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사회와 그 적들 2 - 이데아총서 14
칼 R.포퍼 지음 / 민음사 / 198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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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포퍼, 열린 사회와 적들 II (이명현 )

 

1. 합리주의는 비판적 논증에 귀를 기울이며 경험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태도를 뜻한다. 따라서 그것은, „내가 잘못되고, 당신이 옳은지 모르겠소.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진리에 가까이 도달할 있을 것이오.“ 같이 말하는 태도이다. (315)

 

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뼈대를 이루는 목적론은 플라톤의 변화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낙관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라고 있다. 플라톤은 모든 변화는 원형인 완전한 형상 이데아로부터 점점 떨어져 가는 퇴화의 과정 파멸에로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와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는 궁극 목적을 향해 움직여 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궁극 목적은 다른 아닌 사물이 지닌 본질인데 그것을 형상이라고 그는 불렀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의 변화는 결국 사물이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본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24)

 

3. 현실화되려면 본질은 변화 속에서 자기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이것은 이념은 활동에 의해서 현실화된다는 헤겔의 주장으로 발전된다. (24)

 

4.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확실성을 지닌 지식을 이성의 정신적 눈을 통해 파악할 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지식관은 오늘의 과학적 지식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과학적 지식에 있어서는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지식은 없으며 오직 시험에 의해 확증된 가설과 이론이 있을 뿐인데, 이것은 새로운 경험적 사실에 의해 언제라도 수정되거나 제거될 있는 잠정성을 지니고 있다. (25)

 

5.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변화에 대한 이론의 수정이라는 점에 있다. 플라톤의 이론에 있어서 주요한 점의 하나는 형상, 본질, 원본은 감각될 있는 사물들에 앞서서 그리고 그것들과 떨어져서 존재한다고 보는 점이다. 감각적 사물들은 형상, 본질, 원본으로부터 자꾸 멀리 떨어져 가는 방향으로 운동한다. 이에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감각적 사물들은 그것들의 최종적 원인 혹은 목적을 향해 운동한다. 그리고 최종적 원인 혹은 목적이 바로 형상 혹은 본질이 사물 속에 있으며 플라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사물에 앞서서 그리고 사물과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모든 운동과 변화는 사물의 본질 속에 들어있는 잠재적인 것들을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 (32)

 

6. 비판적 합리주의는 이성을 존중하되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는 지적 겸허를 지니고 있기에, 전통적인 합리주의자처럼 절대적 진리나 최종적 진리를 고집하거나 내세우는 지적 오만도 피우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성에 절망하여 감정과 정열에 모든 것을 내맡겨 버리지도 않는다. 논증과 경험을 인간지식의 탐구의 안내자로 삼되, 그것이 우리를 어떤 최종적 진리나 확고부동한 진리에 안내하리라는 지나친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인간은 상호비판을 통해 점점 세계의 진상에 가까이 접근해 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는 탐구에 몰두한다. 과학적 방법의 객관성을 높이 사지만 그것의 권위를 신주처럼 떠받들지도 않는다. 하늘 아래 수정가능성 앞에 개방되어 있지 않는 인간의 지식과 진리와 지혜가 없다고 그는 본다. 모든 것은 유한한 인간의 산물이므로, 이상의 것일 없기 때문이다. „ 자신을 알라 소크라데스의 권고는 비판적 합리주의가 있는 발바탕이다. (역자서문, 5)

 

7. 포퍼가 헤겔과 마르크스를 보는 관점은 바로 이러한 비판적 합리주의이다. 동일한 사물도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양이 여러가지로 달리 보인다는 것은 어린애도 아는 너무나 진부한 진리이다. 그러나 진부한 진리를 우리는 가끔 잊어버릴 때가 있다. 우리가 가끔 다른 사람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할 없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진부한 진리를 잊어 버렸을 때이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보았기에 동일한 사물도 달리 보일 밖에 없는데, 우리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보았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만 이상하다고 나무라기 일쑤이다. (역자서문, 5)

 

8. 포퍼는 역사주의를 질타한다. 그가 그것을 질타하는 까닭은 첫째로 역사주의는 역사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법칙에 의해 예언할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러한 주장은 점장이의 이야기와 크게 다를 없다고 본다. 그런 예측은 과학적 탐구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런 문제에 관해 이것도 저것도 그렇게 확실하게 말할 없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의 능력 밖의 일이다. 둘째로 그가 역사주의를 비판하는 까닭은, 그것은 우리가 확실히 알지도 못하는 어떤 필연적 법칙혹은 운명 인간을 가두어 놓음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왜소화할 아니라 인간의 창의적인 이성의 활동을 시들어 버리게 한다는 것이다. (역자서문, 5, 6)

 

9. 우리의 문명이 꺼지지 않고 계속 지탱하려면, 우리는 위대한 인간에 대해 그저 굽실거리기만 하는 버릇을 내던져 버려야 한다. 위대한 인간들도 실수를 저지를 있다. (8)

 

10. 이상 손댈 없이 완벽한 책이란 없다. 책에서 손을 떼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모자란 것을 발견한다. (10)

 

11.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가, 그리고 말의 의미 문제는 역사주의와 직접 연결된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이것은, 헤겔의 철학에 있어서 역사주의와 결합되어, 내가 예언적 철학 (주술적 철학, oracular philosophy)이라고 부르는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해로운 지적 질병을 퍼뜨리는 혼란의 원천이 되어 왔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겨 놓은 사상적 영향 가운데 가장 고약한 유산의 중요한 원천이며, 중세기 아니라 현대철학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출몰하는 말장난에 취해 있는 스콜라철학적 풍토의 원천이다. (35)

 

12.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사상의 발전은 이렇게 요약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법을 사용하는 모든 지적 작업은 말장난과 알맹이 없는 스콜라스티시즘에 사로잡혀 있으며, 여러가지 과학이 얼마나 진보를 성취할 있었느냐 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적 정의법을 털어 버릴 있었느냐에 달렸다. (35)

 

13. 과학의 행로에는 한 때 자명한 진리라고 선언되었다가 이제는 내버려진 이론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예를 들면 프란시스 베이컨은 태양과 별들이 명백히 정지된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조소하였다. (42)

 

14.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유효하게 무엇을 논의할 없다. 허송세월에 그치고 마는 많은 헛된 논쟁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의 뜻을 애매하게 알고서 상대방도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사실에 대부분 기인한다. 우리가 말을 정의하고 시작하면, 우리의 논의는 효과적일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신문을 들여다보면 선전 (수사학의 현대판) 말의 의미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혼동케 하는가에 달렸음을 발견한다. 만일 정치가들이 자기가 사용하고자 하는 말을 정의하도록 입법화한다면, 그들의 연설은 짧아질 것이며 그것의 대중적 인기도 줄어들며, 정치가들 사이의 의견의 대립도 대부분 순전히 언어에 기인하는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42)

 

15. 그리고 철학은 2천년 동안이나 말의 의미에 대해 걱정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애매하고 불명확한 말장난으로 가득차 있음에 반하여,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을 하지 않는 물리학과 같은 과학은 상당히 정확한 말을 사용한다는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낡은 신조에 매달려 있다. 이것은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말의 의미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고 나는 본다. (46)

 

16. 과학에 있어서 우리가 진술할 말의 의미에 의존하지 않도록 우리는 주의한다. 우리는 무슨 말을 정의할 때조차 정의로부터 정보를 끄집어내려 하거나, 정의 위에다 논지를 세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과학에 있어서 말이 그렇게 말썽을 부리지 않는가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말에 지나친 무게를 두지 않는다. 가능한 적은 무게를 부여하려 한다. 그리고 의미를 그렇게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말이란 어느 정도는 애매한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항상 인식하고 정확한 말을 쓰기 위해 애매성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감소하려 애쓰는 대신에, 말의 의미가 드리우는 여러 가지 음영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장을 엮어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에 관한 싸움을 피하는 방법이다. (46)

 

17. 정확성은 오차의 범위를 영으로 만들거나 오차가 전혀 없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있지 않고, 오차를 명백히 인식하는 있다. (46)

 

18.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동시성 같은 말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 있어서도, 화근은 말의 의미가 부정확하거나 애매한 있는 것이 아니라, 말에다가 너무 많은 의미와 너무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직관적인 이론에 있다. (47)

 

19. 헤겔의 이와 같은 철학적 방법이 놀라울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심각히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독일에 있어서 자연과학이 그만큼 낙후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당시의 진상을 말하자면, 헤겔의 이와 같은 방법을 쇼펜하우어나 프리스와 같은 엄격한 사람들이나, „페르시아의 국왕이 되느니보다 하나의 인과법칙을 발견하기를 원했던데모크리토스와 같은 과학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나는 본다. 세계에 대한 모든 비밀을 파헤쳐 놓을 없기 때문에 실망만 안겨 주는 과학의 전문적인 탐구보다도 세계의 비밀들을 곧바로 풀어 주는 비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헤겔은 커다란 명성을 휘날리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불모의 형식논리 대치한 헤겔의 변증법보다도 만능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헤겔의 변증법은 쉽사리 모든 문제에 적용할 있으며 동시에 엄청난 난해성 (비록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지니고 있긴 하나 신속하고 확실하게 척척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과학적 훈련이나 지식이 없이도 쉽사리 사용할 있으되 어마어마한 과학적 위험을 지니고 있다. 헤겔의 성공은 부정직의 시대 시작이며, „무책임의 시대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지적 무책임의 시대였다가 나중에는 귀결로서 도덕적 무책임의 시대가 되었다. 시대는 위세당당한 말의 주술과 전문적 조어의 힘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59)

 

20. 심리주의 (J. S. )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은 아마도 사회학자로서의 마르크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회학적 법칙의 보다 구체적 영역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율적인 사회학에 대한 보다 통찰력 있는 개념을 위해 길을 열어 놓았다. (130)

 

21. 심리주의, 사회생활의 모든 법칙은 궁극적으로 인간성의 심리적 법칙으로 환원될 있다는 그럴듯한 교설에 대한 마르크스의 반대 입장을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 그의 유명한 경구이다.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아니다. 차라리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존재이다.“ (134)

 

22. 심리주의의 주된 주장에 의하면, 사회적 관습을 포함한 모든 사회생활의 사건들은 개인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동기들의 결과요, 따라서 상호작용하는 마음들의 산물이므로, 사회적 법칙은 궁극적으로 심리적 법칙으로 환원될 있다. 이러한 심리주의 교설에 반대하여 자율적 사회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제도주의적 견해를 제안한다. 그들은 어떤 행동도 동기에 의해서만은 설명될 없다는 점을 먼저 지적할 있다. 동기 (혹은 다른 심리적이나 행동주의적 동기) 설명에 사용될 있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상황 특히 환경에 대한 참조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인간행동의 경우에 있어서 환경은 대체로 사회적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행동은 사회적 환경, 사회적 제도와 그것들의 사회적 기능방식에 대한 참조 없이는 설명될 없다. 그러므로 사회학은 행동에 대한 심리학적 혹은 행동주의적 분석에로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제도주의자는 논한다. 차라리 그런 분석은 사회학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사회학은 심리적 분석에 전적으로 의존할 없다. 사회학 적어도 사회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은 자율적이어야 한다. (135, 136)

 

23. 그러므로 사회의 모든 현상은 인간성의 현상이다라고 밀은 말했다. 그리고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법칙들은 인간존재의 정열과 행동의 법칙 , 개별적 인간성의 법칙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은 서로 합쳐놓았다 해서 다른 종류의 실체로 바뀌어지는 것은 아니다.“ 밀의 마지막 말은 심리주의의 가장 찬양할 만한 측면의 하나를 보여 준다. 그것은 집단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건전한 반대의 표명이며, 루소와 헤겔의 낭만주의 (일반의지나 민족정신 혹은 집단의식) 의해서 감명되기를 거부하는 자세를 말한다. 심리주의는 방법론적 집단주의 반대되는 방법론적 개별주의 일컬을 있는 것을 주장하는 한에서만 옳다고 나는 믿는다. (137)

 

24. 인간성에 관한 충분한 근거들이 제시되기까지는 사회과학에 있어서 일반화는 하지 말아야 하므로, 인간성에 대한 원리와 인간이 놓여 있는 위치에 대한 일반적 상황들로부터 인간의 발전의 순서를 선험적으로 결정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의 일반적 사실들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J. S. ) (137)

 

25. 인간 ( 인간의 마음, 욕구, 희망, 공포, 기대, 개별적 인간의 동기와 야망) 모두는 사회의 창조자라기보다 산물이다. 우리의 사회적 환경의 구조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제도들과 전통은 자연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결정의 결과들이며 인간의 행위와 결정에 의해 변화될 있는 것이라는 것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요구와 희망이나 동기 등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설계된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에 의해서 설명될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138, 139)

 

26. 아마도 심리주의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판은 설명적 사회과학의 주된 과제를 그것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있다. (139)

 

27. 마르크스의 경제적 역사주의에 대한 해설은 마르크스와 J. S. 밀을 비교함으로써 쉽사리 이루어질 있다. 사회현상은 역사적으로 설명될 있으며 모든 역사적 시기를 이전의 역사적 산물로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는 믿음을 사람이 같이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가 밀로부터 떠나는 점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헤겔의 관념론에 맞먹는) 밀의 심리주의이다. 밀의 심리주의 대신에 마르크스는 그가 유물론이라고 부른 것을 내세웠다. (150)

 

28. 자본론에 유명한 귀절이 있는데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헤겔의 저술 속에서는 변증법이 머리로 있다. 우리는 다시 그것을 바로 세워 놓아야 한다.“ 귀절의 방향은 분명하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머리 인간 사고 자체는 인간의 삶의 토대가 아니라 물리적 토대 위에 있는 상부구조이다. 비슷한 경향이 다음 귀절에도 표현되어 있다. „이상적인 것이 인간의 머리 속으로 자리를 바꾸어 번역되면 그것은 다름아닌 물질적인 것이다.“ (151)

 

29. 우리가 성취할 있는 것은 심신을 고갈시키며 품위가 전혀 없는 노동의 조건들을 개선하며, 인간의 값에 보다 어울리도록 그런 조건들을 만들며, 그것들을 균등화하며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있도록 하는 범위까지 잡역을 줄이는 일이다. 이것이 삶에 대한 마르크스의 중심 사상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교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이라고 나는 믿는다. (152)

 

30. 마르크스는 헤겔에 반대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역사와 심지어 사상사의 실마리는 인간과 그의 자연환경, 물질세계 사이에 나타나는 관계의 발전과정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의 정신적 삶에서가 아니라 경제적 속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때문에 우리는 마르크스 류의 역사주의를 헤겔의 관념론이나 밀의 심리주의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경제주의라고 묘사할 있다. (153)

 

31. 중심과제는 생산조건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는 일이다. (154)

 

32. 그의 헤겔적인 성장과정 때문에 그는 실재와 현상, 본질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이라는 고대의 구별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헤겔 (그리고 칸트) 수정을 가하여 형성된 그의 견해는 실재와 물질적 세계 (인간의 신진대사를 포함하여) 동일시하며 현상을 사상과 관념의 세계와 동일시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상과 관념은 밑바닥에 놓여 있는 본질적 실재 경제적 조건에 환원함으로써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견해는 어떤 다른 형태의 본질주의보다 많이 나은 점이 확실히 없다. 그리고 방법의 영역에서 파급효과는 경제주의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초래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경제주의가 지닌 일반적인 중요성은 결코 지나치게 평가되기란 대단히 어렵지만 어떤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 경제적 조건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기는 매우 쉽기 때문이다. (156)

 

33. 마르크스의 견해에 따르면 법적 혹은 정치적 수단에 의해 중요한 변화가 초래될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정치적 혁명은 집단의 지도자들로부터 다른 집단의 지도자들에로의 이행, 통치자로 행세하는 사람들의 단순한 교체에 그칠 뿐이다. 밑바닥에 놓인 본질인 경제적 실재의 변화 만이 본질적 변화 혹은 진정한 변화, 사회적 혁명을 낳을 있다. „그러면 사회적 혁명이 실재가 되었을 때만 정치적 혁명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된다.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더불어, 전면적인 상부구조의 변화가 신속히 이루어진다. 새롭고 보다 고차적인 생산관계 (상부구조 안에서) 그것이 존재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이 사회의 모태에서 성숙되고 나서야 출현한다.“ 이러한 진술에 비추어 러시아 혁명은 마르르스가 예언한 사회혁명과 동일시될 없다고 나는 믿는다. 사실에 있어서 그것들은 서로 아무 유사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157, 158)

 

34. 마르크스에 의하면, 어떤 제도적 혹은 객관적 의미에서의 계급이익은 인간의 마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헤겔의 말투로 말하면, 계급의 객관적 이익은 구성원의 주관적 마음 속에 의식화된다고 말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계급적 관심과 계급적 의식을 불러일으키며 또한 그렇게 행동하도록 한다. 제도적 혹은 객관적 사회적 상황으로서의 계급이익과 인간의 마음에 미치는 그것의 영향에 관해, 마르크스는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아니다. 그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차리리 그의 사회적 존재이다.“에서 서술하고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사회 안에서 있는 장소, 그의 계급적 상황 바로 그것이다 라고. (163)

 

35.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는 자기의 계급상황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계급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계급의 역사적 임무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계급이 수행하는 백절불굴의 투쟁이 보다 좋은 세계를 초래하리라고 굳게 믿는 노동자이다. (167)

 

36.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각각의 내부에서 나타나는 이해관계의 분규를 생각해 보면, 마르크스의 계급론은 너무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성을 지닌 주장이라고 보지 않을 없다. (168)

 

37.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마르크스의 진술이 지닌 위험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모든 정치적 투쟁이 착취자와 피착취자 간의 투쟁으로 해석하도록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몰고 간다는 점이다. (168)

 

38. 자본론의 서평자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얼른 보면, 책의 저자는 관념론자라는 말의 나쁜 의미에서의 독일 관념론의 거물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릴 있다. 그러나 실상 그는 그의 선배 어떤 사람보다도 엄청나게 현실적이다.“ 서평자는 정곡을 찔렀다. 마르크스는 거대한 전체론적 체제의 설립자들 중의 마지막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놔두어야 한다. 그것을 다른 거대한 체제로 대치하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체론 holism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점진적 사회공학이다. (189)

 

39. 마르크스의 예언적 논증의 둘째 단계의 전제는 가장 적합한 가정인데, 자본주의는 수가 점점 줄어드는 부르죠아의 수의 증가와 수가 점점 늘어나는 노동계급의 빈곤의 증가를 초래한다는 가정이다. … 부르죠아와 프롤레타리아를 제외한 모든 계급, 특히 소위 중산계급은 사라지게 마련이며 부르죠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에 점증하는 긴장의 결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점점 계급의식화하며 더욱 단결력이 강화게 된다. 둘째 부분은 이러한 긴장은 도저히 제거할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212)

 

40. 계급 사이의 분명한 구별이 나타나리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의 예언과는 반대로 그의 가정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계급구조가 나타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1. 부르죠아, 2. 대지주, 3. 기타 지주들, 4. 농촌노동자, 5. 중산계급, 6. 산업노동자, 7. 천민노동자 (또한 이런 계급들의 혼합형태도 나타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의 발전은 산업노동자들의 단결을 저해할 수도 있다. (215)

 

41. 자본론의 주된 교설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적대관계는 필연적으로 증가되며 사이의 타협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개선될 없고 오직 파멸될 밖에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마지막으로 자본가의 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요약하는 자본론의 중심적인 귀절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발전의 모든 혜택을 강탈하고 독점한 자본주의 유력자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빈곤, 압박, 노예화, 비하, 착취의 범위도 늘어난다. 동시에 수가 차츰 늘어나며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바로 매커니즘에 의해 훈련되고 통일되고 조직된 노동계급의 반역의 분노도 차츰 높아진다. 궁극적으로 자본의 독점은 그와 함께 그리고 아래서 성장한 생산방식에 족쇄를 채운다. 소수의 손에로의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적 조직화는 자본주의적 외투가 하나의 질곡으로 전환되는 지점에 도달한다. 그것은 드디어 산산조각이 난다. 자본주의자의 사유재산의 시간은 이제 되었다. 징발한 자는 징발당한다.“ (220)

 

42. 이러한 온건한 이론은 예언적 논증을 통째로 뒤집어 놓는다고 나는 본다. 그것은 타협의 가능성과 자본주의의 점진적 개혁의 가능성, 그리하여 계급적 적대관계의 감소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러나 예언적 논증의 유일한 기초는 계급적 적대관계가 증가한다는 가정이다. 타협에 의해 성취되는 점진적 개혁이 자본주의 제도의 완전한 파괴로 귀결된다는 논리적 필연성은 없다. 그리고 점진적 개혁에 의하여 그들의 운명을 개선할 있다는 것을 경험에 의해 알게 노동자들이, 비록 그러한 방식이 지배계급의 굴복이라는 완전한 승리는 거두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방법을 계속해서 채택하지 않으리라는 논리적 필연성도 없다. 또한 노동자들이 폭력적인 충동으로 귀결되기 쉬운 요구를 함으로써 그들의 이익을 희생시키기보다는, 부르죠아와 타협해서 부르죠아에게 생산수단을 소유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논리적 필연성도 없다.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이라곤 그들의 족쇄 밖에 아무 것도 없다고 우리가 가정할 때만, 그리고 빈곤의 증가법칙이 타당하며 그것은 적어도 개선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우리가 가정할 땜에만, 노동자들이 체제 전체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감행하지 않을 없게 것이라고 우리는 예언할 있다. 사회혁명에 대한 진화론적 해석은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논증을 첫단계부터 마지막까지 파괴한다. (222)

 

43. 저임금, 장시간 노동, 어린아이들의 노동은 마르크스가 예언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노년기의 특징이 아니라, 자본주의 유년기의 현상이다 (팍스). (257)

 

44. 방만한 자본주의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마르크스의 시대 이후로 민주주의적 간섭주의는 엄청난 진보를 이룩했다. 노동생산성의 개선은 (자본축적의 하나의 결과인) 실제로 비참을 없애 버리게 하였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여러가지 커다란 잘못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이 성취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 많이 개선될 있다는 신념을 우리가 가질 있게 한다. 해야 일과 방지해야 일이 많이 있다. 민주주의적 간섭정책 만이 그것을 가능케 있다. 그것을 하는 것은 우리의 어깨에 달려 있다. (257)

 

45.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교묘하게 꾸민 보조가설을 동원하여 그들이 예언했던 바와 같이 비참의 증가법칙이 실현되지 않았는가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보조가설에 따르면, 이윤율의 하락추세, 그와 함께 비참의 증가는 식민지 착취의 영향, 보통 말하는 대로 하면 현대 제국주의에 의해서 저지되었다는 점이다. … 아담 스미스는 식민지무역이 이윤율을 높이는 반드시 기여한다고 이야기했다. 엥겔스는 …. 영국이 전세계를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연유한다고 암시했다. 그리고 그는 영국의 노동자계급이 그가 예측한 대로 고통을 받는 대신에 점점 부르죠아가 되어 가고 있다는 냉소적인 말로 공격했다. „모든 나라 가운데서 최고의 부르죠아인 이들은 부르죠아적 귀족과 부르죠아적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죠아와 나란히 앉아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기를 원한다.“ (258)

 

46.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중산층과 하층 부르죠아들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들며 노동자들을 극빈자로 졸아들게 한다고 하여 자본주의를 규탄하였다. 지금 와서 엥겔스가 자본주의를 규탄하는 까닭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부르죠아로 만든다는 것에 있다. (258)

 

47. 사회민주당원은 그동안 진행된 너무나 명백한 사실들의 압력에 이겨 비참의 강도가 증가한다는 이론을 조용히 내버렸다. … 공산주의자들의 처지는 달랐다. 그들은 비참의 증가이론을 확고하게 붙드고 있었다. (259, 260)

 

48. 마르크스가 많은 것을 제대로 보았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그가 바와 같은 방만한 자본주의 제도는 그렇게 오래 계속되지 않으리라고 그의 예언과, 그것이 오래 가리라고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틀렸다는 그의 예언만을 고려한다면, 그가 말한 것은 옳다고 우리가 말하지 않을 없다. 자본주의를 새로운 경제체제로 변화시킬 있는 것은 계급투쟁, 노동자들의 연합이라는 그의 주장은 또한 옳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새로운 체제인 간섭주의를 사회주의라는 다른 명칭으로 예언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을 말하자면 앞에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는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가 사회주의라고 부른 것은 어떤 형태의 간섭주의와도 매우 다르다. 물론 러시아의 형태와도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앞으로 다가오는 사태는 국가의 정치적이며 경제적 영향력을 감소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는데 간섭주의는 어디에서나 국가의 영향력을 증가시켰다. (266, 267)

 

48. 말할 것도 없이 간섭주의 (특히 직접적 간섭주의) 최대의 위험은 국가권력과 관료제도의 증가이다. 대부분의 간섭주의자들은 이것을 개의치 않거나 그것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린다. 그런데 그것은 위험을 증가시킬 뿐이다. 위험은 정면으로 대결했을 때는 그것을 통제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순전히 사회기술공학과 점진적 사회공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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