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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법학
한스 켈젠 지음, 변종필.최희수 옮김 / 지산(길안사) / 1999년 4월
평점 :
품절
1. 법과 도덕의 차이는 두 사회질서가 무엇을 명령하고 금지하느냐에서 찾을 수 없고, 일정한 인간행위를 어떻게 명령하고 금지하느냐에서만 찾을 수 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법을 강제질서, 즉 일정한 인간행위를 야기하려고 하는 규범질서로 파악하는 경우에만 법은 도덕과 구분될 수 있다. 이 경우 법은 그것이 야기하고자 하는 행위와 반대되는 행위에 대해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강제행위를 연계시키는 반면, 도덕은 어떠한 강제도 확정되지 않는 사회질서이다. 도덕에 있어 강제는 규범합치적 행위에 대한 승인과 규범위반적 행위에 대한 불승인을 그 본질로 하며, 물리적 강제력의 적용은 결코 고려되지 않는다. (115면)
2. ... 왜냐하면 우리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절대적인 도덕가치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모든 경우에 선과 악, 정당함과 부당함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119면)
3. 실정법이론이 일반적으로 법과 도덕, 개별적으로는 법과 정의를 서로 구분하고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요청을 제기하는 경우, 즉 유일하게 효력있는 하나의 절대적인 도덕과 그에 기초한 절대적인 정의가 존재한다는 전통적 견해를 상대로 제기하는 것이다. (121면)
4. 상대주의적 가치론이란 - 종종 오해되고 있듯이 - 어떠한 가치도, 특히 어떠한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절대적 가치나 절대적 정의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상대적인 가치와 상대적인 정의만이 존재한다는 것, 우리가 규범정립행위를 통해 형성하고 우리의 가치판단의 기초로 삼는 가치들은 그와 대립되는 가치들의 존재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요청을 띠고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22면)
5. 그러나 우리가 실정법질서의 형성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경우, 즉 선하거나 악한 것으로, 정당하거나 부당한 것으로 평가하는 경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그 기준은 상대적이라는 것, 다른 도덕체계에 기초한 다른 판단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법질서가 어떤 도덕체계의 기준에 따라 부당한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에는 그와 다른 도덕체계의 기준에 따르면 정당한 것으로 판단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22면)
6.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 이 점은 다시 강조되어야 하며 또 분명하게 강조할 수 밖에 없다 - 하나의 유일한 도덕, 스스로 효력있는 하나의 절대적 도덕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극단적으로 다른 아마 서로 모순되는 다수의 도덕체계들이 존재한다는 통찰, 실정법질서는 수범자 내의 일정한 집단이나 계층, 특히 지배적인 집단이나 계층의 도덕적 견해에는 아마도 대체적으로 합치될 수 있고 또 사실상 대체적으로도 합치되지만 동시에 다른 집단이나 계층의 도덕적 견해와는 모순된다는 통찰이다. 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통찰은 윤리적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과 정당화될 수 있는 것에 관한 도덕적 견해는 법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가변적이라는 점과 법질서 또는 법질서의 어떤 규범은 그것이 효력을 가졌던 시대에는 그 당시의 도덕적 요청에 부합될 수 있었더라도 현재에는 극히 비도덕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전통법학에 만연되어 있었으나 순수법학이 거부한 테제, 즉 법은 그 본질상 도덕적이어야 하며 비도덕적인 사회질서는 법이 아니라는 테제는 절대적 도덕, 즉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효력을 갖는 도덕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간적․장소적 상황과 무관하게 법과 불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사회질서 속에 구축하려는 전통법학의 목적은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 (124면)
7. 순수법학은 법은 그 본질상 도덕적이라는 테제, 다시 말해 도덕적 사회질서 만이 법이라는 테제를 부인한다. 이는 첫째 그 테제가 절대적 도덕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요, 다음으로 특정 공동체의 지배적인 법학에 의해 사실적으로 적용될 경우에 그 테제는 그 공동체를 형성하는 국가강제질서에 대한 무비판적인 정당화로 이르러 가기 때문이다. (125면)
8. 법을 규범질서, 즉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는 규범들의 체계로 파악하면, 무엇이 제반 규범들의 통일성에 그 근거를 제공하는가, 왜 일정한 규범은 일정한 질서에 속하는가 하는 물음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은 왜 규범이 효력을 갖는가, 규범의 효력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 어떤 규범이 “효력이 있다”는 말은 그 규범이 구속력이 있다는 것, 즉 인간이 그 규범에 정해진 방식대로 행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01면)
9.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어떤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 나올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점이 나올 수 없다. 어떤 규범의 효력근거는 다른 규범의 효력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다. 구체적으로 말해 어떤 다른 규범의 효력근거가 되는 규범을 하위규범과 관련하여 상위규범이라고 한다. (301면)
10. 최고의 규범으로서 그것은 전제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상위의 규범에서 권한의 근거를 구해야 하는 그 어떤 권위에 의해 정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효력은 더 이상 상위규범에서 나올 수 없고, 그 효력의 근거는 더 이상 문제대상이 될 수 없다. 최고의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그와 같은 규범을 이 책에서는 근본규범(Grundnorm)이라고 부른다. ... 근본규범은 하나의 동일한 질서에 속하는 모든 규범들의 효력에 대한 공통적인 연원, 즉 공통의 효력근거가 된다. (303면)
11. 근본규범으로서 전제되어 있는 규범으로부터 그 효력근거와 효력내용을 구하는 규범들의 체계는 정적 규범체계(statisches Normensystem)이다. 이 체계에 속하는 규범들의 효력근거를 제시하는 원칙은 정적 원리(statisches Prinzip)이다. ... 그러한 규범은 그에 거를 두고 있는 제반 규범들의 효력근거만을 제공할 뿐, 효력내용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규범들은 동적 규범체계(dynamisches Normsystem)를 이룬다. 이 체계상의 규범들의 효력을 근거지우는 원칙은 동적 원리(dynamisches Prinzip)이다. (305면)
12. 동적 유형의 특징은 전제된 근본규범이 다름아니라 규범창설적 요건을 도입하고 규범정립적 권위에게 권한을 부여하며, 또는 - 같은 의미이지만 - 그 근본규범에 바탕한 질서 내의 일반적 규범들과 개별적 규범들이 어떻게 창설되어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규칙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305면)
13. 왜냐하면 근본규범은 규범정립적 권위를 위임하는 일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근본규칙은 그 체계 내의 규범들의 창설의 기초가 되는 규칙을 세우는 일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306면)
14. 근본규범은 효력근거만을 제공하지, 그 체계를 이루는 제반 규범들의 내용까지 제공하지는 않는다.
15. 근본규범의 본질을 인식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근본규범이 직접적으로는 사실상 정립되고 관습이나 규정에 의해 창조된 대체적으로 실효성을 갖는 일정한 헌법과 관련되어 있으며, 간접적으로는 이러한 헌법에 따라 창설된 대체적으로 실효성을 갖는 강제질서와 관련되어 있음을, 그리하여 근본규범이 헌법의 효력과 그 헌법에 따라 창설된 강제질서의 효력을 근거지운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312면)
14. 양 극단이란 당위로서의 효력과 존재로서의 실효성 사이에는 결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하는, 즉 법의 효력은 그 실효성과는 완전히 무관하다고 하는 테제가 그 하나이고, 법의 효력은 그 실효성과 일치한다는 테제가 다른 하나이다. 첫 번째 해결방법은 관념주의적 이론이고, 두 번째 해결방법은 현실주의적 이론이다. 전자의 오류는, 전체로서의 법질서 및 개별적 법규범은 그것이 실효적이기를 그칠 경우 그 효력을 상실한다는 점, 그리고 실정법규범이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존재행위에 의해 정립될 수 밖에 없다는 측면에서도 법규범이라는 당위와 자연적 현실이라는 존재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후자의 오류는, - 앞에서 본 바와 같이 - 법규범이 실효적이지 않거나 아직 실효성이 없더라도 효력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많은 경우가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331, 332면)
15. 근본규범은 국가헌법의 효력근거이면서 동시에 그 국가헌법에 근거하여 승인된 (즉 국가에 의해 효력을 갖는) 국제법의 효력근거이다. (33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