1면, 2면)
3. 나는 의사와 환자의 만남을 치료적 대화로 규정짓고, 이 구조적 해명을 바탕으로 하여 의료체계는 의료생활체계와 단절된 사회체계, 그러니까 예컨대 기능적 합리성이나 경제적 합리성만을 추구하는 사회체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비판적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의료체계는 의료생활체계의 논리, 즉 대화적 재생산의 논리를 닮은 모습의 사회체계, 즉 대화적 구조로 짜여진 사회체계이여야 한다는 기획을 세운다. (2면)
4. 응용이론을 통하여 기초이론은 비로소 더 ‘구체화’되고, 더 ‘현실화’된다. 이것은 응용이론이 기초이론에 대해 창조적 기능을 갖고 있음을 말해 준다. (4면)
5. 결국 의사와 환자의 상호주체성이란 의사와 환자가 치료적 대화를 온전하게 펼칠 수 있는 의사소통적 교류(의 전제조건들)를 의미할 수 밖에 없다. (7면)
6. 이와 같은 의료관계의 상호주관적 이해로부터 이른바 의업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진다. 흔히 의사의 포괄적인 의료권을 의업권이라고 표현한다. ... 다시 말해 의업권은 고립된 주체로서 의사 개인에게 의료의 자유를 부여하는 (단지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자유권적 기본권’이 아니라 의사가 환자와 ‘함께’ 의료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자율영역’을 보장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자율영역을 의료생활체계라고 부를 수 있다. (7면)
7. 일반적인 의료행위규범은 어떤 의료행위가 의학의 발전수준을 고려할 때 ‘올바른’(richtig) 의료행위인지를 규정하는 반면에, 구체적인 의료행위규범은 어떤 의료행위가 특정한 환자의 특정한 병을 치료하는 개별적인 진료상황에 ‘적절한’(angemessen) 것인지를 규정한다. (9면)
8. 의료생활세계의 구조적 요소: 자율적 의료행위 규범, 의료인격(의과대학의 자치), 성찰적 의료문화. ... 의료행위규범, 의료인격, 의료문화는 의료생활세계라는 개념의 집을 떠받드는 세 가지 기둥이 될 수 있다. (12, 13면)
9. 우리의 의료생활체계가 어떻게 - 의료보험관련법규와 의약분업관련법규를 조종매체로 삼는 - 정치체계의 권력논리와 경제체계의 자본논리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의미구조를 정상적으로 재생산하지 못하는 병리적 현상을 겪게 되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15면)
10. 정치권력은 재정현실을 무시하고 시민에게 낮은 보험료만으로 높은 의료서비스가 보장된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의 권력재생산은 단기적으로는 시민사회에 우호적인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시민사회에 대해 불리하다. 왜냐하면 민간의료시장을 허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낮은 의료수가를 강제하는 것은 의료공급기구들의 수익성 악화를 가져오고, 이를 피하기 위해 의료공급기구들은 시민사회에 대해 ‘공격적 경영’을 감행하게 되고, 시민들은 그런 경영의 수동적인 피해자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17면)
11. 의약분업은 의약품의 오남용방지를 통한 ‘국민건강의 보호’라는 이익보다 (병원-약국-병원을 오락가락하는) 번거로운 외래이용을 기피하는 시민들의 경향(의 증대)을 이용하여 국민의료비의 감소나 (현재 매우 부실상태에 빠져 있는) 의료보험재정의 건실화와 같은 ‘경제적 이익’을 겨냥한 전략이 아니냐는 의혹이 의료계에 점점 더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다시 말해 의약분업정책은 사회보장적 의료체계의 재정보완정책이며, 정치체계의 시민사회에 대한 사회보장약속의 ‘상징성’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23면)
12. 그러나 진료의 보편적 규격화란 의료인이 환자와의 대화과정에서 최선의 진료라고 판단되는 행위를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26면)
13. 그러나 의료시장의 구조가 수익성을 보장하지 않고, 심지어는 수익성을 고갈시키는 통제되고 ‘사회화된 시장구조’ 위에 서 있는 경우에는 의료공급체계는 이른바 ‘공정한 경쟁’의 방법에 의해 스스로는 기능화할 수 있는 자본을 재생산할 수 없다. 여기서 의료공급기구들은 시민사회에 대하여 ‘공격적’ 경영을 펼치게 된다. 예를 들면 의료수가가 낮은 진료를 기피한다든지, 불법적인 임의비급여를 확대한다든지, 불필요한 진료(특히 각종 검사)를 환자에게 행하는 왜곡된 현상이 빚어진다. 또한 이를 위하여 의료기관간에 무분별한 첨단장비의 도입 경쟁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런 경쟁은 의료기관간의 협동적 기능분화(이른바 의료전달체계)를 가로막고, 갈등적 경쟁관계를 촉진시킴은 물론 전공과목별 의료인력의 균형있는 공급도 왜곡시켜버린다. (28면)
14. 그 결함은 평등의 이념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변증적으로 지양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 바로 여기에 자유는 누리되 평등을 지향하고, 평등은 누리되 자유를 지향하는 변증적 교류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요구됨을 알 수 있다. (36, 37면)
15. 여기서 대화윤리란 어떤 실체적인 내용의 특정(의료)윤리를 대화적 방식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대화윤리란 (도덕적) (의료) 행위규범 자체가 오직 그 규범에 관련되는 모든 개인들이 자유롭고 기회균등하게 의견을 교환한 가운데 ‘더 나은 근거’가 (서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되, (서로) 그 의견을 수용하는 의사소통적 과정, 즉 상호이해로 지향된 합의형성적 의사소통적 방식으로만 정당한 규범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요청은 복잡한 경제현실, 탈중심화된(다원화된) 문화, 다층적인 맥락의 사회로 특징되는 현대사회에서도 시민들이 수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핵심윤리가 된다는 점을 가리킨다. (42면)
16. 이와 같은 의료교육목표의 방향선회는 의사나 환자의 ‘인격’을 개인적인 차원의 도덕적 함량(치료적 대화에 지향된 상호작용의 능력)이 아니라 모든 의료주체들이 의료행위가 펼쳐지는 삶의 세계를 대화적 방식으로 함께 구성하는 ‘의사소통의 역량과 권한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게 만든다. (42면)
17. 이런 점에서 의사인격과 환자인격은 대화적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정체성이 - 의사와 환자의 입장에서 각각 비춰질 때 - 나타나는 의사소통적 주체성 이외에 다름 아니다. (43면)
18. 의료영역에서 법의 정당성이 이처럼 ‘내용적으로’(또는 실체적으로)가 아니라 ‘절차적으로’ 창출된다는 점은 법철학의 현대적 논의에 깊이 들어감이 없이도, 쉽게 그리고 소박하게 이해될 수 있다. ... 이러한 현실은 탈형이상학화되고, 다원화되고, 통일적인 패러다임이 상실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전통적 권위(예: 관료의 권력, 의료인의 전문적 및 직원윤리적 명망)가 세계를 지배했던 사회에서와는 달리 어떤 주체도 의료법규범을 독점적으로 정립할 권위를 가질 수가 없다. 여기서 민주적 규범형성이 자연스럽게 대안으로 남게 된다. (50면)
19. 의료공론영역에서 형성되는 합의는 일방의 견해가 타방의 견해보다 비판과 토론의 과정을 거쳐 ‘더 합리적인 근거’로 자리매김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있는 주장으로 (상호)승인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자발적 준수를 동기화하는 역량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료시민사회와 의료공론영역에서 의사소통은 정당한 권력의 근원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런 권력을 ‘의사소통적 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51, 52면)
20. 정치체계는 바로 이와 같은 의사소통적 권력을 수용할 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정적 집행력도 확보할 수 있다. (52면)
21.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의료생활세계의 대화적 재생산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의료시민사회와 의료공론영역이 성장하고 활성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의료시민사회와 의료공론영역이 성장할수록 정치체계의 권력이나 (의료)경제체계의 자본이 의료영역을 왜곡시키는 것은 그 만큼 더 어려워지게 될 것이다. (52, 53면)
22. 의료재의 분배를 오로지 행정관료와 공공의료의 보험자에게 내맡길 경우에는 관료화의 일반적 병폐인 경직성과 비효율이 의료체계에 터잡게 되기 쉽다. (67, 68면)
23. 미국식의 체계는 자유에 편향되어 있고 한국식의 체계는 평등에 편향되어 있지만, 전자의 자유는 (특히 저소득층의) 시민들을 의료시장으로부터 소외시켰고, 후자의 평등은 시민들을 관료적 권위주의에 예속시킨다는 차이는 있으나, 두 체계가 모두 의사와 환자 사이의 치료적 대화를 (의사나 환자 개인의 인격적 결함과 같은 개별적인 차원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왜곡시킨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어 있다. (70면)
24. 의사든 환자든 자율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권력적인 이유에서 또는 금전적인 이유에서 의사와 환자가 질병의 치료를 위해 펼쳐야 할 이사소통과 상호작용이 굴절됨을 의미한다. (71면)
25. 공공의료부문에서 의료보호제도는 ‘최소진료’를 제공한다. 최소진료란 모든 국민이 헌법상 누리는 생존권적 기본권의 연장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최소한의 진료를 말한다. 공공의료보험제도는 사회보장적 프로그램으로서 ‘기본적 진료’(‘보편적 진료’)를 제공하게 된다. 이에 비해 민간의료보험은 이보다 높은 수준의 의료를 제공하게 된다. 즉, 민간의료보험제도는 흔히 병원경영자들이 말하는 ‘적정진료’를 재정적으로 조달하고, 개별의료계약에 의한 의료는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게 된다. (78, 79면)
26. 먼저 의료체계의 두 부문에서 의료서비스 공급의 주된 역할은 공공부문이 해야 하고 민간부문은 공공부문의 기능을 보완해주는 역할만을 떠맡아야 한다. 이와 같은 역할의 기능적 분담은 한편으로는 의료(재)의 공공적 성격, 즉 누구나 생존을 위해서는 누리지 않으면 안되는 재화(공공재)의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요청이며, 또한 시장기능이 실패하기 쉬운 의료서비스의 특성으로부터 나오는 요청이기도 하다. 또한 다른 한편, 이 요청은 인명에는 귀천이 없다는 전승된 문화적 법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요청이기도 하다. (81면)
27. 만일 미국사회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적 약자인 저소득층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면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통합 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은 그의 재정적 역량과는 상관없이 ‘기본적인’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요소, 즉 ‘능력’에 따라 기여(보험금, 세금)하고 ‘필요’에 따라 의료의 혜택을 누리는 사회체계를 사회국가적 기획 아래 수용한 의료체계, 즉 사회보장적 의료체계가 의료체계의 중심에 위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의료적 생존배려(Daseinsvorsorge)는 의료체계의 중심을 형성해야 한다. (81면)
28. 우선 민간의료체계는 의료를 자유시장에 방임하는 미국식의 민간의료체계가 아니라, 의료생활체계의 대화적 재생산에 기여하는 의료체계이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해두어야 한다. (9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