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1. 어떤 작가가 카를 마르크스보다 더 많은 독자를 확보했을까? 어떤 혁명가가 그보다 더 많은 희망을 그려보았고, 어떤 이데올로기가 그보다 더 많은 해설을 낳았을까? ... 오늘날 그를 연구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위독한 상태에 처한 자본주의나 손닿는 곳에 있는 사회주의를 신봉하면서도, 마르크스가 잘못 생각했다고 공공연히 주장한다. (6면)




2. 사회주의자라는 단어는 에드워드 오펜이 이 공동체(‘사회주의자’라고 명명된 최초의 공동체)의 창설자인 로버트 오웬에게 3년 전에 편지를 쓰다가 만들어낸 말이다. (34면)




3. 파리에서는 ‘라 트리뷴’지에 게재된 일련의 기사들 속에서 데자르댕이 노동계급을 지칭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40면)




4. “나는 젊은 시절에 장인의 철학 스승인 헤겔의 ‘어떤 강도의 사악한 사상일지라도 천상의 모든 경이로운 것들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을 장인이 자주 반복하는 것을 들었다.” (48면)




5. ‘과학은 윤리에 우선한다. 사회 분석이 도덕적이 되기 전에 합리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이 교훈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48면)




6. 그들은 “현실적인 것은 모두 이성적이며, 이성적인 것은 모두 현실적이다”라는 헤겔 변증법의 기본 공리를 선배들과 함께 공유했다. 하지만 보수파들이 이 명제의 첫 부분만을 예외적으로 강조한 반면, 진보주의적 젊은이들은 뒷부분을 강조했다. (53면)




7. 그의 사위 중 하나는 마르크스가 ‘비견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시적 상상력을 소유했다’고 후에 회고했다. (54면)




8. 세계에 영향을 미치려면 사상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56면)




9. 마르크스는 바우어나 젊은 헤겔학파와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세계를 변혁시키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생각했다. (57면)




10. 그는 헤겔을 깊이 연구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자기가 발견한 것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만다. 헤겔의 그로테스크한 멜로디는 더는 그에게 영감을 주지 못했다. (58면)




11. 그러나 마르크스는 새로운 과학에 통달함으로써 헤겔로부터 더 멀리 나아갈 필요성을 간파했다. 그 새로운 학문이란 바로 정치경제학이었다. (59면)




12.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글을 읽었다. 마르크스는 절대적인 부정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힘을 보유한 그에게 매료되었다. 존재를 일종의 추상적 관념으로 설정한 채 역사는 모순 없는 시스템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것의 탄생을 위해서는 모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헤겔을 과감하게 비판한 이 철학자에게 푹 파진 것이다. (59, 60면)




13. 사랑하는 아버지, 저의 좋지 않은 문체와 읽기 어려운 필체를 용서하세요. ... (66면)




14. 그가 생각하는 철학자의 역할이란 진실을 말하면서 현실에 관해 행동하는 것이었다. (76면)




15. 왜냐하면 헤겔이 생각한 것처럼, 국가란 사회계급 위에 있는 어떤 절대적인 것의 구현이 아니라, 어느 한 시대의 경제적, 법률적, 사회적 관계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82면)




16. “큰 위기를 맞고 있는 시절에는 철학이 실천적인 것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철학의 실천 또한 이론적이다.” (84면)




17. 마르크스는 시스몽디의 책에서 ‘잉여가치’와 ‘가치 상승’이라는 용어를 발견했고, 자본 집중과 프롤레타리아의 빈곤화에 대한 최초의 분석을 시도했다. (95면)




18. 많은 책을 읽은 마르크스는 경제학이 다른 모든 사회과학의 기반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 어느 것도 경제 법칙과 유물론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창안하기 위해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를 포기하게 된다. (96면)




19. 마르크스는 출간하게 될 잡지의 이름을 ‘프랑스-독일 연보’로 하자고 제안했다. 독일 철학과 프랑스 혁명의 경험을 연결하기 위해서였다. (107면)




20. 그 당시 발명된 전기가 그를 매혹시킨 것이다. 그는 전기를 모든 것이 풍요하고 개방적이며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의 상징으로 보았다. (124면)




21. 마르크스는 닥치는 대로 읽었고 자신이 읽은 책들에 대해 노트하며 글을 쓰고 싶어했다. 하지만 어떤 주제를 선택해야 할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 그는 언제나 가장 최근에 읽은 것에 대해 쓰기를 원했으나, 끊임없이 다른 책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발췌문을 거듭 작성하곤 했다. (125면)




22. 헤스(돈의 본질에 관하여)와 엥겔스(국민경제학 비판 대강) 덕분에 마르크스는 철학과 경제학 사이에 다리 하나를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127면)




23. 어린 시절이나 사춘기에 그럴 법한데 그는 평생 동안 어떤 글을 완성하고 나서도 손에서 놓는 것을 아주 힘들어했다. (128면)




24. 그는 독일 철학, 그 중에서도 특히 헤겔 사상의 중심 개념인 소외에 대한 결론을 끌어내고, 그 개념을 경제학과 연결짓고 싶어했다. (130면)




25. 마르크스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고, 특히 기술의 진보에 관심이 컸다. 그해 5월 24일 새뮤얼 모스가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의 전신선을 실험했는데 마르크스는 전기의 발명에 열광했다. 그는 이런 일들이 통신을 가속화하고 노동 생산성을 증대해 자본주의의 변화를 가져올 거라고 생각했다. (132면)




26. 그에게 소외란 헤겔처럼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회의 산물이었다. 그는 인간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노동에 의해 소외된다고 주장했다. (140면)




27. 프루동은 계산착오 개념을 통해 노동자의 단결과 조화, 그리고 그들의 노력과 동시성에서 비롯한 거대한 힘에 대해 자본가들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에 대해 비난했다. 9149면)




28. 독일철학이 개념 분석에서 사회적 역학관계의 역할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151면)




29. 1845년 9월부터 1846년 8월까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어바흐와 슈티르너를 비난하는 새 글을 집필했다.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의 이 글은 ‘성가족’보다 더 혹독하고 더 분명했다. ... 그들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슈티르너를 주로 공격했다(전체 596쪽 중에서 499쪽이 그에게 할당되었다). (170, 171면)




30. “특정 시대를 위해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독일인들은 영원을 위해 사고하고 행동한다.” (171면)




31. “사회의 상부구조(종교, 예술, 사상)는 사회의 하부구조(경제, 실제적인 것)를 정당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달리 말하면, 상부구조는 하부구조를 결정짓는 소외를 조직한다.” (172면)




32. ... 우리는 여기에서 하인리히가 자기 아들에게 지적 역량만을 키우지 말고, 신체적, 도덕적, 예술적, 정치적 능력도 키우라고 충고한 점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174면)




33. “‘철학의 빈곤’과 ‘공산당 선언’을 읽으면 ‘자본론’을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철학의 빈곤’은 20년 후에 ‘자본론’에서 발전한 이론의 싹을 담고 있다.” (182면)




34. ... 중간계급은 그러니까 혁명적이 아니라 보수적이다. 게다가 반동적이다. (201면)




35.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건 체계의 첫 번째 특징은 인간의 물질적인 열정에 대한 정력적이고 지속적이며 무절제한 호소이다. 물질적 번영은 특히 민주주의에 대해 흥미를 잃는 것으로 이끌어질 것이기 때문에 아주 위험하다. 물질적 안정에 대한 열정은 강박관념이 되어 시민이 의무에 헌신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토크빌은 보편적 평등을 추구하다 보면 자유를 부인하게 된다고 보았고, 사회주의란 새로운 형태의 노예화라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평등은 자유와 결합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평등이라는 단어에 의해서만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그 차이를 보라. 민주주의는 자유 속에서 평등을 원하고, 사회주의는 제약과 노예 상태 속에서 평등을 원한다.” 토크빌은 보호국가에 대한 이념도 거부한다. 공공의 자선을 확대하고, 공헌하고, 조절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217면)




36. 두 번째와 세 번째 기사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에 대립하는 희생자들 간의 연합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그가 처음으로 사용한 새로운 이름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 마르크스가 사용한 ‘독재’라는 말은 다수가 타협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지배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245, 246면)




37. 예니의 전기작가는 딘 스트리트를 ‘죽음의 거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마르크스 자신도 나중에 자신의 인생을 망친 곳이 바로 이 거리라고 썼다. (252면)




38. “자네는 중요하다가 생각해 읽어야 할 책이 한 권이라도 있는 한, 자네는 원고를 시작하지 못할 걸세.”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마르크스는 계속해서 읽기만 했지 글쓰기에 매진하지는 못했다. (265면)




39. “19세기의 사회 혁명이 자신의 시의 원천을 찾게 되는 곳은 과거가 아니라 오로지 미래에서다.” (275면)




40. “마르크스는 그때까지 유토피아의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던 사회주의 운동에 과학적 기반을 제공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그렇게 썼다.” (277면)




41. “이미 온갖 종류의 불운을 겪어왔네만, 진정한 불행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네. 나는 완전히 끝장난 것 같네.” (301면)




42. 마르크스는 그런 처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대영박물관에 다시 자리를 잡고 필요한 것들을 기록하면서 위대한 경제서적을 쓰는 일에 매진했다. 바로 그해 절망의 한가운데서 마르크스는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된다. 이 발견을 통해 1848년부터 고찰해온 노동의 소외에 대한 분석과 1850년에 연구한 계급투쟁의 역사에 관한 분석을 연결했으며, 사상사 속에서 그의 자리를 확실히 굳히게 된다. 그리고 이 발견을 통해 수천만 명의 임금노동자들에게 그들의 투쟁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해줄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임금노동자는 그가 버는 가치 이상의 것을 생산해낸다’는 것이었다. 에드가의 죽음 때문에 극도의 슬픔에 빠져 있던 마르크스는 슬픔 속에서 ‘잉여가치’ 이론을 구축했다. (304, 305면)




43. ... 그러던 중 마치 날짜를 확정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주요한 발견에 대해 예고했다. ...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시간’을 파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판다는 것에 대한 이론이다. (340면)




44. 출간된 지 1년 된 ‘종의 기원’을 읽어본 그는 다윈에게서 세계를 하나의 역사로 간주하는 또 다른 방식을 발견했다. 자신이 연구한 경쟁의 법칙과 다원이 세상에 내놓은 자연도태설 사이의 유사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마르크스는 1년 동안이나 중지한 집필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359면)




45. “다윈이 동물과 식물을 통해 영국 사회의 특징인 분업과 경쟁, 시장 개방, 혁신, 생존을 위한 투쟁 등을 발견한 것에 대해 나는 놀랍네.” (372면)




46. “노동은 그 성격상 자본에 대해 약자의 상황에 놓여 있다. 노동은 다른 상품에 비해 소멸되기 쉬운 성격을 갖고 있다. 노동은 축적될 수 없다.” (421면)




47. 조합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얘기다. 상업적 차원에서 빠져 나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해서는 정치 활동이 필수라는 말이었다. (421, 422면)




48. 특히 출간된 지 30년이나 된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철학 강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기는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이 이 인물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기 때문에 읽었을 뿐이지 이 책에서 아무것도 얻어낸 것이 없다고 하였다. 반면 그가 어떤 작가를 높이 평가할 때면 광적일 정도로 정확하게 문장을 인용했다. (425, 426면)




49. 그 때 마르크스는 20년 전에 발견했으면서도 아직 한 번도 발표한 적이 없는 중요한 이론을 예고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의 산물(그가 제조한 물건들)을 파는 것이 아니라 고용주로 하여금 일정한 시간(노동의 일정한 지속시간) 동안에 자신의 노동력을 쓰게 할 수 있는 능력을 판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자본가와 일종의 법적 허구인 불평등 계약을 맺는 계약 상대자가 된다.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파는 계약을 말하는 것이다. (428면)




50. 그의 사용가치는 그의 교환가치보다 더 크다. 노동자의 노동을 두고 자본가가 지불한 비용과 노동자가 창출한 수익간의 차이 -노동시간으로 측정된 차이-는 자본가가 자기 소유로 만드는 잉여가치다. 이 잉여가치를 통해 착취의 규모를 측정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초과노동’ 또는 ‘초과가치’라고 했는데, 이는 독일어 ‘메르베르트Mehrwert'를 직역할 말이다. (429면)




51. 그는 잉여가치를 증대하는 방법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자들의 탈진을 가져온다는 한계가 있다. 다른 하나는 임금노동잗르이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양을 줄이는 것, 즉 재화 제조의 노동 생산성을 증대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거의 무제한적이며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는 과정을 거친다. 첫 번째 방법은 노동자의 피로에 의해 제한되고, 두 번째 방법은 기술 진보 때문에 제한적이다. 첫 번째는 더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하고, 두 번째 방법은 더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한다. (430, 431면)




52. 그는 잉여가치의 경제적인 소유권 획득을 노동자에 대한 ‘착취’라고 명명하면서 그것을 철학적 개념인 ‘소외’와 구분하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렸다. 착취는 소외의 경제적 결과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결정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인 것이며, 역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소유한 것이 없는 노동자가 있다면,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모든 생산수단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432면)




53. 자본주의는 경쟁과 잉여가치의 축척이라는 장치에 의해 해체되고 변형되며 집중되어 자기 파괴에 이른다는 마르크스의 확신은 더욱 강화됐다. (438면)




54. “헤겔에게 사상의 움직임은 현실의 창조주다. 나에게는 반대로 사상의 움직임은 현실적인 움직임의 반영일 뿐이다. 헤겔에겐 변증법이 머리 위를 걸어가는데, 그것에 완전한 이성적인 모습을 찾아보려면 그것을 다시 발에다 갖다 놓기만 하면 된다.” (447, 448면)




55. “내 책에서 첫 번째로 훌륭한 점은 제1장부터 노동의 이중적 성격을 논하는데, 그 성격에 따라 노동이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로 설명된다는 점이며9사실들에 대한 이해는 모두 이 명제에 근거한다), 두 번째는 이윤, 이자, 토지임대료 등 개별적 형태들과는 독립적으로 잉여가치를 분석했다는 점일세.” (452, 453면)




56. 마르크스는 여전히 라살 파를 사회주의자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라살 당의 지도부에게 순수한 혁명적 목표와는 양립할 수 없는 부르주아적 휴머니즘의 색체가 지나치게 강하며, 생산구조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제기도 하지 않은 채 부의 최선의 재분배를 요구하는 것에만 만족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마르크스에게 수익 분배란 생산양식의 지엽적인 표면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는 부의 공정한 재분배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아래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544, 545면)




57. 머지 않아 사태는 마르크스가 옳았음을 입증했다. 마르크스주의자와 개량주의자 사이의 치열한 논쟁이 새로운 당 안에서도 계속되었고 독일의 두 사회주의 운동의 합병은 프로이센 국가의 강화를 가속화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모인 진보주의자들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비스마르크는 노동자들의 사회보장 시스템을 구축하고, 가까스로 용인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을 가혹하게 검열함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해나갔다. (555면)




58. 어떤 저서를 마쳐야 할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혹시 읽지 않은 책이 있는 건 아닐까, 어떤 중요한 자료를 참조하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끝없는 연구에 빠지게 만들었다. (567면)




59. 엥겔스의 죽음은 베른슈타인을 해방시켜 주었다. 점점 더 자신을 개량주의자로 느끼던 베른슈타인은 1896년에 런던에서 카우츠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급진적인 당 하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극진적 부르주아당이 하고 있는 것을 할 뿐입니다. 단지 활동이나 방식과는 전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언어 속에 그러한 사실을 감추고 있을 나름입니다.“ (635, 636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나키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1. 그런데 아나키즘을 삶의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나키즘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로 번역하지 않는다. 이들은 ‘반강권주의’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아나키즘은 국가 만이 아니라 시장의 폭력에 맞서고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주의에도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미래는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내가 합의한 질서를 뜻한다. 내가 스스로 복종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질서는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위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익고 억압적인 권력을 거부한다. 아나키스트는 스스로 동의한 권위이면 전체의 결정이라도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따르려 한다. 따라서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아나키즘을 오해하는 것이며, 이 한 가지 틀로만 해석하면 아나키즘의 다채로운 면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12면)




2. 자연히 보살핌이나 돌봄보다 경쟁력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고, 나보다 약한 사람을 배려하기보다는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이 성공의 법칙으로 권장된다. 우리의 미래는 함께 살고 함께 즐거운 사회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13면)




3. 아나키스트들은 자급이 가능한 소규모 사회를 꿈꾼다. 그리고 자급자족의 기본은 농업을 터전으로 삼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때에만 갖춰질 수 있다. (14면)




4. 자유무역협정(FTA) ... 선의의 협정 같지만 실제로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고 약소국 내의 기득권층의 배만 불리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15면)




5. 인도의 전통적인 마을 회의기구인 판차야트Panchayat에서 스와라지의 토대를 찾은 간디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중앙에 앉아 있는 스무 명의 사람들에 의해 작동될 수 없다. 그것은 마을의 모든 주민들에 의해 아래로부터 작동되어야 한다”라며 자치의 원리를 강조했다. (17면)




6. 아나키즘은 잘못된 결정이나 부당한 대우에 맞서 저항하고 싸울 때에만 나의 자치와 행복이 보장될 수 있다고 믿는다. (19면)




7. 무정부주의라는 잘못된 낙인과 함께 아나키즘이 가장 많이 받는 오해는 테러리즘이라는 비난이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무차별적인 테러를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 정의와 모두의 행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으라고 권한다. 아나키즘은 어느 한 가지길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이 선택한 결정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19면)




8. 하지만 아나키즘은 세상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경쟁할 때보다 협력할 때 더 잘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쌀 한 톨이 우주를 품고 있다고 보는 동양의 사상은 절대적인 자유를 주장하는 아나키즘과 공통점이 많다. (20면)




9. 하지만 아나키즘이 강조하는 자유는 사회적 자유, 다시 말해 개인의 자율성이 사회적 관계에 의존한다는 의미의 자유이다. “지상의 단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자유롭지 않다”라는 바쿠닌의 말처럼 아나키즘은 나만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추구한다. 아나키즘에서 자유와 평등은 대립하지 않는다. (21면)




10. 아나키즘은 역사가 정해진 경로를 따라 발전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미래의 사회가 어떠한 질서를 갖춰야 한다고 규정하지 않는다. 아나키즘은 그런 주장을 하는 기계적인 역사발전 이론을 비판하면서 풀뿌리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의 미래를 미리 알려주는 예언적인 이론은 불가능하다. 아나키즘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과학적 사회주의와 달리 본능적인 반란과 저항의 힘을 믿었다. 사회를 설명하는 과학적인 이론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인 자유를 억압한다. 아나키즘은 모든 사람이 혁명적인 열정, 즉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열정과 반란을 추구하는 신성한 본능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경직된 이론은 자유롭고 다양한 열정을 하나의 흐름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열정을 과열시켜 결국은 파멸을 부르기 쉽다. 이 점은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국가들의 몰락에서 증명되었다. (23면)




11. 아나키즘의 기원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나르코스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이라는 뜻이다. (26면)




12. 하지만 그런 걱정과 달리 머리를 맞대고 사람들과 나눈 대화는 우리의 생각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나 놓친 점을 보완하는 소중한 충고이다. 설령 배가 산으로 간다 해도 그 산이 우리에게 또 다른 고민거리를 던져준다면 그 경험은 아주 소중할 것이다. (27면)




13. “지배받는 백성이야말로 가장 존귀한 것이요, 국가를 떠받치고 있는 신들은 다음으로 존귀한 것이다. 그리고 지배하는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평범한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자라야 천자가 될 수 있고, 천자의 마음을 얻는 자가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을 얻는 자가 대구가 된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군주(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그 군주는 곧 변혁하여 새롭게 갈아치워야 하는 것이다. ... 그러나 평범한 백성들이야말로 영원히 갈아치울 수 없다.” 이처럼 맹자는 정치의 근본이 민중에게 있고 민중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라는 점을 서구의 정치사상가들보다 훨씬 앞서서 이야기했다. (28, 29면)




14. 노자는 백성의 수가 적은 작은 나라가 소박함과 순박함을 잃지 않고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며 ‘소국과민’을 주장했다. ... 노자는 설령 정부가 있다고 하더라도 민중을 다스리는 방식은 ‘악팽소선’, 즉 작은 생선을 삶듯이 자꾸 건드리지 말고 자켜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백성들의 삶을 쥐락펴락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소중하게 보살피고 돌봐야 한다. (30면)




15. 그래서 임금은 현명해야 한다. 그는 백성들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서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존재로서 무위의 철학을 가져야 했다. (30면)




16. 부지런히 자급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묵가는 노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려 했고 그런 사람들이 서로에게 보이는 겸애와 사랑, 보살핌이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라고 확신했다. (31면)




17. 이런 대동사상을 받아들여 자신의 혁명 이론으로 삼은 이가 조선 중기 선조 시대에 대동계를 조직화고 변화를 꿈꾸었던 정여립이다. ... 정여립은 몇 가지 선구적인 사상을 제시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천하공물설’이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라는 물음은 그 시대에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34면)




18. 프루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식, 곧 열심히 노동해서 얻은 것은 영원히 그 사람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에 도전했다. 땀 흘려 일해서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몰아내고 ‘나만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에게 자연이라는 축복을 내린 것은 분명하지만 그 축복은 한 사람만이 아니라 만인에게 골고루 내린 것이다. (40면)




19. ... 자본주의 국가와 시장이 프루동의 정의, 즉 “평등한 노동 조건 아래서 각자가 재산을 평등하게 나누”고 그런 관계 속에서 “‘자아’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지키는 정의로운 질서를 거부했기 때문에 프루동은 그들의 억압적인 질서를 거부했을 뿐이다. (41면)




20. ... 아나키즘은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었다. (42면)




21. 아나키스트의 역사를 정리한 애브리치Paul Avirich는 아나키즘의 경향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 번째 부류는 아나코-코뮤니스트anarcho-chommunist로 국가와 시장을 대체할 코뮌(공동체)을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크로포트킨으로 대표되는 이 흐름은 ... 두 번째 부류는 노동자들의 조합이 국가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나코-조합주의자anarcho-syndicalist이다. 바쿠닌을 따르는 이 흐름은 ... 세 번째 부류는 아나코-개인주의자anarcho-individualist로, 이들은 코뮌이나 노동조합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권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 독일의 사상가 슈티르너Max Stirner가 대표적인 인물로 ... 네 번째 부류는 앞서 세 가지 부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43, 44면)




22. 볼세비키 혁명은 국가를 해체하기는커녕 국가권력을 강화했다. ...한때 아나키즘과 생각을 같이했던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이제는 아나키스트들을 산적이나 혁명의 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46, 48면)




23. 데이는 “우리 모두 조금 가난해지도록 노력합시다. 제 어머니께서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만 덜 가지면 한 사람 몫이 나온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우리 식탁에는 항상 한 사람 몫의 자리가 더 있었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가톨릭 노동자운동은 사회 구조의 변화를 거부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변화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55면)




24. 자본주의 없는 세상은 지금 당장 불필요한 물건 생산을 거부하고 무절제한 소비의 쾌락에서 벗어날 때 실현된다. 혁명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삶 속에 있다. (57면)




25. “노예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내가 한 마디로 “그것은 살인이다”라고 답한다면, 그 생각은 금방 이해될 것이다. ... 그런데 왜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에 대해 ”그것은 도둑질이다“라고 달할 때마다, 내 답변이 잘 전달되지 못했다는 노파심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사실 두 번째 답은 첫 번째 답이 모양을 바꾼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66, 67면)




26. 이처럼 프루동은 노동의 대가라 해서 노동한 사람이 그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노동의 대가로 받은 물건이나 생산물을 이용할 권리는 있지만 그것을 소유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특히 모두가 함께 일해서 얻은 대가는 결코 한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다. (68면)




27. 그렇다고 해서 프루동은 모든 것을 함께 써야 한다는 공유제를 지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프루동은 공유제를 “강자에 대한 약자의 착취”라고 부르며 반대했다. ... 프루동은 무제한의 축적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와 인간을 평준화하려는 공산주의를 모두 반대했다. (70면)




28. 획일성을 규범으로 삼고 평준화를 평등으로 여기는 공유제는 전제적으로 부당하게 변한다. 반면에 소유는 그 전제와 침해에 의해 곧 압제적이고 비사회적으로 변한다. 공유제와 소유는 선을 원하지만 그 두 가지가 낳은 것은 악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 두 가지가 서로 배타적이기 때문이며 제각기 사회의 두 요소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공유제는 독립성과 비례 균형을 무시하고, 소유는 평등과 법을 존중하지 않는다. (프루동) (70면)




29. 프루동이 점진적인 사회 변화를 추구한 반면에 바쿠닌은 대중의 폭력적인 저항을 지지했다. 바쿠닌은 억압이 있는 한 민중의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반항과 저항이 끊이지 않으리라 믿었다. 혁명의 조건과 방향을 분석하는 과학적인 이론보다 대중의 분노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혁명을 살아 있게 한다. 특히 가난한 대중은 현재의 사회를 무너뜨리는 데 아무런 미련이 없다. 그들은 지금 이 사회에서 아무런 이득을 보지 못하고 착취만 당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쿠닌은 뭔가 조금이라도 잃어버릴 것이 있는 노동 계급보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도시 빈민이나 실업자들이 진정 혁명적인 파괴를 주도하리라고 믿었다. (75, 77면)




30. 파괴의 충동이 창조의 충동이다. ... 바쿠닌은 혁명이 부정적인 파괴 만이 아니라 자주 관리와 자유로운 자기 조직이라는 긍정적인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77면)




31. 바쿠닌은 “지상의 한 사람이라도 노예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는 “모든 사람의 자유에 대한 부정”을 뜻한다고 선언했다. (78면)




32. ‘빵의 쟁취’는 ‘상호부조론’과 함께 코로포트킨의 사상을 드러내는 중요한 저작이다. ‘상호부조론Mutual Aid'이 협력과 연대에 기초한 상호부조가 동물 세계와 인류 문명을 이끌어온 힘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힘은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동물학, 인류학, 역사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증명했다면, ‘빵의 쟁취’는 그 증명을 바탕으로 인간 사회를 분석하고 다시 구성했다. 크로포트킨은 이런 생각을 아나코-코뮤니즘으로 이론화했고 노동 생산물뿐만 아니라 지식의 공동 소유까지 주장했다. (79면)




33. ... 그것은 소수가 생산에 필요한 모든 것, 즉 토지, 광산, 기계, 교통론, 식량, 주택, 교육, 지식 등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 .... 따라서 크로포트킨은 독점이 사라지면 인류가 진보의 유산을 골고루 나눠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낭비되는 노동과 자원을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에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지구 상의 많은 빈곤이 해결될 수 있다. 생산 기술의 발달 덕분에 이미 생산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80면)




34. 중간 계급이 왕권에 반항하여 자기의 지위를 확보하고 동시에 노동자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만든 의회 제도는 중간 계급이 지배하는 독특한 형태이다. (크로포트킨) ... 크로포트킨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중간 계급, 즉 부르주아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제도라고 주장한다.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는 체제가 민주적인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대표는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을 대표하고 대다수 국민의 생각을 무시한다. 프랑스 사상가 루소의 말처럼 우리는 선거를 할 때에만 자유롭다. 그리고 대표를 통해서만 말해야 한다는 원칙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줄 대표가 없는 사람들은 말을 할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사회가 발달하고 이해관계가 다양해질수록 대의제 민주주의는 근원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고 크로포트킨은 날카롭게 지적한다. (83, 85면)




35. 북친Murray Bookchin은 아나키즘에 숨어있는 생태주의의 맹아를 직접 드러냈다. 아나키즘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만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포함해 모든 지배 관계를 없애자고 한다. (86면)




36. 중앙 집권적인 국가는 개인만이 아니라 생태계의 다양한 생명을 억압하고 그 다양한 생명체들이 자율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태적인 대안 사회는 단순히 자연을 보전할 뿐 아니라 인간 사회를 자율적이고 분권화된 공동체로 만들 때 실현될 수 있다. ... 북친은 생태적 감수성이 뛰어난 이론적 성과물이 아니라 바로 평범한 민중의 마음속에 있다는 점을 알았다. (89면)




37. 하지만 파괴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채호는 바쿠닌의 말을 받아들여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나,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들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가 다만 형식상으로 보아 구별될 뿐이요, 정신상에서는 파괴가 곧 건설”이라고 주장했다. (95면)




38.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풍요로움은 단지 물질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았고, 같이 일하고 즐거고 누리는 삶 속에서도 자유와 풍요로움이 녹아 있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삶의 즐거움과 만족감이 물질적인 풍요로움보다 더 소중하다고 믿었다. (105면)




39. 아나키스트들은 농업에 기반한 소규모 공동체나 작은 전원 도시야말로 인류가 만들어야 할 미래 사회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소규모 공동체에서만 스스로 다스리고(자치) 스스로 삶을 유지하는 것(자급)이 가능하다. (108면)




40. 아나키즘에 여러 가지 다양한 흐름이 포함되어 있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점은 자기 삶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이다.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 없고, 때로 어렵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때 인간은 성장하고 시민으로서도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자기 극복과 성장의 기회를 타인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라는 말이나 “너를 위해 내가 희생했다”라는 이야기는 아나키스트들의 귀에 결코 아름답게 들리지 않는다. (108면)




41. 선택과 결정에는 항상 책임이 동반되는데, 그 책임은 언제나 당사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113면)




42. 영국의 아나키스트 골린 워드Coln Ward는 아나키스트의 조직을 설명하기 위해 네트워크 개념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피라미드 대신에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한다. 모든 권위적 기관은 피라미드 구조를 가진다. ... 아나키즘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피라미드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조정하는 개인과 집단의 확장된 네트워크를 지향한다.” (116면)




43. 그(톨스토이)의 시각에서 볼 때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인간을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는 군대에 입대하면 안 된다. ... 톨스토이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저항하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톨스토이는 불복종이야말로 능동적인 저항의 방법이라고 보았다. (127면)




44. ‘아나-볼 논쟁’ ... 볼세비키 문인들은 계급해방 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지 못하는 예술의 가치를 부정하고 아나키스트 문인들을 좌익 문예가의 가면을 쓴 부르주아 문인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아나키스트들은 볼셰비키 문인들이 예술을 정치의 도구로 만들었다고 반박했다. (133면)




45. 실제로 아나키즘을 꿈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현실의 진지한 대안으로 다루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의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세계공화국으로’(2007)라는 책에서 마르크스와 프루동의 사상이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라는 같은 토대에 의존한다고 해석하면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념은 명확히 프루동의 것”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139면)




46. 아나키즘은 변화의 방향을 국가에만 맞추지 않고 다양한 사회적 실천을 장려한다. ... (145면)




47. 아나키즘은 관점의 차이야말로 역사를 발전시켜온 힘이라고 주장한다. 부싯돌이 서로 부딪쳐서 빛을 내듯이, 다양한 차이가 서로 충돌할 때 새로운 사상이 출현한다. 그리고 차이가 서로 충돌하며 만드는 다양함의 가치는 스스로 결정하는 자치를 만나야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내 속에서 나오지 않는 차이, 즉 권력이나 자본이 만든 차이는 긍정이 아니라 부정의 대상인 것이다. (148면)




48. 분명한 것은 아나키즘이 단순한 하나의 지적인 경향이나 흐름으로만 머물 경우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나키즘은 아나키스트로서 살아갈 때 실현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나키즘은 지식이나 학문을 넘어서는 삶의 지혜이다. (150면)




49. 함석헌은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고 “인격이란 것은 있기는 개個로 있으나 그 바탕은 사회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 함 또는 자치는 서구적인 개인의 자치가 아니라, 고립되지 않고 전체 속에 존재할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151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간디 자서전
마하트마 K. 간디 지음, 박선경.박현석 옮김 / 동해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1. 하지만 나는 딱 한 가지는 말해두고 싶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즉, 내게는 그것이 절대로 옳다고 여겨지며 한동안은 최종적인 것이라고도 생각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그것을 토대로 행동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받아들일 것인지 물리칠 것인지를 선택해왔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서 행동으로 옮겼다. (29면)




2. 무릇 진실을 탐구하는 자는 진개보다도 더 겸손해야 한다. 사람들은 진개를 그 발밑에 두고 짓밟는다. 하지만 진실을 탐구하는 자는 그 진개에게조차도 짓밟힐 만큼 겸손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진실을 언뜻 볼 수 있을 것이다. (31, 32면)




3. 나는 선천적으로 윗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장님이었다. 나중에는 나도 그 선생님의 결점을 여러 가지로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존경심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왜냐하면 윗사람의 행동에는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그 명령에 따르는 습관이 몸에 배였기 때문이었다. (47면)




4. 제 아무리 사소한 과실이라도 그것을 깨달으면 내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50면)




5. 연습을 하지는 않았지만 몸은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두고 싶다. 그것은 여러 가지 책을 통해서 오랜 시간 동안 문 밖을 산책하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배웠고, 그 충고에 따라서 산책을 거르지 않는 습관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이 습관은 지금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 산책 덕분에 상당히 튼튼한 체격을 얻을 수 있었다. (51면)




6. 진실한 사람은 또한 아주 세심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52면)




7. 진실에 대한 정열은 나의 타고난 천성이었다. (57면)




8. 개혁자는 개혁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상대방과 너무 친밀해져서는 안 된다. (60면)




9. 당시 기독교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거기에 대해서 나는 일종의 혐오감을 품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기독교의 목사들은 늘 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네거리에서 설교를 했는데 힌두교와 힌두의 신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곤 했다. 나는 그것을 듣고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딱 한 번 거기에 멈춰 서서 그들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으며,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을 반복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80면)




10. 진실은 나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장엄함을 더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에 관한 나의 정의도 더욱 범위를 넓혀갔다. (81면)




11. 이 책(채식주의를 호소함)을 읽기 시작한 날부터 나는 스스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싶다. 나는 어머니 앞에서 맹세를 한 날을 축복했다. (101면)




12. 연설할 때의 망설임은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예전에는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기쁨이 되었다. 그것의 가장 커다란 은혜는, 그것 덕분에 생각을 억제하는 습관이 생겼다는 것이다. 경험에 의해서 나는 침묵이야말로 진실의 신봉자에 대한 정신수양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15, 116면)




13. 제2장(에드윈 아놀드, 천상의 노래) 속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내 마음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 사람이 만약 그 관능의 대상에 집착하면, 대상의 매력 스스로 솟아나고 매력에서 욕망이 생겨나고, 욕망은 곧 격렬한 정열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정열은 무분별의 씨앗을, 깃들게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추억 - 전부 덧없는 - 에 높은 뜻은 사라지고, 마음은 메마르며, 결국에는 지조, 심정, 신명 모두를 잃게 될 것이다. - 그 울림은 아직도 내 귓가에 남아 있다. 내게 있어서 그 책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날 받은 감명은 날이 갈수록 더욱 깊어졌다. 지금 나는 그것을 진실한 지식을 얻기 위한 가장 뛰어난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나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측량할 수 없는 도움을 내게 주었다. (125, 126면)




14. ... 나는 민수기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다른 감명을 받을 수 있었다. ‘산상수훈’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내 가슴을 울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기타와 비교해보았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마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이 구절은 나를 한없이 기쁘게 했으며, 샤마르 바트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떠올리게 했다. ‘한 잔의 물을 받거든 산해의 진미로 거기에 보답하라.’ 나의 젊은 마음은 기타나 ‘아시아의 빛’의 가르침과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하나로 엮어보려 시도했다. 내게 있어 자기 포기야말로 가장 강한 호소력을 가진 종교의 최고 형식이었다. (127, 128면)




15. “자네가 무얼 걱정하는 건지 잘 알겠네. 자네는 아직 독서량이 부족해. 자네에게는 변호사의 필수조건인 세상 지식이 없어. 자네는 인도의 역사를 읽지 않았지? 변호사는 그 인간의 성질을 깨닫고 있어야만 해.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을 읽어낼 수 있어야만 해. 그리고 인도의 역사를 알아둘 필요가 있어. 이건 법률사무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자네는 거기에 대한 지식을 꼭 가지고 있어야만 하네. 그리고 자네는 케이와 맬러슨의 ‘1857년 반란의 역사’를 읽지 않은 것 같군. 바로 구하도록 하게. 그리고 인간의 성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두 권 더 읽도록 하게.” (132면)




16. 완전함을 소망하며 무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136면)




17. 내 생애에 깊은 인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나를 사로잡은 사람은 지금까지 세 명이 있었다. 살아 있는 교제를 나눈 레이찬드 바이,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의 톨스토이 그리고 ‘최후의 사람에게’의 러스킨이다. (136면)




18. 이 모욕에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두려움을 떨면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나를 여기에 앉힌 건 바로 당신이야. 나는 원래 마차 안의 자리를 잡았어. 나는 그 모욕을 참아왔어. 그런데 이번에는 밖에 앉고 싶은 건지 담배를 피우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당신 발밑에 앉히려 하고 있어. 난 그럴 수 없어. 마차 안에 앉겠어.” (158, 159면)




19. “그런 미신은 자네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자, 그 목걸이를 떼도록 합시다.” “아니, 그럴 수 없어요. 이건 어머니에게서 받은 신성한 선물입니다.” (172면)




20. 나는 남아프리카라는 나라는 자존심이 강한 인도인이 올 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어떻게 해야 이러한 현상을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182면)




21. 나는 법률가의 참된 임무가, 서로 어긋나버린 사건 당사자들을 결합시키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교훈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내게 심어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 후부터 20년 동안 변호사 일을 해왔는데 그 대부분을 수많은 소송사건의 자주적인 화해를 강구하는데 쏟아왔다. 나는 그것 때문에 잃은 것은 없었다. 단 한 푼의 돈도, 그리고 내 영혼에 있어서도. (185면)




22. 사건 자체는 그다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편이 되어,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을 위해서 공적인 활동을 해주는 사람이 나탈에도 몇 명 생겼다는 사실은, 계약 노동자들에게는 기쁘고 놀라운 일이었으며 그들에게도 희망을 품게 하는 일이 되었다. (192, 193면)




23. 그런 시간에도 사람들을 찾아 바쁘게 돌아다니는 내 열정이, 그 나이 들어서도 피곤을 모르는 학자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준 듯 했다. (201면)




24. 이렇게 내가 달아나는 동안 알렉산더 씨는 군중들을 이런 노래로 재미있게 해 그들의 발을 묶어놓았다. '늙은 간디의 목을 묶어라 신맛 나는 나무나무 위에' (211면)




25. 하지만 내 실험의 최종 결과는 미래에 속해 있는 것이다. (217면)




26. 나는 1920년, 청년들에게 노예의 성 - 그들의 학교 및 대학 -에서 뛰어나오라고 외쳤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노예의 사슬에 묶여서 학예교육을 추구하기보다는 자유를 위해서 무지한 채로 가장 비천한 일에 종사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나의 권고를 그 근본이 되는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잘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217면)




27. 나는 세탁 방법을 소개한 책을 사다 세탁 방법을 연구해서 그것을 아내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러면 내 일이 늘어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움이 그것을 즐거운 일로 만들어주었다. (218, 219면)




28. 자조와 간결함을 지향한 나의 정열이 결국에는 어떤 극단으로 치달았는지에 대해서는 적당한 곳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이처럼 씨앗은 오래 전부터 뿌려졌던 것이다. 그것이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맺기 위해서는 물을 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물은 적당히 뿌려졌다. (221면)




29. 나는 시련의 순간에야말로 인간성의 가장 좋은 일면이 나타나는 법이라는 사실을 ... (227면)




30. 하지만 나는 쓴맛도 몇 번 보아야 했다. 거주민들에게 의무를 수행하라고 말할 때는, 그 권리를 주장할 때처럼 그들 힘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몇몇 장소에서는 모욕으로, 다른 장소에서는 정중한 무관심으로 대접을 받았다. (229면)




31. 그런 것들을 받고서도 나는 보수 없이 인도인 거주민을 위해서 봉사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인가? ... 그처럼 막대한 금액의 선물을 포기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그것들을 받아들이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그것들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아내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들은 봉사하는 생활은 봉사 자체가 보수라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훈련을 받아왔던 것이다. ... 나는 이들 물건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32, 233면)




32. 공공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사람은 결코 고가의 선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의견이다. (236면)




33. 그리고 나는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하는 나의 습관, 몸의 청결함, 인내력 그리고 규칙적인 생활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247면)




34. 당시는 물론 지금도 나는, 아무리 일이 많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식사시간이 있는 것처럼 몸을 단련할 시간을 늘 만들어두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일하는 능력을 감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증가시킨다는 것이 나의 소박한 의견이다. (248면)




35. 모든 것이 자리를 잡기 전에 삼등차로 인도를 여행하며 삼등차에 탄 사람들의 어려움을 경험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250면)




36. ... 우리는 자신의 노력에 대해서 어떤 보수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모든 선행은 언젠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과거는 잊고 우리 앞에 닥친 임무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257면)




37. 나는 당시부터 이미 기타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매력이었다. 거기서부터 나는 한층 더 심오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60면)




38. 기타를 읽은 것이 내 친구에게 어떤 감화를 주었는지, 그것은 친구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내게 기타는, 행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지침이 되었다. 그것은 내가 늘 가지고 다녀야 할 사전이 되었다. 무소유와 평등이라는 말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떤 식으로 평등을 낳고 또 유지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261면)




39.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를 포기하고 신을 따라야만 했던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분명했다. 즉,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신을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261, 262면)




40. 그리고 나는 무소유에 대한 기타의 가르침은, 구원을 바라는 자는 막대한 재산을 관리는 하더라도 그중 단 한 푼이라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무소유와 평등은 심정의 변화, 태도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알게 되었다. (262면)




41. 그것이 내 관리하에 있는 한, 신문의 변화는 내 생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인디언 오피니언'지는 지금의 '영 인디아'나 '나바지안'과 마찬가지로 내 생활의 일부를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나는 매주 그 논설란에 나의 영혼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대로 사타그라하의 원리와 실천을 설명했다. 10년 동안, 그러니까 1914년까지 내가 강제적으로 휴양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투옥 기간을 제외하면 '인디어 오피니언' 지에 내가 쓴 논설이 게재되지 않았던 판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이들 논설 속에서, 생각 없이 혹은 숙고하지 않고 써내려간 말, 의식적으로 과장한 말, 혹은 그저 인기를 얻기 위해서 쓴 말을 단 한마디도 떠올릴 수가 없다. 실제로 내게 있어서 이 신문은 자기억제를 위한 훈련이 되었으며, 친구들에게 있어서는 내 생각을 접하는 수단이 되었다. (265면)




42. '인디언 오피니언'이 없었다면 아마 사탸그라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265면)




43. 그 책(러스킨, 최후의 사람에게)은, 일단 읽기 시작하자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를 단단히 붙들었따. 요하네스버그에서 더반까지, 24시간 동안의 기차여행이었다. 기차는 저녁이 되어서야 거기에 도착했다. 나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나는 이 책에 적혀 있는 대로 내 생활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나는 러스킨의 이 위대한 책 속에, 내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몇몇 신념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그렇게까지 나를 사로잡고 내 생활을 바꾸게 한 이유였던 것이다. 시인이란 인간의 가슴 속에 숨겨져 있는 선한 것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자들이다. 시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감화를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발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70면)




44. '최후의 사람에게'의 교훈 중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을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개인 속에 있는 선은 모든 것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선이다. 2.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생계를 얻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 한, 법률가의 일과 이발사의 일은 같은 가치를 가진 것이다. 3. 노동의 생활, 즉 땅을 가는 자의 생활과 수공업자의 생활은 모두 가치가 있는 생활이다. 이들 중 1번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었다. 2번에 대해서는 막연한 이해밖에 없었다. 3번에 대해서는, 그때까지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최후의 사람에게'를 일고 나는 2번과 3번 모두 1번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아주 명백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날이 밝음과 동시에 일어난 나는 이들 원리를 실행에 옮겨나가기 시작했다. (270, 271면)




45. 간소한 생활에 대한 추구는 더반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요하네스버그의 집에서는 한층 더 엄격하게 러스킨의 교훈을 지키기로 했다. 나는 변호사의 집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한 간소한 생활을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가구는 역시 필요했다. 변화는 외면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이 더 많았따. 모든 육체 노동을 내 스스로 하는 경우가 많아졌따. 그리고 그런 종류의 훈련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시키기 시작했다. (275면)




46. 전부 합쳐서 5마일이나 되는 거리였다. 그로 인해서 나와 아이들은 상당한 양의 운동을 할 수 있었다. 나는 특별히 누가 나를 불러 세우지 않는 한, 이렇게 걸으면서 하는 대화로 그들을 교육시키기에 힘썼다. (277면)




47. 후회가 되는 점은, 내가 이상적인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오직 거주민에 대한 봉사만 생각했다는 점, 어쩌면 그것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에 대한 문자 교육을 희생양으로 바쳤다고 생각한다. (278면)




48. 아이들은 문자에 대한 교육의 부족함 때문에 힘들어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자연스럽게 습득한 모국어에 대한 지식은 그들을 위해, 국가를 위해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외국인처럼 되어버렸을 텐데 그렇게 되지 않은 것만 해도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279면)




49. 하지만 당시 나는 '영국 제국은 세계의 복지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단순한 충성심 때문에 나는 영국 제국에 반감을 품은 적이 없었다. (280면)




50. 브라마차리아를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다면 가정에 대한 봉사와 인도인 거주민에 대한 봉사는 서로 모순된 것이 되어버린다. 브라마차리아를 수반해야만 그것은 완전히 일관된 것이 되는 것이다. (285면)




51. 나는 브라만차리아가 놀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단순히 육체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것은 육체적 절제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것의 완성에는 불순한 상념조차 배제되어 있다. (286면)




52. 내가 생활에 도입한 첫 번째 변화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그리고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그녀와 함께 있기를 금한 것이었다. (287면)




53. "선생님,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하실 생각이죠? 저는 고기를 먹이지 않아서 제 아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고기를 아내에게 먹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녀가 바란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290면)




54. 소금과 콩을 먹지 않는 식사에 대한 실험 ... 하지만 도덕적 견지에서 보자면, 자기억제는 모두 영혼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기억제를 실천하는 사람의 생활양식 전반이 쾌락주의자의 생활양식과 달라야 하는 것처럼 자기억제를 실천하는 사람의 식사는 쾌락주의자의 식사와는 달라야만 한다. (296, 297면)




55. ... 나는 과일만을 먹는 생활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과일은 가능한 한 싼 것을 먹기로 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297면)




56. ... 분명한 것은 정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97면)




57. 나는 자기억제가 그들 마음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으며, 육체를 정복하려는 그들의 노력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커다란 도움이 됐다고 믿고 있다. (299, 300면)




58. ... 정신적 교양이 결여되어 있는 훈련은 전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유해할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갖게 되었다. (301면)




59. 새로운 소송 의뢰인이 찾아오면 나는 가장 먼저, 허위로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으며, 증인에게 대책을 강구해주지 않는다고 경고를 해둔다. 그것이 좋은 평판을 얻어 내게 부정한 소송은 의뢰하지 않게 되었다. (304면)




60. 이쨌든 사건을 대하는 나의 이와 같은 태도는 내 직업에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실제로는 내 일을 하기 쉬운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진실에 대한 성실함으로 동료 변호사들 사이에서 내 평판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04, 305면)




61. 그 집회는 예정대로 1906년 9월 11일에 열렸다. 집회에서는 여러 가지 결의가 채택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유명한 결의 제4호였다. 이 결의에서, 우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법령이 입법화되면 인도인은 그에 따르지 말 것, 이 불복종 때문에 부과되는 모든 징벌을 감수할 것을 엄숙하게 결의했다. 누구도 우리의 운동을 뭐라 이름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수동적 저항'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 명칭을 사용하면서도 나는 '수동적 저항'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다. 단지 어떤 새로운 원리가 탄생하고 있음을 깨닫을 수 있을 뿐이었다.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서 '수동적 저항'이라는 말은 곧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311면)




62. 실리 마간랄 간디도 응모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선한 방침을 견지한다'는 의미를 가진 '사다그라하'라는 말을 제안했다.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함축하고 싶었던 생각을 전부 나타내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사탸그라하'라고 고쳤다. 진실(사탸)은 사랑을 포함한다. 그리고 견지(아그라하)는 힘을 낳는다. 따라서 힘의 동의어로써 도움이 된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인도인 운동을 "사탸그라하", 즉 진실과 사랑, 혹은 비폭력에서 태어나는 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동적 저항'이라는 말의 사용을 중단했다. (312면)




63. 나는 농장에서 식사와 병의 치료법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행했다. ... 그것들을 통해 캘커타에서, 젖을 최후의 한 방울까지 짜내기 위해서 젓소에게 얼마나 잔인한 짓을 하고 있는지도 읽었다. 그리고 젖을 짜내기 위한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방법에 대해서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우유 마시기를 그만뒀다. (333면)




64. 진실되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아사티야'는 비존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사티야' 혹은 진실은, 있음을 의미한다. 진실되지 못한 것은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의 승리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있음의 진실은 결코 파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사탸그라하 교의의 진수인 것이다. (339, 340면)




65. 이렇게 해서1906년 9월에 시작되어, 인도인 거주민에게는 수많은 육체적 고통과 재정적 손실을 주었으며, 정부에게는 깊은 걱정과 불안을 심어주었던 사탸그라하 투쟁은 '인도인 구제법'의 가결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인도인은 이제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1914년 7월 18일, 나는 기쁨과 슬픔에 한데 얽힌 감정을 품은 채로 영국을 향해 출발했다. 인도에 귀국하기 전에 고칼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기쁨이라고 말한 이유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의 귀국이었기 때문이며, 고칼레의 지도를 받아가며 조국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열렬한 소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슬픔이라고 말한 이유는, 남아프리카를 떠나는 것이 매우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남아프리카는 내게 인생의 쓴맛, 단맛을 충분히 맛보며 생애 중 21년을 지낸 곳이었으며, 생애의 사명을 깨닫게 된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360, 361면)




66. ... 나는 전쟁에 참가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도 나는 그 논의에 부족함은 조금도 없었다고 생각하며, 행동에도 후회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영국과의 연계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63, 364면)




67.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넘쳤다. 기금을 모아야 하는 책임에서 벗어난 것도 기쁜 일이었다. 그리고 나 혼자 모든 일을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는 언제라도 확실한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기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내 마음속 무거운 짐을 덜 수 있었다. (367면)




68. 우리의 신조는 진실에 대한 헌신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직무는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굳게 지키는 것이었다. (379, 380면)




69. 겸손의 참된 의미는 자기 소멸이다. 자기 소멸은 해탈ㄹ이다. ... 겸손함이 없는 봉사는 이기주의이자 자아주의이다. (380면)




70. 인도의 공공생활에 있어서 나와 같은 지위를 가진 사람은 깊은 주의를 기울여 규범을 보여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397면)




71. 내게 발해진 명령을 무시한 것은 합법적인 정부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보다 높은 존재의 법률, 즉 양심의 목소리에 복종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행한 것이다. (398면)




72. 그러나 지금까지도 종종 그래왔던 것처럼, 신은 내 계획이 완성되는 것을 기꺼이 여기시지 않으셨다. 운명은 다른 일을 결정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일을 시작하도록 나를 데리고 갔다. (408면)




73. 나의 단식은 그를 필두로 한 공장주 측에 긴장감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이 나의 가슴을 울렸다. 그리고 친누이 같은 애정을 보여준 그의 아내 사를라데비가 나의 행동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417면)




74. 누가 가난한 사람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민중들의 권리였지만 그들은 그것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권리를 행사할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426면)




75. 구제는 그들 자신 속에 있다. 특히 고뇌와 희생을 견디는 능력 속에 있다는 교훈은 사람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각인되었다. (427면)




76. 나는 남아프리카에서 일찍부터,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나는 융화로 가는 길 위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기회라는 기회는 단 하나도 놓친 적이 없다. 아첨을 하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줘가면서까지 사람을 달래는 것은 내 성격상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에서 얻은 경험이, 불상생이 가장 엄격한 시련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힌두와 이슬람 두 교도의 융화 문제에 부딪쳤을 때일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문제는 나의 불살생의 실험에 최대의 장소를 제공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믿게 해주었다. 이 신념은 아직도 남아 있다. 생애를 통해서 신이 내게 늘 시련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430면)




77. 종교에 대해서 말하자면 각자의 신앙은 다르다. 그리고 자신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앙이 지고한 것이다. (432면)




78. 자국이 말이, 자국과 관계된 일 때문에 자국에서 열리는 집회에서 사용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니. ... (435면)




79. 나는 1908년, 인도에서 더욱 심각해져만 가는 빈곤을 퇴치할 특효약으로써, 베틀 혹은 물레(차르카)에 대한 것을 ‘힌두 스와라지’에 적었지만, 그 이전에 물레를 본 기억은 없었다. 그 책 속에서 나는 인도를 구하고, 인도의 대중을 뼈를 깎는 듯한 가난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같은 경로를 통해서 스와라지를 수립해줄 것이라고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1915년, 내가 남아프리카에서 인도로 돌아왔을 때조차도 사실 나는 물레를 본 적이 없었다. (488면)




80. 경험을 통해서 진실 이외의 신은 없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각 장, 각 페이지가 전부 진실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불살생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선언하지 못한다면 나는 이 글들을 쓴 나의 노력을 참으로 허망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511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 부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경제 발전을 도모하던 시기에는 보호 관세와 정부 보조금을 통해 산업을 발전시켜 놓고 정작 지금에 와서는 후진국들에게 자유 무역을 채택하고, 보조금을 철폐하라고 강요한다. 과거 자신들은 여성, 빈민, 저학력자, 유색 인종에 대해서는 투표권조차 주지 않았다면서 지금은 후진국들에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면 경제 발전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은 다른 나라의 특허권과 상표권을 밥 먹듯이 침해했으면서도 이제는 후진국들에게 지적 재산권을 선진국 수준으로 보호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8면)




2.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자유 경제 정책의 산실로 여겨지는 영국과 미국에 대한 분석이다. 리스트에 따르면 대부분의 국가들의 경제적 번영의 원동력이었던 유치산업 보호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최초의 나라는 영국이었다. (23면)




3.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오른 사람이 그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은 다른 이들이 그 뒤를 이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수단을 빼앗아 버리는 행위로, 매우 잘 알려진 교활한 방법이다. 바로 이 방법에 스미스의 코스모폴리티컬 독트린과 동시대 위대한 정치가 피트의 코스모폴리티컬 경향, 그리고 이후 피트의 정치적 후계자들의 비밀이 담겨 있다. 보호 관세와 항해규제를 통해 다른 국가들이 감히 경쟁에 나설 수 없을 정도로 산업과 운송업을 발전시킨 국가의 입장에서는 정작 자신이 딛고 올라온 사다리(정책, 제도)는 치워 버리고 다른 국가들에게는 자유 무역의 장점을 강조하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걸어왔고 뒤늦게 자유 무역의 가치를 깨달았다고 참회하는 어조로 선언하는 것보다 더 현명한 일은 없을 것이다. (리스트) (24, 25면)




4. 그러나 불행히도 최근 20여 년 동안은 역사적 접근법과 가장 연관이 깊은 경제학의 두 분야인 개발경제학과 경제사학 분야에서마저도 역사적 접근법과 같은 귀납적 사고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주류 학파인 신고전주의적 접근법이 대세를 이루어 왔다. 따라서 현재 경제 개발 정책에 대한 논의는 눈에 띄게 몰역사적이 되었다. (28면)




5.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행히도 최근 수십 년 동안 소수의 주목할 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제 개발에 대한 역사적 접근법을 택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책의 목적 중의 하나가 근래에 많이 논의되고 있는 ‘바람직한’ 정책과 ‘바람직한’ 관리 제도에 대한 연구를 비평하는 데 역사적 접근법을 적용함으로써 그 유용성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데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29면)




6. 영국이 자유 무역 체제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진화된 기술력을 지녔기 때문이며, 이런 기술력 뒤에는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된 높은 관세 장벽’이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55면)




7. 미국이 19세기 초기부터 1920년대 사이 대부분의 기간 동안 가장 강력한 보호주의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동안 가장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룬 국가임을 베어록은 지적하고 있다. (65면)




8. 19세기의 미국은 보호주의 정책의 철옹성일 뿐만 아니라 보호주의의 사상적 고향이었다. (67면)




9. 당시 상황 중에서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따라잡기 기간’ 동안의 미국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영국 고전주의학파가 주장한 자유 무역 이론이 미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68면)




10. 일단 한 국가가 다른 국가보다 앞서 나가게 되면,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역량을 다른 국가들과의 격차를 더 벌리기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충동이 자연스레 생기게 된다. 영국의 정책, 특히 18세기와 19세기의 정책이 이에 해당하는 좋은 사례이다. 그런데 우려스러운 점은 18세기와 19세기의 영국 정책이 현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들과의 관계에서 사용하는 정책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101면)




11. 영국은 (다른 현 선진국들과 함께) 공식적인 식민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당시의 개발도상국들이 제조업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도 저지하려 하였는데, 이때 주로 사용된 방법은 19세기의 소위 ‘불평등 조약’을 통해 자유 무역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런 조약들은 대체로 (일반적으로 5퍼센트의 균등 세율이 부과되는) 관세 상한선의 설정이나 관세 자주권의 박탈을 수반하였다. 그와 관련 매우 우려스러운 것은 이처럼 (반드시 5퍼센트 이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낮고 균일한 관세율을 유지하라는 것이 바로 근래 자유 무역을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이 개발도상국들에게 권고하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리틀Little을 비롯한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대표적 연구에 따르면 최빈국에게 적절한 보호 관세율은 최고 20퍼센트 정도이며, 그보다 발전된 개발도상국들에게는 거의 0퍼센트가 적절하다고 한다. (104, 105면)




12. 그러나 사회복지 제도들은 단순한 사회적 안전망 이상의 것이다. 신중하게 계획되고 시행된다면, 사회복지 제도를 통해 효율성과 생산성의 성장을 높일 수 있다. ... (189면)




13. 사실 독일은 사회복지 분야의 개척자적 국가이다. 비록 실업보험제도는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도입(1905년)되었지만, 독일은 산업재해보험 제도(1871년)와 의료보험 제도(1883년), 국민연금 제도(1889년)를 최초로 도입한 국가였다. (191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한국은 이 금융 위기 이후 과거의 성장세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주된 이유는 한국이 ‘자유 시장 원칙’을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신봉하게 된 데 있다. (29면)




2. 규제 철폐와 민영화, 그리고 국제 무역과 투자에 대한 개방이라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적인 아젠다는 1980년대 이후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다. (31면)




3. 1841년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영국이 자신들은 높은 관세와 광범위한 보조금을 통해서 경제적인 패권을 장악해 놓고서 정작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유 무역을 권장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는 영국이 세계 최고의 경제적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고 비난하며 “정상의 자리에 도달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 올 수 없도록 자신이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은 아주 흔히 쓰이는 영리한 방책”이라고 꼬집었다. (34면)




4. 그러나 더 걱정스러운 것은, 요즘에는 아예 자신들이 권장하는 정책이 개발도상국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35면)




5. 프리드먼의 견해에 따르면, 올리브 나무 세상에 있는 나라들은 그가 ‘황금 구속복’이라고 일컫는 특정한 경제 정책에 맞게끔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렉서스 세상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 그가 제시한 황금 구속복은 세계화라는 가혹하지만 상쾌한 게임에 뛰어드는 데 이용가능한 유일한 의복이다. (43면)




6. 첫 번째 세계화 시기에 영국의 패권 하에 발전하고 있던 상품, 사람, 돈의 자유로운 이동은 대부분 시장의 힘이 아니라 군사력 덕분에 가능했다. ... 식민주의와 불평등 조약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자유로운’ 무역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세계화를 옹호하는 수많은 책에서는 이런 사실들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 그러나 식민주의와 불평등 조약에 묶여 있던 나라들이 올린 경제 성과는 형편없었다. (48, 49면)




7. 결국 첫 번째 세계화의 물결의 주요 설계사였던 영국은 이미 언급했듯 1932년에 자유 무역을 포기하고 다시 관세를 도입했다. 정사에 따르면 이 사건은 영국이 보호 무역주의의 ‘유혹에 굴복’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조치가 대부분 경쟁 국가들, 특히 미국이 보호 무역을 통해 새로운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한 결과 영국의 경제적 우위가 쇠퇴했기 때문에 내려졌다는 사실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50면)




8. 요약하면 1945년 이후의 세계화에 대한 진실은 정사와는 완전히 상반된다. 1950-1970년대는 국가주의적 정책에 의해 뒷받침되던 통제된 세계화의 시기였다. 반면 지난 25년간은 급격하고 통제되지 않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기였다. 통제된 세계화 시기의 세계 경제는 최근에 비해 훨씬 빠르게 성장했고, 훨씬 안정적이었으며, 소득 분배도 훨씬 균등했다. 이런 현상은 특히 개발도상국들에서 두드러졌다. 그러나 정사는 이 통제된 세계화의 시기를 개발도상국들의 국가주의적 경제 정책이 끔찍한 재앙을 불러온 시기로 그리고 있는데, 이렇게 왜곡된 역사적 기록을 퍼뜨리는 의도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를 감추고자 하는 데 있다. (57면)




9. 그러나 부자 나라들이 가진 막강한 영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영향력을 발휘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세계 경제의 규칙을 만들고자 하는 부자 나라들의 의도이다. ... 그렇지만 개발도상국들의 정책 형성에 있어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내가 ‘사악한 삼총사’라고 부르는 다자적 기구들, 즉 IMF, 세계은행, WTO이다. 이들 사악한 삼총사는 부자 나라들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은 아니지만, 주로 부자 나라들에 의해 통제되고, 부자 나라들이 원하는 나쁜 사마리아인 같은 정책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긴다. (58면)




10.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반혁명의 선두에 섰던 마가렛 대처 영국 수상은 ‘대안이 없다’는 말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물리친 적이 있는데, 세계화에 대한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설명 방식에는 바로 이 ‘대안 없음’이라는 식의 분위기가 스며들어 있다. (66면)




11. 자유 무역은 대개 약소국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강요된 것이었으며, 선택권을 가지고 있던 나라들의 대부분은 짧은 예외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유 무역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도 보여 주었다. (67면)




12. 디포는 ‘계획’을 통해 영국의 모직물 제조업을 발전시킨 것은 자유 시장이 아니라 정부의 보호와 보조금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74면)




13.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유시장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윌풀이 주축이 되어 세웠던 ‘중상주의 체제’를 호되게 비판했다. 애덤 스미스의 역작인 ‘국부론’은 영국의 중상주의 체제가 절정에 달했던 1776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책에서 그는 보호 관세, 보조금, 독점권 부여 등의 중상주의 시스템이 만들어 낸 경쟁 제한이 영국 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는 윌풀의 정책이 시대에 뒤처져 가고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물론 윌풀의 정책이 없었더라면 영국의 많은 산업들은 해외의 우월한 경쟁자들을 따라잡을 기회를 잡기도 전에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산업이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게 된 이상 보호무역은 그 필요성이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었다. 스미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더 이상 보호할 필요가 없는 산업을 보호하면 그 산업을 안일해져 효율성을 잃게 될 우려가 있던 만큼, 당시 영국으로서는 자유 무역을 채택하는 편이 훨씬 이로웠다. 그러나 스미스는 시대를 다소 앞서 가고 있었다. 그의 견해는 한 세대가 지나서야 확고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영국이 진정한 자유 무역 국가가 된 것은 ‘국부론’이 출간되고 나서 84년 만의 일이었다. ‘국부론’이 출간된 지 40여 년이 지나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이 되면 벨기에와 스위스 같은 나라들이 기술적 우위를 점했던 소수의 제한된 분야를 제외하고, 영국의 제조업자들이 세계 최고의 실력자로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유무역이 자신의 이익과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자유 무역을 옹호하는 활동을 개시했다. (78, 79면)




14. 곡물법 폐지 운동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경제학자이자 직업적 주식 투자자였던 데이비드 리카도가 제시한 비교우위 이론으로, 이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자유 무역 이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 뒤집어 말하면 한 나라가 무역 상대국에 대해 가격 우위를 가지고 있는 상품을 하나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격 열위의 정도가 가장 적은 상품의 생산에 집중하면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80, 81면)




15. 요컨대 저명한 경제 사학자 폴 베어록이 표현한 대로, 영국은 ‘장기간 계속되어 온 높은 관세 장벽’ 뒤에 숨어 경쟁국들을 누르며 기술적 우위를 획득하고 나서야 자유 무역을 채택한 셈이다. 사정이 이러니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81면)




16. 많은 미국인들은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을 미국 노예들을 해방시킨 ‘위대한 해방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링컨은 유치산업 보호를 강력하게 옹호했던 인물이었던 만큼 미국 공업을 보호한 ‘위대한 보호자’라는 명칭까지 달아야 마땅한 사람이다. 링컨은 휘그당의 헨리 클레이 밑에서 정치 경력을 쌓았는데, 헨리 클레이는 유치산업 보호와 운하 등의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로 이루어진 ‘미국 시스템’의 창설을 옹호했다. (87면)




17. 당시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링컨이 1862년에 노예 제도를 철폐한 것은 도덕적인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적인 조처였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실제로 남북전쟁을 초래한 노예제만큼이나 중요한 문제,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무역 정책을 둘러싼 불화였다. (89면)




18.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1930년대의 스페인을 제외한다면 오늘날의 부자 나라 가운데 영국이나 미국만큼 강력하게 보호 무역 정책을 실시했던 나라는 없다. 흔히 보호 무역주의의 본가처럼 알려진 프랑스나 독일, 일본 세 나라도 늘상 영국이나 미국보다 관세가 훨씬 낮았다. (물론 이는 영국과 미국이 경제적인 우위를 점한 후 자유 무역으로 선회하기 이전의 이야기이다.) (92면)




19. 안타깝게도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상대로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면서 자유 시장, 자유 무역 정책을 강요해 왔다는 사실 역시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이미 완정된 자리를 차지한 나라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사용해 효과를 보았던 민족주의적 정책들을 통해 경쟁국들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부자 나라들의 클럽에 최근 합세한 나의 모국 한국도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은 한때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보호주의적인 나라였지만, 지금은 WTO에서 완전한 자유 무역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제조업에 대한 관세를 크게 낮출 것을 주장하고 있다. (99면)




20.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권장하는 정책이 우리가 역사를 통해 최선의 발전 정책이라고 배운 것과 근본적으로 배치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100면)




21. 마찬가지로 개발도상국의 산업 역시 너무 일찍부터 국제적인 경쟁에 노출되면 살아남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선진 기술을 익히고 효율적인 조직을 만드는 등의 능력을 키워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앞 장에서 미국의 초대 재무 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헤밀던이 처음으로 이론화하고, 그 이전과 이후의 정책 입안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서 사용해 온 것이라고 소개한 유치산업 이론의 핵심이다. (109면)




22. 독자들은 보호주의적인 수입 대체 산업화 시기의 ‘성적이 형편없던 옛날’에 개발도상국들의 성장률이 현재의 자유 무역 하에서 이룬 성장률의 평균 두 배에 이르렀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자유 무역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113면)




23. 통제되지 않은 경쟁이 사회적인 낭비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지만, 완전한 중앙 집중적인 계획과 포괄적인 국유화를 통해 모든 경쟁을 억제하려던 시도는 경제의 역동성을 파괴하여 엄청난 비용을 초래했다. 게다가 공산주의 체제 하의 경쟁 부재와 과도한 하향식 규제는 순응주의, 관료적 형식주의, 그리고 부정부패를 낳았다. (164면)




24. 짝퉁 제조나 복제품 제조는 현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명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선진국들은 지식의 관점에서 볼 때 후진국이었던 시절에 하나같이 다른 나라 사람들의 특허권과 상표권, 저작권을 닥치는 대로 침해했다. (206면)




25. 하지만 1998년의 법(저작권 보호 기간 연장법)은 불명예스럽게도 미키마우스 보호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은 디즈니가 1928년에 최초로 만든 미키마우스의 탄생 75주년을 내다보고 저작권 연장 로비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207면)




26. 실험실에 있던 개별적인 과학자들의 힘만으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서로 맞물려 있는 특허 관계라는 위험한 영역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법률가 집단이 있어야 한다. 만일 서로 맞물려 있는 특허 관계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지 못하면 특허 제도는 실제로 기술 진보를 촉진하는 박차가 아니라 커다란 장애물이 될지도 모른다. (215면)




27. 그러나 솔직히 말해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지적소유권 제도가 경제발전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부자 나라들이 전체 특허의 97%를, 그리고 저작권 및 상표권의 대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적소유권 보유자들의 권리가 강화되면, 개발도상국들의 지식 획득 비용은 높아질 수 밖에 없다. (216면)




28.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시장과 민주주의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충돌한다.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시장은 ‘1달러 1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265, 266면)




29.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1달러 1표’의 원리를 전면 부인함으로써 경제적 비효율성을 초래하고, 다른 기준에 근거한 불평등을 확산시켰다. (267면)




30.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권장하는 자유 시장 정책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시장의 ‘1달러 1투표’ 규칙 속으로 밀려 들어가는 정책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개발도상국의 민주주의를 뒤흔드는 정책들을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268면)




31.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 이후로 유교 문화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이 지역의 경제적 성공을 가져온 원인이라는 주장이 널리 펴져 나갔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이 있기 전까지 사람들은 이 지역의 발전 지체를 유교 탓으로 돌렸다. (291, 292면)




32. (아프리카와 남미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떠올리는) ‘오늘을 위해 사는 것’ 혹은 ‘태평하게 사는 것’ 역시 경제적인 조건이 빚어 내는 결과이다. 천천히 변화하는 경제에서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필요성이 그다지 많지 않다. 사람들은 (새 직업 같은) 새로운 기회나 (수입품의 갑작스런 유입 같은) 예기치 않은 충격을 예상할 때에만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때문이다. 더군다가 가난한 경제는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신용, 보험, 계약 따위의) 장치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299면)




33. 앞서 내가 일본과 독일, 그리고 한국의 사례를 들어 설명했듯, 경제 발전을 ‘설명’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근면, 시간준수, 검약 같은) 행동 특성들 가운데 대다수는 실제로는 경제 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결과이다. (306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