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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자서전 - 상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1.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망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13면)
2. 돌이켜보면, 내 인생관의 형성에서 그분이 지닌 중요성을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이 깨닫곤 했다. 그분의 두려움 없는 태도, 공공 정신, 인습에 대한 경멸, 다수의 의견에 대한 무관심이 내게는 늘 좋게 보였으며, 따라해 볼 만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할머니는 내게 성서를 한 권 주셨는데, 표지 안쪽 여백에 당신이 좋아하셨던 성구들이 적혀 있었다. 그 중에는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지어다”란 구절도 있었다. 할머니가 이 구절을 강조하신 덕분에 훗날 나는 소수에 속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28, 29면)
3. 열한 살이 되자 형을 선생 삼아 유클리드 기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인생이 큰 사건 중에 하나였고, 마치 첫사랑처럼 현혹적이었다. 세상에 그처럼 감미로운 것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제5정리를 배운 후에 형이, 이것은 일반적으로 어렵다고들 한다고 말해 주었지만, 나는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약간 지적인 소질이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그때 처음으로 스쳤다. 그 순간부터, 내 나이 서른여덟에 하이트헤드와 함께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완성하기까지, 수학은 나의 주요 관심사이자 행복의 주 원천이었다. (53, 54면)
4. 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싫어했다. 아무도 쓰지 않는 말을 배우는 것은 어리석인 짓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은 수학이었고, 수학 다음으로는 역사를 좋아했다. (55면)
5. 청년기는 대단히 외롭고 불행한 시기였다. 정서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집안 어른들을 상대로 절대 불가침의 비밀을 간직해야만 했다. 나의 관심은 성과 종교와 수학으로 갈라져 있었다. (59면)
6. “누가 나를 만들었는가/”라는 의문에는 대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묻는 즉시,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는가?”라는 보다 깊은 의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이 나로 하여금 ‘제1원인’론을 포기하고 무신론자가 되도록 이끌었다. 종교적 회의로 보낸 긴 세월 동안 나는 점차 사라져가는 믿음 때문에 대단히 불행했다. 하지만 과정이 끝나고 나자 놀랍게도 그 주제를 모두 정리하고 크게 기뻐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63면)
7. ... 혼자 거기에 가서 일몰을 바라보며 자살을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수학을 더 알고 싶었기 때문에 자살을 감행하지는 못했다. (67면)
8. 나는 인류의 행복이 모든 행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행복에 대한 믿음을 공리주의라고 하며, 그것이 수많은 윤리론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았다. (69, 70면)
9. 어쨌거나 형이상학에 대한 할머니의 혐오는 생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 형이상학이여, 그럼 안녕 나는 너 없이도 살 수 있으며 이제 곧 너는 유행에서 뒤처질 거라고 생각해. (70, 71면)
10. 에게서 아주머니가 읽고 크게 탄복했다는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책들을 소개해 주셨다. 나는 토지의 국유화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에서 얻고자 하는 것들을 모두 확보해 줄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견해는 1914-1918년 전쟁 때까지 지속되었다. (72, 73면)
11. 현재 헨리Henry George는 거의 잊혀진 선지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1890년, 내가 크롬프턴을 처음 알게 된 당시만 해도, 모든 지대는 지주 개인이 아닌 국가에 납부해야 한다는 그의 이론은 당시 경제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사회주의의 강력한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99면)
12. 그(맥태거트)의 영향 아래 있던 2, 3년 동안에는 나도 헤겔주의자였다. ... (106면)
13. 그런데 3학년 때 무어G. E. Moore를 만났다. 당시 신입생이었던 그는 몇 년 지나자 천재에 대한 나의 인상을 만족시켜 주었다. ... “무어, 자네는 ‘항상’ 진실을 말하는가?” 그가 대답했다. “아니오.” 이것이 그가 해본 유일한 거짓말일 거라고 나는 믿는다. (107, 108면)
14. 학생 시절에는 교수들을 대학에서 불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강의를 들어도 내 공부에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으므로, 이 다음에 내가 강사가 되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강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절대 품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그 맹세를 지켜왔다. (113, 114면)
15. 나는 철학이 아주 재미있었다. 그리고 위대한 철학자들이 심상에 제공해 주는 세상을 이해하는 기묘한 방식들을 즐겼다. 내가 케임브리지 시절에 누린 가장 큰 즐거움은 아마 ‘소사이어티The Society' 그룹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115면)
16. ‘소사이어티’는 스스로를 실제의 세계The World of Reality로 가정했다. 따라서 그 밖의 모든 것들은 현상Apperance이었다. 소사이어티 회원이 아닌 사람들은 현상들Phenomena로 불리었다. 시간과 공간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형이상학자들의 주장이었기 때문에, 우리 ‘소사이어티’에 들어온 사람들은 시공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들로 가정되었다. (117면)
17. 나보다 열 살쯤 어린 세대의 경향을 주도한 것은 리턴 스트레이치와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였다. 그 10년의 세월이 지적 풍토에 일으킨 변화가 얼마나 엄청난지, 놀라울 정도다. 우리 세대는 여전히 빅토리아 여왕 시대인 반면, 그들은 에드워드 국왕 시대였다. 우리는 정치와 자유 토론에 의한 순차적인 진보를 믿었다. 그리고 좀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대중의 지도자가 될 포부를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대중과 결별하고자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19면)
18. 케인스의 지적 능력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예리하고 명석했다. 그와 토론하다 보면 내가 목숨을 걸기라도 한 듯 열정적으로 변하고 끝내고 나올 때면 약간 바보가 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122면)
19. 내가 무어의 우수성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소사이어티’에서였다. 그가 보고서를 읽던 게 생각나는데 이렇게 시작하는 글이었다. “태초에 물질이 있었으니 물질이 악마를 낳고 악마가 하느님을 낳았다.” 보고서는, 먼저 하느님이 죽고 이어 악마가 죽어 태초에 마찬가지로 물질만이 남았다는 말로 끝맺었다. 이것을 읽을 당시 그는 아직 신입생이었으며, 루트레티우스(고대 로마의 시인, 철학자)의 열렬한 제자였다. (124, 125면)
20. 결혼하고 나서 몇 년이 흐르는 사이, 화이트헤드가 서서히 스승에서 친구로 바뀌어갔다. (223면)
21. 그(하이트헤드)는 늘 내가 좋지 않게 생각했던 칸트 쪽으로 기울어 있었으며,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게 되었을 때는 베르그송Bergson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그는 우주의 통일성이란 측면에 영향을 받아, 과학적 추론들도 그러한 측면을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나는 기질 때문에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과연 순수 이성pure reason이란 것이 우리 중 누가 더 옳은가를 판단할 수 있었을지, 나로선 의심스럽다. (223, 224면)
22. 당시의 나는 편협한 섬나라 근성의 브리튼족답게 우월감으로 미국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학계의 미국인들, 특히 수학자들과 만나본 결과, 거의 모든 학문에 있어서 영국보다 독일이 앞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알 가치가 있는 것은 케임브리지가 다 안다는 믿음이 여행 과정에서,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서서히 무너졌다. 이런 측면에서는 그 여행이 아주 유용했다고 볼 수 있다. (234면)
23. 1898년이 되지 앨리스와 나는 해마다 일정 기간을 케임브리지에서 보내기로 하고 1902년까지 그대로 지켰다. 그 무렵 나는 맥태거트와 스타우트ㅔ 이끌려 뛰어들었던 독일 관념주의라는 욕조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내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당시 내가 대단하게 보았던 무어였다. 그것은 내게 강렬한 흥분을 맛보게 했다. 감각의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다가, 식탁이나 의자 따위가 현실로 존재함을 다시 믿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은 역시 논리적인 측면이었다. 관계들relations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면 흥미롭고, 모든 명제는 주어-술어의 형태를 취한다는 믿음이 형이상학에 미칠 그 엄청난 영향을 밝혀보고 싶었다. (236면)
24. 결혼한 후에 나는 정서상으로는 조용하고 피상적인 생활을 영위해 왔고, 좀더 깊은 문제들을 모두 잊은 채 가벼운 지식인으로 만족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발 밑에서 땅이 무너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다른 영역에 들어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5분의 시간에 나를 스친 생각은 이러했다. ‘인간 영혼의 외로움은 견디기 어렵다. 종교적 스승들이 설파한 것과 같은 지고의 강렬한 사랑 외에는 어떤 것도 그 외로움을 간파할 수 없다. 이 동기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은 모두 해로우며 잘해 본들 무용하다. 따라서 전쟁은 잘못된 것이고 사립학교 교육은 옳지 않으며 폭력의 사용에 반대해야 한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각 개인이 가진 외로움의 응어리 속으로 파고들어가 호소해야 한다.’ (258, 259면)
25. 그 5분이 흐른 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동한 신비주의적 깨달음 같은 것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깊은 내면이 다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망상이었지만 그럼에도 현실에서 모든 친구들과 수많은 지인들과의 관계가 전보다 훨씬 더 친밀해져 있었다. 그 동안 제국주의자였던 나는 그 5분 사이에 친보어파로, 평화론자로 변해 있었다. 오랜 세월 정확성과 분석에만 매달려왔던 내가, 미에 대한 신비한 감정, 아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 인간의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줄 철학을 찾아내고자 하는 부처님 못지않게 깊은 열망으로 충만해 있음을 발견했다. 야릇한 흥분감이 날 사로잡았는데, 거기에는 강렬한 아픔도 담겨 있었지만 승리감도 약간 배어 있었다. (259면)
26. 그녀(앨리스)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완전무결하게 정숙해 보이려고 애썼는데, 그 결과 위선에 이르고 말았다. (262면)
27. ... 쏙독새가 세 가지의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한 가지 소리만 내는 줄 안다.) (268면)
28. 1907년부터 1910년까지, 나는 1년에 8개월 정도 매일 10시가에서 12시간씩 그 작업을 했다. (269면)
29. 1902년부터 1910년까지는 행복하지 않은 사생활에서 오는 부담과 지적으로 매우 고된 작업이 함께 이어진 세월이었다. 그 시절에는 내가 어떤 터널 속에 있는 듯 했고 과연 터널 저편 끝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종종 회의가 들었다. 나는 옥스퍼드 근처 케닝턴의 육교 위에 서서 지나가는 열차들을 바라보며, 내일은 꼭 저 열차 밑에 드러누우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늘, 언젠가는 ‘수학 원리’가 마무리되리라는 희망에 젖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269면)
30. 나는 청년기 때 남녀 평등에 대한 밀의 책을 읽은 이후로 여성을 위한 평등의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1860년대에 내 어머니가 여성 참정권 지지 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문명 세계를 통틀어 이처럼 빠른 기간 안에 완벽한 성과를 거둔 운동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성공적인 운동에 한몫을 했다는 것이 기쁘다. (274면)
31. 간간히 재미있고 즐거운 일들도 있었지만 1902년에서 1910년까지는 매우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물론 일적인 면에서는 대단한 수확이 있었으나 ‘수학원리’ 집필에서 오는 즐거움은 1900년 후반기의 몇 달 동안에 집중되었다. 그후로는 너무도 힘들고 고생스러워 즐거움 따위를 느낄 여력도 없었다. 결실이 점점 눈에 보이는 후반기가 전반기보다 낫기는 했지만, 그 작업을 통틀어 내가 정말로 생생한 기쁨을 느낀 것은 원고를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로 넘겨주었을 때뿐이었다. (274, 275면)
32. 오톨라인은 내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거의 대부분 유익한 것들이었다. 그녀는 내가 교수나 군자인 양 행동하거나 대화할 때 독재자처럼 구는 것을 비웃었다. ... 자기 중심적이고 독선적인 면도 그녀 덕분에 많이 고쳤다. ... 그녀는 나의 청교도적인 면과 검열관처럼 비판적인 성향을 대폭 완화시켰다. 공허한 세월 끝에 맛보는 행복한 사랑 그 자체가 매사를 더 쉽게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남자는 대개 여자의 영향을 받게 될까 봐 걱정하는데, 내 경험으로 볼 때 그것은 어리석은 두려움이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남자에게는 여자가 필요하고 여자에게는 남자가 필요하다. 나는 사랑했던 여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그들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훨씬 더 편협해졌을 것이다. (366, 367면)
33.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학생들은 칭찬할 만했다. 나는 대학원생 열두 명으로 구성된 반을 맡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그 학생들이 차를 마시러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그 중 한사람이 T. S. 엘리엇인데, ... 당시 나는 엘리엇이 시를 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내가 헤라클레이토스를 칭찬하자 그가 말했다. “네, 그는 언제나 비용Villon(프랑스의 위대한 서정시인)을 떠올리게 하지요.” 나는 아주 훌륭한 얘기라고 생각했고, 그런 식의 소견을 더 말해주기를 늘 기대했다. (378, 379면)
34. 1910년부터 1914년까지는 전환의 시기였다. 1910년 이전까지의 내 인생과 1914년 이후의 내 인생이 마치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중세 7대 악마 중의 하나)를 만나기 전과 후의 파우스트Faust 인생처럼 뚜렷하게 나누어졌다. (407면)
35. 그 암담한 전망도 끔찍했지만 나를 더욱 두렵게 만든 것은 국민의 거의 90퍼센트가 대학살을 기대하며 즐거워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시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 전까지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했으나, 전쟁을 겪으면서 그것이 보기 드문 예외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무엇다도 돈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으나, 돈보다 파괴를 훨씬 더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성인은 으레 진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나, 인기보다 진리를 더 사랑하는 지성인은 10퍼센트도 안 된다는 것을 다시끔 깨달았다. (411면)
36. 1915년 여름, 나는 ‘사회 재건의 원칙들Principles of Social Rsconstruction'을 집필했다. ... 이 책에서 나는, 의식적인 목적보다 충동이 인간의 삶을 빚어내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정치 철학을 제시했다. 나는 충동을 소유욕의 충동과 창조적인 충동으로 이분하고, 창조적인 충동 위에 세워지는 것을 최선의 삶이라고 보았다. 소유욕의 충동이 구체화된 예로는 국가, 전쟁, 빈곤을 들었고 창조적인 충동이 구현된 예로는 교육, 결혼, 종교를 꼽았다. 나는 창조성의 해방이 개혁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처음에는 그 책을 강의용으로 썼다가 나중에 출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책이 즉각 성공을 거두었다. 읽혀지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신념의 고백 차원에서 썼을 뿐인데, 그것이 내게 막대한 돈을 벌어다 주어 향후 나의 모든 수입의 발판이 되었다. (415, 416면)
37. “저분은 저명한 철학자예요.” 숙녀가 말했으나 경관들은 여전히 어깨를 으쓱대고 서 있었다. “전세계가 다 아는 학자라니까요.‘ 그래도 경관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소리쳤다. ”저분은 백작의 동생이라구요.“ 그 말에 경관들이 허겁지겁 내게 달려왔으나 도움이 되기엔 이미 늦은 후였다. (436면)
38.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전쟁은 나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학구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새로운 종류의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도 완전히 바뀌었다. 청교도주의는 인간의 행복에 이바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깊이 확신하게 되었다. 죽음의 쇼를 보면서 살아있는 것에 대한 새로운 사랑을 알게 되었다. (447면)
39. 나는 교수 자리나 청교도주의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렸다.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본의의 작용을 깨치게 되었고, 오랫동안 홀로 서 있는 과정에서 평형 감각 비슷한 것도 얻었다. (450면)
40. 그(비트겐슈타인)는 내가 시키는 대로 다음 학기가 시작되자 논문을 들고 왔다. 그 첫 문장을 읽어보는 순간 그가 천재적인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절대로 조종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답해 주었다. 1914년 초, 그가 대단히 흥분한 상태로 찾아와 말했다. “전 케임브리지를 떠날 겁니다. 당장 떠나고 말겠어요.” “왜?” 내가 물었다. “매형이 런던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 사람하고 이렇게 가까이 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요.” 그리하여 그는 남은 겨울을 노르웨이의 먼 북쪽에서 보냈다. 초창기에 내가 G. E. 무어에게 비트겐슈타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아주 좋게 생각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내가 강의하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은 누구도 그런 표정을 짓지 않거든요.”라고 대답했다. (562, 563면)
41.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 속에 병석에 누워 있는 것은 놀랍도록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 전까지는 내가 근본적으로 비관주의자여서 산다는 것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착각이었으며, 내게 삶은 한없이 달콤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6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