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차별은 피부 색깔이나 머리 색깔의 차이로 생기는 것만이아니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김치 냄새나 마늘 냄새도, 독일말이 서투른 것도 다 인종 차별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런것에서 비롯되는 차별은 그나마 괜찮았다.
"당신들도 예수를 믿을 줄 아느냐?"
교회에 나갔다가 들은 말이었고,
"아, 당신들도 베토벤, 모차르트를 이해할 수 있는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명곡을 감상하다가 이런 말을 들어야했다. - P9

"주선녀 씨,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요. 나도 비슷한 과거가 있어서하는 말인데, 인생의 목표를 새롭게 바꿔봐요. 난 그 상처에서 벗어나려고 독일에 왔고, 여기 와선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자기는자기자신이 구할 수밖에 없어요. 자기 주인은 자기자신이니까요." - P20

전태일은 그 사람의 양복과 자신의 작업복을 비교하며 쓰게 웃었다. 신발을 벗어야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방송국 건물도 자신들이 일하는 공장과는 너무나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양복쟁이들만 모여서 일하는 방송국, 그곳은 천국이었다.
천국에 사는 사람이 지옥의 형편을 알 리 없고, 지옥에 관심이 있을 리도 없었다. 전태일은 마음을 닫으며 길을 건넜다.
이 수많은 사람들은 왜 이리들 바쁜가. 이들은 무엇을 위해 사는것일까....? 사람들이 이렇게 불어나고 있는 서울은 과연 사람이살 만한 곳인가....? 천당과 지옥이 서로 등을 맞대고 동거하는곳, 서울은 끔찍스러운 곳이었다. - P33

"여기 생활실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닙니다. 폭동을 보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과 진상, 이곳의 생활실태와 문제점 같은 것들을 심층적으로 파헤쳐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건경제개발로 꿈꾼 천국이 만들어낸 지옥이고, 최소한 10만 명의 생존권이 달려 있는 문제니까요."

그러면 그들이 부정축재한 것은 얼마이며, 그 돈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러나박정희가 다시 대통령이 되면서 그 사실은 밝혀지지 않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소문으로 떠도는 엄청난 부정축재는 기업들로부터뜯어낸 돈인 것은 너무나 뻔했다. 그럼 기업들은 권력의 힘이 무서워 그저 돈을 갖다 바치고 빈손이었을 것인가. 기업들이 받고 있는특혜설 또한 분분한 소문이 된 지 오래였다. 권력과 기업들의 밀거래그 정경유착은 경제개발이라는 단물을 빨아먹으며 부정하게자라나고 있는 속성수 거목이었다. 그 그늘이 만든 음지가 바로 이성남 같은 곳이 아닐 것인가……………. - P266

문제는 잘못된 ‘공업입국의 경제정책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국제경쟁력을 높여 수출을 계속 신장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저임금 정책을 확정했고, 저임금을 유지시키려면 물가를 안정시켜야 하고, 물가가 안정되려면 노동자들의 주식인 곡물가격을 통제해야 하고, 곡물가격이 억제되면 농민들이 몰락해 이농을 하게 되고, 이농한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고,
그러면 도시 노동력은 과잉이 되어 임금이 싸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이중효과를 나타냈다. 그런 이농현상으로 해마다 50만 명 이상이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도시빈민 문제를 야기시켰다. - P278

・・・・・・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은 자기의 인생 목표를 자기스스로 정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꾸준히 노력한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에게 자기 인생의 주인은 자기자신이다. 그러므로 노력하는 고통도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성취의 행복과 기쁨도 오로지그 사람의 것이다. 여자라고 주저하거나 못할 것이 없다. 난 의사가된 작정이다.……. - P325

"어허, 말 중간에서 자르지 말고 잘 들어 오 상병은 마침 우리회사하고 거래 관계가 있어서 더러 얼굴을 대하니까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오상병 말이 말야, 박 병장이 박사 따가지고 귀국해 어느 대학에 교수가 된 건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용산에 갔다 보니까 박 병장이 미8군에서 나오더라는 거야. 잘못봤나 싶어 다시봐도 틀림없이 박 병장이었다는 거야. 그거 이상하지 않아?"
"글쎄......?"
"글쎄가 아니잖아. 교수라도 민간인일 뿐인데 어떻게 미8군에 드나드느냐 그거야. 오 상병도 그랬지만, 나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그거 수상하다니까. 최형 생각은 어때? 뭔가 수상하잖아?"
"수상하잖아......?"
"뭔가 짚이는 게 없어? 수상하잖아?"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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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분명 작가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살아가는 것은 등장인물이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한반도의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을 응원합니다!][<에덴>의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을 응원합니다!][<명계>의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을 지지합니다!][이름 모를 행성의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을 응원합니다!][수많은 성좌가 코인을 후원합니다!][절대다수의 성좌가 ‘구원의 마왕‘의 마지막 싸움을 지켜봅니다!]그 이야기를 지켜보는 이들이다.
[다수의 성좌가 ‘구원의 마왕‘이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 P23

인간은 한평생을 바쳐도 하나의 존재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수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현성이, 정희원이, 이지혜가. 다시 신유승과 이길영이 마지막으로 전함 위의 동료들이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들 중 김독자가 아닌 이는 없다. 이곳의 모두는 적어도 한 움큼씩은 김독자의 생에 대한 지분이 있다. - P68

「버려진 모든 세계선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녀가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 없던 세계. 오직, 독자의 눈으로만 상상할 수 있기에 [예상표절]로도 읽지 못했던 세계.
「이것이 김독자가 꿈꾸던 세계였다.」 - P97

처음부터 김독자는 희생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아마 김독자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이 세계의 결말에서, 모두 행복해질 방법을.
그가 혼자 희생할 때 일행들이 겪을 상처를 알았을 것이고,
모두 함께 싸우는 대가로 그들이 겪을 파멸을 읽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김독자는 이 시나리오를 택했다.
시나리오를 바꾸는 시나리오. 정해진 결말을 따르지 않는시나리오 모두 함께 종막에 도달할 수 있는 시나리오. - P111

동쪽에서 떠오르는 ‘살아 있는 불꽃.
서쪽 세계의 재앙 가라앉은 섬의 주인‘.
북쪽 우주의 지배자 위대한 심연의 군주‘.
남쪽 성간을 다스리는 ‘은빛 심장의 왕‘
그리고 무엇도 아닌 곳에서 기어오는 ‘위대한 모략. - P120

[바람, 모든 도깨비에겐 ‘단 하나의 설화‘를 선택할 순간이온다고 하셨지요.]
[아마도 나는 저 이야기를 사랑하게 된 모양입니다.]
그는 정확히 지상을 향해 낙하하는 망상의 파편을 가로막고 섰다.
지금껏 그가 기록해온 설화들이 울고 있었다.
이야기꾼을 지켜보는 성좌들이 그의 행동에 개연성을 실어주고 있었다.
후폭풍이 자신의 몸을 찢어발기는 고통 속에서 비형은 생각했다.
아마 그가 읽어온 설화의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을 달갑게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모두를 살리고 싶어하니까.
그럼에도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은 있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이야기는 없다.」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개연성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벽‘에도달할 ‘단 하나의 설화‘가 되기 위해. 이것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었다.
「도깨비 비형은 자신의 마침표를 정했다.」 - P144

「모두 알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을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을.」
「"작가라고 항상 이야기하는 게 즐거운 줄 아냐?"」
「그렇기에 이 선택은 ‘독자‘인 그만이 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원하는 결말을 보고야 말겠다는 탐욕과 아집으로 가득찬 그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 P206

[개천이 시작됩니다!]
[오래된 성운의 늙은 별들이 아득한 잠에서 깨어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방주에 현현합니다!][성좌, ‘흥무대왕‘이 방주에 현현합니다!][성좌, ‘매금지존‘이 방주에 현현합니다!]
[성좌, ‘천제의 풍신‘이 방주에 현현합니다!]
이 방주에서 유일하게 우리 편이 되어줄 별들.
[성좌, ‘고려제일검‘이 방주에 현현합니다!] - P217

「너를 구성하는 설화들은, 네가 보고 겪고 느낌으로써 존재한다.」
「그 녀석에게 네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라」
「김독자는 침착하게 숨을 가다듬었다.」
「네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존재조차 하지 못할 녀석들이다.」
「설화에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자‘가 되어야 한다.」
「설화를 사랑하되, 취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자.」
「그때야 설화는 비로소 실체 없는 공허에 맞설 수단이 되어줄 것이다.」
「"저는 독자입니다."」
「사람들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오해를 받기 일쑤였다.」
「어린 시절, 김독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뭐야, 나라면 이렇게 안 했을 텐데.」
「바보, 씨커맨더는 이렇게 공략했어야지. 이때 필요한 아이템은-」「극장 던전은 연구소에서 앰플을 얻는게 공략의 핵심이고.」「여기서 반드시 간평의를 얻어야 돼. 사인참사검보다 더 중요해.」
「성들을 모두 죽이는 수밖에 없어. 여기서는 그래야 해」
「회귀하지 않고도 강해지려면」
「역시 최선의 루트는 이거지. 첫 번째 거대 설화‘는 마계에서 얻어야해」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는」

이윽고 문장이 끊겼다.
문장이 끊어진 곳에 작고 하얀 문이 있었다.

「그가 읽지 못한 모든 이야기의 ‘에필로그가 그 너머에 있었다.」

「고작 이 문의 손잡이를 돌리기 위해」

유중으로부터 시작된 그 모든 이야기가 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품어왔으나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던 의문이 떠올랐다.

「tls123은 멸살법의 에필로그를 어떻게 그리고 싶었을까.」

문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으며, 나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득한 설화들로 이루어진 길. 멀리서 바라보자 그 길의 중경은 기이하게 낯설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 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 P300

[유중혁. 지키고 싶던 것은 모두 지켰나?]
[거대 설화, ‘멸망을 기억하는 자들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서서히 잦아드는 스파크 속에서 어렴풋한 인형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유중혁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 네 인물이 서 있었다.
키가 큰 사내, 백발의 청년, 포니테일의 여성, 그리고-
[그는 단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다.]
눈부신 날개의 대천사.
도깨비 왕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멸망한 999회차의 설화가 대천사의 검극에서 겁화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직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믿으니까.] - P349

‘최후의 벽‘에 어떤 문장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그린 존이 벽면에 붙어 있다니...…생각해보면 그것을 ‘방‘의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은 애초에 인간들뿐이었다.」문득 나는 내가 딛고 있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 또한, 다른 방향에서는 또 하나의 벽이다.
달려온 벽 위에 우리의 족적이 남아 있었다. 족적 위로 우리가 쌓아온 설화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 P369

「만약 멸살법이 현실이라면 어떨까.」그것이 나의 생각인지, 아니면 ‘최후의 벽‘에 기록된 것인지, 혹은 그것도 아니라「내가 멸살법의 인물들과 함께 싸울 수 있는 세계가 있다면.」
「그러고 보니 유중혁이 회귀한 후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작가님한테 댓글로 물어봐야겠다.」
[당신은 ‘등장인물‘이 됐습니다.]
어쩌면 나는 알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힌트가 있었다.
「그 세계에서 나는 너무나 운이 좋았고.」
「그 세계의 모든 것이 내게 편의적이었으며」
「때로는 허술하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것이 ‘가장 오래된 꿈의 가호 때문이었다면.
「모든 세계선의 태초, 원형의 세계선.」
오직 나만이,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 P429

아이는 얼굴을 파묻은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유중혁이다. 나는 유중혁이다. 나는....."
[너는 유중혁이 아니다.]
억겁의 회귀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잊었던 희귀자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유중혁이다." - P442

「별거 아닌 비극이었다. 고작해야 단 한 번의 생에서 일어난 비극」
[가엾은 아이.]
【나의 신이여, 너를 만나기 위해 아주 오랜 세월을 견뎌왔건만.]
999회차의 우리엘이 어린 나의 뺨에 손을 가져다댔다.
【너는, 이 우주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구나.】
[그래서 우리를 필요로 했던 건가? 너무나 가혹한 구조 요청이군.][자신의 상상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것인가.]
999회차 인물들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999회차의 이지혜였다.
[나는 상관없어. 하지만 괜찮겠어? 당신은 이걸 위해여기까지 왔잖아.]누구를 향한 말인지는 명백했다.
‘은밀한 모략가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힘든 시간이었다."
"왜 나였을까 생각했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999회차의 우리엘과 이현성이 무릎을 꿇어 아이의 몸을안아 들었다. 이지혜와 김남운이 아이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선언하듯 말했다."
"그만 눈을 떠라. 김독자
"정말, 정말로......."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눈앞에 있었다.
"그래. 꿈이 아니다." - P450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나는 연이어 떠오르는 그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정의로운 군인.」
「가장 숭고한 대천사」
「불의를 참지 않는 장군.」
「세상을 향한 증오로 가득 찬 악귀.」「<스타 스트림>이라는 시스템과 대적해온 회귀자.」 - P454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은 ‘가장 오래된 꿈‘이 됐습니다.]
스러지는 먼 불빛이 나를 기억하는 성좌들처럼 보였다.
그렇게, 나의 끝나지 않는 항해가 시작되었다.
[당신의■■은 ‘영원‘입니다.] - 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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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를, 2회차를, 3회차를…………… 999회차를 거듭하면서 그때의 ‘김남운‘과 다른 선택을 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실리‘를 추구한 건 유중혁이 아니라 나였는지도 몰라."
내가 멸살법을 처음 읽던 그때부터 유중혁은 줄곧 ‘스물여덟 살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어른인 유중혁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은 선택의 누적이고, 그 무수한 선택이 쌓여 한 사람분의 설화가 된다는 것을.
태초부터 악으로 조형된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1회차와 2회차가 다르듯 998회차와 999회차가 다르다는것을.
그리고 그것이 그가 회귀를 반복하는 진짜 이유임을. - P334

"복 받았네. 저렇게 생각해주는 ‘동료‘도 있고."
‘동료‘라는 말에 김남운의 텅 빈 동공이 흔들렸다.
이쪽으로 오는 것은 이지혜뿐만이 아니었다.
등줄기가 후끈하다 싶더니, 내 뒷덜미를 위협하는 감각이있었다.
‘업화의 불꽃‘이었다.
[무슨 꿍꿍이지?]
조금 전까지 유중혁과 싸우던 999회차의 우리엘이 어느새등 뒤에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급하게 전장을 이탈한 까닭인지 그녀의 순백색 날개가 찢겨 있었다. 곳곳에 남은 깊은 상처들. 한눈에 보기에도 치명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원한과 증오, 숭패조차 도외시하고 김남운의 위기에 이곳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이계의 신격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거는 동료들.
그런 그들이기에, 유중혁이 없는 999회차의 끝을 볼 수 있었으리라. - P335

-감독자 이다음은 뭔데?
내 오른쪽에 붙어 선 한수영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몰라
-뭐?
-내가 생각한 건 여기까지야.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 한수영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 지금・・・・・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어.
무책임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안은 없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최선이었고, 올바른 결론으로 향한 최선의 길이었다.
나는 문득 1,863회차 한수영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만든 등장인물들을 믿었어. 그게 다야."」그녀의 심정을 나 또한 이해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읽었고, 나를 가르쳤던 그 인물들을 믿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나는 멸살법을 믿는다. 그것을 쓴 작가가 아니라 그 소설에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믿는다. - P346

유중혁은 한참이나 그 설화들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들을 용서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생을 통해 복수할 생각도 없다. 이번 생은 나의 지난 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더 이상 너희가 알던 세계가 아닌 것처럼.
-살아남았다 하여 너희에게 모든 것이 허락된다는 뜻은아니다. 오히려 너희에겐 책임이 있다. 살아남은 죄, 다른 이의 이야기를 짓밟고 생존한 죄. 다른 이의 설화를 비료로, 감히 줄기를 피우고 싹을 틔운 죄. 그러니 살아남았다면 그 죄에책임을 져라.
-모두를 살리겠다는 약속 같은 건 할 수 없다. 나는 그저내 시나리오를 살아갈 뿐이고, 너희의 시나리오를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다.
저곳이 유중혁의 자리였다.
-너희 모두의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나 역시 죽거나 회귀하지 않겠다.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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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남는다고 해서 이들의 임무가 더 쉬운 것은 아니다.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이 있기에, 비로소 이야기가 존재하는것처럼. - P19

[성좌, ‘강철의 주인‘이 자신을 죽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성좌, ‘강철의 주인‘이 자신의 설화와 수식언은 이미 다른 존재에게계승했다고 외칩니다!]
점점 더 고리가 좁아지고 있었다. 우리엘이 움직였다.
그리고.
[성좌, ‘강철의 주인‘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말합니다.] - P77

「이야기의 끝에서 양철 군인은 자신의 마음이 아픔을 깨달았다.」「그리고 그 아픔이 곧 그의 심장이 되었다.」그 문장을 떠올리는 순간, 이현성은 떠올렸다.
내게도 분명 이런 전우들이 있었다.
「"이 모든 비극이 끝난 후 우리의 이야기가 더 이상 시나리오가 아니게 될 때, 현성 씨의 이야기를 꼭 듣고 싶군요."」첫 번째 전우는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를따랐다.
"그때까지 아무도 다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해요."」두 번째 전우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녀의 말이 옳다고 믿었다.
"아니, 한사람 죽더라도 모두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지. 물론 그 한사람‘은 김독자여야 돼. 어차피 그놈은 어떻게든 살아날 테니까."」
세 번째 전우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모두 그녀가 짠 작전이성공할 거라 생각했다.
「"아무도 죽는 사람은 없다. 여긴 내게 맡기고 가라."」
네 번째 전우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에게 등을 맡길 수 있었다.
"있잖아요, 현성 씨. 만약 내가 현성 씨를 잊게 되면."」그리고 다섯 번째 전우는…………….
「"날 죽여줘요."」 - P90

이제 거의 다 왔다.
나는 일행들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을 보며나는 무언가 말을 해보려 했다.
일행들은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대신해 정희원이 말했다.
"함께 이 세계의 결말을 보러 가요." - P130

보통 이계의 신격이 된 존재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다. 자신이 살아온 기억을 잃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의 이계의 신격 이야기고, 이 ‘왕‘들은다르다.
그들에게는 생전의 기억과 감정이 남아 있었다. - P186

「지혜야.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계의 신격‘이 되더라도, 그 원칙을잊지 마「세계가 너를 상처 입힐 때, 그 원칙만이 너를 지켜줄 거다」「네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너를 대신해 말해줄 거다.」 - P216

‘이계의 신격‘들은 모두 기억이 소실되었거나 불완전하다.」그런데 어떻게, ‘왕‘들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어쩌면 그 기억이, 그들에게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은 아닐까.」 - P249

「동쪽에서 떠오르는 ‘살아 있는 불꽃‘.」
「서쪽 세계의 재앙‘가라앉은 섬의 주인‘」「북쪽 우주의 지배자 위대한 심연의 군주‘.」「남쪽 성간을 다스리는 ‘은빛 심장의 왕‘.」「그리고 무엇도 아닌 곳에서 기어오는 ‘위대한 모략‘.」 - P274

[999회차의 ‘유중혁‘이 자신의 오랜 전우를 바라봅니다.]
「유중혁이 여럿이 된 것은 세계선의 장난 때문이었다.」
「회귀자는 사실 회귀하지 않는다. 회귀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제외한 모든 것이다.」
「애초에 그는 이어진 길을 줄곧 걸어온 ‘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아왔고.」
「누군가는 그의 뜻을 잇기 위해 살아왔다.
「누군가는 그와 다시 한번 싸우기 위해 살아왔고.」
「누군가는 그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을 되살리기 위해 살아왔다.」 - P278

한수영, 유상아, 정희원… 우리와 함께 이 세계를 살아온<김독자 컴퍼니> 사람들 석양의 어둠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하나의 거대한 별자리처럼 보였다.
그 모든 정경을 눈에 담은 채, 한 사람의 유중혁이 말했다.
"나는 돌아갈 수 없다. 내 마지막 회는 이곳이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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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일부 요괴가 당신을 따릅니다.]
"무의미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저들은 어차피 이 설화방이 끝나면 다시 <황제>로 회수된내가 데려가겠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저들에겐 이미 수천 번이나 일어난 일이다. 네 호의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도 압니다."
"다시 똑같은 시나리오에서 똑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저들은 너를 잊을 것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에게."
"슬픔이 없는 것입니까?" - P81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편하게날아서 또 누군가는 편한 길만을 골라서 가기도 하겠지.
하지만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달랐다.
(그들은 가장 어려운 방식으로 이곳까지 도착했다.)
그들은 날지도 못했고 편한 길을 골라 걷지도 못했다. 자기자신의 다리로 걷고 또 걸어야 했다.
불합리한 역경과 고난을 헤치며, 불행을 견뎌내고 비탄을삼켜내면서.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눈부신 ‘거대 설화‘의 가호를 받는 저들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었다. - P130

「전부다 잊게될 거야」
「김 독자 더이상 김독자 아니게 된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99.1%]
「감독자는 무서웠다」
「지금껏 쌓아온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는게.」
‘괜찮아. 네가 모두 기억하고 있잖아.‘
‘네가 나를 모두 기록하고 있으니까, 난 절대로 잊지 않아‘
「그 도서관은 지금도 김독자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김독자의 숨소리부터, 김독자의 생김새, 김독자의 웃음과, 김독자의 말투.」「김독자가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 종종 흥얼거리던 노래.
김독자가 슬플 때와 기쁠 때 짓는 표정. 자신이 없을 때 괜히 중얼거리는 말버릇과 뒤따라오는 자조아이들을 생각할 때 고개를 기울이는 버릇.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을 감을 때 생기는 떨림. 유상아와 이야기할 때 짓는 미소 한수영을놀릴 때 휘어지는 눈썹과 입가의 짓궂은 주름. 이현성을 생각할 때의죄책감. 그리고「자신이 사랑하는 이야기를 떠올릴 때의 눈빛까지.」그렇기에 나는 말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 돼‘ - P162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실은 알고 있다.
이 세계에서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행복은 아무런 관심을끌지 못한다는 것을.
그렇기에 평범한 행복은 멸망한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사치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그럼에도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성좌, ‘고려제일검‘이………….]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서, 설마? 말도 안 되는…………!]
[심사위원, ‘필마온‘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유기‘의 역사에서 한 번도 없던 일이 벌어졌다.)[심사위원, ‘미후왕‘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은퇴한 손오공이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고쳐먹었다.)[심사위원, ‘투전승불‘이 당신의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 P204

「이 ‘유중혁‘이 1,863회차에서 사라졌던 그 ‘유중혁‘이라고?」「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지?」「하지만 그 유중혁은 [등장인물]에서 벗어났는데?」「1,863회차의 유중혁이 등장인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3회차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녀석이 처음부터 3회차의 유중혁이었다니 대체・・・・・・・」 - P288

고개를 들자 내가 맞서 싸워야 할 세계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주 힘들고 험난한 싸움일 것이다.
어쩌면 이 우주의 누구도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멀리서 포털의 끝이 보였다.
[당신의 선택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신의 ■■ 「영원으로 기울어집니다.]
마침내 이 세계의 최종장을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 - P400

[너는 김독자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다.】
"닥쳐라. 네놈 따윈 언제든 죽일 수―"
사람들의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중혁을 찾는 소리,
김독자와 한수영, 그리고 <김독자 컴퍼니 > 일행들의 목소리.
【인정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세계선은지금껏 내가 살아온 그 어떤 회차와도 다르다. 어쩌면이 세계선에서 너희는 정말 ‘벽‘ 너머를 볼 수 있을지도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결말일 거라 기대하지는 마라. 그리고 그것이 네가 원하지 않는 결말이라 해도]
[이 세계가 실패한 회차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 P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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