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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사상
엄정식 지음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엄정식, 비트겐슈타인의 사상,
1. 문제들은 새로운 정보의 제공에 의해서가 아니라 늘 알고 있던 것을 정리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Investigation, § 109). (16, 17, 97쪽)
2. 그의 철학은 일종의 실천철학이다. 그는 철학의 임무가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는 실천적 작업이지 또 하나의 체계를 정립하는 이론적 작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 점에서 그것은 철학의 임무가 „세계를 개조하는데 있다“고 주장한 마르크스의 실천철학과 비견될 수 있지만, 그의 비판이 비인간화되어 가는 정치나 경제현상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이 부분적 특징으로 나타나는 언어현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36, 37쪽)
3.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현대철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 그 중에서도 현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평가되어 온 비트겐슈타인은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심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그는 플라톤적 존재론에서 데카르트적 인식론으로 전환되어 있던 서양철학의 패러다임을 다시 의미론으로 변모시킨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철학은 존재의 세계에 대한 확실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탐구에 전제가 되는 의미의 명료화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39쪽)
4. „논고“에서 그는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존재의 세계를 규명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해명의 한계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며 말할 수 있는 것을 제대로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영역도 그 모습을 스스로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현대의 철학에서 존재나 인식보다 의미의 규명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된 계기를 우리는 여기서 추적해 낼 수 있다. (41쪽)
5. 이와 같이 그는 철학의 임무가 기본적으로 철학적 혼란을 제거함으로써 마치 „사상누각“을 철거하듯이, 이해를 어렵게 하는 장애물을 없애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패러다임. 존재론적 혹은 인식론적 탐구를 통해서 진리를 발견한다는 종래의 철학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이러한 구성 자체를 거부하므로 구조에 대해서 해체적이고 이론에 대해서는 파괴적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다. (42쪽)
6.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 대해서 단순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역할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가령 그는 „어법(grammer)“이나 „본질“에 관해서 언급할 때 철학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어법은 그 무엇이든 그것이 어떤 종류의 대상인지 말해준다 (어법으로서의 신학)“고 주장하며 „본질은 어법에 의해 표현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어법을 연구함으로써 철학은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의 본질이나 심성의 본질 같은 것을 규명할 수도 있는데 신에 관한 이야기가 어떠한 어법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지 혹은 정신에 관한 어휘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면면히 검토하고 이것을 정확하게 기술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42, 43쪽)
7. 요컨대 종교적 가치도 윤리적 가치도 심미적 가치처럼 주관적이며 따라서 „종교적 신앙“을 합리적 혹은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배격하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78쪽)
8. 철학의 임무는 개념적 명료화인 동시에 철학적 문제의 해소이다. (44쪽)
9. 그러나 언어비판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철학함(doing philosophy)“의 중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소크라데스적 의미로 자기를 발견한다는 뜻이며 새롭게 태어난 그 자기가 세계를 변형된 모습으로 바라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계와 자기 자신이 인간적 생태형식의 맥락에서 이해될 때 당연히 찾아오는 침묵의 체험인 것이다. 그러므로 제노바 (Judith Jenova)가 잘 정리해 주었듯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은 활동(action), 명료화(clarification), 변형(transformation), 그리고 침묵(silence)이라는 4개의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45쪽)
10. 제노바는 비트겐슈타인이 „사물이 바라보는 방법“을 바꾸게 하였고 또 여기에서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에 이성이 아니라 언어 때문에 인간은 다른 동물이나 기계가 구분되며 오늘날 언어는 모든 학문과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업적이라고 평가한다 (Judith Genova, Wittgenstein: A Way of Seeing, p. 106). (46쪽)
11.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초기에는 과학에 대한 신뢰를 보이고 과학언어에서 유의미성의 전형을 찾았지만 후기에는 과학언어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특히 이것이 종교언어와 윤리언어 혹은 예술언어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그것은 여러 언어게임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다른 언어게임 위에 군림하는 것도 아니고 또 환원이나 번역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이러한 언어게임들 상호간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가령 서로 완전한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느 정도 자율성을 누리더라도 전혀 중복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47쪽)
12. 특히 „논고“에서 논의되었던 단순 명칭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관계적이 아닌 언어적 요소는 없다“는 점에서 자기들의 의견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49쪽)
13. 사실 그는 세계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없고 어떤 형태이든 어휘의 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52쪽)
14. 철학은 소크라데스 이후로 항상 주체적 학문이었고 그 특징은 존재의 세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와 거기에 접근하는 방법 그 자체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비로소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철학이 당면한 정체성 위기의 문제도 바로 이러한 특성을 확인함으로써 그 실마리를 풀어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된다. (63쪽)
15. 어떠한 신념도 다른 신념 못지않게 좋다 (리차드 로티). (56쪽)
16. 더 나은 대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좀더 탐색할 수 있기를 바란다 (퍼트남) (56쪽)
17. 비트겐슈타인의 가치론. 첫째, 그는 가치라는 개념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가지 뜻으로 쓰고, 전자에 관한 한 사실과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둘째, 좁은 의미의 가치로 그는 윤리와 종교 및 예술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한 비트겐슈타인은 가치의 상대론적, 회의론적 및 주관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윤리적 절대가치 혹은 최고선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종교적 가치의 우위성이나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보이며 심미적 가치는 사물이나 예술품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고 감상자의 주관에 의존한다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가치의 자율성을 대체로 인정하지만 서로 중첩되는 특성이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가령 종교적 가치는 심미적 가치나 인식적 가치로 환원될 수 없음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전혀 별개의 대상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69쪽)
18. 다시 말해서 가치의 언어게임에서는 서로 공유할 만한 규칙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나 규칙을 찾으려는 노력은 반드시 실패로 끝난다. 가치는 인간의 삶의 문제이며 삶의 문제는 모든 인간이 공유할 영역이 없기 때문이다. (71쪽)
19. 비트겐슈타인이 가치의 문제와 관련하여 언어의 한계를 설정하는 목적은 가치에 관한 모든 논의를 무용한 것이라고 규정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담화의 각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여 서로 침범하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72, 73쪽)
20. 한 사람에게는 윤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해준다. … 윤리학에 관한 내 강의의 끝부분을 나는 제 일인칭으로 이야기했소. 이것은 아주 핵심적이란 생각이 드오 (F. Waismann). (76쪽)
21. 요컨대 윤리학이 사회학이 아닌 것처럼 미학이 심리학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종교도 또한 역사적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다. 거듭하거니와 이것은 그가 가치의 영역에서 과학적 모델의 설명방식을 엄격히 배제한다는 뜻이다. 그는 가치가 심리학적 과제만이 아님을 미학의 경우를 들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미학이 심리학의 한 분야라고 한다. 이것은 일단 우리가 좀더 진보하면 모든 것이, 즉 예술의 모든 신비가 심리학적 실험에 의해 파헤져질 것이라고 보는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은 극히 우둔한 것으로서 함부로 지어먹은 생각이다.“ (Lecture and Conversations) (76쪽)
22. 사실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어떻게 있는가“에 관해서가 아니라 세계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에 관한 경험을 필요로 한다. (81쪽)
23. 퍼트남에 따르면 현대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세계와 언어의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이라고 주장한다. (260쪽)
24. 여기서 분석이란 언어적 표현 즉 의미의 분석을 뜻하며, 적어도 영미권에서는 이러한 접근방식을 서양철학사 전반에 걸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이 사건을 버그만 (Gustav Bergman)의 표현대로 „언어적 전환 (linguistic turn)“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플라톤이 중심이 되어 신화적 세계로부터 이룩한 „존재론적 전환 (ontological turn)“, 그리고 다시 데카르트가 주축이 되어 시도한 „인식론적 전환 (epistemological turn)“와 비견되는 파격적인 접근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75쪽)
25. 서양철학에서 전개되어 온 확실성의 추구는 대체로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는 플라톤으로부터 중세로 이어지는 존재론적 추구로서 영원하고 불변하는 대상에서 확실성을 찾으려는 특성을 지닌다. 둘째는 데카르트가 그 전환점을 마련하여 오늘날 현상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인식론적 추구로서 절대적인 확실성을 내면적 심성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셋째는 프레게가 그 계기를 마련하여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이 주축이 된 분석철학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의미론적 추구로서, 여기서는 완전한 확실성을 언어의 분석을 통해 획득하려는 특징을 보인다. 이것은 우리는 각기 외부지향적인 존재론적 추구, 내부지향적인 인식론적 추구 및 관계 지향적인 의미론적 추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09쪽)
26. 일반적으로 우리는 언어의 기능을 크게 세가지로 표현하는데, 표현(expression)과 인식(cognition)과 수행(performance)이 그것이다. …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우리들 자신의 감정이나 희망, 소원 등을 밖으로 나타내 준다는 사실에 있다. …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언어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의 기능이다. … 포퍼는 이 인식적 기능을 다시 서술적(descripitve)인 것과 논증적(argumentative)인 것으로 나누고 이 두 기능에 의해서 우리는 인식주관의 심리적 상태에 얽매이지 않는 객관적 지식을 갖게 된다고 한다. 특히 그는 논증적 기능을 최고의 것으로 평가하고 최근에 진화된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 언어는 단순히 자기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의도하는 것을 실천하는 수행적 기능도 지닌다. … 이렇게 말함으로써 나는 무엇을 표현하거나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주고 이름을 지으며 서약을 하는 등 어떤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스틴 (J. L. Austin)은 일상언어의 기능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수행적 기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은 언어의 인식적 기능에만 관심을 집중시켜 왔기 때문에 철학적 문제들을 야기시켰을 뿐 아니라 그 해결방안을 찾을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J.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pp. 99-131). 전통적으로 우리는 언어를 하나의 기호체계로서만 취급해 왔기 때문에 말하는 행위와 언급하는 상황이 언어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 왔던 것이다. (221, 222쪽)
27. 언어에는 세가지 계기가 있다. 언어 혹은 기호 그 자체와 이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과 이러한 대상에 대해 언급하는 화자가 그것이다. 모리스 (Charles Morris)는 이 계기들을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이론을 „기호론(semiotics)“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세가지 분야로 나누어서 취급하였다. 구문론(syntax, syntactics)에서는 기호들 사이의 형식적인 관계를 다루고, 의미론(semantics)에서는 기호와 그것을 표현하는 대상들과의 관계를 다루며, 화용론(pragmatics)에서는 기호와 기호를 해석하는 화자와의 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Charles Morris, Foundations of the Theory of Signs). 이 분야들을 카드납(R. Carnap)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연구에서 화자 즉 그 언어의 사용자가 분명히 언급되면 그것은 화용론의 분야에 속한다. 언어사용자를 떠나서 어떤 표현과 그 지시체 사이의 관계 만을 분석한다면, 그것은 의미론의 분야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지시체를 떠나서 표현들 사이의 관계 만을 기술한다면 그것은 구문론에 속하게 된다.“ (R. Carnap, Foundations of Logic and Mathematics, pp. 139-214). (222쪽)
28. „과학과 기술의 시대는 곧 인간성 종말의 시작이라는 것, 위대한 진보라는 생각은 진리가 궁극적으로 밝혀질 수 있다는 생각과 아울러 환상이라는 것, 과학적 지식에는 좋거나 바람직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이것을 추구함으로써 인류는 함정에 빠져들고 있을 뿐이라는 것 등을 믿는 데는 무리가 없다.“ (비트겐슈타인, Culture and Value, p. 56) (94쪽)
29. 대체로 말해서 과학의 개념은 두 부류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하나는 논리학과 수학을 중시하고 경험론적 원리와 형식적 분석에 의존하는 탈역사적인 실증주의적 과학관이며, 다른 하나는 지식사회학적 맥락에서 과학적 탐구도 역사적이며 사회적 산물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는 역사주의적 혹은 관행주의적 과학관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전자는 헴펠, 카르납, 슐릭 등 실증주의자와 과학자들 자신에 의해서 견지되어오는 전통적 과학관이며, 후자는 쿤을 위시하여 폴라니, 화이어벤드, 툴민 등에 의해 주창된 새로운 과학관이다. (95쪽)
30. 쿤에 따르면 과학은 사회적 활동 중에 하나이며 과학자들의 연구성과도 합의에 따라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것이 구분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식으로 규정된다. 더구나 과학자들도 어느 특정한 사회나 전통 혹은 패러다임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고 보거나 말하는 것은 모두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에서 벌어지는 게임에 해당한다. (98쪽)
31. 피처는 „논고“와 „탐구“의 연계성에 관하여 이렇게 지적한다. „논고와 탐구 사이의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약간의 유사성이 있다. 아마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책 모두 감각의 한계를 설정하여 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제시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사실일 것이다.“ (G. Pitcher, Philosophy of Wittgenstein, p. 326). (134쪽)
32. „탐구“의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의미를 찾으려면 어떤 이름이나 문장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찾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뜻으로 쓰이는지 이른바 „언어게임(language game)“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언어현상을 일종의 게임과 비교하는데 거기에는 사람이 개입되고 다양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규칙을 지닌 사회적 행위라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규정하는데 그는 이것을 „언어와 그것이 얽혀 있는 행동들로 구성된 전체“라고 정의한다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 7).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숨바꼭질, 장기, 공차기 등 여러 게임에 공통된 요소가 없듯이 언어 속에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공통된 요소가 없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언어게임에는 공통점 보다도 어떤 „관계“ 같은 것이 있을 뿐인데 그것을 그는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것 모두에 공통되는 그 무엇을 제시하는 대신, 이 현상을 모두가 하나의 낱말로 표현될 수 있는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모두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관계 혹은 이 관계들 때문인 것이다.“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 65). 이러한 언어게임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적인 „생태형식“을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언어게임“이라는 용어는 언어를 말하는 것이 행위의 한 부분 혹은 생태형식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돋보이도록 의도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특히 그것은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 주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 23). 그의 이러한 지적은 우리가 언어를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태형식으로부터 습득된 것임을 보여주려는 데 있으며, 그것은 또한 언어의 영향 없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은 생태 형식을 벗어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언어의 기능은 사태를 지칭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므로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알려면 언어게임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물러야 한다는 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며, 그가 „의미를 묻지 말고 그 활용을 물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의 혼란은 언어의 기능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언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생긴 것이므로 이러한 점들을 바로 잡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136, 137쪽)
33. 종교철학의 문제는 종교언어를 잘못 활용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므로 종교적 언어게임을 잘 살펴봄으로써 해소될 수 있으며 언어의 기능이 단지 대상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므로 신이란 개념도 단순히 어떤 대상 만은 아니다. (137쪽)
34. 사실 우리가 서로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려면 어떤 단어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단어가 활용되는 판단이 공감할 만 해야 하고 그러한 공감이 이루어지려면 결국 공감대가 형성될 만한 상황을 같이 살아가야 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러한 상황에서의 의견일치를 단순히 „의견에 있어서가 아니라 생태 형식에 있어서“ 이루어진 일치라고 말한다. …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인간들 사이의 일치가 진위를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진위는 바로 인간이 말하는 것이고 인간이 일치를 보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이것은 의견에 있어서의 일치가 아니라 생태형식에서의 일치이다.“ (Investigations, § 241). … 이명현은 그 구분에 대해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는데 가령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리가 삶의 형식에 있어서 일치한다면, 판단에 있어서도 일치한다. 이런 논점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판단은 삶의 형식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은 삶의 형식의 한 양태라고 말할 수 있다.“ (삶의 형식의 두가지 국면, 비트겐슈타인의 이해, 분석철학연구회편, 1984). (146쪽)
35.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언어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언어게임의 마당인 생태형식과 연결해 봄으로써 완결된다. 언어를 말하는 것은 언어게임이라는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며 이러한 행위는 생태형식의 한 부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게임은 인간의 행위이므로 그 게임의 장소는 바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한 뜻으로 그는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하나의 생태형식을 상상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한다. (Investigations, § 19) (149쪽)
36. … 는 모든 기독교신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들이며 따라서 기독교적 언어게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적 생태 형식에 의해 규정되고 또 거기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신은 1993년 10월 22일에 부활한다“는 명제에 오게 되면 이 신개념이 기독교적 언어게임에서 갑자기 그 기능을 잃게 될 것이다. (154쪽)
37.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적 주장을 반증하고자 하는 것은 조리에 맞지 않는다고 논변을 펴는데, 논증의 규칙은 어느 특정한 언어게임의 한 부분이 되어 거기서 논증을 구성할 때에만 비로소 위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상이한 언어게임은 상이한 개념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문자 그대로 의사소통의 길이 막힌다. 이와 같이 종교적 주장의 의미는 종교적 개념으로만 명시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다른 개념으로 평가하면 얻는 것이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어게임이 상충될 때 (그리하여 다른 관행의 문제일 때) 순전히 개념적 차원에서 이것들을 조정하고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Johnston, Wittgenstein und Moral Philosophy, p. 10). (157쪽)
38. „이러한 점을 받아들이면서도, 비록 언어게임이 실재에 관련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일관성이나 정합성의 규준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처럼 보통 게임의 규칙들은 „임의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일관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규칙들“이 일관되지 않으면 어떤 게임도 규정될 수가 없다는 점이다 (Ibid., p. 221) (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