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교수 - EBS 다큐멘터리
EBS 최고의 교수 제작팀 엮음 / 예담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1. 이 책을 읽다보면 강의는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복잡미묘한 커뮤니케이션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9면)

 

2. ... 그러나 모름지기 학생이라면 교수에게 도전할 줄 알아야 한다. (26면)

 

3. 과거 교수님들이 강의실에 앉아 주저리주저리 그저 수업만 할 때 학생들은 하나둘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내가 학생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교수라는 직업은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알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28, 29면)

 

4. 나(골드스타인)는 학생들의 시험지를 되도록 빨리 채점해서 돌려주려고 한다.  (29면)

 

5. 그의 수업 콘센트가 '열정과 재미'이기 때문이다. (30면)

 

6. 그에겐 준비된 쇼맨쉽도 강의 교재 중 하나인 셈이다. (31면)

 

7. "나는 내 수업이 살아 숨쉬도록 연출하고 싶다. 수업을 창조하고 조율하는 감독이자 작가가 되는 셈이다. 이를테면 나는 오늘 히틀러가 되고 내일은 무솔리니가 된다. 이렇게 학생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것은 역사 수업에서 특히 중요하다. 나는 학생들에게 영상과 사진, 기사 등을 이용해 생생한 관련 자료들을 보여주고 이에 대해 토론하게 한다. 무솔리니에 관한 글만 읽는 것보다 그의 사진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쉽고 오래 기억되기 때문이다." (32면)

 

8. ... 책은 보조 자료로 이용할 뿐이다. 책은 가르침의 도구일 뿐 가르침 그 자체가 아니다. (34면)

 

9. ... 현장을 느낀다는 건 교과서로만 배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체험이다. (36면)

 

10. 사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나를 가르친다. (38면)

 

11. "아주 오래 준비한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그대로 나는 대부분의 동료 교수들보다는 많은 시간을 수업 준비에 할애하는 편이다. 나는 준비 없이 수업에 들어가거나, 노트에 써온 그대로 칠판 가득 판서만 하는 그런 수업은 하고 싶지 않다. 학생들은 큰 돈을 내가며 배우러 온 사람들이 아닌가." (46면)

 

12. "훌륭한 교수가 되는 결정적 비결을 알고 싶다고? 지금 하고 있는 일, 즉 가르치는 일을 즐기면 된다." (47면)

 

13. 특히 그는 새학기 첫 강의를 중요시한다. 첫 강의 시간에 학생들이 "바로 이게 대학 공부라는 거구나!"하며 공부에 대한 희망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조벽 교수는 그래서 첫 강의부터 학생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과제를 내준다. (57면)

 

14. "매 시간 빠짐없이 강의 노트를 작성한다. 지금까지 즉흥적으로 강의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60면)

 

15. 조벽 교수는 학생들을 능동적으로 유도하는 강의가 가장 효과적인 강의라고 믿는다. (62면)

 

16. "학생의 질문만 들어도 수업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알 수 있다. 질문하는 능력이 곧 이해력과 창의력의 척도다." (65면)

 

17. "What if ~ 라는 질문은 학생들이 배운 것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의 폭을 넓혀가게 하는 수단이다. 즉 하나 배워서 하나를 아는 것이 아니라 열을 터득하게 하는 방법인 셈이다." (66, 67면)

 

18.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대답을 찾도록 하면 재미있어서 자꾸 더 알고 싶어한다. 그 과정에서 신나게 공부할 마음도 생긴다. 즉 배움의 동기가 강해지는 것이다. 바로 이때 학생과 교수 모두 최고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76면)

 

19. "교육은 단순히 지식 전달이 아니다. 학생과 교수의 인간적인 만남이고,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84면)

 

20. 강의를 하다가 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질 때, 소위 아하~ 하면서 눈이 반짝거린다든지, 눈이 커진다든지 하는 순간에 나는 큰 기쁨을 느낀다. (85면)

 

21. "우리가 사회에 나가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면 다른 디자이너들과 생태학자들, 과학자들, 그리고 정치가나 지역사회 운동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야 한다.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디자인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집단의 의견을 수렴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지향하는 것은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예술가가 아니라 합리적인 디자이너다. 통합 수업은 그런 면에서 아주 효율적이다." (93면)

 

22. ...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캐넌 교수가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기대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소통', 그리고 '비판적인 사고'이다. (96, 97면)

 

23. "학생들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 모두를 고려해 보게 된다. 그 모든 것을 함께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디자인의 시작이다." (97면)

 

24. "디자이너는 곧 질문하는 사람이다. 디자이너는 고객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고, 그 문제의 이유가 무엇이며, 해결을 위해 가장 먼저 무엇을 할지 매일매일 질문해야 한다. 디자이너에게 질문이란 일의 심장과도 같다." (98면)

 

25. 비판적인 질문을 하고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제에 대한 이해와 관련 지식 습득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습 환경을 그는 '비판적 학습 환경'이라고 부른다. (98면)

 

26. "내 학생들은 짧은 시간에 프로젝트를 개발하거나 연습하는 것을 배운다. 이 체험은 학생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결국 사람은 서로 도우면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놀라운 기회다. 공동 작업이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면 말이다." (103면)

 

27. "대학원 시절, 학기가 끝날 때까지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건지 이야기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105면)

 

28.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은 세심하게 들어주기, 그리고 명확하게 말해주기이다." (109면)

 

29. 교사는 학생이 자신의 색깔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110면)

 

30. "첫 수업부터 모호하고 둥글둥글하게 정치철학이란 이런 거다 하며 이야기하는 건 정말 딱 질색이다. 그 대신 나는 학생들에게 매력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나의 학생들을 딜레마로 초대하는 일종의 초대장이다. 흥미진진한 정치철학 수업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노라는출발 종소리이기도 하고." (118면)

 

31. 흥미로운 질문과 여기서 파생된 핑퐁식 문답들이 얼마나 수업의 집중력을 높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가 바로 샌들 교수의 강의실인 것이다. (120면)

 

32. 샌들 교수는 학생들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교수와 상품 광고는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122면)

 

33. 샌들 교수가 정치철학 수업의 주제를 선별할 때 적용하는 첫 번째 기준은 '화제성'이다. 매우 화제가 된 내용이거나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일 경우, 학생들이 공부에 더욱 열의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교수가 하는 일이 상품 광고와 별반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유일한 차이점은 일단 사로잡은 학생들의 관심을 가지고 교수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122면)

 

34. 질문하지 않으면 정의도 존재할 수 없음을 우리는 조금씩 깨달아갔다. (124면)

 

35. "나는 내 학생들이 무엇보다도 스스럼 없이 질문하고, 또 나의 강의 내용에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철학자들의 생각에 도전하길 원한다. 나는 학생들이 과거의 철학자들에 대해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철학자들이 제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우리에겐 그들에게 도전하고 질문할 권리가 있다." (126면)

 

36. "학생들로 하여금 과목에 흥미를 느끼게 해야 한다. 그건 교수의 최우선 의무다. 학생들이 스스로 책을 찾아 읽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 (126면)

 

37. 호기심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사람은 늙는다. (128면)

 

38. 샌들 교수는 정보 전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호기심을 일깨우고, 과목과 배움에 관한 열정을 깨워 학습에 대한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야말로 교수의 진정한 임무라고 생각한다. (129면)

 

39. "그 옛날 누군가 내게 인간의 두뇌를 설명해주었을 때 내가 느꼈던 경이로움과 흥분을 떠올린다. 그리고 학생들이 그때의 나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본다." (135면)

 

40. "나는 학생들이 좀더 비판적으로 생각하길 원한다. 분명한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더해갈수록 나는 학생들에게 점점 더 어려운 문제들을 던진다.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학생들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발전시킬 수 밖에 없다." (145면)

 

41. "학생들을 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존중하는 마음이다. 학생들은 교수로부터 느끼는 감정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다. 그들은 자신이 교수로부터 존중받고 있는지 아닌지를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그러나 우리 교수들은 학생에게 당연히 존경받아야 한다고 기대하면서 자신들은 학생을 존중할 줄 모른다." (155면)

 

42. 물론 좋은 교수의 첫 번째 기본 원칙은 담당 과목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기본적인 것 같지만 그만큼 중요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지식을 잘 전달할 줄 알아야 한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천지 차이다. (157면)

 

43. "어린아이들은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166면)

 

44. "... 훌륭한 과학자라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선생님은 아니다. 좋은 수업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를 말하라면 나는 흥미를 꼽는다. 무엇보다 교수 스스로가 학생보다 먼저 그 과목에 흥미를 느끼고 즐거워해야 한다." (195면)

 

45. 세미나가 끝나고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세익스피어처럼 매끄러운 말솜씨로 발표한 사람이 아니라 발표자 스스로 흥에 겨워 좌중을 이끈 사람이라는 것이다. (196면)

 

46. 상켜 교수는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의 비중이 최종 성적의 2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도록 정해놓고 있다. 무언가 배우고 싶다면 결국 스스로 학습해야 하기 때문이다. (199면)

 

47. "... 나는 심지어 슬라이드조차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잘 쓰지 않는다. 이미 틀 지어진 형태의 감각자료를 제공하는 멀티미디어 자료는 학생들이 지적 상상력을 무한히 펼쳐 나가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통적 학습 자료인 교과서, 강의, 그리고 토론 등이 온라인 학습 자료와 조화를 이룰 때 시너지 효과가 가장 배가된다고 믿는다. 나는 이것이 진정한 미래지향적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214, 215면)

 

48. "나는 프로정신을 가지고 나누는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218면)

 

49.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은 질문을 많이 하게 하는 것이다. ..." (219면)

 

50. 난 잘 외우는 것에는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나는 학생들이 진정 이해하고 있는지에 의미를 둔다. (224면)

 

51. 교사로서 느끼는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학생들이 모르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포기하지 않고 논리정연하게 생각해본 뒤 스스로 문제의 본질과 답을 찾아내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227면)

 

52. 배운다는 것은 곧 질문할 줄 안다는 것이죠. (239면)

 

53. 인간을 질문할 때, 혹은 질문을 받고 고민할 때 가장 배움의 깊이가 깊어집니다. (240면)

 

54. 하버드대학교 정치철학과의 마이클 샌들 교수는 아주 심오한 주제를 위트있게 질문할 줄 아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질문을 '딜레마로의 초대'라고 표현하죠. 딜레마에 빠지면 괴로울 것 같지만, 예상 외로 학생들은 그 갈등을 즐거워해요. 그래서 그의 '정의론' 강의는 하버드 역사상 가장 많은 학생들이 수강한 수업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241면)

 

55. 최고의 교수들은 대개 성적 평가에 대해 매우 겸손한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허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타인의 지적 성장을 측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잘 알고 있어요. (241면)

 

56. 처음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점점 익숙해지면 분명 시간이 단축되거든요. 제가 만나본 교수들은 연구만큼이나 강의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시간이 줄어드는 걸 일정 부분 감수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교수는 대부분의 시간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보내는데, 강의를 준비하는 시간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 인생 자체가 불행할 겁니다. 그렇다면 당장 교수 일을 그만둬야죠. (249면)"

 

57. "교수는 학생을 가르치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 (252면)

 

58. 우리는 누구나 최고의 교수가 될 수 있습니다. 분명 충분히 시도해볼 가치가 있고, 또 성취 가능한 일입니다. 어쩌면 가장 큰 장애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와 편견일 거예요. 교육자로서의 자질은 타고나는 것이며,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 말이죠. (25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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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글쟁이들 - 대한민국 대표 작가 18인의 ‘나만의 집필 세계’
구본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1. "이거, 병원에서 의사들이 환자 차트 꽂아두는 거치대예요. 우연히 의료용품점 앞을 지나가다 보고 '이거다' 싶어 거금을 주고 바로 산 겁니다." 수백개 차트의 등에는 정 교수(정민)가 직접 쓴 제목들이 하나하나 붙어 있었다. 그런 파일이 빈 틈 없이 거치대에 빼곡히 꽂혀 있었고, 이를 빙빙 돌려가며 필요한 차트를 찾아서 꺼내 보게 되어 있다. 자료 찾기가 아주 쉬워 보였다. 정 교수도 스스로 일생 중 가장 성공한 쇼핑 사례라고 웃었다. (9면)

 

2. 정 교수는 어떻게 가장 고리타분해 보이는 전공을 가장 모던한 감각으로 무장하고 독자들을 이끌어갈 수 있을까? 여타 인문학자들과 다른 그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아니, 그 이전에 그는 왜 이렇게 열심을 책을 쓰는가? ... "그거보다 더 즐거운 게 없으니까." (11면)

 

3. "지식을 통한 창조의 욕구는 묘한 쾌감을 동반해요. 어떤 정보 하나를 찾으면 그 뒤로 연관 정보들이 줄서서 대령하고 있었던 것처럼 계속 나와요. 심지어 글 쓰다가 피곤해서 무심코 아무 책이나 집어 들어 펼쳤는데 논문과 관련된 페이지나 막힌 생각을 뚫어주는 힌트가 들어 있는 대목이 나올 때가 많아요. 그것도 생각 이상으로 자주 그래요. 그럴 때는 정말 소름이 꽉 끼쳐요." (12면)

 

4. 일단 쓴 글을 다시 매끄럽게 다듬는 방법으로 그(정민)가 가장 중시하는 것이 '낭독'이다. 글을 쓰고 나서 무조건 세 번씩 소리 내어 읽어본다. 다시 손보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아내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아내가 읽어가다 멈추는 곳이 있으면 그건 문장이 잘못된 거예요. 그런 곳들을 한 번 더 고칩니다." (14면)

 

5. 그(정민)는 글쓰기를 샘물과 펌프 물 퍼내기로 비유한다. 샘물은 퍼낼수록 고이니까 아껴 쓸 필요가 없고 쓸수록 생산적이 된다. 반면 하나를 쓰고 나면 그 다음에 뭘 써야 되나 고민하게 되는 글쓰기는 펌프 물 쓰는 것처럼 소모적인 글쓰기가 된다는 것이다. (15면)

 

6. 제(정민)가 놀란 것이 18세기 실학이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정보화인 거예요. (19면)

 

7. 그(이주헌)가 자신 있게 내세운 것은 단 한 가지. "아직 우리나라에 이런 책이 없다"는 차별성이었다. (28면)

 

8. 한동안 그(이주헌)가 집중적으로 소개한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인상파나 고대미술처럼 중복되어 소개된 미술 말고, 외국에서는 이미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아직 국내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조나 작가를 대중 선호도에 맞춰 소개하는 것이다. (33면)

 

9. 그(이주헌)의 글쓰기 원칙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의 글이 주는 매력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데 '뻐기지 않는 글'이다. "절대로 현학적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그는 늘 신경 쓴다. 그런 철학이다 보니 당연히 글이 이해하기 쉬워진다. 또한 독자지향적 글쓰기가 몸에 배여 있다. 각주를 거의 쓰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33, 34면)

 

10. 역사학자들이 일반 독자보다는 전문가 집단만의 관심사에 빠져 대중은 관심 갖지 않는 주제를 고집하거나 또는 대중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논문체 문장을 극복하지 못하는 글쓰기의 약점을 이덕일은 피해나갔다. 글쟁이로 성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글쓰기, 그리고 눈을 잡아끄는 주제에 달려 있다는 점을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던 덕분이다. (42면)

 

11. 이씨 스스로도 "늘 어렵게 살았던 터여서 '라면 세 개에 소주 한 병이면 하루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했다"라며 "아마 온실에서 도전한 사람이라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47면)

 

12. 철저한 시간관리와 규칙적인 삶의 태도 역시 그(이덕일)의 힘이다. ... "언젠가 저처럼 저술로 먹고사는 공병호 박사의 글을 봤는데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에 긴장감을 느껴야 건강한 삶'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정말 공감했어요." (47면)

 

13. 이씨는 자신의 가장 큰 무기이자 밑천은 단연 "사관 그 자체"라고 잘라 말한다. (48면)

 

14. "머리를 때리는 글이 아니라 가슴을 때리는 글을 쓰자." (한비야) (55면)

 

15. "행복하자, 부자가 되자. 그런 구호들이 넘쳐나는데 한비야를 만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10만 원만 내면 대륙별로 한 사람씩을 구할 수 있다는 거죠. 내 삶이 제대로 가고 있나 불안할 때, 모호하고 불안한 삶을 되돌아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을 때 한비야의 목소리가 있다는 거예요." (57, 58면)

 

16. 그(한비야)는 '글'만이 아니라 '삶', 그리고 '태도'로 그런 수준에 올라섰다. (59면)

 

17. ... 또 어떤 책을 쓰려고 세월을 발효시키고 있는 걸까? (61면)

 

18. 실제 글쟁이들 상당수가 메모광이다. 아무리 뛰어난 머리도 잉크를 따라가지 못한다. 글쟁이에게 메모보다 좋은 무기는 없다. (63면)

 

19. "... 권력이나 명예도 저술을 위해서는 뭉개버릴 수 있다는 프라이드가 없다면 저술가가 못 돼." (김용옥) (72면)

 

20. "독서는 무지막지하게 해서는 안 돼. 그냥 책 있다고 읽어선 안 돼요. 반드시 사계의 정통한 사람에게서 배워야 해요. 옛날에 도사를 찾아가듯 일단 찾아가서 독서의 방향을 얻어야 해. 찾아가서 당신이 이해한 핵심이 무엇이냐고 말로 묻고 터득하는 게 중요합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터득해야 관심이 생기는 거예요. 사람을 찾아 고개 숙이고 배울 생각은 안 하고 엉뚱하게 책읽고 ..., 그럼 안 돼." (75면)

 

21. 구씨(구본형)는 "내게 책을 쓴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질문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82면)

 

22. 책을 읽으면서는 대화를 하려고 노력한다. '내(구본형)가 저자라면' 하는 생각을 수시로 하는 것이다. '내가 저자라면 이 사례를 썼을까? 이런 소제목을 달았을까?' 같은 질문들이다. 본인이 글쟁이여서가 아니라 가장 좋은 독서법이어서다. "책을 읽으면서 질문을 해봐야 처음에 몰랐던 고민들이 보여요. 깊이 읽기 방법이죠." (85면)

 

23. 일주일에 책을 한 권씩 읽는 것, 그리고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칼럼을 쓰는 것이다. ... 연구원은 1년 동안 이 과정을 거친다. 1년 뒤에는 세 가지가 남는다. 50권의 독서, 50개의 칼럼, 그리고 자기 책의 얼개다. 남은 것은 실제 책을 쓰는 것뿐이다. 2년 안에 자기 관심사와 관련된 책을 한 권 쓰도록 도와주는 것이 연구소의 설립 목적이자 교육과정이다. ... 1기인 문요한 씨가 쓴 '굿바이 게으름'이 2007년 베스트셀러가 됐고, 역시 1기 오병곤 씨가 '대한민국 개발자 희망보고서'를 써 좋은 반응을 얻었다. (87면)

 

24. 그(이원복)의 말이 남들 배 아프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배경에는 당연히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가 46년 동안 만화를 그려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집-학교-작업실 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95면)

 

25. 그(이원복)가 '아스트렉스'로부터 받은 가장 큰 영향은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이었다. "충격적이었어요. '아니 이런 것도 만화로 그릴 수 있나' 하는 놀라움이었죠. ..." (101면)

 

26. 현지에 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분위기'를 알기 위해서다.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분위기이다. (102면)

 

27.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아 비교하고 분석해서 단순명료하게 정리해 주는 것, 그게 그(이원복)의 힘이다. (103면)

 

28. "전 교수 일을 하는 만화가입니다." (106면)

 

29. 1990년대 초, 연구소에 다니던 30대 초반의 공씨(공병호)는 "박사학위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는 곧 "나 자신이라는 상품도 지속적으로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이었다고 한다. (112면)

 

30. 자신에 대한 투자는 독서로 해결했다. 그(공병호)의 독서 및 글쓰기 원칙 또 하나, '독서는 소비다.' 읽은 것은 반드시 글로 써서 활용해보는 것이다. (114면)

 

31. 한국에서 1인기업으로, 프리렌서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강조한다. "항상 절박해요. 내일을, 고객을 모르겠어요. 세계적인 컨설턴트 톰 피터스의 강연장에 가봤는데,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서 슬라이드 강연 준비를 했다더라구요. '아, 저 나이에도 유명한 저 사람도 저렇게 처절하구나' 하고 동지애를 느꼈어요." (117면)

 

32. 미지의 길에 인생을 건 그(이인식)은 고시생들이 다니는 독서실에 등록했다. (123면)

 

33. "테크놀로지는 정보 전쟁이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교수들도 몰라요. 먼저 보고 공부해서 소개하는 것이 '장땡'입니다." (이인식) (129면)

 

34. 자료수집이란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를 찾는 것이며, 자료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찾아내는 사람이 진정한 글쟁이요, 이를 잘하는 이가 천재라고 생각한다. 자료들 사이의 관계를 찾아 정보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 바로 그(이인식)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요체이다. (135면)

 

35. 분야별로 파일노트를 만들어 정리하는데, 이런 노트가 30여 권에 이른다. 이렇게 시간을 두고 정리하고 발전시켜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자료들이 글이 되어 써달라고 부르는 것처럼 다가온다"고 그(이인식)는 말한다. "모든 자료는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가 있어요. 마지막에 최신 자료가 있을 뿐 그 뒤에는 연원과 맥락의 뿌리가 있어요. 그걸 알아내고 정리하는 게 진짜 자료수집을 하는 거예요." (135면)

 

36. 정발학연은 자료실이라기보다는 도서관이다. 책 2만여 권, 녹음테이프 2천 여개, 사진 20만 장을 이곳에 보관하고 있다. (주강현) (140면)

 

37. "자료가 공부의 반" (주강현) (141면)

 

38.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 "스스로 자료를 찾지 않으면 퇴화해요. 귀찮아도 도서관 가서 논문을 뒤지는 중에 다른 것도 알게 되고 뜻하지 않은 것도 만나게 되니까요. 찾는 게 일과이자 습관인 거죠." (141면)

 

39. 교수사회에서만 통하는 여러 가지 방어논리에 질렸다고 그(주강현)는 강하게 한국 대학의 풍토를 비판했다. "교수들은 저술가는 학자가 아니라고 몰아가고, 저서와 논문을 분리해요. 이게 교수들 자신의 안전을 위한 전략이예요. 제가 교수에 응모했을 때 겪은 일인데,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는 저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런 제목은 학술적 저술로 인정을 못한다는 겁니다. '조기에 대한 명상'도 '조기에 대한 연구'가 아니니 안 된다더라고요. 일본 호세이 대학에서도 번역출간된 책인데 이런 책이 학술서가 아니면 뭐가 학술서겠어요?" (143, 144면)

 

40. "제(주강현)가 여타 저술가들과 다른 점은 우선 마이너리티에 대한 일관적인 관심이예요. 두 번째는 쓰인 역사보다 쓰이지 않은 역사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했지만 사라져가는 것들의 최후의 기록자'가 되려고 합니다. '생활문화사의 수호자'라고 할까요?" (144, 145면)

 

41. ... 사소한 자기 생각들을 챙기는 것이 바로 저술의 시작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147면)

 

42. 그(김세영)처럼 모든 것의 이유를 "좋으니까"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인터뷰 상대도 드물었다. 노림수나 치밀한 준비는 태생적으로 싫어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157면)

 

43. 그(김세영)에게는 잘 밝히지 않는 과거가 있다. 중고등학교를 다 마치지 않았다. 학업을 그만두었음에도 그가 지금 뛰어난 작가가 된 것의 8할은 독서 덕분이다. 학교를 떠난 뒤 그는 오로지 책만 파고들었다. (157면)

 

44. "제(김세영)가 제일 잘 하는 게 '딴 생각 하기'예요. ..." (158면)

 

45. 그(김세영)가 살짝 밝히는 비법은 "사실은 거짓말처럼, 거짓말은 사실처럼" 쓰는 것이다. 여기에 "없는 일은 있는 일처럼, 있는 일은 없는 일처럼" 쓰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160면)

 

46. 매사 꼼꼼하고 분명한 허영만 확백으로 선 김세영 작가의 게으름이 기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탓이다. "저에게 '일이 이렇게 늦어지면 만화 작업에 연관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문제를 만드는 경제적 범죄다'라고 편지를 보내셨어요. 그래서 저도 '선생님이 책에 제 이름을 빼는 것은 살인죄 아닙니까?'라고 맞받았죠. 그러고 몇 년 지나서 '미스터Q'로 다시 시작하자고 먼저 연락을 해오셨어요." (163면)

 

47. 문제는 이 자료라는 것이 남이 모아주면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자신이 직접 분류, 정리한 자료라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자료를 찾는 과정, 찾아서 평가하는 과정, 그리고 정리하고 보관하는 모든 단계가 공부이자 저술 활동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모아야 할 자료의 양에는 제한선이 없다. 그러다 보니 학자 저술가들은 자신만의 도서관을 홀로 만드는 무지막지한 작업을 하게 된다. 얼마나 많이 자료에 투자하고 관리했느냐에 따라 저술의 양과 질이 바뀌기 때문에 모으고 또 모으게 된다. (167면)

 

48. "건축 자체는 종합 학문이예요. 그래서 책을 쓰는 것도 종합적인 시각을 필요로 해요. 건축현상의 사회문화적 맥락은 물론 역사와 철학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경제와 공학기술도 알아야 하고요. 그리고 예술적 심미안이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어요. 여기에 건축책은 글과 이미지를 함께 다룰 줄 알아야 쓸 수 있어요. 필자가 직접 이미지를 해결하지 못하면 글과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는 책을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임석재) (168면)

 

49. 임 교수의 자료철학은 '눈덩이론'이다. "자료는 눈덩어리 같아서 어느 정도 규모가 되어야 굴러가요. 물론 사놓고 평생 안 볼 책도 있어요. 그런데 그걸 버리면 나머지 자료들도 같이 죽어요. 경영효율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학문적으로는 그래요. 자료가 많아지면 생각이 넓어지는 효과도 있어요. 자료가 오히려 연구주제를 넓혀주기도 하는 거죠." (169면)

 

50. 특이한 점은 인용을 잘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그(임석재)의 취향이기도 하다. 인용보다는 사전을 철저히 활용하는 편이다. (171면)

 

51. 그의 건축사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독특한 '사관'이다. 그는 건축사관을 '중층변증법'이라는 자기만의 개념으로 풀이한다. 음양이론처럼 서로 짝을 이루며 대비되는 갖가지 '쌍개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건축물을 분석하고 특성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쌍개념은 성-속, 도시성-농촌성, 남성성-여성성, 대륙성-해양성, 이상성-현실성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임 교수의 건축사책은 이런 중층층변증법으로 건축사를 재정립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건축사는 수백 가지의 쌍개념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 쌍개념들의 상호작용이 수백 겹씩 중층되는 결과로 이뤄진다는 것이 임 교수의 중층변증법이다. 특히 하나의 문명이 쇠락할 때는 쌍개념이 갈등하고 각각 독자적으로 작용하며 기존 개념을 새로 대체하기도 해 제3의 상태, 곧 정-반을 거쳐 '합'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한다. (172, 173면)

 

52. 글쟁이로 모드를 바꾸면서 그(노성두)가 전범으로 삼은 '글 스승'은 두 명이다. 첫 번째는 고은 시인이었다. "땀 냄새가 나는 현장감이 일품"인 고은 시인의 시를 음미하며 곱씹었다. 또 다른 글쓰기 모델은 바둑 전문 기사 박치문 씨였다. "흰 돌 검은 돌 두 개만 가지고 우주처럼 써대는 수사"에 감탄해 글쓰기 방식을 들여다봤다. (180면)

 

53. 정 교수(정재승)는 가장 즐기는 책 읽기와 영화 보기가 실제로는 자기 연구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뇌를 연구하는 학자는 학제간 공동연구가 필수적인데 다른 분야 연구자들과 두루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가 된다는 것이다. "미래가 필요로 하는 인재상은 결국 한 우물만 파는 게 아니라 우물을 두세 곳 파고, 그 우물 사이에 지류를 내는 사람일 겁니다. 그런 사람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책 읽기라고 생각합니다." (192면)

 

54. "... 상대성원리를 설명하는데 교향곡 이야기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이렇게 연관 없어 보이는 것들이 실은 잘 묶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기쁨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거죠." (194면)

 

55. 새벽 1시 전에는 퇴근하는 법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하루를 쪼개 쓰면서 연구와 글쓰기를 병행한다. 그(정재승)는 이를 "즐거운 사명감"이라고 부른다. (194면)

 

56. 그러나 글쟁이로서 조씨(조용헌)의 '실탄'은 역시 대학에서 배운 이론보다는 찾아다니고 취재하고 만나서 보고 들은 것들이다. (201면)

 

57. "얼마나 쓰셨는데요?" "집 한 채 값은 되죠." ... "대신 이야기를 얻으셨네요. 그래도 재미있었겠어요." (202면)

 

58. 학야논재기중 '공부를 하면 녹이 그 안에 있다' (204면)

 

59. 팩트는 이야기가 될 때 팔린다. 이게 바로 기자는 돈을 못 벌고 작가는 돈을 버는 이유다. 미국 사람들이 하는 말 그대로 "Facts tell, stories sell"이다. 팩트라는 구슬을 꿰는 것, 그걸 잘하는 게 저술가다. (207면)

 

60. "이야기꾼은 삐딱혀야 혀. 평범한 사람들 만나면 상상력이 줄어요. 문필업은 반항적 기질이 있어야 해요." (208면)

 

61. "... 문화현상이라는 것은 굉장히 다양한데, 주변 요소들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거죠. 백과사전 작업을 하면서 사물을 여러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 더 절실해졌어요." (허균) (214면)

 

62. 특히 가장 책을 많이 쓸 법한 인문학 교수 글쟁이는 더욱 적었다. ... 책을 별로 읽지 않아서가 아니다. 당신이 읽을 만한 책을 지식인들이 쓰지 않기 때문이다. (221면)

 

63. ... 인문학 전체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 교수들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지금 위기가 아니라 기회를 맞고 있다. 인문학적 상상력의 가치와 중요성이 지금처럼 높이 평가받고 요구되는 때는 없었다. (222면)

 

64.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전공에서 연구성과를 꾸준히 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기가 연구하는 학문세계와 대중을 이어주는 책을 쓰는 것이다. 한 가지가 더 있다면 다른 문화권의 중요한 지식을 번역해 소개하는 일이다. (224면)

 

65. 스승 라종일 교수가 다른 학자에게 들었다며 자신(주경철)에게 들려 준 "가장 좋은 공부는 바로 서평"이라는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서평을 쓰려면 책을 비판적으로 읽고 생각해야 해요. 읽고, 생각하고, 써보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공부인 거죠." (229면)

 

66. "책을 일종의 부산물이죠. 교수의 임무인 연구와 교육은 따로 놀아서는 안 됩니다. 연구에서 나온 것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하고 피드백을 얻고, 또 오히려 학생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는 거죠." (229면)

 

67. 그(표정훈)가 다른 책벌레들과 조금 다른 점은 단순히 지식을 게걸스럽게 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정리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온 데 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독후감을 쓰고 책을 분류하는 것을 습관처럼 이어온 것이다. (233, 2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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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
최현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1. 인권은 보편적 가치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당위적인 가치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인권을 당위적 가치로 생각하는 데에는 인권을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 또는 ‘하늘이 부여한 권리’로 정의한 채, 현실에 바탕을 둔 시민권을 통해 인권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11면)




2. 선진국에서는 시민권 제도가 발전하여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인권이라는 이상을 실현한다. 이는 인권이란 현재 우리가 누리지는 못하지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시민권 제도를 개선하여 인권을 확대, 심화하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12면)




3. right가 올바른 것, 정당한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은 권리가 자연법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12, 13면)




4. 하지만 자연, 하늘, 신 가운데 어느 것도 실제로 인간의 권리를 보장하지는 못했다. (15면)




5. 하지만 근대 국가는 특정한 지역에 사는 특정한 시민들의 권리만을 보장했을 뿐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까지는 보장하지 못했다. 따라서 현실 역사에서 인권은 시민권의 형태로 실현되었다. (15면)




6. 계몽주의자들은 보편적인 의미에서 인권을 제시했지만, 근대 국가는 자국 시민들의 인권만을 보장했을 뿐 아니라 빈민층과 여성들을 배제해버렸다. 오늘날 대부분 국가에서는 여성과 빈민층에게도 시민권을 보장하지만 외국인은 여전히 시민권을 받기 어렵다. 인권이 도덕적, 당위적, 추상적 차원에서 논의된 인간의 권리라면 시민권은 제도적, 법적, 현실적으로 보장된 것이었고 시민권이 발전하면서 다시 인권에 대한 이해와 논리도 발전했다. (17면)




7. 이 선언(1789년 8월에 프랑스 국민의회가 채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제1조에서 천분 인권론에 기초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며, 제2조에서는 자유, 재산, 안전, 압제에 대한 저항권이 기본권으로 명시하고 있다. ... 제2조에서 재산권을 자연적 권리로 선언한 데 이어 제17조에서 다시 재산권을 신성불가침의 권리로서 선언하여 이 선언이 유산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 또한 드러낸다. (21면)




8. 결국 ‘안티고네’는 보편적인 자연법 또는 이성의 법이 특정한 사회의 규율이나 관습 또는 실정법을 앞선다는 자연법사상의 정수를 보여준다. (26면)




9. 따라서 그리스와 로마에는 시민의 권리citizen's rights라는 개념이 없었으며 시민의 지위 또는 자격civitas(영어의 citizenship)이라는 개념이 있었을 뿐이다. (33면)




10.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할 때 시민의 지위는 군대에서 익힌 조직적 경험으로 얻을 수 있는 ‘지배할 능력’과 ‘지배받을 능력’을 갖춘 남성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시민의 지위를 갖고 공직을 차지하면 공동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가지는 시민의 지위는 근대의 보편주의 시민권과 중요한 차이를 드러낸다. (34, 35면)




11.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나 초기 로마에서 시민의 지위는 그리스 혈통의 남성이나 로마 혈통의 남성에게만 부여되는 특별한 지위였지만 만민법이 적용되면서 모든 사람, 심지어 노예, 외국인, 야만인에게도 부여되어야 하는 것으로 새롭게 정의되었다. 신과 이성 앞에서 모든 인간의 영혼은 그들이 가진 지능, 성격, 재산 등의 불평등과 상관없이 평등하다는 자연법사상에 기초해서 법도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발전한 것이다. (36면)




12.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법학자인 장 제르송은 1402년에 출간된 ‘영혼을 가진 생명체의 삶’에서 jus에는 옳은 것이나 정의로운 것이라는 의미 이외에도 능력 또는 자유라는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50면)




13. 수아레스는 1610년에 펴낸 ‘법률론’에서 인간의 권리로서 jus를 새롭게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jus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소유물이나 자신에게 속한 어떤 것을 마땅히 통제할 수 있는 정당한 권한이다. 곧 jus naturale의 의미가 자연법에서 자연적 권한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51면)




14. 그로티우스는 수아레스의 논의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1625년에 펴낸 ‘전쟁과 평화의 법’에서 jus는 법 또는 정의라는 의미가 있지만, 인간과 관련해서 이야기할 때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정당하게 갖거나 행할 수 있는 정당한 자질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정당한 자질은 완전한 권한facultas(영어의 faculty)와 불완전한 성향aptitudo(영어의 aptitude)으로 구분했다. 더 나아가 그로티우스는 권한을 1) 힘(여기서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라는 힘과 타인을 부리는 권력이라는 힘이 포함된다), 2) 소유권, 3) 채권으로 각각 구분했다. 결국 그로티우스의 jus는 자유와 함께 인간과 사물을 통제할 수 있는 정당한 권한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근대의 권리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52면)




15. 제르송과 수아레스와 그로티우스에 이르기까지 jus naturale는 자연법에서 자연권으로 의미가 변화했는데, 홉스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개념인데도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혼동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념으로 명확히 구분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을 정확히 표현하는데 저마다 다른 용어를 사용했다. 즉 그는 1651년에 펴낸 ‘리바이어던’에서 수아레스와 그로티우스의 용례에 따라 jus naturale를 자연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대신 자연법을 뜻하는 새로운 용어로 lex naturalis(the law of nature)를 소개했다. 그는 법lex이란 이성으로 발견한 보편적 법칙 또는 계율로서 지켜야 할 의무에 가깝기 때문에 자유라고 할 수 있는 권리jus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54면)




16. 즉 홉스에게서 자연권은 자연적으로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 권리이며, 사회 계약과 그것이 만들어낸 근대 국가(바로 홉스의 리바이어던)를 통해서만 실현된다. 근대 국가와 그 국가가 만든 법(실정법)이 자연법을 대신하듯이 현실의 시민권이 자연권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56, 57면)




17. 로크의 사상은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을 위해 이 세상에 창조한 질서가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 홉스는 인간을 욕구의 화신으로 보았지만 로크는 욕구와 함께 이성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 로크의 자연권은 자연법에 따른 질서와 조화를 전제로 한다. .... 로크는 자연권을 생명권, 자유권, 재산권으로 구분해 현대에도 폭넓게 받아들이는 인권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57, 58면)




18. 로크의 자연권은 권리와 의무를 균형있게 다루었으며 이성에 따라 실정법에 비판 및 저항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하지만 로크는 이를 위해 홉스가 지상으로 끌어내려 인간 상호 존중의 지침으로 규정했던 인권을 다시 신의 하사품으로 되돌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신의 뜻은 해석하기 나름이었고 대개 돈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해석을 주도했다. 그 결과 재산권은 생명권과 함께 절대적인 자연권의 일부로 선언되었다. 따라서 로크는 재산권이 다른 사람들의 생명권이나 자유권을 침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자들의 자선이라는 매우 비현실적인 대안을 제기하는 데 그치고 만다. (60면)




19. 루소는 1762년에 쓴 ‘사회계약론’에서 “사회질서는 다른 모든 권리의 근본이 되는 신성한 권리다. 그런데 이 권리는 자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계약에 의거한다.”라고 했다. (61면)




20. 이처럼 일반 의지에 따라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 또는 정치 질서만이 유지될 가치가 있다는 루소의 발상은 저항권을 인권의 중요한 일부로 파악했다. 따라서 루소의 사회 계약론과 인권 사상은 혁명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담고 있었다. 로베르피에르 등 루소의 사회 계약론과 인권론에 공감한 프랑스 혁명가들이 이를 현실로 만들었다. (63면)




21. 근대 인권 사상은 홉스, 로크, 루소가 그 기초를 마련했다. 이들 인권론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지만 근대 인권 사상의 핵심이 공통으로 담겨 있다. 먼저 이들 모두는 정치 질서 또는 국가라는 관계 속에서 인권을 설명했다. 둘째, 이러한 정치 질서나 국가는 선험적으로 또는 초인간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인 시민이 자율로 선택한 것이다. 셋째, 정치 질서 또는 국가는 무엇보다도 시민의 생존과 자유 실현을 목적으로 형성되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64면)




22.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민의 지위는 정치 공동체인 폴리스나 레스 푸블리카에서 나온 말이지만, 근대 시민권citizen right, citizenship은 도시city에서 생겨난 말이다. 이것은 근대 시민권이 자본주의 경제의 중심이 되었던 근대 도시의 발전 및 자본가 계급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67면)




23. 천부인권설이라는 개념은 널리 퍼져나갔지만 하늘이나 신 또는 자연이 인간에게 권리를 보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현실에서 인간의 권리는 근대 국민 국가에서 시민권 제도를 마련하면서 보장되었다. (68면)




24. ... 조선의 양반들도 조선의 노비보다는 명나라 또는 청나라 사대부들과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시민권 제도는 시민들이 서로 평등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71면)




25. 로크의 자연권 사상에서 인간의 태생적 자유와 평등이라는 시민권의 대전제를, 몽테스키외의 삼권 분립 사상에 기초해 시민권 보호를 위한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 제도를 마련했다. (75면)




26. 또한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시민권 제도는 개인주의-보편주의 시민권을 지향하고 노동자와 같은 빈민층과 여성, 사회적 약자들을 시민권에서 배제했다. (79면)




27. 하지만 개인주의-보편주의 시민권은 실제로 사회적 강자인 자본가들을 국가 권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노동자와 장애인,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79면)




28. 물론 프랑스 혁명이 승인한 헌법과 시민권은 우애 속에서 자유와 평등이 공존할 길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부자들이 주도권을 획득하면서 개인주의-자유주의 시민권이 중요해지면서 재산권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79, 80면)




29. 자본주의는 개인주의와 보편주의를 강화해 정치적으로 평등한 시민권을 정당화했지만 동시에 경제적 불평등을 낳아 평등한 시민권을 다시 위협하게 된다. (80면)




30. 온전한 시민권을 얻지 못했던 노동자나 빈민층, 여성들은 사회주의 운동이 발전하고 평등에 대한 욕망이 커지면서 남성 노동자, 여성의 순서로 법적 시민권을 갖게 되었다. (81, 82면)




31.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은 국민 국가를 통해 시민권의 형태로 인권이 보장될 때 생겨나는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특정 국가가 자국 시민의 인권을 근거로 다른 국가 시민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생명을 부정하는 일이 늘 일어났던 것이다. (84면)




32. 인권 조항을 담은 ‘국제 연합 헌장’은 인권이 보편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세계에 공식적으로 알렸다. 비로소 시민권이 국가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85면)




33. 영국의 사회학자 마셜Thomas Humphrey Marshall이 1963년에 출간한 ‘계급, 시민권, 사회 발전Class, Citizenship, and Social Development’은 사회적 약자의 투쟁이 시민권을 어떻게 발전시켜왔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이 책에서 영국의 노동자 계급이 시민권의 내용을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 시민권의 적용 원리를 개인주의에서 공동체주의로 변화해나간 과정을 추적한다. 또한 영국 시민권의 발전 과정을 그 내용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 시기인 18세기 영국에서 시민권은 자유권적 기본권civil rights을 의미했지만, 두 번째 시기인 19세기에는 정치권political rights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마지막 시기인 20세기에 시민권은 사회권social rights도 포함하게 되었다. (95면)




34. 노동자 계급에 이어 페미니스트들이 자유주의적 시민권 제도의 문제점에 주목하면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개념이라고 비판했다. 자유주의에서 시민권은 보편주의라는 이름으로 계약 관계,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교환, 그리고 개인의 독립을 보장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자본주의 계급의 남성들을 위한 것일 뿐 여성들의 권리와는 상관이 없었다. 실제로 자유주의 시민권 제도가 여성을 무권리 상태로 버려두었던 것이다. (101면)




35. 예를 들어 전통적인 시민권 이론에서 여성의 특징으로 간주된 정서적 배려, 돌봄, 상호 의존은 가족 생활 같은 사적 영역에서는 의미가 있었지만 시민들이 활동하는 공적 영역에서는 부정적인 것,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여성의 특징이 시민권의 핵심 전제인 이성적 사고나 군사 활동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 오히려 감정 통제나 과묵함, 육체적 힘과 용기 등 남성다운 특성들을 시민이 갖춰야 할 덕성으로 삼았다. (102, 103면)




36. 영Iris Marion Young 같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이러한 불이익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는 1989년 발표한 ‘정치 공동체와 집단의 차이: 보편적 시민권의 이상에 대한 비판’이라는 논문에서 여성적 특성을 고려한 집단 인지적group-differentiated 시민권이 더욱 공정한 시민권의 형태라고 주장했다. (104면)




37. ... 노동자들이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사회권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사회권이 소수자들의 소외와 배재를 해결하는 방안이 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소수자들은 노동자들처럼 사회 경제적 지위 때문에 온전한 시민권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심리적, 신체적 정체성 때문에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회권보다는 문화적, 심리적 정체성과 연관해서 페미니즘에 의해 체계화된 집단 인지적 시민권이 소수 집단에게 실제로 큰 도움을 주었다. 집단 인지적 시민권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한 집단의 성원들은 개인뿐 아니라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통해 정치 공동체와 연결되며 그들의 권리는 소속 집단과 그 정체성으로 규정된다. ... 이를테면 집단 인지적 시민권은 여성에게는 모성 보호권을, 시각 장애인에게는 점차책과 말하는 건널목 신호등을, 다문화 가정 자녀에게는 대학 입학 때 가산점을 제공하는 권리를 말한다. (105면)




38. 자유주의자들은 특히 집단 인지적 시민권이 근대 시민권 제도의 보편주의를 위반하고 소수자들을 우대해 오히려 다수자들에 대한 역차별과 평등권 침해를 가져왔다고 비판한다. 문제 제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주의-보편주의 시민권 제도가 모든 시민에게 공통의 권리를 보장하고 발전해온 공동체의 지향, 동질감, 연대감을 이 집단 인지적 시민권이 침식할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집단 인지적 시민권이 공동체의 지향과 연대성을 침식해서 해체를 가져온다면 바람직한 시민권의 형태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107면)




39. 다문화 시민권이란 문화적 정체성 때문에 소외받는 집단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차별받지 않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권리이다. (108면)




40. 그러나 오늘날 이들은 자신들의 다름과 정체성을 포용하는 새로운 시민 모델과 시민권을 요구한다. 이른바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가 시작된 것이다. (109면)




41. 소수자 집단이 요구하는 다문화 시민권은 대부분 통합에 관한 것이다. 배제된 집단들은 더 큰 사회에 대부분 통합되기를 원하며, 통합은 그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할 때 이루어진다. (110면)




42. 독일 출신의 미국 사회학자 소이잘dl 1994년에 펴낸 ‘시민권의 한계 - 유럽에서의 이민자와 탈국민적 멤버쉽’에서 지적했듯이 각 집단의 특수한 성격으로 여기던 문화, 언어, 종족의 특색이 보편적 인간의 특성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것은 캐나다의 정치가 로버트슨이 특수주의의 보편화 또는 보편주의의 특수화라고 부른 현상이기도 하다. (112면)




43. 캐나다 정치철학자 킴릭카Will Kymlicka는 다문화 시민권 이론을 발전시킨 대표 인물이다. 그는 1995년에 출판된 ‘다문화 시민권: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론’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기 위해 다문화 시민권은 1) 자치권과 집단대표권, 2) 다문화권, 3) 차별 보상권이라는 세 가지 권리로 소수 종족을 보호한다고 주장한다. (113면)




44. 일부 비판가들은 다문화 시민권이 차별 보상권, 다문화권, 자치권과 집단 대표권 등을 포함한다면 한 국가의 전체 조화를 깨뜨릴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만약 시민권이 차이점을 강조해 통합의 기능을 행하지 못한다면 공동체와 공공성에 대한 의식이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115면)




45. 일부 사람들은 다문화권이 소수 종족에게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상징, 가치,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종족마다 서로 다른 기원을 재인식하게 되어 국민 정체성과 종족 정체성 사이에 혼란스럽고 어중간한 지점에 놓여 통합을 방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117면)




46. 민주적 정치 공동체에서 만일 종족 간에 타협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면, 또는 소수 종족이 주류 문화에 동화되기를 거부한다면 이들의 분리는 피하기는 어렵다. (119면)




47. 통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정체성의 공유일 것이다. (120면)




48. 미국 정치학자 제이콥슨은 1997년에 쓴 ‘경계를 넘는 권리: 이민과 시민권의 쇠퇴’에서 영주권자와 이중 국적자의 증가는 배타적으로 자국 시민을 규정해 유지되었던 근대적 시민권에 변화가 찾아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독일 출신의 미국 사회학자 욥케는 1998년에 내놓은 ‘국민 국가에 대한 도전’에서 영주권이나 이중 시민권은 아직까지 국민국가가 보장한다는 점에서 국민 국가를 뛰어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영주권이나 이중 시민권이 국적과 그 권리를 분리하고 다중적 국민 정체성 또는 지구 시민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 새로운 정체성은 국민 국가의 틀을 약화하는 측면이 있다. 또 소이잘은 1994년에 ‘시민권의 한계’에서 지구화가 혈연과 지연이라는 특수주의 기준에 따라 주어진 국적이 아니라 인간됨personhood이라는 보편주의 기준에 따라 인간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담론에 국제적으로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130, 131면)




49. 하지만 지구 시민권이 현실화되려면 근대 시민권의 존립 근거였던 국민(민족) 정체성을 뛰어넘어 지구 시민의 정체성을 형성해야 한다. (1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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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마틴 루터 킹 자서전
클레이본 카슨 엮음, 이순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 10대 후반에 나는 두 해에 걸쳐서 여름방학을 이용해 돈벌이를 했다. ... 그 곳에서 나는 가난한 백인들도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차별을 당하면서 착취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경험들은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불평등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게 했다. (20면)




2. 흑백분리 관행이 남아있는 대기실과 식당, 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흑백분리는 곧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21면)




3. 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에세이 ‘시민불복종’을 읽었다. 뉴잉글랜드 출신의 소로는 세금납부를 거부한 대담한 사람이었다. 그는 멕시코 내의 노예지구 확장을 위한 전쟁에 자금을 보태느니 차라리 감옥에 가는 쪽을 택하겠다고 주장했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비폭력저항주의를 처음으로 접했다. 나는 사악한 제도에는 협조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상에 너무나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책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24, 25면)




4. 나는 선에 협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악에 협조하지 않는 것도 도덕적 의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25면)




5. 1948년, 나는 펜실베니아 주 체스터에 있는 크로저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나는 사회악을 일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지적인 탐구를 시작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홉스, 벤담, 밀, 로크에 이르기까지 대사상가들의 사회학 이론과 윤리학 이론을 진지하게 공부했다. 사상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론 속에서 의문점을 찾아가면서 나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웠다. (30면)




6. 라우션부시의 저서를 읽은 후, 나는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빈민가와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는 경제적인 조건,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사회적인 조건”에는 무관심한 채 인간의 영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종교는 사멸하게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개인의 문제에만 국한된 종교는 사멸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31, 32면)




7. 나는 설교하는 성직자에게는 두 가지 의무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개인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의 영혼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개인의 영혼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실업문제와 빈민가와 경제적 불안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는 사회적인 복음운동을 충심으로 주창하는 바이다. (32면)




8. ‘자본론’과 ‘공산당선언’부터 시작해써,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에 관한 해설서도 읽었다. 그때 공산주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은 지금까지도 확신으로 남아 있다. 첫째로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인 해석방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현세적이고 유물론적인 공산주의에는 신이란 개념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우주에는 만유의 근거이자 본질인 창조적인 인격의 힘이 존재하며, 그 힘은 유물론적인 관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믿는다. 궁극적으로 볼 때 역사를 이끄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혼이다. 둘째로 공산주의의 윤리적 상대주의에 동의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에는 신성정부도 절대적인 도덕질서도 있을 수 없으며, 고정불변의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상천국’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햐여 무력과 폭력, 살인, 거짓말 등의 거의 모든 수단들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상대주으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느낀다. 목적이 건설적인 것이라고 해서 파괴적인 수단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목적은 언제나 수단 속에 선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공산주의가 가진 정치적인 전제주의에 거부감을 느꼈다. 공산주의에서는 개인은 국가의 부속물에 불과하다. ... (33면)




9. 세계는 몇몇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공산주의가 이론과 달리 실제로는 새로운 계급과 여러 불평등을 만들어낸 것을 목격하였다. 하지만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가난한 사람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를 없애기 위한 항거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34면)




10.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오류를 범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한 공적은 인정되어야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극심한 빈부격차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으면서 빈부격차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다. (35면)




11. 사람들은 인생의 성공을 판단하는 기준을 인류에 대한 봉사와 인간 관계의 질에 두지 않고 수입의 규모나 자동차의 크기에 두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가 전파하는 이런 실용적인 유물론은 공산주의가 제시한 유물론만큼이나 유해하다. (35면)




12. 간디의 사상은 너무나 심오하고 충격적인 것이어서 나는 강연이 끝나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 간디의 일생가 업적에 관한 책을 대여섯 권을 샀다. ... 나는 비폭력저항주의에 대한 그의 주장에 깊이 매료되었다. 특히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은 그의 ‘바다로 향하는 소금행진 운동’과 여러 차례의 단식, ‘사티아크라하(satyagraha)'라는 개념이었다. 사티아는 사랑이자 진리이며, 아그라하는 힘을 뜻한다. 따라서 사티아그라하는 진리의 힘 또는 사랑의 힘을 의미한다. 간디의 사상을 깊이 탐구하는 과정에서 사랑의 힘에 대한 회의는 차츰 엶어지고 사회개혁의 분야에서 사랑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간디에 관한 책을 읽기 전까지는 예수의 가르침이 개인적인 관계에서만 유용하다고 판단했다. 즉 “오른빰을 때리면 왼빰을 내밀어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사상은 개인간의 갈등에만 적용되는 것이며, 인종간 갈등이나 국가간 갈등에서는 보다 현실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간디의 사상을 읽고 나서 이제까지의 생각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37, 38면)




13. 나는 니버의 평화주의 비판을 처음 접하면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저서(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계속 읽으면서 여러 가지 결점이 눈에 띄었다. 그는 대체로 평화주의를 ‘천진난만하게 사랑의 힘을 신뢰하고 악에 대해 수동적인 무저항주의로 임하는 태도’로 해석했다. 간디를 연구하면서 나는 진정한 평화주의란 악에 대한 무저항이 아니라 악에 대한 비폭력적인 저항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41, 42면)




14. 진정한 평화주의란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것보다는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랑의 힘에 의거하여 악에 용감하게 맞서는 태도를 의미한다. 폭력의 가해자는 우주 속에 폭력과 고통을 증식시키지만 폭력의 피해자는 상대편에 수치심을 불러일으켜 심정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42면)




15. 변증법적 과정에 대한 헤겔의 분석은 여러 결함이 있었지만 투쟁을 통해서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인식을 제공했다. (47면)




16. 인생은 거대한 삼각형입니다. 한쪽 각에는 개인 자신이 서 있고 다른 한쪽 각에는 다른 사람이 서 있으며 맨 위쪽에 위치한 각에는 신이 서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적절히 연결되고 조화되지 못한 인생은 불완전한 인생입니다. (61면)




17. ... 흑백차별정책 때문에 우리는 이제까지 즐겨오던 문화생활의 상당 부분을 희생하고 항상 피부색을 의식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남부에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확신했고 직접 그것을 목격하고 싶었다. (63면)




18. 1955년 12월 1일의 일이었다. 로사 파크스 부인이 버스에 타자 백인전용좌석 바로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백인남성이 차에 오르자 버스운전사가 부인에게 일어나서 뒤로 가라고 말했다. 빈 좌석이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버스운전사의 명령을 따른다면 파크스 부인은 방금 버스에 탄 백인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서서 가야 할 형편이었다. 조용하고 침착하고 위엄있는 태도와 상냥한 성격을 가진 파크스 부인은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한 자각과 자존심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다. (70면)




19. “이제 움직일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탁상공론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행동에 나설 때입니다.” (72면)




20. 생각이 깊어지면서, 나는 우리가 계획한 일이 단순히 버스회사에 경제적 타격을 주는 행동이 아니라 사악한 제도에 협력을 거부하는 행동임을 깨닫게 되었다. 보이콧은 물론 버스회사에 충격을 주겠지만, 그 본질적인 목적은 악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소로의 ‘시민 불복종론’이 생각났다. (74면)




21. 우리는 흑인승객의 60퍼센트만 협력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거의 100퍼센트가 협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잠자는 듯 침묵하던 흑인사회가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75면)




22. 그들은 자신들이 걸어가는 이유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자유와 존엄을 되찾기 위해서 고통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개인들의 결연한 용기는 너무나 당당해보였다. (76면)




23. “사람들을 적극적인 행동으로 불러일으킬 정도로 투쟁적이되, 기독교 정신을 벗어나지 않게끔 사람들의 열정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온건한 내용의 연설을 할 수 있을까?” 가혹한 고통을 겪는 흑인들 중에는 쉽게 피의 보복에 나설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적극적인 행동을 할 준비를 시키되 증오와 원한을 품지 않게 하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과연 투쟁적이고도 온건한 연설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완전히 모순되는 두 가지 임무를 결합시키는 어려운 과제에 정면으로 부딪혀보기로 결심했다. “우리들의 자존심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점과 만일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고 이런 불평등을 용인한다면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자존심과 주님의 영원한 가르침을 배반하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반면, 기독교적인 사랑의 교의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균형을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80면)




24. 대중집회에 모인 수천 명의 흑인들이 인간적 존엄성과 새로운 사명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 바로 진정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84면)




25. “지금 나 자신을 위해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과 손자들을 위해서 걸어가고 있는 거라오.” 말을 마친 할머니는 집을 향해서 계속 걸어갔다. (88면)




26. 흑인들에게 사랑을 무기로 삼은 저항정신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간디 사상이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나는 벌써부터 간디의 비폭력주의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기독교적인 사랑의 교의야말로 자유쟁취투쟁에 나선 흑인들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우리 운동에 혼과 동기를 불어넣은 것은 예수였고, 방법을 알려준 것은 간디였다. (90면)




27. 강력한 저항이 없는 한 누구도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흑백분리제도의 숨겨진 목적은 단순히 흑인과 백인의 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흑인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는 흑백분리제도 내에서 용인될 수 없는 평등조치를 요구했는데도 ‘기득권자’들은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흑백분리제도의 근본목적은 차별과 불평등을 지속시키는 것이므로 흑백분리가 존속되는 한 정의와 평등의 쟁취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93면)




28.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조용히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마틴 루터, 정의를 위해 일어서라. 평등을 위해 일어서라. 진리를 위해 일어서라. 보라,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주님이 내 곁에 임하신 것을 경험했다. (103면)




29. 나의 죄는 사람들을 불의에 항거하는 비폭력적인 운동에 참여시킨 죄이며, 사람들에게 자기 존중과 존엄성에 대한 인식을 주입시킨 죄이며, 사람들이 누구보다도 빼앗길 수 없는 생명권, 자유권 그리고 행복추구권을 누리게 되길 갈망한 죄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나의 죄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에 협력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이듯이 악에 협력하지 않는 것도 도덕적 의무라는 확신을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115면)




30. ‘분리하되 평등하게’라는 원칙 때문에 우리는 착취의 늪에 빠진 채 가혹하고 끈질긴 불평등을 경험해왔습니다. (118면)




31. “새벽이 오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 (121면)




32. 우리는 백인성직자연합을 통해서 ‘호의적인 태도와 기독교적인 형제애에 입각해서 행동하자’는 발언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그런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백인사회의 이런 분위기를 보고 우리는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4면)




33. 우리는 상호이해와 상호존중의 자세를 기반으로 해서 흑인들과 백인들을 단합시키기 위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호존중에 입각한 흑백통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125면)




34.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몽고메리가 전 세계 앞에 제시한 새로운 흑인상은 무력감과 수동성, 그리고 고루한 자기 만족을 벗어던지고 인간적인 존엄과 사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춘 인간상, 그리고 자신도 훌륭한 인간이라는 새로운 자존의식으로 무장하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유와 인간적 존엄을 쟁취하겠다는 새로운 결단을 내린 인간상이었다. (129면)




35. 이런 역사적 과정을 절정으로 이끈 것은 공립학교에서의 흑백분리를 금지한 1954년 5월 17일 최고법원의 결정이었다. ... 법원은 ‘분리하지만 평등한’ 시설이란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것이며 인종에 따라서 어린이를 분리하는 것은 그 어린이에게 평등한 법적 보호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결정은 이제까지는 꿈속에서만 자유를 그리던 수백만의 흑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흑인의 자존의식을 향상시키고 정의를 달성하려는 보다 원대한 결단을 품게 하였다. (138면)




36. 남부 전역의 흑인들이 투표권을 획득하게 되면 직면한 대다수의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며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투표권을 얻고 공직에 적절한 사람을 세우기 전까지는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흑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발걸음은 투표함으로 이어지는 짧은 걸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141, 142면)




37. 나는 은크루마의 발언을 자주 생각했다. “편안한 예속보다는 위험한 자치를 원합니다.” (149면)




38. 뉴욕에서 당한 사고 덕분에 나는 생각할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우리 운동이 고수하는 비폭력주의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자극을 주어 피억압 민중을 구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우리 운동이 영혼을 구속해온 공포의 쇠사슬과 절망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동트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불확실하지만 밝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게 되길 간절히 염원했다. (154, 155면)




39. 비폭력운동 덕분에 인도에는 사랑의 공동체가 만들어졌으며 투쟁이 끝나자 피억압자와 억압자 사이에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163면)




40. 진정한 비폭력저항은 악의 세력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악에 용감하게 맞서는 태도를 의미한다. 폭력의 가해자는 우주에 폭력과 원한을 증식시킬 뿐이지만, 폭력의 피해자는 적대세력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어서 그들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 (168, 169면)




41. 흑인 학생들 중에는 자신의 처지가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부 아메리카의 학생들과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179면)




42. 나는 학생들에게 당당한 자세로 투쟁을 계속할 것을 당부했다. 학생들은 비폭력투쟁 방법을 선택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백인을 이기거나 그들에게 굴욕감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상호이해를 기반으로 한 백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달성하는 데 있는 것이었다. (180면)




43. 1960년 남부 전역으로 확산된 학생운동이야말로 시민권 쟁취투쟁의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60년의 학생운동은 많은 학생들이 인간적 존엄과 자유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투쟁을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89, 181면)




44. ... 이 일로 나는 완고하고 편파적인 배심원단을 정의의 편으로 끌어오려면 능숙한 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82면)




45. 사회운동은 여러 약점과 장점을 지닌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들은 실수를 하고, 그 실수로부터 배우며, 더 많은 실수를 하고, 다시 그 실수로부터 배워야 한다. 인간들은 성공 뿐만 아니라 패배를 경험해야 하며, 성공을 하고 패배를 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그 당시를 회상하면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올버니를 떠났던 것이 후회스럽다. 나는 당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때 주도권을 잃고 다시 만회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 당시 경제권력구조가 아니라 정치권력구조를 공격했는데, 투표권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권력구조에 대항해서 승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215, 216면)




46. 올버니 운동은 장기적이고 힘든 싸움이긴 했지만 도덕적인 면에서 공세를 취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평등과 자유를 위한 싸움에 나설 수 있는 정신력을 제공했다. 올버니 시민들은 허리를 펴고 살게 된 것이다. 간디가 말했듯이 허리를 굽히지 않는 사람의 등을 타고 앉을 수는 없는 일이다. (217면)




47.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우리는 정당하다는 확신, 신체의 보호보다 정당한 목적의 실현이 더 중요하다는 확신이라고 강조했다. (229면)




48. 우리는 천부적인 권리가 성문화되기까지 34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 인종차별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기다려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245면)




49. 정당한 법을 준수하는 것은 법적 의무일 뿐 아니라 도덕적 의무입니다. 하지만 부당한 법에 복종하지 않는 것도 역시 도덕적 의무입니다. 저는 “부당한 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투스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247면)




50. 유태교 철학자인 마틴 부버의 말을 빌자면 흑인차별 법령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인간 대 사물’의 관계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인간을 사물의 지위로 격하시키게 됩니다. (247면)




51. 우리는 옳은 일은 하는 데는 적절한 시기가 따로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간을 창조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약속을 실현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국가정책을 인종불평등의 모래밭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단단한 바위 위로 끌어올려야 할 때입니다. (252면)




52. 그러다가 저는 제 자신이 흑인사회에 존재하는 두 반대 세력 사이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자기만족 세력인데, 이 세력은 오랜 세월 동안 억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자존심과 ‘인간적 존엄’ 의식을 상실한 채로 흑백차별제도에 순응하는 흑인들과, 흑인차별제도 덕분에 어느 정도 학문적,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흑인대중의 문제에 무감각해진 중산층 흑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증오와 원한을 품고서 위태롭게도 폭력 옹호로 기울어지는 세력입니다. 이 세력은 다양한 국가 독립주의 그룹의 형태로 전국에 확산되어 있습니다. ... 저는 자기 만족에 빠진 사람들의 ‘무관심’을 흉내내어서는 안 되며 골수 고립주의자들의 증오와 절망을 모방해서도 안 된다고 역설해왔습니다. 사랑과 비폭력항의운동이라는 훨씬 훌륭한 길이 있습니다. (252면)




53. 미국 흑인들 속에서 자유에 대한 열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미국 흑인들은 자신들에게는 자유를 누릴 천부적인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를 쟁취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53면)




54. ... 지금의 사정은 당시와는 많이 다릅니다. 현대교회의 목소리는 나약하고 무력하며 불분명합니다. 현대교회는 기존 질서의 주요한 방어세력으로 역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다수 지역사회의 권력층은 교회의 존재에 불안을 느끼기는커녕 교회의 묵인이나 노골적인 인정에서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258면)




55. “발은 아프지만, 내 영혼은 편안하다오.” (260면)




56.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의지와, 증오 대신 사랑을, 두려움 대신 확신을 가지고 함께 전진하면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이 바이러스처럼 펴져나가 버밍햄 흑인들의 의식을 변화시켰으며 전국 각지로 펴져나갔다. (280면)




57. 1963년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287면)




58.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들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289면)




59. 1963년과 1964년 두 해는 시민권운동에 있어서 역사적인 전환점이었다. (306면)




60. 나는 존슨 대통령의 시민권 법령 조인식에 참여했다. 존슨 대통령은 나에게 법령서명에 사용했던 펜을 선물했는데, 나는 이 펜을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311면)




61. 이렇게 해서 나는 노벨평화상을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 운동의 지속을 위해서 묵묵히 투쟁해온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327면)




62. 노벨평화상 수상은 시민권 투쟁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 우리는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전 세계 여론이 우리편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329면)




63.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우리에겐 초행길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다. 우리는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적 전통과 보다 부강한 나라들도 극복하지 못한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들의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경제는 부의 규모와 기술 수준의 면에서는 미국 경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실업이나 빈민문제는 없었다. 모든 국민이 무상의료와 질높은 교육이라는 혜택을 받고 있었다. 미국과 같은 부강한 나라들의 불완전한 의료 및 교육현실과 이 국가들의 현실을 비교하면서 나는 상당히 마음이 아팠다. (331면)




64. 현재의 내가 있기까지는 가족들과 나와 함께 투쟁해온 모든 사람들의 희생이 컸다. 내가 가장 큰 빚을 진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아내는 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한 사람이었다. (332면)




65. 나는 인류가 직명한 3대 문제, 즉 인종차별과 빈곤, 그리고 전쟁 문제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각각의 문제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별개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 세 문제는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인간의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334면)




66. ... 폭력적 행동을 취한다면 우리는 절대적인 열세에 처하게 될 것이다. (340면)




67. 오랜 세월 동안 공권력의 협박에 위축되었던 흑인 사회는 유일한 탈출구가 단결된 행동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 사람의 흑인이 저항을 하면 그는 그 지역에서 추방되고 말지만, 수천 명의 흑인들이 단결하여 저항하면 상황은 확실하게 달라졌다. (350면)




68. 1966년 나는 시카고에 머물면서 활동했다. 이제까지 시민권운동은 중산층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뿐 서민에게까지 파고들지 못했다 시민권 운동이 직면한 절박한 사명은 바로 빈민지역에 파고들어 이 지역의 거주자들과 청년들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나는 시카고 빈민지역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빈민지역으로 이주하려는 목적은 흑인 형제자매들이 겪고 있는 생활조건을 직접 경험할 뿐 아니라 과연 내게 그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는 데 있었다. (386면)




69. 시카고에 존재하는 궁핍과 절망의 문제는 학문적인 문제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날마다 극악한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고발하는 전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이 도시가 주민들의 영혼에 주입시키는 우울함과 절망감에 대항하기 위해서 날마다 싸워야 했다. 궁핍과 절망의 문제는 생생하게 우리들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386면)




70. 론데일 빈민가는 풍요의 바다에 떠 있는 궁핍의 섬이라고 표현할 만했다. 시카고는 세계 최고의 일인당 소득을 자랑하는 도시였지만, 론데일 빈민가에 자리잡은 내 아파트에서 내다본 풍경은 그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387면)




71. 론데일로 오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 집 아이들의 행동에도 변화가 보였다. 아이들은 짜증을 냈고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여름을 지내면서 나는 닭장같은 아파트가 우리 가족의 정서를 격앙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388, 389면)




72. 흑인들의 반유대감저은 북부 빈민지역에 한정된 현상이다. 남부에는 이런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유태인들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 흑인들은 전혀 다른 두 측면에서 유태인들과 접촉하고 있다. 유태인들은 시민권 투쟁에 임해서는 매우 적극적이며 전혀 편견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빈민지역의 집주인이나 상점 주인의 위치에서는 흑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착취자로 행세한다. (398면)




73. 인생도 그렇지만 인종간의 이해도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야 한다. 이승에 태어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존재이다. 우리는 이 존재를 원료로 만들어야 했다. 건설적이고 행복한 인생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드는 것이다. 흑인들과 백인들이 함께 활동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역시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흑인들과 백인들의 상호교류를 통해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408면)




74. 역사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사랑과 힘이라는 두 개념이 상극으로 취급되어 왔다는 점이다. 사랑은 힘을 포기하는 것으로, 그리고 힘은 사랑을 부인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힘은 무모하며, 힘이 없는 사랑은 감상적이며 무기력한 것이라고 인식해야 한다. 힘은 정의실현을 이행한다는 점에서 곧 사랑이며, 정의는 사랑과 대립하는 모든 것들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에서 곧 사랑이다. (417면)




75. 역사책들도 흑인들이 미국 역사에 미친 공적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들은 쓸모 없는 존재라는 흑인들의 인식을 강화하며 백인지배라는 시대착오적인 교의를 확산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영국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미국의 독립혁명에서 최초로 피를 흘린 미국인은 크리스퍼스 어턱스라는 흑인선원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미국에서 최초로 심장수술에 성공한 의사가 흑인인 다니엘 헤일 윌리엄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또 다른 흑인의사인 찰스 두르는 혈장을 분리해서 대량 저장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인명을 구해냈으며, 전쟁 후에는 많은 중요 의약품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 역사책들은 미국 생활을 풍요롭게 만든 수많은 흑인 과학자와 발명가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419, 420면)




76. 나는 그날 밤 눈물을 흘렸다. 내 아이들을 포함해서 조상들의 문화적 업적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자라는 흑인아이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고, 흑인은 미국 사회와 관계없는 존재라는 내용의 거짓교육을 받고 자라야 하는 백인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미국의 문화적 기술적 진보는 흑인과 백인들의 공동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을 무시해야만 하는 모든 백인부모들과 교사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420, 421면)




77. 내가 처음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생각을 펼치자, 전국의 거의 모든 신문들이 나를 혹평하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 특정 상황에 처하게 되면 비겁한 사람들은 “안전한가?”를 따지고 편의주의자는 “편리한 방법인가?”를 따지며, 남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호응이 좋을까?”를 따진다. 하지만 양심적인 사람은 “옳은가?”를 따진다. 살다보면 안전하지도 않고 편리하지도 않으며 사람들의 호응도 좋지 않은 생각을 양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4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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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자서전 - 상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1.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망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13면)




2. 돌이켜보면, 내 인생관의 형성에서 그분이 지닌 중요성을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이 깨닫곤 했다. 그분의 두려움 없는 태도, 공공 정신, 인습에 대한 경멸, 다수의 의견에 대한 무관심이 내게는 늘 좋게 보였으며, 따라해 볼 만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할머니는 내게 성서를 한 권 주셨는데, 표지 안쪽 여백에 당신이 좋아하셨던 성구들이 적혀 있었다. 그 중에는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지어다”란 구절도 있었다. 할머니가 이 구절을 강조하신 덕분에 훗날 나는 소수에 속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28, 29면)




3. 열한 살이 되자 형을 선생 삼아 유클리드 기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인생이 큰 사건 중에 하나였고, 마치 첫사랑처럼 현혹적이었다. 세상에 그처럼 감미로운 것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제5정리를 배운 후에 형이, 이것은 일반적으로 어렵다고들 한다고 말해 주었지만, 나는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약간 지적인 소질이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그때 처음으로 스쳤다. 그 순간부터, 내 나이 서른여덟에 하이트헤드와 함께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완성하기까지, 수학은 나의 주요 관심사이자 행복의 주 원천이었다. (53, 54면)




4. 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싫어했다. 아무도 쓰지 않는 말을 배우는 것은 어리석인 짓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은 수학이었고, 수학 다음으로는 역사를 좋아했다. (55면)




5. 청년기는 대단히 외롭고 불행한 시기였다. 정서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집안 어른들을 상대로 절대 불가침의 비밀을 간직해야만 했다. 나의 관심은 성과 종교와 수학으로 갈라져 있었다. (59면)




6. “누가 나를 만들었는가/”라는 의문에는 대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묻는 즉시,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는가?”라는 보다 깊은 의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이 나로 하여금 ‘제1원인’론을 포기하고 무신론자가 되도록 이끌었다. 종교적 회의로 보낸 긴 세월 동안 나는 점차 사라져가는 믿음 때문에 대단히 불행했다. 하지만 과정이 끝나고 나자 놀랍게도 그 주제를 모두 정리하고 크게 기뻐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63면)




7. ... 혼자 거기에 가서 일몰을 바라보며 자살을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수학을 더 알고 싶었기 때문에 자살을 감행하지는 못했다. (67면)




8. 나는 인류의 행복이 모든 행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행복에 대한 믿음을 공리주의라고 하며, 그것이 수많은 윤리론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았다. (69, 70면)




9. 어쨌거나 형이상학에 대한 할머니의 혐오는 생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 형이상학이여, 그럼 안녕 나는 너 없이도 살 수 있으며 이제 곧 너는 유행에서 뒤처질 거라고 생각해. (70, 71면)




10. 에게서 아주머니가 읽고 크게 탄복했다는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책들을 소개해 주셨다. 나는 토지의 국유화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에서 얻고자 하는 것들을 모두 확보해 줄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견해는 1914-1918년 전쟁 때까지 지속되었다. (72, 73면)




11. 현재 헨리Henry George는 거의 잊혀진 선지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1890년, 내가 크롬프턴을 처음 알게 된 당시만 해도, 모든 지대는 지주 개인이 아닌 국가에 납부해야 한다는 그의 이론은 당시 경제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사회주의의 강력한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99면)




12. 그(맥태거트)의 영향 아래 있던 2, 3년 동안에는 나도 헤겔주의자였다. ... (106면)




13. 그런데 3학년 때 무어G. E. Moore를 만났다. 당시 신입생이었던 그는 몇 년 지나자 천재에 대한 나의 인상을 만족시켜 주었다. ... “무어, 자네는 ‘항상’ 진실을 말하는가?” 그가 대답했다. “아니오.” 이것이 그가 해본 유일한 거짓말일 거라고 나는 믿는다. (107, 108면)




14. 학생 시절에는 교수들을 대학에서 불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강의를 들어도 내 공부에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으므로, 이 다음에 내가 강사가 되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강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절대 품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그 맹세를 지켜왔다. (113, 114면)




15. 나는 철학이 아주 재미있었다. 그리고 위대한 철학자들이 심상에 제공해 주는 세상을 이해하는 기묘한 방식들을 즐겼다. 내가 케임브리지 시절에 누린 가장 큰 즐거움은 아마 ‘소사이어티The Society' 그룹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115면)




16. ‘소사이어티’는 스스로를 실제의 세계The World of Reality로 가정했다. 따라서 그 밖의 모든 것들은 현상Apperance이었다. 소사이어티 회원이 아닌 사람들은 현상들Phenomena로 불리었다. 시간과 공간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형이상학자들의 주장이었기 때문에, 우리 ‘소사이어티’에 들어온 사람들은 시공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들로 가정되었다. (117면)




17. 나보다 열 살쯤 어린 세대의 경향을 주도한 것은 리턴 스트레이치와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였다. 그 10년의 세월이 지적 풍토에 일으킨 변화가 얼마나 엄청난지, 놀라울 정도다. 우리 세대는 여전히 빅토리아 여왕 시대인 반면, 그들은 에드워드 국왕 시대였다. 우리는 정치와 자유 토론에 의한 순차적인 진보를 믿었다. 그리고 좀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대중의 지도자가 될 포부를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대중과 결별하고자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19면)




18. 케인스의 지적 능력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예리하고 명석했다. 그와 토론하다 보면 내가 목숨을 걸기라도 한 듯 열정적으로 변하고 끝내고 나올 때면 약간 바보가 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122면)




19. 내가 무어의 우수성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소사이어티’에서였다. 그가 보고서를 읽던 게 생각나는데 이렇게 시작하는 글이었다. “태초에 물질이 있었으니 물질이 악마를 낳고 악마가 하느님을 낳았다.” 보고서는, 먼저 하느님이 죽고 이어 악마가 죽어 태초에 마찬가지로 물질만이 남았다는 말로 끝맺었다. 이것을 읽을 당시 그는 아직 신입생이었으며, 루트레티우스(고대 로마의 시인, 철학자)의 열렬한 제자였다. (124, 125면)




20. 결혼하고 나서 몇 년이 흐르는 사이, 화이트헤드가 서서히 스승에서 친구로 바뀌어갔다. (223면)




21. 그(하이트헤드)는 늘 내가 좋지 않게 생각했던 칸트 쪽으로 기울어 있었으며,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게 되었을 때는 베르그송Bergson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그는 우주의 통일성이란 측면에 영향을 받아, 과학적 추론들도 그러한 측면을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나는 기질 때문에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과연 순수 이성pure reason이란 것이 우리 중 누가 더 옳은가를 판단할 수 있었을지, 나로선 의심스럽다. (223, 224면)




22. 당시의 나는 편협한 섬나라 근성의 브리튼족답게 우월감으로 미국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학계의 미국인들, 특히 수학자들과 만나본 결과, 거의 모든 학문에 있어서 영국보다 독일이 앞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알 가치가 있는 것은 케임브리지가 다 안다는 믿음이 여행 과정에서,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서서히 무너졌다. 이런 측면에서는 그 여행이 아주 유용했다고 볼 수 있다. (234면)




23. 1898년이 되지 앨리스와 나는 해마다 일정 기간을 케임브리지에서 보내기로 하고 1902년까지 그대로 지켰다. 그 무렵 나는 맥태거트와 스타우트ㅔ 이끌려 뛰어들었던 독일 관념주의라는 욕조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내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당시 내가 대단하게 보았던 무어였다. 그것은 내게 강렬한 흥분을 맛보게 했다. 감각의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다가, 식탁이나 의자 따위가 현실로 존재함을 다시 믿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은 역시 논리적인 측면이었다. 관계들relations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면 흥미롭고, 모든 명제는 주어-술어의 형태를 취한다는 믿음이 형이상학에 미칠 그 엄청난 영향을 밝혀보고 싶었다. (236면)




24. 결혼한 후에 나는 정서상으로는 조용하고 피상적인 생활을 영위해 왔고, 좀더 깊은 문제들을 모두 잊은 채 가벼운 지식인으로 만족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발 밑에서 땅이 무너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다른 영역에 들어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5분의 시간에 나를 스친 생각은 이러했다. ‘인간 영혼의 외로움은 견디기 어렵다. 종교적 스승들이 설파한 것과 같은 지고의 강렬한 사랑 외에는 어떤 것도 그 외로움을 간파할 수 없다. 이 동기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은 모두 해로우며 잘해 본들 무용하다. 따라서 전쟁은 잘못된 것이고 사립학교 교육은 옳지 않으며 폭력의 사용에 반대해야 한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각 개인이 가진 외로움의 응어리 속으로 파고들어가 호소해야 한다.’ (258, 259면)




25. 그 5분이 흐른 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동한 신비주의적 깨달음 같은 것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깊은 내면이 다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망상이었지만 그럼에도 현실에서 모든 친구들과 수많은 지인들과의 관계가 전보다 훨씬 더 친밀해져 있었다. 그 동안 제국주의자였던 나는 그 5분 사이에 친보어파로, 평화론자로 변해 있었다. 오랜 세월 정확성과 분석에만 매달려왔던 내가, 미에 대한 신비한 감정, 아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 인간의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줄 철학을 찾아내고자 하는 부처님 못지않게 깊은 열망으로 충만해 있음을 발견했다. 야릇한 흥분감이 날 사로잡았는데, 거기에는 강렬한 아픔도 담겨 있었지만 승리감도 약간 배어 있었다. (259면)




26. 그녀(앨리스)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완전무결하게 정숙해 보이려고 애썼는데, 그 결과 위선에 이르고 말았다. (262면)




27. ... 쏙독새가 세 가지의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한 가지 소리만 내는 줄 안다.) (268면)




28. 1907년부터 1910년까지, 나는 1년에 8개월 정도 매일 10시가에서 12시간씩 그 작업을 했다. (269면)




29. 1902년부터 1910년까지는 행복하지 않은 사생활에서 오는 부담과 지적으로 매우 고된 작업이 함께 이어진 세월이었다. 그 시절에는 내가 어떤 터널 속에 있는 듯 했고 과연 터널 저편 끝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종종 회의가 들었다. 나는 옥스퍼드 근처 케닝턴의 육교 위에 서서 지나가는 열차들을 바라보며, 내일은 꼭 저 열차 밑에 드러누우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늘, 언젠가는 ‘수학 원리’가 마무리되리라는 희망에 젖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269면)




30. 나는 청년기 때 남녀 평등에 대한 밀의 책을 읽은 이후로 여성을 위한 평등의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1860년대에 내 어머니가 여성 참정권 지지 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문명 세계를 통틀어 이처럼 빠른 기간 안에 완벽한 성과를 거둔 운동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성공적인 운동에 한몫을 했다는 것이 기쁘다. (274면)




31. 간간히 재미있고 즐거운 일들도 있었지만 1902년에서 1910년까지는 매우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물론 일적인 면에서는 대단한 수확이 있었으나 ‘수학원리’ 집필에서 오는 즐거움은 1900년 후반기의 몇 달 동안에 집중되었다. 그후로는 너무도 힘들고 고생스러워 즐거움 따위를 느낄 여력도 없었다. 결실이 점점 눈에 보이는 후반기가 전반기보다 낫기는 했지만, 그 작업을 통틀어 내가 정말로 생생한 기쁨을 느낀 것은 원고를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로 넘겨주었을 때뿐이었다. (274, 275면)




32. 오톨라인은 내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거의 대부분 유익한 것들이었다. 그녀는 내가 교수나 군자인 양 행동하거나 대화할 때 독재자처럼 구는 것을 비웃었다. ... 자기 중심적이고 독선적인 면도 그녀 덕분에 많이 고쳤다. ... 그녀는 나의 청교도적인 면과 검열관처럼 비판적인 성향을 대폭 완화시켰다. 공허한 세월 끝에 맛보는 행복한 사랑 그 자체가 매사를 더 쉽게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남자는 대개 여자의 영향을 받게 될까 봐 걱정하는데, 내 경험으로 볼 때 그것은 어리석은 두려움이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남자에게는 여자가 필요하고 여자에게는 남자가 필요하다. 나는 사랑했던 여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그들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훨씬 더 편협해졌을 것이다. (366, 367면)




33.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학생들은 칭찬할 만했다. 나는 대학원생 열두 명으로 구성된 반을 맡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그 학생들이 차를 마시러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그 중 한사람이 T. S. 엘리엇인데, ... 당시 나는 엘리엇이 시를 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내가 헤라클레이토스를 칭찬하자 그가 말했다. “네, 그는 언제나 비용Villon(프랑스의 위대한 서정시인)을 떠올리게 하지요.” 나는 아주 훌륭한 얘기라고 생각했고, 그런 식의 소견을 더 말해주기를 늘 기대했다. (378, 379면)




34. 1910년부터 1914년까지는 전환의 시기였다. 1910년 이전까지의 내 인생과 1914년 이후의 내 인생이 마치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중세 7대 악마 중의 하나)를 만나기 전과 후의 파우스트Faust 인생처럼 뚜렷하게 나누어졌다. (407면)




35. 그 암담한 전망도 끔찍했지만 나를 더욱 두렵게 만든 것은 국민의 거의 90퍼센트가 대학살을 기대하며 즐거워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시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 전까지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했으나, 전쟁을 겪으면서 그것이 보기 드문 예외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무엇다도 돈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으나, 돈보다 파괴를 훨씬 더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성인은 으레 진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나, 인기보다 진리를 더 사랑하는 지성인은 10퍼센트도 안 된다는 것을 다시끔 깨달았다. (411면)




36. 1915년 여름, 나는 ‘사회 재건의 원칙들Principles of Social Rsconstruction'을 집필했다. ... 이 책에서 나는, 의식적인 목적보다 충동이 인간의 삶을 빚어내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정치 철학을 제시했다. 나는 충동을 소유욕의 충동과 창조적인 충동으로 이분하고, 창조적인 충동 위에 세워지는 것을 최선의 삶이라고 보았다. 소유욕의 충동이 구체화된 예로는 국가, 전쟁, 빈곤을 들었고 창조적인 충동이 구현된 예로는 교육, 결혼, 종교를 꼽았다. 나는 창조성의 해방이 개혁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처음에는 그 책을 강의용으로 썼다가 나중에 출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책이 즉각 성공을 거두었다. 읽혀지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신념의 고백 차원에서 썼을 뿐인데, 그것이 내게 막대한 돈을 벌어다 주어 향후 나의 모든 수입의 발판이 되었다. (415, 416면)




37. “저분은 저명한 철학자예요.” 숙녀가 말했으나 경관들은 여전히 어깨를 으쓱대고 서 있었다. “전세계가 다 아는 학자라니까요.‘ 그래도 경관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소리쳤다. ”저분은 백작의 동생이라구요.“ 그 말에 경관들이 허겁지겁 내게 달려왔으나 도움이 되기엔 이미 늦은 후였다. (436면)




38.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전쟁은 나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학구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새로운 종류의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도 완전히 바뀌었다. 청교도주의는 인간의 행복에 이바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깊이 확신하게 되었다. 죽음의 쇼를 보면서 살아있는 것에 대한 새로운 사랑을 알게 되었다. (447면)




39. 나는 교수 자리나 청교도주의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렸다.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본의의 작용을 깨치게 되었고, 오랫동안 홀로 서 있는 과정에서 평형 감각 비슷한 것도 얻었다. (450면)




40. 그(비트겐슈타인)는 내가 시키는 대로 다음 학기가 시작되자 논문을 들고 왔다. 그 첫 문장을 읽어보는 순간 그가 천재적인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절대로 조종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답해 주었다. 1914년 초, 그가 대단히 흥분한 상태로 찾아와 말했다. “전 케임브리지를 떠날 겁니다. 당장 떠나고 말겠어요.” “왜?” 내가 물었다. “매형이 런던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 사람하고 이렇게 가까이 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요.” 그리하여 그는 남은 겨울을 노르웨이의 먼 북쪽에서 보냈다. 초창기에 내가 G. E. 무어에게 비트겐슈타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아주 좋게 생각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내가 강의하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은 누구도 그런 표정을 짓지 않거든요.”라고 대답했다. (562, 563면)




41.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 속에 병석에 누워 있는 것은 놀랍도록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 전까지는 내가 근본적으로 비관주의자여서 산다는 것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착각이었으며, 내게 삶은 한없이 달콤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6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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