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armdown > 한없이 늘어지는 지루함
노마디즘 1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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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고원> 역자로서 한 마디 붙입니다. 최근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준비하면서 책의 질에 문제가 많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지엽적인 오류야 뭐 서로 있을 수 있는 일이고, 함께 수정해 가면 학계에도 독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므로 굳이 이런 자리에서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본질적인 오류와 오해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바로잡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도 전공자(전공자가 뭐 특별하다는 건 아니고, 해당 분야에 오래 삶의 시간을 바쳤다는 뜻이지요, 특히 이런 사유 분야에서)들만이 할 수 있는 일로서 말입니다.

더구나 제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노마디즘>이 제가 번역한 <천 개의 고원>을 직접 인용하지 않으면서도 책 도처에서 저의 번역을 직접적으로 문제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응답하지 않으면, 인정하는 꼴이 되버리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런 사정도 최근에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격 서평을 발표하기에 앞서 이곳을 통해 조금만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발표될 글은 다른 경로로 찾아보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편의상 (짧고 쉽게 해명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례만 들겠습니다. 저자는 <노마디즘> 2권 258쪽 주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plan은 '판'이 아니며, 무언가가 그 위에 서서 존립하는 것이란 의미의 '평면'도 아닙니다. 물론 plan이 '평면' 내지 '평면화'라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하고, 그렇게 번역되는 게 더 적당하게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plan은 하나의 기관이 탈기관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배치가 탈영토화되는 양상을 함축할 뿐이지, 기하학적 형태의 '평면'이나 '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들뢰즈의 다른 책 <스피노자, 실천 철학>을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옵니다.

<더 이상 그것은 유일 실체에 대한 긍정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물체들, 모든 영혼(정신)들, 모든 개체들이 있는 내재성의 공통 판의 펼침이다. 이 내재성의 판 또는 고른판은 정신적 구상, 계획, 프로그램이라는 의미의 판(=구도)이 아니라 기하학적인 의미에서의 판(=평면), 즉 절단면, 교차, 도해(=다이어그램)이다.>

참고로 아래에 불어 원문과 영어 번역을 덧붙입니다.

<Ce n'est plus l'affirmation d'une substance unique, c'est l'e'talement d'un plan commun d'immanence ou' sont tous les corps, toutes les a^mes, tous les individus. Ce plan d'immanence ou de consistance n'est pas un plan au sens de dessein dans l'esprit, projet, programme, c'est un plan au sens ge'ometrique, section, intersection, diagramme. >

Deleuze, Spinoza. philosophie pratique, Minuit, 1981, p.164. (plan commun d'immanence는 강조 표시가 되어 있음)

<What is involved is no longer the affirmation of a single substance, but rather the laying out of a common plane of immanence on which all bodies, all minds, and all individuals are situated. This plane of immanence or consistency is a plan, but not in the sense of a mental design, a project, a program; it is a plan in the geometric sense: a section, an intersection, a diagram.> (윗글의 영어번역: 영역판 122쪽)

이진경 씨는 아무 근거도 없이 위와 같은 발언을 통해 들뢰즈의 사상을 뒤틀고 있습니다. 이진경 씨의 주장과 들뢰즈 자신의 발언은 명백히, 뿌리부터 어긋납니다. 문제는 이런 오류가 <노마디즘>에서 주요 개념 거의 전부에 걸쳐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개념 번역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부분적인 잘못이야 누구나 범하는 일이니까요), 개념 이해와 설명에서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면 관계상, 단지 지면 관계상, 다른 오류를 지적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런 오류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 일반 독자들은 어쩌란 말이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냥 이게 한국 학계의 현주소라고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런 상호 검증도 없고, 상호 검증할 만한 사람들도 없고... 시간이 나는 대로, 또 시간을 내서, 해설 자리를 많이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노마디즘>에 대한,  <천 개의 고원> 번역자로서의 소감을 구호로 정리하겠습니다. 긴장도가 한없이 떨어지는 책,. 끊임없는 오해로 중첩된 책, 그래서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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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고원> 역자로서 한 마디 붙입니다. 최근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준비하면서 책의 질에 문제가 많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지엽적인 오류야 뭐 서로 있을 수 있는 일이고, 함께 수정해 가면 학계에도 독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므로 굳이 이런 자리에서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본질적인 오류와 오해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바로잡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도 전공자(전공자가 뭐 특별하다는 건 아니고, 해당 분야에 오래 삶의 시간을 바쳤다는 뜻이지요, 특히 이런 사유 분야에서)들만이 할 수 있는 일로서 말입니다.

더구나 제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노마디즘>이 제가 번역한 <천 개의 고원>을 직접 인용하지 않으면서도 책 도처에서 저의 번역을 직접적으로 문제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응답하지 않으면, 인정하는 꼴이 되버리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런 사정도 최근에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격 서평을 발표하기에 앞서 이곳을 통해 조금만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발표될 글은 다른 경로로 찾아보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편의상 (짧고 쉽게 해명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례만 들겠습니다. 저자는 <노마디즘> 2권 258쪽 주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plan은 '판'이 아니며, 무언가가 그 위에 서서 존립하는 것이란 의미의 '평면'도 아닙니다. 물론 plan이 '평면' 내지 '평면화'라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하고, 그렇게 번역되는 게 더 적당하게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plan은 하나의 기관이 탈기관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배치가 탈영토화되는 양상을 함축할 뿐이지, 기하학적 형태의 '평면'이나 '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들뢰즈의 다른 책 <스피노자, 실천 철학>을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옵니다.

<더 이상 그것은 유일 실체에 대한 긍정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물체들, 모든 영혼(정신)들, 모든 개체들이 있는 내재성의 공통 판의 펼침이다. 이 내재성의 판 또는 고른판은 정신적 구상, 계획, 프로그램이라는 의미의 판(=구도)이 아니라 기하학적인 의미에서의 판(=평면), 즉 절단면, 교차, 도해(=다이어그램)이다.>

참고로 아래에 불어 원문과 영어 번역을 덧붙입니다.

<Ce n'est plus l'affirmation d'une substance unique, c'est l'e'talement d'un plan commun d'immanence ou' sont tous les corps, toutes les a^mes, tous les individus. Ce plan d'immanence ou de consistance n'est pas un plan au sens de dessein dans l'esprit, projet, programme, c'est un plan au sens ge'ometrique, section, intersection, diagramme. >

Deleuze, Spinoza. philosophie pratique, Minuit, 1981, p.164. (plan commun d'immanence는 강조 표시가 되어 있음)

<What is involved is no longer the affirmation of a single substance, but rather the laying out of a common plane of immanence on which all bodies, all minds, and all individuals are situated. This plane of immanence or consistency is a plan, but not in the sense of a mental design, a project, a program; it is a plan in the geometric sense: a section, an intersection, a diagram.> (윗글의 영어번역: 영역판 122쪽)

이진경 씨는 아무 근거도 없이 위와 같은 발언을 통해 들뢰즈의 사상을 뒤틀고 있습니다. 이진경 씨의 주장과 들뢰즈 자신의 발언은 명백히, 뿌리부터 어긋납니다. 문제는 이런 오류가 <노마디즘>에서 주요 개념 거의 전부에 걸쳐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개념 번역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부분적인 잘못이야 누구나 범하는 일이니까요), 개념 이해와 설명에서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면 관계상, 단지 지면 관계상, 다른 오류를 지적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런 오류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 일반 독자들은 어쩌란 말이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냥 이게 한국 학계의 현주소라고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런 상호 검증도 없고, 상호 검증할 만한 사람들도 없고... 시간이 나는 대로, 또 시간을 내서, 해설 자리를 많이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노마디즘>에 대한,  <천 개의 고원> 번역자로서의 소감을 구호로 정리하겠습니다. 긴장도가 한없이 떨어지는 책,. 끊임없는 오해로 중첩된 책, 그래서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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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의 신화 신화 종교 상징 총서 5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심재중 옮김 / 이학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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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과 더불어, 엘리아데를 이해하는 가장 유익한 입문서 중 하나다. 엘리아데가 개진한 종교학 방법론은 이제 학계에서는 고전적인 것이 된지 오래다. 한때 엘리아데는 가장 잘 팔리고 많이 읽히는 작가 중 하나였다. 그의 학술서뿐만 아니라 그가 학술서를 집필하는 짬짬이 선보였던 소설들까지도 열광의 대상이 됐던 시기가 있다. 그저 국내에서 일회적으로 그친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엘리아데의 생각을 엿보고 공명하려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전세계적인 열풍이었던 적이 있다. 그러한 상황을 가리키는, 이른바 엘리아데 신드롬의 기원이 된 책이 바로 <영원회귀의 신화>다.

이 책이 처음 프랑스에서 나왔을 때 학문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 독서대중에게도 큰 호응을 받았다. 그의 학문적인 방법론을 일종의 모형처럼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의 인기는 한동안 사그라질 줄 몰랐었다. 지금도 상상계 일반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이들 사이에서  <영원회귀의 신화>는 필독서로 군림하고 있다. 루돌프 오토의 <거룩한 것의 의미> 같은 책의 딱딱함과 차별되는 부드러움이 이 책의 장점이다. 게다가 이런 적은 분량으로는 감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룬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역사에 관한 종교학자의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도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학술서의 꼬리표를 단 책들이 주는 부담감을 이 책에서는 느낄 수 없다. 좀 지칠 만하면, 독자의 관심을 잡아끄는 신화들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종교학 책들을 읽는 재미는 그런 데 있을 것이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가 그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을 테고 말이다. 

<영원회귀의 신화>의 한국어본은 두 종이다. 하나는 엘리아데 밑에서 종교학 공부를 했던, 한국 종교학계의 거목인 정진홍 교수가 오래 전에 번역했던 <우주와 신화>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판을 저본으로 삼은 이 <영원회귀의 신화>라 할 수 있다. 엘리아데는 루마니아 태생의 뛰어난 인문학자 중 단연 세계적인 명성을 구가한 인물이다. 루마니아의 동방 전통은 서구 지성계에 나름의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인맥주의과는 무관하지만. 이오네스코, 에밀 시오랑 등이 모두 루마니아 태생이다. 인접한 불가리아의 크리스테바 같은 인물도 동유럽 지식인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고. 아무튼 한국어판 <영원회귀의 신화>는 일독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정진홍 교수의 <우주와 역사>도 좋은 번역본이었다. 활판식자로 인쇄되어 고르지 않은 인쇄감이 독서를 방해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번역 자체는 문제가 없었고 아주 좋았다. 엘리아데는 코스모폴리탄이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공부했고, 탄트리즘을 공부하기 위해 인도에 머물며 요기(요가수행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엔 전세계의 최고 지성들을 흡수하는 미국의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다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과거 <우주와 역사>는 그런 미국생활 중에 프랑스에서 발표한 것을 다시 손질해 발표한 책이다. 그래서 최종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의 글쓰기가 대중 지향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에 난해한 학술서와는 시작부터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허술하게 씌어졌다는 말도 아니다. 맘잡고 읽어내려가면 충분히 접근해 들어갈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열려 있다는 말이다. 당대를 주름잡았던 인기 지식인의 글에서 여전히 얻을 수 있는 보화가 그득하다. 그의 책들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종교형태론>(한길사)과 <종교사 개론>(까치글방)은 같은 책이다. 전자는 엘리아데의 번역에 심혈을 기울였던 대표적인 국내학자 중 하나는 이은봉 선생의 번역이고, 후자는 이재실이란 그르노블 대학 유학파의 번역이다. 전자는 독일어판을 옮긴 것이고, 후자는 프랑스판을 옮긴 것이다. 특히 후자에는 국내에서는 거의 만나보기 힘든 조르주 뒤메질의 서문이 실려 있다. 그리고 <성과 속>은 이은봉 번역판(한길사)과 이동하 번역판(학민사)이 나란히 존재한다. 물론 저작권 문제로 시중에는 하나의 책만 돌겠지만, 이렇게 엘리아데의 책들은 여러 번역판본이 있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엘리아데의 소설작품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벵갈의 밤>(세계사)와 그밖의 다른 소설 한 권이 전부다. 예전에 나왔던 <금지된 숲>과 같은 작품은 아직 재출간되고 있지 않다. 엘리아데의 소설이 의미 있다. 왜냐하면 그의 내적인 세계가 창작과 학술 영역에서 어떻게 공명하는지 모여주는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 속에서 상상력에 따라 창조한 세계가 실제 학술 영역을 탐구하는 동안(이를테면, 필드워크를 하는 동안) 실제로 존재하고 그 현상이 딱 맞아떨어지는 놀라운 경험한 적이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영성의 감흥이 어떻게 판이한 두 영역을 넘나드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그의 소설작품에 나와 있다는 말이다. 물론 한 사람의 사상을 소설로 표현되는 것은 드물지 않다. 사르트르 같은 이의 철학도 소설로서 더욱 쉽게 대중적인 지명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여진 사실이다. 메를로퐁티 같은 현상학자도 자신의 철학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창작을 하는 것이란 생각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메를로퐁티가 소설을 썼다면, 정말 그가 문학작품을 남겼다면 얼마나 흥미로왔을지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된다.

각설하고, 엘리아데의 <영원회귀의 신화>는 일반 독자가 읽기에 그리 어려운 책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엉성하게 접근한다면 오해를 불러올 책이기도 하다. 엘리아데는 엄밀한 학문적 방법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학적 방법론을 "종교현상학"이라 한다. 이를테면 종교적 인간으로서의 사람,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라는 관용구를 세계 각지의 다양한 종교현상을 들춰봄으로써 설명하는 이 책은, 인류역사의 원형을 밝히는 일종의 실험적인 저작이기 때문에, 대중적인 반면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해야만 그 비밀스런 세계의 전모를 드러낸다. 적은 분량으로 방대한 인류사의 한 면을 통시적으로 觀하려는 그의 야심찬 손길이 경이롭기만 하다. 그를 "종교사가"로 부르는 것도 그의 탐구가 공시적인 범위보다 통시적인 범위에서 진행되곤 하기 때문이란 점을 참고로 밝혀두고 싶다.

엘리아데의 다른 책들을 읽기 위해서 <영원회귀의 신화>와 <성과 속>을 먼저 집어들라고 권하고 싶다. 종교적 심성이 매말라버린 시대에 여전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서구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쇠잔한 기미는 띤 것은 이미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도 종교에 몰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부정적인 것일까. 종교에 관한 관심이 이제 생활과 일상 속으로 밀착해 들어온다. 종교적 심성을 지닌 종교적 인간의 뿌리를 탐사하는 데 이만한 도구가 있다는 건 참 위안이 된다.

<성과 속> <영원회귀의 신화>를 읽고 나서, 엘리아데의 종교학 방법이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서책을 보려 한다면, <이미지와 상징>(까치글방)과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문학동네) 등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는 제목이 죽이지만, 자료들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독서에는 다소 장애가 될 것이다. 완벽하게 조리되어 잘 익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지와 상징>은 그가 <성과 속> <영원회귀의 신화>에서 개진한 방법론들을 가지고 몇 가지의 테마 별로 아주 맛깔스럽게 요리하고 있어 누구의 입맛에도 잘 맞으리라 생각된다. 엘리아데 책들은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것이 많다. 이학사에서는 시카고대학에서 그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몰두했던 <세계 종교 사상사> 3권을 번역 중이다. 그리고 조만간 엘리아데의 테마별 성찰이 돋보이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간>이란 책도 문학동네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엘리아데의 다양한 글을 풍요롭게 접할 수 있는 마당이 아주 널직하게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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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손세훈 > 프랑스 헤겔 해석의 선구자 이뽈리뜨
헤겔의 정신현상학 1 - 철학사상총서 11
장 이뽈리뜨 / 문예출판사 / 198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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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 아이디가 고로케라고 하는 어느 분과 이뽈리뜨에 대해 논쟁한 적이 있다. 이 책에서 이뽈리뜨의 인용문 하나를 옮겨 적었더니 독일어 겨우 읽어내는 나를 나를 보고 이뽈리뜨의 '논리와 실존'이라는 저서를 불역본으로 봤는지, 영역본으로 봤는지를 너무나 진지하게 물어서 나의 어학 공부에 대한 의욕을 고취시킨 논쟁으로 기억한다 (결국 인문학 공부는 어학이 그 사람의 지식폭을 결정짓는다).

그 논쟁은 결국 쌍욕(바보, 머저리, 병신)까지 오가는 것이 서로간의 인격형성에 좀 안 좋다고 생각되어 둘이서 서로 대화방에서 만나 화해로서 기분좋게 끝을 냈다. 지금은 그분이 나를 보면 항상 존경스러운 어투로 칭찬하는 것이 차라리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오늘날 프랑스 철학이 세계에 유행을 하지만 그 기원은 이뽈리뜨의 헤겔 정신현상학 변역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들뢰즈나 데리다 푸코 같은 이들의 수업기간에서 이뽈리드와 헤겔의 이름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푸코와 들뢰즈는 그의 강좌를 들었고 데리다는 그의 조교였다.)

이뽈리뜨가 살아온 시대는 헤겔에 대한 해석과 마르크스와의 대비(인간주의적 맑스 해석), 또 현상학의 수용과 실존철학의 틈바구니에서 헤겔 철학을 올바르게 규정짓는 그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았는데, '의식'이라는 문제에서 '언어'라는 새로운 철학적 문제에 연관되어지는 현대철학의 선구는 이미 헤겔의 영역 속에 포함되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이뽈리뜨의 평생작업이었고 이런 점은 데리다난 레비나스 같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덧붙이자면 소위 68세대라 불리는 알뛰세 주의자들은 샤르트르, 이뽈리뜨, 르페브르 같은 거의 아버지뻘 세대들을 비판하며 이론중심적이며 구조주의적인 맑스주의 해석을 창안하다.

사실 프랑스 철학자들의 모든 논의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그 기원을 볼 수 있기에 내가 헤겔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많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읽어내는데 너무나 커다란 이익이 된다. 어느 선배는 내게 후설을 권유했지만 아마 내가 그런 질문을 받는 다면 헤겔을 보라고 권할 것이다. 내사랑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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