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지도 - 2023 청주공예비엔날레
강재영 외 지음 / 샘터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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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는 인간과 가장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예술 장르이자 지적 설계물이다. 회화나 문학이 가지는 추상성에 비해 문명의 발전과 함께 성장하는 실리적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런 성격을 가졌음에도 수많은 작가와 장인들은 공예품에 모호한 - 일반인이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예술성을 부여했고, 별도의 설명 없이 작품을 대했을 때 그 공예품에 담긴 작가 개인의 역사나 신념, 의미를 파악하기란 여간 까다롭지 않다.

<사물의 지도>는 2023 청주공예비엔날레 출품작들의 도록이자 해설집이다. 물리적 거리의 한계 때문에 작품을 실제로 볼 수는 없지만, 그대신 10명의 큐레이터들의 친절한 해설과 함께 사진으로나마 세계 각국의 공예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종이, 유리, 흙 등 전통의 재료에서부터 폐타이어 등 버려진 폐기물까지 인간의 손이 닿는 모든 재료가 공예품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은 늘 경이롭다. 또한 그 형태와 과정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예품들에 담긴 인간의 멸망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이 놀랍다. 세대가 다르고 지역이 달라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닿아있음이 느껴진다.

단 하나, 이 책을 읽으며 아쉬운 점이 있다. 이 아름다운 작품들을 직접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청주공예비엔날레는 10월 15일까지라고 하니 청주 인근에 사는 분들은 <사물의 지도>를 들고 찾으시면 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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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나의 집
오노 후유미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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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오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가능한 한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나에게는 이제 집이 없다. 아무리 기분 나쁜 공간이라 할지라도 내게는 돌아갈 곳이 필요했다.

하이츠 그린 홈, 희고 투박한 벽과 녹색의 문에 갇힌 그곳이 아라카와 히로시의 유일한 집이었다. 고작 16살, 고등학생 신분으로 부모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 이상 나은 곳을 찾기도 어려웠다. 독립한 이상 집을 꾸미고 삶을 꾸리는 것 모두 혼자 힘으로 해야했다. 그래도 그 '집'이 있어 더는 유목민처럼 떠돌며 친구들과 헤어지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안정적인 삶을 살기 바랐다. 우편함에 정체불명의 편지가 배달되고, 좁은 골목길이 기분 나쁜 낙서로 뒤덮이고, 똑똑 물소리가 떨어지는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그런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사람 이름을 잘 못 외우는 터라 작가 이름도 거의 외우지 않는 편인 내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인 오노 후유미의 호러 (성장) 미스터리. 미국의 호러 작품은 밑도 끝도 없이 사람부터 죽이고 보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이나 일본 등 동양의 호러는 대개 마음 한켠이 씁쓸해지는 서사를 담고 있다. 아마 내가 끌리는 것도 그 부분이리라.

집, 나의 집. 물리적인 부모가 있다고 해서 그곳을 꼭 집으로 부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 마음아프다. 아이라면, 응당 그곳이 집이어야 하지 않겠나.

<십이국기> 시리즈를 통해 익히 체감한 필력이었으나 단권의 소설에서 그 능력은 거의 최고조로 발휘된 듯 하다. 얼핏 잔잔하게 이어지는 문체에도 놀라운 흡입력을 보여줘서 한눈 팔 기회가 없었다. 오히려 아까운 기분에 억지로 끊어 읽었다. 빨리 다음 장을 읽고 싶은 마음과, 오노 후유미의 작품을 이리 빨리 끝낼 수 없다는 마음이 치열하게 부딪쳤다. 그래도 참,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너무 아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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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나무 상상 동시집 4
권영상 지음, 백향란 그림 / 상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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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얀 곤줄박이 말 같은 시를 낳아보리라 결심했던 시인이 하나, 둘씩 뿅뿅 낳은 귀엽고, 재미나고, 때로 가슴 찡한 52편의 시가 이 한권에 담겼다.

참새 깃털 / 하나 / 길섶에 떨어졌다. / 오늘 밤 / 요만큼 / 참새가 추워하겠다 (깃털)

요 짧은 시 하나에도 핏, 웃음이 나고 공연히 창밖을 두리번거린다. 떨어뜨린 깃털 하나만큼 추워질 참새가 우리집을 찾아오면 어찌하나, 싶다.

여우 엄마가 / 기도합니다. / 제 귀여운 아기를 봐서라도 / 제발 토끼를 잡을 수 있게 해주세요. / 그 무렵 / 토끼굴에서 / 토끼 엄마가 기도합니다. / 제 귀여운 아기를 봐서라도 / 제발 여우에게 잡히지 않게 해주세요. (두 엄마)

여우 엄마와 토끼 엄마의 기도를 노래한 <두 엄마>는 또 어떤가. 모두 제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숭고한 마음의 엄마이건만, 이 둘은 어쩔 수 없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이다. 이 경우 신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어야 공정하다 칭송받을까? 이래라 저래라 대놓고 뭐라지 않아도 몇 줄 안 되는 문장에 참 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겨있다.

이해를 하건 말건 아이를 붙들고 이런 이야기를 나불댄다. 아이를 위한 동시집에 엄마가 더 신났다.

조근조근 들려주는 시인의 노래에 푸근하게 취해본다. 부드럽지만 강하게 울리는 시인의 외침에 가만가만 귀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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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인공지능 코딩 대모험 세젤잼 과학동화 6
노훈 지음, 신성희 그림 / 한솔수북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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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왜 이렇게 아이들에게 코딩을 못 가르쳐 안달인지 모르겠다- 고 하면 시대에 뒤처진 엄마가 되는 걸까? 처음 코딩 열풍을 바라볼 때도 나는 썩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주변에 의견을 물어보았다. 나 자신이 먼저 코딩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야 아이에게도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생각을 정리했다.

"논리적인 사고력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코딩 교육은 인정, 코딩을 위한 코딩 교육은 부정한다."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 드디어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읽어보자. 오- 0과 1로만 구성된 이진 나라.. 그래, 컴퓨터 언어는 0, 1뿐이지. 이진법의 세계. 벌써 머리가 아프려고 한다. 뼛속까지 문과인 사람의 체질적 거부 반응이랄까. 정신을 차리자. 이것은 인공지능과 코딩에 관한 책이지만- 모험 책이다!

일단 목차가 재미있다. 알고리즘 마법 동굴이라던가 버그와 디버깅 같은 전문 용어는 잘 몰라도 된다. 그런 건 살다 보면 알게 되는 날이 온다고 믿는다. 선생님들이 아시면 목덜미 잡으시려나? 사실, 이 책에 다 나온다. 읽으면 된다. 물론, 컴퓨터와 관련된 모든 용어가 영어라는 게 하나의 걸림돌이 되기는 한다.

이진 나라 왕자와 맞서 동굴을 탈출하고, 사이보그 할아버지를 만나고, 무려 해골 섬의 저주까지 풀어야 한다! 채원이와 함께 모험을 즐기며 나와있는 문제를 풀어보려 끙끙대다 보면 저도 모르게 코딩의 세계에 젖어들게 된다.

<?php for ($i=0; $i<$list_count; $i++) { ?>

이런 외계어는 몰라도 좋다. 중요한 건 차근차근 논리를 따라 돌다리를 두드릴 줄 아는 인내와 사고력이다. 그래, 까짓 코딩, 못 해도 좋지. 하지만 논리와 사고는 중요하니까. 호랑이에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하지 않나. 제대로 생각할 줄 아는 힘을 기른다면, 나머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훌륭하다. 모험 이야기로 흥미를 끌어내고 문제 해결을 위해 코딩의 개념을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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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유전학
임야비 지음 / 쌤앤파커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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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ius (악랄한)
Genetics (유전학)
Eugenics (우생학)

책 표지 디자인에 쓰인 이 세 단어가 이야기의 핵심이자 전부이다. 우성 인자만으로 교배하면 후손은 반드시 우성의 존재가 될까? 그렇다면 동일한 논리에 따라 악도 유전될 것인가?

소소, 소셀로, 소설 <부친 살해자>의 주인공인 코바, 아내의 이름을 딴 K. 카토, 곰보라는 뜻의 초푸라, 절름발이라는 의미의 게자, 종교의 뜻을 묻힌 신부 그리고 인간 백정까지. 그 이름이 무엇이 되었던,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사내를 '직업 혁명가'라고 불렀다.
(프롤로그 중에서)

사내의 등장은 화려하다. 은행 지붕 위에서 사제 폭탄을 던지고 죄의 고과에 상관없이 사람을 죽인 후 '그분'의 공작금으로 쓰일 돈을 갈취한다. 혁명을 위한 혁명, 목적을 위한 무자비함.

그런 사내에게 '어쩔 수 없는' 악함의 명분을 제공한 것은, 내 생각에, 사내의 어머니이다. 기적의 케케.

유형지로 떠나기 전날 찾아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수십년 동안 감추었던 자신들의 과거를 들려준다. 사내의 이름 또한 그처럼 감춰진 채로 어미의 과거와 수시로 교차한다. 추악하고 역겨운 고백 끝에 사내는 절망했을까? 어미를 동정했을까? 아니 - 사내는 오히려 악을 대물림받았다.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 악의가 되어버린 리센코 후작의 승리였다.

종교의 관점에서도 과학의 관점에서도 악의 유전자는 없다. 존재하지 않으니 유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자리한 악이 점점 커지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악의 근원이 어디에 있기에 대를 거듭할 수록 더 강해지는 것일까.

이야기의 끝에 드러난 사내의 이름 때문에 놀라느라 자칫 놓칠 수 있겠으나 이야기의 궁극적인 목적 - 인간 스스로 원인이 되어 발현하는 악의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악이 유전되는 일이 없도록 어떻게 자신을 지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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