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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하늘 빨간지구 - 기후변화와 인류세, 지구시스템에 관한 통합적 논의
조천호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3월
평점 :
중학생 시절. 난 유독 아프리카 지도가 불편했다. 사막화라는 것을 배우면서 늘 언급됐던 예시가, 아프리카의 사하라 지역이었다. 그레타 툰베리만큼 기후변화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사막화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왜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지 몰라 답답했던 것 같다. 당시 내가 생각했던 솔루션은 간단했다. 마치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선을 자로 나눈 것처럼, 사하라 지대를 1자로 관통하는 물길을 만드는 것 이었다. 서에서 동으로든, 동에서 서로든, 상관없이 대서양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물길 말이다. 중국이 옛날 황하와, 양쯔강을 잇는 운하를 건설한 것처럼, 제국주의 열강들이 수에즈 운하나 파마마 운하를 건설하는 것처럼, 거대한 운하가 계속해서 증발되고 이것이 비의 형태로 사하라 일대에 내리면, 사막화를 막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상상을 하며 약간 걸리적거리는 것이라곤 남에서 북으로 뻗어있는 나일강이었으나, “어쨌든 사막화가 더 큰 문제 아닌가?”라고 생각을 했다. 혹은 “바닷물이면 안 되지 않나?”라는 고민도 “담수처러기로 불을 보내면 되지 않은가!”라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은 가히 공상이었다. 과학 상상그리기 대회에 가져갈만한 소재라고나 할까. 거대한 운하가 한 나라를 관통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에서의 문제와 비용을 나는 고려치 않았다. 물론, 이는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간 엄청난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다. 사회과학적 생각을 조금만 할 수 있었더라면, 혹은 정책을 추구하는데 있어 합리성이란 것을 조금이라도 따지며 계산할 수 있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발상이었으나, 당시에 나는 그냥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간과했던 것은 사회적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파란하늘, 빨간지구>를 본 후, 들었던 생각이다. 운하 건설 및 운영 단계에서의 사회적 문제만이 아니라, 기후적 혼란을 고려치 않았다. 운하가 세워지고 사하라 지역에 비가 계속 내렸을 때, 생길 수 있는 기후적 맥락을 나는 빼먹었다(아니면, 공사가 성공을 하더라도, 비가 충분히 내리지 않을 가능성 또한 있다. 이렇게 되면 공사 자체가 4대강처럼 헛수고 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연적 문제에도 상호성과 인과성에 존재하고, 하나의 사건이 촉발할 연쇄적인 문제와 이것들 간의 상호작용을 나는 고려치 않았다.
<파란하늘, 파란지구>을 읽으며, 내가 과거에 했던 고민들이 현재에는 ‘지구공학’ 혹은 ‘기후공학’이라 불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내 공상에 대해서 학자들이 붙여진 이름만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과학자들은 지구공학의 문제점 또한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는 내가 했던 것처럼 지구공학적 상상을 동원해, 주변 문제를 풀려는 사례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발 미세먼지를 없애기 위해 인공강우를 생각한다든지,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차폐막 설치 등. 4대강 사업에는 몇 백배, 몇 천배는 될 대서양-인도양을 잇는 운하 건설만큼 스케일이 큰 것은 없지만, 모두 내가 했던 상상과 비슷한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이런 상상들의 장점을 하나라도 굳이 꼽자면, 적어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고,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과 ‘선의’정도는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반대로, 자신의 삶은 바꾸려고 하지 않으면서, 손안대고 코 푸는 것처럼, 정부가 기술을 개발해 알아서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심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자만 언제나 우리 주변의 문제를 만드는 사건들은 노골적인 악의보다, 무지한 선의에 의한 것들이 적지 않다. 직접민주주의는 정말 대의제의 단점을 보완하고, 평등과 자유에 기여하는가와 같은 문제가 대표적이다. 나는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이러한 사건들을 목격했고, 지금 또한 그런 무지한 선의가 만들 미래의 비용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문제들은 단순히 인간간 상호작용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닌, 기후라는 거대한 자연적 상호작용에서도 발생할 수 있음을 이 책 <파란하늘, 빨간지구>를 통해서 알 수 있게 됐다.
기후변화 속 상호, 연쇄, 인과
기후변화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그동안 공허하게 들렸다. 그들이 걱정하는 문제들이 내게는 잘 와닿지 않았다. 광화문에서 기후 문제와 관련해 무슨 시위를 한다든지, 혹은 그레타 툰베리와 같은 초딩(?)·중딩(?)·고딩(?)들이 기후악당인 현 세대에게 경고를 한다든지. 나는 그들의 퍼포먼스들이 솔직히 와닿지 않았고, 내 일 같지도 않았다.
“와닿지 않았다”는 느낌이란, 단순히 그들이 경고한 현상이 실체화 돼, 내 삶에 영향을 미쳤느냐 혹은 미치지 않았는지의 문제만은 아니다(물론, 나는 2016년 폭염을 통해서, 그리고 올해 52일간의 장마를 통해서 기후변화로 인해 울고 웃었다. 전자 때문에 죽을 뻔 했다면, 후자 덕분에 나는 여름을 온전히 날 수 있었다). 소설과 같은 거짓에 우리가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감정을 자극하는 차원을 넘어서, 주인공이 겪는 문제들을 우리가 입체적으로 공감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후와 관련해 주장만 앞선 게 아니라, 사건을 내실있게 혹은 정교하게 다듬어 놓은 이야기가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 사건 내에서 벌어지는 상호성을 인지하지 못할 때, 어떤 주장이든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주장하는 게 아니라, 말로서 그 안을 표현해 보여주지 못한다면, 어떤 주장이든 청자에게 있어 공허함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선의와 문제의식만 앞선 주장이 아닌, 현재 기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상호성을 줄 수 있어야, 트럼프가 그레타 툰베리의 행동을 보고, 사춘기 소녀의 땡강이라고 생각하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파란하늘, 빨간지구>는,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후발(發) 공포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 책이다. 그만큼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알찼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모두 뭉뚱그려 기후와 관련돼 있고, 이에 대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계속해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폭염, 미세먼지, 폭우, 폭설 등.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구체적인 맥락을 보여줌으로서, 우리가 기후변화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은 무엇인지, 빙하에 의해 대륙이 잠긴다는 부풀려진 사실은 무엇인지 등. 기후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 우리가 현재 어느 지점에 와 있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이 책은 잘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1장 이었다. ‘생명의 탄생에서 인류세까지’라는 부분인데, 언뜻 과거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던 백악기, 트라이아스기처럼 가장 재미없었던 단원을 공부하는 느낌이 날 수도 있는 장이었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해당 책을 통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기후라는 게 얼마나 불가능한 확률에 의해 탄생한 것이고, 또 우리는 이 우연한 기적을 얼마나 남용(?)하고 있는지 혹은 함부로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지점이었다. 조천호씨가 쓴 비유대로, 깎아지는 절벽 위에 우연으로 생긴 좁은 비탈길을 걷고 있는 주제에, 그 길이 엄청 튼튼하다고 착각해 함부로 그 길을 훼손하고 있는 게 우리 인류의 모습이라는 것은, 내가 기후변화와 관련하여 들은 비유중 가장 직관적이고 적절한 것이었다(물론, 이 같은 비유는, 해당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비유일테다). 단순히 표면적인 현상들을 중심으로 현실의 위치를 보여주는 게 아닌, 홀로세라는 맥락과 그 안에서의 생긴 짧디짧은 인류 문명을 통한 기후 위기 설명은, 현재 인류가 벌이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철없는 짓인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이었다.
<파란하늘, 빨간지구>
지구라는 유기적 시스템이었다, 왜나는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왜 기후 온난화라는 것을, “빙하란 얼음은 겨울이 되면 다시 얼겠지”라는 간단한 생각으로 바라봤을까? 이유는 간단할 것이다. 앞에서 내가 이야기 한 것처럼, 나는 사건이 본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즉, 기후변화라는 말은 연성적인 단어는 아니지만, 이 문제의 크기을 이해하게 된 이후에 이 말을 돌이켜 보면, ‘기후’라는 말에도 ‘변화’라는 말에도 특별히 위압감이 없다는 느낌이 생겼다. 현재 유지되고 있는 순환 시스템과 이를 유지시키는 자정작용이라는 것들이 종합적으로 파괴되고, 지구 전체의 기후가 종합적으로 변하며, 현재의 기후에 기반을 둔 인류의 시스템이란 게, 모두 무용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한가하게 지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들었다. 간단하게 비유를 하자면, 우리의 몸이 병원균을 쫓기 위해서 체온을 높이는 상황이 됐는데, 인간이란 병원균이 너무 태평하게 지내고 있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의 주옥같은 말들
[추천사]
인간에게 알맞은 기후 환경은 우주의 역사가 우연의 누적을 거쳐 선사한 것이다. 거대한 비선형 복잡계인 지구시스템이 찾아낸 아슬아슬한 평형 조건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화석연료를 바탕으로 한 현대 문명은 산업혁명 이후 전례 없는 규모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지구의 온도를 높여왔다. 기후변화는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의 단순한 양적 변동이 아니라. 임계점에 이르면 질적인 변화로 이어져, 인류는 더는 생존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린 그런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다. 녹아내리는 빙하와 극한 날씨 등이 바로 그 징후다. - 8pp
1장. 기후, 생명의 탄생에서 인류세까지
[인류 문명은 안정된 기후에 의존하고 있다]
홀로세의 지구는 다양성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생명체들로 넘쳐나는 보물상자다. 특히 인류에게 더없이 안성맞춤인 행성이다. 우리가 누리는 기후와 구리가 의존하는 생물 다양성은 홀로세의 환경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홀로세는 75억이 넘는 인구를 먹여 살리고, 현대사회를 지탱해줄 수 있는 우리 문명의 에덴동산이다.
우리는 인류 문명의 인간 지성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하는 오만을 저지르고 있지만, 지구 역사를 보면 이 역시 좋은 기후 조건을 만난 덕에 일어난 우연한 사건일 뿐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수억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화석연료를 태워 오늘날의 번영을 이뤘다. 하지만 이 번영은 과거 7,000년에 걸친 문명을 지탱해왔던 안정된 기후를 붕괴시킬 정도로 위협이 되고 있다. 이제 인류는 자연적인 기후변동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됐다.
지구 미래는 새로움이 아니라 지속에서 찾아야 한다. 홀로세는 우리가 아는 한 인류가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홀로세를 지켜내야 할 절박하고 충분한 이유다. - 36pp
[역경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다]
계몽된 사회는 기상 이변, 흉작과 전염병의 원인을 신의 분노나 마녀의 저주에서 찾지 않고 그 사회 체계의 문제로 보았다. 즉, 기상 격변에 따른 기근은 지배 권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 사회적·경제적 위기를 넘어 종교적·정치적 위기로 치달을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 결국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다.- 49pp
[지구 위기가 곧 인간 위기다]
얼마 전까지 큰행성에서 인류가 이룬 작은세상은 별 탈 없이 유지되었다. 지구가 아주 커서 우리가 지구에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우호적인 지구에서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 우리는 큰 행성의 작은 세계에서 작은 행성의 큰 세계로 들어왔다.
인류세에 진입했음에도 아직 지구가 별 문제 없어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별문제 없어 보이는 이유는 지구가 인간이 가하는 압박을 완충하고 완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구가 복원력이 높을 때는 평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이른바 음의 되먹임이 작용한다. 불만스럽게 떼쓰는 아이에게 끈기 있게 대응하는 어머니처럼, 지구는 인류가 가하는 스트레스와 폐해를 흡수한다. 그러나 지구가 견딜 수 있는 능력도 한계가 있다. 지구도 지속적이고 강력해지는 충격으로 속은 멍들고 있다.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물적 성장과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자연이 인간에게 한량없이 베풀어주지는 않는다.
기후변화나 환경오염 같은 자연재해는 공간적 경계를 넘어 지구에 영향을 주며, 온실가수와 방사능을 따뜻한 각종 폐기물은 세대를 넘어서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인간 활동이 자연의 자연 과정을 넘어섬으로써 지구가 작동하는 온전한 방식을 위협한다. 이 위험은 많은 것을 욕망하고, 많은 것을 내다 버리면서도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 고민도 하지 않는 악순환을 반복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단기적으로는 이익을 안겨주지만, 장기적으로는 지구 복원력을 저해해 취약성을 축적한다. - 57pp
2장. 변화, 미래의 유일한 상수는 기후변화
[기후는 지속해야 하고, 날씨는 변해야 한다]
기후 평균값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자연적인 움직임을 ‘기후변동’이라고 한다. 기후변동은 엘니뇨, 라니냐, 또는 북극 진동같이 주기적 또는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기후 변동의 범위를 벗어나는 상태를 ‘기후변화’라고 한다. 오늘날 기후변화는 특별한 설명이 없는 한, ‘인간이 일으킨 기후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자연적인 기후변동의 범위를 벗어나는 인간 활동으로 발생하는 기후변화가 우리에게 위기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 61pp
[기록이 한번 깨지면 우연이지만, 여러 번 깨지면 변화가 된다] - 72pp
3장. 위기, 파국은 한순간에 찾아온다
[보호난간이 있어야 절벽에서도 달릴 수 있다.]
인류 문명은 1만 2000년 전에 시작된 홀로세의 기수 조건에 맞추어져 있다. 홀로세는 지구 탄생 이후 흔히 있는 상태가 아니라 아주 특별하고 유일한 시기다. 인류는 가파른 절벽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놓인 도로를 달리고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인류가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성장을 해 달려가고 있어 이를 견딜 수 없는 지구는 홀로세에서 떠나려고 한다.
까딱하면 굴러떨어질 수 있는 낭떠러지 길이라 해도 보호난간이 있으면 우리는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다. 지구의 보호난간은 넘어서는 안 되는 지구 위험의 요소로 구성된다. 각각의 위험 요소에 관해 인류의 안정과 번영이 위태로워지는 한계를 정량화해야 한다.
··· 지구가 충격을 받으면 처음엔 지구위험한계의 ‘불확실 영역’에 들어선다. 이때는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복원력이 작동한다. 권투 선수가 펀치를 맞는다고 해도 처음 몇 라운드에서는 회복력이 있어 버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불확실 영역을 넘어서면 ‘고위험 영역’으로 진입한다. 고위험 영역에서는 어느 순간 작은 충격으로도 전체 균형이 무너지고 복원력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원상태로 회복할 수 없다. 회복력이 바닥나는 마지막 라운드쯤 되면 권투 선수는 한 방만 더 맞아도 쓰러져서 다시 못 일어날 수 있는 것과 같다. - 111pp
··· 지구위험한계는 요소들을 단순히 겹쳐 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환원론적으로 과학을 수행하지만, 지구는 전체가 하나로 반응한다. 그러므로 실제는 지각된 부분들의 합과 다르다.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로 영향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가 위험한계를 넘어서면, 수온 상승과 해양 산성화로 이어져 산호초가 파괴되고 물고기도 영향받는다. 생물 다양성과 물의 이용은 결정적으로 기후변화에 달렸다. 그리고 기후계와 생물 다양성의 최종상태는 민물의 양, 토지 이용, 질소와 인의 흐름이 작용한 결과가 곱해져 결정된다. 즉, 모두는 하나를 위한 것이고 하나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가지 지구위험한계에 치중하기보다는 모든 한계가 안전한 운영 공간에 머무르도록 통째로 관리해야 한다. - 116pp
[지구는 스스로 뜨거워질 수 있다]
우리가 온실가스를 계속 배출하면 지구는 한순간 ‘찜통 지구’에 진입한다. 찜통 지구는 지구가 스스로 온실가스를 배출해 기후변화를 증폭시키는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되면 ‘티핑 포인트’를 넘게 된다. 물이 가득찬 컵에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면 물 높이가 컵 높이 위로 서서히 올라간다. 그러다가 마지막 더해진 한 방울에 컵보다 높아진 물이 한껍너에 무너진다. 이처럼 미미하게 진행되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에 전체 균형이 깨져버리는 상태가 되는 시점을 티핑 포인트라 한다.
이산화탄소는 대기오염 물질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곡차곡 쌓인다. 온난화 난로를 계속 켜놓고 사는 셈인데 매년 공기 분자 100만 개당 이산화탄소 두 개씩 온난환 난로에 더 집어넣어 화력을 점차 키우고 있다. 하지만 기온은 이산화탄소 축적량에 비례해서 상승하지 않는다.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요인은 온실가스 배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구는 복잡 시스템으로 그 안의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서로 연결되어 되먹임 작용을 한다. 음의 되먹임을 기온 상승을 둔화시키려는 복원력으로 작용하는 반면, 양의 되먹임은 기온 상승을 증폭시킨다.
지금까지 지구는 인류가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가한 충격을 스스로 흡수해왔다. 배출된 전체 이산화탄소에서 육상식물이 30퍼센트, 해양이 23퍼센트 흡수해 대기 중에는 약 47퍼센트만 머무른다. 또한 바다가 온실가스로 인한 열기의 90퍼센트 이상을 흡수한다. 이처럼 지구는 충격이나 교란이 일어났을 때 불안정한 상태를 회복시킬 수 있는 복원력을 가지고 있다.
지구는 끝없는 인내심과 수용력을 가지고 있어 기후변화 충격에도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열 받는 상황에서는 누군가 한두 마디 더 약을 올리면 한순간 폭발하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로, 지구도 온실가스라는 외부 충격으로 열 받은 상태에서 한계를 넘어 온실가스가 더해지면 열을 자체적으로 증폭시킨다, 즉, 티핑포인트에 도달하면 ‘음의 되먹임’이 ‘약의 되먹임’으로 방향을 틀게 되어 복원력을 상실한다. 지구시스템 내부에는 양의 되먹임으로 기후변화를 증폭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티핑요소가 있다. - 119pp
··· 기후변화의 원인과 결과 시이의 인과관계가 단선적으로 비례하지 않으므로 찜통 지구에 도달했다는 것은 ‘일이 일어난 다음’에야 분명해진다. 이러니 우리는 경고 신호를 너무 늦게 알아차리기 십상이고, 그러는 만큼 적시에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너무 늦을 때까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잇는 복잡한 지구시스템에 우리는 더 민감하고 능동적이어야 한다. - 124pp
[하찮아 보이는 먼지 안에 숨은 위험의 갈등]
이화여대 김영욱 교수는 2015년에 발표한 <언론은 미세먼지 위험을 어떻게 구성하는가?>라는 논문에서 최근 오염먼지를 위험으로 인식하게 된 이유를 분석했다. 2013년 세계보건기구에서 대기오염먼지를 1급 발암물질로 규정했다. 이어 환경부에서 2014년에 미세먼지 예보를 시작했다. 이때 언론은 이에 관한 보도를 쏟아냈다. 논문에서 김영욱 교수는 “우리 주변에 상존하지만 인지되지 않고 있던 위험을 과학적 사실과 무관하게 언ㄹ노에 의해 윟머 문제로 재구성되어 확산될 수 있음을 언론 기사의 변화량이 보여준다.”
라고 썼다. - 174pp
5장. 대응, 기후변화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
[누가 과학을 부정하는가]
과학은 어느 학문보다 객관적인 분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익이 걸린 문제라면 이 전제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1950년대부터 담배 업계는 흡연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을 폭로하는 의학계의 연구 성과를 이익 침해로 간주했다. 담배 회사들은 특정 개인에게 발생한 암의 원인이 흡연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불확실성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그리고 담배 외에 퇴행성 질환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들에 관한 연구를 지원해 다른 상관관계를 제시하며 논점을 흐리는 전략을 활용했다.
근대 과학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라는 르네 데카르트의 회의론으로 진리를 찾으려 했다. 회의론은 기존에 확고하다고 믿어왔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태도다. 즉, 거짓 믿음만 회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도 회의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진정한 과학자는 회의론자다.
담배 회사 로비스트의 “의심이 우리의 상품이다”라는 유명한 메모처럼, 기후변화 부정론자들은 회의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과학계는 불행히도 ‘회의론자’라는 용어를 강탈당했다. 즉, 회의론은 기후변화 논쟁에서 원래 의미와 완전히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입증되어 널리 인정받은 과학적 원칙들을 밀쳐내고 싶을 때 쓰이는 말로 전락한 것이다.
과학적 의견이 불일치하거나 불확실성이 있는 경우에는 근거의 우월성을 판단의 기반으로 삼는다. 과학은 완벽한 근거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형태로 우월한 증거를 제시하고, 그 증거들 사이의 균형, 여러 갈래의 증거들이 보여주는 일관성을 기초로 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견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으나, 증거에 기초한 우월적 사실에 대해서는 그런 의견을 내세울 수 없다.
정상적인 회의론은 증거를 고려한 다음 결론에 도달한다. 반면 부정론은 결론을 부인한 후, 신념과 상반되는 모든 증거를 무시한다. 즉, 기후변화 부정론자는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증거만 받아들이고 그에 반하는 증거의 타당성은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한다. 이 때문에 부정론은 과학의 외양을 갖추려고 노력하지만, 과학이 될 수 없다.
기후변화 부정론은 반증 시험대를 통과해야 하는 학계에서 주장되는 게 아니라, 언ㄹ노을 통해 홍보되려는 경향이 있다. 기후변화가 학계에서 주류이기 때문에 회의론을 학회에서 발표하는 게 어려운가? 그게 아니다. 과학 세계에서는 지배적인 학살을 따라야만 인정받고 명성을 얻는 게 아니다. 통설을 뒤집는 새롭고 놀라운 연구 결과를 보여야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갈릴레오,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이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지구가 더워지지 않았다거나 기후변화가 인간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힐 수만 있다면 그 과학자는 스타가 될 것이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비용을 치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밝혔으니 얼마나 눈에 띄는 과학자인가? 이처럼 부정론이 주류가 될 수 있는 기회는 넘치는데도, 빈약한 근거로 인해 학계에서는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 190pp
[무임승차국이 강제승차국보다 돈을 더 내는 게 정의다]
기후변화는 가난한 사람만의 문제라 생각하기 쉽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대응 능력이 없어 어려움에 부닥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인류가 기후변화를 관리할 수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파리 기후변화협약의 목표대로 산업화 이전 시기보다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2도 이하로 유지하느 경우에만 지구적인 고통을 막을 수 있다. 2도를 넘으면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파국에 도달할 가능성이 크다. 1도 상승한 지금도 이미 미국은 허리케인, 가뭄, 산불과 한파에 절절매고 있지 않은가? - 207pp
[기후변화는 결핍이 아니라 과잉에서 발행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위험은 무지가 아니라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리라 믿었던 지식에서 자연에 대한 불충분한 지배가 아니라 완전한 지배에서,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산업 시대에 확립된 규범과 객관적 체계에서 일어났다. 결국 현대의 위험은 우리가 모르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련느 인류 문명에서 비롯한다.
우리 삶을 안락하고 편안하게 만들었던 과학기술의 발달은 ‘위험 사회’의 조건을 강화했다. 즉, 현대 과학기술은 문제를 풀어가는 도구인 동시에 문제의 근원이라는 이중성을 가진다. 이는 문명의 기반한 과학기술이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인류가 지금까지 밝혀낸 불완전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합리성은 한계가 있으므로 과학기술의 힘이 거대해질수록 그 부작용을 해결하는 것이 더욱더 어려워진다. - 218pp
··· 마크 트웨인은 일찍이 “우리는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믿음’ 때문에 위험에 처하게 된다”라고 했다. - 220pp
[지구공학이 기후변화를 막아낼 수 있을까]
지구공학은 개별적인 증세에만 초점을 맞춘 단편적인 접근 방식이며, 본질적으로 자연을 기계로 바라보는 근대적인 대응 방법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기계처럼 문제가 된 부분만 수리하면 정상적인 작용을 다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는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된 거대한 자기 조절 시스템이므로, 작은 차이 때문에 큰 영향이 나타날 수 있는 비선형 체계고, 한 번 임계상태를 넘으면 원래대로 되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 체계다. 그러므로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공학적 대응이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즉, 지구 시스템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구공학을 통한 섣부른 인간의 기후 조작이 더 큰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다.
또한 지구 공학은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질병으로 봤을 때, 지구라는 행성은 유일무이한 환자다. 그리고 이 환자는 치명적인 결과에 이르면 안 된다. 지구공학은 위험할 수 있는 실험을 밀폐된 실험 조건에서 하는 것과는 상황이 다르며, 통제된 조건에서 무작위로 실험할 기회도 없다. 지구공학을 실험하며 의미 있는 결과를 얻으려는 수십억 인구를 실험용 쥐로, 그것도 여러 해 동안 삼아야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지구공학은 검증되지 않았고, 검증할 수 없으며, 상상한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 오늘날 많은 사람은 기술 진보에 기반한 성장이 사회문제뿐 아니라,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지구공학은 산업과 에너지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도, 기후변화를 해결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는 점에서 호소력을 갖는다. 기술을 개발하려는 것이 사람이 만든 체계를 바꾸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후변화에 무관심한 데는 일종의 안이한 믿음도 깔려 있다. 갑자기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서 우리를 구해줄 거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를 곤경으로 몰아넣은 원인을 그대로 방치한 채 눈앞의 현실에만 몰두하게 하는 무분별한 사고방식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우리의 미래를 불완전한 기술에 의지할 수는 없다.
지구가 기후변화와 위험에 직면해 있지만, 그 원인은 사뭇 간단하다. 이산화탄소를 과다 복용해서 건강을 잃은 탓이다. 지구공학은 여기에 약을 처방하는 셈이다. 가장 단순하고도 안전한 해법은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건강한 몸에는 그 어떤 약도 필요 없다. 지구공학을 만병통치약으로 찾을 게 아니라, 지구를 건강하게 회복시키면 된다. - 236pp
6장. 예측, 알 수 없는 미래마저 준비해야 하기에
[과거 기후를 알아야 미래 기후에 대응할 수 있다]
과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깔끔하게 정동된 어떤 것’을 떠올린다. 옛날 기후도 복잡하게 얽힌 대리지표에서 양적·질적 속성을 숫자로 나타낸다. 수령화 되려면 척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절대적이지 않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나라의 어떤 마을에서는 대포가 시계 노릇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포성 덕분에 규칙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12시 정각마다 포성이 울렸는데 그 발사 시각은 부대장 손목시계에 따라 정해졌다. 부대장은 읍내 시계방 괘종시계를 q고 손목시계의 시간을 맞추었다. 그런데 시계방 주인은 포성 소리를 듣고 괘종시계를 맞추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기준과 척도가 자의적이고 순환적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신은 세상을 창조하면서 어떠한 ‘기준’도 창조하지 않았다.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하게나마 이 세상을 인식하기 위해 기준과 척도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과학은 완벽함을 지향하지만 완벽함을 닿을 수 없다. 과학은 자연에 관한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그 시대에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언제든지 새롭게 알아낸 측정 결과가 나타나면 번복될 수 있다. 과학은 항상 일려 있기에 새로운 증거에 도전을 받는다.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다만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무시하며 측정하지 못하는 것은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기의 지구에서 지금뿐만이 아니라 옛날 기후도 측정해야만 한다.
측정한다는 것은 인류의 근본적인 질문인,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에 관한 대답의 틀을 제시한다. 우리는 측정을 통해 옛날 기후를 알게 되지만 측정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옛날 기후를 알고자 함은 미래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즉, 측정을 통해서 측정할 수 없을 만큼가치있는 지구 기후를 지켜낼 수 있다. - 244pp
[수많은 실패를 딛고 합리성을 쌓는 과학]
과학이 실패도 성공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이유는 무엇인가?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과학의 힘은 확실성이 아니다. 우리의 무지가 어디까지인지를 날카롭게 인식하는 데서 온다. 과학의 대답들이 확정적이어서 믿을 만한 게 아니다. 지식의 기나긴 역사 가운데 한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합리적인 대답이므로 믿을 만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과학의 결과는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하상 개선될 수 있는 상태에 있다. 과학의 합리성이 확실성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즉, 자신감을 진실성이라고 착각하는 세상에서, 확신하지 않는 것은 나약한 태도가 아니라 진정으로 강인한 태도일 수 있다. 확신하지 않기에 기존 체계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치열하게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보가 도출되는 과정이 얼마나 과학적으로 타당한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은 정확한 답을 요구하지만, 과학은 그릇된 과정으로 얻은 정확한 답을 신뢰하지 않는다. 과학에서는 과정이 결과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합리성이 우리가 예보할 수 있고 개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 250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