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하 까치글방 151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지음, 박여성 옮김 / 까치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원전)의 명성이야 미디어 리뷰로도 충분할 것이다. 원전 발간 20년 후에야 한글판이 나왔다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들여다 보았는데 실망을 금할 수 없다. 몇 년에 걸친 번역자의 수고와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만, '이 책은 끝까지 꼼꼼히 인내를 가지고 봐야된다' 던 번역자의 말처럼 번역자가 과연 이 책의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고 번역을 했는지 의문이 든다.

따라서, 역자 후기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번역판의 내용을 감수한다는 말에 자존심 상했다' 말에 야유를 보내고(과연 호프스태터가 내용을 감수 했을까?), 역자 후기 말미의 '지성의 극치를 흘낏 엿본 듯' 써내려간 역자의 구구절절은 vomit를 금할 수 없다.

--가장 잘못된 번역 : 호프스태터가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를 나름대로 증명하기위해 도입한 'BLOOP' 언어로 작성된 프로그램까지 한글로 번역한 것(분명히 BLOOP언어에 사용되는 심볼은 영어 알파벳, 숫자, 몇 개의 기호라고 본문에 번역해놓고도)

이는 차후의 괴델 정리의 증명에 도입된 괴델 넘버링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괴델의 정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을 혼돈의 나락으로~~~

예컨데, 다음이 포함된 c 프로그램을 한글로 번역하여 컴파일한다면 기계가 받아주나?

for(u=0;u<18;u++) vomit=vomit+u;
who_knows=vomit;

--사족 : 재번역 혹은 훌륭한 번역을 기다릴수 없는 분은 Amazon에서 원전을 찾으십시요.(16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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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chaire > 골때리는 소설과 작가, 그러나 예리하고, 집요하고, 웃기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개정판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 역시, 대체 무슨 소설이길래 그렇게들 난리인가,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집어들었다. 절판되었을 때에도, 나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가 몇몇 사이에선 전가의 보도라도 되는 듯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하고, 박민규의 재미난 소설과 함께 회자되던 바, 게다가 절판씩이나 되었으니, 그 고귀함은 더욱 빛이 날 터. 내 안에서도 호기심은 무럭무럭. 마침내 개정판이 출간되었던 것인데, 목차를 보아 하니, 예사놈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가짜 르나르의 야구 박물지, 라이프니츠를 흉내내어, 코 푸는 종이로부터의 생환 등등의, 우아하고 감상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신기하고 발랄하기 그지없는 소제목들에 힘입어, 아주 들뜬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펼쳤는데, 드러나는 장면이 또한 보통 이야기는 아니다 싶었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여기는 내 방인데, 대략 2만 권의 책과 갈색 수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고양이의 이름은 ‘365일의 반찬 백과’이다. 고양이의 이름이 ‘365일의 반찬 백과’인 것에 대해 나는 남한테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이 정도면, 박민규의 <카스테라> 첫 문장, “이 냉장고는 전생에 훌리건이었을 것이다”에 버금가는 전율이다. 옳거니. 나의 눈빛은 무릎을 탁 치고는, 계속해서 행과 행을 넘어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대략 난감. 고양이 이름으로부터 시작하여, 가히 일반인들의 사물 혹은 사유에 관한 명명법을 훌쩍 뛰어넘어, 즉 우리들이 결코 아무것도 독해할 수 없음을 오기지게 증명해 보여주려는 듯 - 전문가들에 따르자면 이것이 어쩌면 ‘포스트 모던’한 방식이라고 하던데 - 그렇게 작가,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이 소설 안에 여러 가지 기괴하고 망측하며, 말도 안 되는(=논리 없는) 작은 이야기들을 엉켜놓았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이 소설이 재밌었다. 읽어갈수록 무슨 소릴 하고 싶어하는 건지 모르겠고, 중간부터는 아예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든 상관 않으리, 하는 마음가짐으로 변질된 비논리적 독자였던 까닭일까. 설명할 수 없이 재미있는,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간혹 읽다가 전철에서 더러 졸기도 하고 그랬는데(라이프니츠가 나오고 그러니까 말이지), 겐이치로의 언어(혹은 세계) 탐구가 그렇게 싱겁지만은 않았다는 거,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아도, 그이의 생각 퍼즐 속에서 허우적대는 게 썩 나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는 거, 게다가 이건 참 괴상한 경험인데,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애써 보여주지 않고 자꾸만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붕괴시키고, 아무렇게나 뭉개고 하면서, 찰흙놀이 하듯 이야기를(혹은 문학을) 갖고 노는 모양이, 나로서는 우습고도 참신했으며(더러 귀엽기도 하고), 그의 '해체'의 시도가 허무하지만은 않더라는 짐작. 무엇보다도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리고 있는 그 무엇을 불러내보려는 시선들... 그래서 나는, 텍사스 건맨즈 대 앵그리 헝그리 인디언즈 이야기라든가, 훠트워즈의 ‘다과회(티 파티)’, 건망증 같은 꼭지 속의 대화, 그리고 일본야구 창세기담 속의 허무맹랑한 질문과 대답들로 인해 키득키득 웃으면서도 정체 불명확한 (의미)심장함에 오싹해지기도 하였더랬다.


“그거야. 문제는. 설레임이 없어진다는 거야. 마운드에서, 설레기는커녕 반대로 가슴이 차가워져.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잘 모르겠는데 뭔가 뿔뿔이 흩어지는 느낌이 들어. 아무리 해도 시합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야구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안 들어.”

생각해보면 내 인생은, 요즘 슬럼프다. 슬럼프라는 건, 내 인생이 ‘산다는 느낌’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의 다른 이름. 그렇담, 내가 슬럼프인 것은, 어쩌면, 내 앞으로 다가오는 공의 구질이 무엇인지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는 구조적 상황(나이든 환경이든)에 접어들었기 때문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이 소설을 읽은 것은, 나의 오독일는지. 박민규의 주인공들은 1할 2푼 5리로 인생을 우습게 따돌려 나를 통쾌하게 만들어주었지만, 다카하시의 주인공들, 즉 한신 타이거즈의 위대한 야구선수들은, 지나치게 높은 타율, 아니 지나치게 잦은 타석, 그 자체에 항거하며 익숙한 인생을 향해 내부 고발을 펼치는 존재들이 아닐까 싶었다. 뻔히 보인다고 말하는 거, 그것은 오만일까. 어떤 공인지 아는데, 배트가 나가게 하고 싶지 않다고 호소하는 거, 그것 역시 핑계에 불과한 걸까. 사방에서 수없이 날아오는 공을 향해 나는 맘껏 휘두를 수 있지만 휘두를 수가 없고, 왜 꼭 휘둘러야 하지, 하는 질문에 붙잡혔다면 그 그라운드에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결국, 나의 슬럼프는 이 소설로 인해 더욱 골깊어졌는지 모른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답을 찾지 못했듯이, 나의 슬럼프에도, 입구가 없었듯 출구도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에게 인생은, 왜냐고 그 의미를 묻는 순간부터 조금씩 재미가 없어져왔는지도 모른다. 투수와 타자가 정해지고, 우수타자로 성장해가고, 기대타율이 형성되면서, 삶이 우수해짐에 따라서, 삶의 즐거움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명명법들에 그는 그러니까 무지하게 싫증을 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마도 나는 그런 작가의 싫증에 얼마간 동의한 것이겠지. 내 인생도 실은 그렇게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중일 터이니.


“질문은 좀 있다가 해주시지 않겠소. 방금 잠에서 깨어서 머리가 안 도니. / 아니, 간단한 거요. 실은 지금 한 얘기의 의미를 미처 다 파악하지 못했어. / 뭐야, 그런 건가? 그렇다면 신경 안 써도 되네. 지금 한 얘기에는 특별한 의미란 없었던 거요. / 의미가 없었다고! 당신은 ‘지극히 유서 깊은 신화적 이야기’라고 말하지 않았어! / 그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둘러댄 거지.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당신들은 얘기를 들으려고도 안 하니까. 게다가 전혀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니었어.”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아, 야구를 하고 싶다, 라는 주인공의 말이, 내게는 참 간절하게 박혔으니까. 하고 싶다, 는 말,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거, 나도 그거 하고 싶다. 뭐, 어쨌든 독해하기는 대체로 어려운 소설이었으나, 아주 재미없지는 않았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오는 소설. 의미 독해를 포기하고 읽으면(꼭 모던의 질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제법 독특한, 각자 저마다 즐길 만한 세계를 만나거나 창출할 수 있으리라는 얘기. 개인적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부에 이르러, 명치를 아주 확실히 찔리고 말았다. "우리들이 하고 있는 것은 야구가 아니다. 확실히 야구를 많이 닮았고, 규칙은 거의 같고, 방망이나 글러브나 로진 백이나 통증을 가라앉히는 스프레이를 쓰는 점도 공통되었고, 공의 크기나 재질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똑같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러나 그건 야구가 아니었던 거야." 

덤으로, 나는 작가 스스로 썼다는 ‘연보’를 읽으며 완전 뒤집어졌다.

- 1964년 14세. 현대시를 발견했다. 최초로 읽은 것은 아유카와 노부오의 <아메리카>, 다니가와 간의 <인간 A>. 그리고 젊었을 때의 스즈키 시로야스의 이런 시였다. / 나는 유부녀가 수음하고 있었다/ 나는 노파가 수음하고 있었다/ 나는 여성 중노동자가 수음하고 있었다/ 나는 우유병에 수음하고 있었다/ 나는 시계가 수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수음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작가의 자작 연보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 1960년대. 잘 표현해낼 말이 없었다. 그래서 소설을 쓰게 되었다.

- 1969년 4월. 모 국립대학에 입학했지만, 가보니 학교는 존재하지 않았다(데모 중이었다). 얼마 지나서 다시 한 번 가봤지만 역시 학교는 존재하지 않았다(폐쇄 중이었다). <이하도 계속해서 재밌지만,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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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평화를 위한 전쟁사
전쟁의 역사
버나드 로 몽고메리 지음, 승영조 옮김 / 책세상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개정증보판의 의미
이 책은 지난 1995년 두 권으로 분권되어 같은 출판사에서 출판된 적이 있다. 나는 구판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생이 사학과에 진학하는 바람에 큰 맘 먹고 몇 권의 역사 관련 서적들을 동생에게 넘기면서 그 때 이 책도 함께 넘겼다. 예전에도 한 차례 이 책에 대해 알라딘에 독후감을 한 차례 쓴 적도 있었다. 그 당시 알라딘 독후감 글쓰기엔 분량 제한이 있어서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다시 한 번 독후감을 쓰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같은 책에 대해 두 번의 독후감을 하는 셈이다. 어떤 이는 왜 같은 책을 두 번 사는가? 혹은 출판사에서 무엇 때문에 개정증보판을 내는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이때의 개정증보판은 중복출판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이를 출판이란 맥락에서 간략하게 이야기해보자. 모든 책에는 판권이란 것이 있다. 여기에 보면 "판과 쇄"란 말이  나온다. 책을 만드는 일도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아무리 공을 들인다 하더라도 실수가 있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작가나 편집자가 수정보완할 필요를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열악한 출판환경에서 대개의 책들은 초판 이후를 기약할 수 없는 실정이다. 설령 인기가 좋아 초판이 모두 판매된다 하더라도 초판의 실수를 수정보완해서 다시 책을 만드는 건 상당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출판사들이 쉽사리 이런 작업에 나서지 못한다.(성의있는 편집자가 출판되어 나온 책을 다시 교정해두거나 독자들이 읽다가 지적해 준 오식이 있더라도 개정판을 만들기 전엔 수정되지 못한다.)우리나라 출판 사정상 재판이라는 건 모 유명작가들의 장편 소설을 출판사를 바꿔 출판할 때나 하는 일처럼 되어 있다. 출판사에서 수정증보판을 만드는 건 독자들에 대한 일종의 리콜 서비스와 같은 것이지만 불행히도 우리에겐 이런 관행이 일반화되어 있지 못하다.

나는 "전쟁의 역사" 1995년 판 초판본과 개정판 1쇄를 가지고 있다. 개정판이 이전 판본과 다른 점은 일단 분권되었던 책이 하나로 묶여 더욱 두툼해졌다는 것이고, 하드 커버 양장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질이나 기타 도판류들이 보다 많이 추가(일일이 대조는 해보지 않았지만, 이전 도판들보다 확실히 사이즈면에서 커졌다.)되었고, 초판본에서 보이던 몇몇 오식들을 바로 잡았다. 그렇다고 개정판에 오식이 전혀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개정판 276쪽의 편집자 주에서 <롤랑의 노래>에 대한 설명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1100년경에 지어진 프랑스 최초의 서사시이자 최고.최대의 무훈시. 롤랑은 샤를마뉴의 이름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롤랑"은 "샤를마뉴 대제"와 별개의 인물이다. "롤랑의 노래"에 등장하는 롤랑은 샤를마뉴 대제가  이슬람교도들과 전쟁할 때 그의 군대에서 활약한 기사 롤랑을 의미한다. 간략하게 내용을 설명하자면 이슬람교도와의 전쟁 당시 그들과 내통했던 간신 가늘롱이 샤를마뉴 대제의 군대를 곤경에 빠뜨려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가장 위험한 임무인  후위 부대 지휘를 왕의 충성스런 신하 롤랑이 자원한다. 가늘롱은 이교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그를 위기에 빠뜨린다. 샤를마뉴는 그에게 뿔피리를 주어 위험에 빠지면 자신을 부르라고 말한다. 하지만 롤랑은 마지막 순간까지 왕을 생각해 뿔피리를 불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대신 뿔피리를 불어 되돌아온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 간신은 처벌당하지만 롤랑은 이미 죽었다는 내용이다. 롤랑이 실존인물인지는 정확치 않지만 샤를마뉴 대제와는 확실히 별개의 인물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들은 개정증보판이 지니고 있는 여러 미덕들에 비하면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무려 1,038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이기 때문이다. 거의 금성판 국어대사전 특장판과 맞먹는 두께다. 가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무지막지한 번역과 편집자의 무뇌충적인 교정교열 작업으로 망가진 책들을 볼 수 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솔직히 우리나라 띄어쓰기, 맞춤법은 국어학 박사라 하더라도 완벽하게 구사하기 어렵다(이 말은 믿어도 된다, 흐흐)는 문제가 있다. 개정판은 이전의 책에서 보다 확실히 오식이 줄었고(이전 책도 오식이 많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인 풍부한 편집자주와 찾아보기, 지도와 도판, 참고문헌들이 충실하게 보강되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전쟁이 벌어졌던 현장의 지도를 부록으로 뒤에 좀더 큼지막한 그림으로 삽입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하여튼 나는 "책세상"이란 출판사와는 개인적으로 독자 이상의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지만 "책세상"이란 출판사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이 출판사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니체 전집"과 "까뮈 전집"을 내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세상 문고"라는 문고본을 출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서가들 말고, 애독자들 중 많은 이들이 문고본의 필요성을 느끼며 일본의 "이와나미 문고"나 프랑스의 "디스커버리 총서" 시리즈와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부러움을 금치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그러나 문고본은 관리 및 영업의 어려움 등으로 출판사들의 외면을 받아왔다. 출판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건 당연하지만 출판이란 동시에 문화적 사명감이 필요한 사업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난 책세상 출판사가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좋은 출판사로 생각한다. 게다가 책 값이나 올릴 요량으로 얇팍한 소설책을 하드커버 양장본으로 개정해 출판하는 곳들이 수두룩한 이 때 진짜배기 개정증보판을 내는 출판사는 또 얼마나 드문가?

이 책의 저자 버나드 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는 어떤 사람인가?
만약 군대를 컴퓨터 게임 "FIFA2002" 에서처럼 심리적 부담감 없이 고를 수 있는 거라면 난 단연 영국군을 내 팀으로 고르고 싶어 할 것이다. 물론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축구팀은 독일팀이다. 내가 영국군을 좋아하는 이유는 축구에서 내가 독일 축구를 좋아하는 것과 흡사하다. 얼핏 보면 독일축구엔 브라질 축구처럼 빼어난 기교도, 프랑스나 네덜란드 축구처럼 토탈 사커니, 아트 사커니 하는 수식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네들 축구는 때로 무미건조할 만큼 덤덤하고, 재미없지만 축구의 정석 플레이, 기본에 충실한 축구를 한다. 축구장 전체를 골고루 사용하여 공격하고, 수비할 때도 특별히 허슬플레이를 한다기 보다는 공의 방향, 공격수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고 봉쇄하는 방식이다. 물론, 전쟁사를 살펴볼 때 영국군이라고 해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혐오스러운 실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크게 보았을 때, 영국군은 모범생이나 천재의 그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종국에 가서는 모범생이나 천재들을 능가하는 성실함과 인내력으로 승리한다. 전사를 살펴보면 영국이 승리한 전투도 많지만 그네들이 패한 전투도 무척이나 많다. 그럼에도 영국군이 패배한 전쟁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결과를 나는 그런 힘에서 찾는다.

굳이 몽고메리의 전쟁사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세계사에서 영국군 만큼 보병을 사랑한 군대도 드물 것이다. 그들이 "백년전쟁"에서 우세한 프랑스 기병을 패퇴시킨 것 역시 보병의 힘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영국 보병들은 우수했다. 군대의 기본이 보병이라면 그에 가장 충실한 군대 역시 영국군이다. 물론 여기엔 그네들이 인도와 인도네시아,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면서 저지른 전쟁 범죄를 논외로 한 표현임을 전제로 해서 말이다. 우리에게 "몽고메리 장군"은 소위 "고집 센 몬티"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렇게 보인 까닭 중 상당수는 역시 미군을 중심으로 한 할리우드의 전쟁 영화들이 만들어 낸 것이기도 하다. 영화 "패튼대전차 군단"을 보면 패튼과 몽고메리가 시칠리아 점령 과정에서 서로 경쟁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는데 역시 미국적 시각에 의한 것이다. 물론 팔레르모를 먼저 점령한 건 패튼이었다. 하지만 롬멜이 지휘하던 독일 아프리카 군단을 시칠리아까지 밀어낸 건 몽고메리였고, 그때까지 미군은 아주 멀리 있었다.

장군으로서 몽고메리에게 가장 빛나는 경력은 롬멜의 탁월한 지휘에 압도당해 영국군이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북아프리카 전선의 승세를 일거에 뒤바꿔버린 엘 알라메인 전투의 승리일 것이다. 그는 1887년 영국 국교회 주교의 아들로 태어나 일평생 성서를 탐독하고 절대적 금주가였다. 철저한 빅토리아풍 교육을 받고 성장한 그이지만 왕립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서는 학우의 셔츠에 불을 지른 사건으로 학교 당국의 처벌을 받은 적도 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큰 부상을 당해 빈사 상태에 이른 적도 있었다. 39세의 나이로 베티 카버와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 10년 만에 아내가 벌레에 물린 상처로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자 평생 재혼하지 않았다. 몽고메리는 헌신적인 아버지였으나 군인으로 임지에 따라 이동해야 했기에 아들 데이비드를 교장 선생집에 맡겨 그 집에서 따뜻한 가정의 정믈 맛보게 하려 했고, 교장 선생에게도 특별히 그 점을 간곡히 당부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북아프리카 전선의 제8군 사령관이 된 것은 1942년 8월 12일이었다. 그는 다혈질이었고, 가시돋친 말을 인정사정없이 내뱉는 수다스런 다변가요, 그 자신은 틀에 얽매이기 싫어하면서도 부하들에게는 사막 한 복판에서도 엄정한 군기와 군율에 따르도록 했던 장군이었다. 몽고메리는 무슨 일이든 자신이 결심한 대로 밀고 나가는 다부진 장군이었지만, 당시 54세였던 몽고메리로서는 처음으로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는 것이었다. 그가 맡은 영국 제8군은 롬멜에게 1년 동안 연전연패한 만신창이 군대였고, 사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병사들은 롬멜이 지휘하는 한 독일군에게 이길 수 없다고 믿었고,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던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연일 전해지는 패전 소식에 기밀 서류를 불태우고, 피난 보따리를 꾸렸다. 몽고메리는 최전방에 부임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이후 제8군은 진지를 1m라도 적에게 넘겨주지 않는다. 각 부대는 현 위치에서 싸운다. 현위치가 당신들의 무덤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매우 엄격했고, 사막 한 복판에서도 참모들은 정시에 시작하는 식사 시간에 언제나 단정한 복장을 하고 나타나야 했다. 그는 부하들을 다시 훈련시켰고, 용기를 북돋았다. 병사들은 부드럽고 성격 좋은 장군 보다 혹독하게 대하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는 장군을 더 좋아했다. 왜냐하면 전쟁은 축구가 아니기 때문에 패한 결과로 지불해야 할 것이 자신의 목숨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몽고메리는 후방인 런던의 다우닝가 1번지로부터 연일 쏟아지는 반격 독촉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에게 더 많은 휴식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섣부른 반격에 나서지 않았다. 정치적 압박으로부터 초연한 그는 점차 병사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결국 롬멜은 그가 파 놓은 함정으로 끌려들어가 패하고 말았다(물론,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늘 이런 문제를 가지고 상반된 의견을 내 놓는다). 그는 마치 삼국지의 육손처럼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독일군을 220km나 후퇴하게 만들었고, 결국 퇴니지에서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 북아프리카에서의 전쟁을 끝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내 영국 점령지의 사령관을 거쳐 영국군 참모총장, 나토의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 부사령관을 지냈고, 참모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러 권의 책을 냈고, 1976년 세상을 떠났다.

전쟁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란 표현은 진부한 만큼 진실이다. 나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때의 사람이란 말은 아마 "인류"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크게 보아 인류의 본성도, 늑대나 개의 본성 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그들만의 본능을 지니고 있으리란 믿음이 그것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류란 말에 대해 나는 눈곱만치도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인류가 배움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면 문자 이래로 기록된 그 많은 비참한 죽음들이 번번이 재현될리 없지 않은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200년의 아이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어느 시대나 정치, 실업계, 매스컴에서 권력을 쥔 자들은 계획하고 가르치고 하나의 방침을 교육해서 그대로 따라오는 '새로운 사람'을 만들려고 해왔다. 나치 독일이 그랬고, 내가 열 살 때 전쟁에 질 때까지의 일본도 그랬단다. 그러나 이런 국가는 주변 국가들을 비참하게 만들고는 결국 패망했어.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런 틀에 박힌 인간과는 다른 홀로 설 줄 알지만 협력할 줄도 아는 진짜 '새로운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한다는 거다. 어떤 '미래'에서나 말이다."

우리나라는 늘상 전쟁의 위험 속에 살아온 탓인지  아니면 혹독한 군사독재 시절을 거쳐 온 반발 심리 때문인지 "전쟁사"에 대한 출판물이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평화에 대한 염원과 필요성이 그 어떤 민족보다 클 것임에도 불구하고 늘상 전쟁의 공포 속에 놓여 있었던 탓에 아니, (군사)국가주의와 (극우)민족주의 아래 놓여 있었던 탓에 "반전평화"운동을 마치 덜 배운 어린 아이들,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들의 배부른 소리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전쟁과 평화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음을 알지만, 알고 싶지 않은 아니, 외면하고 싶어 했다. 국내에 존 키건의 "세계전쟁사"를 비롯해 몇 권의 전쟁사가 번역 출판되거나 육사에서 펴낸 책이 있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지 않는 것, 간혹 읽더라도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취미 용도 이상이 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몽고메리의 "전쟁의 역사"는 우리가 구해 읽을 수 있는 전쟁사 관련 도서들 중 가장 대중적이고, 잘 만들어진 책이다. 아마도 그런 장점 때문에 이 책의 개정판까지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에 대한 역사서로서 이 책은 고대 전쟁으로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만약 그 뒤의 전쟁 사에 대한 책을 찾는다면 구태여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은 20세기 들어 가장 엄혹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다루고 있고, 그 이후 벌어진 다른 전쟁들 역시 이들 세계대전의 결과에 기인하거나 그 이전의 체제들로 인해 빚어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후의 전쟁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역시 이 책을 미리 읽어두는 것이 좋다. 이 책은 모두 7부 25장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전쟁의 본질"은 전체의 서두 역할을 하고, "제2부 고대 전쟁"부터 "제6부 1815-1945년의 전쟁"까지는 이 책의 본문인 전쟁사에 해당한다. "제7부 불가해한 숙명"은 이 책의 에필로그격이다.

이 책의 어쩔 수 없는 한계 혹은 필자의 한계라 할 수 있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은 이 책의 전체 분량과 주목한 부분에서 대체로 동양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너그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의 저자인 몽고메리가 빅토리아 시대 말엽에 태어나 그가 교육받고 성장하여 보낸 인생의 전성기를 서구제국주의 전성기로부터 몰락기에 해당하는, 다시 말해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과 해방 이전 시기를 보낸 인물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주어야 한다. 게다가 오늘날에도 동양에 대한 서구의 인식은 미미하기 그지 없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를 몽고메리 개인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시대적 한계를 생각해본다면 이 책에서 동양이 아주 무시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전쟁사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몽골과 중국, 일본 그리고 인도를 중심으로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은 말이다. 그 나름대로는 중국의 손자나 몽골의 징기스칸, 한국의 이순신 등에 대하여 각별한 존경을 표한 셈이다.

몽고메리는 이 책의 661쪽에서 662쪽에 걸쳐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중략>...일본 선원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이순신 장군의 철갑 전함(거북선)에는 저항할 수 없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뭐 그렇더라도 여전히 불만은 남겠지만 전쟁사에 여러 페이지에 걸겨 많이 기록된다고 썩 좋은 일도 아니지 않나? 흐흐)

솔직히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앞서 언급한 여러 장점들에도 있지만 한 명의 직업 군인이 평생 전장을 거쳐 살아오며 경험하고 느낀 진솔한 전쟁관과 평화관이 이 책 곳곳에 묻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장군들이 쓴 전쟁회고록이나 제너럴십에 대해 군사평론가들이 말한 책은 이미 많이 있다. 그러나 많은 책들이 일종의 회고담에 그치거나  출세기, 실증적인 전사 검토에 그치는데 반해 이 책에는 우리가 전쟁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전쟁 그 자체를 효율적으로 좀 더 잘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살아갈 것인가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는 미덕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매우 좋은 책이다.

몽고메리는 "전쟁의 본질"편에서 전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더러는 전쟁이 문명의 소산이라고 말할 테고, 더러는 전쟁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즉 합의를 도출할 다른 방법이 없을 때 항상 중재자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전쟁이 내린 판결은 정의보다 힘에 기초한 것이었다. <46쪽>

전쟁이란 경쟁 관계에 있는 정치 집단 간의 장기 무장 충돌을 의미한다. 전쟁에는 반란과 내란이 포함되며, 개인적인 폭동이나 폭력행위는 제외된다.<47쪽>"


그는 전쟁의 승자가 곧 정의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건 영국군도 마찬가지였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우리는 최근 이라크 파병 문제와 관련해 스스로를 오랫동안 자유주의자로 자처하던 어떤 지식인이 국회의원이 된 뒤 "국가이성"에는 도덕을 물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파병을 두둔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서구에서 자유주의가 파탄난 것은 자유주의 덕목 자체가 파탄났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이 너무나 손쉽게 보수화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몽고메리는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를 단지 "정치 집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생존 목적을 "국가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불경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는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에 대해 단지 정치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에 나온 "헌법의 풍경"이란 책에서 저자 김두식은 이렇게 말한다. 헌법의 기본권 정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에서 출발한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상과 신앙, 표현의 자유는 인정되어야 한다. 권력자들이 "인정한다, 그러나"라며 필요에 따라 개인의 기본권을 규제하면 국가가 괴물로 돌변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금 어떤 나라가 괴물이냐'라는 것이 아니다. 국가란 본디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서구 중세를 통틀어 일개 국가의 인력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전투 때는 노예들이 소모품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4세기에 흑사병으로 알려진 일련의 전염병이 돌자, 인력이 귀해져 노예의 경제적 가치가 커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노예는 생명이 보호되어야 했고, 더 이상 소모품으로 사용될 수가 없었다. 현대에 있어서 한 국가가 전쟁을 치를 때 무장 병력 중 사병은 직업 육군이나 해군이나 공군이 아닌 민간인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민간인들은 결코 그러길 원치 않는다. 현대의 사병은 지난날의 노예나 용병들과는 딴판이다. 즉, 그들은 교육을 받았고, 사고할 수 있고, 식별할 수 있으며, 비판할 태세가 되어 있다.... 중략 ..... 현대전은 총력전이다. 또 몇 세기에 걸쳐 대단히 복잡해진 현대전은 한 국가의 활동과 존속 자체를 좌우할 정도여서, 과거와 달리 이제는 국가 전체의 사기가 중요해졌다. 그것은 필수적이다. 징용과 용병의 시대에는 국가적 전쟁에 종사하거나 전투를 하는 사람이 비교적 소수였다." <56-57쪽>


프랑스의 정치가 탈레랑은 "전쟁은 너무 심각한 일이라서 군인들에게 맡겨둘 수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와 같은 이유로 몽고메리는 "전쟁은 너무 심각한 일이라서 정치가들에게 맡겨둘 수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이때의 몽고메리가 말한 것은 군인과 정치가 모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뜻일 게다. 우리는 앞서 몽고메리가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은 너무 심각한 일이기 때문에 군인과 정치가에게만 맡길 수 없다. 더군다나 현대의 전쟁은 총력전이기 때문에 더더욱 시민사회의 감시 아래 놓여야 한다.

몽고메리는 전쟁의 여러 이유 중 하나, 특히나 현대전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빈번한 전쟁에 대한 또 다른 근본적 이유로 집단에 소속하려는 인간의 뿌리 깊은 욕망을 들 수 있다. 한 사회 안에서 충성심이나 집단의 주체의식, 애국심과 같은 것이 발전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이웃 집단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적대적이게 된다. 라틴어 hostis가 '이방인'과 '적'을 동시에 뜻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상의 다양한 민족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남다른 문화에 강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러한 문화와 군사제도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83쪽>


라틴어로 이방인과 적이 같은 단어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장군을 만나기는 동서양을 모두 통틀어 보더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배타적인 마음, 조직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수주의가 바로 타인에 대한 잔학 행위로 나타났었음을 우리가 "전쟁의 역사"에서 교훈으로 얻을 수만 있다면 평화의 발명에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는 25장 "에필로그 - 평화라는 이상"에서 예레미야서를 인용하여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모두가 거짓을 행하며,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나 평화가 없도다"라고 말한다. 분명 문명은 진보했고, 지난 2000년 동안 모든 선량한 사람들이 마음속 깊숙이로부터 평화를 갈구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20세기에 이르러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를 경험했다. 우리는 국가간의 전면적인 야만 상태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숱한 시간들을 전장에서 보내고 전쟁을 연구한 학자로서 몽고메리는 말한다.

"진정한 군인은 타인을 적으로 삼지 않고, 인간 내면의 야수를 적으로 삼는다. 한 군인으로서 나는 희망한다. 황금빛 노을이 지고 반목과 싸움을 잠재우는 소등 나팔소리가 울리는 그날이 오기를. 이윽고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며 세계 온 나라의 친선과 평화를 깨우는 기상나팔 울리는 그 시대가 오기를."


아무리 많은 숫자의 군대라 할지라도 항상 승리를 거둘 수 없으며, 국민들의 마음을 영원히 장악할 수도 없다고 말이다. 평화를 애호한 사람들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웠다. 자유와 정의가 없으면 겁 많고 노예화된 사람들에게 평화가 주어졌다 한들 그 평화는 지상의 지옥과 같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는 인간 내면의 야수와 싸워 얻은 평화이며, 만일 그 평화를 쟁취하고 유지한 미덕들이 상실된다면 평화는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평화는 실천이라는 미덕과 함께 해야만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20세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평화를 발명해내야 하는 도덕적 책무를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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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신화 세계 신화 시리즈 14
사무엘 헨리 후크 지음, 박화중 옮김 / 범우사 / 2001년 11월
평점 :
품절



상당히 오래전에 읽는 책이지만

이 좋은책이 그냥 외면받는거 같아서  그냥 지나칠수가 없기에

‘p 자 적어봅니다.

제목처럼 이책은  우리가 중동이라고  칭하는 곳의 신화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음절이상의 의미를 중동이라는 단어는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신화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의 발상지이며 전 세계로 퍼져나간 히브리인들의

신화.. 그리고 철기문명과 고대문자가 연상되는 히타이트 ,   비전을 간직하고 있는 이집트 신화까지.

다빈치 코드가 나오기 전 이 책을 접했었는데 서구인으로서는 드물게 균형잡힌 시각으로

중동일대를 바라보는 관점이 돋보였습니다.

 

한때 그리스.로마 신화 열풍이 불었지만 그 빠른 속도만큼이나 수그러든거 같습니다.

뭔가 새로운 것에 대한 향수와 상업주의가 교묘히 맞물렸기 때문일텐데

사실 신화는 알면 알수록 더 원형적이고 원초적인 매력을 가지는 듯합니다.

그리스.로마 신화가 철저하게 인간에 의해 가공된 문명적인 신들을 다룬다면

중동. 유럽의 신들은 좀더 원시적이고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곤 합니다.

신화의 원초적인 매력을 느껴보세요..

 

 

그리고 시대는 변했어도 인간의 내면속에서 갈구하는 무언가를 찾아보세요.

이 책은 그 첫걸음에 꽤 좋은 친구가 되 줄겁니다.

제가 신화를 좋아해서 한국에서 나온 신화관련 책은 거의 다 보다 싶이

했지만 초심자 에게  이렇게 매력적인 책도 드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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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배송에 2주 걸립니다. > 세 편의 영화를 한 권으로
스탠 바이 미
스티븐 킹 지음 / 영언문화사 / 1993년 7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은 스티븐 킹 씨의 중편집 'Different Seasons'의 완역본입니다. 가을 부분인 '무서운 동심'은 'stand by me'란 제목으로 영화화되었었죠. 롭 라이너 감독에 고 리버 피닉스가 꽤 앳된 모습으로 출연한 영화였죠. 이 번역본이 출간될 당시에는'쇼생크 탈출'이 영화화되지 않아서 '스탠바이미'란 제목이 붙은 것 같군요. 이 외에도 '여름' 부분도 비디오 출시되었다고 하는데요, 거의 영화소설집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인지,'사계', '쇼생크 탈출', '미드나잇 시즌' 등으로 각기 다른 제목을 붙여서 경쟁적으로 번역출판되기도 했는데, 스티븐 킹 씨의 작품치고는 예외적인 인기라고 할 만하군요. 과연 저작권 문제는 어떻게 된 건지 좀 궁금합니다.

'쇼생크 탈출'은 설명이 필요없이 유명한 소설인데,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은 후 영화를 봐서인지 영화가 소설을 못따라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모건 프리맨이 백인죄수들에 둘러싸여있는 것도 어색하고, 앤디 듀프레인 역의 팀 로빈스는 원작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더군요. 아무래도 소설쪽이 짧고 전개도 빠르고 더 흥미진진합니다. '여름'은 전 나치장교와 소년의 기묘한 우정 이야기인데요, 역시 재미있습니다. '가을'은 킹 식의 성장소설이랄까요. 영웅이 되기 위해 시체를 찾아 숲속으로 가는 소년들 이야기입니다. '겨울'은 상당히 오싹한 느낌을 주는데, 공포소설이라고 하기는 좀 뭣하군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중편집이고, 작가후기까지 흥미진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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