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리면서 본다 - 런던 V&A 박물관에서 만난 새로운 여행 방법
이고은 지음 / 후즈갓마이테일 / 2025년 6월
평점 :
살아오는 동안 여기저기 많이도 다녔고, 박물관이며 전시장이며 나름대로 흥미를 갖고 보아왔지만, 그래서 남은 게 뭐냐고 묻는다면 그때 찍었던 사진들 정도...? 그러나 대체로 작품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눈에만, 가슴으로만 담아야 했던 것들이 태반이다.
요즘은 워낙 시대가 이렇다 보니 핸드폰 촬영까지 허용하는 경우도 많지만, 작품 감상은 뒤로 한 채 찰칵거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있다 보면 오히려 그 행태에 질려서 내 폰은 꺼내기도 싫어질 때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도록이라도 구매해 나중에 들춰보긴 하는데, 사실 조그만 사진들로는 현장의 감동까진 느끼기 어렵다. 그저 사전 한 권 더 샀구나, 하고 마는 게 현실이다.
나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지만, 그리면서 본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이고은 작가는 작품 하나당 20분을 이야기한다. 지금껏 한 작품 앞에 20분 동안 계속 서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그 말이 머리를 세게 때렸다. 20분이 뭐람, 2분이라도 내어준 경우가 있었던가 말이다.
오롯이 20분의 시간 동안 한 작품을 '보기'만 하는 것은 말도 안 되게 어려울 테지만, 그 20분 동안 작품을 보며 그림을 그리는 건 그리 긴 시간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20분의 시간 후에는 정말로, 그 작품이 내 안에 깊이 남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그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럴 용기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책 초입에 드로잉에 필요한 것들을 '그려'놓았지만, 사실 제일 필요한 건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에서 스케치북과 펜을 꺼내드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늘 얘기하는 거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조그만 문고판 사이즈의 책에는 그렇게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삐뚤빼뚤한 선으로 그려낸 런던 V&A 박물관의 작품이 가득 전시되어 있다. 이게 작가의 실제 스케치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어쩐지 더 벅찬 심정이 된다. 어반 스케쳐스의 그림들을 봐도 그렇지만, '현장감'이 주는 감동이라는 게 따로 있는 모양이다. 철자를 잘못 써서 대충 수습한 글자도, 공간을 미처 계산하지 않아 갈수록 작아지는 글자도 모두 귀엽다.
그렇잖아도 작은 책을 2/3나 가린 띠지-이쯤 되면 띠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인데-를 펴보니 책보다 훨씬 큰 양면 포스터가 나온다! 런던 V&A 박물관의 외, 내부 전경을 그린 것인데, 띠지-를 제거한 책은 너무 핑크 핑크 해서 약간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포스터를 벽에 붙이는 취미는 없으니 서둘러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았다.
책의 말미에는 실제 작품의 사진과 설명을 확인할 수 있도록 페이지 링크를 담은 QR 코드가 수록되어 있어서 작품 도록을 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카메라가 원하는 qr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아서 속 썩이는 문제가 있긴 하다.)
햇빛에 바래가는 스케치북 한 권을 꺼내 나만의 기록장으로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전시장을 가든 두 시간쯤 다니다 보면 더는 안 되겠다 선언하는 때가 오는데, 그러기 전에 마음에 꼭 드는 작품 앞에 앉아(제발 그곳에 의자가 있어주길) 나만의 스타일로 그려보는 거다. 아무도 보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 쌀알 만큼의 용기가 생겨나겠지. 제목은 역시, '이미나라' 정도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