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는 사랑 용서받는 사랑
스즈키 히데코 지음, 이정남 옮김 / 성바오로출판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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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하데코 (이정남 ), 용서하는 사랑 용서받는 사랑

 

1. 우리는 행복이라고 하면 흔히 일이 있어야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것을 꿈꿉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미 행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생은 행복으로 가득 있습니다.

 

꿈꾸는 것은 하나의 사랑

바라는 것은 하나의 행복

그것들 모두 지금 당신 안에 가득하네.

 

그렇습니다.

사실을 당신가슴 속에 새겨 두기 바랍니다. (180, 181)

 

2. 자신을 안정시키고 기분 좋은 장소를 스스로 만들어가십시오. (177)

 

3.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때 있는 일을 하십시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하고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일을 해결할 있을까?“ 하고 자신에게 묻고, 당신이 있는 일부터 실천하십시오. (170)

 

4. 당신이 행복해질 것인가 아닌가는 깨달을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란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꿈꾸는 , 바라는 , 그것들이 사실은 지금 여기 있음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습니다. 창밖에는 눈부신 햇살이 비추고 있습니다. 당신 곁에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 인생도 괜찮은 편이네.“ 그렇게 한번 말해 보세요. (14)

 

5. 함께 산다는 것은 함께 먹는다는 것입니다. (69)

 

6. 기분 좋은 마음으로 인생을 더욱 즐겁게 사는 것은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작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스스로 좋은 선택을 계속하는 , 그것이 증오를 극복하는 첫걸음입니다. (74, 75)

 

7. 전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기운 없는 사람을 격려해 주는

미소를 짓는

함께 울어 주는

그냥 옆에 있어 주는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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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2 - 이데아총서 14
칼 R.포퍼 지음 / 민음사 / 198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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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포퍼, 열린 사회와 적들 II (이명현 )

 

1. 합리주의는 비판적 논증에 귀를 기울이며 경험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태도를 뜻한다. 따라서 그것은, „내가 잘못되고, 당신이 옳은지 모르겠소.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진리에 가까이 도달할 있을 것이오.“ 같이 말하는 태도이다. (315)

 

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뼈대를 이루는 목적론은 플라톤의 변화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낙관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라고 있다. 플라톤은 모든 변화는 원형인 완전한 형상 이데아로부터 점점 떨어져 가는 퇴화의 과정 파멸에로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와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는 궁극 목적을 향해 움직여 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궁극 목적은 다른 아닌 사물이 지닌 본질인데 그것을 형상이라고 그는 불렀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의 변화는 결국 사물이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본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24)

 

3. 현실화되려면 본질은 변화 속에서 자기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이것은 이념은 활동에 의해서 현실화된다는 헤겔의 주장으로 발전된다. (24)

 

4.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확실성을 지닌 지식을 이성의 정신적 눈을 통해 파악할 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지식관은 오늘의 과학적 지식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과학적 지식에 있어서는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지식은 없으며 오직 시험에 의해 확증된 가설과 이론이 있을 뿐인데, 이것은 새로운 경험적 사실에 의해 언제라도 수정되거나 제거될 있는 잠정성을 지니고 있다. (25)

 

5.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변화에 대한 이론의 수정이라는 점에 있다. 플라톤의 이론에 있어서 주요한 점의 하나는 형상, 본질, 원본은 감각될 있는 사물들에 앞서서 그리고 그것들과 떨어져서 존재한다고 보는 점이다. 감각적 사물들은 형상, 본질, 원본으로부터 자꾸 멀리 떨어져 가는 방향으로 운동한다. 이에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감각적 사물들은 그것들의 최종적 원인 혹은 목적을 향해 운동한다. 그리고 최종적 원인 혹은 목적이 바로 형상 혹은 본질이 사물 속에 있으며 플라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사물에 앞서서 그리고 사물과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모든 운동과 변화는 사물의 본질 속에 들어있는 잠재적인 것들을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 (32)

 

6. 비판적 합리주의는 이성을 존중하되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적 겸허를 지니고 있기에, 전통적인 합리주의자처럼 절대적 진리나 최종적 진리를 고집하거나 내세우는 지적 오만도 피우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성에 절망하여 감정과 정열에 모든 것을 내맡겨 버리지도 않는다. 논증과 경험을 인간지식의 탐구의 안내자로 삼되, 그것이 우리를 어떤 최종적 진리나 확고부동한 진리에 안내하리라는 지나친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인간은 상호비판을 통해 점점 세계의 진상에 가까이 접근해 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는 탐구에 몰두한다. 과학적 방법의 객관성을 높이 사지만 그것의 권위를 신주처럼 떠받들지도 않는다. 하늘 아래 수정가능성 앞에 개방되어 있지 않는 인간의 지식과 진리와 지혜가 없다고 그는 본다. 모든 것은 유한한 인간의 산물이므로, 이상의 것일 없기 때문이다. „ 자신을 알라 소크라데스의 권고는 비판적 합리주의가 있는 발바탕이다. (역자서문, 5)

 

7. 포퍼가 헤겔과 마르크스를 보는 관점은 바로 이러한 비판적 합리주의이다. 동일한 사물도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양이 여러가지로 달리 보인다는 것은 어린애도 아는 너무나 진부한 진리이다. 그러나 진부한 진리를 우리는 가끔 잊어버릴 때가 있다. 우리가 가끔 다른 사람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할 없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진부한 진리를 잊어 버렸을 때이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보았기에 동일한 사물도 달리 보일 밖에 없는데, 우리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보았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만 이상하다고 나무라기 일쑤이다. (역자서문, 5)

 

8. 포퍼는 역사주의를 질타한다. 그가 그것을 질타하는 까닭은 첫째로 역사주의는 역사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법칙에 의해 예언할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러한 주장은 점장이의 이야기와 크게 다를 없다고 본다. 그런 예측은 과학적 탐구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런 문제에 관해 이것도 저것도 그렇게 확실하게 말할 없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의 능력 밖의 일이다. 둘째로 그가 역사주의를 비판하는 까닭은, 그것은 우리가 확실히 알지도 못하는 어떤 필연적 법칙혹은 운명 인간을 가두어 놓음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왜소화할 아니라 인간의 창의적인 이성의 활동을 시들어 버리게 한다는 것이다. (역자서문, 5, 6)

 

9. 우리의 문명이 꺼지지 않고 계속 지탱하려면, 우리는 위대한 인간에 대해 그저 굽실거리기만 하는 버릇을 내던져 버려야 한다. 위대한 인간들도 실수를 저지를 있다. (8)

 

10. 이상 손댈 없이 완벽한 책이란 없다. 책에서 손을 떼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모자란 것을 발견한다. (10)

 

11.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가, 그리고 말의 의미 문제는 역사주의와 직접 연결된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이것은, 헤겔의 철학에 있어서 역사주의와 결합되어, 내가 예언적 철학 (주술적 철학, oracular philosophy)이라고 부르는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해로운 지적 질병을 퍼뜨리는 혼란의 원천이 되어 왔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겨 놓은 사상적 영향 가운데 가장 고약한 유산의 중요한 원천이며, 중세기 아니라 현대철학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출몰하는 말장난에 취해 있는 스콜라철학적 풍토의 원천이다. (35)

 

12.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사상의 발전은 이렇게 요약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법을 사용하는 모든 지적 작업은 말장난과 알맹이 없는 스콜라스티시즘에 사로잡혀 있으며, 여러가지 과학이 얼마나 진보를 성취할 있었느냐 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적 정의법을 털어 버릴 있었느냐에 달렸다. (35)

 

13. 과학의 행로에는 한 때 자명한 진리라고 선언되었다가 이제는 내버려진 이론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예를 들면 프란시스 베이컨은 태양과 별들이 명백히 정지된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조소하였다. (42)

 

14.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유효하게 무엇을 논의할 없다. 허송세월에 그치고 마는 많은 헛된 논쟁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의 뜻을 애매하게 알고서 상대방도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사실에 대부분 기인한다. 우리가 말을 정의하고 시작하면, 우리의 논의는 효과적일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신문을 들여다보면 선전 (수사학의 현대판) 말의 의미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혼동케 하는가에 달렸음을 발견한다. 만일 정치가들이 자기가 사용하고자 하는 말을 정의하도록 입법화한다면, 그들의 연설은 짧아질 것이며 그것의 대중적 인기도 줄어들며, 정치가들 사이의 의견의 대립도 대부분 순전히 언어에 기인하는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42)

 

15. 그리고 철학은 2천년 동안이나 말의 의미에 대해 걱정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애매하고 불명확한 말장난으로 가득차 있음에 반하여,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을 하지 않는 물리학과 같은 과학은 상당히 정확한 말을 사용한다는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낡은 신조에 매달려 있다. 이것은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말의 의미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고 나는 본다. (46)

 

16. 과학에 있어서 우리가 진술할 말의 의미에 의존하지 않도록 우리는 주의한다. 우리는 무슨 말을 정의할 때조차 정의로부터 정보를 끄집어내려 하거나, 정의 위에다 논지를 세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과학에 있어서 말이 그렇게 말썽을 부리지 않는가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말에 지나친 무게를 두지 않는다. 가능한 적은 무게를 부여하려 한다. 그리고 의미를 그렇게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말이란 어느 정도는 애매한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항상 인식하고 정확한 말을 쓰기 위해 애매성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감소하려 애쓰는 대신에, 말의 의미가 드리우는 여러 가지 음영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장을 엮어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에 관한 싸움을 피하는 방법이다. (46)

 

17. 정확성은 오차의 범위를 영으로 만들거나 오차가 전혀 없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있지 않고, 오차를 명백히 인식하는 있다. (46)

 

18.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동시성 같은 말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 있어서도, 화근은 말의 의미가 부정확하거나 애매한 있는 것이 아니라, 말에다가 너무 많은 의미와 너무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직관적인 이론에 있다. (47)

 

19. 헤겔의 이와 같은 철학적 방법이 놀라울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심각히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독일에 있어서 자연과학이 그만큼 낙후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당시의 진상을 말하자면, 헤겔의 이와 같은 방법을 쇼펜하우어나 프리스와 같은 엄격한 사람들이나, „페르시아의 국왕이 되느니보다 하나의 인과법칙을 발견하기를 원했던데모크리토스와 같은 과학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나는 본다. 세계에 대한 모든 비밀을 파헤쳐 놓을 없기 때문에 실망만 안겨 주는 과학의 전문적인 탐구보다도 세계의 비밀들을 곧바로 풀어 주는 비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헤겔은 커다란 명성을 휘날리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불모의 형식논리 대치한 헤겔의 변증법보다도 만능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헤겔의 변증법은 쉽사리 모든 문제에 적용할 있으며 동시에 엄청난 난해성 (비록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지니고 있긴 하나 신속하고 확실하게 척척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과학적 훈련이나 지식이 없이도 쉽사리 사용할 있으되 어마어마한 과학적 위험을 지니고 있다. 헤겔의 성공은 부정직의 시대 시작이며, „무책임의 시대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지적 무책임의 시대였다가 나중에는 귀결로서 도덕적 무책임의 시대가 되었다. 시대는 위세당당한 말의 주술과 전문적 조어의 힘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59)

 

20. 심리주의 (J. S. )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은 아마도 사회학자로서의 마르크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회학적 법칙의 보다 구체적 영역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율적인 사회학에 대한 보다 통찰력 있는 개념을 위해 길을 열어 놓았다. (130)

 

21. 심리주의, 사회생활의 모든 법칙은 궁극적으로 인간성의 심리적 법칙으로 환원될 있다는 그럴듯한 교설에 대한 마르크스의 반대 입장을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 그의 유명한 경구이다.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아니다. 차라리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존재이다.“ (134)

 

22. 심리주의의 주된 주장에 의하면, 사회적 관습을 포함한 모든 사회생활의 사건들은 개인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동기들의 결과요, 따라서 상호작용하는 마음들의 산물이므로, 사회적 법칙은 궁극적으로 심리적 법칙으로 환원될 있다. 이러한 심리주의 교설에 반대하여 자율적 사회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제도주의적 견해를 제안한다. 그들은 어떤 행동도 동기에 의해서만은 설명될 없다는 점을 먼저 지적할 있다. 동기 (혹은 다른 심리적이나 행동주의적 동기) 설명에 사용될 있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상황 특히 환경에 대한 참조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인간행동의 경우에 있어서 환경은 대체로 사회적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행동은 사회적 환경, 사회적 제도와 그것들의 사회적 기능방식에 대한 참조 없이는 설명될 없다. 그러므로 사회학은 행동에 대한 심리학적 혹은 행동주의적 분석에로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제도주의자는 논한다. 차라리 그런 분석은 사회학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사회학은 심리적 분석에 전적으로 의존할 없다. 사회학 적어도 사회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은 자율적이어야 한다. (135, 136)

 

23. 그러므로 사회의 모든 현상은 인간성의 현상이다라고 밀은 말했다. 그리고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법칙들은 인간존재의 정열과 행동의 법칙 , 개별적 인간성의 법칙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은 서로 합쳐놓았다 해서 다른 종류의 실체로 바뀌어지는 것은 아니다.“ 밀의 마지막 말은 심리주의의 가장 찬양할 만한 측면의 하나를 보여 준다. 그것은 집단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건전한 반대의 표명이며, 루소와 헤겔의 낭만주의 (일반의지나 민족정신 혹은 집단의식) 의해서 감명되기를 거부하는 자세를 말한다. 심리주의는 방법론적 집단주의 반대되는 방법론적 개별주의 일컬을 있는 것을 주장하는 한에서만 옳다고 나는 믿는다. (137)

 

24. 인간성에 관한 충분한 근거들이 제시되기까지는 사회과학에 있어서 일반화는 하지 말아야 하므로, 인간성에 대한 원리와 인간이 놓여 있는 위치에 대한 일반적 상황들로부터 인간의 발전의 순서를 선험적으로 결정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의 일반적 사실들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J. S. ) (137)

 

25. 인간 ( 인간의 마음, 욕구, 희망, 공포, 기대, 개별적 인간의 동기와 야망) 모두는 사회의 창조자라기보다 산물이다. 우리의 사회적 환경의 구조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제도들과 전통은 자연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결정의 결과들이며 인간의 행위와 결정에 의해 변화될 있는 것이라는 것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요구와 희망이나 동기 등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설계된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에 의해서 설명될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138, 139)

 

26. 아마도 심리주의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판은 설명적 사회과학의 주된 과제를 그것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있다. (139)

 

27. 마르크스의 경제적 역사주의에 대한 해설은 마르크스와 J. S. 밀을 비교함으로써 쉽사리 이루어질 있다. 사회현상은 역사적으로 설명될 있으며 모든 역사적 시기를 이전의 역사적 산물로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는 믿음을 사람이 같이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가 밀로부터 떠나는 점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헤겔의 관념론에 맞먹는) 밀의 심리주의이다. 밀의 심리주의 대신에 마르크스는 그가 유물론이라고 부른 것을 내세웠다. (150)

 

28. 자본론에 유명한 귀절이 있는데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헤겔의 저술 속에서는 변증법이 머리로 있다. 우리는 다시 그것을 바로 세워 놓아야 한다.“ 귀절의 방향은 분명하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머리 인간 사고 자체는 인간의 삶의 토대가 아니라 물리적 토대 위에 있는 상부구조이다. 비슷한 경향이 다음 귀절에도 표현되어 있다. „이상적인 것이 인간의 머리 속으로 자리를 바꾸어 번역되면 그것은 다름아닌 물질적인 것이다.“ (151)

 

29. 우리가 성취할 있는 것은 심신을 고갈시키며 품위가 전혀 없는 노동의 조건들을 개선하며, 인간의 값에 보다 어울리도록 그런 조건들을 만들며, 그것들을 균등화하며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있도록 하는 범위까지 잡역을 줄이는 일이다. 이것이 삶에 대한 마르크스의 중심 사상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교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이라고 나는 믿는다. (152)

 

30. 마르크스는 헤겔에 반대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역사와 심지어 사상사의 실마리는 인간과 그의 자연환경, 물질세계 사이에 나타나는 관계의 발전과정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의 정신적 삶에서가 아니라 경제적 속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때문에 우리는 마르크스 류의 역사주의를 헤겔의 관념론이나 밀의 심리주의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경제주의라고 묘사할 있다. (153)

 

31. 중심과제는 생산조건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는 일이다. (154)

 

32. 그의 헤겔적인 성장과정 때문에 그는 실재와 현상, 본질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이라는 고대의 구별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헤겔 (그리고 칸트) 수정을 가하여 형성된 그의 견해는 실재와 물질적 세계 (인간의 신진대사를 포함하여) 동일시하며 현상을 사상과 관념의 세계와 동일시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상과 관념은 밑바닥에 놓여 있는 본질적 실재 경제적 조건에 환원함으로써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견해는 어떤 다른 형태의 본질주의보다 많이 나은 점이 확실히 없다. 그리고 방법의 영역에서 파급효과는 경제주의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초래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경제주의가 지닌 일반적인 중요성은 결코 지나치게 평가되기란 대단히 어렵지만 어떤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 경제적 조건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기는 매우 쉽기 때문이다. (156)

 

33. 마르크스의 견해에 따르면 법적 혹은 정치적 수단에 의해 중요한 변화가 초래될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정치적 혁명은 집단의 지도자들로부터 다른 집단의 지도자들에로의 이행, 통치자로 행세하는 사람들의 단순한 교체에 그칠 뿐이다. 밑바닥에 놓인 본질인 경제적 실재의 변화 만이 본질적 변화 혹은 진정한 변화, 사회적 혁명을 낳을 있다. „그러면 사회적 혁명이 실재가 되었을 때만 정치적 혁명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된다.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더불어, 전면적인 상부구조의 변화가 신속히 이루어진다. 새롭고 보다 고차적인 생산관계 (상부구조 안에서) 그것이 존재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이 사회의 모태에서 성숙되고 나서야 출현한다.“ 이러한 진술에 비추어 러시아 혁명은 마르르스가 예언한 사회혁명과 동일시될 없다고 나는 믿는다. 사실에 있어서 그것들은 서로 아무 유사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157, 158)

 

34. 마르크스에 의하면, 어떤 제도적 혹은 객관적 의미에서의 계급이익은 인간의 마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헤겔의 말투로 말하면, 계급의 객관적 이익은 구성원의 주관적 마음 속에 의식화된다고 말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계급적 관심과 계급적 의식을 불러일으키며 또한 그렇게 행동하도록 한다. 제도적 혹은 객관적 사회적 상황으로서의 계급이익과 인간의 마음에 미치는 그것의 영향에 관해, 마르크스는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아니다. 그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차리리 그의 사회적 존재이다.“에서 서술하고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사회 안에서 있는 장소, 그의 계급적 상황 바로 그것이다 라고. (163)

 

35.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는 자기의 계급상황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계급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계급의 역사적 임무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계급이 수행하는 백절불굴의 투쟁이 보다 좋은 세계를 초래하리라고 굳게 믿는 노동자이다. (167)

 

36.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각각의 내부에서 나타나는 이해관계의 분규를 생각해 보면, 마르크스의 계급론은 너무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성을 지닌 주장이라고 보지 않을 없다. (168)

 

37.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마르크스의 진술이 지닌 위험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모든 정치적 투쟁이 착취자와 피착취자 간의 투쟁으로 해석하도록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몰고 간다는 점이다. (168)

 

38. 자본론의 서평자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얼른 보면, 책의 저자는 관념론자라는 말의 나쁜 의미에서의 독일 관념론의 거물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있다. 그러나 실상 그는 그의 선배 어떤 사람보다도 엄청나게 현실적이다.“ 서평자는 정곡을 찔렀다. 마르크스는 거대한 전체론적 체제의 설립자들 중의 마지막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놔두어야 한다. 그것을 다른 거대한 체제로 대치하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체론 holism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점진적 사회공학이다. (189)

 

39. 마르크스의 예언적 논증의 둘째 단계의 전제는 가장 적합한 가정인데, 자본주의는 수가 점점 줄어드는 부르죠아의 수의 증가와 수가 점점 늘어나는 노동계급의 빈곤의 증가를 초래한다는 가정이다. … 부르죠아와 프롤레타리아를 제외한 모든 계급, 특히 소위 중산계급은 사라지게 마련이며 부르죠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에 점증하는 긴장의 결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점점 계급의식화하며 더욱 단결력이 강화게 된다. 둘째 부분은 이러한 긴장은 도저히 제거할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212)

 

40. 계급 사이의 분명한 구별이 나타나리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의 예언과는 반대로 그의 가정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계급구조가 나타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1. 부르죠아, 2. 대지주, 3. 기타 지주들, 4. 농촌노동자, 5. 중산계급, 6. 산업노동자, 7. 천민노동자 (또한 이런 계급들의 혼합형태도 나타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의 발전은 산업노동자들의 단결을 저해할 수도 있다. (215)

 

41. 자본론의 주된 교설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적대관계는 필연적으로 증가되며 사이의 타협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개선될 없고 오직 파멸될 밖에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마지막으로 자본가의 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요약하는 자본론의 중심적인 귀절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발전의 모든 혜택을 강탈하고 독점한 자본주의 유력자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빈곤, 압박, 노예화, 비하, 착취의 범위도 늘어난다. 동시에 수가 차츰 늘어나며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바로 매커니즘에 의해 훈련되고 통일되고 조직된 노동계급의 반역의 분노도 차츰 높아진다. 궁극적으로 자본의 독점은 그와 함께 그리고 아래서 성장한 생산방식에 족쇄를 채운다. 소수의 손에로의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적 조직화는 자본주의적 외투가 하나의 질곡으로 전환되는 지점에 도달한다. 그것은 드디어 산산조각이 난다. 자본주의자의 사유재산의 시간은 이제 되었다. 징발한 자는 징발당한다.“ (220)

 

42. 이러한 온건한 이론은 예언적 논증을 통째로 뒤집어 놓는다고 나는 본다. 그것은 타협의 가능성과 자본주의의 점진적 개혁의 가능성, 그리하여 계급적 적대관계의 감소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러나 예언적 논증의 유일한 기초는 계급적 적대관계가 증가한다는 가정이다. 타협에 의해 성취되는 점진적 개혁이 자본주의 제도의 완전한 파괴로 귀결된다는 논리적 필연성은 없다. 그리고 점진적 개혁에 의하여 그들의 운명을 개선할 있다는 것을 경험에 의해 알게 노동자들이, 비록 그러한 방식이 지배계급의 굴복이라는 완전한 승리는 거두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방법을 계속해서 채택하지 않으리라는 논리적 필연성도 없다. 또한 노동자들이 폭력적인 충동으로 귀결되기 쉬운 요구를 함으로써 그들의 이익을 희생시키기보다는, 부르죠아와 타협해서 부르죠아에게 생산수단을 소유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논리적 필연성도 없다.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이라곤 그들의 족쇄 밖에 아무 것도 없다고 우리가 가정할 때만, 그리고 빈곤의 증가법칙이 타당하며 그것은 적어도 개선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우리가 가정할 땜에만, 노동자들이 체제 전체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감행하지 않을 없게 것이라고 우리는 예언할 있다. 사회혁명에 대한 진화론적 해석은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논증을 첫단계부터 마지막까지 파괴한다. (222)

 

43. 저임금, 장시간 노동, 어린아이들의 노동은 마르크스가 예언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노년기의 특징이 아니라, 자본주의 유년기의 현상이다 (팍스). (257)

 

44. 방만한 자본주의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마르크스의 시대 이후로 민주주의적 간섭주의는 엄청난 진보를 이룩했다. 노동생산성의 개선은 (자본축적의 하나의 결과인) 실제로 비참을 없애 버리게 하였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여러가지 커다란 잘못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이 성취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 많이 개선될 있다는 신념을 우리가 가질 있게 한다. 해야 일과 방지해야 일이 많이 있다. 민주주의적 간섭정책 만이 그것을 가능케 있다. 그것을 하는 것은 우리의 어깨에 달려 있다. (257)

 

45.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교묘하게 꾸민 보조가설을 동원하여 그들이 예언했던 바와 같이 비참의 증가법칙이 실현되지 않았는가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보조가설에 따르면, 이윤율의 하락추세, 그와 함께 비참의 증가는 식민지 착취의 영향, 보통 말하는 대로 하면 현대 제국주의에 의해서 저지되었다는 점이다. … 아담 스미스는 식민지무역이 이윤율을 높이는 반드시 기여한다고 이야기했다. 엥겔스는 …. 영국이 전세계를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연유한다고 암시했다. 그리고 그는 영국의 노동자계급이 그가 예측한 대로 고통을 받는 대신에 점점 부르죠아가 되어 가고 있다는 냉소적인 말로 공격했다. „모든 나라 가운데서 최고의 부르죠아인 이들은 부르죠아적 귀족과 부르죠아적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죠아와 나란히 앉아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기를 원한다.“ (258)

 

46.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중산층과 하층 부르죠아들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들며 노동자들을 극빈자로 졸아들게 한다고 하여 자본주의를 규탄하였다. 지금 와서 엥겔스가 자본주의를 규탄하는 까닭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부르죠아로 만든다는 것에 있다. (258)

 

47. 사회민주당원은 그동안 진행된 너무나 명백한 사실들의 압력에 이겨 비참의 강도가 증가한다는 이론을 조용히 내버렸다. … 공산주의자들의 처지는 달랐다. 그들은 비참의 증가이론을 확고하게 붙드고 있었다. (259, 260)

 

48. 마르크스가 많은 것을 제대로 보았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그가 바와 같은 방만한 자본주의 제도는 그렇게 오래 계속되지 않으리라고 그의 예언과, 그것이 오래 가리라고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틀렸다는 그의 예언만을 고려한다면, 그가 말한 것은 옳다고 우리가 말하지 않을 없다. 자본주의를 새로운 경제체제로 변화시킬 있는 것은 계급투쟁, 노동자들의 연합이라는 그의 주장은 또한 옳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새로운 체제인 간섭주의를 사회주의라는 다른 명칭으로 예언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을 말하자면 앞에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는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가 사회주의라고 부른 것은 어떤 형태의 간섭주의와도 매우 다르다. 물론 러시아의 형태와도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앞으로 다가오는 사태는 국가의 정치적이며 경제적 영향력을 감소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는데 간섭주의는 어디에서나 국가의 영향력을 증가시켰다. (266, 267)

 

48. 말할 것도 없이 간섭주의 (특히 직접적 간섭주의) 최대의 위험은 국가권력과 관료제도의 증가이다. 대부분의 간섭주의자들은 이것을 개의치 않거나 그것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린다. 그런데 그것은 위험을 증가시킬 뿐이다. 위험은 정면으로 대결했을 때는 그것을 통제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순전히 사회기술공학과 점진적 사회공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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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법학
한스 켈젠 지음, 변종필.최희수 옮김 / 지산(길안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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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과 도덕의 차이는 두 사회질서가 무엇을 명령하고 금지하느냐에서 찾을 수 없고, 일정한 인간행위를 어떻게 명령하고 금지하느냐에서만 찾을 수 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법을 강제질서, 즉 일정한 인간행위를 야기하려고 하는 규범질서로 파악하는 경우에만 법은 도덕과 구분될 수 있다. 이 경우 법은 그것이 야기하고자 하는 행위와 반대되는 행위에 대해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강제행위를 연계시키는 반면, 도덕은 어떠한 강제도 확정되지 않는 사회질서이다. 도덕에 있어 강제는 규범합치적 행위에 대한 승인과 규범위반적 행위에 대한 불승인을 그 본질로 하며, 물리적 강제력의 적용은 결코 고려되지 않는다. (115면)




2. ... 왜냐하면 우리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절대적인 도덕가치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모든 경우에 선과 악, 정당함과 부당함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119면)




3. 실정법이론이 일반적으로 법과 도덕, 개별적으로는 법과 정의를 서로 구분하고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요청을 제기하는 경우, 즉 유일하게 효력있는 하나의 절대적인 도덕과 그에 기초한 절대적인 정의가 존재한다는 전통적 견해를 상대로 제기하는 것이다. (121면)




4. 상대주의적 가치론이란 - 종종 오해되고 있듯이 - 어떠한 가치도, 특히 어떠한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절대적 가치나 절대적 정의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상대적인 가치와 상대적인 정의만이 존재한다는 것, 우리가 규범정립행위를 통해 형성하고 우리의 가치판단의 기초로 삼는 가치들은 그와 대립되는 가치들의 존재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요청을 띠고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22면)




5. 그러나 우리가 실정법질서의 형성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경우, 즉 선하거나 악한 것으로, 정당하거나 부당한 것으로 평가하는 경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그 기준은 상대적이라는 것, 다른 도덕체계에 기초한 다른 판단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법질서가 어떤 도덕체계의 기준에 따라 부당한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에는 그와 다른 도덕체계의 기준에 따르면 정당한 것으로 판단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22면)




6.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 이 점은 다시 강조되어야 하며 또 분명하게 강조할 수 밖에 없다 - 하나의 유일한 도덕, 스스로 효력있는 하나의 절대적 도덕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극단적으로 다른 아마 서로 모순되는 다수의 도덕체계들이 존재한다는 통찰, 실정법질서는 수범자 내의 일정한 집단이나 계층, 특히 지배적인 집단이나 계층의 도덕적 견해에는 아마도 대체적으로 합치될 수 있고 또 사실상 대체적으로도 합치되지만 동시에 다른 집단이나 계층의 도덕적 견해와는 모순된다는 통찰이다. 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통찰은 윤리적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과 정당화될 수 있는 것에 관한 도덕적 견해는 법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가변적이라는 점과 법질서 또는 법질서의 어떤 규범은 그것이 효력을 가졌던 시대에는 그 당시의 도덕적 요청에 부합될 수 있었더라도 현재에는 극히 비도덕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전통법학에 만연되어 있었으나 순수법학이 거부한 테제, 즉 법은 그 본질상 도덕적이어야 하며 비도덕적인 사회질서는 법이 아니라는 테제는 절대적 도덕, 즉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효력을 갖는 도덕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간적․장소적 상황과 무관하게 법과 불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사회질서 속에 구축하려는 전통법학의 목적은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 (124면)




7. 순수법학은 법은 그 본질상 도덕적이라는 테제, 다시 말해 도덕적 사회질서 만이 법이라는 테제를 부인한다. 이는 첫째 그 테제가 절대적 도덕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요, 다음으로 특정 공동체의 지배적인 법학에 의해 사실적으로 적용될 경우에 그 테제는 그 공동체를 형성하는 국가강제질서에 대한 무비판적인 정당화로 이르러 가기 때문이다. (125면)




8. 법을 규범질서, 즉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는 규범들의 체계로 파악하면, 무엇이 제반 규범들의 통일성에 그 근거를 제공하는가, 왜 일정한 규범은 일정한 질서에 속하는가 하는 물음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은 왜 규범이 효력을 갖는가, 규범의 효력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 어떤 규범이 “효력이 있다”는 말은 그 규범이 구속력이 있다는 것, 즉 인간이 그 규범에 정해진 방식대로 행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01면)




9.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어떤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 나올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점이 나올 수 없다. 어떤 규범의 효력근거는 다른 규범의 효력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다. 구체적으로 말해 어떤 다른 규범의 효력근거가 되는 규범을 하위규범과 관련하여 상위규범이라고 한다. (301면)




10. 최고의 규범으로서 그것은 전제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상위의 규범에서 권한의 근거를 구해야 하는 그 어떤 권위에 의해 정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효력은 더 이상 상위규범에서 나올 수 없고, 그 효력의 근거는 더 이상 문제대상이 될 수 없다. 최고의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그와 같은 규범을 이 책에서는 근본규범(Grundnorm)이라고 부른다. ... 근본규범은 하나의 동일한 질서에 속하는 모든 규범들의 효력에 대한 공통적인 연원, 즉 공통의 효력근거가 된다. (303면)




11. 근본규범으로서 전제되어 있는 규범으로부터 그 효력근거와 효력내용을 구하는 규범들의 체계는 정적 규범체계(statisches Normensystem)이다. 이 체계에 속하는 규범들의 효력근거를 제시하는 원칙은 정적 원리(statisches Prinzip)이다. ... 그러한 규범은 그에 거를 두고 있는 제반 규범들의 효력근거만을 제공할 뿐, 효력내용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규범들은 동적 규범체계(dynamisches Normsystem)를 이룬다. 이 체계상의 규범들의 효력을 근거지우는 원칙은 동적 원리(dynamisches Prinzip)이다. (305면)




12. 동적 유형의 특징은 전제된 근본규범이 다름아니라 규범창설적 요건을 도입하고 규범정립적 권위에게 권한을 부여하며, 또는 - 같은 의미이지만 - 그 근본규범에 바탕한 질서 내의 일반적 규범들과 개별적 규범들이 어떻게 창설되어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규칙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305면)




13. 왜냐하면 근본규범은 규범정립적 권위를 위임하는 일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근본규칙은 그 체계 내의 규범들의 창설의 기초가 되는 규칙을 세우는 일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306면)




14. 근본규범은 효력근거만을 제공하지, 그 체계를 이루는 제반 규범들의 내용까지 제공하지는 않는다.




15. 근본규범의 본질을 인식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근본규범이 직접적으로는 사실상 정립되고 관습이나 규정에 의해 창조된 대체적으로 실효성을 갖는 일정한 헌법과 관련되어 있으며, 간접적으로는 이러한 헌법에 따라 창설된 대체적으로 실효성을 갖는 강제질서와 관련되어 있음을, 그리하여 근본규범이 헌법의 효력과 그 헌법에 따라 창설된 강제질서의 효력을 근거지운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312면)




14. 양 극단이란 당위로서의 효력과 존재로서의 실효성 사이에는 결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하는, 즉 법의 효력은 그 실효성과는 완전히 무관하다고 하는 테제가 그 하나이고, 법의 효력은 그 실효성과 일치한다는 테제가 다른 하나이다. 첫 번째 해결방법은 관념주의적 이론이고, 두 번째 해결방법은 현실주의적 이론이다. 전자의 오류는, 전체로서의 법질서 및 개별적 법규범은 그것이 실효적이기를 그칠 경우 그 효력을 상실한다는 점, 그리고 실정법규범이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존재행위에 의해 정립될 수 밖에 없다는 측면에서도 법규범이라는 당위와 자연적 현실이라는 존재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후자의 오류는, - 앞에서 본 바와 같이 - 법규범이 실효적이지 않거나 아직 실효성이 없더라도 효력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많은 경우가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331, 332면)




15. 근본규범은 국가헌법의 효력근거이면서 동시에 그 국가헌법에 근거하여 승인된 (즉 국가에 의해 효력을 갖는) 국제법의 효력근거이다. (3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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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생태학적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가 - 니클라스 루만의 생태학적 커뮤니케이션
니클라스 루만 지음, 이남복 옮김 / 백의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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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만, 현대사회는 생태학적 위험을 대처할 있는가 (이남복옮김)

 

1. 낙관론이 이미 오랫동안 논의해 구조적 복합성의 문제점을 과소평가해왔다. 특히 낙관론은 복합성 개념이 차이의 관점에서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며, 그것과 체계와 환경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단위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28)

 

2. 다른 한편 체계와 환경의 차이는 복합성을 축소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전제 조건이다. 축소는 단지 체계 내에서 체계 자체의 준거와 환경을 준거로 하여 수행될 있다. (29)

 

3. 자기 준거적 자동생산체계는 내생적으로 불안정하며 재생산할 채비가 되어 있다. 자동 생산 체계는 자동 생산을 계속하기 위해 고유한 구조를 발전시키고  있다. 여기서 환경은 가능성의 조건과 제한으로 전제되어 있다. 체계는 환경에 의해서 유지되고 교란되지만, 적응을 강요받는 것이 아니며, 최선의 적응의 경우에만 재생산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역시 진화의 결과이며, 동시에 계속적인 진화의 전제 조건인 것이다. (31)

 

4. 사회 체계의 반향 능력에 대한 이러한 제한은 사회와 심리체계 의식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정보 처리 양식인 의미의 고유성에서 조화를 이룬다. … 그러므로 달리 말하자면, 의미는 매순간마다의 세계 복합성에 대한 현실적 대표성이다. (36, 37)

 

5. 우리는 낡은 인류학의 시각을 의미를 기초로 조작적인 폐쇄 체계의 매우 제한적인 반향능력이라는 명제로 대체한다. (38)

 

6. 조작 자체는 필연적으로 체계내의 개별조작이다. 말하자면 다른 많은 중의 하나에서 발생하는 조작이다. 총체적 조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0)

 

7. 다른 체계에 의한 체계의 관찰을 마투라나(H. Maturana) 관련지어 이차적 질서의 관찰이라고 부를 있다. (45)

 

8. 프란시스코 발레라가 도입했던 개념을 빌어 표현하자면, 사회 체계에는 투입에 의한 연결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폐쇄에 의한 연결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54, 55)

 

9. 기능체계의 탈분화로 전환 다시 말해 오늘날 사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 체계들은 나름대로 각기 특수하고 우선적인 기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 원칙은 현대 사회의 강력한 능률성과 복합성의 증대를 설명해주고 있으며, 동시에 통합의 문제점을 말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사회의 부분 체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 체계와 환경과의 관계에서도 점차 반향능력이 적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능적 체계분화이론은 현대 사회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에 대한 원대하고 세련된 경제적 설명 도구인 것이다. (63)

 

10. 사회의 자기관찰은 이데올로기적이다. 다시 말해 인과 귀속의 적용은 항상 가치평가와 당파성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195)

 

11. 그러나 새로운 생태학적 주제들은 준거방향을 변경하여, 적동지 도식의 차이를 체계환경의 전망으로 변경시켰다.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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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사상
엄정식 지음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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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식, 비트겐슈타인의 사상,

 

1. 문제들은 새로운 정보의 제공에 의해서가 아니라 알고 있던 것을 정리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Investigation, § 109). (16, 17, 97)

 

2. 그의 철학은 일종의 실천철학이다. 그는 철학의 임무가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는 실천적 작업이지 하나의 체계를 정립하는 이론적 작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점에서 그것은 철학의 임무가 세계를 개조하는데 있다 주장한 마르크스의 실천철학과 비견될 있지만, 그의 비판이 비인간화되어 가는 정치나 경제현상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이 부분적 특징으로 나타나는 언어현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36, 37)

 

3.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현대철학은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 중에서도 현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평가되어 비트겐슈타인은 문제에 관하여 매우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심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그는 플라톤적 존재론에서 데카르트적 인식론으로 전환되어 있던 서양철학의 패러다임을 다시 의미론으로 변모시킨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철학은 존재의 세계에 대한 확실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탐구에 전제가 되는 의미의 명료화에 몰두하게 것이다. (39)

 

4. „논고에서 그는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존재의 세계를 규명할 있다고 믿었고, 해명의 한계 때문에 말할 있는 말할 없는 분명히 해야 하며 말할 있는 것을 제대로 말함으로써 말할 없는 영역도 모습을 스스로 드러낼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현대의 철학에서 존재나 인식보다 의미의 규명에 비중을 두게 계기를 우리는 여기서 추적해 있다. (41)

 

5. 이와 같이 그는 철학의 임무가 기본적으로 철학적 혼란을 제거함으로써 마치 사상누각 철거하듯이, 이해를 어렵게 하는 장애물을 없애는 있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패러다임. 존재론적 혹은 인식론적 탐구를 통해서 진리를 발견한다는 종래의 철학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이러한 구성 자체를 거부하므로 구조에 대해서 해체적이고 이론에 대해서는 파괴적이라고 까지 말할 있다. (42)

 

6.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 대해서 단순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역할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가령 그는 어법(grammer)“이나 본질 관해서 언급할 철학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임무를 수행할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어법은 무엇이든 그것이 어떤 종류의 대상인지 말해준다 (어법으로서의 신학)“ 주장하며 본질은 어법에 의해 표현된다 말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어법을 연구함으로써 철학은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의 본질이나 심성의 본질 같은 것을 규명할 수도 있는데 신에 관한 이야기가 어떠한 어법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지 혹은 정신에 관한 어휘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면면히 검토하고 이것을 정확하게 기술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42, 43)

 

7. 요컨대 종교적 가치도 윤리적 가치도 심미적 가치처럼 주관적이며 따라서 종교적 신앙 합리적 혹은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배격하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78)

 

8. 철학의 임무는 개념적 명료화인 동시에 철학적 문제의 해소이다. (44)

 

9. 그러나 언어비판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철학함(doing philosophy)“ 중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소크라데스적 의미로 자기를 발견한다는 뜻이며 새롭게 태어난 자기가 세계를 변형된 모습으로 바라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계와 자기 자신이 인간적 생태형식의 맥락에서 이해될 당연히 찾아오는 침묵의 체험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노바 (Judith Jenova) 정리해 주었듯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은 활동(action), 명료화(clarification), 변형(transformation), 그리고 침묵(silence)이라는 4개의 단어로 요약될 있을 것이다. (45)

 

10. 제노바는 비트겐슈타인이 사물이 바라보는 방법 바꾸게 하였고 여기에서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에 이성이 아니라 언어 때문에 인간은 다른 동물이나 기계가 구분되며 오늘날 언어는 모든 학문과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업적이라고 평가한다 (Judith Genova, Wittgenstein: A Way of Seeing, p. 106). (46)

 

11.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초기에는 과학에 대한 신뢰를 보이고 과학언어에서 유의미성의 전형을 찾았지만 후기에는 과학언어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특히 이것이 종교언어와 윤리언어 혹은 예술언어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그것은 여러 언어게임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다른 언어게임 위에 군림하는 것도 아니고 환원이나 번역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이러한 언어게임들 상호간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가령 서로 완전한 자율성을 유지할 있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느 정도 자율성을 누리더라도 전혀 중복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47)

 

12. 특히 논고에서 논의되었던 단순 명칭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관계적이 아닌 언어적 요소는 없다 점에서 자기들의 의견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49)

 

13. 사실 그는 세계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없고 어떤 형태이든 어휘의 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52)

 

14. 철학은 소크라데스 이후로 항상 주체적 학문이었고 특징은 존재의 세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와 거기에 접근하는 방법 자체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을 , 비로소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철학이 당면한 정체성 위기의 문제도 바로 이러한 특성을 확인함으로써 실마리를 풀어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된다. (63)

 

15. 어떠한 신념도 다른 신념 못지않게 좋다 (리차드 로티). (56)

 

16. 나은 대안이 있을 있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좀더 탐색할 있기를 바란다 (퍼트남) (56)

 

17. 비트겐슈타인의 가치론. 첫째, 그는 가치라는 개념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가지 뜻으로 쓰고, 전자에 관한 사실과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둘째, 좁은 의미의 가치로 그는 윤리와 종교 예술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은 가치의 상대론적, 회의론적 주관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윤리적 절대가치 혹은 최고선을 인정하지 않을 아니라 종교적 가치의 우위성이나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보이며 심미적 가치는 사물이나 예술품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고 감상자의 주관에 의존한다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가치의 자율성을 대체로 인정하지만 서로 중첩되는 특성이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가령 종교적 가치는 심미적 가치나 인식적 가치로 환원될 없음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전혀 별개의 대상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69)

 

18. 다시 말해서 가치의 언어게임에서는 서로 공유할 만한 규칙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나 규칙을 찾으려는 노력은 반드시 실패로 끝난다. 가치는 인간의 삶의 문제이며 삶의 문제는 모든 인간이 공유할 영역이 없기 때문이다. (71)

 

19. 비트겐슈타인이 가치의 문제와 관련하여 언어의 한계를 설정하는 목적은 가치에 관한 모든 논의를 무용한 것이라고 규정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담화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여 서로 침범하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72, 73)

 

20. 사람에게는 윤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시 되지 않을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해준다. … 윤리학에 관한 강의의 끝부분을 나는 일인칭으로 이야기했소. 이것은 아주 핵심적이란 생각이 드오 (F. Waismann). (76)

 

21. 요컨대 윤리학이 사회학이 아닌 것처럼 미학이 심리학으로 환원될 없으며 종교도 또한 역사적 증명의 대상이 없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다. 거듭하거니와 이것은 그가 가치의 영역에서 과학적 모델의 설명방식을 엄격히 배제한다는 뜻이다. 그는 가치가 심리학적 과제만이 아님을 미학의 경우를 들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미학이 심리학의 분야라고 한다. 이것은 일단 우리가 좀더 진보하면 모든 것이, 예술의 모든 신비가 심리학적 실험에 의해 파헤져질 것이라고 보는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은 극히 우둔한 것으로서 함부로 지어먹은 생각이다.“ (Lecture and Conversations) (76)

 

22. 사실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어떻게 있는가 관해서가 아니라 세계에 무엇인가가 있다 사실에 관한 경험을 필요로 한다. (81)

 

23. 퍼트남에 따르면 현대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세계와 언어의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이라고 주장한다. (260)

 

24. 여기서 분석이란 언어적 표현 의미의 분석을 뜻하며, 적어도 영미권에서는 이러한 접근방식을 서양철학사 전반에 걸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사건을 버그만 (Gustav Bergman) 표현대로 언어적 전환 (linguistic turn)“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플라톤이 중심이 되어 신화적 세계로부터 이룩한 존재론적 전환 (ontological turn)“, 그리고 다시 데카르트가 주축이 되어 시도한 인식론적 전환 (epistemological turn)“ 비견되는 파격적인 접근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75)

 

25. 서양철학에서 전개되어 확실성의 추구는 대체로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있다. 첫째는 플라톤으로부터 중세로 이어지는 존재론적 추구로서 영원하고 불변하는 대상에서 확실성을 찾으려는 특성을 지닌다. 둘째는 데카르트가 전환점을 마련하여 오늘날 현상학에서도 찾아볼 있는 인식론적 추구로서 절대적인 확실성을 내면적 심성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셋째는 프레게가 계기를 마련하여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이 주축이 분석철학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의미론적 추구로서, 여기서는 완전한 확실성을 언어의 분석을 통해 획득하려는 특징을 보인다. 이것은 우리는 각기 외부지향적인 존재론적 추구, 내부지향적인 인식론적 추구 관계 지향적인 의미론적 추구라고 부를 있을 것이다. (209)

 

26. 일반적으로 우리는 언어의 기능을 크게 세가지로 표현하는데, 표현(expression) 인식(cognition) 수행(performance) 그것이다. …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우리들 자신의 감정이나 희망, 소원 등을 밖으로 나타내 준다는 사실에 있다. … 철학적 관점에서 언어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의 기능이다. … 포퍼는 인식적 기능을 다시 서술적(descripitve) 것과 논증적(argumentative) 것으로 나누고 기능에 의해서 우리는 인식주관의 심리적 상태에 얽매이지 않는 객관적 지식을 갖게 된다고 한다. 특히 그는 논증적 기능을 최고의 것으로 평가하고 최근에 진화된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 언어는 단순히 자기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의도하는 것을 실천하는 수행적 기능도 지닌다. … 이렇게 말함으로써 나는 무엇을 표현하거나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주고 이름을 지으며 서약을 하는 어떤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스틴 (J. L. Austin) 일상언어의 기능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수행적 기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은 언어의 인식적 기능에만 관심을 집중시켜 왔기 때문에 철학적 문제들을 야기시켰을 아니라 해결방안을 찾을 없었다고 지적한다 (J.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pp. 99-131). 전통적으로 우리는 언어를 하나의 기호체계로서만 취급해 왔기 때문에 말하는 행위와 언급하는 상황이 언어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 왔던 것이다. (221, 222)

 

27. 언어에는 세가지 계기가 있다. 언어 혹은 기호 자체와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과 이러한 대상에 대해 언급하는 화자가 그것이다. 모리스 (Charles Morris) 계기들을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이론을 기호론(semiotics)“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세가지 분야로 나누어서 취급하였다. 구문론(syntax, syntactics)에서는 기호들 사이의 형식적인 관계를 다루고, 의미론(semantics)에서는 기호와 그것을 표현하는 대상들과의 관계를 다루며, 화용론(pragmatics)에서는 기호와 기호를 해석하는 화자와의 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Charles Morris, Foundations of the Theory of Signs). 분야들을 카드납(R. Carnap)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연구에서 화자 언어의 사용자가 분명히 언급되면 그것은 화용론의 분야에 속한다. 언어사용자를 떠나서 어떤 표현과 지시체 사이의 관계 만을 분석한다면, 그것은 의미론의 분야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지시체를 떠나서 표현들 사이의 관계 만을 기술한다면 그것은 구문론에 속하게 된다.“ (R. Carnap, Foundations of Logic and Mathematics, pp. 139-214). (222)

 

28. „과학과 기술의 시대는 인간성 종말의 시작이라는 , 위대한 진보라는 생각은 진리가 궁극적으로 밝혀질 있다는 생각과 아울러 환상이라는 , 과학적 지식에는 좋거나 바람직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이것을 추구함으로써 인류는 함정에 빠져들고 있을 뿐이라는 등을 믿는 데는 무리가 없다.“ (비트겐슈타인, Culture and Value, p. 56) (94)

 

29. 대체로 말해서 과학의 개념은 부류로 나누어질 있는데, 하나는 논리학과 수학을 중시하고 경험론적 원리와 형식적 분석에 의존하는 탈역사적인 실증주의적 과학관이며, 다른 하나는 지식사회학적 맥락에서 과학적 탐구도 역사적이며 사회적 산물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는 역사주의적 혹은 관행주의적 과학관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전자는 헴펠, 카르납, 슐릭 실증주의자와 과학자들 자신에 의해서 견지되어오는 전통적 과학관이며, 후자는 쿤을 위시하여 폴라니, 화이어벤드, 툴민 등에 의해 주창된 새로운 과학관이다. (95)

 

30. 쿤에 따르면 과학은 사회적 활동 중에 하나이며 과학자들의 연구성과도 합의에 따라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것이 구분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지식이라고 있는 것도 이러한 식으로 규정된다. 더구나 과학자들도 어느 특정한 사회나 전통 혹은 패러다임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고 보거나 말하는 것은 모두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에서 벌어지는 게임에 해당한다. (98)

 

31. 피처는 논고 탐구 연계성에 관하여 이렇게 지적한다. „논고와 탐구 사이의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약간의 유사성이 있다. 아마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 감각의 한계를 설정하여 지적으로 말할 있는 것과 말할 없는 사이의 경계를 제시하는 관심을 기울인 사실일 것이다.“ (G. Pitcher, Philosophy of Wittgenstein, p. 326). (134)

 

32. „탐구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의미를 찾으려면 어떤 이름이나 문장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찾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뜻으로 쓰이는지 이른바 언어게임(language game)“ 살펴보아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언어현상을 일종의 게임과 비교하는데 거기에는 사람이 개입되고 다양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규칙을 지닌 사회적 행위라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규정하는데 그는 이것을 언어와 그것이 얽혀 있는 행동들로 구성된 전체라고 정의한다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 7).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숨바꼭질, 장기, 공차기 여러 게임에 공통된 요소가 없듯이 언어 속에 본질적이라고 있는 공통된 요소가 없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언어게임에는 공통점 보다도 어떤 관계같은 것이 있을 뿐인데 그것을 그는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모두에 공통되는 무엇을 제시하는 대신, 현상을 모두가 하나의 낱말로 표현될 있는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모두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관계 혹은 관계들 때문인 것이다.“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 65). 이러한 언어게임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적인 생태형식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언어게임이라는 용어는 언어를 말하는 것이 행위의 부분 혹은 생태형식의 부분이라는 사실을 돋보이도록 의도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특히 그것은 받아들여져야 하는 , 주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 23). 그의 이러한 지적은 우리가 언어를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태형식으로부터 습득된 것임을 보여주려는 있으며, 그것은 또한 언어의 영향 없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은 생태 형식을 벗어나서는 이루어질 없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언어의 기능은 사태를 지칭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므로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알려면 언어게임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물러야 한다는 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며, 그가 의미를 묻지 말고 활용을 물어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의 혼란은 언어의 기능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언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생긴 것이므로 이러한 점들을 바로 잡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136, 137)

 

33. 종교철학의 문제는 종교언어를 잘못 활용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므로 종교적 언어게임을 살펴봄으로써 해소될 있으며 언어의 기능이 단지 대상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므로 신이란 개념도 단순히 어떤 대상 만은 아니다. (137)

 

34. 사실 우리가 서로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려면 어떤 단어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단어가 활용되는 판단이 공감할 해야 하고 그러한 공감이 이루어지려면 결국 공감대가 형성될 만한 상황을 같이 살아가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러한 상황에서의 의견일치를 단순히 의견에 있어서가 아니라 생태 형식에 있어서이루어진 일치라고 말한다. …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인간들 사이의 일치가 진위를 결정한다고 말할 있는가. – 진위는 바로 인간이 말하는 것이고 인간이 일치를 보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이것은 의견에 있어서의 일치가 아니라 생태형식에서의 일치이다.“ (Investigations, § 241). … 이명현 구분에 대해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는데 가령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리가 삶의 형식에 있어서 일치한다면, 판단에 있어서도 일치한다. 이런 논점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있다. 판단은 삶의 형식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은 삶의 형식의 양태라고 말할 있다.“ (삶의 형식의 두가지 국면, 비트겐슈타인의 이해, 분석철학연구회편, 1984). (146)

 

35.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언어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언어게임의 마당인 생태형식과 연결해 봄으로써 완결된다. 언어를 말하는 것은 언어게임이라는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며 이러한 행위는 생태형식의 부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게임은 인간의 행위이므로 게임의 장소는 바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한 뜻으로 그는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하나의 생태형식을 상상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한다. (Investigations, § 19) (149)

 

36. … 모든 기독교신자가 받아들일 있는 명제들이며 따라서 기독교적 언어게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적 생태 형식에 의해 규정되고 거기에 바탕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신은 1993 10 22 부활한다 명제에 오게 되면 신개념이 기독교적 언어게임에서 갑자기 기능을 잃게 것이다. (154)

 

37.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적 주장을 반증하고자 하는 것은 조리에 맞지 않는다고 논변을 펴는데, 논증의 규칙은 어느 특정한 언어게임의 부분이 되어 거기서 논증을 구성할 때에만 비로소 위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상이한 언어게임은 상이한 개념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문자 그대로 의사소통의 길이 막힌다. 이와 같이 종교적 주장의 의미는 종교적 개념으로만 명시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다른 개념으로 평가하면 얻는 것이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어게임이 상충될 (그리하여 다른 관행의 문제일 ) 순전히 개념적 차원에서 이것들을 조정하고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Johnston, Wittgenstein und Moral Philosophy, p. 10). (157)

 

38. „이러한 점을 받아들이면서도, 비록 언어게임이 실재에 관련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일관성이나 정합성의 규준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있다. 이처럼 보통 게임의 규칙들은 임의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일관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것은 규칙들 일관되지 않으면 어떤 게임도 규정될 수가 없다는 점이다 (Ibid., p. 221)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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