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파가 흔들리니 만파가 일어선다 산촌에서 고함치면 어촌에서 화답한다 - P18
-아름다운 솜씨다. 짐승을 쏘기에는 아깝구나. 안태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술자리에 모인 사내들에게그 말은 이 세상을 향해서 하는 말처럼 들렸다. - P55
-사내는 입이 무거워야 좋다. 말이 빠른 녀석들은 똥을 오래못 가린다. - P61
안정근은 형이 가려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날 서울 도심에서 눈으로 본 일들이 형이 가려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안정근은 형이 여기에 남아서 함께 견디면서 함께 살기를 바랐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야 하기는 마찬가지일 듯싶었다. 안정근이 말했다. -형님은 장자 아니오. 장자라는 말이 안중근의 가슴을 때렸다. -대륙으로 건너가도 나는 여전히 장자다. -어머니는 내가 모실 테지만 형수님과 아이들은 어찌하시 -어쩔 수 없는 일을 자꾸 얘기하지 마라. 내가 자리잡히면 데려가겠다. -형님, 가지 마시오. 여기서 삽시다. -여기는 이미 이토의 땅이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살길을찾아가겠다. 이것은 벌레나 짐승이나 사람이 다 마찬가지다. 이것이 장자의 길이다. - P73
이토를 어떻게 해서든지 눌러야 한다는 생각이 언제부터 마음에 자리잡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았으나분명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골병처럼 몸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멀리서 다가와서 넓게 퍼진 골병처럼그것은 몸속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집어서 드러내 보일 수는 없었다. 도주막의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는 밤에, 안중근은 이토의 육신에 목숨이 붙어서 작동하고 있는 사태를 견딜 수 없어하는 자신의 마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토의 목숨을 죽여서 없앤다기보다는, 이토가 살아서 이 세상을 휘젓고 돌아다니지 않도록 이토의 존재를 소거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바라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그렇다기보다도, 이토가 애초에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이토의 한 생애의 자취를 모두 소급해서 무화시키는쪽이지 싶기도 했는데, 그 지우기가 결국 이토의 목숨을 제거하는 일이 되는 것인지는 생각하기가 머뭇거려졌다. 이토의 목숨을 제거하지 않고서, 그것이 세상을 헝클어뜨리는작동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렇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야 한다면 그 죽임의 목적은 살에 있지 않고,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까닭을 말하려는 것에 있는데, 살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세상은 말에 귀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 들리게 말을 하려면 살하고 나서 말하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말은 혼자서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이 세상에 대고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일진대, 그렇게 살하고 나서 말했다 해서 말하려는 바가 이토의 세상에 들릴 것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이 세상에서 이토를 지우고 이토의 작동을 멈춰서 세상을 이토로부터 풀어놓으려면 이토를 살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안중근은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생각은 어둠의 벽에 부딪혀서 주저앉았다. 생각은 뿌연 덩어리로 엉켜 있었다. - P88
의병대원들은 저마다의 열혈과 충정으로 자원입대한 사람들이었지만의기가 치열할수록 명령에 따르지 않았고 군율로 통제하기어려웠다. 반도의 면면에서 죽음을 잇대면서 무너지고 또일어서는 의병 부대들을 안중근은 생각했다. 계통이 없고 대열이 없는 복받침이었다. 한없는 죽음이었고 한이 없을 죽음이었지만, 국권회복은 죽음을 잇대어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었다. 산속에서 붙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그때 죽였어야 옳았던가를안중근은 스스로 물었다. 안중근은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 P93
만월대에서 찍은 이토의 사진은 벼락처럼 안중근을 때렸다. 벼락이 시야를 열었다. 몸속의 먼 곳에서 흐린 구름처럼 밀려다니던 것이 선명한 모습을 갖추고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토의 몸이 안중근의 눈앞에 와 있었다. 시간이 없구나. 연추를 떠나자. 운신할 수 있는 자리로가자. 내 몸을 내가 데리고 가서 몸을 앞장세우자. 몸이 살아 있을 때 살아 있는 몸으로 부딪치자..... 신문 속 이토의 사진을 보면서 안중근은 조준점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는 손짓을 느꼈다. 우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토의 일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내내 분명하지 않았다.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자각증세가 없는 오래된 암처럼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었는데, 만월대의 사진을 보는 순간 암의 응어리가 폭발해서 빛을 뿜어내는것 같았다. 안중근은 몸을 떨었다. - P97
..... 이것이 이토의 이목구비로구나. 보통 사람과 아무 차이 없구나...... - P99
철도는 눈과 어둠 속으로 뻗어 있었다. 그 먼 끝에서 이토가 오고 있었다. 멀리서 반딧불처럼 깜박이는 작은 빛이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빛이라기보다는, 거역할 수 없이 강렬한 끌림 같은 것이었다. 두박자로 쿵쾅거리는 열차의 리듬에 실려서 그것은 다가오고 있었다. 문득 빌렘에게 영세를 받을 때 느꼈던 빛이 생각났다. 두 개의 빛이 동시에 떠올라서 안중근은 이토의 사진을 들여다보던눈을 감았다. - P100
-하얼빈은 만주의 중심이다. 이토는 대련에서 북상해서 하얼빈으로 오고 우리는 우라지에서 서행해서 하얼빈으로 간다. 러시아 재무장관 코콥초프는 모스크바에서 하얼빈으로 온다. -그렇구나. 일본은 대련에서 크게 이겼는데, 이토는 대련에서 또 하얼빈으로 오는구나.
-자네는 왜 나를 따라나서는가? 왜 이토를 쏘려고 하는가. -그런 것은 말할 필요 없다. 앞으로도 말하지 말자. - P114
-자네는 권총이 있는가? -있다. 광산촌에서 행상질 할 때 호신용으로 사둔 것이다. 중고품을 팔 루블 주고 샀다. 거기서는 다들 총을 지니고 다닌다.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쓸 만하다. 총알은 몇 발 있는가? - 세 발 있다. 처음에 열 발 있었는데, 일곱 발로 꿩을 쏘고세발 남았다. -권총으로 꿩을 쏘는가? -꿩이 가까이 왔을 때 쏘았다. 모두 한 방에 맞혔다. 한 마리는 먹었고 나머지는 팔아서 밥을 사 먹었다. -꿩을 쏘고 남은 총알로 이토를 쏘는구나. -우습지만 그렇게 되었다. 겨누어 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총을 많이 쏘아보았는가? -많이 쏘지는 않았다. 나는 사냥꾼이 아니지만 이토는 꿩보다 덩치가 크니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겠구나. 그렇겠어. 나는 이토의 덩치가 너무 작아서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좋지 않은 생각이다. -총알 세 발은 너무 적지 않겠나. 좀더 구할 수 있겠나? -세 발은 많지 않지만, 적지도 않다. 세 발이면 적당하다. 이토는 경호원을 여럿 데리고 있을 테니까 아마도 나는 세 발 이상은 쏘지 못할 것이다. 근접할 수만 있다면 세 발 이상은 필요 없다. 경호원이 많아도 먼저 쏘는 자를 당하지는 못한다. 그것이총이다. 너는 참으로 총을 아는 자로구나…………라는 말을 안중근은 참았다.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총은 한번 쏘면 돌이키지 못한다. 생각에 잠긴 안중근에게 우덕순이 물었다. -자네는 몇 발 가지고 있는가. -일곱 발짜리 탄창 한 개다. 그리고 몇 발 더 있다. -다쏠 수 있을까? 탄창을 갈아 끼울 시간은 없을 것이다. -총을 많이 쏴본 사람 같구나. -몇 번 쏴보면 다 알 수 있다. - P116
안중근과 우덕순은 밤에 다시 만났다. 둘은 그날 밤 안중근의방에서 함께 잤다. 잠이 들 때까지 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우덕순이 뭐라고 잠꼬대를 했다. 대륙의 산맥과 강 위로 뻗어나간 철도들이 어둠 속에 펼쳐졌다. 철도의 저쪽 끝에서 이토는 오고 있었다. 그날 밤 안중근은깊이 잠들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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