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차를, 2회차를, 3회차를…………… 999회차를 거듭하면서 그때의 ‘김남운‘과 다른 선택을 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실리‘를 추구한 건 유중혁이 아니라 나였는지도 몰라."
내가 멸살법을 처음 읽던 그때부터 유중혁은 줄곧 ‘스물여덟 살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어른인 유중혁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은 선택의 누적이고, 그 무수한 선택이 쌓여 한 사람분의 설화가 된다는 것을.
태초부터 악으로 조형된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1회차와 2회차가 다르듯 998회차와 999회차가 다르다는것을.
그리고 그것이 그가 회귀를 반복하는 진짜 이유임을. - P334

"복 받았네. 저렇게 생각해주는 ‘동료‘도 있고."
‘동료‘라는 말에 김남운의 텅 빈 동공이 흔들렸다.
이쪽으로 오는 것은 이지혜뿐만이 아니었다.
등줄기가 후끈하다 싶더니, 내 뒷덜미를 위협하는 감각이있었다.
‘업화의 불꽃‘이었다.
[무슨 꿍꿍이지?]
조금 전까지 유중혁과 싸우던 999회차의 우리엘이 어느새등 뒤에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급하게 전장을 이탈한 까닭인지 그녀의 순백색 날개가 찢겨 있었다. 곳곳에 남은 깊은 상처들. 한눈에 보기에도 치명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원한과 증오, 숭패조차 도외시하고 김남운의 위기에 이곳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이계의 신격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거는 동료들.
그런 그들이기에, 유중혁이 없는 999회차의 끝을 볼 수 있었으리라. - P335

-감독자 이다음은 뭔데?
내 오른쪽에 붙어 선 한수영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몰라
-뭐?
-내가 생각한 건 여기까지야.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 한수영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 지금・・・・・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어.
무책임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안은 없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최선이었고, 올바른 결론으로 향한 최선의 길이었다.
나는 문득 1,863회차 한수영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만든 등장인물들을 믿었어. 그게 다야."」그녀의 심정을 나 또한 이해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읽었고, 나를 가르쳤던 그 인물들을 믿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나는 멸살법을 믿는다. 그것을 쓴 작가가 아니라 그 소설에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믿는다. - P346

유중혁은 한참이나 그 설화들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들을 용서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생을 통해 복수할 생각도 없다. 이번 생은 나의 지난 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더 이상 너희가 알던 세계가 아닌 것처럼.
-살아남았다 하여 너희에게 모든 것이 허락된다는 뜻은아니다. 오히려 너희에겐 책임이 있다. 살아남은 죄, 다른 이의 이야기를 짓밟고 생존한 죄. 다른 이의 설화를 비료로, 감히 줄기를 피우고 싹을 틔운 죄. 그러니 살아남았다면 그 죄에책임을 져라.
-모두를 살리겠다는 약속 같은 건 할 수 없다. 나는 그저내 시나리오를 살아갈 뿐이고, 너희의 시나리오를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다.
저곳이 유중혁의 자리였다.
-너희 모두의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나 역시 죽거나 회귀하지 않겠다.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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