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문법 -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소준철 지음 / 푸른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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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든 책을 읽는 이유는 나름의 욕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 <가난의 문법>은 특정한 욕구가 생기는 책일까?

주변의 사회과학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보면, 그들의 욕구란 권력을 지향하는 곳과 긴밀하게 연결 돼 있따. 국회든 정당이든 정부부처든 말이다. 사회과학은 그것 자체로 사회를 좋게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나라가 외교를 잘한다고 해서 혹은 민주화를 자 했다고 해서, 그 수혜가 모든 시민, 특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몇 개월 전의 기사 하나를 봤다. 연합뉴스의 기사였고 추가적으로 더 조사해 봤다. 이야기는 이렇다. 시각장애인인 우리나라 소녀가 프린스턴과 스탬포드 대학에 동시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아마 그 기사를 쓴 사람도 그리고 기사를 읽은 사람도 대단하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시각장애를 가진 아이가, 그 수많은 고비를 넘고 넘어서 미국 명문대에 합격했는지 말이다. 하지만 소녀의 집안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특권층이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조부인지였는지 혹은 외조부 였는지. 그녀의 할아버지 되는 사람은 서울 유수 대학의 총장을 했던 사람이었다. 엄마 아빠는? 이것 또한 명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엄마가 외교부 직원으로 미국에서 일하는 사람이었고, 아버지가 검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사람이 딛고 있는 사회경제적 이점은, 그가 어떤 핸디캡을 갖고 태어나든지간에, 이를 초월할 수 있음을 해당 사건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핸디캡을 갖고 태어나지는 않지만, 학문을 통해 사회과학을 통해서 사회를 더 낫게 만들기보다, 해당 분야에서 자신의 지분을 넓히려고 말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사회과학이란 더 이상 사회를 낫게 만드는 학문이 아니다. 막스 베버가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밝힘으로서, 시민들을 계몽시키려 했던 기능이,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서 시민들에게 부가 어떻게 작동하고자 가르치려 했던 것이, 맑스가 혁명적이었던 사상이, 이 외에도 사회과학을 권위있게 만들었던 모든 사상들이, 한 사람의 권력으로 치환될 뿐이다. 수많은 사회과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좋게 만들겠다는 외피를 두른 채,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는데 그 권위를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예외가 하나 있다. 돈도 되지 않는 사회과학 연구. 그리고 누구의 욕구도 향하지 않는 연구. 그것은 빈곤과 관련된 것이다. 모두가 저 하늘의 별을 보려고 하지, 땅을 기어다니며 간신히 살아다니는 사람들을 보지 않는다. 이것은 못보는 게 아니라, 봤으면서도 무시하고 보지 않은 척 하는 것이다. 며칠전 한 지인이 기사를 쓴 게, 전 국민에게 화자가 됐다. 엄마는 고독사 했는데, 아들은 노숙자였다는 것. 게다가 노숙자 였던 아들은 박스에 글씨를 써서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렸는데 그럼에도 5개월 동안 엄마는 방치돼 백골이 드러났다고 한다.

! 어쩌란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홍세화 선생은 최근 칼럼을 통해서 사회 경제적 양극화의 지독한 문제를 코로나가 덮었다고 이야기 했다. 나는 결코 틀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을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이 지독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시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코로나 사태를 맞고, 이것을 초기에 잘 처리하는 가 싶어, 중산층 시민들의 표를 받아 의회에서 다수의 의석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다수 의석이 됐다고 하여, 앞에서 이야기한 고독사한 어머니와 노숙자 아들이 구제를 받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깜깜하다. 시민들은 가난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모래와도 같이 합쳐지지도 않고 땅바닥에 어디에 있는지도 보이지 않을 사람들을 그들이 과연 주시하겠는가. 아니다.

이 책 <가난의 문법>은 모래와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밟히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주인공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빈곤한 세계에서도 그나마 생계 활동을 할 수 있는 나름의 상류층이라는 생각이 요즘 든다. 이것은 절대 그들의 처지를 비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이 너무 각박해졌고, 도저히 공공의 도움과 이웃의 도움마저 받기 어려워진 시절이라 그럴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고, 또 이 책을 읽는 동안 들려왔던 뉴스 때문에 다시 가슴은 답답해졌다.

하지만 TV뉴스에서 가난에 대한 문제는 언제나 마지막 꼭지에 나올까 말까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추미애와 윤석열의 싸움에 대한 분석이다. 정치권에서는 아무리대 가난에 대해 다루는 것을 포기했나보다. 그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말이다. 나는 이 책을 구매한 사람들에게 한 줌의 희망을 갖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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