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chaire > 골때리는 소설과 작가, 그러나 예리하고, 집요하고, 웃기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개정판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 역시, 대체 무슨 소설이길래 그렇게들 난리인가,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집어들었다. 절판되었을 때에도, 나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가 몇몇 사이에선 전가의 보도라도 되는 듯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하고, 박민규의 재미난 소설과 함께 회자되던 바, 게다가 절판씩이나 되었으니, 그 고귀함은 더욱 빛이 날 터. 내 안에서도 호기심은 무럭무럭. 마침내 개정판이 출간되었던 것인데, 목차를 보아 하니, 예사놈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가짜 르나르의 야구 박물지, 라이프니츠를 흉내내어, 코 푸는 종이로부터의 생환 등등의, 우아하고 감상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신기하고 발랄하기 그지없는 소제목들에 힘입어, 아주 들뜬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펼쳤는데, 드러나는 장면이 또한 보통 이야기는 아니다 싶었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여기는 내 방인데, 대략 2만 권의 책과 갈색 수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고양이의 이름은 ‘365일의 반찬 백과’이다. 고양이의 이름이 ‘365일의 반찬 백과’인 것에 대해 나는 남한테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이 정도면, 박민규의 <카스테라> 첫 문장, “이 냉장고는 전생에 훌리건이었을 것이다”에 버금가는 전율이다. 옳거니. 나의 눈빛은 무릎을 탁 치고는, 계속해서 행과 행을 넘어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대략 난감. 고양이 이름으로부터 시작하여, 가히 일반인들의 사물 혹은 사유에 관한 명명법을 훌쩍 뛰어넘어, 즉 우리들이 결코 아무것도 독해할 수 없음을 오기지게 증명해 보여주려는 듯 - 전문가들에 따르자면 이것이 어쩌면 ‘포스트 모던’한 방식이라고 하던데 - 그렇게 작가,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이 소설 안에 여러 가지 기괴하고 망측하며, 말도 안 되는(=논리 없는) 작은 이야기들을 엉켜놓았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이 소설이 재밌었다. 읽어갈수록 무슨 소릴 하고 싶어하는 건지 모르겠고, 중간부터는 아예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든 상관 않으리, 하는 마음가짐으로 변질된 비논리적 독자였던 까닭일까. 설명할 수 없이 재미있는,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간혹 읽다가 전철에서 더러 졸기도 하고 그랬는데(라이프니츠가 나오고 그러니까 말이지), 겐이치로의 언어(혹은 세계) 탐구가 그렇게 싱겁지만은 않았다는 거,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아도, 그이의 생각 퍼즐 속에서 허우적대는 게 썩 나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는 거, 게다가 이건 참 괴상한 경험인데,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애써 보여주지 않고 자꾸만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붕괴시키고, 아무렇게나 뭉개고 하면서, 찰흙놀이 하듯 이야기를(혹은 문학을) 갖고 노는 모양이, 나로서는 우습고도 참신했으며(더러 귀엽기도 하고), 그의 '해체'의 시도가 허무하지만은 않더라는 짐작. 무엇보다도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리고 있는 그 무엇을 불러내보려는 시선들... 그래서 나는, 텍사스 건맨즈 대 앵그리 헝그리 인디언즈 이야기라든가, 훠트워즈의 ‘다과회(티 파티)’, 건망증 같은 꼭지 속의 대화, 그리고 일본야구 창세기담 속의 허무맹랑한 질문과 대답들로 인해 키득키득 웃으면서도 정체 불명확한 (의미)심장함에 오싹해지기도 하였더랬다.


“그거야. 문제는. 설레임이 없어진다는 거야. 마운드에서, 설레기는커녕 반대로 가슴이 차가워져.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잘 모르겠는데 뭔가 뿔뿔이 흩어지는 느낌이 들어. 아무리 해도 시합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야구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안 들어.”

생각해보면 내 인생은, 요즘 슬럼프다. 슬럼프라는 건, 내 인생이 ‘산다는 느낌’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의 다른 이름. 그렇담, 내가 슬럼프인 것은, 어쩌면, 내 앞으로 다가오는 공의 구질이 무엇인지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는 구조적 상황(나이든 환경이든)에 접어들었기 때문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이 소설을 읽은 것은, 나의 오독일는지. 박민규의 주인공들은 1할 2푼 5리로 인생을 우습게 따돌려 나를 통쾌하게 만들어주었지만, 다카하시의 주인공들, 즉 한신 타이거즈의 위대한 야구선수들은, 지나치게 높은 타율, 아니 지나치게 잦은 타석, 그 자체에 항거하며 익숙한 인생을 향해 내부 고발을 펼치는 존재들이 아닐까 싶었다. 뻔히 보인다고 말하는 거, 그것은 오만일까. 어떤 공인지 아는데, 배트가 나가게 하고 싶지 않다고 호소하는 거, 그것 역시 핑계에 불과한 걸까. 사방에서 수없이 날아오는 공을 향해 나는 맘껏 휘두를 수 있지만 휘두를 수가 없고, 왜 꼭 휘둘러야 하지, 하는 질문에 붙잡혔다면 그 그라운드에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결국, 나의 슬럼프는 이 소설로 인해 더욱 골깊어졌는지 모른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답을 찾지 못했듯이, 나의 슬럼프에도, 입구가 없었듯 출구도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에게 인생은, 왜냐고 그 의미를 묻는 순간부터 조금씩 재미가 없어져왔는지도 모른다. 투수와 타자가 정해지고, 우수타자로 성장해가고, 기대타율이 형성되면서, 삶이 우수해짐에 따라서, 삶의 즐거움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명명법들에 그는 그러니까 무지하게 싫증을 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마도 나는 그런 작가의 싫증에 얼마간 동의한 것이겠지. 내 인생도 실은 그렇게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중일 터이니.


“질문은 좀 있다가 해주시지 않겠소. 방금 잠에서 깨어서 머리가 안 도니. / 아니, 간단한 거요. 실은 지금 한 얘기의 의미를 미처 다 파악하지 못했어. / 뭐야, 그런 건가? 그렇다면 신경 안 써도 되네. 지금 한 얘기에는 특별한 의미란 없었던 거요. / 의미가 없었다고! 당신은 ‘지극히 유서 깊은 신화적 이야기’라고 말하지 않았어! / 그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둘러댄 거지.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당신들은 얘기를 들으려고도 안 하니까. 게다가 전혀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니었어.”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아, 야구를 하고 싶다, 라는 주인공의 말이, 내게는 참 간절하게 박혔으니까. 하고 싶다, 는 말,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거, 나도 그거 하고 싶다. 뭐, 어쨌든 독해하기는 대체로 어려운 소설이었으나, 아주 재미없지는 않았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오는 소설. 의미 독해를 포기하고 읽으면(꼭 모던의 질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제법 독특한, 각자 저마다 즐길 만한 세계를 만나거나 창출할 수 있으리라는 얘기. 개인적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부에 이르러, 명치를 아주 확실히 찔리고 말았다. "우리들이 하고 있는 것은 야구가 아니다. 확실히 야구를 많이 닮았고, 규칙은 거의 같고, 방망이나 글러브나 로진 백이나 통증을 가라앉히는 스프레이를 쓰는 점도 공통되었고, 공의 크기나 재질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똑같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러나 그건 야구가 아니었던 거야." 

덤으로, 나는 작가 스스로 썼다는 ‘연보’를 읽으며 완전 뒤집어졌다.

- 1964년 14세. 현대시를 발견했다. 최초로 읽은 것은 아유카와 노부오의 <아메리카>, 다니가와 간의 <인간 A>. 그리고 젊었을 때의 스즈키 시로야스의 이런 시였다. / 나는 유부녀가 수음하고 있었다/ 나는 노파가 수음하고 있었다/ 나는 여성 중노동자가 수음하고 있었다/ 나는 우유병에 수음하고 있었다/ 나는 시계가 수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수음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작가의 자작 연보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 1960년대. 잘 표현해낼 말이 없었다. 그래서 소설을 쓰게 되었다.

- 1969년 4월. 모 국립대학에 입학했지만, 가보니 학교는 존재하지 않았다(데모 중이었다). 얼마 지나서 다시 한 번 가봤지만 역시 학교는 존재하지 않았다(폐쇄 중이었다). <이하도 계속해서 재밌지만,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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