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별하기 위해 태어났다 - 차별과 혐오를 즐기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가?
나카노 노부코 지음, 김해용 옮김, 오찬호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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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산파는 사회다. 인간이 무리를 짓고 생활하지 않는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런데 왜 사회는 차별의 산파가 되었나. 생각해보면 딱히 사회가 차별을 낳았다는게 완전히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 같지는 않다. 사람들은 사람들이 필요해서 모여설고 있는데, 그 안에서 배제가 일어난다는 게 퍽 설득력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애써 모인 사람들은 왜 차별을 하는 것일까. 일단, 기본적으로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은 야생이 아닌 사회다. 많은 사람들은 마치 버섯처럼 야상에서 갑자이 빵 하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거의 시작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있어 어떤 사회에 태어나느냐가 문제이지, 사람이 없는 외로운 상황에서 태어나느냐 아니면 사림이 많은 곳에서 태어나느냐는 선택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건 상식정인 것이고 또한 물리적인 것이기도 하다.

다시 똑같은 질문을 해보도록 하자, 우리는 왜 차별을 하는가 사회에서. 모든 사회가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알짜배기 사회가 있을 것이고, 자신이 저들과 함께 있으면 손해 보는 곳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알짜배기 사회로 가려고 한다. 물론 그 알짜배기 사회라는 것은 그 사람의 이성과 감성에 달려 있다. 경제적인 것 혹은 문화적인 것으로 단칼에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언제나 알짜배기 세상으로 가려는 무한의 경쟁을 하는 것 같다. (물론 언제나 경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만족하는 사회에 들어오면 그곳에서 나름대로 휴식을 취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더 많기도 할 것이다) 동시에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를 지키려는 모습 또한 보일 것이다. 그게 나는 차별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사회에 경쟁적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 자신의 사회를 폐쇄적으로 유지함으로서 그 안에서 자신이 불안해할 수 있는 요소들을 배제하는 것. 그것이 차별이다.

아이러니 한가.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차별의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차별하기 위해 태어났다>의 저자와 생각을 공유한다. 솔직히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방식은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뇌과학과 사회적인 차별을 연결시키는 과정이 굉장히 거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중 하나는, 인간은 모두가 단일하게 세팅된 컴퓨터라는 점이다. , 어떤 상황에 몰리게 되면 똑같은 호르몬들이 분출하게 되고, 그것을 분출하는 사람들끼리는 함께 있으려 하지만, 그것을 분출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반대로 베재를 하기도 한다(물론, 이 책의 예시처럼 사이코패스와 같은 예외적인 상황도 있다. 자신과 호환할 수 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이득을 주는 경우처럼 말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감정이란 것. 그것은 단순히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다. 감정 또한 이성의 작용을 받는다. 아니 자신의 감정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보호하기 위해 이성적인 행독을 하고 이해타산을 따진다. 감성 혹은 감정은 이성과 완전히 독립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타산 작용은 사회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필요하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사회를 보호하고 싶어하면서 더 나은 사회로 가길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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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오기 전에 - 죽음 앞에서 더 눈부셨던 한 예술가 이야기
사이먼 피츠모리스 지음, 정성민 옮김 / 흐름출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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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낭만. 죽음이 낭만의 반대말도 아니고, 낭만이 죽음의 반대말도 아니다. 하지만 이 둘은 왠지 모르게 특정한 상황에서 그 어떤 단어보다 찰떡궁합을 자랑한다. 아름다운 죽음은 그 어떤 상황보다도 낭만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죽음을 어떻게 그려내느냐에 따라 가장 극한의 낭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내가 그런 극한의 낭만을 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극한의 낭만을 만난적이 있기 때문에, 어떤 책을 보든 혹은 어떤 영화를 보든 다 똑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죽음을 어떤 상황에 포장하느냐에 따라 낭만이 달라질 수 있음을 나는 이 책 <어둠이 오기 전에>를 읽으면 찬찬히 느꼈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 가장 찬란하다는 것. 가장 어두운 공간에서 찰나의 빛을 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빛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핵폭탄 몇백 몇십개를 터트려서 만들어진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이라고 해도 그것은 검은 밤하늘에서 잠시 스쳐지나간 별똥별만큼도 밝다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밝기의 양의 차이가 아닌 사람들이 어떠한 지점에서, 어떠한 상황속에서 그 빛을 목격하느냐이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고, 천천히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관찰해가며 보게된 빛의 존재란, 천천히 어둠이 드리워지는 저녁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샛별의 모습을 계속해서 관찰하는 것과 다를게 없을 것이다. 아름답고 또 아름다울 것이다.

이 책은 어쩌면 평범한 에세이다. 일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 일기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어둠이 오기 전. 자신의 빛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쓴 자신의 이야기. 그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솔직히 이 책의 문장이 좋은지 안 좋은지. 나는 판단할 재간이 없다. 그것은 영어로 책을 읽었을 때. 그리고 그 배경을 아는 사람들만이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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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매혹 사이 - 왜 현대미술은 불편함에 끌리는가
이문정 지음 / 동녘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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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문외한이다. 초등학교 시절. 아니 물감이나 찰흙을 좀 만질줄 알게 된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도 미술은 내게 전혀 익순한 것이 아니었다. 학교 벽을 볼 때마다 보이던 수많은 수채화 혹은 시기한 재료들로 만들어진 미술품을 볼 때마다 나는 학교가 어디에서 사 온거겠지를 상상했지만, 모든 작품들을 가까이에서 보면 아는 선배들의 이름이 조그맞게 붙어 있었다. 나에게 있어 미술 작품을 그린다는 것은 마치 하나의 집을 지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생전 지어본 적도 없는 집을 지어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기본적으로 미술 작품의 시작을 어떻게 끊어야 하는지부터 몰랐다. 어디서부터 그림이든 머든간에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모두가 하는 것들을 그저 따라만 할 뿐. 내가 먼저 나서서 창조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작품이라기보다 쓰레기가 돼 버렸다. 그런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도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고, 미술이 내 대학 진입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기에... 나도 그렇고. 미술도 그렇고. 서소를 버린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이 책을 받은 순간. 난 다시한번 생각하게 됐다. 역시미술을 하는 사람들은 천재가 맞구나. 그리고 내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

 

혐오와 매혹사이 이전에

 

내가 읽은 책의 이름은 <혐오와 매속 사이>. 그리고 이 책의 부제는 왜 현대미술은 불편함에 끌리는가이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의 부제를 보지 않았다면 이 책이 불편한 책인지도 모를 뻔했다. 나에게 미술은 완전히 지식이 없는 분야다. 그래서인지 엄마가 아기에게 그거 위험해” “그거 먹지마” “그거 나쁜거야이렇게 가르쳐 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분별 능력이 없다. 그런데 이 책은 단순히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차원을 넘어 나에게 한가지 질문을 더 던진다. 현대미술은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에게 현대미술은 불편하다라는 이야기를 꺼낸다. 정보량이 많아 머리가 터질법도 하지만, 뭐 나름대로 재미있게 본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은 현대 미술이 불편하다! 혐오스러울 수 있음을 나에게 인식시켜 주었다. 이것도 어쩌면 자그마한 수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미술책을 요즘 보면서 생각하는 건데, 이 세상의 정말 천제들 중에는 왜 미술을 하는 사람들인지 알 것 같았다. 메시지 그리고 생각을 풀어가는 영역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고 완전히 개방된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정말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특히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작품들처럼 혐오스러운 것까지도 작품의 일부분으로 만든다는 것. 나는 정말 상상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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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거지 불행한 게 아니에요
김설기 지음 / 레터프레스(letter-press)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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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지 않고 도시의 그늘과도 같은 초야(?)에 묻혀 산지 어언 4. 내가 초야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동안 나의 동무들은 필드라는 곳을 뛰어있으리라 생각을 한다. 한 친구는 시민들에게 따뜻한 물을 공급하는 공기업에서 마우스 버튼을 누르며 벨브를 눌렀다 놨다 할 것이고, 다른 친구는 승강기가 잘 돌아가는지 매일 확인 할 것이고, 한 친구는 자신의 회사 물건이 잘 팔리도록 마케팅을 하고 있을 것이다.

황금 세대. 그 어떤 세대보다 풍요롭게 자라고, 정해진 코스를 통해서 회사에 취직. 그리고 아이를 낳는다. 90년대 생들이라면 지금 누구나 겪고 있을 것이다.

나는 90년대 생중 가장 빠른 90년생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내 친구들은 누군가가 정해놓은, 부모님들이 가라고 해놓은 혹은 그 길로 가지 않으면 불안했기에 저마다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걸었다. 90년대생 대부분이 자의반 타의반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생에서 누군가의 의자가 반씩이나 반영된 길을 가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나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까.

흔들리는 나침반은 그 방향을 틀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의 인생에서도 북쪽과 남쪽이라는 명확한 방향이 있는 것일까. 인생에서의 나침반은 무엇을 가리키고, 그 목표가 흔들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참고로 내 인생의 나침반 또한 흔들리고 있다. 이상하게 내 나침반은 북쪽을 가리키기 않으려고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다. 전력을 다해서 북쪽을 가리기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지구의 자력이 모이는 그곳으로. 당연히 나침반이 가리켜야 하는 곳을 가리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내가 어쩔수 없이 초야에 묻혀 4년을 지내는지 모르겠다.

<우울한 거지 불한한 게 아니에요>라는 책을 읽으며 나는 대번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나의 동갑. 혹은 아래위로 5년인 나의 또래가 쓴 책이란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은 내가 하는 고민과는 달랐다. 그리고 그녀의 고민은 한편으로 내가 했던 걱정했던 고민이었다. 우울하고 불안한. 이 일이 내 일이 아닌 것. 나와 나개 하고 싶은 일이 일치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강력한 내적 불안정. 나는 그 불안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이렇게 저항하고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하건데, 북쪽을 가리키고 그 방향으로 간 사람들. 그 사람들 또한 나름대로 충실히 그들 나름대로 행복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꿈은 북쪽이 아니지만 이제 북쪽에 집을 짓고 아이를 낳고, 그 안에서 생활을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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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를 잡다
아르놀트 판 더 라르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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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흉 수술 할 때의 일이다. 아침 일찍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의사들이 아침 일찍 수술 시간을 잡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침대에 실려 수술실로 가는길. 몸은 편히 누워 있었지만, 생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긴장감이 몸을 경직시켰다. “누군가가 매스로 나의 살을 가르고, 손으로 휘저으며, 내 몸을 고친다는 생각을 수술실로 가는 침대에서 내내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엄마와 헤어지고 의사가 나를 수술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수 많은 사람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본격적인 수술의 시작이요, 두려움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구 순간 간호사인지 혹은 의사인지 모를 사람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호흡기 같은 것으로 내 코와 입을 쌓았다. 나는 그곳에서 나를 진정시키기 위한 산소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있는 힘껏 그곳에 있는 어떤 공기를 흡입했다. “흐흡~~.” 순간 정신은 몽롱해졌고, 나는 잠에 들었다. 그리고 깨어나보니 상당한 고통과 함께 내 옆구리에는 호스가 하나 달려 있었다. 이게 내 수술에 대한 기억 전부다.

병원 그리고 의사. 병원이라는 공간과, 의사라는 사람은 두려움과 신뢰가 공존하는 곳이다. 하지만 병원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사와 만나 진찰을 받을 때 아주 짧은 순간의 두려움과 신뢰만을 느낄 뿐, 그것이 절정에 오르는 순간은 나처럼 잊어버린다(참고로 나는 산소인줄 알고 마취 가스를 들이마신 것 이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일지도 모르는 순간인데 우리는 그 순간을 가뿐이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과연 그 중요한 순간을 정말 생생히 기억하는게 우리에게 좋은 것일까? 만약 누군가가 이렇게 묻는다면 Yes라도 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리턴이라는 의학계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의사가 환자를 수술 할 동안 환자의 의식이 깨어있는 것이다. 상상을 해봐라. 이사가 나의 배를 휘젓고, 칼로 나의 몸을 난도질 하는데 그것을 생생히 느낀다는 것 말이다. 사람의 인생에서 모든 것을 다 기억하지 않고 망각하는 게 어느 정도 축복이라면, (옛날에는)수술을 하다가 기절하는 것 혹은 빅토리아 여왕 이후 확대된 마취로 인해 의식을 잃는 것은 축복을 넘어 선 어떤 운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의 기억이 끊기는 부분 때문인지, 의사라는 직업은 언제나 미스테리에 쌓이기 일수다. <낭만닥터 감사부>, <라이프>, <하얀거탑>, <굿 닥터>, <뉴하트> 등등의 의학 드라마들이 작가라는 사람을 통해 계속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전문적인 지식에 가리고, 마취에 가려서 우리는 의료계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의사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의료 사고에 대한 막연한 불신만 있을 뿐. 정작 그 극단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화된 일들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메스를 잡다>는 우리의 의식이 미치지 못하고, 우리가 함부로 갈 수도 없는 의료계 현장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드라마틱하게 그리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알량한 전문 지식을 갖고 장난을 치는 집단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이 책을 누군가는 문화사라고 불렀는데, 물론 의학과 관련된 문화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고민사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책은 사람을 고치기 위해, 사람을 덜 아프게 하기 위해, 사람을 갖고 연구를 하고 그런 연구를 통해 치료했던 일들을 담고 있다. 어쩌면 인류가 병으로 전멸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전선에서 고민을 했던 사람들과 그들과 싸웠던 병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이제까지 읽었던 의학 관련 책 중 가장 재미있고, 가장 의료계 현장에 관한 이야기를 선명히 다루고 있으며, 의학이 어떤 것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다.

 

다소 부담스러운 책. 하지만 재미있다

 

게다가 부러진 뼈를 바로잡는 일은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럴 만한 배짱도 있어야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건은 환자가 그렇게 해 달라고 기꺼이 맡기는 것이다. 용기와 권위, 경험을 충분히 갖추고 공감 능력도 웬만큼 갖추어야 환자로부터 그와 같은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치료 신력도 뛰어나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손으로 직접 낫게 해 주는 사람들, 최초의 외과 의사들이 등장했다.”

 

영어에서는 낫다라는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표현한다. 수술과 상처, , 골절에는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을 뜻하는 ‘he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지병에는 건강이 회복되는 것을 뜻하는 ‘cure’를 사용한다. 대략적으로 분리하자면 외과 의사가 하는 일은 heal, 일반의사가 하는 일은 cure에 해당된다.”

 

이 책의 부제는 세상을 바꾼 수술, 그 매혹의 역사. 일단 쉼표를 기준으로 앞에있는 세상을 바꾼 수술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 매혹의 역사에는 조금 동의하기 어렵다. 나쁜 뜻이 있어서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은 아니다. 책의 저자인 아르놀트 판 더 라르가 수술을 할 동안 어떤 일이 있는지, 의사들이 어떻게 수술을 하는지 그려내는 게 참으로 디테일하기 때문이다. 소설도 아니면서 저자가 쓴 글을 읽고 있노라면,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내 몸을 의사가 어떻게 가르고·자르고·파고들어서 수술하는지를 알 수 있다. 정말 말하기 거시기 하다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1장을 읽을 때부터 이 책들 다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석 제거를 하던 초기에 항문으로 손가락을 넣어서, 그곳에서 방광의 어떤 걸리는 부분을 찾아 휘졌는다고 이야기 한 부분은 정말, 책을 읽다가 이렇게 당혹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책의 저자는 수술 혹은 우리 몸과 관련하여 어려운 용어들을 책의 맨 뒷장에 정리해 두었다고 이야기 했지만, 난 절대 그 페이지를 읽고 싶지 않았다. 무지를 통해서 내 상상력이 확장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어떤 책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정말 책을 읽다가 이런 일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어쩌면 책의 묘사로 인해 고통 받던 나에게 유일한 완화제가 있었다면 ‘10: 마취였다. 이 책은 시산순서대로 수술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쓰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매 장을 거듭할수록 의사들이 수술대위에서 병을 치료하는 모습을 보며, ‘의사란 직업. 정말 맨탈이 강해야 하는구나. 혹은 빨리 지금 하는 짓에 대한 gross한 느낌에 적응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마취 부분에서 이런 장면들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들었다. 의사에게 이러한 수술을 받는데 정말 마취란 것이 없다면, 상당히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을 연이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책의 내용 자체는 재미있었다. 하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수술이 어떻게 행해지는지를 계속 보며, 이전까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장면들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었다. 비록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번도 상상해보지도 혹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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