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지키는 여자
샐리 페이지 지음, 노진선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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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 없는 무덤 없고 사연 없는 인생이 없다는데, 어째서 제니스는 자기만의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한 걸까? 한두 살 어린애도 아니고 40 후반의 나이가 되도록 살면서 그럴 수가 있을까? 타인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여자, 제니스의 시작은 이미 수상하다.

한편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제니스는 청소를 아주 잘했어.” 따위로 기억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면 말이다. 모자란 남편까지 챙기며 열심히 살았는데 죽은 뒤에 남는 말이 “청소 잘 하는 여자”라니 서글플 만도 하다. 하지만 내가 죽은 뒤에 남는 말은 기껏해야 “참 게으른 인간이었어” 정도일 테니 나에 비하면 굉장한 칭찬 아닐까….

어쨌든 그런 자신의 이야기가 싫은 제니스는 타인의 이야기를 모으고 정리해서 필요에 따라 끄집어 내어 용기와 미소가 필요할 때 사용한다. 탁월한 능력이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이야기꾼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 역시, ’청소하는 여자‘라는 타이틀에 스스로 깊이 매몰되어 있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많은 자기개발서들이 네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너라고 외치지만, 대체로 평범한, 혹은 남들과 별다를 게 없는 삶을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린다.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어야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매일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남기 급급해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마치 제니스처럼. 하지만-

“어쩌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갖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순간을 찾는 것일지 모른다.” (P.128)

나는 자기개발서 백 권보다 이런 소설책 한 권이 훨씬 이롭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둘 다 판타지의 영역인 건 마찬가지이지만, 목차만 보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반 이상 눈치챌 수 있는 자기개발서는 지루한 반면, 소설은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단면이 그대로 담겨 있어 다음 장에 어떤 이야기가 튀어나올지 몰라 도무지 방심할 수 없다.

이야기가 주는 재미가 좋다. 이야기가 품은 감정들이 좋다. 이야기가 끌어내는 힘이 좋다. 나는 이야기를 수집하지도 않고,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도 않고, 그저 남의 이야기를 읽고 소비하는게 고작이지만 좋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배우고, 내 안에 감춰진 어둠을 해소하는 법을 배우고, 사람의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다.

책을 끝까지 읽은 후에야 비로소 책 날개 안쪽에 적힌 작가 설명을 읽어보았다. 첫줄에 크게 공감했다. “잃어버린 마음의 풍경을 되살리는 이야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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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행복 - 어디서나 펼치는 내 손안의 컬러링북
조해너 배스포드 지음 / 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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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컬러링북 시리즈로 많이 알려진 작가 조해너 배스포드의 새로운 컬러링북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새롭다,라는 말은 그저 새로운 도안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컬러링북의 가장 특별한 점은, 작가 본인이 인정하듯 ‘작다’는 것에 있다.

워킹맘은 바쁘다. 많이 자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아이는 돌봄이 필요하고, 나는 매일 출근을 해야하며, 불가피하게 집안일도 내 몫이다. 만져달라, 놀아달라 징징대는 고양이까지 날 바라보고 있으니 일상에서 해야할 일들을 마치면 빨라도 아홉시, 혹은 그 이후가 된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 매일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려 하는 것 자체가 사치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챗바퀴 굴리듯 굴러가는 대로만 사는 건 억울하고 아쉽다. 거창하지 않더라도, 많은 시간이 아니더라도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꼭 집이 아니더라도, 정해진 시간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럴 때 추천할 수 있는 책이 이것이다.

A5 사이즈의 책은 두껍지 않아 가볍고 가방에 쏙 들어간다. 필요한 도구는 오로지 색연필뿐이다. 물감이나 마카를 사용하기에는 종이가 얇다. 짧은 시간에 완성하는 것이 목표인 듯한 도안들은 앙증맞고 귀여운 대신 오일파스텔 같은 투박한 화구를 쓰기엔 어려운 감이 있다. 하지만 색연필은 휴대성도 좋거니와 손이 더러워질 염려가 거의 없다. 주변을 더럽힐 일도 없으니 카페에서 잠시 짬을 내어 쓰더라도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작은 도안의 가장 특별한 점은 빠르게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의 도안을 며칠에 걸쳐 완성하는 일은 쉽지 않다. 때로는 채색이 완성되기 전에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이 컬러링북의 작은 도안들은 빠르면 5분, 길어도 한 시간을 넘기지 않고 마무리할 수 있다. 그만큼 성취도가 높고, 채워지는 페이지가 뿌듯하다.

올해 봄은 유달리 비염이 심해 늘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이 작은 컬러링북 덕분에 짧으나마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작가님께도 감사하고, 이런 컬러링북을 출판해주신 클 출판사에도 감사한 일이다. 매일의 행복이 이렇게 삶을 살아갈 힘이 된다.

** 기왕이면 180도 제본이면 좋겠다. 억지로 펴려고 하지 말라는 작가님 당부가 있었지만 아직 그걸 받아들일 준비는 안 돼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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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인상파 - 터너에서, 모네, 고흐까지
야마다 고로 지음, 허영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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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488쪽에 달하는 두꺼운 한 권의 책에 총 18인의 인상파 화가의 삶이 빼곡히 담겼다. 양장 제본이 아님에도 워낙 무게감이 있어서 들고 읽거나 가방에 넣어 다닐 만한 사이즈가 아닌 게 아쉬웠지만, 이 정도 규모의 책이 얇고 가볍기를 바라면 그건 너무 큰 욕심일 것이다. 매일 밤마다 책상 앞에 앉아 서너 명의 화가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읽다 보면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을 정도로 몰입도가 좋았다.

제목만 보면 전공자를 위한 어려운 책일 것 같지만, 막상 읽어보니 미술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을 위한 교양서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만 되어도 이해가 될 만큼 쉽고 재미있는 설명이 이어지고, 비전문가와의 생생한 대화 형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친숙한 느낌과 함께 마치 텍스트 사이로 영상이 떠오르는 듯 실감이 났다.

아쉽게도 그림이 작게 실려서 도록의 느낌은 안 들지만, 그 대신 무려 500여 컷에 달할 만큼 방대한 그림 자료가 수록되어 18인의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여러 화가가 같은 풍경을 그린 작품을 비교해 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덕분에 그 페이지를 그림 친구들과 공유하며 서로의 취향을 이야기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나누기도 했고, 덕분에 ‘하늘의 왕‘ 외젠 부댕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기억해두겠어!

한 명 한 명의 작가의 일생을 낱낱이 파헤치진 못 하지만 인상파 계보의 전후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는 충분하다. 각자의 성격이나 환경, 화풍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치 야사를 읽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롭다. 누구 하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사람이 없고, 서로의 재능을 지원하며 성장해가는 모습이 기특하다. (죄송해요!) 의기투합하다가도 생각의 차이로 다투는 모습을 보면 인간사 어디나 마찬가지구나 싶어 절로 웃음이 난다. 그렇게 작가의 말을 따라 18인의 세계를 탐험하다 보면 어느새 종장, 인상파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화가 고흐에 다다른다.

좋아하는 화가는 고흐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인물은 ‘빛과 색채의 화가‘ 터너였다. 그 자신이 인상파 화가였던 것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며 인상파의 탄생에 일조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 가슴에 와닿았던 것은 당시 영국의 기후 상황처럼 어두운 색채 일색이었던 그의 그림이 이탈리아 여행 이후 빛의 세계로 바뀐 부분이었다.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는지에 따라,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따라 작품의 세상이 달라진다니, 당연한 일임에도 가슴이 벅찼다. 세상이 뭐라 하건 내 눈으로 직시할 수 있는 힘은,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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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천국 가는 날
전혜진 지음 / 래빗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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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떡볶이 / 김밥 / 오므라이스 / 김치만두 / 비빔국수 / 돈가스 / 오징어덮밥 / 육개장 / 콩국수 / 쫄면

요즘은 이런 유의 책이 ‘힐링 소설‘로 불리며 많이 나오는 편이라 채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왠지 아는 이야기일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그래, 확실히 모르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역시 어딘가 익숙한 냄새가 난다. 익숙한 저 메뉴들처럼.

총 10개의 메뉴와 총 10개의 에피소드가 서로 얽힌 듯, 설킨 듯 이어지는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집이다. 등장인물의 면면은 하나같이 어디선가 마주쳤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겪는 여러 위기나 갈등 역시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일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야기에 심드렁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온전히 전혜진 작가의 힘이다.

사람 사는 데 어디나 다 마찬가지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새삼 공감하게 된다. 누구나 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기 마련이고, 각자의 자리에서 삶은 참 치열한 순간의 연속이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좋은 시간이 하나도 없는 인생은 거의-아마도- 없고, 이도 저도 아닌 시간과 별로였던 시간을 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는 장사일지라도 그 좋았던 기억 하나로 남은 생을 그럭저럭 살아가는 게 인간이 아닌가 싶다.

고작 케첩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오므라이스라도 남이 해주는 거면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진 잔칫상이 하나 부럽지 않고, 고급 레스토랑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얇은 돼지고기 돈가스는 여전히 나를 꿈꾸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준다. 온갖 편견과 차별, 멸시가 난무하는 세상, 그중에서도 특별히 돈보다 못한 가치로 취급받는 루저 인생이라도 좋아하는 메뉴를 골라 한 끼 든든히 먹고 나면 내일을 살아갈 힘이 생긴다.

영화처럼 드라마틱 하게 달라지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고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와 180도로 달라지는 일도 생기지 않지만, 그래도 내일의 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누군가는 루저의 정신승리라며 비아냥거릴 수준일 뿐일지라도, 그러면 또 어떤가. 기대수명이 백 년을 넘어버린 지금, 조급해한들 남들보다 고작 몇 걸음 더 앞설 뿐이고, 그만큼 남들보다 좀 더 빨리 권태로워질 뿐인데.

김밥천국의 시초가 인천이라는 건 처음 알았다. 하긴, 서울이면 어떻고 춘천이면 또 어떨까. 어차피 나는 소비자일 뿐이고, 맛있는 한 끼를 보다 저렴하게 먹을 수 있으면 그저 좋은 일개 소시민일 따름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부럽다. 같은 지역 출신인 작가에게 간택되어 이렇듯 당당하게 소설의 제목으로 나서게 된 것이.

아,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나는 김치만두보다 고기만두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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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몽이 오늘도 잘 부탁해
rotary 지음 / 부크럼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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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큼이나 몽글몽글한 일러스트와 몽글몽글한 문장이 페이지마다 가득 담긴 '몽글몽글 다이어리'- 처음 책을 받았을 때의 감상도 "와, 몽글몽글하네"였으니, 거참, 이름 한번 잘 지으셨구나 싶다.


마치 봄에서 여름, 가을을 거쳐 겨울로 이어지는 한국의 사계절처럼 4개의 Part로 나뉜 책은 예전에 즐겨 만들던 6*6인치 포토북을 연상시키는 귀여운 사이즈여서 몽몽이 캐릭터와도 제법 잘 어울린다.


때로는 어린 소녀 시절의 감성을 반추하며 미소 짓고, 어느 날은 몽몽이의 말 한마디에 위로를 얻고, 또 어떤 때는 생각지 못했던 문장에 깨달음을 얻어 간다. 비단 나이 탓만 할 건 아니지만, 어쨌든 대체로 무감한 내 영혼 위로 부슬부슬 감성의 물방울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 보름달 아래서 소원을 빌 때면

그 밝은 빛이 나를 비추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내 안에 있는 힘과 가능성을 믿게 돼.

결국 내가 비는 소원은

내가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

스스로 약속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 "

(Part. 3, 본문 중에서)


구태여 첫 페이지부터 글자 하나 놓칠 새라 샅샅이 훑을 필요 없이, 행여나 읽던 페이지를 놓칠까 전전긍긍할 필요 없이, 그저 그날의 기분에 따라 아무 페이지나 열어 오늘의 문장으로 삼아도 좋을 책이다. 혹여 책을 펼치자마자 닫아야 할 일이 생긴다 해도 뭐 어떠랴. 그런 날은 또 그런 날대로 흘러가게 두면 될 일이다. 그러는 편이 이 책의 목적에도 맞을 것이다. 그렇게 믿어버린다.


조금 성의가 더해지는 날에는 동봉된 몽몽이 스티커를 붙인 후 마음에 드는 글귀를 따라 적어 유행인 '다꾸'나 '캘리그래피' 활동을 해봐도 좋겠다. (그렇지만 스티커 한 장으로는 성이 안 찰 텐데, 이참에 몽몽이 따라 그리기 프로젝트라도 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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