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습니까? 믿습니다! - 별자리부터 가짜 뉴스까지 인류와 함께해온 미신의 역사
오후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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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친! 이거 내 이야기 아닌가?” 책이 띠지를 보는 순간, 들었던 생각이다. 마치 오후라는 작가와 동아시아 출판사의 편집팀이란 자객집단이 던진 비수를 맞은 느낌이랄까. 스스로는 반지성의 근처 혹은 미신의 유혹에 절대 안빠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역시나 내 착각이었다.

나는 혈액형 감별이나 별자리 같은 것은 애초부터 믿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 시절 시간을 들여 했던 MBTI검사에서 아인슈타인이나 셜록홈즈와 비슷한 INTP, INTJ가 나온것에 대해 은근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그런데 이 또한 유사과학과 비슷한 것이라니! 책의 띠지 따위에게서 스스로의 얄팍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은, 처음이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무엇을?

 

큰 기대 없이 봤다. 가벼운 마음 그 자체다. 뭔가 깊은 통찰 혹은 지혜를 구할 수 있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인 <지대넓얕>처럼 유려하고 흥미로운 지식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책이라 생각했고, 그 예감은 맞았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 ‘불완전하다라는 현학적 단어를 사용한 문장 보다는 인간은 호구다!”라는 말이 더 나을지 모르겠다. 작가 오후는 이 책에서 인간들이 이제까지 믿어온 다양한 미신의 사례를 통해서, 과거든 그리고 현재든 일간들이 미신에 관해 얼마나 호구 모습을 보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뭔가 자신의 이해와 부딪히는 것이 있으면 인간들은 당당히 부딪히고 성실히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쓰러트리기보다, 그 상황에 맞는 적당한 이해(이 책에서는 미신)를 끌어와서 우회하는 방법을 택했다. 서양에서는 별자리가 그리고 동양에서는 주역과 같은 게, 그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여준다. 사회에서 혹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불가사의한 일들을 자신들이 받아들이기 위한 나름의 사고 방법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는 단순히 인간이 호구이기 때문이이라 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지 모르겠다. 단순히 멍청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 책에 등장한 태평양의 외딴 섬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이야기는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에서 사람이 내리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서 먹을 것도 받은 원주민들은 어느 미국인을 아직까지 신처럼 모시고 있다고 한다. 문명적으로 한계에 부닥친 사람들로서는 어떻게든 해당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끌어다 쓴 것이 미신일 것이다. 몇 십년간 자신들에게 먹을거리를 준 미국인을 기다린 태평양 원주민들이나 2000년간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은, 어쩌면 이 같은 관점에서 봤을 때 대동소이한 존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미신을 믿는 문제를 단순히 사람이 갖고 있는 한계로 거칠게 단정짖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지 모르겠다. 문명의 바깥에 살고있는 원시인들과 문명의 핵심부에 살고 있는 미국인들을 같은 선상에서 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저자 오후는 너무나도 논쟁적일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우리나라의 미신 작가 오후는 이 책에서 미신도 다루지만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인간이 믿고 싶어 믿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에 관한 문제 대신에, 미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 이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큐아논 문제 혹은 오프라윈프리 쇼의 반지성적 문제 등. ‘호구의 나라인 미국을 통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인식의 한계로 인해 미신을 믿는 일도 있지만, 애초에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 책의 초반부에서는 인간이 미신을 믿는 이유에 대해서 인간 자체의 불완전한 점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세상을 볼 수 있는 사고의 틀은 제한돼 있고, 이를 가능케 하는 기술의 문제 또한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작가 오후가 지적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가 있고, 어느 정도 극복된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에서 과거의 기조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힐러리가 아동성매매를 하고 있다는 둥과 같은 헛소리로 보일 간주될 수 있을만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고 또 이로 인해 사회문제가 벌어지는 것들을 오후는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점! 그리고 아쉬운 점!

 

재미있게 읽었다. 책의 첫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저자가 미신과 관련된 여러 사례들을 나열하는 데에서 끝날 것이라 생각을 했다. 초반에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의 후반부로 가면서 내용은 단순히 유려하고 유희가 담긴 이야기집이 아니라, 날카롭게 우리 사회의 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사회과학 책으로 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가짜뉴스, 인지편향과 같은 이야기들은 이제 너무 들어서 지겨울 정도다. 이제는 특별한 것들이 아니면 그러한 책은 거의 보지 않는다. 내 안에 내제된 또하나의 반지성일수도 있겠으나, 이제는 그러한 류의 해석이 지겹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후의 <믿습니까? 믿습니다!>는 광활한 인류 역사의 사례들을 이용해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니, 같은 이야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볍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저자의 주장인 회의적사고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다룰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해당 문제를 다룬 책이 있기도 하다. <계몽주의2.0>처럼. 내가 기자 시험을 준비하면서 사람들의 글을 첨삭해줄 때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주장을 앞에서 했으면, 그 층위에 비례한 만큼의 대안이 뒤에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주장은 아니지만, 다양한 사례들을 많이 보여줌으로서 책 1권으로 균형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또한 그 대안 또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고를 주장하는 것이지, 구체적으로 이를 위한 대안은 없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이 책 한권만으로 끝내는 것보다 <계몽주의2.0>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은 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믿습니까? 믿습니다!>를 통해, 우리 사고의 불완전함에 대해 생각해보고, <계몽주의2.0>을 통해서 저자가 제시한 문제에 대해 좀 더 섬세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사람들이 가졌으면 좋겠다. 아 물론, <계몽주의2.0>은 흥미로운 책이긴 하지만, 오후의 <믿습니까? 믿습니다!>만큼 유쾌하지도 발랄하지도 않다는 점이 있다.

 

주목할만한 문장들

 

완성도 높은 미신은 나름의 체계가 있고, 새로운 상황에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다. 과학적 진실, 혹은 틀린 예언이 사람들을 미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 같지만, 체계 속으로 들어가면 허점과 오류는 쉽게 극복된다. 오히려 그런 오류가 자신들의 체계를 더 확고하게 만든다. 체계가 부족하고, 일부에만 작동하는 미신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쉽게 사라지지만, 체계가 완성된 미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미신이나 종교뿐 아니라 사상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사상에 따라 모든 사회 현상을 해석한다.

미신이 무서운 이유는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다. 완벽하기 때문이다. 미신과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이 모두 바보는 아니다. 그들 중 일부는 우리보다 훨씬 똑똑하다. 그들은 단지 미신이 쌓아 올린 체계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똑똑한 두뇌는 새로운 상황에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화의 속성의 제왕절개, 현대사회를 엮는 그 통찰을 보라. - 155pp

 

곰곰이 생각해보라. 사실 유대교가 뛰어난 종교라서 유대인이 기독교인들을 체치고 부를 쌓은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여러 사례를 통해 설명했지만, 보수적이고 꽉 막힌 것으로 따지자면 유대교가 기독교보다 더하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꽉 막힌 유대인들이 상업에서 더 뛰어난 기지를 발휘했을까? 간단하다. 그들의 종교는 주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에나 금기나 율법 같은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의 법만 따르면 된다. 하지만 유대인은 유대교의 법 위에 기독교의 법이 또 있었다. 이것이 이중 족쇄가 되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여러 법이 충돌했기에 그들은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종교법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법이나 종교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성공한 유대인들은 종교를 초탈했다. 유대인의 성공은 한 사회를 지배한 종교적 도그마가 얼마나 멍청할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유대인을 특별하게 만든 건 하나의 종교에만 귀속된 멍청한 사회가 보인 혐오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령 성 소수자 차별이 없는 도시일수록 창의석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는 단순히 성 소수자가 창의성이 높다는 뜻이 아니다. 소수자에게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는 어떤 다양한 의견도 수렴 가능하기에 그것이 창의성을 높이고 도시 발전도 이끄는 것이다. - 226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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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문법 -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소준철 지음 / 푸른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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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든 책을 읽는 이유는 나름의 욕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 <가난의 문법>은 특정한 욕구가 생기는 책일까?

주변의 사회과학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보면, 그들의 욕구란 권력을 지향하는 곳과 긴밀하게 연결 돼 있따. 국회든 정당이든 정부부처든 말이다. 사회과학은 그것 자체로 사회를 좋게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나라가 외교를 잘한다고 해서 혹은 민주화를 자 했다고 해서, 그 수혜가 모든 시민, 특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몇 개월 전의 기사 하나를 봤다. 연합뉴스의 기사였고 추가적으로 더 조사해 봤다. 이야기는 이렇다. 시각장애인인 우리나라 소녀가 프린스턴과 스탬포드 대학에 동시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아마 그 기사를 쓴 사람도 그리고 기사를 읽은 사람도 대단하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시각장애를 가진 아이가, 그 수많은 고비를 넘고 넘어서 미국 명문대에 합격했는지 말이다. 하지만 소녀의 집안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특권층이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조부인지였는지 혹은 외조부 였는지. 그녀의 할아버지 되는 사람은 서울 유수 대학의 총장을 했던 사람이었다. 엄마 아빠는? 이것 또한 명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엄마가 외교부 직원으로 미국에서 일하는 사람이었고, 아버지가 검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사람이 딛고 있는 사회경제적 이점은, 그가 어떤 핸디캡을 갖고 태어나든지간에, 이를 초월할 수 있음을 해당 사건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핸디캡을 갖고 태어나지는 않지만, 학문을 통해 사회과학을 통해서 사회를 더 낫게 만들기보다, 해당 분야에서 자신의 지분을 넓히려고 말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사회과학이란 더 이상 사회를 낫게 만드는 학문이 아니다. 막스 베버가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밝힘으로서, 시민들을 계몽시키려 했던 기능이,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서 시민들에게 부가 어떻게 작동하고자 가르치려 했던 것이, 맑스가 혁명적이었던 사상이, 이 외에도 사회과학을 권위있게 만들었던 모든 사상들이, 한 사람의 권력으로 치환될 뿐이다. 수많은 사회과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좋게 만들겠다는 외피를 두른 채,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는데 그 권위를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예외가 하나 있다. 돈도 되지 않는 사회과학 연구. 그리고 누구의 욕구도 향하지 않는 연구. 그것은 빈곤과 관련된 것이다. 모두가 저 하늘의 별을 보려고 하지, 땅을 기어다니며 간신히 살아다니는 사람들을 보지 않는다. 이것은 못보는 게 아니라, 봤으면서도 무시하고 보지 않은 척 하는 것이다. 며칠전 한 지인이 기사를 쓴 게, 전 국민에게 화자가 됐다. 엄마는 고독사 했는데, 아들은 노숙자였다는 것. 게다가 노숙자 였던 아들은 박스에 글씨를 써서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렸는데 그럼에도 5개월 동안 엄마는 방치돼 백골이 드러났다고 한다.

! 어쩌란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홍세화 선생은 최근 칼럼을 통해서 사회 경제적 양극화의 지독한 문제를 코로나가 덮었다고 이야기 했다. 나는 결코 틀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을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이 지독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시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코로나 사태를 맞고, 이것을 초기에 잘 처리하는 가 싶어, 중산층 시민들의 표를 받아 의회에서 다수의 의석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다수 의석이 됐다고 하여, 앞에서 이야기한 고독사한 어머니와 노숙자 아들이 구제를 받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깜깜하다. 시민들은 가난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모래와도 같이 합쳐지지도 않고 땅바닥에 어디에 있는지도 보이지 않을 사람들을 그들이 과연 주시하겠는가. 아니다.

이 책 <가난의 문법>은 모래와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밟히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주인공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빈곤한 세계에서도 그나마 생계 활동을 할 수 있는 나름의 상류층이라는 생각이 요즘 든다. 이것은 절대 그들의 처지를 비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이 너무 각박해졌고, 도저히 공공의 도움과 이웃의 도움마저 받기 어려워진 시절이라 그럴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고, 또 이 책을 읽는 동안 들려왔던 뉴스 때문에 다시 가슴은 답답해졌다.

하지만 TV뉴스에서 가난에 대한 문제는 언제나 마지막 꼭지에 나올까 말까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추미애와 윤석열의 싸움에 대한 분석이다. 정치권에서는 아무리대 가난에 대해 다루는 것을 포기했나보다. 그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말이다. 나는 이 책을 구매한 사람들에게 한 줌의 희망을 갖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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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연습
수잔 최 지음, 공경희 옮김 / 왼쪽주머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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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책이다. 가장 사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공적인 것까지. 예전에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였던가, 어떤 페미니스트 작가가 한 말이라고 알고 있다. 솔직히 작가들이 하는 말들은, 뭔가 압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대개는 그 압축적 의미가 대중들에게는 적절한 양을 통해서 전달되기 힘들다. TV프로그램에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그 압축적인 맥락들이 잘 풀어서 전달되지, 단순히 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는 적지 않은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신뢰 수업>은 바로 버지니아 울프가 이야기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란 말과 직결되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사랑과 권력

 

이들은 사랑을 하는 겁니다.” 사랑에 과연 한계가 있을까? 이제 사람들은 권력을 사랑하기까지 한다. 그렇다! 바로 문빠들의 이야기다. 아에서 이야기한 이들은 사랑을 하는 겁니다는 진중권 선생이 어느 프로그램에 한 말중 하나다. 사랑을 하는데 있어서, 이유가 필요한가? 그리고 그 사랑하는 자가 적대하는 자를 자신 또한 적대할 수 있는 것 아닌다. 어떻게보면 논리적으로 전혀 올바르지 않은 현상들, 특히나 권력과 관련된 현상들이 사랑과 관련이 있을 때에는 현재 우리 정치판에서 볼 수 있는 이 같은 것들이 나타나기 일수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사랑과 권력과의 관계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권력은 단순히 그 이름처럼 빛나는 제도권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우리 일상에 있는 권력은 훨씬 사람들을 더 잘 억압하고, 이에 대한 남용 또한 적지 않다. 그리고 이 책 <신뢰 연습>은 일상의 권력과 관련된 것이다. 일상의 권력이란 말, 혹은 일상에서의 정치란 말이 일반 사람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에게 까지도 한 없이 어색하게 들렸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 같은 말을 되새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사랑을 하는 데 있어서 나의 희생이 필요한 부분은 어디까지인지, 합의의 영역은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한 사람이 권력을 남용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또한 그의 권력 남용을 어떻게 방지하고, 다시는 권력을 그렇게 사용하지 못하도록 굴복시킬 것인지 등. 이 책은 고고하면서도 유유희 사람과 사람간의 정치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 태연하게 이를 일상적 이야기를 통해저 전하고 있다.

솔직히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소설 치고 <신뢰 연습>이란 제목은 너무 딱딱하다. 하지만, 그런 딱딱한 제목 안에있는 내용들은, 뭐랄까. 한없이 날카로우면서도, 신뢰 연습이 제목이 될 수밖에 없는 개연성을 내용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이 내 올해의 소설이 아닐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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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vs 과학 - 과학은 합의가 아니라 대립을 통해 성장한다
박재용 지음 / 개마고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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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2를 배울 때가 기억이 났다. 그때의 답답함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화학2를 가리치던 선생님은 친절한 분이셨다. 세상에 그렇게 친절하고 찬찬히 가르쳐주시는 분이 어디있을까라고 생각을 했다. 솔직히 약간 어리버리하기도 했고, 서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어쩌면 계약직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 화학2선생님은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화학2지식과 관련해 말이다.

화학2에 들어가자마자, 이전까지 이해와 배치된 과학을 배우면서, 나는 마치 자아를 분리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종종 들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라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도저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어, 자아를 하나 만들고, 그 친구에게 맡겨야 할 정도로 혼란이 들었다. ? 양자역학의 세상은 우리가 보통 배우는 뉴턴역학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니까 말이다. 어떻게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게, 확률에 의거해 존재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생각을 하고, 눈앞에는 이렇게 글들이 하나하나 늘어가는 게 보이는데, 이것들이 어떻게 불완전한 확률에 의해서 만들어진단 말인가. 그런데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그 불완전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폐기했다면, 지금 컴퓨터로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일 또한 없었다는 것이다.

과학 대 과학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예전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을 때, 너무나도 과학철학과 관련된 이야기만 토마스 쿤이 이야기했기에, 뭔가 손에 잡히는, 혹은 인식을 확 자극하는 이야기는 받지 못했던 것 같다. ,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까만 것은 글이었고, 하얀 것은 종이였다. 아니! 어쩌면 나는 반대로 봤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정신없이 글을 읽는것에만 집중했느니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내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으면서 그 핵심 내용만 알았을 뿐, 그 내용의 기반이 되는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이었다. 과학은 혁명적으로 변한다는, 이 책 <과학 대 과학>과 같은 것이지만, 그 풍부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나는 왜 그 책을 봤단 말인가! 그냥 서평을 보거나 간추린 글을 보고 말지.

이 책 <과학 vs 과학>을 읽어보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과학형명의 구조>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과학사의 극변적인 변화의 흐름을 느끼고 싶었고, 이 책은 8가지 사건을 통해서 재미있게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 내게 있어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2장 빛의 정체를 밝혀라에서는 내 평생의 고민의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단순히 모른다, 혹은 이해했다의 차원이 아니라, 적어도 그 기반이 되는 배경, 그리고 갈등의 강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본질적인 문제는 솔직히 아직도 미궁속에 있지만,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느꼈던 자아분열적 사실에 대해, 해당 문제를 현재소서 겪은 사람들간의 갈등의 강도와 그 입체성을 이해할 수 있었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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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퍼트리샤 포즈너 지음, 김지연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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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이제는 쉽게 욕할 수 없게 될 것 같다. 악을 벌해야 하는 말도, 악을 골라내야 한다는 말도 악을 정말 나쁜 건지도. 만약 악()이란 말을 선()으로 바꿔보자. 선을 벌해야 하는가. 선을 골라내야 하는가. 선은 정말 나쁜 것인가. 왠지 의미적으로 완전한 문장조차 안되는 것 같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악과 선이라는 주어 하나가 바뀐 것으로, 가치관에 그리고 세계관에 혼란이 올 지경이다.

우리는 안다. 이미 들어서.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글너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막연한 믿음 때문에 위험에 처한다. 선과 악의 문제에서도 같다. 우리는 선의 뒷면에는 우리가 모를 수 있는 악이 존재할 수 있고, 악의 뒷면에는 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표면적인 선의 뒷변에는 언제나 선이 있을 것이라 믿고, 악의 뒤에는 악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런 선에 의해 혹은 악에 의해 파국을 맞아도 말이다. 수많은 콘텐츠와, 우리의 뇌를 깨우는 마크 트웨인의 어록이 있어도, 선과 악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관성적인 관념은 여간해서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 선과 악의 문제를 이 책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를 읽으며 다시 한 번 되뇌었다.

이 책 <나느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는 평범한 약사 빅토르 카페시우스에 관한 이야기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아닌, 가해자 쪽에 가까운 사람이 카페시우스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헷갈렸다. 어떤 점에서는 가해자가 자신은 피해자라고 하는데, 특별히 전제를 바꾸지 않고서는, 그의 악행이란 것을 쉽게 단정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어떠면 순수한 악이라는 것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카페시우스의 행적을 보면 그렇다. 현재 우리사회에서는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그가 무조건적으로 처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조건이 붙는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살해를 했다면, 만약 살해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것만으로 그 사람을 선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카페시우스의 이야기는 선과 악의 중간에 있는 회색지대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단순히 이 회색지대는 2차원이지 않다. 거의 3차원 방정식에 가깝다. 그리고 선과 악이란 두 축 사이에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축은 인간은 불완전 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불완전한 척도. 그가 사회적으로 처해있는 상황 등. 인간은 단순한 악도 그리고 단순한 선도 아니다. 나는 어떻게 보면 기후 악당이다. 이 컴퓨터를 구매한 사람이고, 너무나도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사람이며, 이에 저항 또한 하지 않는다. 미래 세대의 입장에서 나는 온전히 악이다. 하지만 현 세대의 사람들에게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크게 악도 그렇다고 선도 아닌.

이 책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유는, 적어도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우리들에게,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악을 찾고 있다. 그 악을 쓸어트리면 선한 세상이 찾아올거라고 전제하며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광화문의 촛불로 박근혜를 쓰러트렸지만, 선한 지도자가 만든 유토피아는 왔는가. 반대로 선해 보이는 악한 자는 완전히 사라졌는가. 책을 다 읽었지만 그 혼란은 수그러들지를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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